인문 2018. 4. 18. 12:52

- 죽음과 삶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네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죽음은 삶의 반대말이거나 삶의 끝이 아니라 삶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삶의 내부로 받아들일수도 있다. (하이데거)
- 본래 죽음은 잔치였다. 한국사회에서의 죽음, 특히 호상의 경우 상갓집은 축제였음.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가무도 행했고, 상여놀이가 그것이다. 상여꾼들이 출상 전에 장례식장에서 빈 상여를 메고 운구를 준비하며 발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노는 놀이, 이것을 상갓집을 축제의 분위기로 만들었다. 고구려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상가의 문화를 살펴보면 죽음은 비통하고 고통스런 사건이 아니었다. 죽음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해 더 좋은 곳으로 가는 이를 보내는 축제의 날이었다. 우리나라 유교적 전통사상에 있어 조상은 또 다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무척 중요한 존재였음. 조상의 제삿날이면 멀리 사는 가족들까지 함께 모여 제사를 지냈다. 제사상에 모여 절을 하며 조상의 안녕은 물론 가족과 후손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동네 어르신들에게는 안부를 묻고 음식을 나누어 드리며 오늘 누구의 제사를 모셨다고 알려드리기도 했다. 이런 아름다운 미풍양속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우리 삶의 모습이었다.
- 제사는 죽은 자와 산 자의 만남이자 묵시적 소통의 자리였다. 이때의 죽음은 없어짐의 의미가 아니다. 죽는다는 것은 고조부모에 이어 증조부모, 그리고 앞서 돌아가신 부모님의 다음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자신은 죽었지만 살아있는 존재인 가족의 품으로 가서 후손들에게 또 하나의 선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이어져온 죽음의 문화에 길든 사람들에게 죽음은 더 큰 어른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살아있는 가족들에게는 돌아가신 분이 위인이자 작은 신화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고 이곳을 떠나 내일로 가는 잔칫날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묏자리를 직접 찾아보고 수의도 맞추며 미리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결코 비통의 제의가 아닌, 축제로서 삶에 자리할 수 있었다. 탄생을 가족이 함께 준비하듯이 죽음 역시 가족과 함께 준비하는 것이 자연스런 이어짐이다. 집 안에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수많은 제사와 차례를 통해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죽음의 질을 높였다. 죽음은 결코 단절이 아닌 지속적으로 가족공동체를 하나로 묶고 연결하는 소통과 이어짐이었다. 이것은 비단 한국 사회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서양에서의 죽음 역시 삶 속에 공존했다. 그들은 묘지를 멀리 떨어뜨려두지 않았다. 동네의 공원이나 교회 정원에 묘지를 만들어 늘 가족들이 지나다니며 만날 수 있게 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땐 위안을 얻고, 좋은 일이 있을 때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장소로 살아 있는 자들의 삶 속에 함께 머물고 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문화는 우리 모두에게 위로이자 안심이다.
-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방문객 중에서)
- 죽음은 감각의 휴식, 충동의 절단, 마음의 만족, 혹은 비상소집의 중지, 육체에의 봉사의 해방에 지나지 않는다. (아우렐리우스)
- 죽음은 인생이라는 연극의 끝맺음이며 삶이 완성되는 순간이고 또 다른 시작이다. 고된 삶에서 벗어나 크나큰 휴식과 평안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을 휴식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세상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모두 끝내고 긴 휴식을 얻게 되는 것이니, 도리어 망자에게 좋은 일 아닌가. 엄밀히 말하면 죽는 것은 내가 아니며 나의 육시이 죽는 것이다. 죽음이란 낡아진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몸은 왔다가 가지만 마음은 영원불멸이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정말로 가야 할 세계에 이르러 행복과 휴식의 보금자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라.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다. 지금 이 순간 가슴 뛰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쓰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는 '지금을 살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과 동의어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만이 진정 현재를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 애벌레가 세상의 끝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나비라고 부른다. (리차드 바크)
- 인생은 짧은 이야기와 같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가 아니라 가치이다. (세네카)
- 품격있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일상 속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배우고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닌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마지막 지점에 다다랐다고 해서 그게 정말 끝은 아니다. 그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기회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하나의 관문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막 지점에서 여유를 찾고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 중요. 어떻게 가야 하는지 생각하고 정리하면서 마지막을 향해 차근차근 한 발짝씩 내딛는다면, 이번 생을 안전하고 편안하고 마무리할 수 있다.
- 죽음의 고통도 탄생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한 과정이다. 사람들은 곧잘 그것을 혼동한다. (헤르만 헤세)
- 가장 행복한 인간은 그의 인생의 시작과 끝을 무엇으로 어떻게 연결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괴테)
-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나는 왜 내가 존재하는지 내가 어떤 소용이 있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모르는 것이 죽음이다. (도스토예프스키)
- 이탈리아 시인이자 철학자인 자코모 레오파르디는 죽음에 대해 '죽음은 악하지 않고 오히려 악하지 않고 오히려 악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라고 하였다. 마음에 깃든 병이든 육체에 깃든 병이든 어쩌면 죽음은 우리가 가진 악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 다만 죽음을 준비하는 방식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어느 것이 좋은 것인지는 신이 아닌 자신만이 안다.
- 조병화라는 시인 유언으로 '나는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에게 돌아갑니다.'라는 말을 남기셨다.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숙연해지면서도 푸근함을 느낀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나이가 들어가고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곁을 떠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죽음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의 어머니와 남편과 아들이 일찍 떠난 곳이라고 생각하면, 그래서 나도 그들에게 간다고 생각하면 죽음이 그리 두려운 것만은 아니에요'
-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손을 잡으며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가 곁에 있다면, 그 죽은은 서럽고 외로운 것이 아닌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분을 돌보는 일이 필요한 이유다.
- 그렇다면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일단 죽어가는 것이 불편하지 않도록 공간과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 깨끗하게 정돈된 공간이 필요한데, 1인병실이나 자신의 방이면 충분. 단, 환기가 잘 되는 곳이어야 한다. 마지막 호흡이 점차 줄어들 때 피부는 필사적으로 호흡을 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얇은 옷과 이불을 덮어도 피부가 호흡을 할 수 있도록 창문을 통해 산소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 임종 하루 전날 쯤에는 임종을 앞둔 이들의 몸을 향물로 깨끗이 닦아드리고 부드럽고 깨끗한 옷으로 입혀드린다. 환자복보다는 부드러운 면으로 만든 넉넉한 사이즈의 바지와 하얀 티셔츠면 된다. 침상 및 방바닥에 까는 요는 푹신한 것이 좋으며, 덮어주는 이불은 100그램을 넘지 않도록 한다. 향물로 몸을 닦아 드리는 것은 사람이 죽어가며 내뿜는 안 좋은 에너지를 정화하기 위함. 측백나무 가지 같은 것을 따다 대비수를 묻혀 주변에 뿌리고, 환자의 몸에도 뿌린다. 또한 임종 후에도 뿌린다. 부처님의 자비심이 담긴 물로 정화해 잘 가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의식. 그리고 환자가 임종을 준비하는 공간에서는 목탁이나 요령은 쓰지 않으며, 향이나 초도 켜지 않는다. 사람들이 내는 소리, 문을 열고 닫는 소리 그리고 미세한 냄새까지도 조심하고 신경써야 한다. 마지막 순간을 고요함과 평화로움으로 채울 수 있도록 배려. 이처럼 환자의 임종을 돕는 의료진과 영적 돌봄가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적절한 간호와 돌봄을 제공해야 함. 무엇보다 환자의 영적 상태가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함. 특히 환자의 종교에 따른 적합한 종교적 돌봄이 절실함. 죽음이란 다리를 이용하여 또 다른 삶으로 가는 것인데, 이때 좋은 삶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종교적 신념이기 때문.
- 말을 타고 갈수도, 차를 타고 갈수도, 둘이 갈수도, 셋이 갈수도 있다. 하지만 맨 마지막 한 걸음은 자기 혼자서 걷지 않으면 안된다. (헤르만 헤세)
- 높은 곳, 깊은 곳, 넓은 곳.
그곳들은 모두 고요하고 청정하다
죽음은 어둠속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환한 아이스 블루와 같이 청정한 곳으로 가는 것.
그곳에서 고단했던 영혼을 씻는 것.
- 환자를 정말 사랑하고 아낀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그가 죽음을 준비하고 생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야 함.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도반들과 당신의 삶이 어땠는지 그동안 무엇이 미안하고 또 무엇이 감사했는지, 얼마나 사랑했느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함. 그리고 우리는 환자가 느끼는 감정들을 마음으로 나누며 진심으로 슬픔을 애도해야 한다.
- 환자들은 분노와 우울을 넘어서 수용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할까?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도 언젠가 겪을 일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죽음에 이르는 것은 개인의 일이지만, 누군가가 떠나고 난 후에 감당해내야 하는 것들은 남겨진 이들의 몫이기 때문. 이것이 우리가 타인의 죽음에 무관심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삶과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됨. 삶을 되돌아보고 죽음을 준비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 삶을 성찰하고, 삶을 통해 죽음을 이해하는 것. 누군가의 마지막을 함께 축복하고, 애도의 시간을 갖는 것, 이것은 떠나는 이와 남겨진 이 모두에게 아름답고 성스러운 일이다.
-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영혼은 떨 수 밖에 없다. 아프고 힘들더라도 머릿속에 넓고 파란 바다를 그려보자. 배를 타고 햇빛이 반짝거리는 바다를 여행하는 것. '저기 저곳은 참 아름답군!' 눈부시게 찬란하게 숙연하게 그렇게 떠나라.
- 죽음은 반드시 오지만 죽음의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아. 모인 것은 흩어지게 마련이고 모아둔 것은 남김없이 소모되며, 일어난 것이 가라앉으리니, 태어남의 마지막은 죽음이 되리라. 우리가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달라이 라마)
-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그대가 원하는 곳으로 간다. 가슴 설레는 또 다른 삶을 위하여 지금의 삶을 살아내자. 그곳에서 더 좋아지고 나아지려면 지금 여기서 좋아야 하고 나아져야 한다.
- 어떤 고난 속에서도 그 과정을 행복으로 만들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견디고 이겨내어 품격과 품성을 높이는 것이 인생이고, 높아진 영혼의 결로 더 환한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죽음이다.
- 나미아미타불이 무엇인가. 나미아미타불에서 나무는 '돌아가다' 혹은 '귀의하다'는 의미. 아미타는 '한량없는 생명의 빛'이란 의미. '한량없는 생명의 빛으로 돌아가다'가 바로 나무아미타불이다. 한량없는 생명의 부처님이신 아미타 부처님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해석할수도 있고, 한량없는 생명의 빛으로 돌아가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수도 있다. 내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한량없는 생명의 빛, 그 빛 속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서방정토, 즉 극락세계로 간다는 것. 그 세계에 태어나면 우리도 깨달음을 얻어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비전을 가질 수 있다.
- 아버지 왜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 아직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러시아 속담)
-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첫사랑들이 해마다 첫눈으로 내려온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도 다시 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당신의 따뜻한 숨에 흰눈으로 누군가 와서 말한다. 사랑해 하얗게 사랑해.
- 나의 혼이여, 너는 장기간 붙잡힌 몸이었으며, 이제야 너의 감옥에서 떠나 이 육체의 장해에서 벗어나는 시기를 만났다. 기쁨과 용기를 갖고 이 별을 견디라. (데카르트)
- 죽으면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갑니다. 진심으로 극락을 원한다면 극락으로 갑니다. 가슴 설레는 또 다른 삶을 살기 위해 갑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새 세상으로 떠나기 위한 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 그처럼 무르익은 공기와 풍요로운 하늘 가운데서 사람들이 해야 할 단 한가지 일이란, 사는 것과 행복해지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베르 카뮈, 행복한 죽음)
- 법정스님께서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버린 헌 옷이니까.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화장)해도 무방하다"며 의연하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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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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