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한국에서는 공정성이 뜨거운 이슈다. '공정'이라는 필터 로 세상을 들여다보니 "불이익을 봤다", "공정하지 않다", "부당 하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경쟁에 내몰린 사람 들이 많다 보니 그렇게 느낄 수 있다. 자기 입장에서 따져보면 손해를 본 것이고, 불공정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이 사회에 'No pain, no gains(고통받지 않았다면 어떤 이익도 누릴 자격이 없다)' 라는 말이 강박적으로 통용되는 건 필연적인 결과같기도 하다. 당연하게도, 스펙을 쌓느라 책상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취준생 들은 몇 년 전 인천공항공사의 비정규직 종사자들이 정규직으로 채용되었을 때 청와대 청원 게시판까지 찾아가 불만을 토해냈다. 당연하게도, 영혼을 끌어모아 내 집 마련을 한 사람들은 올림픽에 서 메달을 딴 국가대표 선수들이 국민주택의 특별공급 대상자가 된다는 제도에 항의했다. 나처럼 공부해서 시험을 통과한 것이 아 니라면 정규직으로 채용될 자격이 없고, 나처럼 집을 마련하기 위 해 애쓰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도 집을 얻을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
- 이들에게 공정은 딱 자신을 위한 장치이다. 자신만의 공정을 외치는 사회에서 타인의 행운이나 행복은 불공정한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오래된 속담이 있 긴 하지만 요즘은 그런 분위기가 더 강해진 것 같다. 공정은 중요 하게 다뤄야 할 주제지만 그 범위가 개인 혹은 특정 집단에게만 국한된다면 그 사회는 결코 진정한 공정에 도달할 수 없다.
공정성에 대한 외침은 질투에서 기인한다. 사회에서 고용의 안정성은 중요한 문제이고 비정규직 철폐는 여전히 유효한 목소 리지만, 내가 아닌 남에게 돌아가는 일은 다른 문제인 것이다. 같 은 상황에서 입장이 뒤바뀐다면 "누군가의 공정을 해치는 일이 니 나는 거절하고 비정규직으로 남겠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외침이 나에게 불공정할 바에야 모두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 워라밸이란 단어에는 분명 '일'과 '삶' 모두 중요한 의미가 있 다는 강조가 담겨 있는데, 직장인들의 태도를 보면 일하는 시간 은 가급적 빨리 벗어나야 하고, 그 시간 뒤에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일은 그저 돈을 버는 수단일 뿐 이라는 인식이 담긴 듯하다. 잠깐만 생각해 봐도 우리는 인생의 절반 그 이상을 일하면서 산다. 그 절반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시간일 뿐이라면 우리는 인생의 반 이상을 버리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워라밸이라는 규칙이 아니라 어떤 마음과 태도로 일하고 사느냐는 것이 아닐까?
- 사람들은 늘 미래를 준비한다. 오지 않은 미래를 지금 끌어다 가 행동의 심판을 세운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좋은 직장 을 얻기 위해, 내 집 마련을 위해,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늘 준비중'인 인생을 사는 것 같다. 불교에서는 현재, 이 순간을 살라고 가르친다. 인생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순간순간이 있을 뿐이니,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나중의 행복도 없다고 말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행복을 위해 열심히 놀아야 한다.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일 따위는 아이들의 행복 과 무관하다. 함께 어울리면서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두뇌를 깨 우고, 규칙을 준수하며 사회성을 기르고, 놀이를 잘 못하는 친구 를 배려하며 인성을 키워나가야 한다.
지금, 현재의 행복에 충실하자는 나의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행 복하다는 느낌을 느꼈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1년 내내 행복한 것은 아니 다. 마음이 내려앉을 때도 있고,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 세상과 인생이 선사하는 불행과 우울 역시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다. 그 럼에도 살아온 여정을 넓게 보면 그 시간이 참 행복했다는 감정 이 가장 먼저 느껴진다. 특별하고 대단한 업적은 남기지 못했지 만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움직였고, 그 방향의 나침반이 된 것은 바로 행복이었다.
- 시험에 초점이 맞춰진 교육은 레스토랑에 가서 접시만 구경 하고 음식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음식이야말로 콘텐츠(목적)이 고 접시는 콘텐츠를 편리하게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인 데, 도구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셈이다. 레스토랑에 가는 이유는 사실 화려하고 예쁜 접시가 아니라 음식 때문이 아닌가? 접시도 물론 식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물건이고, 나도 미각을 일깨우는 예쁘고 특색 있는 접시를 좋아한다. 그러나 접시는 어디까지나 도구이다. 시험 또한 교육의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는, 학습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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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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