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의 문학살롱

저자
박병률 지음
출판사
한빛비즈 | 2014-05-30 출간
카테고리
경제학자의 문학살롱
책소개
경제학자들이 살롱에서 소설을 통해 경제학을 토론한다면...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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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7년 미국 최초의 금융공황이 밀어닥쳤다. 없는 사람에게는 더 혹독한 공황이었다. 서부개척이 활발해지자 서부의 은행들은 부동산을 담보로 막대한 대출을 해줌. 이것이 버블을 일으킴.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투기현상에 깜짝 놀라, 토지 거래를 할 때는 은행권 대신 금과 은 만으로 결제하도록 제한. 금과 은은 부족했다. 화폐부족에 버블은 꺼졌지만 거래마저 뚝 끊김. 토지가치가 떨어지자 이를 담보로 돈을 빌려줬던 소규모 은행들은 버틸 수 없었음. 은행들이 기업에 대출상환을 요구하자 기업들은 줄줄이 파산. 영란은행은 미국으로 금은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이자율을 올림. 그랬떠니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영국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짐. 영국 경제경색은 미국의 면화 수출 급감으로 이어짐. 금융중심지였던 필라델피아가 저물고 뉴욕의 월가가 떠오름
- 개츠비가 짧은 순간 떼돈을 벌 수 있었던 데는 1920년 1월부터 시행된 금주법의 역할이 컸음. 위대한 개츠비의 소설 속 배경은 22년 여름 뉴욕시와 롱아일랜드. 금주법이 시행된 지 2년 된 해다. 개츠비는 밀주를 유통시켜 단 2년만에 백만장자가 됨. 미국의 20년대는 재즈의 시대, 광란의 20년대로 불리는 황금기다. 동시에 금주법의 시대라고도 함. 1919년 10월 전국 금주법이 제정됨. 이듬해부터 미국 땅에서 술은 자취를 감춤. 사실 미국의 금주운동은 남북전쟁 때부터 있었음. 청고도들이 이주해 건설된 나라였던 만큼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는 분위기였음. 술 제조와 판매에 대해서도 금지 여론이 높았음. 1881년 캔자스주는 1차대전 직전에 10여개 주들은 주법을 통해 술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했음. 하지만 연방의회를 통해 전국적으로 술이 금지된 것은 이때가 처음. 미국 내 영토에서 0.5% 이상의 알콜이 포함된 모든 음료의 주조와 판매가 금지됨. 금주는 보수주의자들이 이끌었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앞장섰고 산업자본가들도 찬성. 근로효율이 높아진다는 이유. 주정뱅이 남편들을 싫어했던 여성계도 찬성. 당시 적대국이었던 독일이 주도하던 맥주산업에 대해 가진 반감도 한몫했다. 문제는 부작용. 술 제조와 판매를 금지했지만 암암리에 술은 제조되고 유통됨. 술 가격이 급등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클럽을 만들어 대놓고 술을 즐겼다. 개츠비의 파티에서도 술은 빠지지 않았다. 데이지가 교통사고를 일으킨 것도 음주로 인한 사고였다. 돈 없는 서민들은 가짜 술이라도 들이켜야 했음. 그랬다가 죽은 사람이 13년 동안 3만명이 넘었다.
- 대도시 뒷골목에서는 무허가 밀주 제조공장이 들어섰고, 심지어 가정의 화장실에서도 술을 제조. 식당에서 불법으로 술이 팔려나감. 음주운전 사고율은 오히려 높아짐. 매수된 관료들은 밀주 유통을 눈감아 주었다. 이런 혼돈을 파고든 것이 갱단들임. 갱단은 밀주를 만들고 이를 유통시키면서 큰 돈을 벌었따. 그중 단연 두각을 드러낸 조직이 알 파코네가 이끄는 마피아였음. 알 카포네는 밀주뿐 아니라 도박과 매춘으로 사업영역을 넓히면서 25년 무렵에는 시카고의 일인자가 됨. 금주법 발효 5년만의 일이다. 금주법의 막을 내리게 한 것은 29년 대공황. 대공황의 혼돈 속에 많은 이들이 대놓고 술을 찾으면서 금주법은 더 이상 적용되기 힘들었음. 또 세금확보를 위해서도 지하로 숨은 술을 양지로 끌어낼 필요가 있었음. 루즈벨트 대통령은 금주법 폐지 공약을 들고 나와 대선에서 32년에 승리하고 33년 금주법은 폐지됨
-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 성공을 거두면서 19세기 말 파리는 좋은 시절(belle epoque)을 맞음. 영화가 처음 선보인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새로운 20세기에 대한 기대로 가득참. 이런 기운은 1차대전인 1910년대까지 이어짐. 20세기 상반기 물리, 화학, 생물, 천체, 수학, 의학 등 과학기술은 폭발적으로 발전. 해저 2만리(1870), 80일간의 세계일주(1872), 15소년 표류기(1889)에서 볼 수 있듯이 여행과 북극 탐험, 우주여행 등 공간을 넘나든 미지의 땅에 대한 쥘 베른의 상상력은 과학과 특허의 시대에 환영받음. 쥘 베른의 창의성은 고향 낭트도 한몫했다. 낭트는 제 1의 무역항이었음. 식품, 화학, 기계공업이 발달한 도시. 특히 17~18세기에는 아프리카 노예와 프랑스 잡화, 아메리카 대륙의 산물을 교환하는 삼각무역으로 번영을 누림. 쥘 베른의 못 말리는 상상력과 공상은 이국적 정서가 풍부한 낭트가 출발점이 됨
-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일은 300여 영방국가로 흩어짐. 신성로마제국을 이뤘지만 실제로는 느슨한 연합국에 불과했음.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으로 힘을 한데 모은 이웃 프랑스에 비해 정치, 문화, 경제적으로 낙후됐음. 1806년 나폴레옹이 침공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은 붕괴. 알자스와 로렌을 빼앗긴 것도 이때였음.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한 독일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재상이 된 뒤 1871년 통일을 이룸. 같은 해 프로이센은 프랑스와의 보불전쟁에서 승리, 나폴레옹으로부터 당한 수모를 갚음. 프랑스는 자신의 땅 베르사유에서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 지불을 약속하고 알자스, 로렌을 반환. 1914년 1차대전이 터지며 독일과 프랑스는 또다시 맞붙었다. 이번에는 연합국에 속한 프랑스의 승리였다. 프랑스는 1919년 베르사유에서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림. 보불전쟁의 복수였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독일은 2차재전의 유혹에 빠짐. 헤세는 "전쟁의 유일한 효용은 사랑은 미움보다, 이해는 분노보다 위대하고, 평화는 전쟁보다 고귀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것, 유럽인은 두 차례 전쟁을 겪고서야 헤세의 말을 이해했다.
- 독일은 1871년 통일을 이룸. 이후 급속히 성장하면서 1910년대에는 영국과 겨루는 유럽 최대 공업국으로 성장. 하지만 그늘도 있었다. 소득 양극화로 사업주와 노동자 사이의 빈부격차가 커졌고, 사회적 대립이 커졌다. 체제를 전복하려는 사회주의에 대한 요구도 커져갔음. 독일은 의료보험, 산재보험 등 사회보험을 최초로 도입하며 노동자들의 불만을 달래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음. 변신은 이 시기에 나왔다. 실직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노릇을 해야하는 그레고르의 팍팍한 삶은 평범한 독일인들의 일상이기도 했다. 국가가 부강해지 만큼 노동자들의 삶이 향사된 것은 아니었다. 독일이 택한 것은 팽창주의였음. 독일은 급격히 군비를 늘렸고, 영국, 프랑스 등과 대립하기 시작.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한 후 독일경제는 완전히 망가짐. 패망한 독일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음.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일부 영토를 반환하거나 할양함. 1921년 승전국들은 독일에 배상금으로 1320억 마르크를 낼 것을 요구. 당시 영국 GDP의 절반이나 되는 액수였음. 케인스는 "독일 경제는 물론 유럽 경제를 망칠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음. 결과는 참혹했다. 전비를 마련하느라 이미 많은 돈을 시중에 풀었던 독일은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마구 찍음. 넘쳐나는 유동성은 역사상 유례없는 초인플레를 유발. 1921년 0.3마르크였던 일간신문은 23년 11월 7000만 마르크에 이르렀음. 빵 1파운드를 사기 위해서는 800억 마르크를 내야 했음. 1923년 독일의 물가상승률은 연간 29500%였다. 3.7일마다 물가가 두배씩 뛰었다. 1923년 7월 1000만 마르크, 11월에는 1000억 마르크 지폐가 발행됨.
- 무에서 유를 일궈야 했던 60년대에는 저돌적 기업가 정신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신규사업을 개척하는 창업가형이 많았음. 성장의 시기였던 70~80년대에는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는 사업확장형 CEO가 주목받음. 80~90년대에는 관리형 CEO가 떴다. 주력산업이 성숙기에 진입하고 경쟁이 격화되면서 경영합리화와 조직의 안정성이 중시된 것.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기에는 구조조정형 CEO가 중요했음. 거친 대외 환경에서 기업의 생존을 위해 효율성을 높이는 CEO가 필요했다. 결국 폭발적 성장형 시대에는 공격적인 돈키호테형, 세심한 관리형 시대에는 사려깊은 햄릿형이 적합하다는 의미
- 흔히 영국은 두명의 여왕이 만들었다고 함. 한명은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고, 또 한명은 18세기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18세기 빅토리아 시대로 가는 기초를 닦음. 그는 해적 프란시스 드레이크 등으로 포섭해 1588년 에스파냐 무적함대를 격파. 이는 영국이 작은 섬나라에서 해상제국으로 도약하는 기반이 됨. 동시에 에스파냐의 동인도 무역독점이 깨짐. 영국은 이어 적극적인 해외 원정으로 미국 플로리다 북부를 획등했음. 버지니아라는 지명은 엘리자베스 1세를 의미함. 이 시기 영국 왕권은 절정에 이름. 엘리자베스 1세는 화폐제도를 통일했다. 그레셤의 제안을 받아들여 금과 은의 가치를 일정하게 했음. 노동시간과 임금을 정하고, 빈민구제법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을 보호. 광산, 금속, 제분, 유리 등은 독점권을 부여해 보호 육성함. 중상주의를 강하게 밀어붙여 대외수출을 늘림. 동인도 무역 독점권을 준 동인도회사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경제군주였따. 경제력이 커지면서 유럽의 주변국에 불과하던 영국의 르네상스가 시작됨. 이탈리아보다 1~2세기가 늦었지만 셰익스피어라는 세기적인 작가가 나오면서 영국문학은 황금기를 맞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시대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평을 받음. 햄릿은 1601년에 쓰여짐. 엘리바베스 1세가 사망하기 직전이다. 영국에서는 자식이 없는 처녀 여왕이다 보니 후계자에 대한 온갖 음모와 추측이 들끓었다. 날로 노쇠해져가는 여왕의 건강에 대한 우려도 많았음. 햄릿의 무대는 12세기 덴마크이지만, 실제로는 여왕 사후에 갈등을 겪을 영국 왕실의 불안감을 반영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평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면 국력이 한창 신장되던 때에는 희극들이 많았지만 여왕 집권 말기부터는 비극으로 전환. 햄릿에 이어 오델로, 리어왕, 맥베스 등 불멸의 명작들은 엘리자베스 1세 사후에 나왔다
- 1492년 스페인은 유대인을 몰아냄. 17만명의 유대인이 스페인을 떠남. 스페인은 유대인으로부터 몰수한 재산으로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에 투자. 하지만 유대인이 떠난 빈자리를 컸다. 금융시스템이 무너진 것. 1557년 스페인은 파산을 선언. 이어 무적함대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격파당하면서 해상 주도권마저 잃음. 유대인들은 15세기 스페인, 16세기 이탈리아, 17세기 네덜란드, 18~19세기 영국을 거쳐, 20세기 미국에 정착. 지금도 세계경제를 주무르는 숨은 실력자는 유대인들이다.
- 경제학은 시간의 가치를 표현하지만 미하엘 엔데는 숫자가 빠뜨린 것이 있다고 말한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한국인들은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데 익숙해져 있음. 새벽같이 일어나 일터에서 온종일 일하고, 그것도 모자라 초과수당을 받으며 밤샘근무를 한다. 소녀 모모가 있다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그 시간,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저녁을 먹고, 여행을 다니며 잊지 못할 추억을 쌓으세요. 그것이야말로 더 큰 가치가 있답니다."
- 실비아 나사르의 '사람을 위한 경제학'을 보면 찰스 디킨스는 새 구빈법을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법이라고 생각. 미국 여행은 그의 생각에 힘을 실어줌. 아메리카 대륙은 경작을 기다리는 드넓은 땅이 있었고, 풀밭 위에는 엄청난 수의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인구가 살아갈 땅은 넉넉했다. 인구론은 영국에만 적용된다고 믿게 됐다. 인구론은 자본가들에게 큰 지지를 받음. 노동자들이 자신의 성욕을 참지 못한 나머지 너무 많은 아이들을 낳아 가난을 자초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됐기 때문. 공장주들은 임금착취에 대한 면죄부가 주어지자 환호함. 인구증가에 대한 공포는 1801년 영국이 근대적 인구조사를 최초로 실시하는 계기가 됨
- 인구론은 진화론 탄생의 밑받침이 됨. 다윈은 1838년 어느날 머리를 식힐 참으로 인구론을 읽었따. 식량이 부족해지면 식량을 쉽게 구하기 힘든 사회적 약자부터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보면서 생존을 위한 경쟁개념을 떠올림. 다윈은 종의 기원 서문에서 "맬서스의 인구론을 보든 동식물에 적용한 것이 나의 이론"이라고 실토. 찰스 디킨스는 경제학을 지지했다. 경제학이 없다면 세계가 굴러가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경제학을 음울한 학문으로 방치하는 게 아니라 따뜻한 학무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 나쁜 아이로 불린 구빈원 고아 올리버가 실은 따뜻한 아이였던 것처럼 경제학도 어두운 학문이 아니라 희망찬 학문일 수도 있다는 것. 인간에 대해 따뜻한 경제학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빚어낸 작품이 올리버 트위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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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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