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수의 시대

사회 2021. 1. 12. 21:10

- 자신의 감정을 랩으로 말하듯 노래하는 힙합은 가난한 흑인들이 자신의 고통과 불행을 음악으로 드러내며 시작되었다. 주제는 제한이 없다. 상대에 대한 디스일 수도 있고, 자기 자랑일 수도 있 고, 사회 비판일 수도 있다. 거침없는 표현과 내용을 담다 보니 속 시원한 쾌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때론 차별이나 또 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힙합에는 스왜그와 플렉스라는, 자신을 뽐내듯 드러 내는 표현이 있다. 원래 스왜그란 단어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 여름밤의 꿈》에 처음 등장했는데 건들거리다’, ‘잘난 척하다 의 의미로 쓰였다. 힙합에서 스왜그가 허세를 부리듯 자유분방한 스 타일을 의미하기에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단어의 의미와 비슷하다. '약탈품’, ‘장물의 의미도 있다. 미국 서부 갱스터 문화와 흑인빈민가, 힙합 문화를 주요 배경으로 다룬 게임 'GTA: 산 안드레아스' 에서 물건을 훔치는 상황이 나왔을 때 ‘스왜그'란 표현이 쓰인다. 힙합의 배경을 생각하면 이것이 더 어울리는 의미다. 도둑질을 하자는 게 아니라, 법 제도의 틀을 벗어나서라도 갖고 싶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을 솔직히 드러낸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플 렉스와도 연결된다. 원래는 근육에 힘을 준다는 의미의 단어지만 힙합에서는 '자랑하다', '과시하다', ‘뽐내다'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자신의 성공을 돈과 소비를 통해 증명하는 래퍼들의 과시욕을 플렉스라고 한다. 가난한 흑인 래퍼들이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 로 돈을 벌어 이를 당당히 자랑하며 쓰는 모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과시욕이나 자기 자랑도 거부감 없이 받아 주는 것이 힙합이다.
- “여자 친구 있어?” 라는 초등학생의 질문에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면서.” 라고 답한다. 사실 펭귄은 암수 구별이 어려운 동물이다. 하지만 펭수는 펭귄이란 동물이 가진 속성에 충실했을 뿐 젠더 뉴트럴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이 저지르는 수준의 외모 차별이나 남녀에 대한 관성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벗어날 생각도 보이지 않았다. 생각하는 수준이 초등학교 5학년 눈높이에서 멈췄다. 하지만 이후 2030세대의 지지를 받으며 어린이 캐릭터에서 직장인 캐릭터로 진화하면서, 외모와 성별에 대한 태도에 좀 더 진지한 메시지를 녹여 넣기 시작했다. 젠더리스 Genderless와 보디 포 지티브Body Positive가 펭수의 세계관에 녹아든 셈인데, 이것이 대표 적인 진화의 증거다. 펭수가 전 국민적 캐릭터가 되면서 책임감이 커졌기에 발언과 세계관에 세심한 조율이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정신적 수준이 열 살짜리 초등학생 수준에 불과했지만, 어느 순간 대학생이나 20대 직장인 수준의 펭수로 거듭나기 시작 했다. 이런 변화는 아주 긍정적이다. 이는 펭수가 시대정신을 계속 흡수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또한 그동안 없던 실존 인물 같은 캐릭터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답을 '성장'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새로운 경험, 새로운 사람, 새로운 지식 등을 접하면서 계속 사고도 확장되고 성장한다. 이는 살아 있는 사람만이 가진 특권이자 가상의 캐릭터는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 엔비디아 NVIDIA의 CEO 젠스 황Jen Hsun Huang은 직원들에게 낮은 비용으로 빨리 실패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조직문화이고 이것이 바로 성공 비결이라고 했다. 구글도 실패에 관대한 조직문화를 가졌다. 오류를 계속 수정해 나감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고, 이런 과정을 통해 고객과 시장 상황을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과거의 방식이었다면 자이언트 펭TV〉 제작진은 초등학생을 겨냥한 초기 기획이 반응이 생길 때까지 계속 밀어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제작진은 시장의 반응과 시청자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계 속 변화를 줬고, 여기에 대해 다시 피드백을 받으면서 가장 상품성 높은 콘텐츠로 진화시켜 갔다. 시장에서의 반응이 2030세대 위주로 나오니 초기 기획을 고집하지 않고 그에 적극 대응한 것이 자이언트 펭TV 성공의 비결이라 할 수 있다.
- 펭귄은 조류 중 유일하게 외관상으로 암수 구별이 뚜렷하지 않은 동물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펭귄조차도 서로의 암수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동성 커플도 많다.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 중 동성커플이 있는 경우는 펭귄 외에도 양, 흑조 등이 있다. 물론 동성 커플 중에선 동성애자가 아니라 이성애자인데도 성별을 구분하지 못해 동성과 짝을 이루는 경우도 있다. 펭귄끼리는 이런 상황에 대한 나름의 방법을 갖고 있다. 아델리펭귄과 젠투펭귄은 구애할 때 수컷이 암컷에게 돌멩이를 준다. 예쁘고 매끈한 돌멩이를 골라서 주면 그것을 받은 암컷이 마음에 들 경우 짝을 맺는다. 만약 수컷이 암컷인줄 알고 다른 수컷에게 돌멩이를 주면 상대 수컷은 돌을 걷어찬다고 한다. 즉 다른 펭귄들이 구분하기 어려워 그런 것이지 자신은 스스로가 암컷인지 수컷인지를 인지하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쁘고 반짝거리는 것을 선물로 주며 구애를 하는 동물은 펭귄과 사람밖에 없다는 점이다.
- 꼰대 논쟁은 한두 해 논란이 되다 사라질 이슈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계속 방치되며 누적되어 온 문제이기에 한 번은 제대로 풀고 넘어가야 할 숙제다. 펭수가 꼰대 논쟁을 촉발한 것은 아니지만, 시대적으로 이슈였던 꼰대 논쟁이 더 부각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2019년 3월에 등장한 펭수는 10개월여 만인 2020년 1월, 구독자 수 200만 명을 돌파했다. 유튜브 채널 개설 초반 5개월 동안 2만여 명에 불과했던 구독자 증가세가 이후 5개월 동안에 100배 급증했다. 그 기점이 2019년 9월이고, 꼰대 논쟁을 통한 2030세대의 관심 유발이 단기간 폭발적인 성공을 이루는 데 티핑 포인트가 되었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는 윗 사람에게 할 말 다 하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펭수의 행동 방향은 이렇듯 위계 관계에 억눌린 한국인들의 욕망과 부조리에 저항하려는 사회문화 트렌드에 맞물려 있다. 다시 말해 펭수는 2030세대의 관심과 지지를 받을 가능성을 지닌, 시대가 선택한 캐릭터였다. 단순히 인형 탈 쓴 캐릭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다. 꼰대 문제는 직장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전체적으로 겪는 공통 이슈다. 한국 사회가 나이로 서열과 권력을 구분하는 사회라서 그렇다. 어떤 말이 유행할 때는 단지 언어적인 이슈로만 끝나지 않는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고, 사고는 시 대정신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안티 꼰대'는 2019년을 대표 하는 시대정신이다. 이 안티 꼰대 정신은 잠시 스쳐가는 유행이 아니라 트렌드가 되었으며, 패러다임으로 진화해 문화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안티 꼰대는 과거의 관성에 대한 저항이자 반격 이다. 기성세대식 미덕과 성공 방식을 뒤집는, 새로운 세대와 새로 운 시대의 솔직한 목소리기 때문이다.
- 아이러니한 것은 나이가 권력인 사회면서도 나이가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젊어 보이려고 애쓰고, 나이를 어리게 봐 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우리가 가진 나이에 대한 이중적 태도다. 한국의 정계에서는 '젊은 피'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젊고 새로운 인재가 들어와서 관성에 빠져 있는 조직에 활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낡고 고루한 생각을 가진 기존의 정치 세력을 혁신하지 않고 그저 젊은 피로 '메이크업’만 하려고 든다. 구태 정치를 그대로 둔 채 젊은 인재들을 도구로 쓰는 셈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나이 든 경영진은 젊은 사원들과 함께 밥을 먹고 토론하 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이 젊고 혁신적인 리더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 한국에서는 정계나 재계나 젊은 피는 늙은 피의 생존을 위한 보조 도구일 뿐이다. 이런 접근을 하는 이유도 결국 늙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한국 사회에서 안티 꼰대가 중요 이슈가 되고 트렌드의 중심이 된 것은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가 강력하게 저항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 이제 과거식 위계 구조와 나이 중심 서열화가 만든 폐해를 없애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조금씩 끊임없이 진화했다. 꼰대 논쟁도 바로 그 진화의 결과물이다. 펭수가 아닌 다른 캐릭터여도 안티 꼰대 논쟁을 건드리면 충분히 수혜를 입을 수 있는 시대다. 우리는 우리를 대신할, 유쾌하면서도 당당한 가상의 캐릭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 프랑스에서는 업무 시간 이후에 업무 메일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이 2017년 1월 1일부터 발효되었다. 퇴근 시간 이후에 회사와 상사로부터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는 것 이다. 2013년에 독일 노동부는 업무 시간 이후에는 비상시가 아니 면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전화나 이메일로 연락하지 못하도록 하는 지침을 발표한 바 있다. 다임러벤츠 그룹의 경우 휴가 중인 사람의 메일에 인공지능이 자동 응답하고, 이를 삭제하는 시스템을 운용 중이다. 휴가 중인 사람에게 송신되었던 메일을 분석했더니 업무상 중요한 메일은 2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으며, 그 업무가 상사나 다른 동료가 충분히 대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휴가중인 사람에게는 업무 메일이 가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구축한 것 이다. 국가와 기업이 나서서 이런 법적 장치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개인이 자발적으로 하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 앞으로는 나이 차이보다는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의 차이가 세대를 구분하는 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나이가 몇인지, 성별이 무엇인지는 비즈니스 기획이나 마케팅에서 점점 영향력을 잃어 가는 기준이다. 펭년배’의 등장은 단지 나이를 초월해 모두가 펭수 를 좋아하고 평수 세계관을 지지한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나이로 세대를 구분 짓는 관성에 금이 갔다는 시대적 변화를 보여 주는 증거다. 나이와 상관없이 지금 시대에 맞는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펭수가 확인시켜 준 우리 사회의 변화다. 수가 한국 사회를 바꾸었다기보다 한국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를 확인시켜 주었고, 무엇이 시대 진화의 티핑 포인트인지 짚어 주었다고 하는 표현하는 것이 더 적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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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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