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의 배신

역사 2026. 6. 26. 15:47

- 정착과 농경에 관한 기본 서사는 그 바탕을 제공한 본래의 신화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토머스 홉스로부터 존 로크. 잠바티스타 비코. 루이스 헨리 모건. 프리드리히 엥겔스, 허버트 스펜서, 오스발트 슈펭글러, 그리고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수럽 ∙채집 생활에서 유목생활을 거쳐 농경생활에(그리고 군집에서 촌락, 소읍, 도시에) 이르는 사회 일반의 진화와 연속적 진보에 관한 이야기들은 하나의 교의로 정착 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가족으로부터 씨족, 부족. 민족(종족)을 거쳐 국가(법률 아래 살아가는 민족)를 이룬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진화론적 도식을 흉내 낸 것이었다. 그가 말한 국가에서 로마인은 정상에 있고 켈트인과 게르만족은 그 아래 배치되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기록한 문명의 진보 과정은, 그 세부 내용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정례 교육 과정을 통해 전달되어 전 세계 학생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한가지 생계(생존) 방식에서 그다음 생계 방식으로의 이행은 무척이나 뚜렷하고 확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농경기술을 한번 보고 나면 어느 누구도 유목민이나 채집민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각각의 단계는 인류의 안녕을 향한 획기적 도약으로 간주된다. 즉, 더 많은 여가와 더 나은 영양. 더 길어진 기대수명. 그리고 마침내는 (요리.재봉.육아 등) 가정학 household arts과 문명 발전을 촉진하는 안정된 생활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의 몽상 속에서 이런 서사를 몰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 국가는 생태적으로 풍요로운 지역에서 발생한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국가 형성에 요구되는 조건은 전유할 수 있고 측량할 수 있는 주요 곡물과 그 곡물을 재배하는, 관리와 동원이 쉬운 인구 집단 형태로 이루어진 부호다 습지대와 같이 크고 다채롭게 풍요로운 지역들은. 쉽게 파악되지 않고 변하기 쉬운 다양성을 지닌 채 이동하며 사는 무리에 선택가능한 수십 가지 생계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국가 형성 지대가 될 수 없다. 세금을 매길 수 있고 접근성이 좋은 작물과 사람들이라는 원리는 또한 스페인 당국이 신대륙에 건설한 레둑시온이나 수많은 선교 정착지. 그리고 노동력을 막사에 수용해놓은 단일작물 플랜테이션 등에서 통제∙파악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더 작은 규모의 시도들에도 적용된다(레둑시온은 식민지 시대 아메리카에서 예수회와 여타 식민 당국이 원주민의 개종, 교화, 통제 등을 목적으로 건설했던 마을이다).

- 그렇다면 초기 정착 촌락과 초기 도시생활이 습지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은 왜 간과되었는지 묻게 된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건조 지대에서 이루어진 관개에서 문명이 발생했다고 하는 오래된 서사 때문이다. 이러한 서사는 그 서사를 공식화한 이들이 관찰하고 있던 당시의 경관에 잘 들어맞았다. 하지만 나는 이와 같은 역사적 근시안의 더 큰 맥락은 문명을 밀. 보리. 쌀. 옥수수 등의 주요 곡물과 결부하는 지울 수 없는 관행에서 온다고 믿는다. (<아름다운 아메리카Americathe Beautiful>라는 노래에 나오는 '곡식의 황금물결amberwaves ofgrain'이란 구절을 생각해보라.) 이 관점에서는 늪지, 소택지, 습지는 일반적으로 문명의 거울상으로 여겨졌다. 길들지 않은 자연이고 인적미답의 땅이며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소택지와 관련해서 문명이 벌인 일은 바로 배수 작업을 통해 잘 정리된 생산적 곡물 경작지와 촌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건조 지대의 문명화는 곧 관개를 의미한다. 물이 찬 늪지대의 문명화는 곧 배수를 의미한다. 각각의 경우에 동일한 목적은 곡물을 재배할 수 있는 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H. R. 홀은 초기 메소포타미아에 대해 "문명이 배수 작업과 수로 건설을 시작하기 전 남부 바빌로니아의 (충적) 선상지는 물이 반이고 땅이 반인 혼돈의 상태"였다고 썼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문명이 벌인 작업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가 벌인 작업은 진흙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땅과 물이라는 더 순수한 구성 요소를 채워 넣은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나 네덜란드에서나. 혹은 잉글랜드 동부의 펜이라는 소택지에서나, 결국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개간된 이탈리아의 폰티노 습지와 사담 후세인에 의해 물이 빠진 이라크 남부의 잔여 소택지처럼, 국가는 기술을 동원해 경관을 개량함으로써 통제불가능한 습지를 징세가능한 곡물 경작지로 바꾸어놓았다

- 정착생활의 기원이 된 습지는 여러 다른 이유 때문에도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습지에 형성된 문화들은 오늘날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성문 기록을 전혀 남겨놓지 않은 구술문화(구전문화)였다. 더욱이 갈대. 사초. 대나무, 등나무, 목재 등 썩기 쉬운 재료를 건축에 사용한 탓에 그 혼적이 상대적으로 더 흐릿해지고 말았다. (지금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스리위자야[대략 7세기에 서 11세기까지 수마트라섬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강력한 해상권을 가졌던 도시국가]와 같이 문자를 사용하는 이웃 사회의 성문 기록을 통해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후대의 소규모 사회들에 대해서도 그 흔적들이 물과 토양과 시간에 의해 원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기 때문에 정확히 기술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 습지 사회들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 가운데 좀더 확실치 않은 추측에 근거하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이 사회들은 환경적으로 위로부터의 집중과 통제에 저항적이었고 그런 상태로 계속 유지되었 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오늘날 공유자원common property resources'이라 불리는 것 즉 사회 구성원 전체가 접근권을 갖는 자유생활독립 생활) 식물. 동물, 수생생물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쉽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중앙에서 독점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단일한 지배적 자원이 없었다. 이들 지역에서 생계를 유지한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가변적이며, 그 주기 또한 다중적이어서 그 어떤 집중화 시도에도 저항할 수 있었다. 이들 사회에서는, 우리가 나중에 검토해볼 초기 국가들과 달리, 그 어떤 중앙 권력도 경작지, 곡물, 혹은 관개 용수에 대한 접근권을 독점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것들을 배급할 수도 없었다. 그런 만큼 (보통 차등을 둔 무덤의 부장품으로 측정되는) 어떠한 위계가 존재했다는 흔 적도 거의 없다. 이러한 지역에서 한 문화가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일 이었지만, 그처럼 상대적으로 평등한 정착지들이 왕조는 말할 것도 없고 족장이나 왕을 추대했을 가능성 또한 작다. 한 국가는 ㅡ작은 원형 국가(원생국가)에 불과할지라도 우리가 이제껏 검토한 습지 생태계보다 휠신 더 단순한 생계 환경을 필요로 한다.

- 실제 역사적 증거를 보면,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이들 서로 다른 생계 방식 지대와 여러 사이를 넘나들었으며 그것들을 창조적으로 결합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일례로, 영거 드라이아스기의 추위가 계속되는 동안 메소포타미아 충적토 지대에서 준정착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해당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생계 자원이 줄어들자 이동성이 더 큰 생계 전략을 채택했다. 나중이긴 하지만 (대략 5000년 전에) 타이완에서 동남아시아로 이동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새롭고 풍요로운 숲속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작물을 심고 가꾸기를 포기하고 수립과 채집 생활로 이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20세기 초에 역사에 대한 지리학적 시각을 주창한 주요 인물이 있었는데, 그(프랑스의 역사가 뤼시앵 페브르)는 수렵∙채집민. 목축 민. 농경민을 범주로 하여 구분하기를 거부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약을 대비해 적어도 둘 이상의 생계생존의 생태적 지위에 걸쳐 있기를 선호했다고 강조했다.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언제나 활에는 시위를 두 줄 걸어두는 법이다."

- '정착생활을 향한 사회적 의지'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또한 '목축민'. '농경민'. '수렵민', '채집민' 같은 용어들 역시 적어도 그 본질주의적 의미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이 용어들은 고대 중동에 살았던 종족들을 분리하기보다는 생계 활동의 스펙트럼을 정의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편이 더 낫다. 친족 집단과 촌락은 통합된 경제의 일부로 목축도 하고, 수립도 하고, 곡식도 길렀을 것이다. 한 가족이나 촌락이 작물 재배에 실패했다면 전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동물을 치는 쪽으로 선회할 수도 있었다. 반대로 목축민이 자신들이 치던 동물을 모두 잃었다면 작물을 심는 쪽으로 선회할 수도 있었다. 갈수기나 습윤기 동안은 지역 전체가 근본적으로 생계 전략을 변경할 수도 있었다. 이처럼 서로 다른 활동에 종사하던 이들을 서로 다른 생활 세계에 살고 있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종족들로 다루는 것 역시 훨씬 더 후대에 농경국가들이 목축 민에 찍어놓은 낙인을 다시 복창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소는 하우사족의 곡식 저장고"라는 말은 이러한 식량 저장 방식을 완벽하게 포착한다. 필요할 때 손쉽게 즉시 얻을 수 있는 지방과 단백질의 공급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작물을 심고 길러 보는 실험을 덜 위험해 보이도록 했을 것이다. 실제로 초기 농경에 관한 일부 이론가는 가축이 상대적으로 부재했을 경우 작물 재배의 확산이 훨씬 더 늦어질 수 있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믿을 만한 대비책도 없이 작물을 길러본다는 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나 컸다. 여타의 식량도 그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기간 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 어류와 육류는 소금에 절이 거나 말리거나 훈연했고, 병아리콩이나 렌즈콩 같은 협과는 말려서 보관했으며. 과일류와 곡물류는 발효시켜 증류했다. 우루크의 신전 일꾼에게는 발효시킨 보리맥주 한 사발이 매일 배급되었다. 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채집민이 보던 대로 경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채집민에게 주변 환경은 어류, 연체동물, 조류, 견과류, 과실. 근채류 초체. 덩이 줄기. 식용 골풀과 사초, 양서류, 작은 포유류와 큰 사냥감으로 가득한 거대하고 다양한 살아있는 창고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떤 해에 한 식량 공급원이 부족해지면, 다른 식량 공급원은 풍부해졌을 것이다. 이 살아있는 창고 복합단지 안에 워낙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내용물이 들어 있던 덕분으로 안정된 생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 최근까지 지배적인 설명은 쟁기 농경에 관한 궁지 이론인데. 이 이론은 훌륭한 덴마크 경제학자 에스테르 보세럽(1910~1999)과 결부되어 있다. 보 세럽은 일반적으로 쟁기 경작이 수렵∙채집보다 얻을 수 있는 열량에 비해 휠씬 더 많은 수고를 들여야 했다는 난공불락의 전제로부터 출발해 완전히 농경만 하게 된 것은 하나의 기회로서가 아니라 다른 어떠 한 대안도 가능하지 않게 되었을 때 마지막 방법으로서 시작된 것이었다고 추론했다. 인구는 증가하는데 수럽과 채집으로 얻을 수 있는 야생의 단백질과 영양가 있는 야생 식물군은 줄어드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접근가능한 땅으로부터 더 많은 열량을 뽑아내기 위해 내키지 않아도 할 수 없이 더 열심히 일해야만 했을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받을 갈고 땀을 흘려 살아가게 된 성경 속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인류가 고된 노동의 세계로 이행하게 된 과정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들 한다

- 궁지 이론은, 분명한 경제적 논리가 있음에도. 최소한 메소포타미아 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발견되는 증거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이 지역에서 쪼들리며 살고 있던 채집민들이 결국 주변 환경의 수용능력 (환경용량)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래서 처음으로 경작을 채택했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원이 결핍된 지역보다는 풍요로웠 던 지역에서 경작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앞서 언급했듯. 이들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강물의 범람-퇴각을 이용한 농법을 실행하고 있었다면. 보세럽의 주장이 깔고 있는, 경작은 아주 고된 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중심 전제는 유효하지 않다. 결국. 경작의 시작을 수립할 동물과 채집할 식물의 소멸과 결부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는 것 같다. 농경에 관한 궁지 이론은 (최소한 중동 지방에 관한 한) 너털너덜해진 누더기가 되었다. 하지만 궁지 이론을 대체해 경작의 확산을 만족스레 설명할 수 있는 대안적 이론 또한 아직 나오지 않았다.'

- 뇌 크기의 감소와. 다소 추측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길들인 동물 일반에 대해 '온순함tameness'이라 것의 총체를 일으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양은, 야생의 조상들과 비교하면, 1만 년 동안 길들이기 과정을 거치면서 뇌 크기가 24퍼센트나 작아졌다. 페럿[유럽산 긴털족제비를 길들인 아종. 식육목 족제비과 중에서 유일하게 가축화된 동물이다)은 (훨씬 더 최근에 길들었음에도) 야생 긴털족제비보다 뇌 크기가 30퍼센트나 더 작다. 돼지(멧돼지)는 그 조상보다 3분의 1 이상 뇌가 작다. 길들이기의 새로운 최전선(수중양식)의 사례를 보아도. 포획되어 길러지는 무지개송어의 뇌는 야생 송어의 뇌보다 더 작다 전체적인 뇌 크기가 작아진 것보다 더욱 두드러지는 특징은 뇌의 부 분들이 영향을 받는 정도가 고르지 않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개∙양.돼 지의 사례를 보면. 뇌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부분은 외부의 위협과 자극에 대한 신경계 반응과 호르몬 활성화를 담당하는 변연계(해마 시상하부, 뇌하수체, 편도체)다. 변연계가 축소된다는 것은 공격, 추격, 공포가 촉발되는 역치가 높아지는 것과 관련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길든 동물이 사실상 모두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길든 동물은 일반적으로 감정적 반응성이 떨어진다. 이와 같은 감정 약화 현상은 과밀한 도무스에서 인간의 감시 아래 살아가야 하는 생활을 위한 조건으로 볼 수 있다. 도무스에서는 포식자와 사냥감에 대한 즉각적 반응이 더는 강력한 자연선택압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물리적 보호와 영양 공급이 더욱 안전하게 보장되기 때문에 길든 동물은 친족관계의 야생동물보다 주변 환경에 덜 집중하 며 덜 기민해질 수 있다

- 중동에서 곡식이 주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 뒤, 곧이어 농사력이 공적 의례생활을 결정하게 된 과정 또한 두드러진다. 사제나 왕이 행하는 쟁기질 의식. 수확제. 풍년을 기원하는 기도의식과 희생의식. 특정 곡물을 관장하는 신 등. 사람들이 추론에 쓰는 비유에서도 길들인 곡물과 길들인 동물이 점차 주를 이루게 되었다.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다'라든가. '착한 목자' 같은 표현들이 그 예다.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 구절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도무스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생계와 의례생활이 이처럼 체계적으로 정리 되었다는 것은 길들이기 과정을 통해 호모사피엔스가 광범위한 식물군을 한 줌의 곡물과 맞바꾸고, 광범위한 야생동물상을 한 줌의 가축으로 대체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나는 후기 신석기혁명이 대규모 사회에 기여한 바가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일종의 탈숙련화deskiling였다고 보고 싶다. 애덤 스미스는 분업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설명하기 위해 핀 공장을 사례로 제시했다. 이제는 하나의 아이콘이 된 이 사례에서. 핀을 만드는 각각의 세세한 단계는 여러 개의 과업으로 나뉘고 한 과업은 각기 다른 노동자에 의하 수행된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스미스의 국부론을 호의적으로 읽었지만 이렇게 물었다. "인생의 20년을 핀 만드는 데 써 버린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런 관점은, 문명을 가능하게 했다고 인정받는 혁신을 너무 암울한 게 바라보는 것이라 해도, 적어도 우리 인류가 자연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과 실용적 지식의 축소, 식단의 축소, 공간의 축소, 의례생활의 축소를 나타낸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전염병에 더욱 취약해지게 된 것은 대부분 야생에서 얻을 수 있는 음식과 고기가 빠지고 상대적으로 탄수화물 함량이 높아진 단순한 식단에 의존한 때문으로 보인다. 필수 비타민이 부족하고 단백질이 결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축을 잡아서 그 고기를 가끔씩 즐길 수 있었겠지만. 이런 고기는 수렵으로 잡아온 야생동물의 고기에 비하면 필수 지방산이 매우 적었다. 발병 원인을 신석기시대의 식단으로 돌릴 수 있는 질병 중 뼈에 흔적을 남기는 것. 예컨대 구루병 같은 질병은 기록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 하지만 인체의 연조직(뼈나 연골 을 제외한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질병은 (잘 보존된 미라가 남아 있는 경우를 제외하곤) 그렇게 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그럼에도, 식단에 관한 지식을 토대로 하면. 그리고 같은 지식에 근거해서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는 질환들에 관한 성문 기록을 토대로 하면, 영양 상태 에 관련된 질병(각기병, 펠라그라, 리보플라빈결핍, 콰시오르코르(단백 결핍성 소아영양 실조증) 등)은 발병 원인을 신석기시대 식단으로 돌릴 수 있다

- 신석기 곡물 복합체가 궁극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도무스의 역학적 상황으로는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농경 문명의 부상에 당황했을 뿐 아니라 신석기시대 경작민이 대면했던 병원체들을 고려할 때. 이 새로운 형태의 농경 번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짧은 답은. 내가 알기엔. 정착생활 그 자체다.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민은 수럽∙채집민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건강 상태가 불량하고 유아사망률과 모성사망률 maternal mortality이 높았음에도 전례 없이 번식률이 높았다. 곧 전례 없이 높았던 사망률을 보상하고 남을 만큼 인구 재생산율이 높았던 것이다. 정착생활로의 이행이 인구 재생산율에 끼친 영향은 오늘날의 연구 조사에서도 기록에 의해 설득력 있게 입증되었다. 

- 100만 년에서 500만 년에 걸친 인구 팽창(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대략적 인 자릿수가 사실적이라면)은 지난 5000년에 걸친 세계 인구 증가에 비하면 미미해 보일 뿐이다. 수럽∙채집민 대비 신석기 농경민의 비율은 기원전 1만 년보다 기원전 5000년에 훨씬 더 컸으므로. 이 인구학적 병목 시기에조차 곡물을 재배하던 전 세계 농경민은 인구학적으로 수렵 ~ 채집민을 능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두 가능성 있는 대안이 있는데, 하나는 다수의 수럽∙채집민이 선택에 의해서든 강압에 의해서든 농경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농경민에게 풍토병이 되어 덜 치명적이게 된 농경사회의 병원체들이 면역학적으로 여전히 순수했 던 수럽∙채집민을 괴멸시켰다는 것이다. 유럽의 병원체들이 다수의 신대륙 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을 가능성들을 확정짓거나 거부할 명백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레반트, 이집트, 중국의 신석기시대 농경공동체들은 확장되고 있었으며 충적토 저지대를 항해 확산되고 있었다. 그 과정의 대가로 비정착민이 희생된 것은 분명하다.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상황이 나빠졌으리라는 징후는 분명히 있었다

- 은을 가진 자는 누구나, 보석을 가진 자는 누구나, 소를 가진 자는 누구나, 양을가 진 자는 누구나 곡물을 가진 자의 문간에 자리를 잡고 앞아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수메르 텍스트, 양과 곡식 사이의 논쟁)
- 궁극적으로 사람들은 보물을, 곡식을, 재물을 탈취할 수 있고 실제로 과감하게 탈 취해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어주는 사람이나 일단의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D.H.로렌스

- 곡물과 국가 사이 단단한 결합관계의 핵심은 오직 곡물만이 조세의 토대로 사용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곡물은 쉽게 눈으로 볼수 있고, 나눌 수 있고, 가치 산정이 가능하고, 저장할 수 있고, 운송할 수 있고, '배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협과, 덩이줄기, 전분 식물도 국가 운영에 적절한 속성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곡물의 이런 이점을 모두 다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곡물 특유의 이점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무엇보다 쉽고 효율적인 전유 가능성에 관심을 두는 고대 세금징수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쉽다
곡물이 거의 동시에 땅위로 자라나 여문다는 사실은 세금징수원의 일을 그만큼 더 쉽게 만들어준다. 군대와 세금징수원이 알맞은 때에 도착하면. 일거에 전체 수확 곡물을 베고, 탈곡하고, 징발할 수 있다. 적군의 입장에서는 곡물 덕분에 초토화 작전이 더 쉬워진다. 수확 때가 다 된 곡물 경작지를 태워버리면 경작민은 도망가거나 굵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금징수원에게나 적군에게나 곡물 수확이 모두 끝나 탈곡과 저장이 다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곡물 저장고의 내용물 전부를 몰수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실제로 중세시대 십일조의 경우 경작민은 탈곡하지 않은 곡물을 단으로 묶어 밭에 두어야 했고, 그러면 십일조 징수원이 와서 10개의 단마다 1개의 단을 취했다

-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을 권력의 핵심부 근처에 정착시키고, 그들을 그곳에 계속 붙잡아두면서 그들의 필요를 넘어서는 잉여를 생산하게끔 해야 하는 절박한 필요성이 초기 국정 운영 기술의 많은 부분을 움직이게 했다.' 그 이전에 정착해서 살고 있던 인구가 없고 그래서 국가 형성의 핵이 될 인구도 없던 곳에서는 의도적으로 인구를 한데 모아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신대륙과 필리핀 등지에서 실행된 스페인 식민지 건설의 기본 원칙이었다. 스페인 권력이 뻗어나간 중심 근처에 형성된 레둑시온이라고 하는 원주민의 (많은 경우에 강제로) 집중화된 정착지들은, 문명화 프로젝트의 일부로 여겨졌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식량과 각종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용도로도 쓰였다. 그리스도교 선교 거점들은 ㅡ그 명칭이 무엇이었 든ㅡ 분산되어 있던 주민 중 생산가능한 인구를 거점 근처로 모아들이는 동일한 방식으로 시작되었고, 그 거점으로부터 개종 활동이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 결국, 전쟁은한 가지 위대한 발견에 도움을 주었다 ㅡ즉 동물만이 아니라 사람도 길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패배한 적을 죽이는 대신 노예로 만들 수 있다. 목숨만은 살려주고 열심히 일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동물을 부릴 수 있게 된 것에 견줄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 초기 역사에서 노예제는 고대 산업의 토대이자 자본 축적의 강력한 도구였다. (v.고든 차일드, <신석기혁명과 도시혁명Man Makes Himself)>)

- 인류의 안녕이라는 측면에서 고전적 암흑기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게 무척 많을 것이다. 이 시기들을 특징짓는 인구의 분산은 전쟁, 세금, 전염병. 흉작. 징병을 피하기 위한 도주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국가의 통치 아래 집중화된 정착생활에서 비롯된 최악의 손실들을 막아주었을 것이다. 탈집중화는 국가가 지운 부담을 덜어주었을뿐더러 무난한 수준의 평등주의를 도입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문화의 창조를 오직 국가 중심과 동일시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탈중심화와 분산은 문화 생산의 다양성과 재공식화를 촉진했을 것이다. 나는 국가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별로 인식되지도 않고 기록되지도 않은 또 다른 참된 암흑기를 향해 적어도 약간의 몸짓을 해보려고 한다. 초기 국가 시대에 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국가에 속하지 않고 수립과 채집으로 살아갔다. 윌리엄 맥닐은 이들이 곡물 핵심부의 집 중화에 의해 발생한 새로운 질병들에 -도시의 인구에는 고유의 풍토 병으로 정착되어 덜 치명적이었을 질병들에 접촉하게 되었을 때 인구학적으로 철저하게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했다면 신대륙 주민이 유럽인들의 눈에 띄기도 전에 먼저 내륙 깊숙이 퍼져나간 질병들에 굴복했듯. 이 비국가 인구에 속한 많은 사람은 아무런 기록이나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고 그래서 역사에 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질병에 의한 사망자 기록에 19세기까지 지속된 노예 같은 비국가 주민을 추가한다면, 역사 그 자체에 의해 간과된 '역사 없는' 사람들에게는 방대한 비율의 '암흑기'가 존재하는 셈이다.

- 시골 사람들의 역사는 도시 사람들이 쓰고 유목민의 역사는 정착민이 쓰고 수렵.채집민의 역사는 농경민이 쓰고 비국가 민족[종족]들의 역사는 궁정 필경사들이 쓰고 이 모든 역사는 야만인들의 역사'라는 목록으로 정리되어 문서고에 보관된다.

- 한과 그 유목민 이웃 흉노 사이의 관계는 정치적 협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홈노는 번개처럼 습격을 가한 뒤 국가의 병력이 반격하기 전에 초원 지대로 물러가곤 했다. 그리고 이내 한 조정에 사절단을 보내 평화를 약속하고 그 보답으로 유리한 조건에 따라 국경 무역이나 직접적 원조를 허락받았다. 이와 같은 협상은. 유목민들이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서 적절한 방식에 따라 충성하면 그 보답으로 많은 원조를 받는다는 조약으로 확정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역효'조공이었 고 그 양은 어마어마했다. 연간 한 정부 수입의 3분의 1이 유목민을 매수하는 데 쓰였을 정도다. 7세기 뒤. 당의 관리들은 매년 비슷한 조건dp 따라 위구르에 비단 50만 필을 제공하고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유목민이 당 황제보다 열등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 수입과 물품의 흐름을 보면 사실은 그 반대임을 알 수 있다. 유목민은 당으로부터 뇌물을 받 고 그 대가로 (당에) 공격을 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보호비 갈취가 완전히 세상에 드러난다면 국민에게 알려진 전능한 국가의 이미지와 상충될 위험이 있는 만큼, 보호비 갈취는 국가의 비밀이 되었을 테고, 이 점을 고려하면 보호비 갈취는 문헌에 나오는 사례보다 휠씬 더 만연했을 것이다. 

- 중국. 그리스. 아랍의 역사 자료들은 초원 지대의 민족[종족]들이 무엇보다도 교역에 관심이 많았다는 데서 내용이 일치한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점령지들을 인수했던 신중한 방식은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은 충돌을 피하고자 노력했고 도시들을 평화롭게 굴복시키고자 애를 썼다. 도시에서 저항을 하거나 반란을 일으켰을 때만 반드시 응징할 필요가 있었다. (..-)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의 정복 활동은 교역 경로나 교역 도시를 획득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취득의 이유는 통 치자들의 사회-정치적 기반시설의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세금을 거두어 들일 수 있는 점령된 영토를 안전하게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정확히 주변부 정착 국가들이 하고 있던 일처럼 들린다면, 그 둘은 정말로 똑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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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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