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한국경제 이야기. 1

저자
이장규 지음
출판사
살림 | 2014-06-0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역대 대통령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제 정책을 썼을까?해방 이...
가격비교

- 경제환경뿐 아니라 정치사회 여건도 북한이 남한보다 앞섰음.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눠서 점령했으나 양쪽의 사정은 많이 달랐음. 남함은 미군의 비교적 느슨한 통치 아래 정당이 난립하고 좌우로 갈라져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던 반면, 북한은 소련군의 치밀한 지시아래 김일성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공산정권을 구축해 나감. 많은 부문에서 북한은 남한을 앞서 나감. 46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해 사실상의 정부가 만들어졌고, 제대로 된 군대를 창설했으며, 소련한테 들여온 탱크로 탱크부대까지 만들었음.경제운영도 북한이 한수위였음. 남한은 거주 일본인을 다 쫓아냈지만, 북한은 일본인 기술자 900여명을 강제로 붙잡아 놓고 일을 시킴. 그들이 없으면 비료공장, 철강공장 등 주요 산업시설이 당장 멈추게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 제도 개혁또한 과감하게 추진. 토지개혁을 실시했고 대부분의 산업시설을 국유화. 그리고 땅뿐 아니라 가축까지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줌. 47년 말에는 화폐개혁을 단행했고, 49년에는 통일을 전제로 한 남한의 토지개혁계획까지 수립. 실제로 이듬해 6/25 전쟁을 일으켰을 때 점령지역을 대상으로 이때 준비했던 토지개혁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었음. 북한이 신속한 체제구축을 통해 일찌감치 사회적, 경제적 안정을 이뤄나갔던 반면, 남한은 극도로 혼란스러웠음. 무엇보다 이념대립이 심각했음. 북한에서는 시비의 여지없이 사회주의 체제구축이 처음부터 정해진 노선이었던 반면, 남한은 수많은 정당이 자유롭게 생겨나면서 이념적으로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치열하게 대립했음.

- 일본인이 경영하던 적산기업의 수는 크고 작은 것을 합쳐 2700여개에 달했는데, 수많은 사람이 이것들을 차지하려고 미군정청을 상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열한 로비를 벌임. 철수한 일본인 기업주와 내통해서 사실상 주인행세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음. 반면, 북한에서는 소련 고문단의 코치아래 모든 기업의 국유화 조치가 일찌감치 취해졌고, 남한에서도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음. 그러나 미군정청의 기본입장은 국유화 반대였음.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업은 민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 결국 미군정청은 기업활동의 활성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적산기업의 일부만 민간에게 넘기고 대부분의 주요 기업들은 중간관리인만 지정한 채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었음. 골치 아픈 적산기업 처리를 자기들이 처리하지 않고 새로 수립되는 한국 정부에 넘기기로 한 것. 아무튼 미군정청이 적산기업의 처리원칙을 국유화가 아닌 민영화로 정한 것이 남한 기업 역사의 시작이었던 셈. 적산기업 못지 않은 또 다른 돈벌이는 미국이 주는 원조물자, 구호물자를 확보하는 일이었음. 밀가루, 의류, 의약품 등 생필품이 중심이었고, 기름, 석탄, 비료, 면화 등 원료도 대상이었음. 미군정청은 본국에서 보내오는 구호물자를 제대로 나눠주는 것이 큰 과제였음. 그러나 무정부시대나 다름없는 해방직후의 혼란과 부패속에 구호물자들이 필요한 곳에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했음. 상당부분이 암시장으로 흘러들어갔고, 이것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번 사람을 구호물자 벼락부자라 했음. 미국은 여러 시도 끝에 구호물자를 교회 같은 종교단체를 통해 배급하기도 했는데, 이즈음에 교회가 급격히 난립했던 배경에는 이처럼 무상으로 배급되는 구호물자 탓도 있었음. 또 다른 굵직한 사업은 일본으로부터의 밀수였음. 당시 일본을 통치했던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의 무역행위 자체를 금지시켰으나 사실상 단속이 불가능했음. 일본 상인들은 부족한 쌀을 한국으로부터 밀수입했고, 한국쪽에서는 부산항을 통해 일제 화장품, 의약품, 기계부품 등을 물물교환으로 들여왔음. 일본과의 밀무역에 이어 다롄, 칭다오 등 중국과의 무역도 성행. 47 3월쯤부터 마카오를 통한 중계무역이 그리고 뒤이어 홍콩과의무역이 본격과되기 시작. 우리는 적산기업들이 생산했던 텅스텐, 망간 등을 수출했고, 그 돈으로 페니실린, 사카린, 시계, 생고무 등을 수입. 이처럼 무역이 돈벌이의 주축으로 활기를 띠자, 해방이전부터 무역업을 했던 화신무역의 박흥식이 선두에 나섰고, 다른 조신인 기업들도 뒤따름. 대구에서 양조장을 하던 이병철도 48년 서울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에 뛰어듬

- 이승만의 경제적 관심은 오직 달러였음. 나라경제를 살리려면 달러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 부족한 생필품을 수입하는 일도, 공장을 짓는 일도, 달러 없이 되는 것은 없었기 때문. 이승만이 걸핏하면 미국과 실랑이를 벌였던 것도 바로 달러 문제에서 비롯. 달러에 대한 원화가치, 즉 환율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미국에서 얻어낼 수 잇는 달러 액수가 늘었다 줄었다 했던 것임. 원조받는 달러를 어떻게 쓸지에 대해서도 충돌. 이승만은 일본에서 생필품을 사다 쓰라는 미국의 권고를 무시하고 국내에 발전소를 짓고 밀가루 공장과 비료공장들을 건설하겠다고 맞섰던 것. 원조를 통해 돈줄을 쥐고 있던 미국정부도 이승만의 이같은 고집때문에 애를 먹음. 미구긍로서는 코리아의 대통령이 영어를 잘해서 소통에는 문제가 없어 좋은데, 중요 정책들을 자기네가 시키는 대로 않고 사사건건 반기를 드는 바람에 골치를 썩임. 아무튼 이승만의 산업정책은 하루빨리 수입대체 산업을 키워서 수입을 줄이는 일이었음.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는 자급할 수 있는 제조업 기반을 키워야 한다고 이승만은 판단했음. 품질이 떨어져도 국산품 사용을 독려했고 수입은 강력히 규제. 국산품 애용과 수입품 배격은 이 시대의 중요한 범국민운동 과제였음. 따라서 이승만은 미국의 원조자금을 부족한 물자를 수입하는 데 쓸 것이 아니라 공장 짓는데 투자하기를 바랐음.

- 농지개혁의 정치적, 정책적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 결과와 역사적 의미는 대단했음. 비록 땅값을 치른 유상몰수였다고는 하나, 왕조시대의 전통적 지주제도가 농지개혁으로 인해 일시에 해체된 것. 부작용도 상당했지만 지주제도의 해체는 한국경제의 생산구조와 분배구조 면에서 혁신적 변화를 몰고 왔음. 지주제도의 붕괴는 3년간의 처참한 전쟁을 치러내는 과정에서 더 과격하게 진행됐음. 전쟁통에 지주계급들은 피해가 컸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전쟁 인플레 탓에 토지보상대금으로 받은 지가증권이 휴지조각이 되었기 때문. 농지개혁을 계기로 기존 농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을 기대하였으나, 애초의 의도는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말았음. 지주들이 유상몰수의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은 3년 전쟁을 치르면서 엿장수들이 엿을 주고 거둬들일 정도로 그 가치가 폭락. 아무튼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공산화를 막았고, 자본주의 기틀인 사유재산제도를 공고히 다졌으며, 지주계급이 해체됨에 따라 분배구조면에서도 꾸준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음. 이것이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필리핀 경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 브라질 대통령 룰라가 재임시절 "브라질 경제의 근본문제는 한국이 50년대에 했던 농지개혁을 아직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말은 한국 농지개혁을 밖에서 보는 객관적 평가이기도 함

- 원래 5개년 계획은 장면정권의 경제관료들이 완성했지만, 발표 직전 쿠데타가 터져 사장됐던 것. 이 계획은 쿠데타로 경제 청사진 마련이 다급했던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안성맞춤이었음. 즉각 실무자들을 동원해서 몇군게 손질을 통해 급조한 것이 바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62~66)이었음. 박정희에게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두가지 계획을 성사시키는 데 필요했음. 첫째, 집권 6개월만에 미국 워싱턴 방무을 앞두고 있는데, 워싱턴에 가서 원조와 차관을 요청할 사업계획서가 필요했음. 둘째, 경제를 모르는 군사정권이었기 때문에 경제를 꾸릴 목표와 계획표가 있어야 했음. 그러나 두가지 모두 박정희의 생각처럼 되지 않았음. 박정희는 미정부에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열심히 설명했으나 워싱턴 당국자들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음. 호주머니 생각은 않고 사고싶은 물건들만 잔뜩 열거한 쇼핑 리스트라며 무시. 의욕만 앞세웠을 뿐, 내용도 조잡하고 방향도 틀렸다는 것. 미국은 애당초 한국의 독자적 경제계획에 부정적이었음. 미국은 5년간 평균 목표성장률 7.1%가 실천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숫자이며, 한국정부로서는 무리한 성장을 추구할 게 아니라 물가안정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 이는 세계은행도 마찬가지였음. 경제쪽에서 박정희에서 첫 시련과 좌절을 안겨준 것은 외자조달이었음. 자금이 없는 상태에서는 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 큰소리쳤던 대규모 공장건설은 불가능했음. 기업도 정부도 돈이 없었음. 몇푼 안되는 외환보유고만 축내고 있었음. 당시 정부 외환보유고는 2억달러 안팎.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첫해의 성장률이 흉작까지 겹쳐 2.2%에 그치자 박정희의 좌절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음. 경제살리기를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는데,초장부터 실패를 면치 못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음. 그로서는 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음. 이후 박정희는 23개 부분에 걸친 220개 사업을 일일이 챙김. 브리핑 차트를 집무실에 걸어놓고 밤낮없이 군사작전처럼 밀어붙였으나 그런다고 될 일도 아니었음. 계획자체도 엉성한데다 돈도 없으니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음. 결국 미국의 종용을 받아 목표성장률을 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실시 1년만에 계획을 수정. 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소득은 성공이 아니라 쓰라린 실패경험이었음. 박정희는 경제개발 전략의 요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수많은 조절을 통해 학습했고, 나름대로 해법을 찾기 위해 골몰. 무엇보다 사업이든 계획이든 자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엇하나 되는 일이 없음을 절실히 깨달음. 투철한 사명감과 혁명정신으로 목숨을 걸고 추진하면 안될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그게 아니었음.

- 박정희 경제모델은 정형화할 수 없는 특유의 리더십과 환경적 요인을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음. 정치적 화경, 그리고 박정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안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함. 그는 반대에 부딪히면 독재의 힘으로 밀어붙였고, 전문관료들이 소신껏 정책을 펼 수 있도록 정치적 외풍을 차단시킴. 정책 토론 과정에는 민주적 분위기를 보장해 주는가하면, 시간을 끌면서 결론이 나지 않을 때는 자신이 결단함. 흉내낼 수 없는 리더십이었음.

- 정권말기를 제외하면 수출지상주의는 박정희 정권 내 경제정책의 핵심이요, 중추적 역할을 함.주무부 장관도 추진력을 으뜸으로 따져서 앉침. 심복이었던 국세청장 이낙선을 상공부 장관에 보낸 것도 세금을 걷듯이 수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밀어 붙이라는 의도였음. 관치금융, 정책금융의 대표선수가 수출금융이었음. 당시 일반 시중금리는 30%였는데, 수출금융 금리는 절반 이하로 특혜를 주었음. 한국의 은행들은 수출지원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음. 수출 뒤치다꺼리를 하다보니 금융시장이 왜곡되는 등 부작용도 많았음.

- 박정희의 수출 드라이브는 정권내내 지속되다가 막판에 와서야 제동이 걸림. 갖가지 부작용과 폐단때문이었음. 수출은 한국경제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돌파구였던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인플레와 집값폭등 등 심각한 부작용을 만들어냄. 수출기업은 경제의 1등공신이었으나, 불항에 빠져드니 부실의 원흉이 됨. 더구나 싼 금리를 악용해서 수출은 뒷전이고 그 돈을 빼돌려 돈놀이를 하거나 부동산 투기를 일삼는 기업이 생기는 등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됨. 결국 2차 석유파동과 세계적 불황 속에 박정희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수출지상주의를 수정하기 시작. 16년 동안이나 지속했던 금융특혜를 대폭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하는 이른바 안정화 정책으로 노선을 전환

- 베트남 파병이후 보잘 것 없던 수출은 내용이나 규모면에서 모두 달라짐. 인력진출이 최고에 달했던 69년 해외진출 인력은 15500명이 넘었고, 베트남 진출기업도 최고 79개업체에 달함. 한진 그룹은 당시 베트남에 미군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수송업을 발전시켜 항공산업까지 뛰어들면서 오늘의 대한항공으로 발전. 훗날 중동에서 소위 대박을 터뜨린 해외건설도 우물안의 개구리에 불과했던 국내 건설업체들이 베트남 전쟁터에서 기초실력을 닦은 덕택이었음. 그전 같으면 국제입찰에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 100만 달러만 수출해도 주목받던 시절, 베트남 참전을 계기로 수출금액의 단위도 달라지기 시작. 달러뿐 아니라 군인과 해외공사에 파견되는 노동자의 봉급 그리고 기업의 현지 사업수익 등을 모두 합치면 베트남 전잰중에 벌어들인 돈은 10억 달러가 넘었음. 현금반입, 군수품 편법 반입 등 비공식적 금액을 포함하면 한국의 경제적 소득은 공식 집계보다 훨씬 컸음. 이 같은 달러 벌이는 이후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데 주요 재원이 됨. 박정희 정권이 올린 또 다른 소득은 베트남 참전을 계기로 껄끄러웠던 미국과의 관계도 호전되었다는 점. 미국이 박정권에 대해 호의적으로 바뀌었고, 수출 또한 잘되는 바람에 국제 신인도는 부쩍 상승했으며, 돈 빌리기도 수월해지고,적용되는 금리도 한결 낮아짐

- 정부직제도 중요하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운용임. 포철이나 경부고속도로 건설 같은 국가적 프로젝트는 대통령이 직접 진두지휘. 그러나 대부분 주무부 장관들에게 믿고 맡기고 정기적 회의를 통해 전체 동향을 챙김. 월간경제동향보고와 수출진흥 확대회의가 대표적 사례.65 1월부터 본격화된 경제동향 보고회의는 대통령 주재로 매월 빠짐없이 열렸고, 수출진흥확대회의도 마찬가지였음. 이 두 회의는 박정희가 불행한 최후를 맞을 때까지 14년 동안 계속됨. 모두 1400회 이상의 회의 직접 주재. 모든 주요 현안은 대통령 앞에서 직접 보고, 논의 되었고, 난관에 봉착한 문제는 즉석에서 대통령의 판단과 결심으로 결론이 났음. 부처들의 의견이 달라 정책결정이 유보되거나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음. 아무리 어려운 일도 두 회의에서 결판이 났던 것. 이것이 박정희 주식회사의 의사결정방식의 요체였음.

- 훌륭한 출발을 보였던 새마을 운동은 유신정치와 결합하면서 당초의 순수성이나 자발성은 크게 훼손당했음. 이런 이유로 외국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훨씬 평가절하됨. 여기에 전두환의 잘못도 가세. 그렇지 않아도 변질된 새마을운동 사업을 전경환 손에 맡기는 바람에 기능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완전히 망해버림. 본연의 새마을 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전경환 개인의 놀이마당이자 대통령 친인척 비리의 온상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

- 북한의 위협은 군출신 대통령 박정희에게는 큰 충격을 줌. 250만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전 국민에게 일련번호를 부여하는 주민등록번호 제도가 68년부터 시작. 경부고속도로도 서울-수원구간은 중앙분리대를 없애 유사시 전투기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 박정희의 산업혁명 방향은 중반을 지나면서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다시 말해 무기공장을 집중적으로 건설하는 것. 단순한 산업구조조정 차원의 변화가 아니었음. 한국경제의 근간이 된 중화학 공업의 본격적인 추진이 경제적 동기보다 북한의 위협이 가져다준 결과물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음. 유신체제 또한 한국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 당시 정치환경과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간의 관계는 매우 주목할만함. 박정희가 몰아붙였던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은 민주적 토의나 의견수렴 절차를 상식적으로 밟았다면 도저히 추진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 유신체제가 아니었다면 짧은 시간안에 그 같은 대규모 투자는 불가능했을 것임.그러나 극심한 정치, 사회적 저항을 초래했다든지, 무리한 과잉투자로 엄청난 부작용을 유발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유신체제 때문에 빚어진 부정적 측면 또한 심각했음. 따라서 중화학 공업 발전이 유신체제 덕분이었다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임. 중화학 공업이 뿌리를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비용이 있었는지에 대한 분석 없이 결과만 놓고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다. 돌이켜보면 북한의 위협, 중화학공업의 육성, 유신체제의 탄생은 서로 깊고 복잡하게 얽혀 있음. 어떻든 간에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이 경제성을 무시한 과감한 중화학 투자를 낳았고, 비판이나 반대를 봉쇄했던 권위주의적 정치환경 또한 이 같은 시도에 속도를 더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 지나친 정책금융으로 시장원리를 무시하는 바람에 부작용을 야기했다는 비판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비판과 부작용에 아랑곳 없이 정부의 강력한 지원아래 기업의 중화학공업 투자는 봇물을 이뤘고, 결과적으로 수출을 비롯한 국내산업 구조가 강제적으로 바뀌었음. 70년대 중반, 한때는 중화학 공업 제품이 수출증가의 새로운 견인차로 박수를 받기까지했음.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했던 것이 세월이 흐른 뒤 한국경제에 결정적으로 효자노릇을 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78년에 접어들면서 2차 석유파동과 세계적인 불황이 닥치자 그동안의 과잉투자와 잘못된 투자가 드디어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경제적인 면에서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는 중요 요인으로 작용했을 정도로 심각한 파국을 초래. 사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훨씬 선배였음. 60년대 중반부터 주체사상 아래 자체 무기생산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 북한판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었음. 결국 그것이 실패하면서 70년대부터 남한경제가 북한경제를 추월하기 시작.

- 박정희 경제는 정권말기에 이르러 급기야 휘청거리기 시작. 그런데 희한하게도 위기도래 직전은77, 뜻밖의 반짝 호황을 맞게 됨. 중동 해외건설로 벌어들이는 오일달러가 안겨준 마지막 축복이었음. 중동 해외건설 붐은 베트남 전쟁에 이은 두번째 대박이었음. 베트남 참전을 계기로 한국기업들의 국제화가 본격화되었고,특히 국내기업들이 해외건설에 대거 진출했는데, 베트남 철수가 결정되자 이들이 갈 곳을 잃어 심각한 고민에 빠짐. 그동안 키웠던 해외건설 전문인력과 비싼 장비들을 소화할 방법이 없었음. 그러던 판에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국가에 건설붐이 일면서 안성맞춤의 돌파구를 찾은 것. 73년부터 74년 사이에 터진 1차 석유파동은 석유 한방울 나지 않는 한국경제에 큰 타격을 안겨주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동 산유국들이 벌어들인 오일달러가 한국의 건설사들에게 살길을 터줌. 제조회사들의 수출만이 달러를 벌어들이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는데, 건설회사가 외국에 가서 건설공사하는 일이 새로운 달러박스로 등장한 것. 76년과 77년 사이 수출이 75억불에서 대망의 100억불을 돌파했고, 이중 중동 해외건설 수주는 25억불에서 35억불로 껑충 뛰었으며, 경제성장률은 각각 13% 14%를 기록.

- 그러나 중동 해외건설로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에 대해 모두 좋아하기만 했을 뿐, 경제가 너무 잘돼서 일어나는 무서운 부작용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음. 하지만 2차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우리 경제는 극심한 인플레와 부동산 투기, 수출감소에 따른 재고누적 그리고 국제수지 악화라는 심각한 파국에 처함. 결과적으로 77년 반짝 호황은 박정의 정권에 독화살이 되어 돌아온 셈. 과잉투자로 인해 중화학 공업은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수출기업들은 줄줄이 도산. 여기에 부가가치세 도입에 따른 조세저항으로 민심도 흉흉했음. 정치는 차치하고, 경제쪽에서도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예고하는 심상찮은 조짐이 일고 있었던 셈.

- 박정희 정권 말기에 추진된 경제안정화 정채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할 만큼 획기적이었음.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던 것일까. 이 같은 전환은 다름 아닌 박정희 시대가 키워 온 직업 관료들에 의해 시작, 추진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함. 박정희 경제에 앞장서 왔던 그들이 박정희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안 제시와 새로운 처방을 주장하고 나선 것.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익숙하고 권력에 약한 관료집단이 도대체 어떻게 위험을 무릅쓰고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를 겁없이 주도했던 것일까. 한마디로 박정희 키즈의 반란이었음. 7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경제기획원의 핵심관료들 사이에는 박정희식 경제정책에 대한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었음. 반란의 주모자격이었던 강경식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음.

"78년 당시 경제관료들은 어떻게 하면 물가안정을 이루고 국제수지 흑자를 내는 경제를 만들 수 있는가 염원했다. .... 독일, 일본, 대만이 성공사례였다. 1차 석유파동 때 우리는 경기부양에 역점을 두었는데, 일본과 대만은 물가안정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래서 우리도 79 2차 석유파동 때는 불황을 감수하더라도 물가안정 위주의 정책을 펴고자 했던 것이다."

이론적으로야 무슨 말인들 못하겠나. 그러나 공무원은 물론이고, 경제학자나 연구기관, 심지어는 언론조차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리는 정책건의나 비판을 대놓고 하기 어려운 때였음. 이런 상황에서 경제기획원은 차관보 강경식, 기획국장 김재익 등을 중심으로 78년부터 안정화 정책에 시동을 걸기 시작. 이들의 노력을 정책으로 만드는데 지지하고 방어해준 최후의 보루는 뒤늦게 부총리가 된 신현확뿐이었음.경제기획원이 나서서 외롭게 안정화 계획에 불을 지피고 KDI의 경제학자들이 힘을 보태는 과정에는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의 어떠한 건의나 경고도 없었음. 다시 말해 선진국 전문가들이 한국경제에 대한 경고등을 켜기 전에 한국의 경제관료들이 스스로 빨간 불을 켜고 비상을 건 셈. 실물경제를 주관하는 상공부와 금융기관을 관장하는 재무무, 그 밖의 농림부, 내무부 등 대부분의 부처들은 고통감수를 요구하는 안정화 정책에 모두 반대했음.

- 박정희 정부에서 재무장관, 경제부총리, 경제특별보좌관 등을 역임한 남덕우는 박정의의 최대장점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탁월한 용병술이라고 말함. 집권초기의 혼란을 거치고 나름대로 경제정책의 틀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감을 잡은 박정희는, 남덕우의 말대로 특유의 용병술을 통해 사람을 키우고 적재적소에 활용. 박정희는 상대가 누구든 언제나 듣는 입장을 취함. 보고를 듣는 것은 공부의 기회이자, 동시에 보고자의 됨됨이를 살필 기회기도 했음. 집권 초기에는 자신의 심복인 군인들에게 요직을 나누어주었으나, 이내 한계를 깨닫고 직업관료를 중심으로 학자들을 과감하게 영입. 이병철을 비롯한 부정축재 처벌대상인 재벌 총수들에게 지도를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음. 현안이 생길 때마다 전담반을 만들고, 거기서 내린 결론을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나감. 신문에 게재되는 팔럼이나 기고를 유심히 보고 발탁인사에 참고하기도 함. 남덕우를 재무장관에, 김만제를 KDI원장에 기용할 때도 그들이 쓴 신문칼럼을 주목했던 것. 박정희는 한번 믿고 맡기면 오래 중용했음. 경제 쪽은 더욱 신임. 그는 사람보는 눈이 있었음. 발탁된 인물이었던 장기영, 김학렬, 김정렴,남덕우, 김용환, 김만제 등은 박정희 경제의 기둥역할을 해냄. 그들이 없었다면 박정희 경제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임

- 믿고 맡기는 인사도 경제가 잘 돌아갈 때 이야기힘. 정권말기에 해당한느 78년 선거패배로 단행한 인사에서는 전에 없이 흔들렸음. 신임했던 김정렴, 남덕우, 김용환을 모두 내보내고 신현확에게 지휘봉을 맡길즈음 박정희는 그전 같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함. 탁월했던 용병술이 정상궤도를 벗어난 것은 비단 경제분야뿐만 아니었음. 경호실작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정부장 김재규를 측근 3인방으로 임명하면서부터 심각한 사달이 나기 시작. 자타가 인정했던 인사의 달인이 결국 자신이 임명한 정보부장의 총탄에 최후를 맞았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 박정희 시대가 한국의 경제발전 기틀을 마련한 것은 사실이나, 정권말기의 부작용과 어려움은 매우 심각했음.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박정희 경제의 막판 위기상황을 어렵사리 극복해냈고, 한국경제를 여러면에서 한단계 끌어올림. 건국 이후 계속되던 만성 인플레를 근절시켰을 뿐 아니라 고도성장 시대를 부활시켰고, 여기에 더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국제수지 흑자시대를 열음. 처름으로 물가안정, 경제성장, 국제수지 흑자라는 소위 세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대통령이었음. 사실 경제성장도 잘하고, 물가도 안정시키고, 국제수지도 흑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불가능한 것으려 여겨 왔었음. 그런 것을 전두환 정권이 이뤄낸 것이다. 아무도 전정권이 세마리 토끼를 잡아낼 것으로 기대한 사람은 없었음. 원래 전두환은 경제에 문외한이었음. 세마리 토끼가 무얼 뜻하는지도 몰랐던 인물. 하지마 그는 집권초기부터 철권통치로 비판과 저항을 봉쇄한 가운데 물가안정 정책에 총력을 기울였고, 유능한 전문인력을 기용했으며, 본인 스스로 열심히 경제공부를 해나감.

- 전두환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운이 좋은 대통령이기도 함. 재임 중반에 국제 원유값이 떨어진 것을 비롯해 국제금리와 달러값이 동반하락하는 소위 3저 호황이 전두환 경제를 결정적으로 도왔음. 하지만 대외여건 덕을 보았다고 해서 그의 치적을 과소평가할 순 없음. 3저 호황은 세계 모든 나라가 겪었지만 유독 한국경제가 3저 현상을 잘 활용해서 좋은 성과를 만들었기 때문.물가안정은 원유값 하락에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이전부터 전정권이 추진했던 강력한 긴축정책 등 지독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음. 또한 개방정책이나 투자확대 정책 등을 미리미리 준비했었기 때문에 타이밍을 잃지 않고 대외여건 호전의 상승물결에 올라탈 수 있었음. 예산동결 같은 파격적 조치는 일종의 정치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정부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결단을 내리으로써 재정안정화의 기틀을 마련. 지금까지도 한국의 재정상태가 다른 나라에 비해 양호한 것은 당시의 재정혁신 덕택임. 산업쪽에서는 전임정권에서 넘어온 중화학 공업 과잉투자와 부실문제를 해결했고, 전자교환기 도입 등을 시작으로 오늘의 통신 혁명 인프라를 구축. 오늘날 인터넷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기본터전이 이때 마련된 것. 재벌의 경제력 집중문제에 대처히기 위한 공정거래제도도 정권 초기에 도입되었는데, 기업들이 반대할 겨를도 없이 신군부가 후다닥 결정함. 박정희 시대의 연장선에서라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일들이었음. 이처럼 전두환 시대의 한국경제는 여러 방면에서 도약적 발전을 기록했고, 전두환은 스스로 경제대통령임을 자임했음. 그러나 이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실패하는 비판을 면키 어려운 것이 노동정책이었음. 그는 집권이후 줄곧 노조에 대한 탄압을 강화. 3저호황으로 노동정책을 정상화할 호기를 맞았으나, 전두환은 이때에도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음. 그는 노조의 활성화를 사회불안 요인으로 간주했던 애당초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함. 결국 80년대의 잘못된 노동정책이 후일 노동시장에서 두고두고 심각한 왜곡현상을 초래하는 화근으로 작용

- 돌이켜보면 물가상승률 목표를 2~3%로 책정한 것 자체가 일종의 몽상이었음. 어쩌면 김재익의 몽상을 신뢰한 사람은 전두환 혼자뿐이었을지도 모름. 박정희 경제가 자신의 확고한 경제관으로 추진됐다고 한다면, 전두환 경제는 경제선생이나 참모인 김재익에 대한 전두환의 절대 신뢰에 의해 소기의 목적을 극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셈. 아무튼 고통을 감내하는 물가안정 우선정책은 80년부터 시작해 무려 4년간 지속.불황의 터널이 그만큼 길고 지루했다는 이야기. 그렇다고 전정권이 경기부양을 전혀 외면한 것은 아님. 여러가지 부양책을 동원.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물가안정 기반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제한적으로 허용된 부양책이었음. 경제 전체의 체질개선을 위해 구조조정을 줄기차게 해낸 것은 건국 이후 처음이었음. 박정희 경제에 대한 대대적 수선기간이었던 셈

- 돌이켜보면 전두환 시대의 경제정책은 박정권의 경제를 계승하면서도 잘못된 것을 고치고 업그레이드시킨 정책들이 많았음. 경제운영을 시장원리에 더 충실하게 했다던지, 금융자율화를 더 촉진시켰다던지, 공기업들을 경쟁체제로 바꿨다던지, 공정거래제도를 처음 도입해서 재벌규제를 본격화했다던지, 정부의 만성적 재정적자를 청산했다던지, 수입규제를 과감하게 텄다던지 등 여러 방면에서 한국경제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방향으로 정책을 끌어갔다고 평가할 수 있음. 그러나 전두환 시대에 경제가 좋아졌다고 해서 잘했다고만은 할 수 없음. 물가안정에 성공한 치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빚어졌던 부작용도 적지 않았음. 예산동결 같은 파격적 조치로 정부의 씀씀이를 줄이고 재정을 건전화시킨 공로도 크지만, 그 바람에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그 뒷감당을 다음 정부에 넘긴 부정적 측면도 없지 않음. 예컨대 세출예산 동결에 따라 항만이나 도로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싹둑 잘라버리는 바람에 중요한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할 수 없었음. 결국 부작용과 부담은 다음정권이 뒤집어 씀. 도로나 항만시설의 건설을 소홀히 한 결과 유통비용이 크게 오르는 물류대란을 야기했던 것. 가장 잘못된 것은 노동정책이었음. 다른 정책이 대부분 앞을 향해 나아갔다면, 유독 노동정책만은 뒷걸음질쳤음.경제가 좋아지고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소홀했던 노동자 권익보호에 대해 적극적인 정책을 펴는게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은 오히려 박정희 시대보다도 더 강압적인 정책을 폈던 것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