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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의 세계사

역사 2014. 10. 21. 20:21

 


상업의 세계사

저자
고바야시 다카시 지음
출판사
황금가지 | 2004-01-16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보통 고대 문명이라 하면 누구나 농경 사회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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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베버는 오리엔트 고대 제국의 문화를 관개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하안문화라고 명명하고 오리엔트형 관료제 부역 국가를 모델로 아시아 역사를 조감했음. 또한 마르크스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기초로 아시아 사회 정체론을 전개. 물론 막스 베저는 오리엔트 교역활동도 함께 고려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 그러나 오리엔트와 이슬람, 인도, 중국 등 여러 아시아 문명은 단순히 토지와 노동을 기초로 하는 생산양식론과 공동체론의 범위를 훨씬 초월하여 각각의 개성적 풍토와 교역권을 가진 세계-경제를 성립시켰음.
- 아시아 여러문명은 바로 세계-경제로서 제각기 일정한 교역권을 지니고 성립했음.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문명을 세계체제의 구조로 파악한 브로델이 그것을 자본주의 세계 경제 이전의 세계-경제로 파악했다는 것. 브로델이 말하는 세계-경제란 세계적 규모로 확대된 세계경제가 아님. 그것은 자본주의가 확산하기 이전 세계 제국 주변부에 성립한 일정한 교역권을 말함. 그는 세계-경제가 세계의 한 단면에 불과하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대체로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일정한 지역간의 연락 및 교환을 통해 유기적 통일을 이룩한 교역권이라고 설명했음. 또한 그 특징은 정치적,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어 왕래하는 점이라고 지적. 실제로 그러한 의미의 세계-경제라면 아시아 지역에서 상당히 광범하게 발전했음.
- 오리엔트 지역이 문명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 것은 전적으로 빗물에 의존한 천수농경에서 관개농경으로의 전환이었음. 오리엔트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중류와 지류 유역에서 천수농경에 의한 농지개발을 진행하여 기원전 4000년에서 3400년경에는 본격적인 관개농경을 전개. 관개 농경은 일시에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하류지역으로 퍼져나감. 이와 함께 관개농경에 필요한 집단노동이 조직됐으며, 상당한 잉여 생산물의 집적과 더불어 농경촌락을 통합하는 신전지배가 등장. 더욱이 기원전 3400년에서 3100년 사이에는 이곳에 스텝지대 유목민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도시가 등장했고 기원전 3100년에서 2800년 사이에는 많은 도시국가가 성립. 이때 우르크, 우르, 라가슈, 운마 등 수메르계의 여러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기원전 2400년경에는 셈계 유목민인 아카드인이 수메르 국가를 정복하여 아카드 시대가 시작됨
- 메소포타미아의 여러제국과 이집트 제국은 관개농경에 필요한 노동력을 조직하기 위한 국가였고, 토지는 모두 국가소유로 제도화됨. 이와 달리 그리스 제국은 천수농경에 의한 소농민 사회를 기반으로 성립됐으며 토지는 공동체 소유와 병행하여 가족집단 소유로 귀속되어 있었음. 따라서 토지의 협소함을 보충하기 위해 해상교역이 발달했으며 그곳에 연해 문화의 연해형 제국이 성립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임
- 그리스인들이 이집트를 편입시켜 확대한 교역망이 시장과 교역의 결합을 기초로 하여 시장교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점. 이것은 드물게 나타나는 역사적 사건임. 이론적으롤 말하면 시장은 개인적 수요와 공급에 의존하지만 교역은 일정한 제도적 테두리 안에서 공동체 간에 이루어짐. 따라서 시장의 발전은 그대로 교역과 결합되지 못하고, 교역의 발전 역시 쉽게 그대로 시장과 결합되지 않음. 그런데도 그리스에서는 이 두가지가 결합하여 시장 교역의 길이 열렸고, 그리스식 세계-경제가 성립되었음.
- 도대체 어떤 조건에서 시장과 교역이 결합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시장은 물론 아테네의 아고라 시장임. 아고라에서는 시민이 시장교환의 담당자로 자유롭게 매매활동을 했음. 아고라 시장이 성립한 것은 그리스가 사적 소유자로서의 시민을 구성요소로 한 폴리스 국가로 성립되었기 때문이며, 시민은 개인 소유 토지에서 생산한 재화를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었음. 그러나 곡물만은 별개였음. 폴리스 국가의 천수농업으로는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없어 곡물수입은 국가가 엄붕하게 관리하고 있었음. 따라서 폴리스 국가의 곡물거래는 아고라를 벗어나 교역항에서 이루어졌음. 국내 생산물의 자유매매가 가능한 시장과 국가의 관리가 필요한 교역항은 제각기 다른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유는 그것만이 아님. 폴리스 국가의 경제는 가정에서의 재분배, 국가수준의 재분재, 시장교환이라는 세가지 수준의 균형 위에 성립했으며, 곡물수입은 바로 국가수준의 재분배에 해당했기 때문
- 물론 아테네는 곡물 뿐 아니라 목재, 철, 청동, 마, 납 등에 대해서도 통제교역을 실시하며 강력한 독접권을 보호하고 유지했음. 그 점에서 아테네의 통제교역은 다른 곳과 비교하여 시장교환의 요소가 많기는 했지만 교역과 시장은 역시 분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음. 그럼에도 그리스는 곡물생산 기지인 이집트를 지배하여 시장과 교역을 결합하는 데 성공했던 것임. 폴라니의 설명에 의하면 그러한 결합을 완성한 것은 아테네가 아니라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제국이었음. 그리스의 이집트 총독인 클레오메네스가 곡물생산 기지인 이집트의 국내공급을 국가 통제하에 재편성하고 곡물수출을 정부가 독점하도록 한 것. 이로써 국제적 가격형성 시장이 출현했으며, 이 가격형성 시장의 참가자는 역할에 따라 네종류로 나뉨. 첫번째 그룹은 이집트에 머물면서 곡물수출의 실제 임무를 맡음. 두번째 그룹은 곡물을 배에 싣고 항해함. 세번째 그룹은 로도스 섬에 주재하며 그곳을 거래의 중심지로 삼음. 네번째 그룹은 그리스 각지의 항구에 주재하며 위탁재화를 취급하면서 로도스 주재원에게 가격의 움직임을 알림.
- 이리하여 곡물은 배로 이집트에서 로도스로 운반되었고, 로도스에는 그리스의 모든 도시에서 최신 가격정보가 끊임없이 들어왔음. 그 정보에 따라 곡물을 실은 배는 가격이 가장 높은 도시를 향해 출발하거나 로도스에서 곡물을 매각. 이런 조건에서 로도스의 가격은 그리스 여러 도시의 평균가격을 반영하는 경향을 띰. 수많은 그리스 도시간의 곡물가격은 비로소 일관된 기초 위에 놓였고, 공급은 가격을 따라 이동하게 됨. 드디어 공급이 정치적 영향력이라든가 군사력에 의해 멋대로 움직이지 않고 현실의 필요에 따라 합리적으로 움직이게 됨. 그리스 세계-경제는 바로 이렇게 성림. 그것은 아테네 아고라의 직접적 발전이 아니라 국가적 독점 무역을 매개로 한 교역과 시장의 결합이자, 아고라 시장의 비약이었음. 일반적으로 그리스의 발전은 오리엔트 여러 제국에는 없었던 아테네 아고라의 시장 교환이 직접적 원인인 것처럼 알려져 있음. 그러나 사실 그리스 세계-경제는 독점무역에 기초한 국가의 관리, 즉 아고라의 죽음의 비약에 의해 달성된 것임.
- 아랍 사회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븐 할둔은 이슬람 사회를 바두라는 사막 오아시스 농경 목축 사회와 하둘이라는 상업도시 사회의 두 유형으로 나눔. 그리고 농경 목축민은 소박하고 선량하면서도 용감한 기질을 가지고 생활하며 도시민보다 미개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농민과 도시주민을 하나의 세계로 통합한 것은 유목민의 강인한 아사비야, 곧 연대의식이었다고 지적.
- 아시아 여러 제국의 주변부에 존재했던 교역활동을 세계-경제로 파악한 브로델도 이 이슬람 도시의 시장을 국제적 만남의 장소로 표현. 확실히 이슬람 도시는 기본적으로 대교류의 중심으로 기능했고, 혈연, 지연, 부족, 종교, 문화의 차이를 넘어 개방된 융합의 장소가 됨. 이슬람 도시는 모스크와 시장이라는 종교적, 경제적 기능을 중심으로 그물로 둘러친 것처럼 넓은 교역망을 만들었음. 바그다드라는 거대한 문화경제적 중심을 중추로 한 교역망 위에는 여러 중계도시가 늘어서서, 인도양 연안지역, 북방 유라시아, 비잔틴 제국, 지중해 연안부, 사하라 남쪽 기슭의 나이저 강 유역까지도 교역망의 말단이 이어졌음. 그것은 바로 이슬람의 문화경제적 교류권의 성립이고, 하나의 이슬람 세계-경제의 형성이었음.
- 중국 상업혁명의 기축이 된 것은 몽골제국이 중국 전지역에 확립한 상업도시형 지배체제였음. 상업도시형 지배는 유목민 우위의 농목 복합사회를 지배하는 체제로 제일 먼저 이슬람 세계에서 형성됐음. 원 왕조는 그것을 행성제도로써 구체적으로 제도화했음. 원 왕조는 중국 전토를 지배하기 위해 중국의 전통적 중앙 집권적 관료제도를 채용했음. 지방 행정조직에는 황제직속의 행중서성을 중국 재래의 노, 주, 현이라는 지방 행정 조직위에 설치했고 그것이 지방 최고 통치기관이 됨. 행성을 설치한 장소는 대륙의 실크로드와 남래 교역료가 결합하여 중국 경제의 대동맥이 된 허난, 산시, 간쑤, 쓰촨, 후난, 장시, 장쑤, 저장, 윈난 등지였음. 설치된 장소만 보아도 그 체제가 몽골의 길을 따라 상업도시를 거점으로 주변의 농촌을 지배하는 것이었다는 점은 매우 명료함. 사실 몽골제국의 국가 재정 정책은 전통적인 중농억상책이 아니라 극히 중상주의적이었음. 중앙 정부 수입의 80%이상이 소금전매에 따른 이윤과 15%가 넘게 부과되는 상업세였음. 게다가 상인들이 각지에 납부하던 통관세가 철폐됐고, 상품에 붙는 세금으로는 최종 매각지에서 매상세를 일률적으로 3%만 내면 됐음. 기타 토지에서 세금 수입은 중앙에 상납하지 않아도 좋은 지방세가 됨.
-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진전된 서유럽의 상업혁명을 연구한 브로델이 지적한 것처럼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서유럽 지역은 아직 이슬람 세계-경제의 주변부에 있었으며,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는 이슬람권의 여러 도시와 콘스탄티노플 등지에서 금화와 은화를 입수하여 호화로운 견직물을 구입하고 이것을 서쪽으로 전매하고 있었음. 그 이탈리아가 급속히 서유럽 세계 경제의 중추로 성장. 여기서 말하는 서유럽의 세계 경제란 상업 혁명의 전개로 도시국가 재분배 경제의 테두리를 뛰어넘은 시장 교역이 지배적 경제활동이 되면서 서유럽 지역을 하나로 묶은 국제적 상업망을 형성한 상태를 말함. 아시아 여러 제국을 중추로 한 세계-경제와 달리 서유럽에서는 여러 도시국가의 지배를 뛰어넘은 시장 교역망이 형성됨. 물론 그것이 지리적으로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었다는 의미는 아님. 지배적 경제활동이 된 시장 교환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확립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것은 소규모 세계경제라고 말해야 할 것임
- 그 선두에 선 것이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이며, 브로델이 말한 것처럼 이탈리아 발전의 결정적 전기가 된 것은 4차 십자군 원정이었음. 십자군의 출항 기지가 된 이탈리아의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같은 도시에서는 수송선이 대형화하여 거선이 되었으며 몇개의 기독교 국가가 중동이 성지에 뿌리를 내림. ㅇ에 중동으로 향하는 돌파구가 열려, 후추, 향신료, 비단, 마약 등 매력적 상품에 대응할 수 있는 교역의 길이 열림. 베네치아는 그때까지 비잔틴 제국에 기생하고 있었지만 십자군 원정 이후 이탈리아 여러 도시가 비잔틴의 재산으로부터 이익을 얻었으며 또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이익을 올리기도 했음. 동지중해 연안에서 서아시아 내륙부를 거쳐 중국에 이르는 몽골의 길을 통해 서유럽은 확실히 좀더 세계경제화됨. 피렌체는 1250년에, 제노바는 더 빠른 시기에, 베네치아는 1284년에 금화를 주조. 그것은 이슬람권 디나르화에 대한 이탈리아의 경제적 해방을 상징하는 획기적 사건이었음.
-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난 상업혁명은 일찍 성숙했지만, 상품 화폐 경제화의 파도속에서 농촌 사회가 붕괴했고 도시에 모여든 수공업자와 유목민은 빈민화됨. 그뿐 아니라 거기에 대응한 국가이 통제교역이 강해지면서 이슬람의 상업 도시형 지배가 변질되었으며 그 결과 다양한 민족을 통합한 이슬람의 질서는 쇠퇴. 국가권력과 유착한 아얀 계급 지배구조의 확립은 그 귀결점이었음. 그들은 통제교역의 중개자로 활동했지만 이미 이슬람 세계에서 생산과 판매의 조직자는 아니었으며 지방에 국한된 지역 경제권의 담당자가 되어 이슬람 세계-경제를 위축시켰던 것. 이슬람의 바다는 서유럽의 바다로 변했고 이후 이슬람 세계는 세계에서 지역으로 분열되어 서아시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내륙부에 한정되었음.
- 북인도보다 훨씬 상품 화폐 경제를 발전시키고 남인도에 상당히 넓은 면포 교역시장을 만든 힌두 상인이 무엇때문에 서유럽 여러 나라의 교역상에게 뒤처졌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임.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카스트 분업의 발전을 기반으로 인도 각지에서 향주라는 지방 유력자층이 형성되었고, 그들이 도시와 농촌의 시장을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됨. 브라만의 지배를 대신한 향주계층의 대두는 분명이 인도에서 발달한 상업혁명의 귀결이었음. 그리고 그들은 이슬람 세계의 아얀이나 중국의 향신과 거의 동일하게 국내생산과 판매의 조직자였지만 벵골만을 무대로 발전한 인도 세계-경제의 담당자는 될 수 없었음.
- 아시아를 무대로 한 상업혁명이 일본을 제외하고는 내향화한 반면 서유럽의 상업혁명은 봉건사회의 벽을 뚫고 발전하여 서유럽의 세계경제를 탄생시킴. 그러나 아시아의 세계-경제와 서유럽의 세계-경제는 왜 공존할 수 없었는가? 대략 세계 체제로 서유럽의 발전을 분석해보면, 서유럽식 세계경제를 형성하려면 국경을 뛰어넘어 이윤의 축적을 바라는 상인과 기업가가 끊임없이 중심-반주변-주변이라는 3층구조를 가진 국제분업 체계를 편성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기본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음. 또한 아시아의 세계-경제가 형성한 중심-주변 관계와 달리 서유럽식 세계경제에는 그 탄생부터 중추지역의 경제발전이 끊임없이 주변지역을 저개발의 개발로 몰아넣는 구조가 존재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할 수 있을 것임.
-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대서양, 인도양 무역은 서유럽 세계경제를 확대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면서도 두 나라의 공업화에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함. 그러나 그 뒤를 이은 네덜란드의 중계무역은 양상이 달랐음. 그것은 아메리카 대륙과 동남아시아 지역을 세계경제의 주변부로 편입시키고 네덜란드를 주도적 상업국가로 끌어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함. 네덜란드는 16세기 말에 이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농산물 생산에 특화된 농업부문을 유지했고 공업부문에서는 당시 양대 산업이었던 섬유산업과 조선업에서 우위를 지킴. 그리고 암스테르담 은행으로 연결된 상업망 덕분에 세계의 창고가 되었으며, 또한 세계은행의 지위를 획득. 중심부가 된 네덜란드는 1602년 설립한 동인도 회사의 활동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 및 아시아 지역 일부를 서유럽 세계경제의 주변부로 편입시킴.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동인도 회사가 전개한 무역정책이 그때까지 지역간 교역에 의존한 중계 교역에 머무르지 않고 정복지의 현지인을 지배하여 상품작물의 재배를 관리하는 플랜테이션 농업을 목표로 했다는 점. 네덜란드는 1619년 바타비아(지금 인도네시아)를 식민지화한 것을 시작으로 1638년에는 일본의 나가사키에 입항했으며 말라카 해협을 식민지화하는 것과 동시에 1663년에는 아라비아 반도의 동쪽 끝 무스카트로 진출. 또한 베트남 남부에서 싱가포르까지 침략하여 식민지 경영에 착수. 네덜란드가 취급한 중요한 동양 물산은 우선 후추와 향료였으며, 그것은 1648년부터 1650년까지 전체 상품 매입액의 66%, 1698년부터 1650년 사이에는 23%에 이르렀음.
- 전후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진 것은 사회주의의 도전때문도 아니고 주변부 지역에서 일어난 자원민족주의의 저항 때문도 아니었음. 전후 자본주의의 위기는 오히려 그 발전을 지탱하는 포드주의적 축적체제가 성숙하면서 나타났음. 국경을 초월한 다국적 기업의 발전과 함께 풍요로운 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생산시스템이 국내에서 환경오염의 벽에 부딪히고, 대외적으로도 자원고갈을 초래하여 원료가격을 급격히 앙등시킨 것. 따라서 당연히 생산비용은 상승하고 기업이윤은 줄어들었으며, 이와 동시에 케인스의 유효수요 정책도 한계를 드러냈음. 국경을 초월한 다국적 기업의 발전을 가능케 한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을 국가의 재정정책으로는 충분히 규제할 수 없게 된 것. 전후 풍요로운 사회를 유지해 온 복지국가의 국민주의적 경제 틀은 녹아 없어지고 일국 단위의 유효수요 정책으로는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짐. 그것은 곧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한계였음. 71년 닉슨 쇼크가 상징하는 것처럼 미국의 달러를 기축으로 하는 전후 국제 통화체제는 붕괴됐고,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또다시 재편을 강요받게 됨
- 대륙 아시아에서 해양 아시아로 크게 전개되었던 아시아 여러 민족은 서유럽에서 탄생한 세계경제의 확대과정에서 해양 아시아의 개척지를 상실했고, 아시아의 발전은 내륙부로 깊에 매몰됨. 전쟁과 혁명의 태풍이 세계를 뒤덮고 2차대전을 계기로 아시아 여러 민족이 독립한 후에도 미소 냉전 체제 아래 이런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음. 그러나 89년 동유럽 혁명을 계기로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미소 냉전체제가 종언을 고함에 따라 이런 세계 상황은 일변함. 이렇게 폐쇄된 상황을 일변시킨 것은 정보혁명을 매개로 한 세계경제의 새로운 전개였음. 전후 자본주의의 번영을 지탱한 거대한 과학기술의 개발이 정체한 대신 초소형 전자기술이 발달. 이 기술을 습득한 다국적 기업은 국경과 체제를 뛰어넘어 활동했으며 세계적 규모의 상호 의존이 전에 없이 깊어졌음. 그 결과 아시아 여러 민족을 내륙부에 가두어 놓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구조가 크게 변했음. 이로써 전후 세계를 이끌어 온 미국이 쇠퇴하고 일본을 비롯한 한국,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신흥 공업국들이 급속히 발전함과 동시에 소렴을 중추로 한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했고 중국도 자본주의와 공존하는 길을 걷기 시작.
- 미국을 중추로 한 전후 자본주의는 이를 전후로 정보혁명을 매개로 하는 포스트 포드주의적 축적체제로 크게 변화. 거기서 확립된 새로운 생산 시스템은 중심부에서는 정보혁명에 의한 초소형 전자기술과 고임금 노동을 결합한 생산라인을 유지하면서도 주변부에는 이식된 초소형 전자기술과 저임금 노동을 결합한 생산라인을 만들어냄. 이것을 하나의 직접적 생산조직으로 만든 것이 바로 국제 분업체제임. 그 안에서 국경과 체제를 초월한 다국적 기업이 활발하게 활동했음. 이로써 자본주의 세계 경제가 재편되고 그 과정에서 미소냉전 체제가 붕괴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이 새로운 지역 경제권을 형성. 이 포스트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핵이 된 초소형 전자기술은 전후 자본주의를 유지한 지식집약적, 자본집약적 거대기술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설비투자가 적고 다양한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효율적인 다품종 소량생산을 가능케 하는 기술이었음. 따라서 전후에 독립한 주변부 국가들은 이것을 비교적 쉽게 받아들였고, 거기서 저임금 노동과 결합한 수출가공 공업이 발전하여 새로운 국제분업 시스템이 성립. 그것은 이제까지 중심구 국가가 공업제품을 수출하고 주변부 국가가 원료 및 자원을 공급하는 식으로 이루어진 수직적 분업이 아니었음. 오히려 이식된 첨단 기술과 저임금 노동에 의한 수출 가공공업을 기축으로 수평적 분업을 발전시켜 주변부 국가의 자본축적을 가능케 한 것이었음. 이 초소형 전자기술 개발과 중심국가와 주변국가의 결합으로 중층화된 국제분업에 재빨리 대응한 나라가 80년대 후반 일본과 서독이었음. 그 결과 미일 경제 주도권의 교대와 확대된 유럽 공동체의 발전이 가능해짐. 그뿐 아니라 일본의 첨단기술산업과 주변부의 저임금 노동을 결합한 수출가공공업의 발전은 아시아 주변부의 저임금 노동을 결합한 수출가공공업의 발전은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킴. 이로써 유럽 공동체를 중추로 한 유럽연합과 미국을 중추로 한 북미자유무역권과 함께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지 경제권이 형성되었음. 그것은 중국을 포함하여 구성된 화남 경제권을 중추로 하지만 넓게는 동해에서 중국, 한반도의 남해, 게다가 동남아 해역에 걸쳐 연쇄적으로 형성된 몇 개의 국지 경제권으로 구성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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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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