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니얼 골먼이나 칙센트미하이는 억제와 조종 이론을 통해 논리적이고 분석적 이성으로 충동적이고 비논리적 감정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 감정이 인류의 지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제공했지만 얄궂게도 두 사람은 감정을 이성에 종속시키고 말았다. 심리치료의 대가 미리암 그린스팬은 인간의 핵심감정 중에서 슬픔, 절망, 두려움을 가장 피해야하는 그러나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정서라고 주장. 나쁜 감정이란 없으며, 단지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만성적으로 감정을 억압하는 사람은 살짝 스치기만 해도 폭발해버릴 수 있다. 이를 프로이트는 억압된 것으로의 회귀라고 했고, 미리암 그린스팬은 감정의 부메랑효과라고 부름. 그는 우리가 감정적으로 살아있기 위해서 감정을 조련하기보다는 친구가 되고, 지배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는 연결과 흐름을 방식을 찾아내라고 조언. 이런 방식을 배움으로써 잃었던 감정 에너지를 되찾아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만들 수 있는 긍정적 에너지가 되기 때문.
- 우리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감정은 깊은 슬픔, 두려움, 그리고 절망이다. 이 어둠의 감정은 몸속에 존재하는 에너지로, 우리를 둘러싼 문화로부터 습득해온 믿음들에 의해 왜곡도어 있다. 이들의 목적은 우리를 비참하게 하거나, 화나게 하거나, 치욕스럽게 하거나 약하게 하거나 패배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 타인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을 열도록 가르치고, 우리가 우리의 삶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돕는 것으 목적으로 함. 그들에게 귀기울이는 법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자각능력을 보호대로 삼아, 마치 파도를 타듯, 그 감정에 올라탈 수 있다. 그럴 때 감정에너지가 흐르고,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문이 열린다. 그리고 무언가 변화한다. 고통이 고귀한 영적인 힘으로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도처에 널려 있는 흔하디흔한 것들이 어느 순간 고귀한것으로 변화하는 감정의 연금술이다.
- 괴로움을 경청하는 데 드는 노력과 그 어려움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의 수많은 돈을 심리치료사라 불리는 듣기 전문가에게 쏟아붓는다. 듣기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목적지 없이 한 영역에 들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청한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의 나열을 듣거나, 바디 랭귀지로부터 의미를 해독하는 것이 아니다. 웹스터 영영사전은 경청의 정의를 신중한 자세로 듣는 것이라고 내리고 있다. 그런데 면밀히 귀기울여 듣는 것에는 일종의 사고의 중단이 있다. 듣기 전문가는 대뇌피질을 통해 듣는 것만큼이나 직관의 제3의 귀인 대뇌변연계를 통해 자신을 비워 다른 사람의 사연이 들어오도록 하며, 감정의 힘찬 흐름에 마음을 열고, 타인의 경험과 과감히 하나가 된다. 이것이 가장 성공적인 치료의 비결. 그러나 머리를 가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에서는 일반적으로 귀 기울여 잘 들어주는 것을 상담치료의 기술로 배우지 않는다. 이러한 문화에서 훈련받은 상담치료사는 상담내용을 이론화하고 분석하고 진단하고 예지하고 해석하고 질문하는 데 능하지만, 환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는 못한다. 치료과정에서 한 사람의 괴로움을 잘 들어준다면, 그 때 연금의 과정이 시작된다.
- 우리가 맨 처음 우리의 감정을 불신하도록 배운 곳은 우리의 가정이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창피한 것이라고 배운 곳도 우리의 가정이다. 감정을 수치스럽게 느끼거나 무시하는 것이 통하지 않을 때에는 항상 처벌이라는 직접적 처방이 따라왔다. 여자아이들은 침묵속에서 괴로워하는 방법을 배웠고, 남자아이들은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도록 학습되었다.
- 프로작 혁명이라 불리는 것을 낳은 신경정신약리학은 괴루움을 정복하는 데 한몫했따. 의학과 정신병학에 만연한 메시지는 아프면 약을 먹어 고쳐라다. 우울증에 대한 약리학적 응답은 약이기도 하고 독이기도 함. 항우울제는 괴로움의 부재가 정상적인 정신 건강상태와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을 증가시켰다. 그 결과, 절망은 화학물질을 통해 조절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생화학적 잡음에 불과한 세로토닌 한방울 정도로밖에 취급되었다.
- 우리 문화는 분열의 문화다. 이 분열의 문화는 몸을 마음으로부터 떼어내고, 몸을 정신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감정을 사고로부터 갈라놓는다. 이런 종류의 분열은 가부장제 사회의 이른바 남성다움을 특히 필요로 함. 어려서부터 남성들은 자신의 몸을 감정으로부터 방어해야 한다는 혹독한 세뇌과정에 얽매여 있다. 한 영웅이 죽음, 살인, 이혼 등의 슬픈 사건 뒤에 술집에 앉아 술을 마심으로써 남자답게 감정을 날려버리는 영화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요컨대 이는 사내다움이 강요한, 이미 일상화된 감정학대다. 그 결과 많은 남성들에게 감정적 민감함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다. 이런 감정 불감증은 남성들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몸으로 편하게 머물 수 이어야 할 가정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도록 만들며, 타인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데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 이런 결과들에는 국제적 문제의 해결점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포함된. 반면, 여성들은 타인들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교육받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반대로 행동할 것을 교육받음. 또한 자신의 육체를 타인들의 관심과 열정을 낚는 미끼로 사용하도록 교육받음. 소녀들은 자신의 육체와 육체적 섬세함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 남용하도록 배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사춘기 전 혹은 사춘기 때의 소녀들뿐만 아니라 성인 여성들에게 전염병처럼 퍼져가는 섭식장애에서도 볼 수 있다. 사회는 시작부터 이중으로 얽매인 여성들에게 느끼고 표현하는 것, 남성들에게는 금기시되어 있는 이러한 행동을 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하는 것을 폄하한다. 결국 여성들은 감정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그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문화를 내면화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어둠의 감정의 힘과 지혜를 발견하는 것은 능동적인 의지, 감정적 노출을 감내하려는 결단력, 우리의 유약함에 대한 용감한 관찰, 그리고 신체의 감정적 신호들을 경청하는 능력을 필요로 함. 이런 능력들이 없다면, 어둠의 감정은 그들 스스로를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맹독성의 수프로 조리해버리고 말 것이다.
- 욥의 풍요로운 삶은 오직 그가 완전히 겸허해진 다음에야, 그가 알 수 없는 것을 알려는 욕심을 포기한 다음에야 비로소 제대로 흘러간다. 자신의 취약성을 다른 곳에 기대지 않고, 진실을 피하려 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그는 그 미지의 것을 향해 자신을 내던지고 새로워진 삶을 하사받는다. 결국 욥의 이야기는 삶의 고통과 인간의 취약성을 받아들임을 통한 영적인 변화에 대한 것이다.
-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가감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연회나 만찬에 앉아 만족이라는 빵과 환희라는 포도주를 즐기고 싶어 하지만,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감정이라는 음식은 피하려 한다. 인생의 많은 음식들 가운데, 모든 음식이 한결같이 맛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소화되어야 한다. 우는 방법을 알기 전까지는 진심으로 웃을 수 없다. 슬퍼하기를 두려워한다면 행복할 수 없다.
- 감정은 즐거울 수도 있고 즐겁지 않을 수도 있지만,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감정(emotion)이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은 movere로 움직이다는 의미. 감정은 우리를 움직에게 하는 에너지다. 우리를 느끼게 하고, 우리가 느낀 것들을 표현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에너지다. 감정적 에너지는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감정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그리고 우리가 이 에너지를 어떻게 하는가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어둠의 감정이 우리를 경직시키고 파괴한다는 믿음은 그 감정에 대한 불신과 전적으로 부정적 관점을 보여준다. 불신은 어둠의 감정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좌절시킨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둠의 감정의 에너지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이 그 에너지를 부정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것은 특히 우리가 그 감정을 인식하며 제대로 경험하기도 전에 행동에 옮길 때 그러하다. 그렇지만 에너지 그 자체만 본다면, 좋은 용처를 찾을 수도 있다.
-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어둠의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어설픈 대응방법 그리고 감정 공포증적 반응이다. 고통을 경청하는 방법을 모를 때, 우리는 대부분 우리의 문화로부터 배운 평범한 대처법들에 의존한다. 가족상황과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 그리고 전체 문화 속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인내하고 거부하고 비켜가고 보복하고 피하라고 교육받았다.
- 머리/가슴의 분열은 깊은 단절의 근원이다. 감정은 인식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으며 그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을 통해 느끼는 것을, 느끼는 것을 통해 생각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이성을 감정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우리는 문화적으로 남성적 특징을 가진 이성을 신뢰하도록 조건화되어왔지만, 문화적으로 여성적 특징인 감정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우리는 이성의 힘, 장점, 안전, 남자와 관련짓고, 감정은 약함, 미개함, 위험, 여성과 관련짓는다. 감정공포증은 감정 에너지의 가공되지 앟은 힘에 대한 근본적 공포다. 이 감정공포증은 규범적이고 성적으로 양극화된, 이성의 감정에 대한 우월함에 의해 강화된다
- 감정에너지가 자유롭게 흐르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를 기분좋게 만들 마약주사를 원한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느끼고 세포하나하나가 감정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무언가를 원한다. 이제 막 재활원에서 나온 팝의 디바나 우울증적 의기소침을 겪고 있는 여배우의 모습은 우리의 감정적 신경전달물질을 자극하고 그것이 지속되도록 만든다. 동떨어젼 타인들의 감정적 삶에 빠져듦으로써, 우리는 감정적 대리경험과 해방이라는 다중적 기회를 갖게 됨. 그러나 이러한 기회들은 순수한 감정적 연결에 대한 우리의 능력을 갉아먹는 것에 불과하다.
- 감정이 살아있기 위해, 우리는 어둠의 감정을 편하게 대해야 하며, 그들이 그들일 수 있게 하는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의 고통에 대한 억제와 조종의 방식이 아닌 연결과 흐름의 방식을 찾아내야만 한다.
- 감정의 흐름이란 감정이 제멋대로 놀게 놓아두고, 그거이 밀어붙이는 대로 마음대로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체내에 있는 슬픔, 두려움, 절망의 에너지를 견디어 내고 이러한 감정의 지혜를 펼쳐놓는 것이다. 감정 연금술의 흐름은 감정의 파도에 드러누워 익사해 버리는 것과 같이 수동적이고 무력한 과정이 아니다. 또한 흘러가는 물을 가로막는 댐을 일으켜 세우는 것처럼 과하게 활동적이거나 통제하는 과정도 아니다. 감정의 흐름은 감정의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주의깊게 목도하는 상태다. 인식이라는 서핑보드를 타고 감정이라는 파도위를 가르는 것이다.
- 어둠의 감정에너지를 그 흐름의 상태를 따라 주의깊게 함께 하고 인내하고 풀어줄 때, 우리는 감정연금술의 마법을 향해 우리 가슴의 빗장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다. 여기에는 세가지 기본적 기술이 있다. 주의집중, 친해지기, 그리고 내맡김이다. 이 세가지 기술을 숙달시키지 않고서는 슬픔, 절망, 두려움이 전달하는 정보를 받을 수도 없고, 그 에너지들을 감사, 믿음, 기쁨으로 변화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당신이 느끼는 방식에 만족하고 있어서, 이 세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이런 기술들을 개발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슬픔, 절망, 두려움, 또는 감정적으로 힘든 상황을 만나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이 세가지 기술은 당신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 우리는 저마다 어둠의 감정에 대한 독특한 육체적 경험과 정신적 반응을 갖고 있다. 감정에너지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심신이 겪는 감각과 생각의 주의깊은 흐름인 의식이 이런 상황을 지켜보도록 유지하면서, 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며, 몸이 느끼는 것을 느끼도록 하고, 마음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 감정 언어에 귀 기울이는 숙달된 능력이 없을 때, 어떤 증상이 일어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한다. 가벼운 위통이 시간을 거듭하면서 위궤양이 될 수 있듯이,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쳤던 슬픔이 심각한 불안장애 또는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 부정된 두려움은 면역체계를 약하게 만들고 심신장애를 일으킴으로써 자신을 알린다. 부인된 절망은 우리 몸속에 살면서, 우리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한 행동으로 그것을 표출하도록 우리를 꼬드긴다. 이런 신호와 증상의 발생을 실망스럽게 느낄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심신에 내재된 치료를 향해 나아가는 측면을 갖고 있다. 그 증상을 인지하고 조심스럽게 조사하고, 어떤 감정이 그 증상을 전달하는지 혹은 위장시키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당신의 위궤양, 천식 혹은 요통에 이런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면, 당신은 숨어있던 어둠의 감정을 발견할 것이다.
- 육체의 감정언어를 경청하는 것은 남성들에게는 힘든 일이다. 우리 문화에서 여성적인 것으로 매도되는 감정에너지의 유연성과 취약성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라 강력한 갑옷을 개발할 것을 요구받기 때문.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감정과 보다 가깝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들이 감정 연금술에서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성들은 감정을 자기 몸안에 위치시키도록 사회화되어 있고, 그 감정을 남성들보다는 더 정확하게 표현하고 이름짓느낟. 그러나 한편으로 여성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스스로 비난하도록 사회화되어 있기도 하다.
- 탈무드의 랍비들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이 그들의 외로움을 보시고, 자비심에 그들에게 눈물이라는 선물을 주셨다고 한다. 그들의 슬픔은 이 선물로 치료할 것을 약속하셨다고 한다. 눈물은 슬픔에 대한 천연윤활제다. 아담과 이브에게 눈물은 에덴의 영광으로부터의 추방을 치료할 향유였다. 탈무드는 우리에게 말한다. 눈물은 그 근원(에덴)으로의 길이다. 천국의 문이 닫혀 있을 때에도 그 문은 눈물에 열려 있다.
- 우리가 절망의 격동에 휩싸여 있을 때, 실은 환골탈태의 과정이 진행중에 있는 것이다. 절망 속에서 영적인 죽음과 환생의 요청은 쉽게 자살의 요구로 오해될 수 있다. 이때가 바로 우리가 고통을 덜기 위해, 혹은 그 속에 빠지기 위해 알약에 손을 대고 싶어할 때다. 그러나 뱀이 허물을 벗을 때 그것이 곧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나비의 애벌레가 변태의 과정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번데기에서 빠져나온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라. 변화의 과정은 도중에 중단될 것이다. 어둡고 밀폐된 장소인 번데기의 상태는 변태의 과정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 우울증은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그리고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결핍과 관련지어져 왔다. 그러나 이 설명 역시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의사들은 의학적인 사실이라 믿지만, 이것은 증명되지 않은 작업가설일뿐. 사실이라 할지라도 신경전달물질들의 결핍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들이 원인이라는 결론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런데도 텔레비전 광고들은 우리에게 세로토닌 결핍이 우울증을 일으키며, 우울증은 당뇨병과 마찬가지로 육체의 질병이라고 선전.
- 정신병리학자들이 거듭해서 이러한 근본적 잘못을 범하고 있다. 감정 또는 정신상태에 생화학적 기질이 있다는 사실이 이 생화학적 상관관계가 우울증의 상태를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 이 논리를 따르자면, 모든 기분이 생화학적 원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엔돌핀이 미친듯이 날뛴 결과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또한 사랑을 정신병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우울증을 다루기 힘든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얼마나 우리가 절망을 두려워하고 그 가치를 폄하하며, 얼마나 이 감정을 견디어내는 것이 힘든가와 많은 관계가 있다. 절망을 독방에 가두어놓으려는 모든 노력기 수포로 돌아가면, 우리는 종종 패닉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것이 당장 사라지기를 원한다. 재앙을 급히 피해가야 할 때 종종 응급조치가 필요할 수도 있다. 자살충동을 일으키는 심각한 우울증이라는 긴급한 상황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절망을 통과해 나아가는 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길을 택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응급조치에 대한 욕구는 어떤 감정이든 간에 그것을 다루는 기간과 경험을 더 복잡하게만 만들 뿐이다. 우리가 절망의 유약함에 빠져 있다는 이유로, 절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무력함을 경험하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 자신을 혐오할 때,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패닉에 빠질 때 이러한 반응들을 우리는 우울증이라 부르는 상태로 침몰시켜 버린다.
- 심리상담을 하러 온 사람들이 확실하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고, 새로움의 매력이 손짓하는 동시에 위협으로 다가오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것은 그리 색다른 일이 아님. 40대에 길목에 선 사람들은 특히 이런 내적 변동을 겪는데, 이를 흔히 중년의 위기라고 함. 이런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항상 감정을 주체 못해서 생기는 섣부른 결론으로 뛰어들기 전에, 속도를 늦추고 그들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경청해보라고 권유한다. 어떤 사람들은 별안간 만족스러운 것 같은 삶의 뒤에서, 내 40여년이 헛된 것이었다고 느낀다.
-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것은 절망이다. 이것은 감정이지, 치료불가능한 상황이나 종착역은 아니다. 나는 이 감정에너지를 참아낼 수 있고, 견뎌낼 수 있다. 만일 내가 그것에 주의를 집중하고 그것이 본래대로 있을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은 나를 신대륙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이것을 당신의 의지로 삼아라.
- 불안은 두려움과 동의어가 아니다. 두려움은 특정 대상에 대한 불연속적이고 강력한 감정인 반면, 불안은 불편함이 일반화된 상태임. 우리는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 반면, 모든 것에 대해 불안해 한다.
- 두려움을 추방하는 것의 가장 극단적 형태는 정신적 마비다. 어둠의 감정에 대한 이러한 강력한 방어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한창 일어나고 있다. 두려움은 점점 더 유발되고, 무차별적이고 의미없는 폭력과 전 세계적 규모의 압도적 위협들 앞에서 마비된다. 우리는 한순간 두려움을 느낄지도 모른지만, 그 순간 그것을 밀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개인적 수준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두려움을 유발하고, 동시에 그것을 느끼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환경, 두려움을 불어넣고는 그것을 부정하도록 재촉하는 환경은 광기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는 두려움에 대한 정신적 마비, 불안장애와 공포증이다.
- 프로이트는 '불안의 문제'에서 "여행자가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때, 그는 자신의 소심함을 거부한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더이상 아무것도 명확하게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무서워할 게 없단다. 다 괜찮아"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무서운 일이 일어나면 무서워해도 괜찮아. 두려움을 알아차리는 것이 네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척하는 것보다 너를 더 강하게 만들어줄거야. 네가 좀더 안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더 찾아보자" 이런 식으로 우리는 아이들에게 두려움이 자연스런 것임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들의 주의깊음과 정직함을 칭찬해줄 수 있다. 그들에게 어둠속에서 휘파람을 불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고서도, 그들을 달래줄 수 있다. 그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 말하고, 그것을 위한 행동을 찾아냄으로써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다. 두려움을 존중하고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다.
- 두려움에 대해 말하고 경청하는 것은 새로운 말들, 새로운 상호연결에 대한 느낌으로 인도한다. 오랫동안 절망과 무관심에 의해 고통받아온 관계도 새로워질 수 있다. 오직 고통과 거리감만이 있는 곳에 기쁨과 관계가 다시 찾아든다. 이것이 두려움의 연금술이다.
- 두려움에 내맡기는 것은 삶의 기술이다. 우리의 문화는 두려움을 비합리적인 것이고,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내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가 두려움에 주의를 기울일 때, 두려움이 스스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 기쁨에 가득 찬 삶은 두려움 없이 사는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두려움과 온전하게 사는 것이다. 기쁨은 삶을 위해 두려움과 함께 움직일 때 발견할 수 있다. 주의깊게 관찰되는 두려움은 우리를 우리 자신과 타인들을 위해 용기와 사랑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리고 이러한 자비와 봉사의 행동들은 두려움을 없애는 가장 빠른 길이다. 만일 당신이 병에 걸리는 것을 무서워한다면, 병에 걸려 있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 만일 당신이 장애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장애가 있는 사람을 위해 봉사하라. 만일 당신이 돈을 충분히 가지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 만일 당신이 죽음을 무서워한다면, 호스피스로 자원봉사를 하라. 만일 당신이 외로워지는 것을 무서워한다면, 요양원에 갇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노인들을 위해 일하라. 그러는 사이에 당신은 두려움의 연금술을 발견할 것이다. 죽음, 상실, 고통, 취약함, 고립, 혼돈과 같은 최악의 두려움들을 대면하는 것은 눈보라 치는 황무지 속을 트래킹하는 것만큼이다 막대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좋은 소식은, 두려움이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그것에 정면에서 맞설 때 기쁨이 더욱더 커진다는 것이다.
- 보다 큰 사회 시스템들 안에서 어둠의 감정과 협동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기술은 공감능력. 이것은 인류라는 가족안에 있는 타인들에 대해 느끼는 것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치유하고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를 치유할 길을 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감의 능력을 갖는데 있어 우리가 직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가족 시스템이다. 공감이라는 자연스런 인간능력은 가부장제 속에서 그 뿌리가 끊어진 채 이어져왔다. 가부장제는 한 세계아 시스템이다. 가부장제 속에서 감정지능의 장애는 의식 속에서 특징적인 분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이성과 감정 사이의, 영혼과 자연 사이의, 정신과 몸 사이의 분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우리는 앎의 한 방법인 감정을 가치폄하하는 것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다. 의식 속에서의 이러한 분할들과 가치폄하는 가부장제가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파괴와 폭력성향을 부추겨 왔다.
-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은 제도적으로 자신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에 대해 방관자가 되도록 길들여졌다. 한편 여성들은 자신의 감정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까지도 느끼도록 사회화되었다. 여자 아이들은 일찍부터 감정접속자가 되도록 배워왔고, 남자아이들은 감정단절자가 되도록 배워왔다. 방관자적 원형은 남성중심 문화의 규범이다. 이것은 여성들을 심각한 이중족쇄에 밀어 넣는다. 여성들은 여성적이기 위해 감정을 보유하고 있을 것을 요구당하며, 그 때문에 가치폄하를 당한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이, 이것은 문화에 의해 인지되지 못하는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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