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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 범선 제국

역사 2014. 11. 16. 15:53

 


대포 범선 제국

저자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출판사
미지북스 | 2010-09-27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가장 약했던 유럽 문명이 군사적 헤게모니를 쥐기까지 대항해시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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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유럽의 만성적 취약성의 원인은 너무나 분명함. 우선 유럽의 인구가 많지 않았음.(결코 1억명을 넘기지 않음) 더 중요한 것은 유럽이 분열되어 있었고 끊임없이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자기 민족의 피, 같은 기독교도의 피로 제 손을 더럽히느라 정신이 없었음. 각국의 군대가 모여 연합군을 형성하면, 결과는 한마디로 혼란 그 자체였음. 마지막으로, 간과할 수 없는 또다른 요인은 유럽 국가들의 군사조직이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 유럽, 특히 동유럽 군대는 중무장한 기병대에 의존했는데, 이들은 보기에는 화렸지만 움직임이 둔했음. 누군가의 말마따나 유럽의 귀족계층은 자신은 전혀 다치지 않은채 적에게 강한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는 불가능한 꿈을 위해 전술과 전략을 희생했음. 이런 저런 이유로 유럽이 생존하리라는 희망은 중세 내내 상당부분 신의 손에 달려 있었음.

1장 유럽의 도약

1. 초창기의 거대한 대포

- 청동은 주조하기가 기술적으로 더 쉽고 예부터 교회에서 종에 대한 수요가 커서 청동주조공정에 익숙한 숙련공들이 유럽 전역에 많았음. 종과 같이 고상한 물건을 만들면서 발전한 기술이 결과적으로 살상무기의 진보를 낳았다는 사실은 역사의 무수한 아이러니 중 하나임.

- 16세기를 거치면서 심각해진 또 다른 문제점은 기술적인 것과 어느정도 관련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것이었음. 15세기 내내 청동대표가 선호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 연철대포가 계속해서 제작되기는 했지만 품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러한 평가는 틀리지 않았음. 15세기에는 주철대포도 시도되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함. 청동대포의 문제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 구리와 주석은 매우 비쌌고 대포에 대한 수요가 커질수록 청동대포의 생산비용은 감당하기 어려워짐. 또 당시 기술이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포의 기대수명이 매우 짧았으며, 따라서 이같은 상황이 더 저렴한 대포를 개발하려는 또 다른 동기로 작용.
2. 대포 부족에 시달린 에스파냐
3. 영국의 혁신, 주철 대포의 등장

- 유럽 대륙의 사람들 눈에 영국은 분명 저발전 국가였음. 영국의 대포산업과 군비도 예외가 아니었음. 활이 영국의 무기로서 1595년까지 공식적으로 폐기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영국의 기술발전에 관한 진지한 역사라기보다 영국 민담의 역사에 속함. 그러나 민담과 전승을 감안하더라도 14세기와 15세기 영국의 군수산업이 대륙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 것은 대체적으로 사실임. 한가지 원인은 영국 삼림 지대 가까이에 철광석 공급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점. 이로 인해 영국인들은 야금에서 철에 주력하게 되었고 구리 합금 공정보다 철 제련 공정이 기술적으로 더 후진적인 한 기술적으로 계속 불리한 위치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음.

- 주철 대포 생산이 빠르게 증가했고 영국제품과 기술력의 명성은 재빨리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감

- 사실 주철대포는 여러 측면에서 여전히 청동대포보다 열등했음. 이것이 대포전문가들 사이에서, 특히 청동대포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대륙에서 가장 우세한 견해였다는 것은 틀림없음. 젠틸리니의 말처럼 "청동대포는 녹슬지 않는다. 그러므로 포병이 위험에 처하지 않고 안심하고 포를 발사할 수 있지만 주철대포는 그렇지 않다. 포탄이 얼마간 대포안에 있으면 녹이 슬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동을 선호하는데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음. 영국의 대포 제작자들이 이룬 크나큰 진보에도 불구하고 주철대포는 여전히 청동대포보다 더 부서지기 쉬웠음. 런던 기록보관서에 소장된 기록을 보면 강도 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주철대포에 대한 언급과 주철대포가 청동대포보다 덜 믿음직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는 전투 중의 사고기록을 계속해서 만나게 됨. 더욱이 금속자체가 내구력이 낮기 때문에 철제대포는 청동대포보다 확연히 두껍게 만들어야 했음. 그 결과 주철대포는 비슷한 크기의 청동대포보다 훨씬 무거웠음. 그러나 주철대포는 청동대포에 비해 한가지 이점이 있었음. 비용이 적게 든다는 점. 청동대포의 가격은 평균해서 보통 주철대포의 서너배에 달함. 따라서, 영국인들은 떨어지는 품질을 가격에서 보상하고도 남는 제품을 들고 나온 셈. 같은 시기 직물 산업 분야에서 외국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애쓰면서 영국은 그와 동일한 태도와 행동노선을 보여줌.
4. 영국산 대포, 유럽 시장을 평정하다
5. 에스파냐의 좌절
6. 네덜란드의 자립 노력, 대륙으로의 기술 확산
7. 스웨덴의 맹렬한 추격

- 네덜란드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대포를 찾고 있었는지를 안다면 이들이 곧 스웨덴의 발전양상이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을 것임. 북해에서 교역과 상업 활동이 성장하고 저지대 국가출신 기술자들이 스웨덴의 공장에서 일한다는 사실도 의심의 여지 없이 양국간 계약이 성사되도록 일조했음. 네덜란드 인의 도래는 스웨덴에 현지의 천연자원을 온전히 가용할 인력과 자본을 가져옴. 그와 동시에 네덜란드의 상업조직은 스칸디나비아의 제작자들에게 네덜란드와 영국의 해외팽창, 네덜란드-에스파냐 전쟁, 30년 전쟁으로 인해 엄청나게 증가한 대포 수요의 자극을 중개하는 역할을 했음. 17세기 첫 30년간 스웨덴 산업은 혁명적 변화를 겪었고, 스웨덴은 유럽 군수 산업의 전면에 나서게 됨.
8. 독일과 러시아의 진입
9. 영국의 연료 위기, 스웨덴산 대포를 부르다.
10. 해군과 대포를 향한 프랑스의 분투

- 네덜란드와 영국의 발전과는 눈에 띄게 대조적으로 프랑스 민간부문은 무기력한 것이 특징이었음. 외국에서 대포를 수입하려는 정부의 성향도 상황을 개선하는데 보탬이 되지 못함. 정부는 정부대로 현지생산능력이 불충분했으므로 외국의 생산자들에게 손을 내밀 수 밖에 없었음.
11. 야포의 발전과 구스타브 아돌프

- 유럽의 팽창과정을 기술할 때 군비에서 유럽의 우월성은 일반적으로 정적인 현상처럼 묘사됨. 그러나 사실, 15세기의 첫 팽창의 물결 이후 유럽의 군비생산능력은 질적인 측면에서나 양적인 측면에서나 극적으로 증가했음. 이로 인해 비 유럽권의 사람들은 유럽의 팽창에 적절히 대응하기가 극도로 어려웠을 뿐 아니라, 영토방어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게 됨. 특히 대포제작에서 유럽의 진보는 전함의 건조와 해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전략과 기술의 주목할만한 발전을 동반했기 때문.
12. 범선 시대의 개막

- 노잡이들을 돛으로 병사들을 대포로 대체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력을 기계적 동력으로 대체하는 것을 뜻했음. 대서양 지역 민족들은 대포를 실은 범선으로 완전히 선회하면서 인력 확보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병목현상을 피하고 훨씬 더 큰 양의 자연적 에너지를 자신들의 뜻대로 동력화할 수 있었음. 유럽의 범선들이 가장 먼 바다까지 위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때였음.
13. 갤리언선의 탄생, 더 거대한 배에 더 많은 대포를!
14. 지중해식 해전 전통의 퇴장
- 시대에 뒤떨어진 지중해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가용한 인력이 제한되어 있었으며, 구제불능으로 사략질에 빠져 있었던 영국은 바람에 의한 조종과 일제사격의 유효성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됨. 수는 적었지만 공격적이고 집요하며, 창의력이 풍부하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기술을 금방 받아들이고 노련한 영국인들은 매우 가볍고 대초로 잘 무장해 에스파냐의 거대한 배들을 갖은 방법으로 괴롭힐 수 있는 배를 만들어냄. 네덜란드도 같은 노선을 따름. 유럽에서 대포와 돛으로 더 철저하게 전환한 나라들이 우위를 차지하게 됨. 인력의 시대가 끝나고 기계의 시대가 열리려는 참이었음.
2장 유럽 너머의 대포와 범선
1. 거대한 대포를 향한 투르크인들의 집착
2. 중세에 머물러 있는 이슬람 해군
3. 중국과 조우하다
4. 포탄에 실려 온 그리스도
5. 중국은 왜 우수한 대포를 만들지 못했는가

- 중국의 조정은 기술개발에 관심이 많고 호전적 서양의 군주와 달리 대포에 열성을 보인적이 없음. 외적 못지 않게 내부의 비적을 두려워하고 외침 못지 않게 내부의 반란을 걱정한 조정은 포술에 관한 지식이 널리 퍼지고 포술에 능통한 기술자들이 느는 것을 막으려고 했음.

- 군사적 패배는 서양의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는 주장의 기술적 근거이지만 동시에 서양의 기술을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의 심리적 근거이기도 함. 본능적으로 중국인들은 심리적인 위기 상태에 빠지기 보다 군사적 패배를 인정하는 쪽을 선호함. 승패는 뒤집어질 수 있음. 그러나 사람이란 굴욕은 참아낼 수 있어도 자신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법임. 관리들은 경제적, 정치적 쟁점과 상관없이 중국문명에 대한 전반적 위협을 감지하고 역시 경제적, 정치적 위험요소를 고려하지 않은채 이러한 위협에 저항하려 했음. 과거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자존심을 버릴 필요가 없었음. 이민족 출신의 왕조들은 언제나 중국문명을 받아들였음. 따라서 지금의 위기를 헤쳐 나가는데 도움을 줄만한 역사적 선례가 없는 것임. 문화적 자존심이 변화의 앞길을 끈질기게 가로막았음. 전통적 취향과 오랫동안 재내된 가치관도 변화를 방해했음.
6. 정크선의 탄식
7. 아시아, 기술 혁신에서 길을 잃다
- 언뜻 보기에 요점은 단순히 새로운 제작방식을 소개하고 그에 맞는 도구와 수단, 기계를 도입하는 문제인 듯 함. 그러나 여기에 진정으로 수반되는 것은 사회적 신념체계와 관습의 광범위한 변화임. 기술적 지식이란 환경과 다른 인간활동에 의해 변화하는 문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표출된 것임. 새로운 상황을 만나면 새로운 생각, 태도, 행위가 요구됨. 그러나 무엇보다 지식이 성장해야 함. 지속적 실험을 바탕으로 능력이 새롭게 계발되어야 하고 그와 더불어 새로운 기대와 신념도 생성되어야 함. 이러한 새로운 활동들이 기존 제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맞춰 조정되어야 하고 반대로 기존의 제도들 역시 새로운 활동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 이 같은 변화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다른 것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느리게 진행될 수 밖에 없음.
에필로그
- 다방면의 경제적 기회들이 유럽인들을 해외로 유인. 물론 향신료 무역은 언제나 가장 수지맞는 사업전망을 제공. 그러나 향신료 이외에 다른 것도 존재했음. 포르투갈인들은 15세기가 저물어갈 무렵 향신료 무역에 관심을 더 품게 되었음. 그보다 앞서 그들은 상아와 흑단, 노예, 금, 곡물과 수산물을 찾아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했음. 유럽인들이 16,17세기에 인도양과 중국해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을 때, 그들의 관심사는 향신료에 국한되지 않았음. 그들은 초석보투 구리, 비단,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에 흥미를 보였음. 아시아에서 유럽 탐험가들의 유일한 활동이란 서양에 동양의 산품을 공급하는 것이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오늘날의 경제사 교과서들은 틀렸음.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영국인들은 아시아 국가들 간의 광대한 상업활동의 네트워크 안에서 중개상으로 활약했으며, 적지 않은 유럽의 수입품은 무역외 수지인 해운 및 통상 서비스 수출에 지불된 대금이었음. 기회는 많았고 위험은 컸지만 이윤은 더욱 컸음.

- 종교는 명분을 제공하고 금은 동기를 제공함. 14~15세기에 대서양 연안 유럽국들이 성취한 기술적 진보는 수단을 제공했음. 적극적 동기는 13세기부터 지중해 유럽에서 이미 존재해왔음. 이탈리아와 카탈루냐 인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앞서 나갔으나 이슬람 세력의 봉쇄를 푸는데는 성공하지 못했음. 적절한 기술적 진보의 지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 그들은 풍력, 또 나중에는 화약을 어느정도 이용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보조적 수단으로만 취급. 그들은 근본적으로 이동과 싸움을 위해서 인간의 육체적 힘에 의존. 그러나 선원들은 인간의 육체적 힘에만 의존해 바다를 통제할 수 있었고, 적과 맞닥뜨렸을 때 싸움이 최종적인 난투극으로 결정된다면 수적 우위에 기대야 했음. 지중해의 발전과 대서양의 발전 사이의 연결고리는 콜럼버스였음. 그는 대서양의 선박과 비스케이만의 선원, 포르투갈의 항해술을 빌려와야 했음. 인도 항로 개척 프로젝트에서 그의 역할과 의미는 제노바 자본의 대리인이라는 것이었음. 15세기 말 유럽 팽창의 역사에서 지중해 세계의 공헌은 기술적이라기 보다는 재정적, 상업적인 것이었음. 14,15세게에 대서양 유럽이 개발한, 대포로 무장한 배는 유럽의 영웅담을 가능케 한 발명품임. 근본적으로 그것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선원이 전례없이 막대한 양의 물리적 에너지를 이동과 파괴를 위헤 제어하는 것을 가능케 한 경제적 고안물이었음. 어느 순간 유럽이 극적으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비결은 모두 거기에 있음. 대서양 연안 국가들이 범선을 조종하기 위해 축적한 기술과 오늘날 바다에서의 싸움이 적선에 올라타거나 활을 쏘고 작은 포탄을 던지며 칼을 휘두르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주로 대포를 이용해 돛대와 활대를 부수고 배에 구멍을 내거나 배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수행된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에 달려 있었던 것임.

- 유럽의 해상확장은 산업혁명으로 가는 길을 닦은 여러 주변 여건 가운데 하나임. 유럽에 공장을 지은 기업가들 가운데 서인도 제도 교역상이나 동인도 회사의 사업가들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해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갈릴레오나 뉴턴이 맨체스터에 방직공장을 차리지 않았다면서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사이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 만큼이나 이치에 맞지 않음. 산업혁명은 유럽인들의 인구수를 절대적 의미에서 또 비유럽 인구와 비교하여 상대적 의미에서 모두 증대시켰음. 그리고 유럽인들에게 더 강력한 무기와 인간에게 불리한 자연력을 통제할 수 있는 효율적 기술을 제공했음. 산업화된 유럽에게 자유무역 정책과 이중경제(근대적 부문과 전통적 부문이 공존하는 식민지 경제체제)라는 정교한 메커니즘을 통해 비산업화된 경제를 종속시킬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음. 애덤 스미스가 인식한대로 "옛날에 부유하고 문명화된 민족은 빈곤한 야만족들의 공격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기 힘들었다. 오늘날 가난한 야만족은 부유하고 문명화된 민족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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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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