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진보

사회 2023. 8. 18. 12:10

- 만약 공장의 기계가 갖는 잠재력이 현재의 공장 시스템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과 결합된다면, 우리는 누그러지지 않는 잔혹함으로 전개되는 종류의 산업혁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 시기를 해를 입지 않고 지나가고자 한다면, 유행하는 이데올로기를 볼 게 아니라 사실관계를 봐야 한다.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 1949년)
- 이 모든 낙관이 무색하게 지난 1000년의 역사는 발명과 혁신이 "공유된 번영”과는 딴판인 결과를 불러온 사례로 가득하다.
*개선된 쟁기, 더 체계화된 윤작, 말의 사용 확대, 훨씬 개량된 수차와 풍차 등 중세와 근대 초기 농업에서 나타난 일련의 기 술 발달은 인구의 90퍼센트 가까이를 차지하던 농민에게 거 의 아무런 이득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중세 말부터 시작해 유럽에서 선박 설계가 개선되고 대양을 가로지르는 교역이 가능해지면서 유럽의 일부 사람들이 막대 한 부를 획득했다. 하지만 동일한 종류의 선박이 아프리카에 서 수백만 명을 노예로 납치해 신대륙으로 운송했고 수 세기 간 이어진,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끔찍한 영향이 남아 있는 억압적인 시스템을 불러왔다.
*영국 산업혁명 초기의 직물 공장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부를 창출해 주었지만 노동자들의 소득은 100년 가까이 증가하지 않았다. 직물 노동자 본인들이 절절히 잘 알고 있었 듯이, 되레 노동 시간이 늘었고 공장의 노동 여건과 인구가 밀 집한 도시의 생활 여건 모두 가혹하게 악화되었다.
*혁명적인 혁신이라 할 만한 조면기로 면화 재배의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고 미국은 세계 최대의 면화 수출국이 되었다. 하지만 이 동일한 발명이 남부 전역에서 면화 대농장이 운영될 수 있게 함으로써 노예제의 가혹함을 한층 더 강화했다.
*19세기 말에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발명한 합성비료는 농업 산출을 크게 증대시켰다. 그러나 하버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동일한 원리를 적용해 화학 무기를 고안했고, 화 학 무기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상세히 논의하겠지만, 지난 몇십 년 사이 컴퓨터의 놀라운 발달로 소수의 사업가와 기업계 거물이 지극히 부유해졌다. 그러는 동안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대부분 의 미국인은 뒤로 밀려났고 많은 이들의 실질소득이 심지어 감소했다.

- 중국 공산당과 페이스북의 의사결정을 추동한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둘 다 과학과 테크놀로지 자체에 내재한 속성에 의해 내려진 결정은 아니었다. 자신의 경로를 거침없이 나아가는 진보의 행진이 반 드시 거치게 되는 다음 단계여서 나타난 일도 아니었다. 두 사례 모두 에서 우리는 [의사결정자의] 이해관계가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음을 볼 수 있다. 반대자를 억압하려는 이해관계, 그리고 온라인 광고 수입 을 늘리려는 이해관계와 같이 말이다.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고 무엇이 우선순위여야 하는가에 대한 지배층의 비전도 핵심적인 역할 을 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가 통제에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에는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를 통제하기 위해, 페 이스북의 경우에는 사람들의 데이터와 사회적 활동을 통제하기 위해 테크놀로지가 사용되었다.
- 이것이 프랜시스 베이컨이 놓친, 그리고 275년의 인간 역사가 더 지나고 나서 H. W. 웰스가 깨달은 지점이다. 테크놀로지는 통제의 문제이며 자연에 대한 통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통제 이기도 하다는 점 말이다. 이는 단순히 기술 변화에서 어떤 이들이 다 른 이들보다 더 이득을 본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이것 은 생산을 조직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 일부 사람들의 부와 권력을 강화하고 다른 사람들의 권력을 훼손한다는 의미다.
-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비전에 사회가 단단히 흘려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그 비전은 기업계와 테크 분야의 지배 충이 자신의 부와 정치 권력, 사회적 지위를 한층 더 높이려는 계획을 밀어붙이는 데 도움이 된다. 지배층은 자신에게 좋은 것이 곧 공공선 에도 최선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의 고결 한 경로가 모종의 고통을 유발한다 해도 진보를 위해 충분히 치를 가 치가 있는 비용이라고까지 믿게 될 수도 있다. 고통을 겪고 비용을 떠 맡게 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비전으로 추동된 지배층은 매우 상이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상이한 경로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누군가가 대안 적인 경로를 그들 앞에 제시하기라도 하면 그들은 격분할지도 모른다.
- 레셉스의 사례는 한 세기 반 전의 일이지만 우리 시대의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이해하는 데도 시사점을 준다. 이 이야기는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비전이 어떻게 사회의 지배적인 비전의 자리에 등극하는 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테크놀로지의 최전선을 밀어붙여 확장하는지 보여준다. 좋은 쪽으로도, 때로는 나쁜 쪽으로도 말이다.
레셉스는 프랑스의 많은 기관에서 지지를 받았고 한때는 이집 트 당국의 지지도 받았다. 그가 굉장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 는 수에즈에서 대대적으로 성공을 거둔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는 프랑스 투자자들과 이집트 당국이 수에즈 운하에 대한 그의 계획 을 받아들이도록 성공적으로 설득했고,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에서 봉 착하게 될 어떤 난제도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나타나 해결해 줄 수 있 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성공의 정점에 있었을 때도 레셉스가 상정한 진보가 모두를 위한 것이지는 않았다. 수에즈 운하 건설 현장에서 일해야 했던 이집트 노동자들은 이 기술적 위업의 수혜자가 될 법하지 않았고, 레 셉스의 비전은 그들의 고통에 전혀 영향을 받는 것 같지 않았다.
파나마 프로젝트는 강력한 비전이 어떻게 그들 자신의 기준으 로 보더라도 대대적으로 실패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레셉스는 확신 과 낙관에 사로잡혀서 파나마에서 나타난 어려움을 인정하려 하지 않 았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그 어려움이 너무나 명백하게 보이는 상 황에서도 말이다. 프랑스 건설 공학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대실패 를 겪었고 투자자들은 돈을 날렸으며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헛되이 목숨을 잃었다.
- 비전의 덫
레셉스는 카리스마도 있었고 사업가적 안목도 있었고 야망도 있었다. 프랑스 권력층에 연줄도 있었고 때로는 이집트 당국의 지지도 받았다. 또한 그가 전에 거두었던 성공은 동시대의 많은 사람을 매혹했다. 더 중요하게, 레셉스는 거대한 공공 인프라 투자와 기술 진보가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이에게 득이 되리라는 19세기판 테크노-낙관 주의를 설파했다. 이 비전이 프랑스 대중, 그리고 프랑스와 이집트의 의사결정자들이 그에게 동참하게 만들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이러한 비전의 역할이 없었다면 레셉스는 약 190킬로미터에 걸쳐 이집트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공사에 엄두를 내볼 만한 의지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고, 계획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기 시작했을 때도 그러한 의지를 가질 수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비전이 없으면 테크놀로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비전은 가시 범위를 제한하는 왜곡된 렌즈이기도 하다. 레셉스가 수에즈에서 발휘한 멀리 보는 안목과 기술 진보에 대한 믿 음은 찬사받을 만했을지 몰라도, 해수면 높이의 운하를 짓겠다는 그의 접근 방식에서 그에 못지않게 핵심적이었던 요인은 수만 명의 이집트인 부역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진보에 이 노동자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 자신의 기준으로도 레셉스의 비전 은 대대적으로 실패했는데, 이는 가장 큰 강점이던 자신감과 명료한 목적의식이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비전에 갇 혀서, 실패를 인식하고 상황의 변화에 맞게 적응하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어려웠다.
두 운하 이야기는 이러한 동태적 과정의 가장 해로운 측면을 보여준다. 레셉스는 파나마에 전과 동일한 믿음과 동일한 프랑스 전문 가와 동일한 방식으로 조달한 프랑스 자본을 가지고 왔고, 본질적으로 유럽에서 동일한 제도적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엇이 필요 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자신의 생각에 배치되는 사실들이 계 속해서 나오는 현장 상황에 직면해서도 한사코 계획을 수정하지 않으 려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 몇 가지 면에서 레셉스의 감수성은 놀랍도록 현대적이었다. 거대 프로젝트에 대한 선호, 테크노-낙관주의, 민간 투자의 힘에 대한 믿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처하게 될 운명에 대한 무시 등 을 보건대 레셉스는 오늘날의 기업 이사회에 들어가도 잘 어울렸을 것이다.
파나마 운하의 재앙이 주는 교훈은 오늘날에도 유의미하며, 오 히려 오늘날 시사점이 더 크다. 1879년 파리 국제회의에서 한 미국 참 가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회의의 실패는 공화국의 시민이라면 반드 시 스스로 생각해야 하며 어떤 다른 사람이 이끄는 데로도 그냥 따라 가면 안 된다는 유익한 교훈을 줄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이제는 우리 가이 교훈을 잘 알게 되었노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진보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부과된 재앙의 사례에서 얻은 시사점을 토대로 오늘날의 실패를 논의하기에 앞서 던져보아야 할 중요한 질문들이 있다. 레셉스의 비전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지배적인 비전이 될 수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 다른 이들의 목소리, 특히 그의 비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왜 들리지 않았을까? 답은 사회적 권력과, 또한 정말로 우리가 “공화 국의 시민으로서 살아가고 있는지와 관련이 있다.

- 설득 권력은 가시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 포착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정치 권력은 정치 제도(입법의 규칙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누 가 행정적 권한을 갖는가 등)에서, 그리고 서로 다른 개인과 집단이 효과 적으로 정치적 연합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경제 권력은 경제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역량과 그 자원으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에 좌우된다. 강압 권력은 폭력 수단을 얼마나 장악하고 있느냐에서 나온다. 그런데, 설득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거대 은행 및 그곳의 경영진과 투자자들이 구제된 과정을 살펴 보면 설득 권력의 두 가지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아이디어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의제 설정의 힘이다.
- 월가가 정책과 규제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는 데는 아이디어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 거대 금융 기업을 만든 경영자들은, 현대 경제 전체가 소수의 거대 금융기관이 정부 규제를 거의 받지 않 고 매끄럽게 돌아가는 데 달려 있다는 개념을 촉진했다. 금융 산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금융인들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해 가면서, 또한 영화와 신문에 금융권 초고소득자들의 막대한 연봉과 고 급스러운 라이프스타일이 화려하게 그려지면서, "거대 금융은 좋은 것이다"라는 아이디어는 더욱 옳고 설득력 있게 들렸다.
- 사회적 지위를 존중하고 성공한 사람을 모방하는 것에는 명백한 진화상의 논리가 있다. 성공한 사람이 성공한 이유는 올바른 선택 을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러한 모방에는 분명한 단점 도 있다. 높은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 울이는 것은 강력한 피드백 과정을 일으킨다. 사회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원을 가진 사람은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되 고, 사람들은 그의 말에 더 귀 기울이게 되며, 그러면 그 사람에게 더 큰 설득 권력이 부여된다.
다른 말로, 우리는 너무나 모방을 잘 하는 존재여서 우리가 많 이 접하게 되는 아이디어와 비전에 내포된 정보를 흡수하지 않기가 어렵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 아이디어와 비전은 강력한 의제설정자들 에게서 나온 것이다. 실험에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결과를 볼 수 있다. 믿을 만한 정보가 아니라는 표시까지 붙어 있는 정보마저 그것을 진 지하게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드는 것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 경제적·정치적 제도는 누가 다른 이들을 설득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를 갖는지에 영향을 미친다. 정치 시스템의 규칙은 누가 온전 히 대표되고 정치 권력을 갖게 될지, 따라서 누가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을지를 결정한다. 당신이 왕이거나 대통령이라면 의제 설정에 아 주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고 명령을 내려 직접적으로 의제 를 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제적 제도는 지지를 동원하 고 필요하다면 정치인과 기자에게 돈도 줄 수 있는 자원과 경제적 네 트워크를 누가 가질지를 결정한다.
당신이 솔깃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으면 설득 권력은 강해지 는데, 앞에서 보았듯이 이것도 어느 정도 제도에 의존한다. 당신이 부 유하거나 정치적으로 강력하다면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될 것이고, 이는 당신의 말이 더 설득력을 갖게 해줄 것이다.

- 11세기 초에 잉글랜드 농촌에서는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농민들은 힘겹게 일했고 생계 수준 정도의 소비를 했다. 게다가, 현존하는 증거들에 따르면 이후 두 세기 동안 이들은 한층 더 쥐어짜인 것으로 보인다. 노르만 정복자는 농업을 재조직하고 봉건제 를 강화했으며, 명시적으로 또 암묵적으로 세금을 늘렸다. 농민들은 산출물 중 전보다 많은 양을 영주에게 바쳐야 했다. 중세의 영주들은 점차 더 가혹한 노동 여건도 강요했다. 잉글랜드 일부 지역에서는 농 민들이 1년 중 영주의 땅에서 일하는 시간이 노르만 정복 이전에 비해 두 배로 늘기도 했다.
식량 생산은 증가했고 농민들은 더 열심히 일했지만, 이들의 영양 상태는 악화되었고 소비 수준은 생존이 불가능해질 경계선으로까지 떨어졌다. 기대수명은 여전히 낮았고, 어쩌면 더 낮아져서 출생 시 기대수명이 25세밖에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어서 1300년대 초에는 일련의 기근이, 1300년대 중반에는 흑사병이 닥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흑사병으로 잉글랜드 인 구의 3분의 1에서 2분의 1이 줄었다. 균이 워낙 치명적이었기도 했지 만, 만성적인 영양실조와 결합된 것이 사망자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발 생하게 된 원인이었다.
수차, 풍차, 말굽, 물레, 외바퀴 손수레, 금속학의 발달로 증가한 산출이 농민에게 가지 않았다면, 다 어디로 갔을까? 일부는 더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는 데 들어갔다. 잉글랜드 인구는 1100년 220만명이던 데서 1300년에는 500만 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인구가 느는 동안 농 업 노동력과 농업 생산도 늘었다.
전반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졌는데 인구 대부분의 소비 수준은 낮아졌으므로 잉글랜드 경제에 막대한 "잉여"가 발생했다. 잉여는 생산된 것(대체로는 식량, 목재, 의류) 중에서 인구의 생존과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최초 수준을 넘는 양을 말한다. 증가한 농업 잉여는 소수의 지 배 계급이 누렸다. 지배 계급은 왕의 가신, 귀족, 고위 성직자 등을 다 포함해서 최대한 넓게 잡아도 인구의 5퍼센트가 채 되지 않았지만 중 세 잉글랜드의 농업 잉여 대부분을 가져갈 수 있었다.
잉여 식량 중 일부는 새로이 떠오르며 번성하던 도시 인구를 부양하는 데로도 들어갔다. 1100년에 20만 명이던 도시 인구는 1300 년경 100만 명으로 늘었다. 대부분의 농촌 지역과 크게 대조적으로, 도시에서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된 것으로 보인다. 도시 거주자 들은 사치품도 포함해서 다양한 물품을 구매할 수 있었다. 런던의 팽 창은 이 시기 도시에서 볼 수 있었던 풍요의 확대를 잘 보여준다. 런던 인구는 세 배 이상 늘어서 약 8만 명이 되었다.
- 하지만 잉여의 대부분은 도시로 흡수된 것이 아니라 종교 교단으로 흡수되어 대성당, 수도원, 예배당을 짓는 데 들어갔다. 1300년경에 주교, 대주교, 그 밖의 사제들이 소유한 땅이 전체 농경지의 3분의 1에 달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 시기의 종교 건축 붐은 진정으로 놀라웠다. 1100년 이후 26 개 도시에 대성당이 세워졌고 8,000개의 새 예배당이 지어졌다. 어마 어마한 대형 프로젝트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러져 가는 집 에 살던 시절에 대성당은 석조 건물로 지어졌고 대개 슈퍼스타급 건 축가가 설계했으며 어떤 것은 완공되는 데 몇백 년이 걸렸다. 날마다 숙련 장인들을 포함해 수백 명이 일했고 채석장에서 돌을 캐고 자재 를 나르는 등의 저숙련 육체노동도 많이 필요했다.
- 새로운 기계의 도입과 그로 인한 생산성 증가가 굳이 농민을 더 쥐어짜고 농민의 생활 수준을 낮추는 쪽으로 쓰인 이유는 무엇인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생산성을 높였지만 영주가 노동자를 더 고용할 의향이 없거나 고용할 수 없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그래도 영주는 여전히 더 생산적인 새 테크놀로지에 더 많은 노동 시간이 투 입되기를 원한다. 이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표준적인 설명에서는 종종 간과되지만, 한 가지 방법은 강압의 강도를 높여서 노동자의 노 동 시간을 강제로 늘리는 것이다. 그러면 생산성 증가의 이득은 토지 소유자가 가져가게 되고 노동자에게는 기술 혁신과 생산성 증가가 직 접적으로 해가 된다. 더 강도 높은 강압과 더 장시간의 노동에 (아마도 심지어는 더 낮은 임금에도)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잉글랜드에 수차와 풍차가 도입되었을 때 벌어진 일이 바 로 이와 같았다. 새로운 기계의 도입으로 생산성이 높아지자 봉건 영주들은 농민들을 더 강도 높게 착취했다. 노동 시간은 길어졌고 농민들이 자신의 작물을 경작할 시간은 줄었으며 실질소득과 가구 소비도 줄었다.
사회적 권력의 분배 방식과 당대의 지배적인 비전도 새로운 테 크놀로지가 어떻게 개발되고 도입되는지에 영향을 미쳤다. 어디에 방 앗간을 짓고 누가 그것을 통제할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의사결정이었 다. 종교 교단의 사회이자 신분 질서의 사회이던 잉글랜드에서 영주와 수도원이 방앗간을 운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또한 이들은 경쟁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데 권위와 권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 서 영주의 방앗간은 해당 지역 전체의 곡물과 직물을 처리했고 사용 료도 영주가 결정했다. 어느 경우에는 농민들이 방앗간을 사용하지 않 고 집에서 손으로 곡식과 직물을 처리하는 것을 영주가 금지하기도 했다. 테크놀로지가 이러한 경로를 따라 도입되면서, 경제적 불평등과 권력의 불평등이 강화되었다.
- 인클로저 운동의 역사는 설득 권력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테크놀로지 변화에서 누가 이득을 얻고 누가 그렇지 못할지에 어떻게 영 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준다. 무엇이 진보이며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가에 대해 영국 지배층이 가졌던 비전은 농업의 재조직화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늘 그렇듯이, 이 비전은 그들의 이해관계와 부 합하는 부분이 많았다.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상을 거의 혹 은 전혀 하지 않고 토지를 확보하는 것은 그것을 추진하는 사람들에 게 명백하게 이득이 되었다.
공공선에 부합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비전은 새로운 테크놀로 지가 승자만이 아니라 패자도 만들어 내는 경우에도, 아니 그런 경우에 더욱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테크놀로지 도입과 재조직화를 밀어 붙이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전환의 과정에는 설득해야 할 관련 당사자가 아주 많다. 자신의 관습적인 권리를 빼앗기게 될 가난한 농민을 설득시 키기는 어려웠으므로 더 가능성이 높고 이 전환이 성공적으로 이뤄지 는 데 더 본질적이었던 것은 도시 사람들과 의원 등 정치 권력자를 설 득하는 것이었다. 인클로저를 빠르게 진행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영의 과학적인 분석은 이 과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예상할 수 있듯이, 토지 소유자들은 그들이 듣고 싶은 결론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 었다. 그리고 영이 그것을 이야기했을 때는 그의 말을 환영했고 영이 생각을 바꾸자 그를 침묵시켰다.
- 신석기 혁명 이후 몇천년간은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이보다 적지만, 정착 농경이 완전히 확립된 약 7000년 전 무렵 이면 최근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패턴이 나타났다. 곡물 생산을 기반으로 한 잘 알려진 고대 문명 모두에서 대다수의 인구는 수 렵 채집을 하던 조상보다 못 살았고, 반면 지배층은 훨씬 더 잘 살았다.
이 중 어느 것도 진보의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었다. 모든 곳에 서 중앙집권적 전제 국가가 생겨난 것도 아니었고 농업의 발달이 꼭 강압과 종교적 설득에 특화한 지배층의 잉여 수탈을 필요로 한 것도 아니었다. 수차와 같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꼭 지역의 지배층이 독점 적으로 통제해야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농업 근대화도 가뜩이나 가난 했던 농민들에게서 꼭 땅을 더 빼앗아야만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경우에 대안적인 경로가 있었고 어떤 사회들은 대안을 선택했다.
- 대안적인 경로가 있었긴 하지만 농업 테크놀로지의 오랜 역사는 명백하게 지배층에게 유리하게 편향된 경로를 보여준다. 이는 지배 층이 강압을 종교적 설득과 결합했을 때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다. 이 러한 역사는 우리가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말하는 아이디 어에 접하면 늘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특히 강력한 사람들이 특정한 비전을 설파하려 할 때, 우리는 더 더욱 조심해야 한다.

- 영국이 다른 나라들과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은 개천용들의 나라가 될 수 있게 해준 오랜 사회적 변화였다.
19세기 중반이면 영국에서는 수만 명의 중간 계층 사람들이 사업적 성공과 테크놀로지 개발을 통해 현재의 처지보다 훨씬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서구 유럽의 다른 나라들 에서도 사회적 위계가 느슨해지고 부와 지위를 높이고자 하는 야망 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수의 중간 계층 사람들이 기존 의 계층을 벗어나 사회적 위계의 사다리를 올라가려고 한 나라는 당 시에 영국 말고 없었다. 18세기와 19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혁신과 새 로운 테크놀로지 도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역이 바로 이러한 “중 간정도의 사람들”이었다.
1700년대 초 무렵이면 대니얼 디포가 말한 "프로젝트의 시대" 로 표현되는 정신이 영국의 시대정신이 되어 있었다. 중간 계층 사람 들은 진보의 기회를 보았고, 건전한 투자를 통해서든 빠르게 부자가 되기 위한 금융 투기를 통해서든 그 기회를 잡는 데 나섰다. 1720년에 터진 남해회사 버블은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새로운 모험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기대를 잘 드러내며 특히 수익을 추구하는 소규모 투자자들 의 열정을 잘 보여준다.
- 높은 사회 계층으로 올라가고 싶다면 부를 획득해야 했고, 역으로 부만 획득할 수 있다면 얼마나 높이 올라갈 수 있는지에는 한계가 없었다. 그리고 빠르게 변화하는 18세기 영국 경제에서 부는 더 이상 토지 소유하고만 관련 있지 않았다. 교역을 하거나 공장을 지어서도 큰돈을 벌 수 있었고 큰돈을 벌면 사회적 지위가 따라왔다. 이와 같이 상대적으로 유동적인 환경에서, 내세울 것 없는 집안 출신의 수많은 야심가들이 기존 사회 질서를 완전히 전복하기보다는 기존 질서가 다 소 수정된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성공을 통해 계층 상승을 이루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토머스 터너 Thomas Turner의 일기는 18세기 중반 그와 같은 중간 계층 사람들이 가졌던 야망을 잘 보여준다. “아, 사업은 얼마나 즐거운 가! (정직한 직업이기만 하다면) 활발하고 바쁜 삶은 게으르고 무기력한 삶보다 얼마나, 얼마나 좋은가? 그리고 상업이 독려되는 바로 그 지점 에 자신의 운이 놓여 있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밀어붙일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때, 그는 얼마나, 얼마나, 행복한가?"
이것은 상업과 산업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 의 발명은 "대항해 시대에 중간계층의 야심가들이 꿈과 야망을 펼치 기에 자연스러운 장소였다. 옛 진리와 기성의 방식은 무너지고 있었 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예견했듯 사람들은 점점 더 자연에 대한 정복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 중간 계층 출신의 야심가들은 도시와 농촌의 빈민에 대해 [엘리트주의적 진보 개념을 가진] 휘그 사관식 귀족주의의 내려다보는 듯한 태 도를 받아들였다. 빈민은 "더 비천한 종류의 사람들이고 자신들, 즉 시스템 안에 통합될 수 있는 사람들인 야망 있는 중간 계층과는 완전 히 다르다고 여겨졌다. 그레고리 킹Gregory King은 이들 빈민이 국부에 기여하지 않고 오히려 "국부를 줄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역시 당대의 인물인 윌리엄 해리슨William Harrison은 "[빈민은] 국가에서 목소리도 권 한도 가질 수 없으며 다른 이들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 이러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으니 야심 있는 새로운 중간 계층이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을 뿐 노동자와 사회 공동체 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6장에서 보겠지만, 그 결과 기술, 조직, 성장 전략, 임금 정책 등에 대해 산업가들이 내린 선택은 그들을 부유하게는 했지만 생산성 증가의 이득이 노동자들에게 공유되는 것은 가로막았다. 이러한 상황 은 노동자들 자신이 정치적·사회적 권력을 충분히 획득했을 때에서 야 달라지게 된다.

- 학자 얀 드 브리스Jan de Vries는 산업혁명 Industrial Revolution이 사실상 "근면 혁명 industrious revolution"이었다고 지적했다. 처음에는 영국에서, 그 리고 곧이어 다른 모든 곳에서도 노동자들이 전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의 평균 노동시간은 연간 2,760시간으로, 50년 전 이나 1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1800년 경이면 평균 노 동시간이 이미 3,115시간으로 늘어 있었다. 이후 30년간 노동시간은 더 늘어서 3,366시간이 되었고, 이는 주당 65시간에 해당했다. 그러나 더 장시간의 노동이 더 높은 소득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노동 강도와 노동 시간의 증가가 어느 정도까지 더 나은 경제 적 기회에 반응한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선택이었고 어느 정도까지 노 동자의 의지에 반해 강요된 것이었는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 21세기에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우리가 던져보기에 좋은 질문이긴 하 지만, 1800년대 초에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50년이나 100년 전 사람들 보다 더 장시간 더 고되게 일하지 않으면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새로이 등장한 공장 경제에서는 이것이 생존의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 공장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factory"는 기름 짜는 도구나 방앗간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가 어원이다. 1500년대에는 규모가 비교적 작은 사무소나 교역의 전초 기지를 의미하는 말로도 쓰였다. "물건을 만드는 건물의 의미로 쓰인 용례는 1600년대 초부터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다가 1721년부터 이 단어는 꽤 새로운 무언가를 의미하기 시작했 다. 기계가 돌아가는 곳에서 여성과 아동도 포함해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곳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초창기 직물 공장에는 많게는 1,000명이 고용되어 있었고 반복 동작에 방점을 두고 업무를 단순한 부분들로 쪼갠 뒤 강한 규율을 부과해 모두가 한 몸처럼 일하게 했다. 물론 노동자의 자율성은 크게 줄었다.
당대의 가장 성공한 혁신가이자 공장 소유주였던 리처드 아크 라이트는 첫 공장을 탄광 근처에 지었다. 당시에 그의 공장은 수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동력원에 쉽게 접하기 위해 정한 입지는 아니었다. 아크라이트의 목적은 탄광 노동자의 가족들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여성과 아동은 고도로 규율 잡힌 군대식 시스템에서 성인 남성보다 말 도 더 잘 듣고 손놀림도 더 민첩하다고 여겨졌다. 물은 밤낮으로 흐르 니 공장은 쉬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다. 공장을 짓는 데는 돈이 많이 들었으므로 일단 투자를 하고 나면 사업가들은 공장의 장비를 가능한 한 밀도 있게 사용하고자 했다. 늦은 밤까지 공장을 돌리는 것은 당연 했고 밤낮없이 가동할 수 있으면 더욱 좋았다.

- 전후의 테크놀로지가 내재적인 속성상 새로운 업무를 창출해 자동화의 노동 대체 효과를 상쇄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고 생 각하면 안 된다. 테크놀로지의 방향을 두고 맹렬한 갈등이 있었고, 이 갈등이 이 시기 노동과 경영 사이에 벌어진 갈등의 본질이었다. 그리 고 테크놀로지가 노동자 친화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노동자 쪽에서 길항 권력이 생겨나 기업들을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데 일조한 제도적 배열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전쟁 때 노조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과 와그너법의 도 입은 노동계의 힘을 강화했고, 전쟁이 끝나면 미국의 제도에서 노조가 주요 기둥 중 하나가 되리라는 예상이 사람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형 성되었다. 루스벨트 행정부의 내무장관 해럴드 이크스Harold Ickes는 전 쟁이 끝나가던 시점에 한 노조 콘퍼런스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함으로 써 이러한 예상을 공고히했다. "여러분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진을 막으려는 사람, 아니 속도를 늦추려는 사람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 노동계는 그렇게 했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말의 의미를 기업계에 확실히 인지시키는 일에 나섰다. 전미자동차노조United Auto Workers 는 전후의 첫 단체 협상에서 GM에 큰 폭의 임금 인상을 요구했고 GM 이 거부하자 파업에 돌입했다. 자동차 분야에서만이 아니었다. 같은 해인 1946년에 대대적인 파업의 파도가 일었고 노동통계국은 이를 "미국 역사상 노사 갈등이 가장 집중적으로 일어난 시기"라고 표현했 다. 일례로 전기 노동자의 파업은 미국 제조업의 또 다른 거인인 제너 럴 일렉트릭을 마비시켰다.
- 노동계가 자동화에 반대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자동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이해했고 올바른 선택을 내린다면 자동화로 인한 비용 절감이 모든 당사자에게 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이들이 요구한 것은 새로운 업무를 창출하는 데 기술 발달을 사용 하고 비용 절감과 생산성 증대의 이득을 노동자들과도 나누라는 것이 었다. 1955년에 전미자동차노조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 더 큰 기술적 진보가 더 큰 인간의 진보를 가져올 수 있게 할 ... 정책과 프로 그램을 찾는다는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면서 ... 협력할 것이다."
- 긴 역사적 시간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몇십 년은 독특했다. 알려진 바로는 이렇게 빠르고 널리 공유된 번영의 시기는 전에 없었다.
근대 이전에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수백 년간 성장을 경험 했지만 이 성장은 훨씬 느려서 기껏해야 연간 0.1~0.2퍼센트 정도였 다. 이것은 배제된 집단의 가혹한 착취에 기반한 성장이기도 했다. 가장 두드러지게는 노예 노동을 착취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모두에서 시민 신분이 아닌 사람 상당수가 강요된 노동을 했다. 또한 시민 계층이 어느 정도 번영을 누리기는 했어도 성장의 주된 수혜자는 귀족 계급이었다.
중세의 성장은 4장에서 보았듯이 느리고 불평등했다. 1750년 경부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성장률이 도약하지만 1950년 대와 1960년대에 서구 세계 전반적으로 연평균 2.5퍼센트가 넘는 정 도의 성장률을 보인 것에 비하면 느린 성장이었다.
전후 경제 성장의 다른 면들도 마찬가지로 이례적이었다. 과거 에는 중등 교육, 고등 교육이 상류층과 중산층의 특권이었으나 전쟁 후에는 이것이 달라졌다. 1970년대가 되면 서구 세계 거의 전역에서 중등 교육은 물론이고 고등 교육까지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하게 되었다.
- 산업의 집중이 심화되고 지대의 공유가 줄면서 1950년대와 1960년대 에 존재했던 공유된 번영 모델이 첫 번째 타격을 맞았지만 이것 자체 만으로는 실제로 진행된 정도만큼의 대대적인 전환을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규모로 전환이 일어나려면 테크놀로지의 방향 또한 반노동적인 쪽으로 전환되어야 하는데, 이 지점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등장 한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프리드먼 독트린은 기업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수익을 높여 야 한다고 독려했고 1980년대 무렵이면 이 아이디어가 기업계에서 널 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스톡옵션의 형태로 경영자에게 주어진 보상이 이러한 전환을 강력하게 촉진했고 기업 최상층의 문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미국 기업계에서 많이 이야기된 주요 주제 하 나는 처음에는 소비자 가전에서, 그다음에는 자동차에서, 효율적인 일 본 제조업체들과의 경쟁에 직면했다는 것이었다. 미국 기업인들은 이 에 대응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느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새로운 업무의 창출과 자동화로 인 한 노동 대체 사이에 균형이 잡힐 수 있는 방식으로 투자가 이루어지 면서 노동자의 한계생산성이 증가했고 제조업의 소득 중 노동으로 들 어가는 몫도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70퍼센트 가까운 수준으 로 대략 일정했다. 하지만 1980년대가 되면 많은 미국 경영자들이 노 동을 자원이 아니라 비용으로 여기면서 외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 려면 이러한 비용이 절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말은 생산에 고용된 노동력을 자동화로 줄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자동화가 노동자를 밀어내면 노동자 1인당 산출은 늘지 만 노동자의 한계생산성은 그만큼 늘지 못하거나 때로는 줄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충분히 큰 규모로 일어나면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고 임금의 증가도 둔화된다.
노동 비용을 줄이기 위해 미국 기업들은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필요했는데, 경영대학원과 새로이 떠오른 테크놀로지 분야가 이 두 가지를 각각 제공했다. 비용 절감과 관련해 핵심적인 아 이디어는 1993년에 출간된 마이클 해머Michael Hammer와 제임스 챔피 James Champy의 『리엔지니어링 기업혁명Reengineering the Corporation: A Manifesto for Business Revolution』에서 잘 볼 수 있다. 해머와 챔피는 미국 기업이 매우 비효율적이 되었으며 중간 관리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너무 많이 두고 있는 것이 큰 이유라고 보았다. 따라서 더 강력하게 경쟁에 나서기 위해서는 미국 기업에 리엔지니어링이 필요하고 새로운 소프트웨어들이 이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해머와 챔피는 리엔지니어링이 자동화만 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긴 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면 저숙련 일자리가 상당 부분 없어질 것이라고 보 았다. "옛 방식의 반복 작업은 상당 부분 사라지거나 자동화될 것이다. 단순한 노동을 단순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옛 모델이었다면 새 모델 은 복잡한 일을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노동시장 의 진입 기준이 높아질 것이다. 리엔지니어링이 된 환경에서는 단순하 고 반복적이고 저숙련을 요하는 일자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 다." 현실에서 이것이 펼쳐진 바를 보면, 복잡한 일을 하는 똑똑한 사 람들은 늘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온 사람들이었다. 리엔지니어링이 된 환경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괜찮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일자리는 점점 더 드물어졌다.
- 새 비전을 설파할 사제들은 이 시기에 새로이 번성하던 경영 컨설팅 분야에서 나왔다. 1950년대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경영 컨설팅 분야의 성장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더 잘 사용함으로써 구조 조정을 하려는 기업계의 노력과 나란히 이루어졌다. 경영대학원들과 더불어 맥킨지, 아서앤더슨 같은 경영 컨설팅 회사들도 비용 절감 아 이디어를 촉진했다.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경영 전문가들에 의해 점점 더 정교하게 설파되면서 노동자들이 이에 맞서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프리드먼 독트린도 그랬듯이 기업 리엔지니어링 이론도 이미 존재하고 적용되고 있었던 아이디어와 전략을 정식화하고 고착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해머와 챔피의 책이 출간된 무렵이면 이미 미국정책도 일조했다. 미국의 조세 시스템은 늘 자본을 노동보다 우대했다. 자본 이득이 노동 소득보다 실질적인 세율이 더 낮은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과세 비대칭이 더욱 심해졌고 장비와 소프트웨어 자본과 관련해서 특 히 더 그랬다. 여러 행정부를 거치며 기업의 법인세와 가장 부유한 개 인들에 대한 연방 소득세율이 연달아 낮아졌고, 이로 인해 자본에 대 한 실질적인 세율이 더 낮아졌다(기업의 자본 투자 수익이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게 압도적으로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2000년부터는 장비와 소프 트웨어 자본에 대해 감가상각충당금 적용을 점점 더 후하게 허용하면 서 자본에 대한 과세 우대가 더 강화되었다. 이 같은 제도는 처음에는 일시적으로만 도입된다고 했지만 종종 연장되었고 더욱 후해졌다.
전반적으로, 급여세와 연방 소득세 기준으로 노동 소득에 대한 평균 세율은 지난 30년간 25퍼센트 이상을 계속 유지했지만 장비와 소프트웨어 등 자본(자본 이득으로 환산될 수 있는 모든 항목을 다 포함해 계 산했다)의 실질적인 세율은 1990년대에 15퍼센트 정도이던 데서 2018 년에는 5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치우친 조세 인센티브는 기업이 자동화 장비와 도구를 더 많이 도입하도록 했고, 다시 이러한 수요 증가로 자동화 기술이 더 많이 발달하면서 자기 강화적인 순환 고리를 타게 되었다.
- 1980년 이후 미국의 평균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은 연간 0.7퍼센트가 채 되지 않았다. 1940년에서 1970년대 사이에는 평균 약 2.2퍼센트였 는데 이것은 매우 큰 차이다. 총요소생산성 성장이 1950년대와 1960 년대 수준이었다면 1980년 이래 미국 경제는 GDP 성장률이 매년 1.5 퍼센트포인트 더 높았을 것이다. 생산성 둔화는 2008년 금융위기 이 후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미국의 생산성 성장률은 호황기이던 2000년 부터 2007년 사이에도 연간 1퍼센트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실증근거들이 있는데도 테크놀로지 분야의 리더들은 우리가 테크놀로지와 혁신의 시대를 살고 있어서 무척 운이 좋은 것 이라고 말한다. 저널리스트 닐 어윈Neil Irwin은 뉴욕타임스에서 이러 한 낙관적 견해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표현했다. “우리는 혁신의 황금기, 즉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인간 존재의 기반을 변모시키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 지난 40년간 혁신이 노동자의 한계생산성을 높이고 노동자들이 할 새로운 업무를 창출하는 데서 등을 돌렸지만, "쉽게 딸 수 있는 낮게 매달린 과일"을 많이 버려두기도 했다. 버려진 생산성 기회를 볼 수 있는 영역 하나가 자동차 산업이다. 로봇과 특화된 소프트웨어가 노동자 1인당 산출을 증가시켰지만 사람에게 더 투자했더라면 생산성 이 이것보다 더 높아졌을 것임을 시사하는 연구들이 있다. 1980년대 에 토요타 같은 일본 회사들은 점점 더 많은 업무를 자동화하던 중에 생산성이 그리 많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정이 돌아 가는 곳에 노동자들이 있지 않으면 유연성이 상실되어 수요나 생산 조건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를 발견 하고 토요타는 자동화 추세에서 한발 물러섰고 중요한 생산 업무에서의 핵심적인 역할에 노동자를 다시 불러왔다.
토요타는 미국에서도 동일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캘리포니 아주에 있는 GM의 프리몬트 공장은 낮은 생산성, 불안정한 품질, 노 사 갈등으로 고전하다가 1982년에 문을 닫았다. 1983년에 토요타와 GM은 합작회사를 세우고 두 회사 모두의 자동차를 생산할 곳으로 프 리몬트 공장을 다시 열었다. 예전의 노동력과 노조 지도부도 유지되었 다. 하지만 토요타는 자신의 경영 원칙을 도입했고, 여기에는 발달된 기계를 노동자들의 재교육과 노동자들이 수행할 수 있는 유연성 및 주도력과 결합하는 접근 방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곧 프리몬트는 생산 성과 품질 수준이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보다 훨씬 높아졌고 토요타의 일본 공장들에 맞먹을 정도가 되었다.
- 더 최근에는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전기차 회사 테슬라가 비슷한 교훈을 얻었다. 처음에는 머스크의 디지털 유토피아 비전에 이끌려 서 자동차 생산의 모든 부분을 자동화하려 했지만 비용이 급증했고 지연이 많이 발생해 수요를 맞추지 못했다. 머스크 본인도 이렇게 인 정했다. "그래요, 테슬라에서 과도한 자동화는 실수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실수였어요. 인간을 가치절하했습니다.”
이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어야 한다. "로봇"이라는 말을 만 든 카렐 차페크도 로봇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고, 인간이 하는 종류 의 정교한 작업을 로봇이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렇게 언급했다. "수년간에 걸친 실행을 통해서만 아무렇게나 돌아다 니는 것 같은데도 아무것도 망가뜨리지 않는 진짜 정원사가 갖는 대 담한 확실성과 신비로움을 터득할 수 있다."
혁신의 영역에서 아직 활용되지 않은 채로 낮게 매달려 있는 과일은 공장의 재조직화보다도 더 큰 결실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하지 만 경영자들은 자동화를 더 밀어붙이면서 정보 공유와 협업을 위해 더 나은 플랫폼을 제공하고 새로운 업무를 창출함으로써 노동자의 생 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식으로 테크놀로지에 투자하는 것에서는 등을 돌렸다(9장에서 더 상세히 논의할 것이다). 디지털 유토피아가 추동하는 과도한 자동화가 아니라 균형 잡힌 혁신의 포트폴리오가 경제의 생산성을 더 빠르게 높일 수 있는 길일 것이다.

- 미래 세계는 편안히 누워서 노예 로봇을 기다리면 되는 안락의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지능의 한계에 맞서야 하는, 점점 더 힘겨워질 투쟁의 장일 것이다. (노버트 위너, 신과 골렘 주식회사God and Golem, Inc.』 1964년)
- 인간의 역량을 가치절하하는 것은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돌아올 수 있다. 자동화를 하기로 결정할수록 사회적 상호작용과 인간의 학습이 벌어질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고객 서비스를 예로 들어보자. 잘 훈련된 서비스 직원은 매우 효 과적으로 고객의 문제를 처리해 주는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고객과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직원은 지금 막 사고를 당해서 청구서를 써야 하는 고객에게 공감하면서 유대를 형성할 수 있다. 그는 부분적으로 그러한 소통의 도움으로 문제의 속성을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고객의 필요에 부합하는 해법을 찾아낸다. 또한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업무 경력이 쌓이면서 점점 더 일을 잘하게 된다.
- 그런데 고객 서비스 업무를 더 잘게 쪼개서 프론트엔드 업무를 알고리즘에 할당했다고 생각해 보자. 알고리즘은 당면한 문제의 복잡 성을 완전히 파악하고서 다루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고객 이 아주 기다란 메뉴를 거친 후에 결국 인간 상담사가 문제 해결을 위 해 개입해야 하는데, 이 시점이면 고객은 화가 나 있다. 사회적 유대를 쌓을 수 있는 초기의 기회들이 사라졌고, 이제 고객 서비스 직원은 고 객과 소통을 해도 전만큼의 정보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구체적인 상 황에서 정보를 얻고 그에 대응하는 역량이 줄어들고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경영자와 기술자들은 이를 인간이 잘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판단해 추가적으로 업무를 기계에 할당하려 할 것이다.
AI와 관련 테크 분야 사람들은 인간의 지능과 적응성에 대한 이러한 교훈을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인간 특유의 역량이 수행하는 역할이 무엇이든 간에 수많은 업무를 자동화하는 방향으로만 몰두한다
- 영상의학 분야에서 AI의 성취가 널리 찬양되었다. 2016년에 현대적인 딥러닝 기법을 공동으로 개척하고 튜링상도 받은 구글의 과학 자 제프리 힌턴 Geoffrey Hinton은 “5년 안에 딥러닝이 인간 영상의학자보 다 업무를 훨씬 더 잘 수행할 것이 명백하므로 영상의학 교육을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016년 이래로 영상의학 전문의에 대한 수요는 증가했다.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다. 영상 진단 은 심지어 고객 서비스보다도 상황적·사회적 지능이 더 많이 필요하 며 현재로서 이것은 기계의 역량을 넘어선다. 최근의 연구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인간이 가진 전문성이 결합되었을 때 효과가 더 크 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일례로, 기계 학습 알고리즘은 당뇨성 망막증 (당뇨 환자들 사이에 망막으로 가는 혈관이 손상되어서 생기는 증상)의 진단 을 향상시켜 줄 수 있지만, 알고리즘으로 어려운 케이스들을 짚어내 고 나서 인간 안과 전문의가 추가로 검토했을 때 진단의 정확도가 더 높아졌다.
- 과적합은 기계 지능과 관련해서 특히 더 문제일 수 있는데, 기계 지능이 실제로는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도 잘 돌아가고 있다 는 가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가령 국가들의 평균 기온과 1인당 GDP라는 두 변수 사이에 통계적 관련이 있다고 해서 기후가 경제 발 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상관관계는 단순히 유럽의 식민주의가 특정한 역사적 과정에서 상이한 기후대와 상이한 지역에 상이하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제대 로 된 이론이 없으면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헛갈리게 되고, 기계 학 습은 이 둘을 종종 헛갈린다.
- 과적합은 AI가 인간이 새로운 정보에 반응해 행동하는, 따라서 내재적으로 사회적인 속성을 갖는 상황을 다루어야 할 때 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인간이 환경에 반응한다는 말은 맥락이 자주 달라 진다는 뜻이고, 특히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바로 그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하는 행동 때문에 맥락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경제학의 사 례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구직자가 채용 공고가 거의 나오지 않은 직 종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을 때 알고리즘이 이것을 포착했다면 구직자 에게 행동을 바꾸도록 정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적합을 막 기 위해 개발된 방법들(예를 들어 알고리즘을 훈련하는 데이터와 검증하는 데이터를 분리하는 것 등)은 여기에서 과적합 문제를 제거하지 못한다. 두 샘플 모두 예를 들어 유통 분야에 채워지지 않은 일자리 공고가 많다는 특정한 환경에 적응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환경이 시간이 가면서 달라질 수 있는데, 바로 인간이 새로 입수하는 정보에 반응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알고리즘이 구직자에게 유통 분야에 지원 하도록 독려하면 유통 분야의 일자리에 지원자가 많아져서 더는 구직 자에게 매력적인 분야가 아니게 된다. 인간의 인지가 갖는 상황적이고 사회적인 측면과 인간의 행동이 동태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이 해하지 못하면 과적합은 앞으로도 계속 기계 지능을 괴롭히는 문제가 될 것이다.
- AI가 사회적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은 또 다른 우려스러운 함의를 가진다. AI가 방대한 사용자로부터 데이터를 수집해 데이터 에 담겨 있는 사회적 차원을 포함할 수 있긴 하지만, 현재의 접근은 인 간의 이해가 사람들 사이의 선태적 모방, 커뮤니케이션, 논쟁에 토대 를 두고 있다는 점을 활용하지 못한다. 그 결과, 잘 훈련된 노동자라면 종종 동료들로부터 배운 관점과 기술을 활용해 변화하는 상황에 빠르고 융통성 있게 반응함으로써 쉽게 달성할 수 있는 종류의 유연성을 자동화가 (높이는게 아니라) 줄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 어느 정도의 모니터링은 고용주의 합당한 권한일 수 있다. 가령 고용주는 노동자들이 주어진 업무를 잘 수행하게 하고 기계를 잘못 사용하거나 훼손하지 않게 하기 위해 어느 정도 노동 활동을 모니터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에는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고 기계를 잘 관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요인이 꼭 감시가 아니라 높은 임금 과 회사의 분위기를 통해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 발달하는 선의에서 나오기도 했다. 고용주나 감독관이 어느 노동자가 그날 몸 상태가 좋 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면 쉬엄쉬엄 일하도록 허용해 줄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면 그 노동자는 작업 물량이 많은 날 기꺼이 평소보다 강도 높 게 일하려 할 것이다. 이와 달리 감시는 고용주가 노동자의 임금을 깎 고 노동자들이 더 많은 일을 하도록 몰아붙일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의 미에서 감시는 "지대를 이전하는" 행위다. 노동자의 실질적인 생산성 은 그리 혹은 전혀 증대시켜 주지 않으면서 전반적인 생산성 이득이 노동자에게로 공유되는 것을 막고, 지대를 노동자에게서 떼어내 다른데로 옮기는 데 쓰일 수 있다는 의미다.
AI 기술이 [노동자로부터] "지대를 이전하는 방향으로 쓰이는 또 다른 사례는 업무 일정 관리다. 노동자가 자율성을 가질 수 있으려 면 노동 시간과 여가 시간이 명확하게 분리되고 업무 일정이 예측 가 능해야 한다. 패스트푸드점 노동자를 생각해 보자. 반드시 오전 8시에 일하러 와야 하고 반드시 4시에는 퇴근한다는 것을 아는 경우라면 예 측 가능성이 높고 그 8시간을 제외한 시간에는 자율성도 높다. 하지만 갑자기 경영자가 4시 이후에 손님이 증가하리라는 것을 발견하면 어 떻게 될까? 노동자들의 시간 자율성을 없애고 4시가 넘어서까지도 일 하게 만들고 싶을 것이다. 이것을 달성할 수 있을까?
- 먼 과거와 가까운 과거를 막론하고, 역사를 해석할 때 우리는 결정론적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벌어진 일은 벌어졌어야만 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종종 이는 정확한 해석이 아 니다. 역사가 갈 수 있었을 경로는 아주 많다. 테크놀로지의 역사도 마 찬가지다. AI의 세 번째 파도를 규정하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접근 방 식은 대규모 데이터 수집과 끊임없는 자동화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필연이 아니라 "선택"에 의한 결과다. 사실 비용을 많이 수반 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자동화와 감시에 치우친 지배층의 편향을 따라 가면서 노동자들의 경제적 기반을 훼손하고 있어서이기도 하고, 연구 와 노력이 사회적으로 더 유익한 범용 디지털 기술 쪽으로 가지 못하 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그렇다면 왜 테크 기업들은 인간을 도우면서 동시에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도구들을 개발하지 않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모두가 우리가 직면한 더 광범위한 요인에 대해 시사점을 준다. 교육 을 생각해 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새로운 업무의 창출이 중요한 이 유는 인간(이 경우에는 교사)에게 유의미하고 충분한 소득을 올릴 수 있 는 일자리를 창출해 줌으로써 생산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 만 새로운 업무가 생긴다는 말은 이미 자금이 쪼들리는 학교에 더 큰 비용이 발생하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늘날 많은 조직이 그렇듯이 대부분의 공립학교는 노동 비용을 줄이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해서 교사를 더 채용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학교로서는 자동화된 채점, 자동화된 교육과 같은 프로그램이 더 매력적일 수 있다.
의료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의료에 4조 달러를 쓰는데도 병원 들은 여전히 예산 압박에 시달리며, 코로나19 기간 동안 간호사의 부족은 고통스럽도록 명백했다. 간호사의 역량과 업무를 확대하는 테크 놀로지가 도입된다는 말은 양질의 의료를 위해 더 많은 간호사를 채 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핵심 지점을 다시 말해준다. 조직이 비용 절감에 초점을 두고 있을 때는 인간을 보완하는 테크놀로지가 조직 입장에서 매력적이지 않다.
- 오늘날 우리는 모든 비적정 기술의 어머니를 AI라는 형태로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녹색 혁명에서와 비슷한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노먼 볼로그가 했던 역할을 하고자 하는 AI 연구자도 많지 않다).
한국, 타이완, 중국 같은 곳에서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빈곤 이 감소한 것은 단지 서구의 생산 방식을 수입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 니었다. 그보다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이들 나라의 인적 자원이 더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나라 모두에서 테크놀로지는 노동 인구 대부분에게 새로운 고용 기회를 창출했고, 국 가 자체도 테크놀로지가 요구하는 바와 국내 인구의 실제 숙련도 사 이의 불일치를 줄이기 위해 교육 투자를 늘렸다.
- 그런데 현재 AI가 가는 경로는 이 길을 원천적으로 닫아버리고 있다. 디지털 기술, 로봇 기술, 그 밖의 자동화 장비는 이미 글로벌 생 산에서 요구되는 숙련 수준을 높였고 국제 분업 구도를 재편하기 시 작했다. 이를테면, 노동 인구가 주로 저학력 노동자로 구성된 개도국 에서 탈산업화가 벌어지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이 과정의 핵심도 역시 AI다. 현재의 AI 경로는 저소득국이나 중위소득국 인구 다수에게 일자리와 기회를 창출하기보다 자본, 고숙 련 생산직 노동자, 고숙련 서비스 노동자(경영 컨설팅이나 테크 기업에 서)에 대한 수요를 늘리고 있는데, 이것은 정확히 개도국에 부족한 자 원이다. 수출 주도 성장과 녹색 혁명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개도국 경 제는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빈곤을 줄이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하지만 테크놀로지의 미래가 AI 환상이 명령하 는 길로 간다면 그러한 자원은 계속해서 사용되지 않고 남아 있게 될 것이다.
- 2000년대 중반 무렵이면 디지털 기술과 거대 기업의 결합은 억만장자를 점점 더 많이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2010년대에 AI 도 구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부는 한층 더 증폭되었다. 하지만 이 것은 AI 도구들이 주창자들이 주장해 온 것만큼 놀랍거나 생산적이어 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AI 기반 자동화는 생산성을 크게 높이는 데 종종 실패하며, 더 안 좋게도 공유된 번영은 전혀 짓지 못한다. 그런데도 업계의 거물과 고위 경영자들을 매혹하고 부자로 만들어 주며, 그와 동시에 노동자들의 역량과 권력을 약화하고 사람들로부터 수집한 정보를 돈으로 만드는 방법을 개척한다
- 자동화와 감시에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쪽으로 맹렬히 돌진하는 가운데 이 모든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는 점이 우리가 이 비전의 이 같은 국면을 "AI 환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 환상은 향 후 몇 년간 강력한 알고리즘이 더 많이 개발되고 온라인을 통한 전 지 구적 연결이 더욱 심화되면서, 그리고 가전제품 등 기계들이 영속적으로 클라우드에 연결되어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한층 더 강화될 것이다.
- 오늘날 우리는 H. G. 웰스가 타임머신에서 묘사한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우리 사회는 이미 이중 구조 사회다. 꼭대기에는 거대 기업의 거물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부 를 자신이 가진 놀라운 천재성으로 획득했다고 믿는다. 바닥에는 평 범한 사람들이 있다. 테크 지도자들은 이들이 늘 오류를 저지르고 대 체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AI가 현대 경제의 많은 면에 점점 더 깊이 파고들면서 이 두 계층은 서로에게서 점점 더 멀어질 가능성이 크다.

- 모두가 늘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의 결과는 당신이 그것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74년 인터뷰)
- 컴퓨터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초지능적인 AI의 목적이 인류의 목적과 제대로 합치되지 않았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을 나타내기 위해 종이 클립 우화를 즐겨 이야기한다. 멈추는 것이 불가능한 강력한 지적 기계가 있는데, 더 많은 종이 클립을 생산하라는 명령이 이 기계 에 내려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기계는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상당한 역량으로 더 나은 생산 방법을 찾아내 지구상의 모든 자원을 종이 클립으로 바꾸어 버릴 것이다. 어쩌면 AI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도 이런 것인지 모른다. AI가 우리의 제도들을 클립으로 바꾸어 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AI의 뛰어난 역량 때문이 아니라 AI의 그저 그런 역량 때문에 말이다.
- 소셜미디어가 이렇게 시궁창이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가? 아 니면 테크 회사들이 내리는 의사결정이 우리를 이렇게 유감스러운 상 태에 도달하도록 만든 것인가? 진실은 후자에 더 가깝다. 이는 9장에 서 제기했던 다음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준다. 획기적으로 생산성을 증가시키지도 않고 획기적으로 인간을 능가하지도 않는데 AI는 왜이 렇게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답은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회사들이 개인별 디지털 광고 로 벌어들일 수 있는 금전적인 수입에 있다. 또한 이것은 디지털 테크 놀로지가 특정한 경로로 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디지털 광고는 사람들이 그것에 관심을 가져야만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그 러므로 이 비즈니스 모델은 플랫폼들이 온라인 콘텐츠에 대해 사용자 의 관여도를 늘리기 위한 쪽으로 노력을 쏟을 유인을 제공한다. 그리 고 분노와 선동으로 강한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이를 달성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 궁극적으로 여기에서 알고리즘이 어떻게 결과를 계산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고, 정말 중요한 혁신은 페이지와 브린이 인간의 통찰과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점이다. 이 경우에는 어떤 페이지가 관련성 높은 정보를 담고 있는지에 대한 사람들의 주관적인 평가에 인간의 통찰과 지식이 담겨 있었고, 이것이 기계의 핵심 업무 (검색 결과를 관련성 높은 순서대로 보여주는 것)를 향상시키는 데 사용되 었다. 브린과 페이지는 1998년에 펴낸 "대규모 하이퍼텍스트 웹 검색 엔진의 해부The Anatomy of a Large-Scale Hypertextual Web Search Engine"라는 제목의 논문을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이 논문에서 우리는 구글이라 는 것을 선보이려 하는데, 이것은 하이퍼텍스트 안에 있는 구조를 주되게 사용하는 대규모 검색 엔진의 원형이다. 구글은 효율적으로 웹크롤링과 인덱싱을 해서 기존 시스템보다 만족스러운 검색 결과를 제 공하도록 고안되었다.”
페이지와 브린은 이것이 커다란 혁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만 상업화할 계획은 명확하게 가지고 있지 않았다. 래리 페이지는 이 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놀라실지 모르지만, 저는 검색 엔진을 만들 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 아이디어는 내 레이더 안에 있지도 않았 어요."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계 무렵이면 그들이 확실한 성 공작을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이 명백했다. 이 검색 엔진을 만들 수 있다 면 월드와이드웹이 기능하는 방식이 막대하게 개선될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회사로서의 구글이 등장했다. 처음에 페이지와 브
린이 생각한 것은 그들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사람들에게 팔거나라 이센스를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초기의 시도는 그리 호응을 얻지 못 했다. 다른 주요 테크 기업들이 이미 그들 자신의 접근 방식에 고착되 어 있거나 검색이 아닌 다른 영역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던 것이 한 이유였다. 그때는 검색이 크게 돈벌이가 될 영역으로 여겨지지 않았 다. 일례로, 당시에 선도적인 플랫폼이었던 야후!도 페이지와 브린의 알고리즘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8년에 테크 투자자 앤디 벡톨샤임Andy Bechtolsheim 이 등장하면서 판도가 달라졌다. 페이지와 브린을 만난 벡톨샤임은 돈 을 벌 수 있는 딱 맞는 방법만 있다면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막대한 전 망이 있으리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벡톨샤임은 그 방법 이 무엇일지를 알고 있었는데, 바로 광고였다.
광고를 판매한다는 것은 페이지와 브린이 계획은커녕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벡톨샤임이 아직 회사 설립 신고도 하지 않은 구글에 10만 달러를 투자하면서 게임이 완전히 달라졌다. 곧 구글은 설립 신고를 했고,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광고 분야에서 갖는 잠재력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더 많은 돈이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탄생했다.
2000년에 구글은 구글에서 검색을 하는 사용자에게 보여질 광 고를 판매하는 플랫폼 '애드워즈'를 선보였다. 이 플랫폼은 잘 알려진 경매 모델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는데, 검색 화면에서 가장 가치 있는(눈 에 잘 띄는) 자리들은 빠르게 팔려나갔다. 가격은 광고주가 얼마나 많은 입찰가를 쓰는지와 광고가 얼마나 많이 클릭되는지에 따라 정해졌다.
- 구글이 사용자의 이메일 활동과 위치에서 얻는 메타 데이터로 사용자 에 대해 알게 되는 정보는 자신의 활동, 의도, 열망, 견해를 친구나 지 인과 공유하려는 사람들이 제공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미미하다. 소 셜미디어는 타깃 광고 기반의 비즈니스 모델을 한 차원 위로 올려놓
았다.
마크 저커버그는 처음부터도 페이스북이 성공하는 데는 사람 들이 페이스북 공간 안에서 다양한 사회적 친목 활동에 관여하게 하 는 "사회적 웹[망]"의 도구, 아니 사실은 그러한 사회적 웹의 제조자가 되는 능력이 핵심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규 모를 키우는 것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하지만 그 정보를 돈으로 바꾸는 것은 늘 쉽지 않았다. 모방할만한 구글의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이미 존재했는데도 그랬다. 페 이스북이 광고를 타기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시도한 처음 몇 차례의 데이터 수집 노력은 실패했다. 2007년에 페이스북은 페이 스북 사용자가 어느 웹사이트에서 구매를 하면 그 정보를 수집해 그 사용자의 페이스북 뉴스피드에 올리거나 그의 페이스북 친구에게 공 유되게 해주는 "비콘"이라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그러나 비콘은 사 용자의 프라이버시를 막대하게 침해한다고 여겨졌고, 곧 중단되었다. 페이스북은 디지털 광고에 필요한 방대한 데이터 수집을 사용자가 자 신의 정보를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관리할 수 있게 하는 방법과 결합해야 했다.
이것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 셰릴 샌드버그shery! Sandberg다. 샌드버그는 구글의 애드워즈 담당 임원 출신으로, 구글을 광고 머신으로 변모시킨 일등 공신이었고 2008년에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로 자 리를 옮겼다. 샌드버그는 그 두 가지를 결합할 방법을 알고 있었고 페 이스북이 이 방면에 잠재력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페이스북은 사용자들이 누구와 주로 어울리는지와 그들의 선호에 대한 정보를 활 용해 제품에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제품의 광고 기회를 창출할 수 있었다. 이미 2008년 11월에 샌드버그는 페이스북 의 성장 기반으로서 이 조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리가 여기에 서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신뢰의 힘과 사용자들의 진정한 프라이버시 관리를 여기에 불러와서 사람들이 온라인상에서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사용자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 가 된다면 자신에 대해 더 많이 드러낼 것이고 광고 수입을 위해 사용 할 수 있는 정보도 더 많아질 것이다.

- 컴퓨터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되기보다
사람들에게 적대적으로 사용되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사용되기보다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할 때다
우리에게는...
민중의 컴퓨터 회사가 필요하다
-"민중의 컴퓨터 회사People's Computer Company" 첫 뉴스레터,1972년 10월
- 세상에서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부분의 일은 그것이 행해지기 전에는 늘 불가능한 일이라고 선언된다. (루이스 브랜다이스 변호사, 조정 절차 결과, 뉴욕 의류 업계,1913년 10월 13일)
- 디지털 기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보완할 수 있다.
•현재의 일자리에서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인간의 역량을 강화해 주는 기계 지능의 도움으로 새로운 업 무를 창출할 수 있다.
•인간의 의사결정에 더 신뢰할 만하고 양질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 서로 다른 능력과 필요를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이는 플랫폼을 만들 수 있다.
- 혁신 전략의 다양성은 자동화가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사람이 수행하던 업무를 기계와 알고리즘으로 대체하는 기술은 산업 자체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 에도 지속될 것이다. 데이터 수집도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 것이 공유된 번영과 민주적 거버넌스 둘 다와 배치되는 경우는 책무 성을 지지 않는 기업과 정부의 손에 집중되어서 사람들의 역량과 권 한을 약화하는 데 사용되는 경우다. 혁신 포트폴리오에 균형이 깨어져 자동화와 감시에 과도하게 우선순위를 두면서 노동자들을 위한 기회 와 업무는 창출하지 못할 때가 문제인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방향을 다시 잡는 과정에 꼭 자동화를 막거나 데이터 수집을 금지하는 것이 필요하지는 않다. 필요한 것은, 인간의 역량을 보조하고 지원할 수 있 는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독려하는 것이다.
- 1980년대 말의 HIV/AIDS 환자들에게 미래는 지극히 암울해 보 였다.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이 그들을 치명적인 질병의 피해자가 아 니라 스스로 삶을 망가뜨린, 자기 자신의 가해자라고 여겼다. HIV/ AIDS 환자들은 강력한 조직 기반도 없었고 어떤 전국 단위의 정치인 도 그들을 대변해 주지 않았다. AIDS가 전 세계에서 이미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었는데도 치료제나 백신에 대한 연구개발은 매우 미미했다.
그런데 이후 10년 사이에 이 모든 것이 달라졌다. 먼저, 아무 잘 못이 없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역량을 크게 훼손하고 목숨까지 위협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통받고 있음을 보여주면 서 새로운 내러티브가 생겨났다. 이 과정은 극작가이자 작가이자 제작자인 래리 크레이머 Larry Kramer, 작가인 에드먼드 화이트Edmund White 등 소수의 사람들이 먼저 시작했고, 곧 이들의 운동에 저널리스트와 여타 미디어 종사자들이 동참했다. 1993년 영화 「필라델피아Philadelphia」는 미국에서 HIV에 감염된 성소수자의 삶과 그들이 처한 문제를 영화관 의 대형 스크린에서 보여준 초창기 작품으로, 관객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어서 비슷한 주제를 다룬 TV 드라마들도 나왔다. 내러티브가 달라지면서 게이 권리 활동가들과 HIV 활동가들이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는 HIV 치료제와 백신 에 대한 연구를 늘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정치인들도 주요 과학자 들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운동의 조직화는 결실을 맺었고 곧 정치인과 의료 정책 전문가들의 입장이 180도 바뀌었다. 수백만 달 러의 돈이 HIV 연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돈이 들어오고 사회적 압력이 높아지자 의료 연구의 방향이 바 뀌었고, 1990년대 말이면 AIDS 감염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새로운 약 이 여러 개 나와 있었다. 또한 줄기세포 치료법의 초기 형태, 면역제 치료법, 유전자 편집 같은 새로운 치료법도 나오기 시작했다. 2010년초 무렵이면 여러 가지 효과적인 약이 시중에 나와서 HIV 바이러스의 확산을 통제하고 감염자들이 더 정상적인 삶의 여건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몇몇 백신도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HIV/AIDS와 싸우는 데서도, 재생에너지 영역에서도, 도저히 불 가능해 보였던 것이 꽤 빠르게 이루어졌다. 일단 내러티브가 바뀌고 사람들이 조직화되자 사회적 압력과 금전적 인센티브가 테크놀로지 의 경로를 선회시켰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미래 경로도 그렇게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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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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