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
- 저자
- 제임스 E.매클렐란 3세 지음
- 출판사
- 모티브북 | 2006-02-22 출간
- 카테고리
- 역사/문화
- 책소개
- “출판이냐, 파멸이냐.” 저자는 오늘날 주류 과학자들이 처한 현...
1. 인류의 탄생 : 도구와 도구제작자
- 인간의 조상들은 구석기 시대의 생존방식을 자발적으로 버린 것이 아님. 환경 악화의 압력 아래에서 떠돌이 식량채집 생활양식을 버리고 식량생산 방식을 채택함으로써-사냥과 채집에서 농업과 목축으로 진보함으로써- 인류는 비로소 마지못해 에덴 동산을 더나 신석기 시대로 들어섬
2. 농부의 지배
- 일반적으로 전세계의 신석기인들은 태양과 달의 관찰을 통해 수평선상의 천체 위치를 표시하는 표시물을 만들었으며, 그것을 이용하여 태양과 달이라는 두 천체의 주기적 운동을 확인하고 계절의 변화를 추적하여 농업사회에 매우 소중한 정보를 얻었음. 그들이 때를 계산하고 계절을 예측하기 위해 만든 장치들 중 일부는 노력과 비용이 매우 많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잉여의 부를 산출해 낼 수 있는 축복 받은 지역에서만 가능했음.
3. 파라오와 기술자
- 약 6000천년 전에 근동에서 시작된 변화가 최초의 문명들을 낳았음. 그것들에는 높은 인구밀도, 중앙집권적 정치적/경제적 권력, 국가형성의 단초마련, 복잡화/계급화된 사회, 기념비적인 건축물, 문자와 고급지식의 탄생 등 도시형성에 동반되는 모든 사회적/역사적 귀결이 있었음. 두번째 기술/경제적 혁명인 이러한 변화는 계속되는 증가로 거주지의 수용력에 압박을 가하는 인구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고밀도 농업이 필요했다는 데에서 비롯됨. 인류역사와 기술사의 중대한 사건인 도시혁명은 18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산업혁명 전까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큰 여파를 불러왔음.
- 도시혁명은 대개의 경우 인공적인 물관리를 통해 밀도가 높아진 농업과 중앙집권적 권력과 도불어 더 많은 인구, 도시화된 중심지, 군대형태의 강제징집제도, 세금징수원, 경찰, 확대된 교역, 궁전과 신전, 성직자 계급, 종교기관, 고급교육 등을 가능하게 했음. 그런 관료 중심적 조직사회에서 글을 아는 지식인 계급이 수학과 의학, 천문학을 발전시킴.
4. 천재적인 그리스인
- 알렉산더가 죽은 후 제국은 세개의 왕국으로 분열됨. 마케도니아(그리스 반도 포함),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셀레우코스 왕국이 그것임. 확대된 그리스 세계는 알렉산더가 죽은 뒤에 크게 재편되었기 때문에 그 시기는 제국이전이 헬레나 문명과 구별하기 위해 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름. 헬레니즘 시대의 개박은 고대 과학사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함. 독립적인 개인들이 주도한 헬레나 자연철학은 물러나고, 헬레니즘 시대(그리스 과학의 황금기)의 새로운 연구조직과 사회적 지원이 시작됨.
- 기술사가들은 왜 고대에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음.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간단한 대답이 될 수 있음. 당대의 생산양식과 노예 경제는 기존의 상태를 유지하기에 충분했음. 이익이 바람직한 가치라는 자본주의적 생각은 당재의 사고방식에서는 전혀 낯선것이었음. 따라서 대규모 기술을 동원하여 이익을 산출할 수 있다, 혹은 산출해야 한다는 생각 역시 낯선 것이었음.
5. 꺼지지 않은 동방의 빛
- 이슬람은 예나 지금이나 코란이라는 경전과 문서에 기반을 둠. 정치적으로 흔들림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슬람 교도을은 기독교도와 유대교도에 대해 관용적이었으며, 책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선진문명을 약탈하고 파괴한 유럽의 야만농업민족과는 달리 아랍유목민들은 선진문명을 동화하고 유지함으로써 제국을 건설했음. 초기 이슬람 지배자들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을 비롯한 외국 문화전통에 대한 학습을 장려했음. 그것은 아마도 고도로 발전된 다른 종교들과 비판적/지성적 전통에 맞서 새로운 이슬람교의 논리적/수사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임. 결과적으로 또 하나의 혼혈사회가 형성되었음. 이슬람은 문화적으로 헬레니즘화 되었고, 헬레니즘 특유의 관료체제가 자연철학이 가미된 유용한 지식을 장려하는 부유한 지배자들 밑에서 발전했음. 중세 이슬람은 그리스 과학의 주요 계승자가 되었고, 이슬람 문명은 적어도 800년에서 1300년까지 사실상 과학의 전분야에서 세계 최고였음.
- 이슬람 과학은 수백년 동안 번창했고 관측소와 도서관과 마드라사와 모스크와 병원과 궁정에 안정적으로 자리잡았음. 그것이 이슬람 과학의 긍정적 성취였음. 이슬람 과학자는 모두 이슬람의 울타리 안에서 일했으며, 이슬람 과학의 전성기 이후에도 수백년 동안 변함없이 활동했음. 과학이 서양과 똑같은 방식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를 오독하게 만드는 것이며, 활기 넘쳤던 중세 이슬람 문명에 시대적/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짓임.
6. 중앙의 왕국
- 중국사를 다룰 때에는 중국이 이런저런 발명품을 다른 문명보다 먼저 개발했다는 흥미 위주의 주장들을 경계해야 함. 흔히 외바퀴수레, 남향전차, 옻칠, 화약, 자기, 우산, 릴 낚시, 현수교 등이 중국의 발명품으로 거론됨. 이런 최초 발명품들은 흥미로울 수 있겠지만 역사연구와 관련한 분석적 가치는 제한적임. 오히려 중국 기술연구의 출발점은 독창성이나 선행성 문제와 관계없이 중국의 기술이 송대와 그 이후까지도 세계 최고수준이었다는 인식이 되어야 할 것임.
- 중국 과학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시도할 때 극복해야할 장애물들
(1) 중국에는 과학들이 있었지만 과학은 없었다. 다시말해서 지식인들은 다양한 과학적 활동(천문학, 점성술, 수학, 기상학, 지도제작술, 지진학, 연금술, 의학 등)을 추구했지만, 그 개별적인 활동을 통일된 자연에 과한 비판적 연구로 묶어내지는 못함
(2) 중국사회는 연구과학자에게 사회적 역할을 제공하지 않았으며, 과학을 위한 별개의 일터나 뚜렷한 직업이 존재하지 않았음. 오히려 특권층의 아마추어와 박식가들이 과학적 관심을 추구.
(3) 전통적인 중국의 세계관은 자연을 서양보다 더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방식으로 파악
(4) 중국에는 학교가 충분히 있었지만 중국의 교육제도는 과학을 포함하지 않음.
- 이슬람 과학과 관련해서 지적했듯이, 왜 중국에서 과학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라는 부정적인 의문은 역사학적 분석의 주제가 아님. 이런 부정적 의문들은 당연히 무수하게 많고 중국이 과학혁명을 일으켜야 했지만 장애물 때문에 혹은 어떤 필수적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현재의 입장에서 돌이켜 보면서 전제하는 오류를 범함. 중국 과학을 유럽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임. 중국이 유럽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었고 또 걸어야 했다는 요구는 훗날의 유럽사를 통해 중국 과학사를 소급해서 투영할 때만 나올 수 있음. 진실은 정반대임. 전통적 중국의 과학은 상대적으로 한계가 있었지만 중국의 관료체제와 국가의 맥락안에서 전혀 문제없이 작동했음. 이것은 수주높고 오래된 중국문명에 대한 가치판단이 아니라 다만 충실한 역사학적 판단임.
7. 인더스, 갠지즈, 그리고 그 너머
- 사실 인도는 많이 기계화되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이미 산업화된 사회였다고 평가됨. 인도의 가장 큰 산업은 방직이었고, 당시 인도는 세계최대의 직물 생산국이었음. 방직자 카스트에 속한 사람의 수는 농민 다음으로 많았으며, 직물생산에 기대어 화학산업과 염색업, 의류생산업 같은 보조산업이 발생. 인도양 교역을 위한 선박을 제공한 조선업 역시 인도의 주요산업이었음. 인도의 조선공들은 인도양의 몬순기후에 적합한 조선기술을 특별히 개발. 심지어 인도 조선산업의 중요성은 유럽인들이 인도양에 들어간 후에 더욱 증가하였음. 인도의 철생산은 기원전 1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슬람 무굴제국 시대까지는 비교적 소규모로 행해졌고, 총포생산은 16세기에 시작됨. 인도의 주조기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4세기 찬드라 굽타 2세시절에 델리에 세운 7.3미터 높이의 기념비적인 철기둥임. 인도 기술자들은 도기와 유리제작을 비롯해서 거대문명을 떠받치는 여러가지 실용적인 활동에 종사. 이와 같은 기술적 성취도를 감안한다면, 사실상 인도는 19세기에 영국의 지배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후에 놀라운 탈산업화 과정을 겪었다고 해야 옳음.
- 쌀생산과 메콩강 및 그 지류들의 수자원에 기반을 두고 인도문명에 기초한 크메르제국은 12세기와 13세가에 찬란하게 번성. 관개기술과 저수기술로 지탱된 제국은 동남아 역사상 가장 큰 정치적 통일체였음. 크메르 제국은 기념비적 건축, 글, 계산, 천문학의 지식, 유용한 과학에 대한 국가의 지원 등 고도문명의 전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음. 크메르 문명은 15세기초 관개기반구조가 무너지면서 사라짐.
8. 신세계
9. 쟁기, 등자, 총포, 페스트
- 유럽인들은 9세기 무렵 수천년 전 동방의 강 유역에 정착한 신석기인들로 하여금 농업을 고밀도화하고 문명으로 이행하도록 유도한 것과 같은 종류의 환경적 위기에 직면하기 시작. 유럽의 농업발전은 인공적 관개작업이 기술적 해결책이 될 수 있었던 고대 동방과는 다른 패턴을 따를 수 밖에 없었음. 유럽은 봄과 여름에 내리는 충분한 비 덕분에 이미 자연적으로 관개가 이루어진 상태였음. 대신에 유럽 농부들은 땅 표면을 긁는 수준이 지중해권의 가벼운 쟁기로는 일굴 수 없었던 지역의 척박한 토양을 깊게 쟁기질함으로써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었음. 북유럽의 환경조건에 알맞은 독특한 기술적 혁신이 유럽의 농업혁명을 낳음
(1) 무거운 쟁기의 도입. 목재와 철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도구는 바퀴를 달아 움직였고 땅을 깊이 갈아 엎는 철제 보습이 달려 있었음. 무거운 쟁기는 유럽의 습한 저지대에서 경작을 가능케 함으로써 농업생산을 증진시킴
(2) 견인동물로 소 대신에 속도와 지구력이 더 뛰어난 말을 이용하기 시작
(3) 윤작체계의 도입
- 심경쟁기는 새로운 농토를 만들 수 있게 해줌. 특히 유럽평원의 비옥한 충적토를 경작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중세 유럽의 농업이 북쪽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음. 하지만 무거운 쟁기와 여러마리의 소는 농부 개인이 마련할 수 없는 비싼 도구였으므로, 공동소유와 공동경작, 공동 가축사육의 패턴이 등장했고, 따라서 중세 마을의 단결력을 강화했음. 이로 인해 정착된 장원 체계는 유럽사회의 기반이 되어 최소한 프랑스 대혁명 시기까지 유지됨.
- 12세기가 번역의 시대였다면 13세기는 유럽지식인들이 고대와 중세의 과학적/철학적 전통을 흡수한 동화의 시대였음. 동화 과정의 많은 부분은 전통적 기독교 세계관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이교도 전통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짐. 위대한 지적 종합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동화 과정을 상당부분 완성.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화한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를 아리스토텔레스화한 것인지, 혹은 둘 다 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님. 어찌 되었든, 아리스토텔레스는 완벽한 지적체계를 제공했고, 중세 스콜라 철학은 그 체계에 기초하여 신과 인간과 자연에 관한 합리적 사고를 구성했음.
- 오직 규모가 큰 정치적 통일체만이, 특히 세금조달력이나 기타 상업적 부를 확보한 중앙집권적 민족구가들만이 새로운 무기와 요새를 감당할 수 있었음. 그러므로 군사혁명은 권력을 지역의 봉건적 권력자들에게서 중앙집권적인 왕국과 민족국가들로 이동시켰음. 예컨대 프랑스 왕국-근대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음-은 15세기의 백년전쟁 이후에 통일체의 모습을 갖추었음. 1550년대 이후의 소총과 상비군의 발전은 그런 추세를 강화했음.
- 유럽은 군사혁명의 결과로 점점 더 중앙집권화 되었지만, 지리적/환경적 조건 때문에 중국이나 인도나 이슬람 세계에서처럼 제국이 형성될 수는 없었음. 동방의 광범위한 영역-나일강 유역과 유프라테스/티그리스 범람원-전체를 포괄하는 대규모 관개시설과는 달리 빗물에 의존하는 농업에 기반을 둔 유럽의 전형적인 군사/정치적 체제는 국지적 성격이 강했고, 그 속에서 다양한 인종적/언어적/지리적 요소가 종합되어 민족국가가 형성됨. 그리하여 군사혁명의 일차적 산물로 비교적 중앙집권적이며 서로 경쟁하는 민족국가 집단이 출현했음. 민족국가들은 정치적/군사적/경제적 경쟁을 벌였으며, 어떤 국가도 전체를 지배하기에는 충분한 힘을 얻지 못했음. 에스파냐,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그리고 약소국인 프로이센, 스웨덴, 러시아 사이의 상호경쟁은 유럽을 분쟁의 온상으로 만들었으며, 또 기술적으로 세계사를 이끌 역량을 갖추게 만들었음.
10.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시작하다
11. 갈릴레오의 죄와벌
- 갈릴레오의 재판과 처벌은 17세기 후반의 이탈리아의 과학활동을 중단시키지는 않았지만 과학의 수준과 질에 큰 지장을 초래했음. 이탈리아의 분위기는 계속해서 억압적이고 교회 권력은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음.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비롯한 거대 우주론적 이론은 금지되었고, 이탈리아 과학자들은 그 같은 이론을 회피하는 대신에 철저히 관찰적인 천문학을 비롯한 좀더 안전한 활동을 선택했음. 갈릴레오에 대한 관용은 그의 사망 100년 후에야 자유주의적인 교황 베네딕트 14세에 의해 그의 작품들의 이탈리어 판본이 허가되면서 이루어짐. 카톨릭 교회는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교육을 1822년에야 허가했고, 코페르니쿠스의 작품은 1835년 마침내 금서목록에서 제외됨.
- 과학이 유용하다는 생각, 과학이 공공의 재산이라는 생각, 지식이 힘이라는 생각은 17세기 이후 서양에서, 그리고 19세기 이후 모든 곳에서 지배적 원리가 됨. 이 원리의 귀결은 첫째, 과학과 과학자는 지원받을 자격이 있다. 둘째, 과학과 과학이 산출하는 힘은 공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자연철학이 자연철학자들을 위한 활동이거나 신학의 시녀라는 옛날의 생각은 쇠퇴했음. 과학의 유용성을 부르짖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유럽의 새로운 중앙집권적인 국가와 상업적 자본주의의 발전에 더 적합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임.
12. 신께서 말씀하시길,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 유럽정부는 사상 최초로 과학 및 자연철학과 굳은 계약을 했고, 과학자들로부터 유용한 봉사와 힘을 받는 대가로 인정과 지원과 자율을 제공했음. 과학자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정부에 팔았고, 정부는-처음엔 절대 군주의 왕정이, 나중엔 민족국가의 관료체제가-최소한 어느 정도는 과학자들을 사들이기 시작. 근대 유럽에서 과학과 정부가 맺은 새로운 계약의 역사적 의미는 유럽정부들이 과학 전문가를 고용하면서 고대의 관개문명을 닮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임.
- 뉴턴 과학 속의 자연신학은 주변 문화와 중요한 방식으로 조화를 이룸. 그의 자연신학은 특히 1688년과 그 이후의 영국의 종교적/정치적 온건파(종교관용파)의 주장과 잘 맞아 떨어짐. 뉴턴을 추종한 온건파 인사들은 그의 과학에서 신의 존재와 섭리, 재산의 신성함, 사회적 위계의 정당성, 의무, 계몽된 이기심에 관한 신학적, 사회 정치적 논점들을 추출함. 다시 말해 뉴턴의 우주론과 자연철학은 영국의 지배적인 사회적/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했고, 심지어 그의 중심에 있었음.
- 망원경의-그리고 광학과 천문학의-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과 기술은 과학혁명기에 활발히 교류하지 않았음. 과학적 통찰은 (적어도 잠재적으로) 실용적 함축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연철학자와 이론가들은 기술자, 건축공, 건축가, 장인, 기타 실용적 숙련돌르 지닌 사람들 앞에서 무시당했음. 사실상 과학이 기술에 미친 영향보다 기술이 과학에 미친 영향이 더 컸던 것으로 보임.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현대적인 연합이 과학혁명기에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경계할 필요가 있음. 과학의 이데올로기적인 호언장담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렇다할 결실을 이루지 못했음.
13. 산업혁명
- 178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과정-경제사가들이 지속적 성장을 향한 이륙이라 부르는 과정-은 주요 산업에 함께 혹은 개별적으로 발달하면서 일으킨 상호보강 효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음. 예컨대 철을 석탄으로 녹이기 시작하면서 제철산업은 석탄산업의 발달을 촉진하고, 석탄산업의 발달로 인해 광업을 위한 증기기관이 탄생했고, 석탄을 대량으로 운송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철도가 만들어지며, 철도의 필요성때문에 다시 철 생산이 엄청나게 증가하는 식으로 상승적 공생관계가 형성됨. 결과적으로 영국이, 그리고 결국엔 세계가 바뀌었음. 농촌의 농부들은 도시의 공장노동자가 되었고, 기관차와 철도는 지저분한 도로와 말을 대체함. 철과 강철은 점차 목재와 돌을 밀어내고 건축재료로 자리잡았으며, 증기선은 범선을 대체했음. 과거 신석기 혁명과 도시혁명에서 그랬듯이 이런 근본적인 변화의 과정이 일단 시작되자, 과거의 사회적 혹은 경제적 양식으로의 복귀는 불가능했음.
- 과학혁명의 이론적 혁신이 산업혁명의 기술적 발명의 원인이었다는 신화는 이 책에서 거듭 반박하고 있는 상식적인 믿음, 즉 기술이 본질적으로 응용과학이라는 믿음에 의해 재강화되. 이 믿음은 연구와 개발이 실제로 연관 속에서 수행되는 일이 흔한 오늘날에조차도 부분적으로만 옳음. 18세기와 19세기 초에 대해서라면 이 믿음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 물론 과학이 산업화를 촉진하는 데 사회적/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전개될 당시 과학은 유럽문명의 사회적/문화적 조직 속에 스며들어 있었음.
14. 현대과학으로 가는 길 : 순수과학과 응용과학
- 제2의 과학혁명은 19세기 벽두에 전개되기 시작. 이 획기적인 과학사의 변화는 두가지 핵심적인 경향성을 특징으로 함. 하나는 과거에 정성적이었던 베이컨 과학이 수학화되는 경향이며, 다른 하나는 고전과학과 베이컨 과학이 이론적/개념적으로 통합되는 경향임. 다시말해 과거에 별개였던 전통들이 과학적으로 통합되어 오늘날 우리가 물리학이라 부르는 것을 형성하기 시작. 제2의 과학혁명이 전개되고 수학화와 통합의 과정이 진행되면서 단일한 보편적 법칙 체계와 매우 일관적인 과학적 세계관이 등장하기 시작. 오늘날 고전적 세계관이라 불리는 그 세계관은 물리과학의 전분야를 아우르는 듯이 보였고,19세기 말에 이르면 물리적 세계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약속하면서 물리학 자체를 종결시키려는 듯이 보였음.
- 첫번째 과학혁명의 특징은 과학의 깃발아래 사람들이 중세적인 대학에 사회적/지적으로 등을 돌린 것에 있었음. 그 후 2세기 동안 뒷전에 물러나 있던 대학은 19세기의 제2의 과학혁명 속에서 다시 한번 자연과학을 위한 선도적 기관이 됨. 대학들이 과학연구의 발전에 느리게 반응했던 영국에서조차도 19세기의 세번째 사반기에 가장 오래된 두대학, 즉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런던을 비롯한 영국 각지에 새로 설립된 대학들에 발맞추어 새로운 과학교수직을 설치하고 기술과 공업에 가까운 분야를 포함한 여러 과학연구를 지원했음.
- 과학자를 의미하는 단어 scientist가 1840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당시의 과학과 과학연구자들을 둘러싼 사회적 변화가 얼마나 근본적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임. 물론 적어도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작 이후 과학과 과학연구자들은 지성계의 한 부분이었음.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과학자가 사회적/직업적 존재로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과학이 겪은 조직적인 변화에 대해 중요한 증언을 해줌.
15. 생명 그자체
- 코페르니쿠스 혁명과 다윈혁명은 유사성을 보여줌.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2000년 동안 유지되어 온 천문학적 믿음에서 이탈했음. 그 믿음-지구가 멈추어 있고 태양이 움직인다는 믿음-은 자명해 보였기 때문에 천문학과 종교에서 당연시 되었음. 다윈혁명은 종이 고정되어 있다는 해묵은 믿음에서 이탈했음. 이 믿음-종이 고정되어 있다는-역시 성경적인 전통의 지지를 받고 있었음.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은 자신들의 새로운 사상을 출간하는 일을 뒤로 미루었음. 그것은 종교적 혹은 정치적 권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당대에는 증명할 수 없었던 자신들의 과격한 이론이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 그리고 두 사람은 후대의 연구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음. 이 두혁명의 결과로 하늘과 땅이 동일한 물리법칙을 따르며 인간과 짐승은 생물학적인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과학적 세계관이 탄생.
- 지난 150년 동안 생명과학은 대체로 다윈의 일생을 되풀이했음. 생명과학도 다윈처럼 처음엔 기독교에 충실한 학생이었지만 나중엔 생명의 다양성이 자연의 작품이라는 인식에 도달했음.
16. 도구제작자, 지휘봉을 잡다
17.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
- 가끔씩, 특히 물리학 수업에서 뉴턴 물리학은 아인슈타인 물리학의 특수한 경우라고 해석되기도 함. 느리게 움직이는 물체는 뉴턴의 법칙을 따르고 광속에 가까운 물체는 아인슈타인의 법칙을 따른다는 식의 설명을 종종 접함. 그러나 이런 설명은 과학교육에는 도움이 될 지는 몰라도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아인슈타인의 1905년 논문들이 일으킨 혁명적 변화를 격하시킴. 뉴턴과 고전물리학에서 공간과 시간은 절대적임. 고전물리학에 따르면, 어딘가에 모든 운동측정의 기준이 되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존재하며, 어딘가에 보편적인 시간을 알리는 시계추가 존재하고 질량과 에너지는 상호변환가능하지 않으며, 물체들은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음. 아인슈타인은 이들과 절대적으로 다른 결론에 도달했음. 그러므로 뉴턴의 공식 F=ma와 아인슈타인의 공식 E=mc2에 똑같이 질량이 등장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두 사람의 물리학에서 질량의 개념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됨.
18. 오늘날의 응용과학과 기술
- -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새로운 이론을 그토록 신속하게 적용한 것-은 또 과학과 기술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형성하였음. 아주 많은 측면에서-역사적으로,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오래전부터 거의 별개였던 과학과 기술은 대중의 인식속에서 융합됨. 2차대전이후 기술은 응용과학으로밖에는 생각하기 어렵게 되었음. 그리고 많은 측면에서 맨해튼 프로젝트는 과학을 하는 새로운 방식을, 과학생산의 산업화를, 혹은 이른바 거대과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음. 19세기의 지배적인 과학지식 생산 양식은 혼자서 혹은 몇명의 동료와 함께 작은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개별과학자로 대변되었음. 그러나 20세기에 핵물리학이 발전하면서 그 해묵은 패턴은 바뀜. 거대한 시설과 비싼 장비가 연구의 필수요소가 되었고, 연구에 필요한 자원은 개별 실험가나 대학이나 사적인 연구기관의 능력을 초과하기 시작했음.
- 기원전 3000년 이전에 시작된 원초문명들에서 정부가 과학과 과학전문가들을 지원했다는 사실에서 처음 드러나는 응용과학에 대한 기대는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상당한 정도로 실현됨. 그 결과 정부와 산업체의 과학과 응용지식에 대한 지원은 오래전부터 있어온 과학의 유용성을 옹호하는 웅변에 걸맞은 수준으로 향상됨. 20세기에 과학과 기술은 지적으로 사회적으로 화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완전히 결합했음. 오늘날 많은 분야에서 기술은 이론과 과학적 진보의 직접적 응용이라 말할 수 있음. 예컨대 기술자와 공학자들이 받는 교육과 현장수련은 꽤 많은 과학을 포함하지만, 그 과학이 첨단 연구에서 나온 발전된 이론과학인 경우는 드뭄. 현장 공학자나 과학에 기초한 기술자들은 한물간 과학을 아는 것으로 충분함
- 과학적 지식이 기술이나 장치의 개발에 기초를 제공한 경우에도 그런 개발에는 대개 아주 많은 요소가 개입하기 때문에, 신기술이 단순히 응용과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여전히 오류일때가 많음. 예컨대 1938년 체스터 칼슨은 한물간 광학과 광화학 지식을 이용하여 제로그래피를 발명. 그런 그 발명의 어머니는 필요가 아니었고, 칼슨은 오랜세월동안 IBM을 비롯한 여러 후원자를 찾아다니며 카본지를 대체할 수 있는 자신의 발명품의 유용성을 설명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함. 결국 복사기의 성능향상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디자인 개선과 공학적 개선이 이루어지고 복사기를 파는 대신에 빌려주는 마케팅 전략이 채택되어 결정적 효과를 발휘하면서, 최초의 제록스 복사기들이 1960년대 엄청난 성공을 거둠. 그렇게 되자 비로소 복사에 대한 체감수요가 급증했고, 복사기는 일상적인 제품이 됨. 이 사례 역시 발명이 필요의 어머니라는 것을 보여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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