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기원

과학 2023. 11. 17. 06:42

- 어떻게 하면 여자가 낳은 아이가 반드시 자 신의 아이가 되도록 할 수 있을까요? 고릴라처럼 여자가 가임기 때에 다른 남자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 됩니다. 계속 곁을 지키고 있으 면 됩니다.
이제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여자에겐 남자가 계속 자신에 게 고기를 가지고 오게 하는 것이 이득입니다. 하지만 가임기는 기껏 해야 한 달에 하루, 이틀입니다. 그럼 나머지 날에는 남자가 가져오는 고기를 받을 수 없는 걸까요? 여자가 내놓은 해답은 위장 전략입니다. 자신이 항상 가임기인 듯 속여서 계속해서 고기를 받으면 되죠. 가장 확실하게 속이는 방법은 남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속일 뿐 아니라, 아예 여성 자신도 자신 의 가임기를 모르게 됐습니다. 가임기를 정확히 모르는 인간은 늘 수 시로 성교를 해야 했고, 남자는 계속 같은 여자에게 되돌아오게 됐습 니다.
이렇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성과 먹을거리를 매개로 짝을 맺게 돼 성별 분업, 핵가족, 직립 보행이 '패키지'로 등장했습니다. 이것이 인간 의 기원이라는 주장은 '러브조이 가설'로 불리고 있습니다. 미국 켄트주립 대학교 사회학 및 인류학과 오언 러브조이(Owen Lovejoy) 교수가 1981년 유명한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해 사회적 파장을 불 러일으킨 가설입니다.
인류학자들은 러브조이 가설이 맞는지 검증해 보고 싶어 했습니 다. 러브조이 교수의 주장이 맞다면 초기 인류가 직립 보행의 흔적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수컷끼리의 경쟁이 약했기 때문에 여자와 남자 의 몸집 차이도 적고 송곳니 역시 크지 않았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류 조상으로 거론돼 온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 스(Australopithecus afarensis)'를 보면 이 예상은 반만 맞았습니다. 아파 렌시스의 송곳니는 현대인보다는 크지만 침팬지나 고릴라보다는 작 았습니다. 남녀의 몸집 차이 역시 고릴라보다는 작지만 현대인보다 는 큽니다. 이런 특징을 바탕으로 추정해 보면, 아파렌시스는 현생 인 류도 아니고 고릴라도 아닌, 색다른 형태의 남녀 관계를 보였을 것입 니다.
- 러브조이 가설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으며, 특히 페미 니스트들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이전에 사람들은 핵가족이 자본 주의와 시장경제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러브조이 교 수의 말이 맞다면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고, 남자는 밖에 나가 돈을 벌어 오고 여자가 그 돈으로 집을 지키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이 태초부터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운명이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 말을 조금만 바꾸면 수백만 년 전부터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여자가 자 신의 성을 제공했다는 해설이 생길 수 있습니다. 러브조이 교수의 학 설은 인류의 기원에 대한 학설이 아니라, 무한한 성생활을 꿈꾸는 남 성들의 환상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 지난 30년 동안의 연구 결과를 보면 러브조이 가설이 틀렸을 가능 성이 높습니다. 먼저 가임기에 상관없이 성생활을 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이 아닙니다. 멀리는 돌고래, 그리고 인간과 가장 가까운 보노보 (bonobo, Pan paniscus) 역시 언제나 성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는 핵가족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러브조이 교수의 설명과 달리 사실은 인 간의 가임기가 숨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알게 모르게 가임기 때 평소와는 달리 행동하며, 남자들도 알게 모르게 달리 반응 합니다. 인류학 연구 결과를 보면, 배란기의 여자는 목소리가 높아지 고 식욕이 줄어들며 남녀 어느 쪽이 보기에도 예쁜 옷을 입습니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배란기 여자의 냄새에 끌리고 배란기 여자의 근처 에 가면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을 분비합니다(신기하게도, 이런 남자 들도 자신의 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배란기 여자에 대한 반응을 달리 합니다.). 어느 날 문득 그녀가 유달리 예뻐 보인다면 호르몬의 추파에 대한 화답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 인간의 아버지는 생물학적인 관계를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믿음)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몸 역시 그에 맞춰 진화했습니다. 남자가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갖게 되면 남성 호르몬이 줄어듭니다. 남성 호 르몬은 생물학적인 '수컷다움'을 관장합니다. 이 말은 '수컷 노릇의 사 령부'가 아버지 노릇을 위해 퇴진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러브조이 가설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 자는 수컷과 암컷이기도 하지만, 생물학을 넘어선 사회 문화적인 존재 입니다. 아버지의 탄생은 그것을 증명합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지극 히 인간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 머리는 커지고 산도는 좁아지고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새끼의 머리 크기가 산도보다 크지 않습 니다. 산도를 통해 새끼를 낳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지요. 하지 만 인간 태아는 다릅니다. 머리는 크고 산도는 좁아, 출산할 때 어려움 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400만~500만 년 전의 초기 인 류는 여러모로 유인원처럼 생겼습니다. 머리 크기도 침팬지 머리 크기 와 비슷한 450시시(cc) 정도였죠. 단지 직립 보행을 했다는 점만 달랐습니다(3장 '최초의 인류는 누구?' 참조). 그 후 인류의 머리 크기는 점점 커 져서 200만 년 전에는 약 2배인 900시시에 다다르고 그후 10만년전 에는 현재 우리의 머리 크기와 비슷한 1300 시시도 쉽게 볼 수 있습니 다. 하지만 몸 크기는 200만 년 전이후 별로 달라지지 않았지요.
몸의 크기는 변하지 않았는데 머리 크기만 커지자, 여러 가지 고민 스러운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가 큰 아기를 낳기 위해서 골반은 넓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산도도 넓어지니까요. 하지만 직 립 보행을 하기 위해서는 골반이 좁을수록 좋습니다. 다리를 앞뒤로 바삐 움직이며 걸어야 하는데 다리가 좌우로 멀리 벌어져 있으면 중 심이 흔들거리는 등 문제가 많습니다. 인류는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출산과 보행 중에서 결국 보행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골반이 커지지 않는 쪽으로 진화했으니까요. 좁은 산도를 통해 머리 큰 아기를 낳는, 유례가 없는 출산의 어려움은 그대로 감내하고 말이지요.
경이롭게도,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출산과 분만은 수도 없이 성 공적으로 이뤄져 왔습니다. 산도보다 머리가 큰 아이를 낳기 위해 여 자의 골반은 뼈와 뼈 사이가 물렁해졌고, 벌어질 수 있는 구조를 갖게 됐습니다. 골반뿐 아니라 골격 전체의 관절이 벌어집니다. 물론 벌어진 다 해도 큰 아기의 머리를 쉽게 낳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어서 늘 위험 과 고통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출산 후에는 벌어졌던 관절이 다시 닫히기도 하지만, 대개는 이전 상태로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습니 다. 아이를 낳고 나면 옷매무새가 이전과 같지 않다는 말을 종종 하곤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비록 체중이 아이 낳기 전의 상태로 돌아와도 몸매가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많이 낳은 여자의 골반에는 벌어졌다 아문 기억이 상흔이 돼 남아 있습니다.
출산은 당사자인 아기에게도 트라우마를 안겨 줄 수 있습니다. 유 인원인 원숭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원숭이 암컷은 새끼를 낳을 때 쪼그려 앉는 자세를 취합니다. 아기를 낳을 때 중력의 도움을 받기 위 해서지요. 산도에 막 들어간 태아의 얼굴은 엄마의 배꼽 쪽(몸 앞쪽)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산도를 통과해 갓 빠져나온 새끼의 얼굴은 자 연스럽게 엄마의 몸 앞쪽(얼굴)을 향하게 됩니다. 쪼그린 상태의 엄마 원숭이는 팔을 뻗어 새끼의 나머지 몸이 빠져나오도록 돕고, 새끼가 몸 밖으로 다 나오면 그대로 품으로 가져와 안습니다. 엄마의 도움으 로 세상에 처음 나온 새끼는 이제 엄마의 얼굴을 보면서 품에 안겨 젖 을 뻽니다.
- 다른 동물들의 암컷과 달리 분만을 하는 여자는 해산의 진통을 느 끼면 혼자 있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진통 중 혼자가 되면 많은 경우 스 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분비돼 진통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심하면 해산 과정이 멈추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는 여자는 믿 고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 과정을 함께해 온 그들은 대개는 여자의 어 머니이거나, 여자 형제이거나, 다 큰 딸이거나, 또는 같은 집단에 사는 경험이 많은 여자였습니다. 그들은 진통 과정을 함께하고 마지막에 아 기를 효율적으로 밀어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며, 아기가 태어날 때 목 이 꺾이지 않도록 잘 받아서 엄마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리고 갓 태어난 아기와 시간을 함께 보내느라 엄마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이런저런 마무리를 대신 해 줍니다. 아기가 나온지 얼마 후 뒤 따라 나오는 태반도 받아 내야 하죠. 누군가 다른 사람의 도움이 개입 돼야 하다니,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적인 동물인 셈입니다.
- 살아 있는 동물을 잡기가 어려우면 죽어 있는 동물을 먹으면 되지 않을까요? 사자는 막 죽인 사냥감의 내장을 배불리 먹고 나면 소화시 키기 위해서 한숨 자러 갑니다. 사냥감은 내장만 제외하고는 나머지 고깃살이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그걸 노리면 되겠죠.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은 없습니다. 사자가 물러가고 나면 이번에는 독수리 떼나 하 이에나 떼가 몰려듭니다. 독수리 한 마리는 선 키가 100센티미터 정도 로, 초기 인류와 비슷한 크기입니다. 두 날개를 쭉 편 길이는 180센티 미터가 넘습니다. 게다가 항상 떼 지어 몰려다닙니다. 절대로 연약한 인류가 만만히 고기를 빼앗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류는 동물성 지방을 얻는 획기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방법이랄 것도 없습니다. 사자부터 독수리, 하이 에나까지 모든 경쟁자들이 내장과 고기를 다 발라 먹고 버리고 간 찌 꺼기를 먹는 거니까요. 바로 뼈입니다. 뼈는 무시할 게 아닙니다. 팔다리의 뼈 속에는 골수가 있고 머리뼈 속에는 뇌가 있습니다. 골수와 뇌는 모두 순수한 지방 덩어리로 영양이 풍부한데, 이를 노리는 경쟁자 는 벌레와 박테리아 정도입니다. 초기 인류가 아무리 약했다 해도, 이 정도는 물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뼈 안의 영양분을 취하는 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 다. 뼈는 매우 단단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팔다리뼈는 먼 훗날 무기로 도 사용할 정도로 굵고 단단합니다. 이빨로는 이런 뼈를 깰 수 없습니 다. 그래서 초기 인류는 돌로 뼈를 깨서 골수를 빼 먹는 방법을 찾았습 니다. 뼈 깨는 돌은 점점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춘 '석기'가 되었습니다. 호모 하빌리스가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올도완 석기는 이렇게 뼈 깨는 돌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육식이 부른 또 다른 진화
인류는 이렇게, 점점 넓어지는 초원이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연명 하기 위해 사체 찌꺼기에 손을 댔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름진(고지방 식품 섭취에 힘입어 초기 인류의 두뇌가 점점 커진 것입니다. 두뇌는 빗대서 말하자면 제 작비와 유지비가 많이 필요한 기관입니다. 그에 걸맞는 영양 섭취가 필 수인데,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육식이 그 과정을 도운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확보한 고지방 고단백 식습관은 몸집도 키웠습니다.
- 초기 인류는 400만~500만 년 전 두뇌 크기가 현생 침팬지와 비슷한 400~500시시(cc) 정도였습니다. 200만~300만 년 뒤 호모 하빌리스 때는 750 시시로 커졌습니다. 하지만 몸집은 여전히 100센티미터 전후 로 작았습니다. 200만 년 전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했습니다. 호 모 에렉투스는 두뇌가 1000시시까지 커졌고 몸집 역시 170센티미터 정도까지 자랐습니다. 몸집도 크고, 두뇌도 큰 인류 조상이 나타난 것 입니다.
인류는 이렇게 큰 두뇌와 큰 몸집을 갖추고서야 비로소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가 흔히 '원시인'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사냥은 이렇게 인류 진화의 비교적 늦은 시기에 등장한 것 입니다. 하지만 인류는 곧 뛰어난 전략과 체력, 그리고 석기 덕분에 잡 을 수 있는 짐승 수를 늘려 가며 사냥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 이제까지 초기 인류가 '울며 겨자 먹기로' 육식을 시작한 사연을 소 개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은 가시지 않습니다. 고릴라 와 침팬지가 먹을 게 없다고 해서, 혹은 고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곧바 로 고기를 많이 먹을 수 없듯, 초기 인류 역시 바로 기름진 음식을 소 화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인류는 이 마지막 문제를 진화를 통해 해결했습니다. '아포 지방 단 백질(apolipoprotein)'이라는 물질을 이용해 기름진 음식을 소화할 수 있 도록 한 것입니다. 아포 지방 단백질은 마치 세제처럼 작용하는 물질 입니다. 기름기가 지닌 지질 성분에 결합한 뒤, 이를 혈관에서 치워 피 를 깨끗하게 합니다. 특히 혈중 지방 단백질을 낮추는 데 가장 효율적인 형태의 아포 지방단백질 E엡실론 4(APOE-epsilon 4) 유전자가 우리 몸에 등장한 시기를 보면, 약 150만 년 전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호모 에렉투스가 큰 두뇌와 몸집을 하고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석재 의 양쪽 면을 가공해 다듬은 석기)를 만들어 내던 시점입니다.
KNM-ER 1808 화석의 주인공이 초기 인류로서는 엄두도 못 냈을 부위인 육식 동물의 간을 많이 먹었다면, 이것은 본격적인 육식이라 는, 인류 진화 역사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뜻합 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로 인한 뼈 출혈로 죽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아직은 풍부한 동물성 지방과 단백질을 소화시킬 정도로는 진화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놀라운 KNM-ER 1808 화석은 바로 그 진화의 중간에 놓인 인류의 다난했던 현실을 드러내는 것 같 습니다.
- 그렇다면 언제부터, 왜 인류의 털이 솜털로 바뀌었을까요? 고기를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게 된 다음부터라는 가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초식을 하던 초기 인류는 250만 년 전부터 고지방, 고단백 음식에 맛 을 들였습니다. 다른 짐승들이 먹고 난 찌꺼기인 뼈를 깨서 그 안에 있 는 골수를 먹는 정도였지만, 그 덕분에 두뇌와 몸집이 커지고 제대로 된 석기를 만들어 쓰면서 사냥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5장 '아이 러브 고 기' 참조).
털을 가진 짐승은 주로 초저녁과 아침에 사냥을 합니다. 사자를 생 각해 보세요. 수사자의 멋진 갈기와 윤기가 흐르는 털이 떠오를 겁니 다. 보기엔 폼 나지만 이런 몸으로 대낮에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 요. 모피를 입고 복날 더위가 한창인 대낮에 전력으로 뛴다고 생각해 보세요. 너무 더워 정신을 차리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맹수들은 한 낮이면 체온을 발산하기 위해 입을 벌리고 뜨거운 호흡을 계속 내쉽 니다. 말복 더위에 축 늘어져서 혀를 내밀고 헉헉거리고 있는 개처럼 요. 이렇게 가만히 있기만 해도 힘든데, 시속 65킬로미터의 속도로 힘껏 달려 도망가는 영양을 뒤쫓아 잡는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인간은 바로 이때, 맹수들이 움직이지 않는 대낮을 노려 사냥감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마저 온몸이 털로 덮여 있다면 어떨까요? 사자와 똑같이 대낮에는 맥도 못 추고 그늘부터 찾아 쉬어야 했을 것입니다.
- 이런 상황에서 털이 없어져서 맨몸이 되는 돌연변이가 우연히 등장 합니다. 이 돌연변이를 지닌 인간은 맨몸에 난 땀을 증발시켜서 뜨거운 체열을 발산하는 기발한 방법으로 아프리카의 대낮을 정복했습니다. 하지만 뭐든 장점이 생기면 예기치 못한 단점도 나타나는 법입니다. 땀을 흘려 체온을 조절하게 되면서 인간은 물에 그만큼 많이 의존하 게 됐습니다. 건조화가 진행되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마실 물을 구하기 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이 행동반경 내 어디에 있는지가 대단히 귀중한 정보가 됐죠. 물은 계절적으로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합니 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정보(기억)를 저장하고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일도 중요해졌습니다. 또 자주 물을 마시러 물가로 나오는 일은 위험하 기 때문에 이런 위험을 피할 방법도 중요해졌습니다.
자외선도 문제였습니다. 자외선을 막아 주던 털이 없으므로, 인류 의 피부는 자외선에 그대로 노출됐습니다. 자외선은 피부암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일으켜 체내의 엽산을 파 괴해 기형 태아가 생길 확률을 높입니다. 후손을 남길 확률이 줄어든 다는 뜻이기 때문에 인류에게는 대단히 불리한 일입니다. 체내로 들어 오는 자외선을 차단할 수 있다면 진화에서 매우 유익했을 것입니다. 인류의 피부에서 이 역할을 하는 것은 멜라닌(melanin) 색소입니다. 인체의 멜라닌 색소는 특수한 세포가 생산하는데, 멜라닌 색소가 많 아지면 피부색도 검어집니다. 이게 바로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최초의 인류가 검은 피부를 지녔으리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인류는 털과 땀을 맞바꾼 후에는 검은 피부가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이에 반해 털이 있는 동물의 피부는 흽니다. 털이 가려 주기 때문에 굳이 색소가 필요 없고, 색을 띨 다른 이유도 없어서지요. 인간 역시 머리털로 덮여 있는 두피는 하얗습니다.).
- 빙하기 동안에는 구름 낀 날씨가 계속되기 때문에 햇 빛을 보기 힘들죠. 햇빛을 보기 힘들면 자외선을 차단할 필요가 없고, 멜라닌을 만들어 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멜라닌이 필요 없 어졌기 때문에 피부가 하얗게 된 것은 아닙니다. 멜라닌이 필요 없어 졌다고 꼭 피부색이 옅어질 필요는 없기 때문이죠. 피부색이 검어도 그만, 옅어도 그만이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피부색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을 가를 정도로 중요합니다. 햇빛이 강한 곳에서는 멜라닌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듯 이, 햇빛 보기 힘든 곳에서는 오히려 멜라닌이 없어야 살아남을 수 있 습니다. 햇빛 보기 힘든 곳에서는 자외선이 부족한데, 우리 몸에는 약 간의 자외선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몸에서 유일하게 만들 어낼 수 있는 비타민 D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비타민 D는 칼슘 흡 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없으면 칼슘이 흡수되지 않아 뼈가 물 렁해지고 형태가 일그러집니다. 비타민 D가 부족한 시기가 길어지거 나 성장기의 중요한 때에 이러한 시기를 겪으면 구루병이 됩니다.
- 최근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유럽인의 흰 피부를 유발하는 돌연변이는 5000년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것은 뜻밖입니다. 아프리카를 떠난 인류는 자외선이 급격히 감소하는 빙하 기의 유럽에 살게 되면서 비타민 D 합성을 방해하는 멜라닌 색소를 잃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흰 피부를 발생시키는 돌연변이는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에서 살기 시작한 백수십만 년, 적어도 수십만 년 전에 발생해서 퍼졌어야 합니다. 현생 인류가 새롭게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서 유럽으로 진출했다고요? 그렇다 하더라도 흰 피부의 돌연변이는 적어도 수만 년 전에는 나타났어야 합니다. 5000년은 의외로 최근입 니다. 이렇게 늦게 나타난 이유는 농경의 발생과 정착입니다. 농경 이 전 시대에는 자외선이 부족한 지역에 살아도 비타민 D를 합성하지 않 아도 되었습니다. 비타민 D가 풍부한 식물, 해산물, 고기를 충분히 섭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농작물에 의존하는 식생활이 정착되면서 곡류와 전분류에 점점 의존하게 됐습니다. 먹을거리를 통하여 비타민 D를 충분히 섭취할 수 없게 되자 멜라닌을 없애고 자외선을 이용해서 비타민 D를 합성하게끔 하는 돌연변이가 유익하게 된 것입니다.
-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노년
재미있게도 우리 현생 인류가 주인공인 시대인 후기 구석기 문화는 이전까지의 인류 문화와 혁명적으로 다릅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암각화 등의 예술과 상징 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노 년층의 비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은 단순히 우연일까요? 저 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예술과 상징은 추상적 사고와 연결됩니 다. 또 정보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실제적인 기능도 있지요. 예술과 상징이 늘어났다는 건 이 시기에 그만큼 정보의 전달이 중요해졌다는 뜻입니다.
노년은 바로 이렇게 정보가 늘어난 시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손주를 볼 때까지 살면 세 세대가 같은 시대를 공유하게 됩니다.
두 세대가 같은 시대를 사는 것에 비해 오랜 기간 정보를 모으고 전달 할 수 있지요. 만약 두 세대가 50년 정도를 공유한다면, 세 세대는 75 년 동안 일어난 정보를 공유할 것입니다. 이렇게 노년은 정보의 생산 과 전달, 공유가 늘어나게 된 실질적인 계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예술과 상징의 탄생에 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이고 이 장을 마칩니 다. 후기 구석기 시대 이후 현대까지, 평균 수명과 노년층의 수는 계속 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 변하지 않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사는 세대의 수'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평균 수 명이 50세이던 시대에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주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살아 있었습니다. 즉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그 이후 수명이 대 폭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 추세를 고려하면 평균 수명이 75세가 된 지금은 증손주가 클 때까지 증조부모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 해 4대가 공존해야 하죠.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칠순이 되도록 증손주는커녕 손주를 보기도 힘듭니다. 예 전에 비해 결혼과 출산 연령이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100세 시대가 눈앞으로 다가왔지만 인류는 여전히 세 세대가 같은 시대를 사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가족 구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 떻게 보면 우리는 과거보다 '오래' 살게 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린 그냥 '느리게' 살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슬로우 라이프'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 농경의 발달이 유전자 다양성을 늘렸다는 것은, 인류 문명에서 대 단히 큰 의미를 갖는 사건입니다. 농업이라는 '문명'이 인류의 진화에 직접 영향을 미친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문명과 문 화가 발달하면 진화는 멈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문명과 문화의 발달, 그리고 인구 증가의 영향으로 인류의 진화가 빠른 속도 로 진행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2장 '인류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참조).
오늘날, 인류는 또 하나의 문화적 현상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바로 '노령 인구의 증가'라는 전에 없던 현상입니다. 문화가 인류 진화에 영 향을 미친다면, 분명 지금의 노령 사회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진화 를 새로운 양상으로 이끌 것입니다. 인류는 과연 이 새로운 현상에 어 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요? 계속될 인류 진화의 역사가 기대됩니다.
- 베이징인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두뇌 용량의 2배에 이를 만큼 머 리가 컸습니다(현대인의 약 3분의 2). 큰 머리를 지닌 베이징인은 인간다운 생활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실제로 저우커 우뎬 동굴에서 발굴된 동물뼈와 석기, 불을 피우고 난 둥근 흔적 등은 '추운 빙하기에 따뜻한 동굴에 둘러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불을 피워 고기를 익혀 먹는 인류'라는 구체적인 상상을 가능하게 했 습니다. 빙하기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게 할 만큼 문화적인 생활이 가 능했다는 것이지요(이런 상상이 최근 흔들리고 있다는 이야기는 앞서 했습니다.). 베이징인은 약 5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렇게 인간 다운 모습을 갖춘 조상 인류가 50만 년 전의 아득한 시간 전에 중국에 서 등장했다는 이야기는 중국이 자랑거리로 삼기에 충분했습니다.
베이징인은 곧 호모 에렉투스의 대표가 됐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인류 최초의 직계 조상이 중국에서 나타났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 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보다 일찍 살았던 초기 인류 조상 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아프리카에서만 발견되고 있었습니다. 이 들이 어떻게 멀고 먼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로 진화했는지 연결이 잘 안 됐던 것입니다. 이 수수께끼는 1970년대 이후 동아프리카에서 도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 발견되면서 해결되는 듯했습니다. 베이징인 만 한 머리 크기에 현생 인류와 맞먹을 만큼 몸집이 큰 이들은 무려 150만~200만 년 전에 등장했습니다. 이로써 새로운 시나리오가 탄생 했습니다. 호모 에렉투스는 일찌감치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뒤, 나중 에 큰 머리와 몸집, 우수한 사냥 도구를 바탕으로 서서히 전 세계로 퍼 졌다는 것입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에렉투스 역시 그 중 일부였고, 따 라서 베이징인과 자바인은 아프리카에서 시작한 거대한 물줄기의 하 나였다는 설명입니다. 이 가설은 화석의 연대와 지리적 분포 등을 고 려할 때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듯이 보였습니다..
- 하지만 큰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1990년대에 과학자들이 자바인의 연대가 180만 년 전까지 올라간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말은 아프리카 에서 호모 에렉투스가 탄생하던 시기와 거의 비슷한 때에 아시아에도 호모 에렉투스가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자바인이 아프리카의 호모 에 렉투스가 이주한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바인 화석의 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습니다. 이 문제는 아직도 분명 한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연이어 보다 확실하고 강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터키 북동쪽에 있는 나라, 조지아의 드마니시(Dmanisi) 유적에서 이상한 화석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 화석은 머리도 몸집도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함 께 발견된 석기 역시 그다지 세련되지 않습니다. 고인류학자들은 머리 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프리카 밖에서 이렇게 보잘것없는 화석이 나왔다는 사실은 기존의 가설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거든요. 큰 머리와 몸집, 뛰어난 사냥 도구를 지닌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 에서 태어났고,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비로소 전 세계로 확산할 수 있 었다고 인류학자들은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예가 처음 으로 나온 것입니다.
더구나 이 화석의 연대가 측정되자 시름은 더 깊어졌습니다.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와 동시대인 180만 년 전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런 시나리오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호모 에렉 투스가 나타나기 전에, 어떤 인류 조상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습니 다. 이 인류는 작은 머리와 몸집을 지녔고, 도구도 아주 허술하게만 만 들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초라한 몸과 도구를 가지고 아프리카 를 벗어나 세계로 향했습니다. 도중에 조지아의 드마니시를 거쳐 인도 네시아 자바까지 흘러 이주했습니다. 이후 이들 집단은 모두 사라졌습 니다. 하지만 그 중 아시아에 살던 집단 중 하나가 살아남아 따로 진화 합니다. 그게 바로 호모 에렉투스입니다. 이들은 이제 다시 아시아를 떠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갑니다.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 역시 그 후 손입니다. 영국 셰필드 대학교의 로빈 데넬(Robin Dennell) 교수는 아시 아기원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유럽인 학자입니다.
- 아직은 시나리오입니다. 하지만 드마니시에서 화석이 나온 이상, 아 프리카 바깥에서 호모 에렉투스가 기원했다는 가설은 더 이상 황당 무계한 주장이 아닙니다. 그 중 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가설 역시 무 시하기 어렵습니다. 이 가설이 맞을지, 우리를 포함해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 몸집은 암수 차이가 크지만 송곳니 크기는 그다지 차이가 없는 기간토피테쿠스는 수컷끼리의 경쟁이 격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 습니다. 그렇다면 수컷의 덩치가 커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인은 바로 포식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몸집이 크면 포식자를 물리칠 때 유리합니다. 특히 수컷의 덩치가 커집니다. 포식자는 암수 를 가리지 않는데 수컷만 몸집이 커지는 것은 재생산과 관계가 있습니 다. 유인원을 비롯한 영장류의 경우, 몸집을 키우려면 자라는 기간(성 장기)이 늘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성장기가 길어지면 성적으로 성숙해 지는 시기는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적절한 시기에 임신과 출산을 해야 하는 암컷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지요. 따라서 암컷은 마냥 몸집을 키우지 않아 작고, 수컷만 성장기가 길어져서 몸집이 커집니다. 나중엔 확연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게 되지요. 실제로 영장류를 연 구해 보면 암컷의 성장기와 성적 성숙기가 안정돼 있고, 개체 차이도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수컷은 환경 요인에 따라 성 장기가 변하기 쉽고 몸집 역시 개체별로 차이를 많이 보이지요.
기간토피테쿠스의 성차가 적고 크기도 작은 송곳니는, 무시무시한 천적이 있었음을 알려 줍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도대체 무엇이 기간토피테쿠스로 하여금 큰 체구로 무장을 하게끔 만들었을까요? '킹콩'을 탄생시킨 이 무시무시한 천적은, 놀랍게도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기간토피테쿠스가 중국 남부에 살던 시기는 약 120만 년 전부터 30 만년 전까지입니다. 당시 동아시아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대륙 전체에 퍼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호모 에렉투스는 큰 짐승을 사냥해 먹었습 니다. 저우커우뎬 등 중국 지역의 호모 에렉투스 유적에서는 말뼈가 많이 발견됩니다. 사냥을 한 뒤 발라 먹고 버린 뼈입니다. 아시아에서 말이 멸종한 이유가 바로 호모 에렉투스가 잡아먹어서라는 얘기가 있 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호모 에렉투스가 기간토피테쿠스도 잡아먹었을까 요? 아직까지는 그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기간토피 테쿠스와 호모 에렉투스의 뼈가 함께 발견돼야 하는데, 그런 적조차 없습니다. 베트남에서 호모 에렉투스의 치아와 함께 기간토피테쿠스 의 이빨이 발견됐다는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인류학과의 러스 시어 헌(Russ Ciochon) 교수의 연구 결과가 있긴 했습니다만, 시어헌 교수는 2009년에 호모 에렉투스의 이빨이 아니었다고 입장을 철회했습니다. 그렇다면 호모 에렉투스와 기간토피테쿠스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 이 없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학자들은 둘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기간토피테쿠스의 멸종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나무 지대에서 살던 기간토피테쿠 스는 대나무를 주식으로 하는 판다와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 데 여기에 호모 에렉투스가 끼어들며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호모에 렉투스는 대나무를 먹지 않았는데, 왜 경쟁 구도가 됐을까요? 호모 에 렉투스가 도구를 만드는 데에 대나무를 썼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 니다. 동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나 유럽에 비해 돌로 만 든 도구가 조잡하고, 그 수도 적습니다. 그 이유를 놓고, 일부 학자들은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가 돌 대신 당시 동남아시아에 풍부하게 자라 나던 대나무로 도구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대나무 도 구는 석기에 비해 지금까지 남아 있기 힘들기 때문에 도구가 없는 것 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 주장에 따르면, 호모 에렉투 스는 도구를 만들 목적으로 대나무 숲을 마구 베었고, 기간토피테쿠 스가 살 곳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 그뿐 아닙니다. 굶주림까지 겪었습니다. 기간토피테쿠스는 대나무 숲에 살았지만 대나무를 주식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빨을 보면 여느 유인원처럼 다양한 먹을거리를 고루 먹고 살았죠. 특히 충치 흔 적이 많은 것으로 보아 달콤한 과일을 즐겨 먹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 습니다. 그런데 이빨을 보면 영양실조를 의미하는 에나멜 형성 부전 (enamel hypoplasia)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장기에 영양실조에 걸렸던 흔적입니다. 열대가 아무리 식물 종이 풍성하다고 해도, 킹콩 같은 기간토피테쿠스가 과일 등을 배불리 먹을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 입니다.
- 기간테피테쿠스가 살던 중기 플라이스토세는 점점 건조하고 추워 지는 추세였습니다. 기간토피테쿠스는 점점 춥고 건조해지는 기후, 줄 어드는 서식지 때문에 생존의 위협을 겪었습니다. 게다가 먹을거리까 지 부족해지자 큰 몸집을 계속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 서 역사상 가장 커다란 영장류였던 킹콩은 결국 멸종하고 말았습니다. 기간토피테쿠스의 이야기는 단순히 비운의 종에 대한 것만은 아 닙니다. 인간은 플라이스토세 내내 줄어드는 자원을 놓고 다른 동물 과 경쟁을 했고, 이들을 모두 제치며 세상에서 가장 우세한 종으로 살 아남았습니다. 기간토피테쿠스는 그 중 하나의 예에 불과하겠죠. 
- 뛰어난 두뇌는 큰 머리 크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인류는 유난히 두 뇌 크기가 극적으로 변한 동물에 속합니다. 초기 인류의 화석을 보면, 두뇌 용량은 침팬지와 비슷한 수준인 450시시(cc) 정도밖에 안 됩니 다. 현생 인류의 3분의 1 수준이지요. 이렇게 작았던 두뇌는 약 200만 년 전 900시시로 2배 가까이 증가했고, 약 10만 년 전에는 현생 인류 평균치인 1300시시에 이르렀습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이끌었을까 요? 돌로 만든 도구는 지금부터 250만 년 전에 나타났습니다. 최초의 인류가 나타난 600만 년 전보다 200만~300만 년 더 지난 뒤의 시점입니다. 언어는 화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적어도 두뇌가 커진 다음 에 나타났을 것입니다. 두뇌 크기의 증가는 이렇게, 다른 인류의 고유 한 특징들보다 먼저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무엇보다 '지혜 로운 인간'이라는 뜻의 종명(호모 사피엔스)을 지닌 종이 아닌가요. 인류 가 지혜롭게 환경에 적응하고 도구를 사용하며 문화와 언어를 가지게 된 기원을 뛰어난 두뇌, 그리고 큰 머리에서 찾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 였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류를 진화하게 한 최 초의 원동력까지 뛰어난 두뇌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간을 인간답 게 만든 최초의 특징은 머리와 반대 방향인 다리 쪽에서 나타났습니 다(3장 '최초의 인류는 누구인가?' 참조).
- 과거에 살던 어떤 동물이 두 발로 걸었는지 혹은 네 발로 걸었는지 는 화석으로 남아 있는 뼈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 발로 걷는 동물 은 네 다리로 체중이 분산됩니다. 하지만 두 다리로 걷는 동물은 팔로 는 체중이 분산되지 않아 두 다리에 힘이 몰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체 중을 받은 관절은 크기가 커지기 때문에 쉽게 확인할 수 있지요. 따라 서 두 다리가 몸과 연결되는 엉덩관절(고관절)과 두 팔이 몸과 연결되는 어깨관절의 크기를 보면, 그 종이 생전에 몇 개의 다리를 써서 걸었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초기 인류 화석으로 남아 있는 어깨관절뼈를 확인해 봤습니다. 과연 크기가 작았습니다. 체중을 지탱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반면 엉덩관절과 무릎관절이 커졌습니다. 모양도 변해서, 무릎 관절은 평평하고 튼튼해졌고, 엉덩관절은 움푹 파인 모양이 됐습니다. 웬만해서는 관절이 빠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반면 어깨관절은 그런 변화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어린이의 어깨관절은 빠지기 쉽습니다. 모든 것이 체중이 두 다리로 분산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두 발로 서 있는 것과 다릅니다. 지금 일어나서 한 번 두 발로 걸어 보세요.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 다 막상 땅과 맞닿는 발은 하나뿐입니다. 그 한 발이, 정확하게 말하면 그 발의 엄지발가락이, 온몸의 체중을 모두 받습니다. 두 발로 걷는다 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한 발로 걷는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 발로 서 있는 자세에서 가장 큰 문제는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다 쓰러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걸을 때와 같이 양쪽을 번갈아 가면서 한 발로 체중을 지탱해야 한다면 몸의 중심을 안정적으로 잡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인류는 발가락, 발목, 무릎, 다리, 그리고 골반에서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엉덩뼈(골반)와 허벅다리뼈 (대퇴골) 를 연결하는 근육들을 다른 목적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는 동작에 쓰던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은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기보다는 옆으로 비틀거리는 상체를 안정적으로 잡아 주는 기능 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쪽 다리에 가해진 체중은 마지막에 엄지발가락까지 전해진 뒤에 야 다른 쪽 다리로 옮겨집니다. 체중을 온전히 견뎌야 하기 때문에, 인 간의 엄지발가락은 발가락 중에서 가장 크고 튼튼해졌을 뿐만 아니 라, 다른 발가락과 마찬가지로 몸의 앞쪽을 향하게 됐습니다. 다른 유 인원의 엄지발가락이 인간의 손가락처럼 옆을 향하고 있는 것과 대비 되지요.
- 요통의 기원, 두 발 걷기
하지만 사람이 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두 발로 걷는 일에는 대 가가 필요했는데, 말 그대로 고통이 따랐습니다. 두 발로 걸으려면 몸 통이 항상 곧추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 체중의 상당 부분이 허 리뼈와 골반뼈에 몰리게 됐습니다. 이 무게는 다시 두 다리에 몰리게 됐고, 특히 걸을 때는 한쪽 다리에 한꺼번에 몰리게 됐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허리와 무릎, 엉덩관절은 끊임없이 몸 전체의 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형벌 아닌 형벌을 받게 됐습니다. 네 다리에 체중을 분산할 수 있 는 동물과는 상황이 다르지요. 인간이 유독 허리와 무릎 통증으로 고통 받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여자들의 허리는 남자에 비해 훨씬 더 무거운 짐을 평생 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여자는 일생의 대부분을 임 신을 하거나 젖먹이를 안은 상태로 보내야 했습니다. 어른이 되자마자 쉴 새 없이 임신과 육아를 반복하면서 다섯이나 여섯, 많게는 열두 명 의 아이를 낳았죠. 갱년기를 지나 할머니가 된 다음에는 손주를 안아 줘야 했습니다. 허리와 다리에는 더 큰 무리가 갔습니다.
심장도 피로해졌습니다. 네 발로 걷는 짐승은 심장이 몸 위쪽에 있 습니다. 온몸 구석구석으로 피를 보낼 때 중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손쉽습니다. 예외적으로 목 길이가 2미터에 달하는 기린이 있지만, 대신 머리가 몸에 비해 유별나게 작고 심장은 유별나게 커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 물론 두 발 걷기가 인류에게 고통만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류는 두 발 걷기 덕분에 다른 '인간다움'의 특성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바 로 문화입니다. 두 발 걷기는 손과 팔을 보행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자유 로워진 손과 팔은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윗몸도 함께 보행에서 해방됐습니다. 그 결과 횡격막이 자유로워졌 습니다. 숨쉬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됐고,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낼
수 있게 됐습니다. 목소리는 언어를 탄생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구 와 언어라는, 인류 문화와 문명의 토대가 완성되었습니다.
- 두뇌가 커진 것도 역시 걷기 덕분입니다.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려 면 뛰어난 지능이 필요합니다. 언어를 사용할 만큼 복잡한 사회생활 을 하려고 해도 지능이 필요하고, 이는 곧 큰 두뇌를 의미합니다. 하지 만 두뇌는 그냥 커질 수 없습니다. 두뇌는 지방으로 이뤄진 기관입니 다. 고지방, 고단백의 식생활이 필수입니다. 이런 식생활은 도구를 이 용해 고기를 정기적으로 확보하고 섭취한 이후에야 가능했습니다. 
-  그런데 육식으로 에너지를 확보한다고 해서 머리가 바로 커질 수는 없습니다.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거든요. 우선 한정된 에너지 를 놓고 머리와 경쟁하는 다른 장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소화기 관입니다. 둘 다 커질 수는 없으니, 머리가 커지려면 소화 기관으로 가 는 에너지가 줄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국 런던 대학교 인류학과 레슬리 아이엘로(Leslie Aiello) 교수와 피터 휠러 (Peter Wheeler) 교수가 1995년 발표한 '비싼 조직 가설(expensive tissue hypothesis)'입니다. 실제 로 다양한 동물들을 비교해 보니, 과연 두뇌 크기와 소화 기관 크기는 반비례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두뇌 크기에 맞춰서 머리뼈도 자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머리뼈가 크려면 머리뼈에 연결되어 있는 근육이 먼저 작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머리뼈가 자랄 공간이 생기니까요. 머리뼈와 연 결된 근육 중 가장 큰 근육은 씹는 근육(저작근육)입니다. 이 말은, 두뇌 가 커지려면 씹는 근육이 작아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흥미롭게도, 실 제로 씹는 근육에 돌연변이를 유도해서 크기를 작게 만들었더니, 동 물의 머리뼈가 지나치게 커졌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두 가지 문제를 인류 진화와 연관 지어 보겠습니다. 200만 년 전, 아 프리카에는 자연에 서로 다르게 적응한 세종의 친척 인류가 있었습니다. 바로 초식인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와, 동물들이 먹고 남은 사체찌꺼기를 먹은 호모 하빌리스, 그리고 사냥을 한 호모 에렉투스입니 다. 이 중 초식인 보이세이는 두뇌가 작은 대신(500시시) 이빨이 어마어 마하게 컸습니다. 씹는 근육도 발달해 턱뼈와 광대뼈도 엄청나게 컸습 니다. 반면 육식을 주로 한 호모 에렉투스는 상대적으로 큰 두뇌 (1000 시시)를 가진 대신, 이빨이 작고 씹는 근육 역시 작았습니다. 식습관과 두뇌 크기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유지비가 많이 드는 두뇌를 위해, 인류는 다시 동물성 단백질과 지 방을 끊임없이 확보하고 섭취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사냥과 채집 을 해야 했죠. 움직이는 동물에 대한 정보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를 기억하고 종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류의 '무기'가 나타납니다. 바로 사회적 협동입니다. 속해 있는 집단의 크기가 커지면서, 집단의 구성원에 대한 정보와 그들 사이의 관계 에 대한 정보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인류의 큰 두뇌는 이런 다채로운 정보를 저장해 두고 상황에 따라 응용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인류가 큰 두뇌를 지니고 있는 진짜 이유입 니다. 두뇌 속의 뇌세포를 동시에 100퍼센트 쓰지 않더라도 많은 뇌세 포를 지니는 것, 큰 두뇌를 지니는 것이 유리합니다.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축적해 둬서, 유사시 빠르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동안 네안데르탈인이 말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FOXP2 유전자가 인류와는 다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들은 당 연히 게놈(유전체) 해독 결과가 나오자 FOXP2 유전자를 찾아봤지요. 연구 결과는 학자들을 한 번 더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네안데르탈인 의 FOXP2 유전자는 현생 인류와 똑같았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정 말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말을 했던 것일까요?
유전자만으로는 언어 사용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고 생각한 학자들은 다른 연구에 돌입했습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현 생 인류 두뇌의 핵심적인 특징은 대뇌가 좌우 비대칭이라는 점입니다. 대뇌 곳곳이 언어에 관여합니다만, 특히 중요한 부위는 좌뇌와 관련이 많습니다. 그런데 뇌가 좌우 비대칭이라면, 반드시 몸의 좌우 어느 한쪽을 더 자주 쓰게끔 만듭니다. 그래서 오른손잡이나 왼손잡이처럼 한손잡이가 생깁니다.
따라서 만약 네안데르탈인이 한손잡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면, 뇌가 언어를 쓸 수 있는 비대칭 구조였는지를 역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 캔자스 대학교 인류학과의 데이비드 프레이어(David Frayer)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기발한 방법으로 이 아이디어를 실제 로 연구에 도입했습니다. 연구팀은 네안데르탈인 화석의 이빨에 주목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이빨을 도구로 이용하기로 유명합니다. 치열을 보면 닳은 면이 울퉁불퉁 이상하게 나 있거든요. 그냥 음식물을 먹는 데에만 썼다면 위아래 이가 서로 부딪혀 닳았을 테니 닳은 면이 고르게 나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지요. 먹는 일뿐만 아니라, 뭔가 다른 일을 할 때에도 썼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고기나 질긴 식물 등을 자 를 때엔 한쪽을 이로 꽉 깨물고 손으로 고기나 식물의 다른 쪽을 쥡니 다. 그런 뒤에 다른 손으로 석기를 쥐고 내리 그어서 자르는 식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고기를 자르다가 석기의 방향이 조금 틀어지면 어 떨까요? 바로 옆에 있던 이빨의 표면을 긁게 되고, 이빨에 그 긁힌 흔 적이 남을 것입니다. 그 흔적의 각도를 보면 석기를 오른손으로 내리 그었는지 왼손으로 내리 그었는지 알 수 있겠지요. 기발한 연구 방법 이지요? 실제로 이 방법으로 자료를 연구한 결과, 네안데르탈인은 9 대 1로 오른손잡이가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비율은 현생 인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비율과 비슷합니다. 
- 결과를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8만~7만 년 전, 데니소바 지역에는 데니소바인들이 살았습니다. 이어 4만 5000년 전에 이 지역에 네안데 르탈인이 진출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도구를 남기고, 적지만 인골 화석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4만 년 전에 모두 떠났고(사라졌고, 그 자리를 현생 인류가 채웠습니다. 이렇게 알타이 지역은 짧은 시간 동안 세 종의 인류가 번갈아가면서 차지했습니다.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서로 만나 자손을 남겼을까요? 현생 인류의 DNA에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DNA가 포함돼 있는 것처럼, 데니소바인의 DNA에도 네안데르탈인의 DNA가 17퍼 센트 포함돼 있습니다. 세종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복잡한 관련을 맺 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 인류의 이런 엄청난 다양성을 보고 나면, 현생 인류가 언젠가 한순 간에, 하나의 지역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아프리카 기원론(완전대체론, 단 일 지역 기원론)'이 과연 옳은가 되묻게 됩니다. 하나의 기원에서 시작됐다 고 보기에는 너무나 다른, 다양한 인류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입장에 서 있습니다. 현생 인류가 한곳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홀로 세계로 진출한 게 아니라 각 지역에 존재하던 여러 인류와 만나 교류하며 동시 다발적으로 진화했을 것이라고 봅니 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볼 수 있는 광범위한 지역적 다양성의 비결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모두 현생 인류의 한 식구인 것은 물론이 고요. 이런 생각은 현생 인류가 어느 한 시점에 홀로 아프리카에서 태 어난 게 아니라 여러 지점, 여러 시점에서 다발적으로 태어났다는 생 각으로 이어집니다. 바로 아프리카 기원론의 맞수인 '다지역 연계론 (다지역 진화론)'입니다.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가 서로 교류하며 유전 자 이동(gene flow)을 통해 계속 하나의 종으로 진화해 왔다는 다지역 진화론은 최근의 유전학 연구 결과와도 부합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멀고 가까운 여러 친척 인류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 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자신이 속한 종의 시작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인류의 진화에 관한 여러 문제 중 가장 흥미진진하고 가장 어려운 문제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 학문과 정치
아프리카 기원론과 다지역 연계론이 한창 뜨겁게 학계를 달구고 있던 1990년대에는 급기야 개인적인 감정까지 개입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양 진영의 학 자들이 서로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은근히 공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프리 카기원론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최근에 기원하였다 는 점을 들어 우리 눈에 보이는 다양성이 모두 최근에 생겼으며, 우리는 모두 진 하게 피를 나눈 형제자매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더불어 다지역 연계론은 인류가 서로 다른 인종으로 나뉜 지 오래되었다는 주장이기 때문에 인종학적 인 주장과 별다를 것이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다지역 연계론에 동조하는 학자 들은 인류가 서로 다른 인종으로 나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유전자 교환으로 같은 종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동포였다고 주장했습 니다. 더불어 현생 인류가 최근에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여 전 세계로 퍼지면서 기존의 인류 집단과 피를 하나도 섞지 않고 모두 죽이거나 몰아내어 멸종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이야말로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 차별적 편견과 식민주의적인 공포를 반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이 모두 정식 논문으로 발표되기보다는 세미나 장소 혹은 사석에서 오간 논쟁입니다. 서로의 경쟁 학설에 대해 논리와 자료를 벗어나 정치적인 파장이 있는 주장까지 불사하게 된 것은, 결국 당 시의 뜨거웠던 학계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고 논리를 근간으로 삼도록 훈련 받은 학자들도 일개 인간일 뿐임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 인류는 탄생한 뒤 가장 오랜 시간을 적도 부근의 동아프리카에서 보냈습니다. 적도 부근이므로 자외선이 강했고, 자외선을 막는 멜라 닌 색소를 많이 만들어 내는 돌연변이가 환경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원래 피부색이 검었습니다. 일부 인류는 이후 아프리카 를 떠나 전 세계로 퍼지면서 햇빛이 약한 중위도 지역에서까지 살게 됐습니다. 이때는 빙하기가 본격적으로 기세를 떨치던 때로, 구름이 많이 끼어 햇빛은 더 약해졌습니다. 멜라닌 색소가 많은 피부는 자외 선을 막아 오히려 불리해졌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 자외선은 비타민 D를 합성하는 데 필수니까요. 비타민 D 합성이 안 되면 인체는 칼슘 을 흡수할 수 없게 되어서 뼈에 이상이 생기고, 생존에는 물론 자손을 낳을 때(번식)에도 큰 위험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중위도에 살던 사람들은 멜라닌 색소가 없는 돌연변이를 지니게 됐고, 피부가 하얘졌습니 다. '비타민D 가설입니다. 이 가설이 맞다면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북위권으로 진출한 200만 년 전부터 흰 피부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흰 피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화석으로 밝힐 수 없습니다. 피부는 오래된 화석에서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그 해답은 유전자를 통해 알 려졌습니다.
피부색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1999년에야 처음 발견돼 현재까지 10 개 이상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륙마다 분포가 다릅니 다. 피부색이 대략 비슷한 정도로 검거나 희다고 해도 그 유전적인 조 합은 다른 것이죠. 유럽인의 흰 피부는 아시아인의 흰 피부와 다른 색 깔을 띱니다. 그런데 유럽인의 흰 피부는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북쪽으로 퍼지고 나서 한참 뒤인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비로소 처음 나타났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인류가 북쪽으로 진출한 직후는 지 금으로부터 200만 년 전인데, 그보다 훨씬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비타 민D 가설이 간단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학자들은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중위도 지방에 산 이 후에도 인류는 사냥 등으로 고기와 생선을 풍부하게 먹었습니다. 이런 음식에는 비타민 D가 풍부했고, 따라서 굳이 피부로 합성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피부에 있던 멜라닌 색소를 없앨 필요도 없었기 때 문에, 흰 피부도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농경이 시작된 1 만년 전부터 이런 생활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고기와 생선 대신 곡 물을 주로 섭취하게 되면서 비타민 D를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는 상황 이 됐습니다. 그 결과, 결국 부족한 비타민을 합성하기 위해 피부로 햇빛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택하게 됐습니다. 이제 자외선을 통과시켜 비 타민 D를 만들 수 있는 흰 피부가 검은 피부보다 유리해졌고, 이 사람 들의 피부는 하얘졌다는 것입니다. 농경이라는 문화적 요인이 흰 피부 의 선택을 초래한 셈입니다. 문화가 진화를 대체한 게 아니라, 반대로 진화를 촉진했습니다.
사실 이런 주장은 1970년대부터 뼈의 형질을 연구한 학자들을 중 심으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미국 캔자스 대학교의 데이비드 프레이 어 교수는 유럽 후기 구석기 시대와 중석기 시대 인골을 연구한 결과 그 변화 속도가 이전보다 훨씬 빠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지 만 당시에는 문명과 문화의 발달로 오히려 진화가 느려진다는 생각이 주류였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제는 이런 예가 풍부하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이런 진화 사례를 주제 로 한 『1만 년의 폭발(The 10,000 Year Explosion)』이라는 책이 출판됐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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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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