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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인간

역사 2014. 12. 28. 10:31

 


작은 인간(인류에 관한 102가지 수수께끼)

저자
마빈 해리스 지음
출판사
민음사(주) | 1995-05-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 참고사항 ** 도서측면에 얼룩흔적이 있는도서 입니다,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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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지금의 침팬지 수준의 지능에 머물러 있었으면서도 도구 사용을 엄청나게 확장할 수 있었으리라고 내가 확신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직립을 하게 되면서 도구 사용의 비용-효과에 변화가 왔다. 이제 도구를 집어 운반하고 사용함으로써 그냥 맨몸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데 더 유리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지금 침팬지들이 실험실이나 동물원에서 하는 방식으로 도구를 사용했음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어쩌다가 하는 것도, 긴박한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 생활 양식의 중요한 일부로서 일상적으로 도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 도구 사용과 직립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진화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도구에 의존할수록 그들의 손을 발로부터 더욱 차별화되었다. 그리고 손이 발로부터 차별화될수옥 도구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였는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혜택은 무었인가? 그 해답은 도구 덕분에 땅에서 발견되는 영양가 있는 음식들을 섭취할 수 있게 된 것이라는 게 거의 확실하다.
-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힘센 사냥꾼이 되지 못한 대신, 결국 죽은 짐승을 뒤져 먹는 능력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런데 그 쪽에서 성공을 하는 데는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다. 두꺼운 고기 가죽을 뚫는 데 필요한 더 뾰족한 이빨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3백 내지 250만 년 전, 그러니까 루이 리키가 발견한 손재주 능한 인간이 출현하기 훨씬 이전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테크놀로지의 돌파구를 찾아냈다---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것이었다. 그들은 돌을 가지고 자르고 베고 쪼개는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새로운 발명품은 짐승의 살가죽과 힘줄과 뼈를 다루는 데 가장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만큼이나 끝내주었다. 그리고 이제 더욱 대담한 생활 양식이 환하게 열리고 있었다.
- 적어도 160만 년 전 에렉투스가 출현하기 전까지 우리 조상들은 주로 죽은 짐승를 뒤져 먹는 동물에 머물러 있었다. 에렉투스에 관한 자료를 모두 훑어보면 그것이 새로운 생존 양식에 기초해 하나의 생태학적인 적소를 메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것은 하빌리스보다 현저하게 키가 컸고, 그 손가락과 발가락은 나무를 잽싸게 타고 오르는 장점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는 날카로운 돌조각, 그리고 양쪽 면이 모두 사용되고 커다란 타원형 모양을 한 뾰족한 <손도끼>와 곡괭이 같은 도구들을 사용했다. 그렇게 <양면으로 된> 도구를 실험해 보면 커다란 짐승를 각 뜨는 데 매우 유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에렉투스의 도구들과 함께 발견된 동물 뼈 표면에 미세하게 나 있는 일련의 홈줄들은 <잘라낸 자국>으로 해석되는데, 이는 그 도구들이 짐승들을 분해하고 살점을 발라내는 데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에렉투스는 또한 몸통돌과 파편들을 가지고 나무를 벗기고 깎아내어 뾰족한 창을 만드는 데도 능숙했을 것이다.
- 뇌라는 기관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게 되었다. 커다란 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몸에서 그만큼 많은 에너지와 피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 사람은 휴식중에도 몸으 전체 신진 대사 가운데 20%가 뇌를 위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렇게 대가를 치르는 뇌가 생존과 종족 번식의 성공에 중요한 기여를 하지 못한다면, 쓸데없이 많은 뇌세포는 자연 선택에 의해 도태될 것이다. 에렉투스의 뇌가 도구를 발명하고 지구의 모습을 바꾸는 데 유용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엇에 도움이 되었을까? 모란드 과학 아카데미의 진화 및 이론 생물학 위원회의 일원인 콘라도 피아코프스키(Konrad Fialkowski)는 독창적인 해답을 내놓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달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 에렉투스는 뇌가 컸기 때문에 다른 맹수들이 거의 사냥을 멈추고 그늘이나 물가에서 쉬는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뛰어다닐 수가 있었다. 피아코프스키는 그의 이론을 세우는 가정으로서 에렉투스의 뇌에 필요 이상의 세포가 있어서 오랫동안 쉬지 않고 달리면서 받게 되는 열 스트레스를 잘 견딜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운다. 뇌 세포 하나하나는 다른 기관의 세포에 비해 열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그것이 파손되면 인지적인 혼란, 경련, 뇌일혈로 이어져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사람의 뇌처럼) 파손되기 쉬운 요소를 가진 종보 체계에서는 똑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요소들 및 이들 사이의 연결 고리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시스템의 신빙성을 높인다는 것이 정보 이론의 한 가지 기본적인 원칙이다. 따라서 에렉투스의 뇌는 열 스트레스 아래서 안전판 장치의 수단으로 선택된 잉여의 세포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 장치는 사냥감을 쫓아서 먼 거리를 달려갈 때 작동했다.
- 에렉투스가 장거리 주자로서 생활을 영위하고 그 몸에 증발을 통한 냉각 장치를 진화시켜 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코트를 입을 수가 없었다. 공기는 땀냄새에서 나온 습기의 얇은 막 위를 거침없이 지나가 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인간은 특유하게 <벌거벗은> 몸을 갖게 되었다. 물론 우리 몸에도 원숭이만큼이나 털이 많이 나 있다. 그러나 그 털들이 코트처럼 몸을 감싸기엔 너무 가늘고 짧다. 다만 물기를 밑으로 흘려보내는 이점만은 팔다리의 털들이 아래쪽으로 향해 있는 것으로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 우리의 언어적 탁월함은 단지 호미니드 뇌의 확대되고 재구성된 회로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유아기에서 유년기로 이행하면서 언어적 능력을 획득하도록 돕는 인간 특유의 신경 프로그램에 기초한 것인가? 만일 어린아이가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면 그는 말을 전혀 배울 수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마치 걸음마를 배우듯이 말을 배우는 것 같다. 기던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데는 양식화된 가르침이 거의 필요없다. 그 까닭은 두 발로 걸을 때 발, 다리, 팔, 몸통을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에 관한 명령어는 그의 유전자 안에 이미 프로그램으로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를 위한 프로그램은 걸음마를 위한 프로그램만큼 강하고 분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은 부모나 다른 언어 공동체 성원이 아주 조금만 가르쳐주어도 작동할 만큼 강하게 내장되어 있다. 언어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충격 속에 사람들이 대거 이주한 결과 생겨난 한 가지 특정한 언어의 역사를 내세운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서양 열강들은 값싼 플랜테이션 노동력을 얻기 위해 저마다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강제로 차출했다. 그리고 그들을 하이티, 자마이카, 구야나, 하와이처럼 고립된 연안이나 섬에 한데 몰아넣고 함꼐 살도록 만들었다. 그러한 다중 언어 사회의 성원들은 서로 이야기하기 위해 <피진어pidgins>라고 알려진 의사소통 형식을 개발했다. 당시에는 피진어에 뒤섞인 언어가 대단히 다양했고, 플랜테이션 농장주의 언어를 구사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피진어는 새로운 언어 형성의 자연적인 실험인 셈이었다.
- <우리가 삼키는 모든 음식물은 기관의 구멍을 넘어서 지나가야 한다. 그래서 자칫하면 폐로 들어갈 위험도 있다.> 사실, <잘못 삼키는 것>은 우리에게 치명적일 수 있지만 다른 포유동물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우리의 목이 깊어지면서 치르는 대가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이러한 배열은 위험보다 잇점이 더 많았다. 왜냐한면 길어진 인후 덕분에 <이>, <에이>, <우> 같은 모든 언어에서 필수적인 모음을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 만일 햇빛이 오로지 해만 끼칠 뿐이라면 자연은 모든 인구 집단을 검은 피부빛으로만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햇빛은 순전히 위협만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피부에 와 닿으면서 표피 속의 지방질을 비타민 D로 전환시켜 준다. 혈액은 비타민 D를 피부에서 장으로 운반하고(기술적으로 그것을 비타민이라기보다는 호르몬으로 만들면서), 거기에서 칼슘을 흡수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것이 부족한 사람은 구루병과 골연화증에 걸린다. 여성들은 칼슘이 부족하면 산도의 기형을 초래해 잘못하면 출산중에 산모와 아기의 목숨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
비타민 D는 몇 가지 음식에서 얻어질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바다 물고기의 기름과 간에 풍부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내륙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중요한 물질을 공급받는데 햇빛과 자기의 피부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 피부의 독특한 색깔은 상당한 정도가, 햇빛이 너무 많아 화상이나 피부암에 걸릴 위험과 너무 적어서 구루병이나 골종에 걸릴 위험 사이의 어떤 타협인 셈이다. 인류의 대다수가 갈색 피부를 가진 것이나, 열대 지방 사람들의 피부가 검고 위도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피부가 희어지는 것도 바로 그러한 타협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 산업 시대 예찬자들은 과식의 원초적인 중요성을 잊고 있다. 예를 들어 추수감사절에 미국인들은 몇 달 동안을 반쯤 아사 상태로 있다가 고갈된 지방질 저장고를 빨리 보충해야 하는 절박함으로 그 절기를 맞는 것이 아니다. 칼로리적으로 말하자면, 현대의 휴일, 결혼식, 생일, 또는 기념 잔치는 단순히 식사를 평상시의 수준 이상으로 높여 살찌기에 충분하도록 먹어대는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여분의 칼로리는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에게는 사정이 달랐다. 잔치는 지방질을 저장하는 것이었고, 지방질을 저장하는 것은 그 다음번 추위, 가뭄, 또는 궁핍기를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다.
- 음식을 선호하거나 회피하는 것과 관련해 가장 난해하면서도 얼핏 자의적으로 보이는 문화적 결정은, 어떤 동물이 먹는 고기로서 갖는 비중과 중요한 산물이나 서비스로서 갖는 비중 사이의 타협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동물은 죽지 않고 살아 았어야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인도의 소가 그렇다. 그 소들은 우유를 제공할 뿐 아니라 쟁기를 끌고 그 똥은 비료나 연료로 쓰이기 때문에 도살해서 고기로 판매하는 것보다 늙을 때까지 일을 시키는 편이 훨씬 이득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 소들이 그렇게 중요한 서비스를 다 끝내고 죽은 다음에도 고기가 버려지는 경우란 거의 없다. 그 주인은 즉시 최하층 카스트를 지목하여 죽은 고기를 먹어서 처분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 다른 포유동물들처럼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락타아제를 생산하는 능력을 잃는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락타아제는 락토오스-젖당-를 소화 가능한 수크로오스와 갈락토오스로 분해한다. 어른의 락타아제 결핍이 생물학적으로 심각한 까닭은 대개 사람의 젖이 락토오스의 유일한 원천이고, 엄마의 젖은 아이의 생존에는 절대로 중요하지만 어른의 생존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왜 젖 속에는 더 단순하고 더 소화가 잘되는 설탕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지를 설명하겠다. 그것은 락토오스가 에너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젖 속에 있는 칼슘을 소화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다들 알고 있듯이 우리 몸은 뼈를 만들고 그것을 톤튼하게 하기 위한 그 핵심 미네랄을 필요로 한다. 어른들은 칼슘을 식물 특히 잎새 푸른 야채에서 섭취한다. 그러나 아기들은 엄마의 젖에서 공급받아야 한다. 칼슘을 소화하는 데 중요한 또 한가지 요소는 비타민 d이다. 앞서 설명한 바 있듯이 비타민 d는 바다 생선이나 생선을 먹는 포유류를 통해 섭취하든지 또는 피부를 태양에 노출시킴으로써 몸 안에서 자체적으로 합성해 낸다. 어른들과 달리 아기들은 비타민 d를 오직 햇빛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젖에는 그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슘 흡수에 락토오스가 기여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젖에 단순한 설탕이 아니라 복합적인 설탕이 들어가 있는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자기에게 필요하지만 갖고 있지 못한 어떤 것을 상대방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면, 재화와 재화 사이의 교환이 가져다주는 결속 효과는 점점 더 높아진다. 보통 침팬지들의 경우 수컷은 암컷보다 고기를 더 많이 획득하고 암컷은 수컷보다 벌레를 더 많이 획득한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이다. 그렇다면 아파렌시스와 하빌리스도 그와 비슷한 교환을 했을 가능성이 맣다. 그래서 아마도 여자들은 벌레와 식물 역매를, 남자들은 고기를 구해다가 바꾸어 먹었을 것이다. 교환하는 대상이 더욱 다양해지고 그 양도 늘어나면서 주고받는 남녀 사이에는 불가피하게 파트너쉽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개인들은 함께 살아가는 무리의 모든 이성들을 상대로 가리지 않고 성적 서비스를 베풀 수 있었지만 -항상 충분했으니까- 음식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줄 수 없었다. 음식은 섹스보다 훨씬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체 무리보다 작은 두세 개의 소집단내에서 음식 교환에 집중하여 형성된 파트너십은 가족의 원시 문화적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다가 자칫 전체 무리가 뿔뿔이 해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원시 가족들 사이에도 어느 정도 교환이 유지되어야 했다. 그 가족 안에서 그리고 가족들 사이에서 주는 쪽은 그 대가로 뭔가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했다. 물론 그것은 준 것과 똑 같은 것일 필요는 없고, 당장 받을 필요도 없다. 어느 정도는 간간이 받으면 된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그들은 더 이상 주지 않을 것이다.
- 집단 내에서만 결혼을 시키는 밴드는 결국 적대적인 이웃과 대치하게 되어 작은 땅에 고립되고 만다. 그런데 가뭄이나 홍수 등의 기후 변화가 몇 년 지속되면 그 땅은 너무나 작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 집단은 또한 성원이 20 ~ 30명밖에 안 되기 때문에 자칫 운 나쁘게 아들만 연달아 낳는 바람에 여자가 모자라 다음 대를 잇지 못하는 위험도 무릅써야 한다. 그에 비해 집단끼리 서로 동맹을 맺고 있는 밴드들은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넓은 땅을 누비면서 먹이를 구할 수 있고, 더 커다란 인구를 번식시키는 데 참여할 수 있으며, 끈질기고 호전적인 다른 집단을 방어하는 데도 서로 지원해 줄 수가 있다. 그리고 먹을 것이 부족할 때에는 서로 나눌 수 있다.
- 근친 회피의 경제적, 사회적 가치는 농경이 시작된 이후 더욱 복잡한 사회로 진화하는 과정에서도 계속 높아졌다. 농경 집단들 사이에서 확대된 가족들끼리의 결혼을 통해 교환을 행하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윤택함을 누리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결혼으로 동맹을 맺은 가구들은 땅을 개척하고 추수하고 도랑을 파고 둔덕을 쌓는 것같이 일시적으로 노동을 집중시켜야 하는 일을 하는 데 유리하다. 더 나아가, 전쟁이 집단의 생존을 위협하는 곳에서는 많은 전사들을 동원하는 능력이 결정적이다. 군사적이고 남성 지배적인 마을 사회에서는 동맹을 맺는 데 종종 여성을 저당물로 활용한다. 그러한 동맹이 결혼으로 맺어진 집단들 사이의 전쟁을 반드시 제거하지는 않지만 많이 줄일 수는 있다. 적의 귀족 계급에 자기 딸과 자매가 있기 때문이다.
- 아이를 늘림으로써 생활이 나아질 때는 아이를 많이 가질 것이다. 반면 아이를 적게 가져야 생활이 나아질 때에는 또한 적게 가질 것이다. 역사 시대와 선사 시대 대부분을 통하여 생산 양식은 아이를 많이 낳아 기르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보상해 주었다는 사실에만 집착하지 말자. 산업화와 함께 그러한 경향은 뒤집어졌다. 아이가 많은 것은 부모의 생리적 심리적 안녕을 최대화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아이를 적게 가졌다. 자녀를 적게 갖든가 또는 아예 갖지 않는 것이 결국에는 종족을 번식시키는 실질적 전략이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현대 생활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 한 가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지금 세계에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두번째 아이보다는 두번째 수입, 두번째 자동차, 그리고 두번째 집을 열망하고 있다. 자연 선택이 아니라 문화적 선택이 우리를 이 지점까지 몰고 왔다.
- 고기를 밝히고 고기에 흥분하는 것은, 산업 사회 이전 사람들이 고급 단백질과 지방질이 하나의 패키지로 가득한 음식에서 그만큼 각별한 영양학적인 이점을 얻었음을 반영한다. 배가 고픈 사람의 몸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무슨 음식을 먹든지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고기가 조금밖에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단백질은 보디빌딩과 신체 조절 기능으로서가 아니라 에너지로 사용된다. 고기속에 있는 단백질을 아끼는 한 가지 방법은 칼로리가 풍부한 녹말 음식과 함께 섞어서 먹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테이크와 감자, 치킨과 쌀, 스파게티와 고기완자, 돼지고기와 덤플링을 함께 먹는 것이다. 야노마미족도 마찬가지로 고기와 열대 과일을 조합하여 단백질을 아꼈다. 언젠가 케네스 굿Kenneth Good이 내게 말하기를, 야노마미족은 고기 없이는 열대 과일을 먹을지언정, 열대 과일 없이는 절대로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단백질을 절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방질이 풍부한 고기를 먹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방에는 그램당 칼로리가 녹말 음식보다 두 배나 더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지방질 많은 고기가(또는 목축민들에게는 고지방질 우유가) 산업 사회 이전의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보디빌딩과 신체 조절 기능을 위한 단백질 보존의 문제와는 상관 없이, 지방질의 근원으로서 고기가 가져다 주는 이점이 또 하나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배고픈 시기를 일정하게 경험하고 음식 조달이 들쭉날쭉한 사회에서는, 사정이 괜찮을때 칼로리를 몸의 지방질로 전환시켜 놓음으로써 혹독한 시기를 대비하는 것이 매우 긴요하다. 그런데 만일 지방질로 전환해야 할 음식이 녹말 음식이라면, 그 칼로리 가치의 거의 4분의 1은 전환과 소화 과정에서 그냥 버려지고 만다. 그러나 저장되는 지방질의 원천이 지방질 그 자체라면, 소화된 칼로리의 3%만이 소실될 뿐이다.
- 군장 사회와 국가에서 여성의 지위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남자들이 자기의 근육과 신장의 유리함을 활용하여 전쟁과 생산 모두에 핵심적인 테크놀로지 과정을 통제할 수 있었던 정도에 따라 좌우된다. 군사와 생산 업무를 수행하는 데서 남녀의 능력이 똑같이 발휘될 경우,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동등한 수준으로 올라간다.
- 쟁기에 대한 남자의 통제처럼 하나의 단순한 요인만 가지고 여아살해, 지참금, 과부 분신 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쟁기 끄는 것이 농사 자체에 끼친 직접적인 영향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남성의 전문성은 추가적인 전문화의 기폭제가 되어, 인도 북부나 그와 비슷한 형태로 농사를 짓는 산업화 이전의 사회에서의 열악한 여성의 지위를 설명해 준다. 쟁기 끄는 방법을 배운 남자들은 소들에게 쟁기를 씌워 몰고 가는 방법도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바퀴가 발명되면서 남자들은 소의 멍에를 수레에 연결하여 우마차를 움직이는 데 전문성을 획득하였다. 그로 인해 남자들은 곡식을 시장에 운송하는 일을 떠맡게 되었고, 거기에서 몇 단계 지나지 않아 지역 내에서 그리고 장거리로 이루어지는 교역과 상업을 지배하게 되었다. 교역과 상업이 점점 중요해지면서 기록이 보관되어야 했는데, 그 임무를 떠 맡은 것은 역시 교역과 상업에서 활동적인 남자들이었다. 따라서 쓰기와 산수가 발명되면서 남자들은 첫번째 서기와 회계사로 전면에 등장했다. 거기에서 더 확대되어 남성들은 첫번째 서기와 회계사로 전면에 등장했다. 거기에서 더 확대되어 남성들은 여성과 달리 문자를 해독하고 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처음 알려진 철학자, 신학자, 수학자 들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인 까닭도 바로 그것으로 설명된다.
게다가 쟁기 끄는 것의 그러한 간접적인 영향은 전쟁의 남성 중심적인 영향이 지속되는 것과 맞물려 작용했다. 남자들은 무장 군대를 통솔하면서 국가 종교를 포함한 정부 최고위의 행정부서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자 전사들의 징집이 계속 필요해지면서 공격적인 남성다움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국가와 제국에서 국가 정책의 초점이 되었다. 그리고 근대의 여명기에 기본식량을 동물이 끄는 쟁기에 의존하는 곳은 어디에서든 남자들이 정치, 종교, 예술, 과학, 법, 산업, 상업, 그리고 무장 군대를 지배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 브라질 인디언들에게 우두머리란 밤에 야외에서 음식을 해먹는 동안 열심히 정찰해야 하는 임무를 연상시킨다. 우두머리는 아침에 가장 먼저 일어나서 마을 광장 한가운데 서서는 소리를 지르며 동료들을 깨운다. 무슨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그 일을 먼저 시작하는 것은 우두머리이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해야 하는 것도 우두머리다. 그는 열심히 일하는 것 뿐만아니라 인정을 베푸는 것에서도 모범을 보인다. 고기잡이나 사냥 탐험에서 돌아오면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자기가 잡은 것을 나눠준다. 그리고 다른 집단과 거래를 할 때도 가장 좋은 것을 자기 것으로 챙기지 않도록 조심한다. 저녁이 되면 그는 광장 한가운데 서서 사람들에게 착하게 살아가고 권면한다. 성욕을 다스리고, 열심히 일하며 강에서 자주 목욕하라고 요구한다. 낮에는 잠을 자지 말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마라고 한다. 시종 그는 어느 특정한 개인의 잘못을 비난하지 않으려 매우 조심한다.
로버트 덴탄은 말레이사아의 세마이족에서도 비슷한 패턴의 리더쉽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외부에서 세마이족 리더들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그 우두머리는 단지 동료 집단에서 가장 위신있는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덴탄에 따르면, 우두머리는 강요가 아니라 회유를 통해서 평화를 도모한다. 그는 인격적으로 존경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그를 떠나가 버리거나 그에 대한 관심을 서서히 거두어 갈 것이다... 더 나아가 훌륭한 우두머리는 거의 언제나 어떤 쟁점에 대한 성원들의 일반적 느낌을 짐작하고 거기에 기초해 자기 결정을 내린다. 그러니까 그는 여론을 형성하단기보다는 여론의 대변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스스로 뽐내는 것의 극단적인 형태는 뱅쿠버 섬의 콰키우틀족이 행한 포트래치(Potlatches, 콰키우틀 족에서 성행했던 잔치로서, 손님들에게 막대한 양의 음식을 대접하거나 소중하게 모아둔 물건들을 나누어주거나 또는 그들 앞에서 모조리 파괴함으로써 주최자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는 이벤트)라는 경쟁적 잔치에서 나타났다.
- 재분배는 사람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선택하는 자의적인 경제 양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재분배자의 성공은 생산을 증대시킬 수 있는 능력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외의 노력이 정말로 효과를 거두는 조건에서만 재분배는 선택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일을 더 열심히 하라고 독촉하는 것은 오히려 생산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 쿵족과 같이 단순한 수렵 사회에서는 개개인이 동물 사냥과 식물 채집을 더 집중적으로 했다가는 자칫 동물을 지나치게 죽이고 식물을 고갈시킬 위험이 있다. 쿵족 사냥꾼에게 무미처럼 행동하가고 부추겼다가는 자칫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당장 굶어 죽을 수가 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슈아이족이나 카오타족 같은 농경민들에게 고갈은 그다지 절박한 위협이 아니다. 곡식은 종종 넓은 지역에 파종되어 보다 세심하게 경작되어 수확될 수 있고, 당장 고갈될 위험이 없는 여분의 물과 비료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수렵 채취 생산 양식과 농경적 생산 양식 사이의 형식적인 구분을 너무 강조하지 않는 편이 좋다. 콰키우틀족은 농경민은 아니었지만, 그 생산 양식은 고도로 집약적이었다. 그들은 식량의 대부분을 해마다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수많은 연어와 빙어로 충당했다. 그리고 그들이 고유의 그물만 사용하는 한, 그 물고기들이 당장 고갈될 위험은 없었다. 따라서 포트래치는 그 나름의 형태로 생산을 자극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콰키우들족처럼 많은 사회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도 불평등한 계급으로 특징지워지는 영구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콰키우틀족처럼 어떤 사회에는 심지어 노예 비슷한 하급 평민도 있었다. 불평등한 수렵 사회는 대부분 연안이나 강가에서 발달한 듯하다. 그런 곳에서는 조개의 서식지가 많고 물고기나 바다 포유류가 집중되어 영구적인 정착지가 잘 만들어지고, 가외의 노력이 생산성을 높여준다.
- 최초의 국가는 군장 사회에서 진화한 것이지만, 모든 군장 사회가 국가로 진화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여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로 인구가 많아야 할 뿐만 아니라(1만 명에서 3만 명 사이), 그 거주하는 땅이 한정되어 있는 이른바 환경적인 고립 circumscription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세금이나 노동력 징발을 거부하는 이들이 도망갈 수 있는 땅이 주변에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환경적인 고립은 얼마나 많은 땅이 이용 가능하냐의 문제이상인 것이다. 그것은 흙과 자연 자원의 질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고, 도망간 자들이 억압적인 추장 밑에 있을 때보다 더 잘 먹고 살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도망자들이 갈 수 있는 곳이 높은 산, 사막, 열대 밀림 같은 거주하기에 불리한 생태 조건일 경우 지배자에게서 떨어져 나갈 동기는 그만큼 적어지기 때문이다.
두번째 조건은 재분배를 위해 중심 창고에 바쳐지는 음식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추장의 창고가 얌이나 고구마처럼 잘 썩는 구근 고식으로 채워질 경우, 쌀, 밀, 옥수수 등 다음 수확기까지 안전하게 보관될 수 있는 재배 곡식들로 채워져 있는 경우에 비해 강제력을 발휘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 군장 사회가 처음으로 국가로 된 것은 중동, 특히 기원전 3500년에서 3200년 사이의 이란과 이라크의 남부에 있는 수메르에서였다. 왜 중동에서 그런 일이 먼저 일어났을까? 아마도 그 지역은 다른 초기 국가 형성 중심지에 비해 사육하기에 적합한 야생 풀과 동물들이 풍부했기 때문이리라. 밀, 보리, 양, 염소, 소, 돼지의 야생 원조들 모두 레반트 지방의 고지대와 자그로 산맥의 기슭에서 번창했다. 거기에서 그들은 수렵 채취적인 생계 양식을 포기하고 마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 초기국가사회의 교단종교들이 전쟁을 금하지 않으면서 식인은 금지한 까닭이 무엇인가의 문제로 되돌아가야겠다. 내가 보기에 문제의 핵심은 그들 사회들이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을 자신들의 노동력으로 통합하는 능력을 발휘할만큼 정치적으로 진화되었느냐이다. 그능력은 다시 그 사회의 농부나 노동자들은 재화와 서비스에 잉여를 창출할수 있다. 따라서 한 국가의 인구가 늘어날수록 잉여생산의 양도 늘어나고 세금과 공물의 기반도 더커지며 그렇게 되면 지배계급의 힘도 더 막강해진다. 포로들을 대규모로 살인하여 버린다면 세금과 공물의 기반을 확장하려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는 좌절될 것이다. 포로들이 잉여를 창출할수 있는 만큼 그육신을 먹는 것보다 그들의 노동의 산물을 먹는편이 훨씬더 유리하다. 특히 사육된 동물의 고기와 젖이 그 잉여의 일부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에 비해서 밴드 및 촌락사회에서는 많은 잉여를 창출할 수 없고 포로들을 중앙정부에 통합할수 있는 정치군사적인 조직도 세금을 통해 이익을 얻을수 있는 지배계급도 없다. 따라서 밴드 및 촌락사회의 입장에서 승자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군사전략은 이웃집단을 죽이거나 내쫓아서 자원에 대한 인구압울 낯추는 것이다. 밴드 및 촌락사회는 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적을 사로잡아 데려와서는 장기적인 이익을 얻을수 없다. 포로들은 대개 잉여를 창출할수 없기 때문에 집에 데려와 노예를 삼아보았자 음식만 축낼 뿐이다. 포로를 죽여서 먹을때 얻을수 있는 이익은 분명하다. 포로가 잉여를 낼수 없다면 포로는 음식의 생산자가 아니라 음식 그자체로 더가치있는 것이다.
- 선사 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독립된 주권을 갖는 정치 단위의 합병 비율을 연구해 보면, 국가를 초월해야만 인류가 살아남는다는 것이 더욱 확연해진다.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로버트 카르네이로에 따르면 전세계에 존재하는 자율적 정치 단위의 수는 기원전 1000년 무렵에 가장 많았다. 그때 대략 50만개의 독자적인 밴드, 마을, 그리고 군장 사회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국가와 제국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자율적 단위의 수는 기원후 500년경 20만개 이하로 줄어들어 버렸다. 독일만 놓고 보더라도 1648년에 900개의 주권 국가가 있엇는데, 지금은 둘뿐이다. 카르네이로는 주권단위의 수가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그대로 계속된다면 2300년에는 지구 전체에 오직하나의 정부가 있게 되리라고 예상했다. 카르네이로가 지적했듯이 불행히도 자율적 단위의 수를 줄이는 주요 수단은 언제나 전쟁이었다. 따라서 그는 장차 정치 단위가 완전히 하나로 줄어든다면 그것은 마지막 전쟁을 통해서 일것이고, 인류는 거기에서 살아남으려 애쓸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유일한 희망은 하나를 향한 추세를 완성하는 평화로운 길을 찾는 것이다.
이 지구에서 마음과 문화의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부과한 한계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화적 도약의 중요성, 그리고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 사이의 커다란 차이를 또한 인식해야 한다. 인류가 선천적으로 공격적이고 그래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한다. 또한 인종에 우열이 있어서 각 사회를 안팎으로 위계적인 구분이 생기는 것은 기나긴 문화적 진화 과정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 선택의 결과라는 주장도 비과학적인 것으로 거부해야 마땅하다. 이미 수많은 증거들이 그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가 아직 문화적 진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정도를 인정해야 하고, 인간 조건과 역사의 반복적 과정을 객관적으로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다스려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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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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