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은 분명히 유전의 영향을 받음. 부모 중 한 명이 불안장애가 있으면 같은 장애를 갖게 될 확률은 4-6배까지 증가. 하지만 심리유전학은 가장 영리한 과학자들도 미치게 하는 루빅큐브 같은 수수께끼다.
첫째, 헌팅턴병이나 겸상적혈구빈혈증과 달리 불안은 단 하나의 유전자로 조절되지 않기 때문. 불안이 몇 가지 유전자의 치명적 영향의 결과인지, 수많은 유전자의 소소한 영향의 결과인지도 분명치 않음. 표현형 복잡성이라는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불안은 머리가 여러개 달린 신화 속 히드라와 같다는 뜻. 사회불안장애는 당연히 불안으로 분류되지만 강박장애, 공황발작, 심지어 거미공포증 같은 다양한 징후도 불안으로 분류됨. 같은 유전학적 씨앗에서 어떻게 그처럼 다양한 꽃이 피어나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둘째, 불안은 객관화 불가능함. 적어도 아직은 실험실에서 불안을 측정할 수는 없다. 피를 현미경으로 관찰한다고 불안이 보이는 것도 아님. 지금까지도 불안은 전적으로 자기 보고에 의존. 인간의 유전자가 수천 년 동안 불안을 발현시키고 있다고 해도 사회불안장애는 66년이 되어서야 문학작품에 처음 묘사되었고, 80년이 되어서야 장애증상의 하나로 규정됨. 그러니 지금껏 인간이 내려온 진단이, 고대로부터 전해온 유전자지도를 제대로 파악해 이뤄진 것인지도 의심스러움.
마지막, 커피와 크림처럼 절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유전과 경험의 관계다. 타고난 기질이 일상생활의 선택을 좌우하지만 집에서 책 읽는 편을 선호하는 것은 유전자가 그렇게 배열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습관이 되어 편하기 때문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불안이 유전의 영향을 받는다는 명제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지만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 누구나 배가 아프고 볼이 빨개지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굴욕의 순간이 있다. 그 일회성 충격을 계속 불타오르는 사회불안장애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회피다. 간단히 말하자면 회피는 더 좋은 기분을 위해 불안의 원인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 여기서 문제는 회피가 분명 당사자의 기분을 회복시킨다는 점이다. 적어도 잠깐은 그렇다. 회피는 잠시나마 불안이 사라지게 만든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회피는 재앙이다. 회피는 감정적 안녕의 주적이며 사회불안장애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불안을 고착시킴
- 약간의 사회불안은 두가지를 통해 공동체를 유지했음.
첫째, 사회불안은 집단의 조화에 기여. 우리는 자신에 대한 타인의 판단을 의식하도록 진화. 적당한 사회불안은 사회적 유대감을 유지시켜 갈등을 줄임. 따라서 내적 분쟁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일 없는 응집력 있는 집단이 내적 갈등을 겪는 집단보다 더 잘 적응하고 오래 간다. 끈끈한 공동체는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므로 공동체의 조화는 진화에 유리했음. 그러므로 타인과의 긴장을 통한 조화는 문제아 한 사람이 집단 전체의 조화를 깨트리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더 영리한 진화전략이었다.
둘째, 사회불안은 개인의 안전을 보장. 위에 언급한 문제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추방, 유배, 배척이다. 힘들게 이룬 집단의 조화를 위협하는 이들에 대한 차단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도 존재했음. 심지어 인류가 아닌 다른 종도 마찬가지였다.
- 내향적인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에 기운을 회복하지만 외향적인 사람은 그럴 때 오히려 기운이 빠진다. 실제로 외향적인 사람은 너무 오래 혼자 있으며 달팽이처럼 모든 에너지와 의욕을 잃는다. 불안해하는 외향적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힘들 수밖에 없다. 힘없이 외로워하거나 두렵고 어색하거나, 둘중 하나다. 불안해하는 외향적인 사람은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힘들다고 느낄수도 있겠지만, 외향성과 불안을 혼동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내향성과 사회불안은 경계가 모호함. 흔히 사회적으로 불안해하는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하듯이 두 용어는 종종 혼용됨. 심지어 사회불안이 내향성으 극단적 형태로 여겨지기도 함. 하지만 행동억제라는 뿌리가 내향성과 사회불안이라는 두가지 싹을 틔우고, 그 두가지가 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둘의 의미는 몹시 다름. 내향성과 사회불안은 빨간 사과와 초록사과의 차이 정도가 아니라 사과와 오렌지의 차이다.
- 불안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할 성격들. 그렇다면 존중해야 할 내향성과 이겨내야 할 사회불안의 차이는 무엇일까?
(1) 사회불안은 키워지는 반면 내향성은 타고난다.
(2) 내향성일 경우 혼자 있을 때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사회불안은 혼자 있을 때 단지 덜 불안해 지는 것 뿐이다. 불안을 덜 느낄 때 기분이 좋아지므로 아주 미묘한 차이일 수 있다. 그러니 더 자세히 살펴야 한다. 내향적인 사람은 혼자 있거나 일대일 만남일 때, 혹은 믿을 수 있는 소수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에너지를 얻음. 내향적인 사람에게 고독은 기분전환이자 배터리 충전이다. 반대로 불안해하는 경우, 혼자 있을 때 불안이 감소해 기분이 좋아질지 모르지만 이는 만족이라기보다 안도에 가까움
(3) 사회불안은 완벽주의를 먹고 자람. 완벽주의는 사회생활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서로 다른 회색을 용납하지 못하고 반드시 흰색과 검은색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4) 내향성이 삶의 방식인 사람에게 사회불안은 그 삶을 방해하는 요소임.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부작용이 있다면,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회피의 핑계로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회피의 핑계로 사용하기 시작하는 순간 내향성은 더 이상 특성이 될 수 없다.
- 니릇 비르마우머 연구팀은 사이코패스 범죄자들과 사회불안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뇌를 관찰. 관찰결과 사회불안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전두변연회로는 지나치게 활성화되어 있었고 정반대로 사이코패스들의 전두변연회로는 거의 활동이 없었다. 즉 사이코패스와 사회불안장애는 정반대의 뉴런활동이라는 의미. 불안해하는 뇌에서 전두변연회로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다시 말해 위협이 없어도 알람이 울린다면 어떨까? 아니면 상황이 반대인 경우, 그러니까 연기가 나고 있어도 알람이 울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이코패스의 집은 이미 타버리고 없을 것임. 이것 역시 우리가 원하는 바는 아니다. 그렇다면 성격을 완전히 뒤집는 것 말고 우리 뇌에 필요한 것은 무얼까? 다행히 급격한 변화는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소한 시도들이다. 뇌와 행동은 쌍방향 상태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뇌가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만 행동도 뇌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변화를 시도해보자. 닻의 역할은 밑바닥까지 가라앉는 것이다. 뇌의 역량 끝까지 조심스럽게 다가가 한계를 실험해보자. 튼튼한 신체를 타고나지 못한 사람도 건강해질 수 있듯이 사회불안을 타고난 우리도 더 편해질 수 있다.
- 부모가 자기 자식을 이 세상을 호령할 특별한 아이라고 생각하듯, 우리 내면의 비판자도 우리가 특별하기를 기대함. 최고의 모습만 보이길 바람. 더 잘하길 바라고, 완벽하길 바라고, 그래서 당당히 나서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그럴 능력이 없다고 주입시킴. 우리는 특별한 노력 없이도 날 때부터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아테나 여신처럼 완벽해야 한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의도는 좋지만, 내면의 비판자는 안전은커녕 우리를 불안에 몸부림치게 만든다.
-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드러남, 즉 들키는 것. 궁극적으로 사회불안은 우리가 숨기려고 하는 그 무엇이 만천하에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대머리를 가리는 부분가발이 세참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결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를 숨기려고 함. 여기서 생각이라는 단어에 크게 별표를 쳐야 한다. 왜?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결점이 진짜라고 느껴진다 해도, 그 결점은 사실도 아니며 사실이라 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정도이기 때문.
- 내면의 비판자가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과거의 어두운 사건을 끄집어내는 것은 예기불안이고, 이것이 이후에 벌어지면 사후처리다. 어느 쪽이든 모두 잘못된 일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내면의 비판자는 우리를 돋보기로 본다. 그 돋보기는 확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까지 함. 중립적 상황도 부정적으로 해석하게 만듬. 사회불안이 잔인한 이유중 하나는 아무리 미리 걱정하고 자기비판을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발목만 잡힌다는 것. 우리 내면의 비판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
- 가끔 운이 좋으면 구체적으로 명시하기만 해도 곧바로 불안이 사라지기도 함. 두려움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됨. '창피한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를 '직원회의에서 아기처럼 말을 더듬을지도 몰라'로 만들어놓으면 불안은 뽀족구두를 신은 바비인형 발처럼 현실적인 문제가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구체적으로 명시하기는 그저 첫번째 단계일 뿐이다. 내면의 비판자가 그리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면 이제 반격을 시작할 차례다
- 질문들이 꼬리를 무는, 즉 실제로 상황이 얼마나 나빠질까?와 그럴 가능성은 얼마일까?로 넘어오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당신의 불안을 상당히 덜어줌. 집요한 심문이 불안을 절감시킨다는 점을 보여줌
- 내면의 비판자가 불안의 시동을 걸 대 가장 먼저 이렇게 물어라.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무엇인가?" 최대한 정확하게 대답하라.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자
* 실제로 상황이 얼마나 나빠질까?
* 그럴 가능성은 얼마일까?
*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마음챙김 방법을 사용하면 불안한 생각에 빨려드는 대신 그저 바라볼 수 있다. 최근에 가장 부끄러웠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그때 완전히 일을 망쳐버렸지.', 그때만큼의 부끄러움이나 죄책감, 수치심이 다시 떠오를지도 모름. 바로 그때 이렇게 생각한다. '완전히 일을 망쳐버렸다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미묘한 차이지만 다르다. 두번재 생각에는 거리와 자각이 있다.
- 극장에서 옆 사람이 재채기를 한 순간처럼, 실제인 듯 영화에 빨려 들어가 있다가 그저 영황를 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영화가 현실이 아니듯, 우리 생각도 현실이 아니다. 놀랍지 않은가? 동시에 자유롭다. 감정은 사실이 아니다. 생각도 진실이 아니다. 그저 지나갈 뿐이다. 내면의 비판자가 불안해하며 실패만 떠올린다 해도 그 생각에 계속 사로잡혀 있을 필요가 없음. 내면의 비판자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그저 바라보면 된다. 받아들일 필요는 더욱 없다.
- 자신감보다 행동이 먼저다. 이룰 때까지 이룬 척하라. 진심으로 순수하게.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드는 행동부터 시작하라. 용기라고 할 수도 있다. 용기는 두렵지 않아서 내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은 용기의 전제조건이다. 진정한 용기는 두렵지만 그래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변화를 느낀다. 사회불안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잠시 일어나는 해프닝이다. 불안할 때 '절대 그러면 안돼'라고 생각하기보다 '음, 또 시작이군'이라고 넘겨보낼 수 있다. 사회불안은 우리를 제자리에 묶어 놓는 족쇄가 아님. 그 족쇄를 들고 걸어라. 자신감을 느끼기 전에 행동하라. 사람들이 많은 방으로 들어가든, 더 많은 사람과 눈을 맞추든, 마음을 조금 풀어놓든,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떨쳐 일어나 행동하면 자신감이 따라붙는다.
- 내 삶은 끔찍한 불행이 난무했지만, 그 불행의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몽테뉴)
- 모든 감정에는 실체가 있다. 슬픔은 무겁고 느리며, 분노는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고 이빨을 드러내게 만듬. 혐오를 느끼면 역겨움으로 몸서리가 쳐진다. 그렇다면 불안은? 수천년의 진화과정을 통해 다듬어진 결과, 신체의 모든 부위가 폐에 산소를 공급하고 근육에 혈액을 보내기 위해 힘을 합친다. 설전을 벌일 준비, 급히 몸을 돌려 달아날 준비슬 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불안으로 인한 생리현상이다. 혈관이 확장되니 얼굴이 빨개지고, 체온이 높아져 땀이 나며, 근육이 산소와 수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숨이 가빠지고 입이 마른다. 혈액이 갑자기 근육으로 몰려 손발은 차가워진다. 손과 입술이 떨리는 것은? 온몸을 도는 아드레날린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엔진처럼 우리를 떨게 만든다. 근육은 용수철처럼 꼬여 피곤해짐. 마지막으로 소화기관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 몸안의 모든 내용물을 내보내려 한다. 다 버리고 가벼워져 빨리 달아나거나 민첩하게 싸울 수 있도록 말이다. 전부 썩 유쾌한 증상은 아님. 장기적 불안은 어깨와 등, 배의 근육을 뭉쳐 우리를 피로하게 만듬. 게다가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면 생각하는 것도 쉽지 않음. 집중하기도 어렵고 다음에 할 말을 생각하기도,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기억하기도 어려움
- 자기 신체에 대한 그와 같은 인식을 내부감각 수용인식이라고 함. 내부감각 수용인식은 불안해하는 경향이 큰 사람에게 더 민감하게 나타남. 실제로 신체의 감각에 민감한 사람들은 얼굴이 붉어지고 땀이 나고 손이 떨리고 더듬기 시작하는 자기 모습을 확인하고 그때부터 그 불안증상에 대해 불안해하기 시작함. 우리 몸이 느끼는 대로 보일 것이라는 오해를 만들어내면, 우리 뇌는 그 불꽃에 부채질을 한다. 이 현상은 다 보일 것 같다는 환상 때문에 발생. 우리는 내면의 상태가 외면으로 고스란이 드러날 거라고 생각함. 평소에 불안하지 않을 때 우리는 보통 타인과 경험을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많은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듣는다. 하지만 불안이 고조된 상황에서 자기 몸과 뇌의 작용은 사실 타인이 알 수 없다. 그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우리는 두려워지고 심장이 뛰고, 불안한 생각이 터져나올 때 모든 사람들이 마치 해파리처럼 우리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함. 하지만 옆에서 일깨워주면 자신이 해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다 보일 것 같은 환상'이라는 개념이 있다고 알려만 줘도 참가자들은 척추를 똑바로 세우고 허리를 편채 더 나은 발언을 했다. 그리고 그 환기는 그저 참가자들의 기분만 좋게 만든 것이 아니라 실제 발언능력도 높여주었다.
- 완벽주의는 소셜 미디어의 또 다른 현상에도 기생하고 있는데, 이는 너무 만연해 13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되기도 했음. 바로 나만 제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FOMO*fear of missing out)다. 포모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다. 얼핏보면 완벽주의와 관계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모의 결과로 우리는 자신이 부족하고 거부당했으며 심지어 문제가 있다고 느낌. 그 흑백논리의 결과가 바로 완벽주의의 핵심이다.
- 완벽주의는 그 높은 기준이 삶을 방해할 때만 문제. 높은 기준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면, 조쉬처럼 자기 레스토랑에 대한 기대치가 높고 그래서 잘 되고 있다면, 그건 괜찮다. 이는 긍정적 성취라고 하는 해롭지 않은 완벽주의다. 완벽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해 실패자라고 느끼는 경우와 달리 긍정적 성취는 높지만 도달 가능한 기준에서 출발한다. 더불어 그 기준에 도달했을 때 만족감과 행복을 느낀다.
- 창피해지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진화과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창피함은 진화과정에서 비언어적 사과와 유화의 몸짓으로 여겨져 왔다. 심지어 신뢰를 구축하기도 했다. 더 어색해하는 사람들이 더 멋지고 믿을만하며 관대하다. 기억하라. 사회물안은 늘 장점들과 한쌍이다.
- 자연스러워 보이려는 노력만큼 자연스러움을 방해하는 것은 없다. (라 로슈푸코 공장 프랑수아 6세, 잠언과 성찰, 1665)
- 사회불안은 사회부적응과 다름. 사회불안은 내면의 비판자가 만들어낸 왜곡인 반면 사회부적응은 교정이 가능하지만 사회성이 부족한 것이다. 믿을만한 가족과 친구와 함께 있을 때 두렵지 않고 움츠러들지 않는다면 사회성은 전적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사회부적응은 사회적 능력과 사회적 기대가 실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왜곡이 아니라는 의미.
- 지난 한 해 동안 미국인 열명 중 일곱이 술을 마셨다. 철학자 호머 심슨의 말대로 알콜은 사ㅗ히불안 문제의 해결방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원인일수도 있음. 두가지가 동시에 가능하다고? 우선 알콜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다. 연구에 따르면 한 잔을 마실 때마다 사회불안이 4% 감소. 마음이 마법처럼 편해지는 쉬운 방법이다. 와인 두 잔을 마시면 바보같은 느낌이 8%나 감소한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는 전혀 다름. 첫재, 음주가 사회불안을 일시적으로는 완화시켜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사회불안에 대한 반응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사회불안과 음주문제를 동시에 겪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불안이 거의 늘 먼저 생긴 문제였다. 둘째, 사회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은 부정적 감정을 없애기 위해 혼자 술을 마실 가능성이 더 높다. 마지막으로, 주차장에서 미리 술을 마시고 들어가던 사람처럼 알콜과 자신감을 연관지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보드카의 약속을 믿는다. 나만 있으면 어디서 무슨 말을 하든 문제없는 사람이 될 거야! 어떤 방식으로 불안을 줄이든 사회불안장애는 알콜 관련 장애를 초래할 가능성이 4배 이상 높다.
- 우리는 왜 술에서 희망을 찾는 걸까? 앞서 말한 기대치와 능력의 차이를 기억해야 함. 사회적 기대는 하늘처럼 높지만 우리는 그 기준을 충족시키기에는 절망적으로 부족하고 서투르고 어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 여기에 사회불안의 마지막 강박이 도사리고 있따. 마음이 편해지려면 술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당연히 술은 우리의 기를 펴주지만 사회성을 발휘할 능력 또한 앗아감. 우리는 사회성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너무 움츠러든 나머지 이를 사용하지도 못함. 술은 덤보의 마법 깃털이다. 깃털을 없애버리면 우리는 날 수 없다고만 생각한다.
- 대화의 궁극적 목적은 친밀함이다. 친밀함이라는 단어가 서양 문화권에서는 성적인 뉘앙스를 풍기기도하지만 반드시 그래야할 필요는 없다. 친밀함은 마음 깊은 곳이라는 뜻의 라틴어가 그 어원이다. 생각과 행동, 감정 등 마음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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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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