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사회

사회 2021. 1. 21. 21:39

-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Wendy Brown이 설명했듯이, 이제 교육, 데이트 또는 운동과 같이 부를 창출하지 않는 삶의 영역조차도 시장용어로 해석 되고, 시장지표로 통제되고, 시장체계에 따라 운영된다. 웬디 브라운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오늘날 개인부터 회사, 대학부터 주정부 그리고 식당부터 잡지사에 이르는 거의 모든 시장 행위자들은 당장의 수익보다 자신들의 추정 가치, 미래 가치를 결정하는 등급과 순위에 더 관심이 있다. 그들은 타인의 투자로 이어지는 자기 투자를 통해 현재와 미래 가치를 향상 시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제 모든 시장행위는 금전적 이득을 위해 행해진다. 예를 들어, 블로그 조회수, 리트윗, 옐프 별점, 대학 순위 또는 무디스 신용등급을 통해서 금융화된다. 이렇게 금융화된 시장행위는 누군가의 등급을 향상시키거나 유지한다.
- 오늘날 성공적인 CEO가 되는 비결은 리더십이다. 전략적인 사고, 산업에 대한 지식 그리고 정치인 같은 설득력도 바람직한 자질이지 만 더 이상 필수 요소는 아닌 것 같다. 특히 회사가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투자자, 분석가 그리고 경제지 기자뿐만 아니라 새로운 CEO가 필요한 기업의 이사진은 단지 능력 있고 경험이 풍부한 최고경영자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회사는 리더를 원한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성공한 리더 를 만드는 것일까? 리더로 인정받는 CEO를 소개할 때, 사람들은 주로 ‘카리스마'란 단어를 사용한다.
라케쉬 쿠라나는 카리스마를 저주라고 부른다. 이것은 비즈니 스 리더십의 근간이 걱정스럽게도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카리스마는 지속 가능한 혁신과 성장보다 단순한 이념에 더 가깝다. 게다가 바람직한 결과를 실제로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기술과 조직 모델의 개발을 방해한다. 카리스마는 조직의 구세주에 대한 기업의 욕망을 위험하게 파고든다. 이 CEO의 저주는 이사회 회의실 문을 넘어 더 넓은 사회로 퍼 져나간다. 카리스마가 있고 세 치 혀로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이 문화적 연단 위에 선다. 도널드 트럼프는 선거유세를 하면서 연단에 서서 수많은 미국인들을 설득해 자신에게 투표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CEO를 신화적 존재로 받아들이는 현상은 지속가능한 경제성장과 진정한 혁신을 위태롭게 하고, 그럴듯하지만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약속만 남발하는 사회 풍조를 강화할 뿐이다. 결국 장기적인 사고보다 단기적인 수익이 우선시된다. 카리스마적 권위주의는 협력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짓밟고 널리 퍼 져나간다. 이런 이유로 CEO의 저주는 기업을 넘어 사회 전체를 갉아먹는다. CEO가 더 이상 우리를 구할 수 없다면 우리 스스로를 그들로부터 구원할 수 있을까?!
- 당시 하버드경영대학원의 한 교수가 “그의 강연은 경영에 대하여 일종의 공식을 제시한 것 같다"고 말했듯이, 프레드 릭 윈슬로 테일러는 매우 유명했다. 1914년 경영에서의 테일러시스템데 대한 강연은 하버드경영대학원의  가장 대표적인 강연이 되었다. 그들을 영웅이라 여긴 사람도 일부 있었지만, 이것은 보편적인 시각은 아니었다. 어딘가에서는 기업가가 자본주의의 착취자로 그려지고 있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자본은 뱀파이어처럼 살아 있는 노동을 빨아먹고 살아가는 죽은 노동이다. 살아남기 위 해서 더 많은 살아 있는 노동을 빨아먹는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 겼다.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그는 “부르주아는 [소작농들의] 피 와 뇌를 빨아먹고 그들을 연금술사의 자본 가마솥에 던져 넣는 뱀 파이어가 되었다”고 말했다. 칼 마르크스와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정반대에 서 있는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는 1912년 공장 경 영에 관한 테일러 시스템과 기타 시스템을 조사하기 위한 미 하원 청문회에 증인으로 소환되었다. 왜일까? 경영에 대한 그의 접근법 이 권위주의적이고 노동자를 학대하며 미국적이지 않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가는 CEO를 상징하는 인물로, 기업가정신은 자본주의 의 핵심 가치로 인식되었다. 오랫동안 CEO는 한편으로 경제적 희망과 번영의 핵심인물로 여겨졌고, 다른 한편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인물로 도전을 받았다.
- 제리 유심의 말에 따르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악덕 자본가 시 대에 포악한 최고경영자는 1920년대부터 기업의 '예스 맨인 개성 없는 행정가로 변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과 마가렛 대 처Margaret Thatcher의 신자유주의 개혁 이후, 20세기 후반이 되어서 야 CEO는 문화적으로 칭송받는 유명인사 혹은 모든 비용을 감 수하고 주주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데에만 집착하는 외골수 “파 괴자”에 걸쳐 있는 이중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각 시대별로 다 른 CEO의 특징들은 경제 관계뿐만 아니라 리더십에 대한 인식 의 변화를 의미했다.
- 그들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찬사와 그들이 쏟아내는 성명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그들을 책임감 있는 존재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어색하다. 그들의 책임감은 이윤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어서 도덕적으로 의구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업가가 되면 개인적으로 출세하고 사회의 진보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매력적인 가능성이 CEO를 존경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러나 CEO 우상화의 핵심 비결은 자유시장이 모든 사람에게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준다는 믿음을 퍼뜨리는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낙수효과'란 경제이론을 통해 이런 믿음을 강화했다. 낙수효과란 최상위 계층의 부가 나머지 계층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경제 용어다. 낙수효과가 거짓임을 보여주는 여러 증거가 있지만, 여전히 많은 정치인들이 이 이론을 애용한다. 그들은 자유시장이 낭비를 없애고 세금을 낮추며, 그 과정에서 고용과 생산성이 증대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믿는 사람은 CEO가 독자적으 로 신성장과 혁신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미신을 쉽게 받아들인다.
- 1990년대 후반, 조직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사 람을 지칭하는 엘리트란 개념이 도입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엘리 트 노동 시장이 부상했다.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없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있는 자들이 엘리트 노동 시장을 운영했다. 과연 엘리트 노동 시장은 모두에게 공정할까? 아니다. 오히려 엘리트 노동 시장은 엘리트라는 새로운 계층이 중심이 되는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다수로부터 빼앗은 권력을 이 소수의 엘리트에게 줬다
- 임원진은 경쟁 계약과 상업화의 도입 같은 경영 전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세계화 담론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경영 전략에서 사용된 세계화 담론은 불가피성, 외부 압박 그리고 조직 생존에 관한 것이었다. 
자유시장의 이러한 특징은 스스로의 생명을 앗아갔다. 자유 시장은 조직의 변화를 인가하는 수단이었다. 자유시장은 현대사 회가 피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현실로 여겨졌다. 원하든 원 하지 않든 간에, 지나친 시장화와 끊임없는 경쟁을 멈출 수 있는 기업은 없다. 기업은 그냥 상황에 대응할 뿐이다. 보다 광범위하 게 일어나고 있는 지정학적 변화에서 인간적인 요소는 사라졌다. CEO의 신화는 신자유주의 문화로 가득한 시장의 무력함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런 의미에서 CEO는 조직 생활의 현실을 뛰어넘어 의기소침해지는 현실에 대응하고 통제하는 인물이 되었다.
- CEO 사회에서 CEO들은 비즈니스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삶의 영역에서 롤모델로 떠올랐다.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을 즐기는 혁신가로서 CEO는 CEO사회의 핵심 인물이다. 실제로 그들의 이런 남성적인 페르소나가 CEO를 사회적, 경제적 승리자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영역을 넘어 여러모로 닮고 싶은 존재로 만든다. 사람 들은 CEO들이 일반 사람들이 따르는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 신만의 규칙을 따르기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CEO라고 하면 사람들은 서구사회의 남성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인물을 떠 올린다. 그들의 한계는 오직 자기 자신의 능력과 의지다. 마크 저 커버그는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수십억 달러의 페이스북 제국을 만들었고 스티브 잡스는 환각제를 흡입하며 자신의 의식을 팽창시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회의 간섭이나 규제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나아갈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 2008년 금융위기는 CEO의 영웅 이미지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2008년 12월 미국의 대형 자동차 회사 를 이끌던 CEO들이 구제금융을 요청하기 위해 각자 전세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달려왔다. 이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런 그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한 민주당 하원의원은 “퍼스트클래스를 타거나 전세기 한 대를 같이 타고 올 수는 없었나요? 그렇게 했다면 최소 한 당신들이 현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 일화는 금융위기가 터지자마자, 기업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만큼 무력한 존재란 사실을 보여준다. 금융 위기는 시장의 움직임을 이해하거나 시 장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CEO와 금융 전문가도 일반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보여줬다. 많은 사람들은 금융시장이 완전히 붕괴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리고 '장님이 장님에게 길안내를 맡기는 것처럼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지식과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21세기 경제를 맡겼다고 느꼈다.
- 『포브스』에서 로버트 우드Robert Wood가 말했듯, 마크 저커버그의 관대함은 “세금 측면에서도 유리한 것이다. “가치가 오른 주식 을 기부하는 것은 그 주식을 팔고 판매수익을 기부하는 것보다 세금과 관련해서 더욱더 현명한 행동”이고 “마크 저커버그는 기부금에 대해서 소득공제를 받을 것이다. 그래서 수십억의 다른 소득에 대한 세금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가 자선 단체가 아닌 유한책임회사로 설립되었다는 것은 상업, 세금 그리고 정치에서 상당한 혜택을 누리면서 마크 저커버그가 재단의 투 자를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마크 저커버그가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를 시작한 동기에 관대함이나 인류의 웰빙과 평등을 증진하고자 하는 열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 웹사이트를 보면 마크 저커버그는 “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깊이 헌신하는 인물”인 것 같다.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의 사례를 통해 CEO의 베풂에는 기부금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면서 관대한 것과 관대한 행위의 대가에 대한 기대가 양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관대함'이 새롭게 태어난다. 관대함은 더 이상 통제권이나 사익과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 아니며, CEO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 된다.
- 분명 자선활동의 황금시대에서 개인 기부자들에게 누적된 혜택이 핵심은 아니다. 이 새로운 유형의 자선활동은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고 나아가 인간의 모든 활동으로 확장되고 있다. 자선자본주의는 기업자본주의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기업의 논리와 관행이 어떻게 수익창출 등의 상업적 목표 너머까지 영 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새로운 자선활동 과 CEO사회의 관계를 분명하게 만든다. 자선자본주의는 단지 베푸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선자본주의는 자선활동을 이끄는 억만장자 CEO로 의인화된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사회에 주입시킨다. 이것의 핵심은 CEO가 자선활동을 신규 사업과 동 일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선 기부는 효율성과 수량화된 비용/효익으로 특징지어진 시장 기반 솔루션을 이용하는 비즈니스 모델로 변형된다. 법학교수 게리 젠킨스Gary Jenkins는 자선자본주의에는 두 가지 의 주요한 특징이 있다고 요약했다. 첫 번째는 기업의 경영방식 과 사업관행이 자선활동에 적용되는 것이다. 자선자본주의에서는 기업가 정신, 시장 중심의 접근법 그리고 성과지표가 핵심이 된다. 두 번째는 엄청나게 부유한 사업가들이 필요한 자금을 대고 비즈니스 경험이 있는 사람이 리더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CEO가 기업을 관리하던 방식으로 자선자본주의가 실천된다. 동시에 자선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교환방식과 조직구성을 모두에 게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것처럼 강화한다. 자선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자선재단이 최근 몇 년 사이 변했다. “자선재단은 점점 기부금을 받는 공공 자선단체에 지시를 내리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종 지표에 집중하고 자선사업의 사업성을 검토한다. 자선 사업이 '전략적이고 책임 있게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 해서 이런 변화가 나타난다. 이것은 “비즈니스 사고와 시장이론 을 활용하여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주장에 기반을 둔 CEO 스타 일로 자선사업이 추진되는 온건한 변화가 아니다. 이렇게 되면 자선자본주의에서 자선사업의 이익이 자선 자체보다 중요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관용이 사회와 기업의 CEO 모델의 지배로 이해될 수 있다.
- 정치적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발전하는 것을 비즈니스 관행으로 이해하는 경우, 그것의 정치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배경을 기억 해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성장함과 동시에 정치경제적 중심축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이동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역사적으로 영웅으로 칭송받는 CEO들이 기업의 권력을 확대시켜나간다. CEO들은 그중에서도 정부가 소유했던 산업의 민영화, 세계적 차원의 무역 자유화와 시장 규제 완화를 통해서 기업의 권력을 확대시켰다. 최근 들어 정치적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더욱 강조되면 서, 대형 조직이 세계적인 규모로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게다가 이것은 거대 기업의 행동과 그런 행동을 규제하는 방법이 사회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의미다. 우려하던 일이 2000년에 일어났다. 당시 미국 정책연구소Institute for Policy Studies는 기업의 수익을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 GDP 과 비교하면 세계에서 거대 경제 집단의 51%는 기업이고 나머지 49%가 국가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최대 경제 집단에는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 월마트, 엑손 모빌, 포드가 있다. 각 기업은 폴란드, 노르웨이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보다 경제 규모가 크다. CEO는 이제 유사 정치인이다. 세계경제포럼의 권 위가 갈수록 높아지는 것을 생각해보자. 매년 CEO들과 정치인들 은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스위 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에 모인다. 이것은 CEO의 세계적 권한과 행위주체성을 상징하는 유서 깊은 의식이 되었다.
- 본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의 사익추구의 부정적인 영향을 상쇄시키는 도구로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표면적으로는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기업의 사익추구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 기업이 스캔들에 휘말릴 위험이 생 기면, 기업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용해 기업의 평판을 높이고 정부 규제의 위협을 완화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기업이 어떻게 책임감 있어 보이는 관행을 만들어왔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고 기업 운영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서 활동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CEO는 기업의 사 회적 책임을 이용해서 기업의 형편없는 관행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을 피한다. 그리고 기업이 활동하는 세계화된 시장경제체제를 위해 자신의 도덕적인 이미지를 유지한다. 기업은 평판을 쌓거나 스스로를 옹호하기 위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용한다. 이 때문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윤리적으로 비판받는다. 이 비판의 핵심은 기업이 '선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하게 보이기 위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 CEO 사회에서 기업이 말하는 '도덕자본과 같은 논리는, 관대 하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다고 여겨지는 기업의 모든 활동에는 결국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말한다. 친절, 호혜 그리고 사익의 윤리성에 대하여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논쟁은 더 이상 CEO사 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불평등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은 부자들에게 있고, 그들은 자신을 위하여 이 불평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CEO사회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이미 도를 넘어섰다. 도를 넘어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대변자이자 최대 수혜자인 CEO의 행동이 이거 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한다. 부의 재분배는 부자들에게 맡겨지고, 사회적 책임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사회를 착취해온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그동안 불평등은 확대되었고 기업과 부자는 우리 모두가 내는 세금을 피할 방법을 찾았다. 우리는 자선이란 이름으로 기업 통치의 새로운 형태를 목격했다. 바로 모든 인간의 활동이 기업의 이익에 도움이 되도록 바꾸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CEO는 사업을 하 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공익까지 통제해야만 한다. 앞으로 '기부서 약의 웹사이트에는 의기양양한 CEO의 웃는 얼굴을 찍은 사진이 점점 더 많이 게시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매년 심각해지는 불 평등으로 고통받을 것이다.
- CEO가 사회를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유시장이 경제 문제를 해소할 해결책에서 극심한 사회문제로 바뀌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 신자유주의는 후기 전후시대의 경기 침체와 문화적 병폐를 타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이념이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이 관료주의의 형식적인 제약에서 해방되어 유기적이고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역동적 탈관료주의 세계의 비전을 제시했다.14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와 함께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면서 1980년대는 시장 주도 낙관주의로 가득한 용감하고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마가렛 대처가 즐겨 말했듯, 다른 대안이 없었다.
- 과연 시장에 근거한 해결책이 시장이 야기한 문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병든 환 자'는 자본주의인데, 자본가가 이 환자를 치료할 유일한 희망일 까?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아니다' 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었던 세 계로 다시 되돌아가면 생각이 좀 달라질 수 있다. 당시 버락 오바 마 대통령은 “나는 맞는 약을 처방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환자 가 안정되었다고 믿는다. 물론 치유해야 할 상처가 아직 남아 있 고 응급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꽤 좋은 보살 핌을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모두가 여기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 역사적으로 서구세계는 지난 25년 동안 시장 근본주의라는 종교의 지배를 받았다. 내가 시장 근본주의를 종교라고 부른 까닭은 이 사상이 경제학이나 역사학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은 시장 근본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이 사상은 사익과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의 활동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전체 웰빙으로 이어진다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관한 주장처럼 오래된 경제 이론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
- 다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CEO의 사고방식은 사람들에 게 자유를 주고, 복잡하고 위태롭고 무력한 삶을 관리할 지식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널리 찬양받는다. 실제로 CEO가 현재의 병폐 인 소외감의 주요 원인이지만, CEO의 지혜는 개인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특효약으로 받아들여진다. CEO의 지혜는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성스러운 지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성공과 번영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 속세의 성공을 여는 천상의 열쇠를 준다. CEO사회를 받아들이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여기에는 현대인들이 스스로가 행위주체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전제 가 깔려 있다. 이로 인해 CEO사회와 CEO의 라이프스타일을 우리 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으로 잘못 받아들일 위험이 생긴다. 게다가 이런 오인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부당하고 개인적으로 심신을 약화시키는 시스템에 이념적으로 구속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는 CEO사회에 저항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시장에 패배할 뿐만 아니라 현재 주어진 극도로 제한된 자유만이 전부라고 믿으 며 살아가게 된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예상했듯이, 이런 자유 에 만족하는 것은 노예가 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오늘날 정 부와 기업은 이렇게 극도로 제한된 자유만을 제공한다. CEO사회의 조건은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가 처음 소개한 '그릇된 신념bad faith'의 개념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릇된 신념은 기존의 지배적인 정체성에 과도하게 애 착을 느껴 급진적인 자유를 실현하고 추구하기를 꺼리는 것을 말 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존의 지배적인 정체성은 다음을 말한다.
나는 반드시 '이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거나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이기를 원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이 사람'과 나 사이에 공약수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이 공약수는 타인과 나 자신을 대변한다. 그래서 나는 표면적으로만 이 사람'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정체성은 다른 누군가와의 동질감에 입각한 존재로 스스로를 이해하는 행위였다. 이런 정체성은 역설적으로 미리 결정된 편협한 자아에 스스로 갇히는 '자유가 없는 자유'를 대변한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변모할 수 있는 현상現狀의 영속성 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은 결국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CEO 사회의 근간인 자유시장 중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찬양은 현대의 그릇된 신념의 좋은 사례다. 그것은 영웅 같은 CEO로 가득한 번창하는 자유시장의 비전으로 우리를 현혹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 가능성을 자본주의와 기업 지배의 편협한 이념으로 제한할 수 있다.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권 공산 주의의 몰락이 우리가 자유를 시장의 손아귀에 완전히 넘겨준 기폭제가 됐다. 자유시장은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선택지라고 믿게 만들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와 유사한 그릇된 신념의 사례가 나타났다. CEO 가 문화적 영웅으로 부활한 것이다. CEO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확 실히 악마 취급을 받았다. 실제로 CEO 무리는 탐욕과 실책으로 널리 비난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 CEO란 인물과 그들의 능력, 사 고방식이 다시 영웅으로 대접받게 된다.
- 현대인들은 CEO처럼 되고 싶어 안달이다. 이것은 비극적인 상황이다. 사람들은 자유선택을 탐구하기를 거부하고, 사람들의 자유선택을 막는 장애가 존재한다. 이런 그릇된 신념의 숨길 수 없는 징후는 이 지배적인 정체성과 이념의 이상화된 이미지를 완 전히 구현하려는 시도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이상적인 웨이터가 되 려고 애쓰는 웨이터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한 웨이터가 카페에서 서빙을 한다. 그는 빨리 그리고 한 발 앞서 움 직인다. 그의 움직임은 조금 지나칠 정도로 정확하고 빠르다. 그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고객에게 다가가서 조금 지나칠 정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그리고 고객의 주문이 매우 궁금하다는 듯한 눈빛과 목소리로 조금 지나칠 정도로 고객을 세심하게 배려한다. 마침내 그가 고객이 주문한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고객에게 돌아온다. 그의 걸음은 마치 로봇처럼 경직되고 뻣뻣하다. 그는 팔과 손을 가볍게 움직이며 쟁반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으려고 애쓴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줄타기 곡예사의 무모함이 느껴진다.
- 결론적으로 CEO사회는 사람들에게서 선택과 자유를 빼앗으려고 한다.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CEO사회는 우리에게서 민주 주의의 약속을 통째로 앗아갈 것이다. CEO사회는 CEO의 가치와 사고방식을 널리 퍼뜨리고 직업, 정치, 공동체, 가족, 자선, 교육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그들은 그릇된 신념에 빠져 있고 두려 움에 떨고 있다. 그들은 두려워한다. 두려움과 그릇된 신념은 신들의 구미를 당기는 향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 신들은 그런 향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 선언한 바 있다. 실제로 CEO 신은 인간의 욕구와 윤리의식을 편 협한 경영자주의와 세계주의에 가두고 우리에게서 CEO사회의 대안을 찾는 능력을 앗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돈을 벌고 싶든지 아니면 환경을 보호하고 싶든지 간에, 우리를 CEO의 가치와 기준에 따라 행동하도록 회유한다. 실존주의적 자유는 아닌 것을 구현하거나 얻으려고 노력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단, 이 실존주의적 자유가 CEO 사회에 존재 한다면 말이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이것은 현재와는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능력이다. 새천년의 인간이 오로지 원하는 것은 CEO처럼 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아닌 것은 없다. CEO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하면 실망감만 남는다. 그것은 가끔은 편안하지만 결국 심신을 쇠약하게 만드는 자유의 포기를 낳는다. 이것은 강한 CEO가 사회와 자기 자신을 구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릇된 신념이다. 그러나 CEO를 아무리 낭만적으로 묘사하더라도, CEO를 이상화하는 것은 다다를 수 없는 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다름없다. CEO사회는 CEO 구 원이라는 그릇된 신념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이 구원자들과 그들 의 추종자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하는 것은 모두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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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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