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담이 받은 성경 속 처벌을 재현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즉, 우리는 이마에 맺힌 땀을 통해서만 살아남도록 선고받았다. 힘 들고 어려운 일은 지위와 돈을 얻기 위한 티켓이다. 지루한 운동과 맛없는 식사는 단단한 복근과 활기찬 노년을 위해 견뎌야 하는 것 이다. 자유주의자들의 구호를 빌리자면 '공짜 점심' 같은 것은 없다. 고난은 더 큰 쾌락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다.
- 정리하자면 행복한 사람은 건강하고, 재정적으로 넉넉하고, 많은 쾌락을 누리며 사는 경향이 있다. 삶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야심 찬 목표를 세운다. 그들의 삶은 더 많은 불안과 걱정에 시달린다. 해당 논문의 공저자인 캐슬린 보스Kathleen Vohs는 이렇게 쓴다. “이 결과는 행복의 핵심이 좋은 기분 을 느끼는 것, 나쁜 기분을 피하는 것, 욕구와 필요를 충족하는 것임 을 드러냈다. 반면 삶의 의미는 타인이나 결과에 대한 우려를 반영하는 행동과 감정으로 예측되며, 이는 걱정과 스트레스로 드러난다."
- 왜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라틴어나 그리스어, 심지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울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지식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신호 보내기 이론가들은 이 문제에서는 오히려 비중요성이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자녀가 가시적 효용성이 없는 과목에 귀중한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은 당신이 물질적 필요로부터 자유로움을 세상에 알린다. 가난한 아이들은 유용한 과목을 배워야 하기에 시간을 손해볼 수 없다. 왜 너무나 많은 남학생회, 엘리트 부대, 폭력 조직은 신고식을 치를까? 신고식은 해당 집단에 대한 관심을 알리는 값비싼 신호이기 때문이다. 엄지를 올리면서 5달러의 입회비만 내면 되는 경우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열성적 인 사람과 게으른 사람을 구분할 수 없다. 반면 수치스럽거나, 고통 스럽거나, 혐오스러운 일을 견뎌내는 것은 값비싼 신호로서 아주 좋다. 헌신적인 사람만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 의 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이나 어린 아들에게 포경수술을 행하 는(특히 마취제가 발명되기 전에) 남자가 보여주는 헌신성은 어느 정도일까? 아주 강하다.
- 일부 심리학자들은 호러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정말로 무서워하는 게 아니며, 비극을 즐기는 사람들이 정말로 슬픈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부정적 감정이 미래의 쾌락을 위해 기꺼이 지불하는 비용이라고 생각한다. 즉, 좋은 부분까지 이르기 위해 참아야 하는 부분이라는 뜻이다. 반면 흄은 이런 경험에 따른 쾌락은 불안이나 슬픔 등에 대한 경험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흄에게 부정적 감정은 버그가 아니라 기능이다.
- 한 가지 대답은 놀이나 게임으로 볼 때 노력이 즐거워진다는 것이다(생산성이 뛰어난 사람은 인터뷰에서 성공 비결에 대해 “그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게임이 아닌 것을 게임으로 제시하는 '게임화gamification’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다만 이 내용은 앞선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질문을 재구성할 뿐이다. 즉, 어떤 유형의 노력이 즐거운지 묻지 않고 어떤 유형의 노력을 게임으로 보는지 묻고 있다. 그래도 이 재구성은 유용하다. 사람들이 좋은 게임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주 제시되는 속성은 다음과 같다.
1. 획득 가능한 목표: 철학자들이 말하는 '아텔릭 atellic' 활동, 즉 끝이 없기 때문에 절대 완료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데서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텔로스 Teles'는 목적을 뜻하고, '아텔릭 atelic'은 목적이 없음을 뜻한다.) 정처 없이 무작정 걷거나 친구들과 빈둥대는 시간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일반적으로 아텔릭 과제에 오래 노력을 기울이기는 힘들다. 특히 어렵거나 꺼려지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스 신화에서 시시포스 Sisyphus는 거대한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렸다가 바위가 굴러떨어지면 다시 밀어 올리는 일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 이것이 너무나 끔찍한 운명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목표가 없어서 절대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 목표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화장실 청소처럼 누구도 재미로 하지 않는 수많은 힘든 일에는 가시적 목표가 있다. 30분 동안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은 불쾌하다. 하지만 아무리 솔로 문질러도 계속 더러운 시시포스 식 화장실을 청소하면서 30분을 보내는 일이 더 기분 나쁘지 않을까?
2. 하위 목표: 낱말 퍼즐을 푸는 즐거움 중 일부는 조금씩 작은 목표를 달성
하면서 완성에 가까워지는 진전의 느낌이다. 이렇게 점수, 화폐, 진척도 막대를 활용하여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것은 상당수 게임화의 핵심이다. 이런 지표들은 강화 효과를 안기는 작은 자극을 가한다. 나는 달리기를 할 때 GPS 시계를 활용한다. 이 방법은 달리기를 일종의 게임으로 만든다. 나는 여러 번의 달리기에 걸쳐 속도와 시간을 비교하면서 진전을 이루려고 애쓴다. 그뿐만 아니라 달리기 전반에 걸쳐 하위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좋아, 1분 동안 X까지 속도를 올렸다가 그 보상으로 이후 1분 동안 Y까지 속도를 늦출거야'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시간이 더 빨리 가고 경험이 더 즐거워진다. 이 점은 우리를 즐거운 활동이라는 개념에 더 가까이 데려간다.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도달한 것이 아니다. 가구를 옮기는 일은 하위 목표로 가득하다. (100개의 가구를 트럭까지 옮기는 일에는 100개의 하위 목표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즐겁지 않다.
3. 숙련 올바른 게임은 최적 수준의 난이도를 설정한다. 테트리스〉와 〈앵그 리버드 같은 단순한 게임을 비롯한 많은 게임들은 처음에는 쉽다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그래서 딱 적당한 정도로 고생하는 지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어떤 일을 잘하게 되는 것, 이전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게 되는 것은 즐거움을 안긴다. 이 점은 재미있는 활동과 화장실 청소 및 가구 옮기기 같은 활동을 구분한다.
4. 사회적 접촉, 동지 의식, 경쟁: 이 요소들은 모두 필수적이지는 않다. 뛰어난 게임 중 다수는 1인용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또는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게임하는 것은 많은 요소를 더한다.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은 팀 단위 경쟁으로 진행된다. 이는 게임화의 한 측면이다. 즉, 일을 게임으로 바꿀 때 사람들에게 아바타가 주어지고, 다른 사람의 아바타를 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또한 사람들은 팀을 형성하고, 점수판에는 팀별 점수가 표시된다.
5. 수집: 일부 인기 있고 재미있는 게임은 획득 요소를 지닌다. 당신이 포켓몬 고에서 모든 포켓몬을 수집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하위 목표의 구체적인 형태로 볼 수도 있다. 당신이 수집하는 각 아이템이 하위 목표에 따른 만족감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획득 활동에는 낱말 퍼즐이나 1인용 슈팅 게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차별적인 만족감이 존재한다.
- 아이 때문에 행복해지는 사람도 있고, 불행해지는 사람도 있다. 나머지는 그 중간에 해당한다. 주로 나이가 몇 살인지, 엄마인지 아빠인지, 어디서 사는지에 좌우된다. 그래도 하나의 심오한 수수께 끼가 남는다.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더 행복한 삶과 결혼 생활을 누 렸을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부모가 된 것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면서 가장 잘한 일로 꼽는다. 왜 우리는 아이를 낳은 일을 후회하지 않을까? 한 가지 가능성은 기억이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가늠할 때 절정 부분만 기억한다. 그 사이에 있는 99퍼센트의 진부하고 끔찍한 부분은 잊어버린다. 기억은 선택적이다. 제니퍼 시니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경험하는 자아는 연구자들에게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설거지(또는 낮잠, 쇼핑, 이 메일 답신)를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반면 우리의 기억하는 자아는 연구자들에게 누구도(그리고 어떤 것도) 아이만큼 많은 기쁨을 안기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행복이 아닐지 모른다. 우리가 되새기는 행복, 불러내고 기억하는 행복, 삶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행복일지도 모른다.
- 알베르 까뮈 Albert Camus는 『시시포스 신화』에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으로 자살을 해야 할지 여부라고 썼다. 까뮈가 보기에 이것이 철학적 문제인 이유는 삶은 살 가치가 있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되고 뒤이어 삶의 의미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의미가 가장 시급한 질문이 된다. 그러나 까뮈는 이 질문에 명시적인 답을 얻어야만 삶을 견딜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 집안 에는 풍요로운 삶을 살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물으면 아마 콧방귀를 뀌며 눈동자를 굴릴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모두가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일부 철학자들은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케이시 우들링 casey Woodling은 이렇게 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숙고함으로써, 일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자신 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함으로써, 그 의미와 중요성을 발견한 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은 어떤 의미도, 중요성도 얻지 못한다.......... 이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과 비슷하다. 나는 더 나아가 성찰하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 하지만 초자연적인 창조주가 없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썼다.
이 질문은 체스 챔피언에게 “세상에서 최고의 수는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것과 같다. 어떤 판에서 나온 특정한 상황 그리고 상대의 특정한 성향과 무관 한 최고의 수 또는 좋은 수 같은 것은 없다. 인간 존재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삶의 추상적인 의미를 찾아서는 안 된다. 인간은 모두 삶에서 이뤄야 하는 확고한 과업에 대한 구체적인 소명이나 사명을 지니고 있다.
- 첫 번째 집단에게는 8킬로미터 달리기(괴로움)를 하는 자선행사에 참여할 것인지 묻고, 두 번째 집단에게는 야유회(즐거움)를 가는 자선행사 에 참여할 것인지 물었다. 이 경우 첫 번째 집단이 동의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이것이 순교 효과다. 다른 한편 두 선택지를 동시에 고려하게 하면, 즉 8킬로미터 달리기와 야유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 게 하면 야유회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다. 야유회를 가면서도 똑 같은 선행을 할 수 있다면 굳이 8킬로미터 달리기를 하면서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올리볼라와 샤피르가 지적 한 대로 이 점은 우리가 단지 '고통스러운 선행을 애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보다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 데 필수적이라고 여겨질 때만 고난이 가치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비선택적 고난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그것이 신과 우리의 관계를 개선하고, 가치 있는 교훈을 주고, 영적성장을 허용하며, 도덕적으로 선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사람들의 믿음은 잊도록 하자. 비선택적 고난은 실제로 유익할까? 정말로 우리를 더 강하고, 착하고,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까?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존 로버츠John Roberts 대법관의 2017년 졸업 연설 중 일부다.
졸업 연설자들은 대개 행운을 빌어주고 덕담을 합니다. 저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죠. 저는 앞으로 가끔 여러분이 부당한 대우를 받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정의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니까요. 또한 여러분이 배신 당하기를 바랍니다. 신의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으니까요. 미안한 말이지만 저는 여러분이 때로 외롭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친구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요. 저는 여러분이 가끔은 불운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삶에서 운의 역할을 인식하고, 여러분의 성공이 전적으로 마땅한 일이 아니며, 타인의 실패도 전적으로 마땅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테니까요
- 로버츠가 보기에 고난은 객관적 관점을 부여하고 공감 능력을 촉진한다. 즉, 고난이 끈기를 길러준다는 것이다. 나심 탈레브Nassim Table의 멋진 표현에 따르면 고난은 '반취약성 anti-fragile'을 심어준다. 이는 “죽음 이외의 모든 고난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라는 니체의 유명한 경구로도 표현되어 있다. 또한 브록 바스티안은 이를 보다 고상하게 “건강한 심리적 기능을 얻는 핵심적인 수단은 고난에 노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레베카 솔닛 Rebecca Solnit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여러 집단이 재해에 대응하는 양상을 기록한다. 그리고 집단 구성 원들이 서로에게 대단히 친절했다고 주장한다. 외부의 제약이 없어 지는 경우 사람들이 야만적인 수준으로 퇴행하리라는 홉스의 주장 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말이다. 솔닛은 “재난 상황에 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은 끈기, 수완, 관대함, 연민 그리고 용기”라 고 말한다. 그녀가 보기에 재난은 일종의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들 은 그냥 위기에 대처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기쁨을 얻는다. 이는 “재난이 종종 제공하는 공동체 의식, 목적성, 평소에는 충족되지 않는 의미 있는 일에 대한 욕구"를 드러낸다. 연구실에서도 이런 징후를 일부 확인할 수 있다. 브록 바스티안이 진행한 일련의 실험에서 피실험자들은 얼음물에 손을 담글 뿐 아니라 레그 스쿼트leg squat를 하거나 매운 고추를 먹었다. 이런 과제는 소규모 집단으로 나뉘어 실행되었다. 그 결과 고통스러운 경험을 나눈 집단의 구성원들은 보다 강한 유대감을 느꼈고, 서로 를 신뢰했으며, 더 잘 협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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