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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음모 하

경제 2014. 10. 29. 22:45

 


자원음모(하)

저자
리우쑤샤 지음
출판사
책속의 책 | 2014-04-11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자원고갈에 대한 경고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중동,...
가격비교

- 감자 1킬로그램을 생산하려면 물 90리터가 필요.
  보리 1킬로그램을 생산하려면 물 1300리터가 필요.
  쌀 1킬로그램을 생산하려면 물 3400리터가 필요
  치즈 1킬로그램을 생산하려면 물 5000리터가 필요
  볶은 커피 원두 1킬로그램을 생산하려면 물 21000리터가 필요
  소고기 1킬로그램을 생산하려면 물 15000리터가 필요
  젖소에서 우유 1리터를 짜내려면 물 1000리터가 필요
  맥주 500밀리리터를 만들려면 물 150리터가 필요
- 고기와 술을 많이 먹는 사람이라면 매일 소비하는 수자원은 대체로 자신의 몸무게의 100배가 됨. 한사람이 일년동안 먹을 음식으로 제공될 농작물에는 대략 1500~2000톤의 물이 필요함
- 65년 아랍국가는 요르단 강을 차지할 목적으로 시리아에 차단설비를 세움. 하류에 위치한 국가인 이스라엘은 생활용수 40%를 요르단 강에서 얻고 있어 당연히 중요한 수원지안 요르단 강을 잃을 수 없는 입장이었음. 만약 차단된다면 이스라엘은 원래 부족한 물이 더 줄어들고 농공업에도 막대한 손실을 입을 게 분명. 이스라엘은 즉시 폭격기를 보내 시리아의 하천차단설비를 폭격. 이것은 3차 중동전쟁의 도화선이 됨. 전쟁에서 아랍과 이스라엘은 적에게 타격을 입하는 방법으로 상대방의 용수시설을 파괴. 그들은 수원지 확보를 전쟁의 중요 목표로 삼음.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했고, 요르단 강의 수로 전부를 장악. 골란공원은 중동지역에서 물의 탑으로 불리는 곳으로, 요르단 강의 발원지이기도 함. 물이 중동지역에서 갖는 의미에 비추어 보았을 때 골란고원은 양측이 가장 먼저 확보해야할 전략 요충지였음. 전쟁이 끝난후 골란고원은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협상에서 주요의제로 다루어졌음. 물의 분배문제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이스라엘은 그 전략요충지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었음. 또한 이스라엘은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의 지하수층이 이 자역 주민들의 주요 식수원이었음에도 줄곧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새로 우물을 파는 것을 금지. 이스라엘은 지하수 80%를 뽑아 유대인 거주지에 사는 주민들에게 공급했음. 이 지역 일대 이스라엘 주민 5000명은 매일 1만 7000세제곱미터의 물을 쓸수 있었음. 하지만 40만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매일 고작 7000세제곱미터의 물을 쓸수 있을 뿐이었음. 게다가 이스라엘 사람보다 두배로 비싼 값을 치르고 이스라엘 상수도 회사에서 사와야 했음. 물의 분배가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더욱 고조되었고, 요르단강 서안지역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가장 격렬하게 대립하는 지역 가운데 하나가 됨
- 90년대 말 동남아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해 급성장을 거듭. 동남아 국가들이 이렇게 도약하고 있을 때 주변 여러나라들의 불만이 쌓여 갔음. 경제가 발전하면서 동남아 국가들이 체질변화를 일으켰기 때문. 과거 동남아 국가들은 대부분 자원수출형 경제구조를 갖고 있었음. 하지만 90년대말, 그들은 점점 자원수입형 국가로 탈바꿈했음. 즉, 과거 동남아 국가는 몇몇 나라들에 먹거리를 제공했는데, 90년대말부터는 그 몇몇 나라로부터 먹거리를 가져오기 시작한 것. 동남아의 이런 변화는 즉각 후진국의 자원을 약탈하는 데 길들여진 선진국의 불만을 불러일으킴. 특히 미국은 동남아 국가의 급성장에 마음이 편치 않았음.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력 향상은 미군의 태평양에서의 전략적 배치에 영향을 미침. 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동남아 국가의 경제성장으로 말미암하 새로운 자원소비사장인 아시아가 더 커지고 세계최대의 자원 소비시장인 북미의 자리가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했음. 동남아 국가들이 아직 크게 성장하기 전인 90년대초 미국은 아시아에서, 위력은 대단하나 아시아 국민이 잘 알지 못하는 금융자원전을 일으켰음. 일본 부동산 버블붕괴가 그것임. 일본 부동산 버블위기는 바로 금융자원전이었음. 미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엔화절상의 압력을 가하는 등의 일련의 수단을 동원해 부동산 버블을 터뜨렸음. 결국 일본경제는 부동산 버블 붕괴후의 20년 동안 불황의 늪을 벗어나지 못함.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경제가 20여년 동안 경기침체에 머물러 있는 사이 미국은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 자리를 공고히 했다는 점. 97년 동남아 국가들은 90년대 초기 몇년 동안의 발전을 거치면서 경제규모가 확대된 상태였음. 그들은 아시아 자원 소비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일본경제가 쇠퇴한 후 아시아 자원 소비시장에 일었던 혼란을 일소했음. 하지만 이때 미국을 비롯한 서방강국은 동남아 경제에 대한 금융자원전을 준비하고 있었음. 이들이 일으킨 금융자원전은 총 3단계로 이루어짐.
(1) 화폐 공매도와 환율이라는 수단으로 대상국에 직접적 타격을 입힘. 97년 7월 2일 태국정부는 그동안 시행해오던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로 전환한다고 공포. 태국정부가 환율제도를 개혁한다고 선포한 당일 달러화대비 태국 바트화 환율은 폭등. 그날의 상승폭은 무려 18%에 달함. 외환시장의 동요는 금융시장 전체의 혼란을 야기. 단 며칠 사이에 태국 금융시장은 모두 붕괴됨. 태국 바트하는 대폭 절하되었고 태국 금융자원의 손실은 그야말로 막대했음. 그런데 예상밖의 일이 일어남. 태국의 금융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붕괴하자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금융시스템도 크게 동요하기 시작. 월가 투자은행을 비롯한 국제투기꾼들은 태국 바트화를 마음껏 주무르고 난 다음 동남아 다른 나라들도 공격.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필리핀 페소화, 말레이시아 링깃화 등 동남아 국가의 화폐가 국제 투기꾼들이 공매도대상이 됨. 그래서 동남아 국가들의 화폐는 잇달아 대폭 절하되었고 금융자원은 심각한 타격을 입음. 8월이 되자 동남아 국가의 정부는 궁지에 몰림. 말레이시아 정부가 제일먼저 링깃화에 대한 방어를 포기한다고 선언. 그후 줄곧 잘 버티고 있던 싱가포르 달러화도 큰 충격을 받음. 이때 동남아 국가의 금융시스템은 거의 붕되괸 것이나 다름없었고, 국가금융자원은 국제투기꾼의 배후조종자, 즉 서방선진국으로 빠르게 유입됨
(2) 공매도 후 다시 공매수 하는 수법. 금융자원전의 핵심전략은 금융대란을 이용해 금융자원을 빼오는 것. 98년이 되자 일본 엔화와 한국 원화를 공격해 아시아 금융위기를 일으켰던 국제투기꾼들은 예고도 없이 방향을 틀어 홍콩에 치명적 일격을 가함. 이로써 동남아의 소국은 다시한번 대규모 습격을 당함. 98년 초 인도네시아는 또다시 심각한 금융대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음. 국내경제의 성장 둔화 속도는 사상 최고를 기록. 국내 금융을 안정시키기 위해 인도네시아 정부는 2월 11일에 루피아하를 달러화환율에 고정하겠다고 선언. 경제 쇠퇴를 완화하기 위한 조치였음. 인도네시아의 이런 조치는 매우 적절하고 효과적인 것이었음. 루피아화의 달러화에 대한 고정환율제 채태으로 국제투기꾼들은 인도네시아의 루피아화를 마음대로 공매도할 수 없게 됨. 인도네시아 정부의 조치는 국제은행가들의 불만을 야기. 그들의 이익을 크게 침해하는 행위였기 때문. 그리하여 국제통화기금과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나라들은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를 달러화 환율에 고정하는 것을 반대. 심지어 국제통화기금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원조를 전면 철회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함. 결국 인도네시아는 경제위기에 빠져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위기도 맞음. 2월 11일 달러화와 인도네시아 루피아화의 환율은 1대 1만이 되었고, 인도네시아 금융질서는 무너짐. 한편 국제투기꾼들은 태국 바트화, 싱가포르 달러화, 필리핀 페소화 등 동남아 국가화폐를 공격.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일본, 타이완 경제는 또다시 무너짐. 엔화, 원화, 뉴타이완달러화는 모두 대대적 공매도 공세를 당함. 이로써 아시아 금융은 짙은 안개 속으로 빠져들었고, 아시아 금융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3) 화폐를 공매도하는 것과 동시에 주식시장을 공략하는 것. 협공작전은 금융자원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 아시아 금융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국제투기군들은 다시 홍콩에 주목했고, 대대적 물량공세에 나섬. 이번에도 강력한 투기꾼들이 나섬. 조지 소로스가 직접 홍콩 공략에 나선 것. 투입한 자금만 해도 수천억 달러에 달했음. 지난번의 충격은 이번 충격에 비하면 약소한 것에 불과했음. 국제투기꾼들이 맹공을 퍼붓자 홍콩 항셍지수는 1만포인트에서 6600포인트로 급락. 소로스가 이끄는 집단은 지난번의 실패를 교훈삼아 홍콩 달러화의 공매도로 주식시장을 압박해 금융자원을 획득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음. 소로스와 그 집단의 홍콩 주식시장을 집중공략해 우위에 섬. 물론 소로스와 그의 집단은 이번의 금융전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뿐만 아니라 홍콩의 금융시스템을 무너뜨려 금융자원 전부를 획득한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음. 아시아의 금융허브 홍콩은 아시아 금융위기 속에서 가장 기름진 먹이였던 것. 소로스와 그의 집단의 기세등등하게 압박해오자 홍콩정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결연하게 맞섰음. 홍콩 항셍지수가 6600포인트까지 떨어진 불리한 상황에서 홍콩정부는 앞서 환율안정에 기울였던 노력을 주식시장 방어에 쏟음. 대량의 외환보유고를 주식시장과 선물시장에 투입해 국제투기꾼들이 매도한 주식과 선물물량을 받아냄. 일정기간의 힘겨루기를 거치자 홍콩 항셍지수는 하락세를 멈추고 안정화됨. 이때 실패를 인정하기 싫었던 소로스는 공격목표를 홍콩 달러화로 바꿈. 이미 대비를 하고 있던 홍콩정부는 다시 홍콩 달러화를 두고 국제투기꾼들과 각축전을 벌임. 홍콩 정부는 어떠한 대가를 아끼지 않고 국제투기꾼들이 투매한 홍콩 달러화를 사들여 홍콩 달러화와 달러화의 환율을 7.75대 1로 안정시킴. 홍콩 금융자원전은 비로소 홍콩 정부의 승리로 막을 내림. 국제투기꾼들은 홍콩에서 약 700억달러라는 참담한 손실을 기록. 하지만 홍콩 역시 타격을 입음.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에서 국제투기꾼을 상대로 방어전을 펼치기 위해 사용한 금액이 98년 한달간 약 1450억 달러에 달했기 때문.
- 세계가 점점 하나가 되는 오늘날, 미국 금융자원손실은 미국채권과 달러화를 보유한 나라로 전가됨. 세계 금융위기가 일어난 후 미국정부는 즉각 채권을 발행해 월가 금융조직의 부족한 자금을 메워줌. 채권이 발행되자 채권가격은 곧바로 큰 폭의 하락세를 보임. 미국 채권과 달러를 보유한 국가의 금융자원도 동시에 감소. 이밖에 미정부가 금융위기동안 시행한 시장구제계획도 정부의 재정적자와 무역수지 적자가 늘어난 원인으로 작용. 결국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옴. 시장구제계획이 시행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달러화가 다시 평가절하의 길로 들어선 것. 달러화의 평가절하는 다시 국제원유시장을 흔들어 놓았고 동시에 세계 벌크스톡의 가격을 상승시켜 미국채권과 달러를 보유한 국가의 금융자원은 더욱 감소. 미국은 채무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외채권을 통해 자신들의 채무를 다른 나라로 전가하는 방법도 사용.
- 역사적으로 세계의 금융자원 강국은 미국처럼 금융대출을 통해 강국의 꿈을 실현했음. 20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에서 빌린 차관 덕분에 독일은 유럽 최대의 금융자원국이 됨. 20세기 중엽 미국에서 차관을 제공받은 일본은 세계2위의 금융자원국이 되었음. 21세기 초, 미국은 신흥시장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빌려 이라크를 침공했고 시장에는 유동성 과잉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세계금융위기가 촉발됨. 일극화 발전모델은 그야말로 부자나라들에게 너무 많은 혜택을 준다고 할 수 있음. 그들은 자신들에게 상당히 유리한 금융시스템을 통해 가난한 나라들의 금융자원을 마음껏 가로챌 수 있음. 여러가지 복잡한 원인으로 이런 불균형의 일극화 발전 모델은 당분간 지속될 것임. 그 주요원인은 첫재, 현재 세계의 정치, 경제구조가 완벽하지 않고 개도국의 힘을 한데 모으기가 어려워 미국 등 정상급 선진국에 강력하게 맞서 수 없기 때문. 둘째, 미국 등 정상급 선진국 금융자원과 과학기술의 수준이 여전히 선도적 위치에 있어 단기간에 국면을 전환하기는 어렵고, 셋째, 미국 등 정상급 선진국의 군사패권주의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
- 청나라 왕조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할 당시 돈은 바닥나고 곧 목숨이 끊어질 상황. 그들은 백은이 없었기 때문에 탐욕스런 일본을 만족시킬 수 없었음. 청나라가 돈으로 일본의 환신을 살 수 없자 서구 열강은 흔쾌히 청나라에 배상금으로 쓸 백은을 빌려줌. 서구 열강의 은행단은 청나라에 높은 이자로 차관을 제공했고, 청나라는 상환시에 원금과 이자를 합쳐 백은 6억량을 갚아야 했음. 그 구체적 상황은 다음과 같음. 1895년 7월 청나라는 프랑스, 러시아 두나라 은행단과 4리 차관계약을 체결. 총금액 4억 프랑, 연 이자율 4리, 36년 원리금 분할상환 조건. 1896년 3월 청나라는 영국과 독일 두 나라 은행단과 영독 차관계약을 체결. 차관은 총 1600만 파운드, 연 이자율 5리, 36년 분할상환조건. 1898년 3월 청나라는 다시 영국과 독일 두나라 은행단과 속영독 차관계약을 체결. 총금액은 1600만 파운드, 이자율은 4.5리, 45년 분할상환 조건. 이 계약에 따라 조건은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요구한 배상금인 백은 2억량을 위해 백은 4억량을 더 지불해야 했음. 마지막에는 원금과 이자의 합계가 6억 471량에 이르렀기 대문. 이를 통해 청일전쟁 이후 중국의 부를 가장 많이 약탈해간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서구열강임을 알 수 있음. 사실 표면적으로 백은 2억량을 가져간 일본은 그리 많이 약탈한 것이 아님. 일본이 약탈해간 2억량 대부분이 서구 금융그룹에 외채를 갚고 군수물자를 사들이는 데 쓰였기 때문. 군수물자의 비용은 백은 수천만량에 달했음.
- 쑨원이 1925년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장제스가 왕징웨이와 함께 국민정부를 이끌어 나감. 하지만 장제스는 미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했음. 왕징웨이도 중국을 침범한 일본 제국주의의 대변인이 됨.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도움에 힘입어 열강들은 중국 금융화폐자원 약탈에 박차를 가함. 왕징웨이는 특히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동안 일본에 투항해 일본이 점령한 지역에 세운 정권의 수장이 됨. 장제스는 국민정부 최고 권력자가 된 후 북양정권의 방법을 그대로 이어받아 거액을 차관했음. 차관은 열강이 중국 금융화폐자원을 약탈하는 중요한 방식이었음.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은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부정한 축재를 도우며 중국의 금융화폐자워을 약탈하기 시작. 열강의 고문들은 장제스 정부가 고금리 이자를 주는 공채를 발행할 수 있게 도움. 이때부터 중국의 공채 시장은 팽창하기 시작. 나아가 중국 금융자본이 급속히 성장. 나중에는 열강들의 이익집단인 장, 쑹, 쿵, 천 사대가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국면이 됨. 결국 사대가문은 중국 금융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농업은행, 우정 저축환업국, 중앙은행, 중앙신탁국, 중국은행, 교통은행을 완전히 통제해 관료가 독점하는 시스템을 구축. 이로써 열강들이 중국 금융화폐자원을 더 쉽게, 더 많이 약탈할 수 있었음. 중일전쟁 기간, 2차대전을 치르던 열강들은 그 와중에도 중국약탈을 멈추지 않음. 열강들은 사대가문을 조종해 채권을 발행하게 했고, 장제스 정부에도 더 많은 차관을 제공. 더욱이 해방전쟁기간에 미국 등이 장제스 정부에 빌려준 자금과 군수물자대금은 1000억 달러가 넘었음. 이로 이해 중국 경제는 심각한 인플레를 겪음. 당시 국민정부가 발행한 지폐는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었음. 결국 사대가문과 국민정부는 분노한 국민에 의해 무너짐. 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고 공산당이 이끄는 새로운 시대의 인민민주정권이 탄생. 신중국 수립후 금융자원을 약탈하던 세력과 대리인은 사라지고, 열강이 중국 화폐금융자원을 약탈하던 시대는 종말을 고함.
- 08년 11월 미국을 공황상태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 금융위기가 일어난 것. 그러자 전 세계의 거의 모든 투자자들이 앞다투어 가치보전도가 높은 금을 사들이기 시작. 결국 금값은 폭등했고 달러가치는 폭락. 과거 미정부는 월가 금융거물을 시켜 금값을 잡을 수 있었음. 하지만 금융위기가 일어나 월가 거물들이 연이어 파사하자 미정부는 달러의 하락세를 막을 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 이때 미정부는 어떻게 했을까? 이번에 미정부는 과거처럼 황금을 팔아 달러화 가치를 억누르지 않음. 이때의 시장상황은 천문학적인 양의 황금을 퍼부어도 모두 깨끗이 삼켜버릴 수 있었기 때문. 그래서 미정부는 당시 금융위기로 크게 타격을 입지 않은 월가 거물 골드만삭스에게 홍콩상하이은행과 함께 금시장에 들어갈 것을 지시. 골드만삭스와 HSBC가 금시장에 들어갈 때 많은 투자자들은 직감적으로 골드만삭스와 HSBC가 황금을 매도해 달러가치를 끌어올릴 것이라고 판단. 하지만 투자자들은 골드만삭스와 HSBC가 금시장에 들어온 후 금값을 떨어드리지 않고 오히려 금값을 폭등시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함. 결국 몇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금값은 천달러 관문을 돌파. 이때 월스트리트의 각 기관들은 금값이 얼마 지나지 않아 2천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 이렇게 되자 금시장은 큰 자극을 받아 금값은 연일 신기록을 갱신. 하지만 예전과 달리 금값이 오르자 달러가치도 덩달아 빠르게 상승. 뿐만 아니라 달러는 금세 강력한 위치를 회복함. 그 원인은 무엇일까? 금을 구매하는 유일한 화폐가 달러였기 때문. 금값이 올라 다른 나라 투자자들이 황금을 사려고 할 경우 그들은 본국 화폐를 달러로 바꾸어야 함. 그러고 나서 달러로 황금을 사야 하는 것. 결국 금융위기 기간에 세계 각국의 화폐가치는 떨어졌지만 달러화만은 그 가치가 오르는 현상이 나타남. 미정부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했고 달러화의 강력한 지위를 지켜냄. 그후 미정부는 달러화의 강력한 지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졌음. 달러화 위기는 달러화의 강력한 지위를 약화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달러화의 가치보존성을 크게 높이는 역할을 함. 이로 인해 세계 투자자들은 달러화가 가치보전도가 가장 높은 화폐라고 인식. 세계 금융위기 동안 달러화만이 절하되지 않았고, 현재 달러화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 화폐였기 때문.
- 91년 12월 반세기가 다 되도록 조용히 숨죽이고 인내해 온 유럽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 당시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무력사용결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유엔 안보리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세계적인 비난을 샀음. 미국이 걸프전쟁에 집중하고 있는 기회를 이용해 유럽은 배후에서 미국을 공격해 세계 경제와 정치의 중심이라는 전략적 지위를 탈환하려 했음. 미국이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때 유럽 각국의 정부 수뇌들은 마스트리히트 정상회담에서 유럽연합조약을 통과시킴. 유럽연합조약의 체결은 유럽국가들이 연합해 하나의 단일한 조직을 만들려는 꿈이 실질적으로 한걸음 내디딘 것. 이후 미국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93년 11월 1일 유럽연합조약이 정식 발효되었고, 유럽연합이 출범. 유럽연합의 탄생은 전세계의 주목을 끌었고, 사람들은 한가지 의구심을 갖게 됨. 이제 막 탄생한 유럽연합이 미국의 수중에 있는 패권을 가져올 수 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줌. 유럽연합은 미국이 보유한 패권을 가져올 수 없었음. 유럽연합이 수립된 후 미국은 유럽의 경제발전에 연속적으로 압박을 가함. 관련 통계에 따르면, 유럽연합 출범후 유럽연합이 수출하는 상품에 대해 미국의 반덤핑 제소가 12.7% 늘어남. 게다가 미국은 유럽연합이 화폐맹주인 자신에게 도전하는 조직이 되는 걸 용인할 수 없었음. 겉으로는 무척 사이가 좋은 동맹국 관계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미국이 예상치 못한 것이 있음. 세계경영의 바통을 넘겨받으려는 유럽의 열망이 예전보다 훨씬 강렬했던 것. 02년 1월 유로화는 유로존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화폐가 되었고, 정식으로 유통됨. 유로화가 나타난 달러자리를 넘겨 받으려 할 때가 되서야 미국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 많은 나라들과 IMF는 유로화가 중요한 비축통화가 될 것이라 생각. 유로화가 시장에서 유통되기 전에 전세계의 국제비축통화는 오직 달러밖에 없었음. 유로화의 등장 자체만으로도 이미 달러의 화폐맹주 지위를 위협했다고 할 수 있음. 그럼 미국은 달러를 위협하는 유로화를 어떻게 제거하려 했을까? 미국은 유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금융자원을 약탈해가는 방법을 채택. 화폐의 강세는 그 배후에 금융자원을 얼마나 비축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 얼마후 미국은 유로화에 타격을 가함. 하지만 유로화는 다른 화폐와는 달랐음. 그 자체가 지역화폐가 통합된 일체화의 산물이었고, 뒤에선 금융자원이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 이것이 바로 유로화가 시장에서 유통될 때 일부 국가와 IMF가 유로화를 국제비축통화로 사들인 이유이기도 했음. 그러나 미국은 결코 유로화를 두려워하지 않았음. 당시 유로화가 미국을 위협하기는 했지만 달러화의 강력한 지위에 도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 게다가 미국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음. 공격하기에 가장 유리한 시기를 기다렸던 것. 미국은 당시 유럽연합이 매우 단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럽연합에서 내란이 일어날 때 다시 공격하면 단숨에 유로화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 더 중요한 점은 그때가 되면 금융자원도 대량획득할 수 있다는 것. 사실 단결은 유럽귀족의 피에 가장 필요한 요소였음. 휘황찬란한 로마제국시대든, 게르만의 전차가 유럽을 도살장으로 바꾼 시대든, 단결은 유럽국가의 이슈가 아니었음. 그들의 피에는 교활함, 적의, 서로간의 약탈이란 정서만이 흐를 뿐이었음. 그래서 유럽이 화폐단이로하로 달러에 맞섰을 때 미국은 유럽연합이 다시 내란에 휩싸일때 유로화로 지탱되는 금융자원을 약탈하기로 결정. 미국은 행동에 나서지 않고 노련한 사냥꾼처럼 조용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음. 하지만 유럽연합은 미국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발전을 이루었음. 07년 유럽연합 경제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체가 됨. 날로 커져만 가는 유럽연합의 경제를 지켜보면서 미국은 바짝 긴장. 이 시점이 되자 미국은 더이상 기다릴 수 없었음. 그랬다간 유로화가 달러를 대체하는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 미국이 유럽연합에 화폐전쟁을 일으키려고 실질적 준비에 돌입했을 때 미국은 자기집에 불이 난 것을 발견. 즉, 부동산 거품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불러온 것.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났을 때 미국은 그야말로 어쩔 줄 몰라 허둥댐. 그러나 사태가 점점 세계금융위기로 번져감에 따라 미국은 큰 불에 화상을 입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을 안절부절못하게 했던 적수 유럽연합도 중화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됨. 미국은 한시름을 덜 수 있었음. 자기 몸에 붙은 불을 먼저끄고 다시 생각할 시간을 번 것. 그러나 미국은 자신이 화상치료를 끝내기도 전에 중화상을 입은 유럽이 자신의 불을 끄는 건 물론 빠른 회복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됨. 09년 하반기에 유럽연합은 강력한 회복기에 들어섬. 이때 미국은 다시한번 당황했음. 먼저 불을 끄고 난 다음 유럽을 공격한다는 전략을 실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자신의 불이 다 꺼질 때면 유럽은 이미 세계 최대의 재력가가 되고, 유로화 역시 달러의 강력한 지위를 무너뜨릴 것이 분명. 그래서 미국은 오랫동안 유럽에 묻어두었던 시한폭탄인 그리스 채무위기를 터뜨림. 그리스 채무위기는 달러와 유로화의 화폐전쟁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
- 10년 3월 이후 유로화는 그리스 위기의 영향으로 약세로 돌아섬. 이때 달러화는 유로화와 화폐전쟁을 시작. 전쟁 초기 유럽연합은 자본등록 방식으로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유로존 경제를 안정화시켜 달러화와 맞서게 함으로써 유로화가 어느정도 우위를 점하게 한다는 계산. 하지만 미국은 유럽에게 숨쉴틈조차 주지 않음. 월가 투자은행들은 과거의 화폐전쟁 때처럼 신속하게 움직임. 유로화를 대량으로 사들인 것. 유로화의 절하는 불가피했고 그때가 유로화를 모두 팔아버리기에 가장 좋은 시기였음. 월가 투자은행들이 유로화를 대거 매도하기 전, 유럽연합 정부는 유로화의 화폐가치를 계속 유지해 유로화 환율을 안정시키기로 결정.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거액이 자금이 필요했음. 그리스 채무위기로 타격을 입은 후 원래부터 단결되지 못했던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 일부국가는 거액의 자금을 투입해 그리스 등의 국가를 구제하고 유로화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 하지만 몇몇 국가들은 그리스 등의 국가를 구제하는 걸 포기하고 미국과 협상해 유로화를 안정시키자고 주장. 결국 두 진영의 국가들이 계속 다투는 사이 월가 투자은행들은 천문학적인 양의 유로화를 팔아치움. 유로화의 매도세는 피할 수 없었음. 유로화는 달러와의 첫 싸움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심. 유로화의 절하로 유럽연합은 약 2000억 유로에 달하는 화폐자원을 상실. 세계경제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앞으로 10년 내에 유로화는 달러에 다시금 공격을 가할 힘을 갖지 못할 것.
- 일찍이 진시황 때 외국국적 인사인 이사는 진나라 재상이 됨. 이사는 진시황에게 간축객서를 바치고 새로운 인재강국 전략을 세움. 이는 진시황이 여섯나라를 통일하는 데 밑거름이 됨. 당나라 때 태종은 수나라의 과거제도를 계승하고 한편으론 빈공과를 신설. 빈공과란 외국 국적의 유학생과 조공을 바치러 온 사람을 귀빈으로 예우하고 그들에게 당나라 왕조의 과거시험에 응시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말함. 우수한 성적을 거둔 사람에게는 관직을 하사하기도 함. 당시 유명 인물로는 최언위, 최치원, 최승우가 있었음. 특히 최언위는 한림원 대학사가 되어 당나라 고위관리가 됨. 태자의 스승을 역임하기도 함. 당나라 왕조가 중국 역사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많은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였기 때문.
- 세계은행이 제공하는 통계에 따르면, 08년 말까지 졸업 후 다른 나라에서 발전의 기회를 잡은 영국 대학생이 170만명에 이른다고 함. 대학 졸업생 중에서 17.4%를 차지하는 수치. 영국 대학 졸업생이 선호하는 국가는 주로 미국과 캐나다. 이 밖에 호주를 선택한 졸업생도 상당수. 자료에 의하면, 170만명 가운데 약 130만명이 미국과 캐나다로 향함. 그 가운데 캐나다로 간 사람은 60만명에 달해 미국보다 조금 적었음. 그러나 02년 이후로는 매년 영국에서 캐나다로 가는 대학 졸업생의 수가 미국으로 가는 수보다 더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음. 대량의 인적자원이 북미로 향하자 영국인들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움에 쌓임. 영국이 자랑으로 여기던 과학연구와 첨단기술 인재양성이 한층 퇴보했고, 심지어 영국의 현행 교육제도에 대해 의문과 불만이 제기됨. 영국 외에도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강국의 인적자원도 캐나다로 대량 유입되고 있음. 이들 국가의 과학자와 기업가는 인적자원의 외부유출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그에 대한 정부의 각성을 여러차례 촉구했음. 그래서 이들 국가는 캐나다의 인재정책에 맞서 여러가지 대응책을 마련하기 시작. 캐나다의 강력한 인재흡수력은 각국 정부의 경계대상이 됨. 하지만 캐나다의 독특한 지리적 우세와 미국이라는 든든한 배경 덕에 많은 인재들이 캐나다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는 쉽지 않음. 게다가 개도국은 문제가 더 심각. 일례로, 인도정부도 인적자원 유실문제가 심각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있지만, 경제, 정치 등의 열세한 조건으로 인해 우수한 인재가 캐나다로 가는 걸 막지 못하고 있음.
- 미국은 전략적 광산자원의 통제를 일찌감치 시작. 50년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국방생산법은 희귀금속을 군수물자 생산과 비축분야에 포함시켜 관리하도록 규정. 80년대 레이건 정부는 국가물자와 광물방안 정책을 펼침. 그 정책은 정부가 반드시 핵심물질과 광물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도록 규정. 전쟁이 발발해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각종 전투부대를 파견할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핵심원료의 부족으로 부대의 전투력이 저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정책의 골자임
- 희토류를 충분히 비축하고 중국의 경계를 방지하기 위해 일본은 기존의 구매전략에 변화를 주었음. 공개적으로 집중해서 대량의 희토류를 사들이는 방식에서 분산해서 소량씩 사들이는 방식으로 전환. 일본기업은 중국의 홍콩, 타이완, 동남아 등지에 공장을 세우고 중국과 제3국에서 희토류를 수입해 희토류 구입처를 분산하고 있음. 그들은 광시, 윈난성 등에서 희토류 완성품이나 반제품 밀수를 통해 대량 사들임. 또한 홍통, 태국 등에서 항구무역을 통해 희토류를 수입하기도 함. 이렇게 하면 다른 나라들의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있고, 구매의 시간차와 1최구매량을 줄임으로써 큰 폭의 가격상승을 피할 수 있음. 결국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희토류 자원을 확보. 관련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희토류 자원의 약 90%를 중국에서 수입했으며, 일본의 현재 희토류 비축량은 앞으로 20년 동안 사용할 수 있음. 하지만 일본이 중국에서 희토류를 수입하는 데 사용한 비용은 매우 작음. 저렴한 가격으로 수입한 희토류 금속은 일본 첨단산업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임. 일본기업은 저렴하게 수입한 희토류 원료를 첨단기술을 통해 부가가치를 크게 높여 첨단제품을 제작. 그리고 이를 중국에 수출해 엄청난 이윤을 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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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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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음모 상

경제 2014. 10. 29. 22:43

 


자원음모 - 상

저자
리우쑤샤 지음
출판사
책속의책 | 2014-04-11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자원고갈에 대한 경고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중동,...
가격비교

- 자원에 대한 수요의 증가로 자원가격이 상승하면 달러화 약세로 이어짐. 벌크스톡의 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면 벌크스톡의 기준가격인 달러의 유동성이 증가하게 되고 이로 인해 화폐가치가 하락하기 때문. 화폐가치가 하락하면 인플레의 압력이 높아짐. 금융위기의 충격때문에 현재 세계 각국은 저금리를 통해 경기를 자극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인플레 압력을 크게 높이는 요인임. 이처럼 세계가 높은 인플레에 직면해 있는 가운데 점점 자원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음. 자원은 신용을 기반으로 하는 화폐와 달리 진정한 부라 할 수 있음. 자원에 투자하면 화폐의 가치를 보전할 수 있고, 자산이 크게 줄어드는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회피할 수 있음. 자원투자가 가치를 발휘하는 시기는 바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진 때임. 앞으로 자원제일주의 시대가 시장에 모습을 드러낼 때 세계시장은 어떤 추세로 바뀔까?
첫째, 자원시장의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자원공급국과 자원 소비국의 상호 의존도가 커짐에 따라 경쟁과 협력이 일반화될 것임. 자원시장의 세계화는 자원 공급국과 자원소비국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자원수출국과 자원공급국 사이의 이익관계가 더욱 긴밀해질 것임. 만약 자원류 벌크스톡의 가격이 지나치게 높으면 세계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음. 세계경제가 침체하면 국제시장에서 자원류 벌크스톡의 수요가 줄어들어 자원공급국은 자원상품을 팔지 못해 상품의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음. 이렇게 되면 자원공급국은 손실을 보게됨. 그래서 세계 주요 자원수출국은 석유수출국기구 같은 자원통제기구를 만들어 자신의 이익을 지킴
둘째, 세계 자원 소비의 중심이 점차 신흥경제시장으로 옮겨가면서 신경제시장과 구경제시장 사이의 갈등이 심화될 것임. 90년대부터 세계자원 소비의 중심은 유럽에서 북미로 이동. 고도성장에 힘입어 미국은 세계경제시장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로써 미국은 영국, 프랑스 등이 대표하는 유럽의 구경제시장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음.
- 2000년 395톤에 불과했던 중국의 금보유량은 현재 1,054톤으로 급증해 세계 금보유고 순위에서 5위를 차지. 미국이 8133톤으로 가장 만혹, 독일이 3412톤, 국제통화기금이 3217톤, 프랑스 2478톤, 이탈리아 2451톤. 이중 독일은 전체 외환보유고 가운데 71%를 금으로 보유. 선진국들이 외환보유고를 다변화하고 실물자산인 자원의 비중을 높이고 있는 것은 개도국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큼. 이것은 이제 화폐제일주의 시대는 이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의미. 그러므로 화폐위주의 전략에서 자원위주의 전략으로 발전전략을 전환해야 함
- 1918년 11월 1차대전이 끝나고 나서 세계는 표면적으로 평온을 되찾은 듯했고 더이상 무력분쟁도 없었음. 하지만 세계의 산업분야에서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전략자원인 광물은 각국의 주요 목표가 되었음. 당시 영국과 미국은 전세계 석탄의 53%, 철광석의 48%, 석유의 76%, 동의 79%, 알루미늄의 81%, 납의 74%, 그리고 방대한 식민지와 세력권을 보유. 그밖에 프랑스, 구소련 등 유럽강국도 막대한 전략자원을 장악. 이에 대해 급성장세에 있던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의 신흥국가들은 불만이 매우 컸음. 이들 국가들은 자신들의 자원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미국, 영국 등과 대립했고, 갈등이 격화되던 가운데 결국 2차대전이 일어남. 20세기 전반 50년 동안 전화가 끊이지 않았던 근본적 원인은 바로 자원분배의 불균형에 있었음.
- 전통적인 강국들과 비교했을 때 미국은 성장과정에서 전쟁이 가장 적었던 나라임. 또한 자원비축과 경제발전의 기반이 되는 평화의 기간이 가장 길었음. 전통적 강국으로 꼽히는 영국과 비교해보면, 1688년부터 1763년까지 75년동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거의 매일 전쟁을 치름. 자본주의 국가들에 있어서 이 기간은 큰 발전을 이룬 황금기였음. 영국도 이 시기 대외전쟁을 통해 많은 토지와 자원을 약탈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고속성장에 유리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음. 반면 미국은 1776년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문을 공포하여 자립의 발판을 다져씅며 발전을 위한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 나감. 또 한편으로 운도 따라줌. 황제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는 지리적 이점이 외부세력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껏 실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 다른 한편으로는 불간섭 주의 노선을 택해 전화를 피함. 미국은 독립한 후로 줄곧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에 유럽 각국이 혼란에 빠지고 혁명의 불길에 휩싸여 있을 때도 자국 경제발전에만 힘을 쏟음. 그 결과 유럽과 미국의 성장속도에 현격한 차이가 발생. 결국 유럽의 지위는 점차 하락하고 미국은 상승세를 타 미국이 유럽을 앞지르게 됨.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내분과 전쟁이 없는 환경은 한 나라의 고속성장을 보장한다는 것을 알수 있음. 자원의 낭비를 최소화하고 자원을 경제발전에 최대한 활용할 수 있기 때문. 이에 더해 미국은 다른 나라들이 전쟁으로 한창 바쁜 와중에 마치 강태공이 기회를 기다리며 낚시를 했던 것처럼 한쪽에서 조용히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가 기회를 틈타 이익, 즉 자원을 챙기는 데 능했음.
- 히틀러가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나치군에 구소련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미국은 바다 건너에서 기회를 보고 있었음. 그 당시 미주리 주 상원의원이었던 트루먼은 한 공개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음.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쟁에 대한 미국의 전략은 이렇습니다. 히틀러의 나치기가 스탈린의 침실에 꽂히게 되면 어떤 망설임도 없이 스탈린을 지원할 것입니다. 스탈린의 군대가 뮌헨으로 진격하면 우리는 소련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런 전략은 유럽인들이 끊임없이 자기편끼리 서로를 죽이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기회를 틈타 발전을 이루고 더 많은 전략적 자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 정치가는 미국이 최대강국이 된 원인을 이렇게 지적. "세계 정치라는 럭비경기에서 초창기 미국은 출전기회를 얻기 힘든 후보선수였음. 미국은 늘 벤치에 앉아 있다가 경기장의 주전선수들이 기진맥진했을 때에야 경기의 마무리를 위해 대신 투입되었다. 미국은 두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모두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에 출전하여 공 한두번 주고 받은 것만으로 가장 많은 전리품을 챙겼고 수상의 영예마저 가져갔다."
- 여러나라가 북극을 노리는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자원때문. 미국 지질조사국의 발표에 따르면, 북극권에는 약 900억 배럴의 석유 및 러시아 내 총매장량과 맞먹는 44조 세제곱미터의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음. 이 양은 세계 매장량의 25%에 해당. 그래서 전문가들은 제3차 대전이 북극해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며 전쟁의 도화선은 북극이 보유한 풍부한 자원이라고 지적.
- 경제가 점점 활기를 되찾아가던 러시아는 05년 외환보유고가 2257억 달러로 세계 4위를 기록했고, 여러해 동안 침체해 있던 경제는 상승곡선을 그림. 러시아의 경제회복은 즉각 미국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킴. 미국은 러시아의 경제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두려워했음. 예전 전성기를 구가하던 구소련은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에 위협적인 존재였기 때문. 외환보유고가 2000억 달러를 넘자 러시아 정부는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섬. 석유가 세계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러시아 정부는 석유를 비축하기로 결정. 이 당시 석유를 비축하는 것은 황금을 비축하는 것과 같았음. 러시아 정부가 석유비축을 시행할 당시 국제유가는 배럴당 70불에 달했음. 석유가 점점 고갈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1배럴에 70달러는 싼편이었음. 그래서 러시아는 국제 석유시장에서 석유를 사들임. 러시아의 경제회복에 대해 줄곧 좌불안석이었던 미국은 국제석유시장에서 석유가 러시아로 대량 유입되는 광경을 지켜보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음. 마침내 러시아의 외환을 빼앗아올 방법을 찾아낸 것. 방법은 간단했다. 미정부는 그 임무를 자신의 금융킬러 즉 월가 투자은행에 맡김. 모건스탠리, 골드만 삭스, 시티은행 등 월가 거물들이 국제석유시장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이후 거대 투자은행들과 러시아가 국제시장에서 석유를 앞다투어 구매. 그러자 1배럴당 70불이던 유가가 147달러까지 급등. 월가 투자은행들과 러시아가 국제석유시장에서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을 때 미정부는 이 기회를 이용해 워싱턴에서 세차례에 걸처 국제 유가 청문회를 열음. 여기에서 러시아와 국제투기꾼이 유가를 끌어올렸다는 결론이 내려짐. 곧이어 세계 여론은 비난의 화살을 러시아와 월가 국제투기꾼들에게 돌렸음. 세계경찰을 자청하던 미정부는 즉각 골드만 삭스, 시티뱅크, 모건스탠리 등 월가 거물들을 한자리에 불러 비난을 퍼부으며 국제유가를 혼란에 빠뜨린 국제투기꾼들에게 일정한 제재를 가하겠다고 밝힘. 미정부의 월가 거물들에 대한 질타는 아직 러시아를 상대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려는 일종의 연막작전. 러시아는 결국 미국의 작전에 속음. 국제원유시장에서 국제투기꾼이 사라지고 구매자가 혼자만 남았다는 사실에 러시아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음. 그래서 즉각 원유구매량을 늘림. 바로 이때 월가 거물들은 물건을 방출하기 시작. 그들은 보유한 석유를 자신들이 구매한 가격보다 더 높은 값에 러시아에 판매. 석유 구매에 열을 올리고 있던 그때, 러시아는 수중에 현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음. 그러자 월가 투자은행들도 다급해짐. 러시아의 수중에 현금이 떨어지면 자신들도 비싼 값에 석유를 팔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지기 때문. 그래서 월가 투자은행들은 러시아에 대출을 해주기로 결정. 월가 투자은행들은 러시아에 무척 관대한 태도를 보임. 러시아가 원하기만 하면 액수가 얼마든 대출을 제공했고, 요구하는 담보도 간단했음. 러시아 대기업 주식을 담보로 맡기면 흔쾌히 대출을 해주었던 것. 한마디로 '현금이 없어도 상관없어. 대출을 해줄테니 우리가 보유한 석유를 전부 사가기만 하면돼'라는 식이었음. 러시아는 월가 투자은행들이 그렇게 우호적으로 나올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함. 담보도 순자산 담보가 아니라 거품성격이 농후한 주식을 담보로 요구했기 때문에 부담감이 크지 않았음. 이에 러시아 기업가들은 국제적인 규모의 투자은행들을 비웃었음. 수익률이 높은 주식이 실은 별 값어치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 모른다가 생각해 비웃은 것. 그러나 이후의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사실을 보여줌. 러시아는 미국을 이해하지 못했고, 핵무기보다 강력한 월가 투자은행들의 힘을 알지 못했음. 얼마 지나지 않아 월가 국제투기꾼들은 보유한 고가의 원유를 모두 처분했고 러시아도 석유를 충분히 비축하게 됨. 이후 유가가 돌연 급락. 배럴당 147달러이던 유가가 배럴당 32달러로 폭락. 유가 폭락으로 러시아는 막대한 손실을 입음. 러시아가 힘들여 쌓아 놓은 외환보유고는 유가폭럭에 따라 대축 축소됨. 러시아가 심하게 줄어든 외환보유고에 울상을 짓고 있을 때, 미국은 마침내 본색을 드러냄. 월가 투자은행들이 채무상환을 요구. 그 순간 러시아는 국제적 규모의 투자은행들이 왜 애초에 수익률이 높은 주식을 담보로 요구했는지 비로소 깨달음.
- 스코틀랜드왕립은행 통계에 따르면 05년부터 07년까지 2년 동안 월가 투자은행은 러시아 기업에 7000억 달러가 넘는 금액을 대출해줌. 이 천문학적 금액은 러시아 경제를 다시 무너뜨림. 러시아는 구소련 해체이후 꼬박 10여년 동안 모은 2000억 달러가 넘는 돈을 거의 모두 월가 투자은행들 주머니에 넣어 줌.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탈탈 털어 주었을 뿐 아니라 외채까지 짊어짐. 10여년 동안 고생스럽게 견뎌온 러시아인의 삶이 하룻밤 사이에 구소련 해체전으로 돌아간 것. 이렇게 석유전쟁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본 러시아는 이제 더이상 석유쟁탈전에서 미국에게 많은 주도권을 쥐어주려 하지 않을 것임. 따라서 미국 정부가 석유자원을 풍부하게 보유한 이란에 대해 전략적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러시아 정부는 주저없이 도울 것임. 미국과 러시아가 이란 핵문제에서 견해차를 보이는 것은 사실 자원문제 때문만은 아님. 두나라 사이에는 중요한 두가지 쟁점이 있음. 하나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통제권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카스피해의 에너지 문제임.
- 59년 12월 1일 미국, 영국, 남아공, 노르웨이, 뉴질랜드, 벨기에, 소련,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칠레, 프랑스 12개국은 남극조약에 서명. 남극조약은 다음과 같이 규정됨. "남극에서 실질적인 과학탐사를 수행하는 세계의 어떤 나라도 본 조약의 가입을 환영한다. 남극은 비군사지역이며, 남극에서는 한 나라로서의 법적 지위는 인정하지 않으며, 새로운 영유권 주장을 금지한다. 이전에 제기된 영유권 주장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남극조약은 20세기 후반에 거둔 가장 위대한 인류의 성취 가운데 하나이며, 그 지위는 87년 미국과 구소련이 체결한 중거리핵전력조약을 넘어서는 것으로 평가받음. 남극조약이 체결된 뒤, 남극 대륙은 수십년 동안 평온을 유지. 그러나 이것은 표면상의 안정일뿐 암암리에 일어나는 불협화음은 결코 그친 적이 없음. 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도 남극대륙의 영유권 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분쟁임. 남극조약은 큰 의의를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유권 분쟁을 잠시 미뤄두도록 하는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해 근본적인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존재. 오늘날까지 남극 영유권을 주장하는 몇몇 나라들은 여전히 보란 듯이 자신들의 영토를 보살피며 영유권을 지키고 있음. 일례로 칠레, 아르헨티나 등 국가는 남극대륙에 우체국, 학교, 병원, 은행 등의 사회기반시설을 적극적으로 짓고 있으며, 국무회의 등 대내외 행사를 진행하기도 함. 심지어 남극대륙에서 전화를 걸면 국내기준을 적용해 요금을 받고 있음. 또한 이들 나라는 여성들이 남극에서 출산하는 것을 장려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즉시 남극토착주민임을 대내외에 알림. 이런 자국영토 만들기 사례는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음.
- 현재 중국과 일본은 동중국해의 석유자원 개발을 놓고 끊임없이 분쟁을 벌이고 있음. 동중국해에 250억톤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고 중국의 연간 소비량이 3억톤 내외인 것을 감안한다면, 동중국해의 석유자원은 중국이 8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름. 게다가 동중국해에는 8조 4000억 세제곱미터에 달하는 천연가스도 매장되어 있어, 이곳은 중국의 중요한 에너지기지라 할 수 있음. 이 때문에 천연가스가 부족한 일본은 동중국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음. 일례로 저장성 닝보 동남쪽 춘샤오 가스전은 원래 중국 영해에 있음에도 일본은 춘샤오 가스전이 중국과 일본의 중간선에 가깝다는 이유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중국을 기소. 기소 사유는 중국이 일잔 춘사오 가스전을 개발하면 중간선 너머의 다른 한쪽에 있는 석유도 가져가게 되고, 유엔해양법협약의 규정에 따른 배타적 경제수역을 침해한다는 것. 동중국해는 겨우 330해리이고, 동중국해 남서부에 위치한 댜오위다오가 일본영토잉므로 동중국해 대부분의 석유를 일본이 차지하는 것이 맞음. 하지만 문제는 중국도 동중국해에 대해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 또한 일본의 경제수역은 자신이 직접 정한 것이고 국제법 규정에 따라 정한 것이 아니어서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했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자 결국 일본은 할 수없이 그 부분을 포기
- 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전쟁을 일으켰을 때 독일은 이미 합성석유 공장 14곳을 가동시켜 연료로 쓸 합성석유를 확보하고 있었음. 그 후 합성연료의 생산량은 더욱 늘어나 일일 생산량이 7만 배럴에 달했음. 이것은 전체 공급량의 64%를 차지. 히틀러는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함. 무기를 전력가동하기 위해선 더 많은 석유가 필요했던 것. 독일군은 서유럽을 점령한 뒤 영국을 급습했지만, 영국 왕실공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음. 또한 영국은 레이더를 발명해 독일의 폭격에 맞섰고 해상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어 독일이 단기간에 영국을 점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음. 이때 히틀러는 이제 막 생겨난 구소련으로 목표를 수정하기로 함. 그는 구소련을 신속하게 점령할 수 있기를 바랬음. 구소련을 점령하면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독일의 우방인 일본과도 접촉이 원활해질 수 있기 때문
- 기계화 전쟁에서 연료로서의 석유는 전쟁에 쓰이는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원임. 이런 전쟁에서는 석유생산과 연료수송이 승리를 좌우하는 관건. 다시 말해, 상대의 석유생산과 공급을 장악하는 자가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음.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 섬나라 일본은 원료가 풍부하지 못했고, 30년대말 석유의 80%를 미국에서 그리고 10%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들여옴. 일본은 전쟁이 확대되면 미국과의 결전을 피할 수 없으며 미국이 곧바로 자신들의 석유공급로를 차단할 것이라는 사실을 내다보고 있었음. 그래서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해 뒷일을 대비하기로 결정. 41년 7월 일본은 남부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략. 미국과 네덜란드는 즉각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금지 조치를 내림. 동인도 유전을 점령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실시하기 전에 동부 미 해군의 저지를 피할 목적으로 일본은 미국이 진주만에 세운 해군기지를 기습해 태평양에서 일본해군에 대항할 군사력을 파괴하기로 결정
- 2차대전후, 수에즈 운하는 유럽 석유수송의 중요한 관문이 됨. 유럽 석유의 3분의 2가 수에즈 운하로 운송되었고, 수에즈 운하의 물동량 중 3분의 2도 석유가 차지. 석유가 갖는 전략적 의미는 양차 세계대전에서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에 전후산업화 국가에서 석유는 경제기반이자 최대 산업분야로 발전. 산업화 국가들은 당연히 석유운송라인을 확보해야 했음. 그렇지 않으면 다른 국가에 발목을 잡힐 수 있기 때문. 당시 영국 수상 이든이 구소련의 서기장 흐루쇼프와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석유문제와 관련된 수에즈 운하에 대해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석유를 놓고 전쟁을 하게 될 겁니다. .... 우리는 석유 없이는 살수 없고 남의 손에 목이 졸려 죽고 싶지도 않습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 두나라는 이스라엘과 손잡고 이집트에 군사행동에 나서 2차 중동전쟁이 발발. 이스라엘이 이 전쟁에서 선봉을 맡은 것은 아랍과 아프리카 그리고 이슬람권의 통합고 그 세력의 지도자가 되려는 야망을 갖고 있던 나세르와의 갈등도 한 요소가 됨. 나세르는 이스라엘을 아랍세계의 눈엣가시로 여겨 사사건건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음. 이스라엘 선박에 한해 아카바 만의 티란 해협과 수에즈 운하의 통행을 금지하기도 함. 이스라엘은 아랍세계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동적 자세를 버리고 능동적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이스라엘은 적의를 보이는 이집트에 무력을 사용해 가자와 시나이반도 등과 같은 전략 요충지를 더 많이 장악하기로 결심. 56년 10월 24일 영국과 프랑스 고위급 외교관과 군장교가 파리 교외 세브르에서 이스라엘의 고위급 대표단과 비밀 회동. 이 자리에서 이스라엘이 군대를 보내 시나이 반도를 공격하려면 영국과 프랑스가 운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수에즈 운하를 점령한다는 내용의 합의가 이루어짐. 국제 정세 변화를 느낀 이집트도 전쟁에 대비. 10월 23일 이집트와 시리아는 그들이 통제하는 연합군 지휘부를 설립하여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이집트가 시리아의 부대를 지휘하기로 함. 이튿날 요르단도 이 연합군 지휘부에 가입. 10월 29일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로 진격했고, 이와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에게 운하를 넘기라는 최후통첩을 선포. 10월 30일 영국 비행기가 이집트 공항을 폭격했고 이집트군은 시나이반도에서 철수. 사전협조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제때 운하에 도착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세르는 급히 특수부대를 꾸려 돌과 시멘트 등을 대량으로 실은 선박을 수에즈 운하에 가라앉혀 수로를 막음으로써 영국과 프랑스 전함의 접근을 효과적으로 저지. 한편 나세르는 이집트 기술자에게 이라크에서 지중해로 가는 파이프라인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림. 이 밖에 사우디와 쿠웨이트도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석유수출을 중단. 이에 서유럽 전체 석유 수입량의 4분의 3이 중단됨.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세계의 봉쇄조치로 석유공급이 차단되면 미국이 부족분을 메워줄 것으로 내심기대하고 있었음. 석유가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선거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음. 뿐만 아니라 그는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과 상의 한마디 없이 마음대로 군대를 동원한 것에 대해 불쾌한 감정이었음. 때문에 유럽의 기대에 대한 그의 반응은 싸늘했음.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석유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들은 고생을 자처한 것입니다." 서유럽 사회는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아 얼마 지나지 않아 석유부족으로 인한 여러가지 곤란에 직면. 서유럽 나라들은 석유판매량 제한, 석유에 세금부과, 자가용 자동차의 주말운행 금지, 발전소의 연료를 석탄으로 대체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 석유 소비를 통제했으나 한계가 있었음. 석유공급부족은 서유럽에 심각한 경제적 파장을 몰고 옴. 게다가 소련과 미국, 국제여론은 그들에게 침략국의 꼬리표를 붙이며 몰아붙임. 11월말,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할 것을 국제사회에 약속. 아이젠하원는 긎야 중동국가에 서유럽에 대한 석유수출봉쇄조치를 철회하도록 촉구함. 이와 동시에 유엔 긴급군을 이집트와 이스라엘 국경 인근에 배치해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전면 철수토록 했음. 이때부터 수에즈 운하는 완전히 이집트의 통제하에 놓이게 됨
- 73년은 아랍국가에게 상징적인 한해였음. 4차 중동전쟁 기간에 유가는 아랍국가가 주도하는 OPEC의 조종으로 큰 폭으로 상승. OPEC가 석유의 가격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됨. 70년 유가는 1.8불에 불과했지만, 71년 시장에 대한 개입을 2.18불까지 올랐고, 73년 중반만 해도 2.90불에 머물러 있었음. 그러다가 4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자 유가는 단숨이 5.12불로 올랐고, 73년 말 OPEC은 테헤란아세 열린 회의를 통해 석유회사와의 진통끝에 석유 공급가를 11.65불로 올리는 데 성공. 한해 동안 아랍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장 상황에서 그들이 지닌 석유는 하나의 무기가 되어 놀랄만한 위력을 발휘.
- 중동각국은 모두 산유국이고, 그들 사이에는 국경이 있음. 하지만 지하의 석유자원은 경계를 그을 수 없음. 석유의 유동성은 종종 산유국간의 갈등의 도화선이 됨. 쿠웨이트는 OPEC의 규제를 받지 않고 석유를 생산했기 때문에 석유의 초과생산은 국제유가의 하락을 불러왔음. 이에 이웃 강대국인 이라크가 강한 불만을 갖게 되었던 것. 후세인은 90년 5월 개최된 아랍정상회담에서 쿠웨이트의 아미르 자비르가 마음대로 원유생산량을 늘리고 이라크의 석유를 훔치고 있다고 비탄. 이에 대해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석유를 도둑질하지 않았다고 전면 부인. 사실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석유를 훔쳤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수익증대를 위해 쿼터를 무시하고 석유를 채굴하는 것은 다른 날, 특히 이라크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만은 확실했음. 그뿐만 아니라 이라크를 제외하고 중동반도의 아랍국가들은 모두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 나라들의 왕실은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미국의 영향을 받아 증산을 통해 국제유가를 조종했음. 후세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바트당 정권은 그들이 아랍영토의 풍부한 자원을 이용해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 국가에게 봉사한다고 비난을 퍼부었음. 사담 후세인은 다른 아랍군주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고 쿠웨이트의 모든 석유를 독식하고자, 무력을 쓰기로 결심했음. 90년 8월 2일 새벽에 대대적인 군사작전이 개시됨.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점령하자 부시 역시 파병을 결심하고 국회에서 연설. "세계의 주요 석유가 후세인의 손에 넘어간다면 우리의 생활방식, 취업기회와 민주국가의 자유가 모두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미국의 이라크 파병은 이른바 민주국가의 자유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음. 미국의 정치, 군사, 경제적 힘을 중동지역까지 확대하려는, 더 좋은 석유공급원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더 컸음. 쿠웨이트는 1만 7800제곱필로미터에 불과한 작은 나라지만 석유 매장량은 현재 밝혀진 세계 매장량 가운데 9%를 차지하고 있음.
- 사우디는 이슬람교의 발원지로 이슬람 문화가 짙게 배어 있음. 파드 국왕은 이슬람교의 양대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영토로 두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자국을 양대 성지의 수호자임을 자청하며, 큰 자부심을 갖고 있음. 사우디 왕실은 국내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석유로 벌어들인 수입의 일부를 국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함. 하지만 사우디는 출산율 급증으로 20년만에 인구가 두배로 늘어남. 젊은층이 총인구의 65%를 차지하지만 대다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고 석유로 얻는 수입의 무상분배도 급증하는 인구때문에 크게 상쇄됨.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현 정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우디는 국민에게 코란경전을 철저히 교육시켰음. 이에 따라 젊은층에서 근본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음. 사우디 왕실은 민의를 따르기 위해 석유수입으로 팔레스타인을 원조하고, 반이스라엘활동을 벌이는 폭력적 성향의 극단주의 조직에도 자금을 지원함. 사우디는 아프간 탈레반 정권의 지지자이고, 탈레반 정권과 수교한 세 나라 가운데 하나이기도 함. 미국이 아프간을 공격하는 동안 사우디는 자국의 군사기지를 미군에게 제공하는 것을 거절. 이란에서 자국으로 알카에다 조직원을 이동시킬 때도 사우디는 이를 비밀리에 진행했으며 그들은 심문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음.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사우디사람들이었기 때문. 사우디는 탈레반, 알카에다 및 테러리즘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 미국인들은 사우디를 테러리즘의 온상이라고 생각함. 미국이 석유와 안보의 교환이라는 협상을 통해 사우디로부터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게 되었지만, 믿을만한 석유 공급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사우디내에서 반미정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 이런 사항들은 앞으로 사우디 왕실의 국내외정책을 좌우하게 될 것이고, 특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에 새로운 충돌이 벌어질 때는 더욱 그러할 것임.
- 9/11 사태 이후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음. 미국은 믿을 수 없는 우방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음. 이라크는 미국에게 사우디아라비아를 대체할 최선의 선택이었음. 이라크는 세계에서 석유자원을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중 하나이다.
- 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공격을 당함. 미정부는 탈레반 정권이 이번 테러공격을 감행한 알카에다 지도자 빈 라덴을 지지하고 비호한다며 비난하고 나섬. 그리하여 그해 11월 7일 미 정부는 아프간 탈레반 정권에 군사행동을 취해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림. 반테러리즘의 기치를 대대적으로 내걸고 아프간 전쟁을 일으켰지만 미국의 속내는 따로 있었음. 그들의 진짜 목적은 아프간의 중요한 전략적 위치와 카스피해의 석유를 차지하는 것이었음. 아프간은 중앙아시아의 핵심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미국이 아프간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중앙아시아의 핵심에 쐐기를 박는 것이나 다름 없었음. 그렇게 되면 중국, 러시아와 이란을 서로 떨어뜨려 놓을 수 있고, 그들 사이의 군사, 에너지 협력관계도 끊어놓을 수 있음. 동시에 아프간을 발판으로 삼아 중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면 그 세계의 중심이 미국의 세력권으로 들어오게 됨. 그러면 미국이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전략의 공백지대를 차지하게 되고, 이로써 러시아와 중국 등 잠재적 경쟁상대를 포위하여 그들을 압박할 수 있음. 지정학자드른 중앙아시아의 전략적 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자가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분석. 미국이 아프간을 지배하면 곧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첫걸음을 내딛는 것. 중앙아시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카스피해는 페르시아만 다음으로 많은 석유가 매장됨. 카스피해는 남북 길이는 1200킬로, 동서폭 320킬로의 염수호임. 이곳에 매장된 석유는 대략 1500~2000억 배럴로 세계 총매장량의 18~25%를 차지. 그밖에도 약 8조 세제곱미터의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음.
- 투르크메니스탄은 전통적인 중립국으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석유, 천연가스의 수송과 판매에서 실리적인 태도를 취했음. 즉, 러시아와 미국을 끌어들이고 두나라와 동시에 협력관계를 취하면서 양국의 경쟁을 통해 이익의 극대화를 실현하고자 했음. 이런 배경하에서 미국은 곧바로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투르크메니스탄 등과 우호관계를 수립했음. 미국은 중앙아시아 진출의 두번째 단계에 접어들었고 큰 진전을 보았음. 카스피해와 중앙아시아의 석유, 천연가스자원 보고를 개척하기 위한 탄탄한 기초를 다진 것. 세 국가들과 우호관계를 맺게 되자 러시아와 이란의 견제를 벗어나 카스피해 일대의 석유, 천연가스를 확보할 여건이 조성되었음. 러시아와 이란을 우회해 카스피해 지역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반출하기 위해 미국은 두가지 루트를 설계. 하나는 서향 루트이고, 다른 하나는 남향루트임. 카스피해 서부의 석유는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와 터키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서쪽으로 수송됨. 하지만 동부의 석유, 천연가스자원은 아프간, 파키스탄을 통해 남쪽으로 수동할 수 밖에 없음. 아프간을 통제하고 카스피해 석유의 남향루트를 열면 미국은 한편으로 러시아의 남향 통로를 끊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동향루트 개척에도 영향을 미쳐 중국에 대한 중앙아시아의 석유공급을 줄일 수 있음. 심지어 필요한 경우 아프간을 거점으로 삼아 중국으로 가는 중앙아시아의 석유공급을 차단할 수도 있음.
- 에너지 허브로서 아프간이 이런 전략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미국은 전쟁이라는 커다란 대가를 기꺼이 치르고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 이때부터 아프간 전쟁은 결실을 맺기 시작해 미국은 카스피해 지역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손에 넣기 시작. 02년 5월, 미국의 적극적 중재로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과 아프간은 대규모 파이프라인 건설협정을 체결. 카스피해 동부의 에너지를 확보하려는 미국의 목표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 아프간을 경유지로 한 석유 파이프라인은 비교적 짧기 때문에 근처의 석유, 천연가스를 아라비아해로 수송해 빠른 시간 내에 국제 석유시장에 선보일 수 있음. 02년 9월 미국 주도하에 아제르바이잔의 석유생산지 바쿠에서 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지중해 도시 제이한에 이르는 파이프라인이 착공됨. 카스피해와 지중해를 잇는 석유 대동맥이 완성된 것. 그루지야의 한 경제학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 "이는 거대한 성공이며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파이프라인은 카스피해 주변국에게 또 다른 선택권을 제공해 줄 것이며 러시아의 석유 수송선에 피해를 줄 것입니다." 서향과 남향의 파이프라인 건설은 미국 석유전략의 중요한 승리를 의미. 이것은 서방 세계의 석유에 대한 갈증을 크게 해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서방 동맹국에게 풍부한 석유 공급로를 제공해주었음. 이로써 아랍의 무기 가운데 하나인 석유의 위력은 크게 감소했고, 반면 카스피해와 중앙아시아에 미치는 미국의 영향력은 크게 강화됨. 또한 중국, 러시아, 이란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중국의 석유 공급은 타격을 입음. 카스피해 석유에 대한 러시아의 통제력은 약화되었고, 석유와 천연가스로 이익을 챙기고 있던 러시아는 큰 손해를 입음
- 철광석을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음에도 중국은 철광석 가격결정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있었음. 철광석 가격은 세계3대 철광석 공급회사가 좌우하고 있기 때문.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음. 하나는 국제 철광석 공급시장에서 품질이 우수한 철광석의 대부분을 발레, 리오틴토, BHP빌리턴 3대 광산업체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 다른 하나는 철광석의 구매자가 세계 여러나라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 중국 철강회사는 전국시대나 다름 없음. 중국 내 철강업계의 혼탁한 상황은 철강업 조직구조를 느슨하게 하고 생산력을 집중시키지 못함. 외국투자자와 투자협상에서도 다른 부문과의 공조없이 독단적으로 처리하며 기세가 등등하지만 사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사심이 가득하고 가벼운 충격에도 쉽게 약한 모습을 보임. 수요의 우위를 접할 수 있는 탄탄한 자금력과 드넓은 시장이 있는데도 선도기업이 없어 가격주도권을 갖지 못했음. 이는 중국 철강회사가 철광석을 수입할 때 피동적 입장에 서게 하고 결국 손해를 보게 만듬
- 일본이 최대한 많은 자원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지만 해외의 자원채굴권을 얻을 때는 언제나 조용히 진행함. 다른 나라의 유전과 광산을 적대적으로 사들일 경우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적대감을 불어일으킬 수 있기 때문. 일본기업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방식은 지분참여. 그들은 소유지분도 보통 7.5%를 넘지 않도록 함. 수십년간의 노하우로 자원보유국의 반감과 배척을 야기하지 않으면서도, 자원확보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적정선을 도출한 것. 일본기업읜 자원 보유국의 사회간접자본에도 투자함. 자원을 해외로 운반할 때 물류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 바로 이런 전략 덕분에 국제시장에서 원자재의 가격이 올라도 일본기업들은 큰 타격을 입지 않고, 자원을 효과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음.
- 국제 메이저 광산업체들은 새로 발견된 철광석 산지를 완전히 통제하려고 하고 새로운 철광석 공급자의 출현을 반기지 않음.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연합이 아닌 독식임. 광산업체들이 새로 발견되는 품질이 우수하고 매장량이 풍부한 철광석 산지마저 통제할 수 있다면 현재의 독점시장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고, 더욱 높은 가격의 철광석 시장이 형성될 것임. 이것이 바로 그들의 기본전략이자 야심임. 높은 각겨의 철광석이 가져다주는 고이윤에 길들여진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협하는 어떤 상황도 원하지 않음. 이런 이유로 세계 3대 광산업체들의 끊임없는 견제와 야욕의 대상으로 떠오른 곳이 서아프리카임. 특히 기니만은 아프리카 대륙의 화수분으로 각종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수산물 자원도 풍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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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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