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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한국경제 이야기. 2

저자
이장규 지음
출판사
살림 | 2014-06-0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역대 대통령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제 정책을 썼을까?1988...
가격비교

- 대통령은 더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민주화 시대는 더이상 대통령의 강한 리더십을 원하지 않았고, 노태우도 그 점에 동의. 시대환경은 의회중심으로 흘러갔고, 대통령 스스로 권력행사를 삼갔으므로 청와대의 힘은 현저히 약화되었음. 정부관료들은 노골적으로 청와대와 간격을 벌려나감. 그전 같으면 경제수석이 관계장관 회의를 주재하면 장관들은 즉각 청와대로 달려갔지만, 노태우정부에 와서는 지방출장을 핑계로 빠지기 예사. 노태우도 그렇게 하는 것이 민주화 시대에 맞다며 청와대 역할과 기능을 대폭 줄였음. 여소야대 의회는 더이상 정부의 일방통행 행정을 용납하지 않음. 국회의원들도 경제분야만큼은 경제부처의 전문성을 인정해 왔으나 이제 어림없는 분위기로 바뀜. 상황이 이렇다보니 권력의 중심도 청와대에서 국회의사당으로 넘어감. 대통령이 의회를 견제할 수 있는 거부권이 있었으나 노태우는 거부권 행사에 적극적이지 않음. 그는 자신의 소신을 내세우기보다는 대세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을 편하게 여김. 경제쪽에서 가장 먼저 민주화의 뇌관이 터진 것은 노동문제였음. 앞선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 유연하고 합리적인 노동정책을 펴왔더라면 노태우 정권에 와서 그토록 부작용이 심각하진 않았을 것임. 전임정권의 잘못된 노동정책이 다음 정권을 더 어렵게 만들었음.
- 3저호황 속에 거침없이 뻗어가던 한국경제는 얼마 가지 않아 적신호가 켜짐. 88올리픽의 흥분이 가시면서 경제가 속절없이 주저앉기 시작. 민주화의 열기와 흥분 탓에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사실 이상 징후는 이미 여기저기서 나타났었음. 우선 전임정권에서 2~3%로 안정됐던 물가가 노태우 정권에 들어서는 7~8%가 보통이었음. 물가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 부동산 가격 폭등까지 감안하면 일반 사람들이 직접 느끼는 물가는 훨씬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음. 수출전선부터 이상이 왔음. 미국이 원화 절상을 압박하는 바람에 달러당 원화환율이 한때 666원까지 떨어지면서 수출이 눈에 띄게 위축되었음. 환율 탓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한국제품의 수출경쟁력이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었음. 한국경제는 어느새 이른바 저효율 고비용 구조에 빠져들었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전정권이 3저호황에도 불구하고 물가안정을 위해 지나치게 긴축재정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항만,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소홀히 하여 물류 비용이 급속히 올랐기 때문. 여기에 더해서 임금상승 부담도 가중됐음. 국제수지는 88년 145억 달러 흑자를 정점으로 줄어들어 급기야 90년부터 적자로 돌아섬. 흑자시대를 마감하고 적자가 3년 연속 계속되는데도 정부는 수출감소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 그저 왜 이렇지? 이상한데? 하는 식이었음. 한국 수출이 부진에 빠지게 된 것은 국내적으로 인건비와 물류비용이 급속히 오른 탓도 있었지만, 다른 나라 제품의 경쟁력이 강해진 것도 크게 작용. 일본의 기술과 자본, 동남아의 값싼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이 서로 결합하면서 국제협업체제를 구축했고, 미국과 유럽의 중저가 시장을 협공하는데 성과를 올리고 있었던 것. 요컨대 동남아에서 만들어진 일본 브랜드 제품이 싼값으로 나서는 바람에 메이드인코리아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음
- 중국과의 수교(92년 8월)가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소련과의 수교 영향이 컸음. 소련 수교를 성사시킨 노태우는 여세를 몰아 중국과의 수교에 박차를 가했음. 북한과 형제국가인 중국과의 협상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소련과의 수교 덕을 많이 봤음. 그러나 한국과 수교 이후 중국은 북한의 반발에 적지 않게 시달림. 만약 중국과의 수교가 2~3년 뒤로 미루어졌다면 한국이 중국시장에 진출하는 시기는 지금보다 훨씬 늦어졌을 것임. 오늘날 중국 시장 수출이 미국과 일본 시장 수출을 합친 것보다 많을 정도로 한국경제에 새로운 젖줄이 되었음을 생각하면 노태우 시대의 북방정책이 갖는 경제적 의미는 매우 큼
- 실제로 개혁 대통령이라 할 정도로 김영삼은 집권 내내 개혁작업을 계속함. 그중 최고개혁은 부정부패에 대한 개혁이었음. 그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처럼 자신을 포함한 공직자들이 부패척결에 솔선수범해야 함을 강조. 단 한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고 공언하는가하면, 공직자 재산신고제도를 도입하는 등 공무원들의 부패를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음. 국회의원들을 포함한 고위 공무원의 재산등록을 의무화한 제도가 이때 만들어짐으로써 한국사회의 부패개선에 두고두고 큰 역할을 함. 이 시기에 실시한 금융실명제도 경제정책보다는 부패척결 차원에서 내린 긴급조치였음. 금융실명제 실시로 가장 타격을 받게 된 곳은 기업들보다 정치판이었음. 가장 고질적인 부패의 고리가 정치자금이었는데, 실명제 실시로 정치자금의 움직임이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 것. 물론 김영삼의 아들과 주변인물들이 비리 스캔들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감옥가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음. 그러나 공직자 재산등록제도나 금융실명제 등 이 시대에 구축된 제도적 장치가 한국사회의 투명성을 높이는데 결정적 계기가 됨.
-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을 때의 경제는 어떠했을까. 첫 경제부총리 이경식이 취임직후 한 말은 93년 초 경제상황을 잘 요약해 줌.
"80년대 후반 이후 한국경제는 경쟁력 약화와 함께 성장활력이 크게 떨어졌다. 정치 민주화에 상응하는 경제윤리가 새롭게 따르지 못했고, 부동산 투기 등으로 계층간 갈등이 심화됐으며, 각종 규제로 기업의 투자의욕이 크게 위축됐고, 넷째 사회전반적으로 왕성했던 의욕과 자신감이 상실된 것이 이유다. 게다가 중국과 동남아처럼 새로운 경쟁상대국들이 부상하는 등 92년 하반기 이후 한국경제는 구조적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 원래 김영삼은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스타일이 아님. 특히 숫자가 있는 보고서를 싫어했으며, 구체적 사항에는 관심이 없었음. 물론 김영삼도 대통령에 당선되기위해 후보시절에 경제를 공부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함. 텔레비전 토론을 준비할 때도 경제분야 공부를 꺼려서 가정교사 박재윤이 애를 먹음. 김영삼은 원래부터 거시정책이나 미시정책이나 하는 경제용어를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런 것은 전문가나 직업관료에게 맡기면 된다고 여딤. 아마 다른 대통령이었다면 신경제 5개년 계획이 그토록 허망하게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임.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YS노믹스에 해당하는 신경제 5개년 계획이 힘도 한번 못써 본채 흐지부지된 가장 근본적 이유는 김영삼 자신이 경제에 대한 이해나 열정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 그렇다고 김영삼이 경제를 무시한 대통령은 아니었음. 취임사에도 밝혔듯이 그는 나름대로 한국병을 치유해야 경제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점은 절실히 느끼고 있었음.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해서 다른 대통령은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경제개혁 정책을 훌륭히 실현할 수 있다고 자신. 특히 대통령이 우유부단해서 해야 할 것을 못하는 일은 자신의 임기중에는 없다고 장담함. 전임 대통령 노태우와 다르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주고자 했음.
- OECD가입을 계기로 자본시장을 과감히 개방했고, 신생 종금사들이 홍콩 금융시장에서 외자를 끌어들여 한국기업에게 빌려주는 일도 예사로 벌어졌음. 그들은 돈만 빌려 오는 것이 아니고, 대박을 노리고 위험부담이 높은 싸구려 정크본드를 대량으로 사들이기도 했음. 국내 금리보다 낮은 외채가 들어올 수 있게 되자 기업들은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등의 신규사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고, 부채비율은 350~400%로 높아짐. 그러나 원화가치가 계속 유지되는 한 기업은 외채를 많이 빌릴수록 좋았음. 재수가 좋으면 싼 금리에 더해 환차익까지 누릴 수도 있었음. 외국투자자도 설마 한국에 돈을 떼일까라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한국기업들에게 돈을 빌려줌. 수출이 줄어들어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는 데도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원화가치가 떨어지지 않았던 것임. 일본의 엔화나 중국의 위안화는 같은 기간에 20~30%씩 절하되는 판에 유독 한국의 원화만 3년 내내 평균환율이 달러당 800원대를 유지됐으니 수출은 죽을 쑬 수밖에 없었음. 그런데도 김영삼 정부는 아랑곳 하지 않음. 수출은 부진한데 소비재 수입이 급증하고 해외여행 자유화까지 겹체 급기야 96년에는 237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 외환보유고에 육박하는 적자를 낸 것. 다른 한편에서는 금융기관들이 해외영업 규제에서 풀려 마음대로 외자를 끌어들임. 그것도 정부가 장기차입은 규제하고 단기차입만 허용했기 때문에 1년만기 이하의 단기 외채 도입이 크게 늘었음. 이렇게 총 외채는 93년 439억불에서 96년 1,047억 불로 급속히 불어남. 이처럼 불길한 징조가 완연한데도 환율이나 금리에 대한 정부정책은 일관성이나 정리된 입장이 없었음.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은 항상 의견이 엇갈렸고, 바뀌는 장관이나 경제수석마다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 한쪽에서 수출경쟁력을 위해 환율을 올리자고 주장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기업들의 외채상환부담 가중을 내세워 반대. 이견이 다른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이견들을 조정하고 결론을 내려주는 시스템도 사람도 없다는 것이 문제. 더구나 환율인상(원화가치 절하)을 공론화하지 못한 배경에는 국민소득 1만달러 달성 차질을 염두에 둔 정치적 압박이 작용하고 있었음.
- 외환위기 원인정리
(1) 빚더미 기업(부채비율 400%이상)들이 무모하게 외채투자를 벌임
(2) 정부는 OECD 가입에 급급한 나머지 개방정책을 무분별하게 추진
(3) 의회는 대통령 선거에 눈이 멀어 정부정책에 딴죽걸기만 일삼음
(4) 노조와 시민단체들은 노동자 권익을 주장하며 부실기업 정리를 가로막음
(5) 국제투기자본이 여러나라에 몰려다니며 국제금융시장에 심각한 불안을 가중시킴
그러나, 결정적 문제는 대통령의 리더십. 대통령이 최소한의 위기수습 능력을 발휘했더라도 국가부도 위기 상황까지 가지는 않을 수 있었음. 사실 경제분야의 대통령 리더십문제는 노태우권부터 불거졌음. 소위 경제가 민주화를 만났을 때 생겨나는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이해상충의 문제를 잘 조화시켜 나가야 하는 새로운 대통령 리더십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
- 돌이켜보면 국가부도 위기가 처음은 아니었음. 70년을 전후로 차관기업들이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다가 무더기로 빚더미에 올랐을 때 사채동결조치로 위기를 넘긴일이 있었고, 이후 중화학공업 과잉투자와 석유파동, 대통령 암살 등이 겹쳐 80년에 또 한차례의 큰 위기에 몰렸었음. 그러나 모두 독재정치 시대에 일어났던 상황이었고, 위기대처 또한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일사불란하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음. 부작용이나 반대가 있더라도 방향을 정해놓고 밀어붙이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이었음. 그런 뜻에서 97년 외환위기는 종래 개발연대식의 대처가 애당초 불가능했음. 박정희와 전두환이 풀었던 위기해법 방정식보다 김영삼이 풀어야 했던 방정식은 훨씬 어렵고 복잡했음.
- 한국경제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김대중 정권하에서 여러가지 개혁을 이루었음. 그러나 김대중이 의도한 개혁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이 개혁은 김대중의 개혁이라기 보다는 IMF개혁이라 부르는 게 옳다. 자존심이 상하는 부분이지만 한국정부의 개혁의지가 아니라, IMF의 강력한 압력이 변화에 결정적인 개혁의 엔진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과거와 비슷함.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맥아더 사령부가 패전국 일본의 과거를 해체하고 변화와 개혁의 판을 다시 짰던 형국과 비슷한 점이 많았음. IMF가 구제금융만 해주고 개혁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정부는 어떤 정책을 폈을까. 30대 재벌의 절반이 무너지고 5개 시중은행이 모조리 간판을 내리는 사태가 벌어졌을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임. 과거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처럼 충격적 개혁을 우리 스스로 시도한 적은 없었음. 재벌개혁이든 은행개혁이든 훨씬 온건하게 진행되었을 것임. 특히 개방정책은 분명 비교가 안될 정도로 소극적으로 진행했을지도 모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무자비한 초강력 긴축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은 외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음. 더욱이 지방은행 하나도 부도를 내본 적 없는 한국정부가 시중은행 간판을 내리게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음. 결국 IMF가 강요한 구조조정이기에 피를 철철 흘려가면서도 엄청난 대수술을 감행할 수 있었음. 어쨌거나 재벌개혁, 금융개혁, 정부개혁, 노동개혁 등 4대개혁을 내걸고 김대중은 IMF의 약속을 실천에 옮겼으나 부문마다 사정이 달랐음. 개혁은 주로 재벌과 금융기관에 집중됨.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관치금융 속에 뿌리내렸던 권력과 재계의 유착관계가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는 것. 정부가 지원하는 사업이라고 거래은행이 눈감아주고, 국회의원이 압력을 넣는다고 계속 대출을 해주는 일이 근절되었음.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하는 기업은 부도처리를 당해야 했고, 은행도 자기자본이 일정기준 미만이면 문을 닫아야 했음. 지금까지 한국경제가 이렇게 원칙대로 해온 일은 없었음. 뭐니뭐니 해도 기업들이 빚으로 사업을 마구 벌이는 차입경영 습관이 뿌리째 뽑혔고, 은행들은 전당포식 낡은 금융관행이 크게 변화. 500%에 달하던 대기업 부채비율이 100%로 급격히 줄었는가 하면, 은행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간섭도 확 줄어듬. 불신의 대상이던 한국기업들은 회계장부 작성을 국제기준으로 끌어올렸고, 감시감독 제도가 강화되면서 경영의 투명성이 현저하게 높아짐. 외국인들이 은행을 비롯하여 땅과 주식도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됨. 이처럼 외국인 투자가 보편화되면서 기업의 투명성 문제는 좋은 싫든 개선될 수 밖에 없었음.
- 한편 IMF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김대중의 지론이었던 대중경제론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는 IMF에 시종일관 끌려다니기만 한 것인가. 개혁의 주도권이 IMF에 있었으나, 그 내용이 김대중의 경제철학과 소신에 꼭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음. 우선 대중경제론 자체가 그동안 변해왔지만, 김대중의 생각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많이 달라짐. 더구나 자신이 늘 주장하던 것이 관치금융 폐지와 재벌규제, 자유로운 시장경제였는데, 이는 IMF가 한국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하는 개혁의 핵심과 일치. 그러고 보면 뜻하지 않게 김대중의 개혁의지를 뜻하지 않게 IMF가 대신 비난을 무릅쓰고 실현시켜 준 셈
- 김대중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공기업 개혁이 용두사미가 된 배경에는 노조의 반발이 결정적이었음. 김대중은 평소에 공기업의 비효율과 저생산성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자신이 집권하면 반드시 민영화를 통해 경쟁원리를 도입시키겠다고 장담. 공기업을 민영화해야 한다는 김대중의 소신은 오래전부터 국영기업체들은 독재정권의 일부라고 생각해왔기 때문. 그런데 막상 자신이 집권한 후 추진하던 민영화가 노조의 반발에 걸려 무산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 아무튼 그는 집권 내내 노동자 편에 서서 가장 많은 정책을 폈던 대통령이었음. 처음으로 노조의 정치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던 민노총과 전교조를 합법화시켰으며, 공무원의 노조활동에 정당성을 부여. 그럼에도 대화와 타협의 장에 참여해달라는 김대중의 요청을 노조는 끝내 거부. 김대중은 노조에 대한 서운함이 쌓여갔으나 이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일은 없었음. 다만 재임기간중 마지막 노동부 장관에 노조운동 준법을 강조하던 방용석을 기용함으로써 자신의 노조관에 변화가 왔음을 보여줌
- 김대중 정부는 구조조정 작업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경제에 새 살을 찌우기 위한 강력한 부양책을 펴기 시작. 국가적으로도 먹을거리를 제공할 새로운 산업을 찾아야 했는데, 인터넷을 중심으로한 IT산업이 그것이었음. IT산업은 운도 따랐다. 마침 미국을 중심으로 닷컴 비즈니스가 붐을 일으켰고, 국내여건도 전두환시대 이후 닦아 놓은 통신산업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서 IT산업 육성 정책의 여건은 잘 조성됌. 정부는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 구축 등을 비롯해 기업지원책을 적극적으로 늘렸고,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IT창업 자금지원을 대폭 강화했음. 강남 테헤란로 일대가 한국이 실리콘 밸리로 불렸던 것이 이때부터임. 99년 후반부터 소위 벤처창업이 봇물처럼 터지자 언제 국가부도위기를 당했느냐는 듯이 한국경제는 순식간에 달아오름. 그해 연말 증권시장의 종합주가지수는 1000을 돌파했고, 벤처기업들이 주식을 거래한느 코스닥을 모르면 촌놈이엇다. 닷컴이란 이름만 붙이면 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오름. 경기를 살린 것은 벤처회사만이 아니었음. 정부는 얼어붙은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 신용카드를 적극적으로 권장. 현금대신 카드를 사용하면 세금을 깎아주는 제도를 도입하는가하면, 카드사의 현금서비스 한도도 철폐. 부동산 경기를 살리기 위해 아파트 전매금지를 비롯해 그동안 실시해온 규제란 규제도 죄다 풀었다. 금리도 빠른 속도로 내렸음. 이자부담 때문에 은행돈을 못쓴다거나 은행문턱이 높다는 말도 사라짐. 보통 연간 금리는 10%가 넘었는데 3~4%대로 떨어진 것. 자기돈으로 집을 사면 바보란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 집값이 오르고 투기가 일더라도 하루빨리 경기를 살려내는 것이 정부의 급선무였음. 이 같은 노력의 총집결을 통해 IMF 조기졸업을 박수갈채 속에 이뤄낼 수 있었던 것. 그러나 문제는 뒤탈이었다. 우선 2000년부터 미국의 닷컴 버블이 진정되자 곧바로 한국의 닷컴회사들에 영향을 미침. 하늘높은 줄 모르던 벤처기업들의 주가는 어느날 갑자기 폭락세로 뒤집혔고, 테헤란로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섯던 중소창업회사들은 여기저기서 무너짐. 01년 미국 9/11 테러사태까지 겹쳐 세계경제가 하락하자, 결국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99년 10.7%까지 회복했던 것이, 01년 4.0%로 떨어짐
- 노무현의 참여정부는 출범 당시 충분한 준비가 없었으며, 특히 경제분야가 그러했음. 그의 주분에는 비판을 전문으로 하거나 운동권 사람들만 수두룩했지, 실제로 정채을 입안하고 책임지고 실행해본 경험을 지닌 행정전문가들은 드물었음. 물론 대선과정에서 기존 보수후보들과는 달리 서민복지를 앞세웠고 성장보다는 분배에 무게를 두는 과감한 개혁을 약속했으나, 막상 국정을 책임지면서 이내 간단치 않음을 깨달음. 오죽하면 노무현은 재벌기업 싱크탱크인 삼성경제연구소를 소문나지 않게 찾아가서 코치를 받고, 그들이 만든 보고서를 경제운영의 참고서로 삼았겠는가. 그러나 노무현이 추구하는 국정방향은 분명한 자기색깔이 있었음. 그의 경제관은 비록 다듬어지지는 않았으나 몇가지 점에서 명료했은. 무엇보다 박정희식 경제정책이 빚어낸 불균형과 왜곡을 고치고 바로잡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생각. 요컨대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을 분배와 복지우선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음.
- 집권 첫해 03년 경제성적표가 나오자 노무현은 큰 충격을 받음. 경제성장률은 3.1%를 기록했는데, 일자리는 3만개 정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 경제성장률도 02년 7%에 비해 크게 둔화된 것도 충격이었지만, 일자리의 절대 숫자까지 줄어든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음. 성장을 하는데도 고용이 늘지 않는다는 이른바 고용없는 성장이 현실로 다가설줄은 노무현은 미처 예상치 못함. 이때부터 노무현은 선거때 주장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기 시작. 가장 중요한 과제는 복지예산을 늘리는 게 아니라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일자리 창출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복지정책이요, 이를 위해서는 성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경제방정식을 비로소 인식. 그의 참모들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참여정부는 03년 고용없는 성장을 경험한 이래 노동시장 정책을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으로 물꼬를 틀었다. 무조건적인 성장우선 방식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북유럽식 복지체제를 추구하다가 노동시장이 지나치게 경직되는 것도 피하자는 것이다."
- 집권중반에 접어들면서 노무현의 노조관은 처음과 많이 달라져 있었음.
(1)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노조의 투쟁방식은 과거 독재 탄압시대와 다를 바 없다
(2) 대기업 노조들이 집단이기주의와 귀족화 현상을 보인다
(3) 정작 보호받아야 할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는 오히려 소홀해졌다
(4) 노조의 불법파업이 너무 잦아 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 한미 FTA는 미국의 개방압력으로 시작된 게 아님. 당시 미국은 한국과의 FTA에 시큰둥했으나, 한국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추진됨. 초기 단계에서 한국 실무자들이 미국측과 협상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것이 결실을 볼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무엇보다 참여정부의 성격이나 정책기조로 봐서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개방정책이라고 여겨졌기 때문. FTA의 경제적 효과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가뜩이나 반미성향이 뚜렷한 노무현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랬던 것이 예상을 깨고 노무현이 앞장서 미국과의 FTA를 밀어붙였던 것. 노무현이 한미 FTA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지극히 비정치적이고 실무적 차원에서 비롯됌. 통상산업본부장 김현종으로부터 한미 FTA 관련 보고를 받고 나서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한번 결심이 서자 주저하지 않고 추진
- 노무현 정부는 돈줄 조이는 정책은 외면한 채, 왜 세금폭탄 정책에만 의존했을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 첫째, 돈줄을 조일 경우 경기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을 우려. 노무현 정권은 기회 있을 때마다 경제가 아무리 나빠도 부양책을 쓰지 않겠다는 정책의지를 밝혀왔는데, 사실 이런 정책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였음. 경기부양을 위해 돈을 푸는 인위적 부양책을 펴지 않는다는 것이었지, 아파트 투기의 원천이었던 주택대출제도는 그대로 방치했던 것. 둘째, 노무현은 부동산 투기꾼을 처벌하고 손해를 보게 하려면 세금을 중가하는 징벌적 정책으로 뿌리를 근절해야 한다고 생각. 참여정권은 집권내내 부동산 문제를 경제정책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운동권적 시각으로 보았던 것. 그 결과는 실패였음. 아파트값은 물로 전국의 땅값을 잔뜩 올려 놓았을 뿐 아니라, 세금폭탄 투하로 부동산 거래 자체를 얼어붙게 하였음. 소위 말하는 지나친 세금공세로 심각한 조세저항을 초래해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인 열우당이 패하는 중요 요인이 됨
- 노무현의 업적을 돌이켜 봐도 대화와 타협보다는 오히려 반대를 무릅쓰고 굽힘없는 소신을 관철시켜 이뤄낸 경우가 많았음. 그에게는 역시 도전이나 투쟁이 더 어울렸음. 자기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가마저 모두 아울러 끌어안고 융화하는 것이 통합을 추구하는 리더의 기본덕목이라고 한다면, 그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끝까지 다투고 이기고 싶어하는 사람이었음. 노무현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고야 이점을 후회했음
- 이명박은 전임대통령 노무현이 경제를 망쳤다는 사회분위기의 반사이익을 많이 보았음. 김영삼 경제의 실패로 외환위기가 닥친 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처럼, 노무현 경제에 댛나 실망이 경제대통령, CEO대통령을 표방하고 나선 이명박의 당선에 크게 작용했던 것
- 집권초기 이명박은 성공한 기업인, 성공한 서울시장이란 이미지를 바탕을 매사에 자신만만해 했음. 사소한 부분까지 실무자들로부터 일일이 보고받고 지시해야 직성이 풀림.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며 현안문제들을 따지기 시작하면 보고가 서너시간을 넘기기 일쑤였으니 보고자들은 애를 먹음. 그는 관료들에 대해 부정적 선입견이 있었음. 특히 재무부에 대한 반감은 노골적임. 그는 기업에 있을 때부터 관치금융의 습성에 젖어있는 재무관료에 대한 불신이 깊었음. 이명박 정권의 첫 금융위원장 자리에 뜻밖의 인물인 전광우를 발탁한 것도 이런 불신 때문. 원래 주변에서 금융행정 경험이 풍부한 재무관료 출신을 천거했으나 재무관료 출신은 안된다는 기본입장이 작용. 대운하 추진계획이나 4대강 사업 또한 이명박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음. 4대강 사업의 경제적 타당성을 주제로한 TV토론에 출연한 이명박은 토목공사는 내가 최고 전문가 아니냐며 비판론자들의 비전문성을 반박. 이명박은 자신이 실무에 밝다는 점을 자주 내세움. 자원개발이나 원자력 발전소 건설수주 같은 사업도 직접 나서길 좋아했고 실제로 효과를 보기도 함. 한국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추진됐던 녹색성장 개념 또한 이명박이 적극적으로 나섰기에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었음. 그는 국정전반을 조감하고 총괄한다기 보다, 개별 프로젝트의 책임 매니저 같이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스타일이었음.
- 청와대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음. 야당가 시민단체의 공격에 굴복하는 항복문서나 다름없는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고, 그것에 더해 집권 첫인사를 불과 3개월만에 송두리째 바꿔야 하는 수모를 겪음. 이로 인해 MB노믹스의 추진일정은 초장부터 크게 빗나갈 수 밖에 없었음. 더구나 촛불시위의 위세가 어느정도 수습국면에 들어서자 미국발 금융위기와 3차 석유파동이 터져 나오면서 이정권은 또다시 격랑속으로 빠져듬. 운으로 치면 이명박 정부는 억세게 운이 나쁜 케이스였음.
- 기세좋게 출발한 MB노믹스는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났음. 정권 출범 3개월만에 터진 촛불시위로 대통령의 권위가 실추된 것을 시작으로 미국발 금융위기, 국제 석유값 폭등 그리고 유럽발 경제위기로 이어지는 대외여건 악화는 성장 촉진에 초점을 맞춘 747공약을 초장에 주저앉혔던 것. 세계경제가 구조적 불황에 빠져든 판국에 성장을 모토로 하는 747 공약이 무위로 돌아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음. 오히려 역풍이 불기 시작. 747 공약은 졸지에 나쁜 정책으로 전락. 경제가 나빠지면 당연히 투자촉진책을 먼저 쓰기 마련인데, 정반대 현상이 벌어진 것. 종전의 경기 부양정책이 기업특혜 정책으로 매도되는 분위기 속에서 이제는 지속성장을 위해 분배와 복지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음. 마치 다시 참여정부로 회귀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음. 원인이 어디 있든 간에 여론은 급속히 이명박 정권을 비난하는 쪽으로 기울었음. 대외여건 악화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추진했던 기업지원책만 비판의 도마에 오름.
- 이명박은 유난히도 자주 인사문제로 비판받았음에도 특유의 자기스타일 인사를 고집. 경제분야 인사는 내가 최고의 전문가라고 확신했기에, 누구를 등용하느냐보다도 누구를 시키든 내가 직접 챙긴다는 식이었음. 부총리를 통해 경제부처 장관들을 통괄하거나, 경제수석에게 부처간 이견조율을 맡기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 각료들의 팀플레이나 장관중심의 정책운용은 애당초 없었다. 이명박은 부총리제도를 폐지하고 주요 사안들을 직접 챙김. 선거캠프 때부터 중심역할을 했던 강만수를 첫 기획재정부 장관에 앉혔으나 경제부처의 총괄이나 통솔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획재정부 장관이 뭐라 하던 보건복지부 장관이나 국토해양부 장관은 아랑곳 없이 대통령과 직접 의견을 나누거나 따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같은 이명박 정부의 진두지휘는 미국발 금융위기에 처해서 일사불란하게 비상회의를 꾸려가는 과정에서는 효과적이었음. 하지만 MB인사는 고전의 연속이었음. 단순한 인사 스타일 차원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였음. 첫번째가 도덕성 시비. 당선자 시절의 첫 국회청문회 과정에서 이명박 정권은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음. 소위 고소영, 강부자라는 신조어가 회자되는 가운데 부자와 재벌을 위한 정부라며 몰아붙이는 야당의 공세는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 MB인사가 고려대 출신, 소망교회 교우, 영남지역 인사에 쏠려 있음을 비아냥 거리는 데서 나온것. 국회청문회에서는 청문대상자의 자격이나 능력검증은 뒷전이었음. 청문회가 개인적 치부를 들추기 위주의 도덕성 검증에 치중했음에도 이명박은 이점을 너무 소홀히 대처. 재산이 많은게 무슨 잘못인가.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가 돼야한다는 그의 소신은 너무 나이브했음. 축재의 정당성을 따지는 사회적 요구가 얼마나 엄격해졌는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줌
- 역대 대통령들은 대체로 국내보다 외국에서의 평판이 더 좋음. 이명박도 그러했음. 국내에서는 747공약의 좌절이나 촛불사태 등으로 지지도가 급속히 떨어졌지만, 해외에서는 미국발 금융위기와 석유파동, 유럽의 재정위기 등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지도자로 그를 치켜세움. G20정상회담 서울 개최를 주도함으로써 2차대전 이후 세계경제를 이끌던 G7체제가 새롭게 진화하는 길목에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괄목상대로 끌어올렸다는 점 또한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만했음.
- 이명박 경제는 09년 동안 내내 미국발 금융위기의 대혼란 속에서 한국경제를 구출하는 일에 올인해야 했음. 이처럼 정부가 출범했던 08년부터 이듬해인 09년까지 광우병 사태와 국제금융위기, 게다가 3차 석유파동까지 겪어야 했으니, 747 공약은 제대로 추진할 겨를도 없었음. 그나마 위기에서 벗어나나 했는데, 11년부터 그리스를 시작으로 한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가 연이어 덮침. 대외여건만 보면이명박 경제는 유난히도 나쁜 상황이 끊이지 않고 계속됨. 사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로서는 이같은 외부악재들에 대해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음. 그나마 한국은 대통령이 적극적인 리더십으로 대응을 잘해서 다른 나라에 비해 타격을 한결 덜 입음. 09~10년 세계평균 경제성장률이 2.2%였던 것에 비해 한국경제 성장률은 3.2%였음. 바로 이점에서 국내평가가 국제적 평가보다 훨씬 인색했음. 여론은 대부분 위기극복을 주도한 이명박 리더십에 대해 긍정적 시각보다 당초의 747 공약 실패를 비판. 대통령이 경제운영을 잘해서 위기를 넘겼다는 소리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음. 일반의 관심은 위기극복은 당연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일자리 문제, 다시 고개를 든 인플레이션, 서민들에게 직접적 타격을 주는 전세값 폭등 등 눈앞의 현안들이었음.
- 이명박에 대한 평가는 억울한 구석이 많음. 비록 당초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 배경에는 국제경제 악화가 결정적이었으며, 고용없는 성장이나 양극화 심화문제 또한 혼자서 그 책임을 뒤집어쓸 일은 아님. 본인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경제살리기에 매진한 대통령이었따고 자부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명박은 왜 비판의 대상이 됐고, 노무현은 왜 명예롭게 부활한 것일까. 노무현 정부때보다 이명박 정부에 와서 객관적으로 더 나빠진 것이 첫번째 이유. 여기에 더해 이명박의 정책수정 결과가 노무현이 추구했던 것을 뒤늦게 따라갔다는 것이 둘째 이유. 다음 정권이 전임정권의 정책을 비판하다가 태도를 바꿔 따라한다는 것은 결국 전 정권의 정책이 옳았음을 입증해주는 꼴. 노무현 부활론도 그런 맥락에서 나옴. 결과를 놓고 보면 그럴만 했음. 이명박 정권에 와서 경제가 더 악화된 것도 사실이고, 취임 첫해를 보낸 이후 이내 성장 위주 정책에서 분배 및 복지 정책으로 기조를 급선회한 것도 맞음.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된다고 친기업론을 강조하던 대통령이 어느날 갑자기 친서민가 윤리경영을 내세운 것도 사실. 동반성장 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비정규직 문제로 기업들을 압박하고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것은 원래 참여정부의 단골메뉴였음. 그러나 이런 이슈가 갑자기 생겨난 문제는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함. 양극화 해소는 사회통합 문제는 노무현의 적절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결하는 데는 실패했던 사안. 도리어 집권기간 중 양극화 현상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가진자와 없는자의 패를 갈라놓는 바람에 대립과 갈등이 더 증폭되는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이 바통을 넘겨 받았던 것. 경제가 악화되자 이에 대한 정치, 사회적 불만이 한층 더 강해짐. 다시 말해 노무현의 정책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노무현 시대에서 불거지고 이슈화되었던 양극화 문제가 국제경제 악화와 국내경제 구조의 급속한 진화로 한층 더 심각하게 부각된 것.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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