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된 위기

사회 2024. 12. 11. 07:09

- 먼 곳에서 벌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우리와는 무관한 것으로,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각자의 일상을 이어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그렇지만 멀어보이던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국의 지정학적 위기와 연결되어 평온한 일상을 무너뜨리는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중국의 대만점령, 나아가 한반도 핵위기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 지구상 어느곳보다 한국이 얄타체제 해체가 촉발한 연결된 위기의 위협적 공간이 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70여년간 크고 작은 군사적 위기가 있었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이미 일상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제 계속해서 그렇게 믿어도 될지 불안이 커지고 있다. 한반도는 전쟁 심지어 핵위기 가능성을 알리는 시게가 째깍째깍 조여오고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 현대사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질서가 크게 요동친 시기는 두번 있다. 한 번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일본 식민지로 전락한 때, 또 한 번은 2차대전 종료후 해방된 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결국 전쟁으로 치달은  때. 되돌아보면 두 차례 국제적 대변동의 국면에서 한국의 지식인, 정치가와 사회운동은 정세변화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최악의 상황을 벗어날 돌파구를 찾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복잡미묘한 국제정세에 직면했을 때마다 한국사회는 이를 분석하고 체계적 대응에 나서기보다 의지만으로도 현실을 돌파할 수 있다는 과도한 열망에 빠지곤 했고, 이는 곧 좌절로 이어짐. 그러다 보니 우리 맘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생각해 국제정세란 무시해도 좋은 것, 아니면 우리로서 어찌 해볼 수 없는 숙명으로 간주하곤 했다. 나는 이를 분석의 부재와 의지의 과잉이라 부른다.

- 분석이 결핍된 의지만으로는 위기를 돌파하기 어렵다. 대격동의 시대에는 기존 질서의 붕괴와 그에 따른 혼란을 심지어 찬양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마련. 지금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세계적으로 거대한 무질서가 도래해야 비로소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일부 자칭 좌파의 근거없는 허망한 낙관이나 대란대치(문화대혁명 때 구호. 대혼란이 일어나야 새로운 질서가 수립된다는 의미)식의 사고는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의 조화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신화만큼이나 또 다른 신화일 따름이다.
많은 질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답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2차대전의 성격이 무엇이었는지, 20세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무엇이었는지, 냉전은 무엇이고 냉전형성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은 실제로 얼마나 적대적이었는지, 러시아 혁명과 중국혁명의 관계는 무엇이었는지, 한국전쟁 발발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어떠했는지, 유럽냉전과 동아시아 냉전은 어떻게 관련되고 어떻게 유사하면서도 다른지, 중국 사회주의 건설고정과 개혁개방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한국 현대사는 이 20세기 세계적 변동과 어떻게 얽혀 있었는지, 얄타체제는 이런 많은 변화에 어떤 새로운 방향성을 부여했었는지 등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이전과는 다른 접근을 시도해야만 할 것이다. 

- 우크라이나 전쟁을 냉전적 체제대결의 틀로 해석하게 된 배경에는 전쟁원인으로서 나토동진이라는 쟁점이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원인과 관련해 가장 많이 이야기된 것이 바로 나토동진과 이에 대한 미국 책임론이다. 91년 소련 해체와 더불어 소련의 영향 아래 있던 바르사뱌 조약기구가 해체되었음에도 나토는 해체되지 않았고, 그 시점에 1인치도 동진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을 깨고 구사회주의권 동유럽 국가의 대부분 지역으로 확장한 것이 사실이며 이제 러시아 문턱에까지 이르렀다는 것. 이 전쟁을 미국이 경쟁자 없는 단극세계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체제대결 구도를 강화한 결과이자 탈냉전과 9.11이후 미국의 전지구적 팽창주의의 산물로 보는 것이다.

- 신자유주의는 세계자본주의의 수익성이 저하한 결과로 출현하였고, 금융을 우위에 두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전환의이유 자체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붕괴를 막고 위험을 분산시키려는 데 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층화하고 차별화한 방식으로 경제적 위험을 구조적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금융세계화의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는 세계경제를 통합한다. 그 정점에서 산업의 중심이 아예 금융으로 전환하는 곳은 미국이지만, 그 바로 아래서 유럽이나 동아시아는 산업의 중심이 금융이 아니라 제조업으로 유지되더라도 초국적 금융투자에 점점 더 개방되는 방식으로 전환된다. 그 아래 층위에서는 개별국가의 국민경제적 통합은 해체되고 선별적으로 세계경제의 공정분할과 로지스틱스에 통합된다. 초국적 금융기관들이 이런 전 지구적인 층화한 통합을 주도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개별국가의 경제정책의 자율성 그리고 통치의 유지와 관련해 중대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경제위기가 반복되며 신자유주의의 압박은 더 커지고 정치의 공간은 점점 더 축소된다. 상이한 사회집단들의 상이한 존재적 요구들을 정치의 공간에서 수용하고자 하던 앞선 시대 정치의 틀은 약화되고, 사적인 것의 공적인 것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된다. 이제 경쟁은 집단가 차이보다 집단 내 차이를 더 크게만들고, 집단사이의 차이를 현실로 인정하고 거기에 국가가 개입하는 재분배의 정치는 점점 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불평등이 전 지구적으로 확장되며, 국가의 재분배적 개입은 자본이 해외로 이탈할 수 있는 경우 제약을 갖게 됨. 사회는 불평등과 배제로 가득하지만 타인에 대한 연대만큼이나 정치적 조직에 대한 소속감을 형성하는 것은 어렵게 된다.

- 사정이 복잡해지는 것은 동아시아 위기가 한반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대만 무력점령 위협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북한 핵 관련 분석이 한계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인데, 두 위기가 맞물릴 때 어떤 결과가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북한이 중국을 활용해 위기를 고조시킬 수도 있고 중국이 북한을 통해 긴장고조를 외주하는 길도 열려 있다. 또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과 대립하는 국가들이 의도와 무관하게 북한의 핵도발에 끌려들어갈 가능성도 있다.
북한이 비대칭적 확전의 길로 나아가고 이를 제어하기 위한 미국의 대북한 응징적 핵억제력의 경고가 높아지면서 한반도의 핵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 여기서 응징적 억제만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려움. 그렇지만 문제는 또한 2018년 이전처럼 북합의 촉매형 전략을 전제로 한 대응이나 남북 양자회담을 통한 해결의 방식이 작동할 가능성도 매우 낮아졌다는 데 있다. 압박을 핟라도 그 다음 출구를 모색해야 하는데 군사적 압박은 언제나 외교적 해결책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은 북한의 핵전략을 다시 촉매형으로 되돌리기 위해 중국을 압박하고 설득할 수 있는가가 쟁점 중 하나일 것이다. 북한에 대해 응징적 억제력과 거부적 억제력을 결합하는 확증억제를 강화하자는 주장을 펴는 경우에도 한국-일본-미국을 연계한 외교적 대응과 맞물린 당사자 대화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현실주의적 판단에는 군축과는 구분되는 군비통제 패러다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과거 다른 나라의 군비통제 논의상황과 잘리 현 북미관계처럼 비대칭적 군사력상황에서 군비통제를 추진하면 핵전력이 감축되어 억제 안정성이 약호할 우려가 커지기 때문에 협상에 난관이 발생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하나의 선택지로 모든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가지 선택지를 결합하는 고려를 해야하는 상황이고, 각 선택은 후속선택과 긴밀히 연결되어야 할 것임.

- 제3차 역사결의
21년 제3차 역사결의는 앞선 두차례의 역사결의와는 상이함. 우선 대내적으로는 앞선 시기 당의 지도노선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노선을 수립할 필요성이 없었고, 2차 역사결의와 굳이 시기를 구획하기 어려운 개혁개방의 연속선상에서 제기됨.
신시대라는 규정에 따라 3차 역사결의는 중국공산당 100년사를 네 개의 시기로 구분하는데, 이는 학계의 통상적 구분법과 매우 다름. 3차 역사결의에서는 두 개의 100년의 분투, 모욕받은 과거와 중흥의 미래대비, 중화민족의 부흥 등에서 볼 수 있듯 내부적 평가와 판단보다는 세계에서 중국 민족이 차지하는 위상과 대응에 훨씬 더 강조점이 놓인다고 할 수 있다. 3차 역사결의 또한 국제정세를 고려하고 있지만 이제는 더 이상 혁명이나 개혁개방이 아니라 미중대결시대의 중화민족 부흥이 목표가 되고 있는 것. 이런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3차 역사결의의 좀 더 분명하고 핵심적인 목표는 18차당대회때부터 줄곧 추진해온 시진핑의 당 중앙 핵심지위와 전당의 핵심지위를 확립하고 또 시진핑 사상을 전당, 전국 인민의 지도사상으로 확립한다는 두개의 확립을 당 공식문서로 명문화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음. 3차 역사결의의 이런 과제와 핵심목표가 결합한 결과가 수세적 예외주의라는 특성을 낳는다. 

-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통합(원심력)에 대해 개별 국가권력의 통치자율성(구심력)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준제국적 국가들의 군사강국화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제기하는 위험은 단지 러시아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님. 전쟁을 통해 처음부터 제기된 또 전쟁개시의 숨은 고리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 중국문제, 좀더 정확히 말해 중국으로부터 발발하는 대만위기 가능성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대만위기와 연동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이해하는 것이 현 국제정세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 

- 락다운과 코로나 통제에 대한 불만의 양가성을 평가하는 중국내 비판적 지식인 왕샤오밍의 분석은 핵심을 잘 드러낸다. 그는 당국자본주의라고 보면서 중국식 정치형성의 한 경로를 다음과 같이 분석.
새로운 경제상황이 점점 더 많은 민중, 특히 청년이 미래에 갖는 물질적 기대 및 이와 관련된 사회상황에서 갖는 낙관적 기대를 무너뜨리고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물질적 빈곤을 체험하기 시작하면서, ... 이러한 의문과 불만은 모두 정치와 통하는데 이것이 차곡차곡 쌓여 정치의식이 부활하고 성장할 것이라는 점음 자명하다. ... 80년대 초부터 ... 사회생활에 대한 당국의 통제는 점진적으로 이완되어왔다. 사람들이 마음놓고 정치적으로 무관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통제가 느슨해진 것이 적잖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체로 2010년대 중반부터 국내외의 다양한 요소에 영향을 받아 당국은 사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정치와 무관하고 싶은데 정치가 나를 찾아온다는 감각이 점점 더 빈번하게 감지되기 시작했다. ... 민중은 당국과 충돌하는 것을 늘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은 우리가 사적인 생활로-안심하면서 누리려고-물러섰을 때, 당국의 거대한 손이 특정 비상사태를 집행한다는 명의로 사생활 속으로 밀고 들어와 정치가 편재하고 이를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던 것이었다.
중국에서 민중의 정치의식이 자극받아 저항의 정치가 등장하는 사회경로는 이런 연쇄를 거칠 수 있음. 미국과 경합해 미국을 추월하겠다는 강한 미국 선망적 민족주의가 중국 국내의 대응을 보수화하고 대만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더 촉진시킬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 탑다운방식의 강한 통제가 지속되면 코로나 통제와도 맞물려 당-국의 일방적 정책추진에 대한 반발을 서서히 누적해갈 수도 있다. 전자의 힘이 더 강하지만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외부에서 대만의 무력통일 가능성에 대해 지속적으로아니다라는 목소리를 전해야만 하는 이유다. 그 목소리가 중국 내에 전달되어 그곳에서도 아니라 라느 목소리에 다시 힘이 실릴 수 있을 때 재앙으로 가는 길도 막을 수 있다. 한반도의 재앙은 한반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루즈벨트의 네 경찰국 구상
30년대 미국의 국내질서를 뉴딜로 재편한 이후 41년부터 단일 세계주의에기반한 루스벨트의 글로벌 뉴딜이 시작됨. 이 단일 세계주의는 매우 야심찬 기획이었는데, 세계를 19세기의 식민지 질서로부터해방해 완전히개방된 세계시장을 창설하고 이를 통해 세계질서에 대한 위협을 제거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는 미소영의 3강 또는 미소영중의 4강 구도로 구체화되었는데, 식민화 세력의 대표였던 영국을 껴안되 탈식민지적 방향을 추동하기 위해 명백한 비식민화 노선을 표명한 소련을 파트너로 인정하는 과제가 핵심으로 부각됨. 얄타 구상은 루스벨트 개인만이 아니라 여러 뉴딜주의자들이 결합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 

- 미국 헤게모니 시대의 국가간체계의 특징이 미국화로 귀착된 계기는 마셜플랜의 시행과 동서독분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셜플랜은 유럽강대국들에 대해서조차 진정한 초민족적 동형화의 동학을 작동시켰고, 그렇게 서방을 탄생시킴. 동아시아에서 유럽의 마셜플랜과 유사한 것이 독일의 군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설치된 일본점령을 위한 총사령부였다. 이 총사령부가 점령 후 실시한 민주혁명은 치안유지법 체제 해체, 헌법 자유주의화, 재벌해체, 농지개혁, 국가신도 철폐 등을 포함한 급진적인 것이었으며, 그렇지만 전제주의적인 민주주의 이식이라는 신식민지주의적 혁명의 방식을 띠었다. 전후 체제로서 독일을 중심으로 한 미국화의 방식이 일본에도 관철된 결과는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말했듯이 미국의 기계뿐 아니라 그 사상까지도 포함해서 미국 것을 일본이 흉내내기 시작하는 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것이었다. 세계는 이제 미국화하는 지역과 미국화와 괴리된 지역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심지어 미국 영향아래의 자유세계 내에서도 미국화의 의미는 달랐고, 그 의미 차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확인된다.

- 루즈벨트 주도의 단일 세계주의 구상에 대해서는 보는 입장에 따라 매우 상이한 평가가 내려짐. 냉전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면, 한편에서는 거대한 세계자본주의의 포섭전략에 사회주의가 속절없이 개량화되어 자본주의에 동화되었다고 비판했을지도 모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순진한 이상주의에 빠진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철저히 이용당해 그가 요구하는 대로 양보했다고 비판했을지도 모름. 실제 미국에서는 얄타회담을 순진한 루스벨트가 사악한 스탈린에게 이용당한 것으로 몰고 가려는 냉전적 해석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얄타회담 참석자 앨저 히스가 얄타에서 미국의 이익을 팔아넘긴 간첩으로 지목되었고 이는 매카시즘 광풍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 중국을 전후 주요 책임자로 포함하려는 루스벨트의 구상은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힘을 강화해 일본을 견제하는 동시에 아시아 식민세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탈식민지화 문제에서 프랑스를 압박하고 아시아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제어하는 문제 등이 중요해 질 것이었고 여기서 중국이 새로운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러나 얄타 구상은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에서도 균열이 진행되는데, 중국이 바로 그 출발점이었다. 첫번째는 중국 내전과 국민당 퇴각에 뒤이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었고, 두번째는 한국전쟁과 항미원조 이데올로기의 등장이었다.
얄타 구상이 냉전체제로 귀결된 결정적계기는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중국혁명 때문에 얄타구상이 원래 궤도에서 이탏면 전개된 결과라 할 수 있음. 동아시아 냉전의 잠정적 해결은 2차대전 승전국 49개 나라가 참가해 대일본 전쟁을 종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51년 9월8일)과 한국전쟁을 종결한 종전협정(53년 7월27일)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중국과 남북한 모두 참가하지 않았고, 소련은 참가했으나 서명하지 않고 이후 별도로 일본과 조약을 체결. 한국전쟁 정전협정에는 소련이 참가하지 않고 중국과 북한이 참가한 반면, 정전협정 당사자가 아닌 남한은 빠지고 연합국이 협정에 조인. 이 두 개의 조약-협정에 바탕해 동아시아 냉전구도인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작동하게 됨. 정작 유러버에서의 냉전은 독일 문제를 둘러싼 이견과 대립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같은 종지부를 찍지 못했고, 그 최종해결은 91년 통일독일 이후의 일로 미루어짐.

- 22년 3연임에 성공한 시징핑 주석은 중간지대혁명의 성공으로부터 지금까지 누적된 80여년간의 모순에 찬 역사를 한순간 종결할는 조급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강력한 국가주의나 자민족 중심주의를 동원한다고 해서 남겨진 과제가 일순간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님. 오히려 환상적 또는 허구적 해결이 문제를 더욱 해결하기 어렵게 만들고 대내외적으로 불안정과 위협의 요인을 증폭시킬 수 있음. 개혁개방을 통해 얻어낸 경제성장의 신뢰가 약화되기 전에 그에 걸맞은 국제적 위상을 수립하려는 중국의 시도는 중간지대 혁명의 특성과 항미원조를 통해 형성된 모순적 성과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 성과의 거대함에 비추어 볼 때 중국이 동원할 수 있는 역량과 자원의 제한성은 수세적 예외주의를 낳는다. 중국 측에서 보자면 누적된 역사적 문제를 단계적으로 그리고 내정방식으로 해결한다고 주장하겠지만 이는 외부에서 보자면 기존 세계질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대만 문제가 바로 그렇다.

- 얄타구상이 얄타체제로 갔던 역사적 궤적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미래지향의 구상, 다자주의를 가능하게 할 보편주의의 형성, 당초의 구상을 좌절시킬 수 있는 돌발변수에 대한 세심한 대응 그리고 현실주의의 냉정한 판단 필요성 등이었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아직 수평선 위로 떠오르지 않는 공위기의 시대에는 과거의 유산에 의존하고 숨쉬는 공간을 잘 마련해 버티는 것도 중요. 짧게 주어진 시간의 조그마한 숨 쉴 공간에서 버티면서 지혜를 모아 극단적 위기를 헤쳐나갈 해결책을 신속하게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조급해진다고 대안이 신속하게 출현하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이런 시대에 지식인의 책무는 주변 사람들의 조급한 마음을 더 가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섣부른 장밋빛 낙관주의를 설파하는 대신, 사방에 깔린 장애물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위기 속에 몰락하지 않도록 냉정하고 신중한 판단의 끈을 마지막까지 잡고 있어야 한다.

- 현재 상황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적절한가
100년전 1차대전 전후 시기를 참조점으로 삼아야 한다. 
1차대전 시기와 지금을 비교하면 다섯가지 유사점과 한가지 차이점이 있다.
1. 강대국의 지정학적 충돌이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에서 벌어짐
2. 1차대전이 종결되는 과정에서 스페인독감이란 팬데믹이 큰영향을 및ㅁ. 지금도 코로나 19팬데믹이 진행중
3. 자유주의의 위기. 100년전에는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의 한계로 실업자가 넘쳐나고 식민지 경합이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지금 많은 문제는 신자유주의 부작용과 관련되어 있다.
4. 파시즘의 등장. 1차대전 당시 자유주의 위기에 대한 대응 중 하나가 파시즘이었다. 적과 우리의 이분버으로 혼란에 대처하려는 강력한 구심점을 매우 반동적 방식으로 만들어냈다. 지금도 자유주의 위기는 포퓰리즘 또는 극우정치의 분출로 비슷하게 반복된다.
5. 전시자본주의. 1차대전에서는 금융과 무역이 단절되고 자유로운 시장질서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전시 자본주의를 경험. 지금은 코로나19가 일종의 전시 자본주의가 작동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1차대전과 지금의 대단히 중요한 차이점은 사회주의 위상이다. 19세기 위기의 돌파 속에서 뉴딜과 함께 사회주의가 등장. 사회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제국주의 세계질서에 대한 대안이었고, 러시아 혁명을 거쳐 중국으로 퍼져나감. 그런데 지금 대단히 역설적이게도 사회주의 혁명의 양대국가였던 러시아와 중국이 바로위협의 핵심국가로 부상하고 있음. 사회주의라는 대안이 사라지고, 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을 지닌 국가가 오히려 위협이 되고 있는 상황이 중요하다.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속가능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3) 2024.12.20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4) 2024.12.20
분노 설계자들  (3) 2024.11.28
엑스트로피  (2) 2024.11.24
현대사회 생존법  (8) 2024.11.21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