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0년 전 붓다도 말씀하셨다. 행복을 바깥에서 찾으면 반드 시 고통을 얻는다고 말이다. 수피 스승 나스루딘 역시 제자들에 게 편하다고 해서 바깥에서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마음에(그러 니까 올바른 장소에 불을 밝혀야 한다는 교훈을 전하려 했다. 물론 외부 활동은 인생의 큰 부분이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 이 우리의 유일한 전략이라면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우 리는 삶이라는 롤러코스터에 올라타 내려오지 못한다. 롤러코 스터가 잘 돌아가면 행복하지만 잘 돌지 못하면 불행하다. 그런 데 삶이란 어쩔 수 없이 무상하기에 불행해질 확률이 높다. 삶을 의식적으로 안에서 밖으로 창조하지 못하면 삶은 무의 식 중에 밖에서 안으로 일어난다. 붓다와 나스루딘, 예수를 비 롯한 인류 역사의 스승 모두가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권했다. 붓 다는 행복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했고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장 20~21절)”라고 말했다. 깨달음 을 얻은 모든 이가 같은 방향을, 안을 가리킨다.
- 이렇게 상상해볼 수 있다. 당신은 작은 컴퓨터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당신은 세상에 하나뿐인 특성과 용량을 갖고 태어난 유일한 컴퓨터이지만 겉보기엔 다른 컴퓨터와 크게 다르지 않 다. 향후 7년 동안 당신이라는 컴퓨터에 당신의 보호자가 운영 시스템을 장착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체로 무의식적인 삶을 살 기 때문에 자신들의 무의식적 패턴, 습관, 행동방식, 세계관을 그대로 당신에게 장착한다. 그전에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을 깔거나 자신의 하드를 최적화하자는 생각은 전혀 못 한다.
이 운영체계가 당신 인생을 떠받치는 기둥이 된다. 세월이 더 흐르면 사회의 가치관과 규범과 생각까지 추가된다. 당신이 어 떤 행동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일러주는 정신적 각인이 수천 가지나 새겨진다. 하버드대학교 에서 실시한 한 연구 결과를 보면, 18세 청소년이 살면서 들은 부정적인 암시는 평균 18만 종이라고 한다. 18만 종의 부정적 프로그램이 당신의 하드에 깔린 셈이다.
이제 어른이 된 당신은 이 책을 손에 들고서 생각이란 무엇인지를 자문한다. 대답은 무척 쉽다. 생각은 살아오는 동안 당신 의 마음에 장착된 수천 가지 프로그램의 결과물이다. 진짜 당신 생각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당신의 생각은 당신과 대부분 시간 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의 메아리이다. 그리고 당신이 성장한 사 회의 메아리이다. 당신을 따라다니는 온갖 소음의 메아리이다.
-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우리는 진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생각이 나일 수는 없다. 앞에서 소개한 몇 가지 훈련을 거치면 서, 당신은 이미 생각을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 이다. 관찰자는 관찰 대상일 수 없다. 맞다. 당신은 생각이 아니 다. 신경생물학적으로 보아도 생각은 두뇌활동의 아주 미미한 부분에 불과하다.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의 세계관을 굳게 고집하면서 남의 세계관을 거부하면 전쟁이 일어난다. 자신은 옳고 상대는 그르다고 확신하면 다툼이 발생한 다. 자신은 할 줄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있던 잠재력도 줄 어든다. 머릿속에 그려진 공포의 미래를 굳게 믿으면 불안과 근 심이 자라난다.
악순환의 쳇바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명상과 마음챙김이 가르치는 '의식'이다.
- 수많은 인상에서 의미를 끌어내어 인생의 여러 도전에 맞설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정신, 즉 이성이 맡는다. 문제를 해 결하는 이 원숭이 역시 당신이 제대로 다룰 줄만 알면 맡은 일 을 척척 해낸다. 사실 인류 역사에 기적을 불러온 장본인도 바 로 이 원숭이다. 피라미드와 타지마할을 짓고 우주를 탐험하고 이 시대가 한껏 누리는 온갖 기술을 개발한 것도 바로 이 두뇌 이니 말이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이 녀석을 다룰 합리적 사용 설명서를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는 데에 있다. 녀석이 맡은 일을 잘 처리할 것을 본능으로는 알지만, 녀석의 한계와 잔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녀석의 첫 번째 오작동은 시간개념이다. 문제 해결을 담당하는 이성 부위에는 시간개념이 없다. 우리가 온종일 고민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고 말하는 상황을 상상해보 자. 두뇌는 이 정보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할까? 정확한 결과도 모르면서,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당신은 고민한다. 운전 하면서도 집중을 못 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맛을 모른다. 두뇌의 일부가 계속해서 온갖 진단명을 떠올리기에 잠도 못 자고 밤새워 뒤척인다. 발가락 하나가 간지럽거나, 허리가 뜨끔하기만 해 도 다 중병의 증상인 것 같다. '다음 주에 의사한테 정확한 결과 를 듣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아. 이성아, 인제 그만 잠 좀 자 자.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의 문제 해결 부 위는 시간개념이 없기에 그렇게 말해봤자 통하지 않는다.
병원 사례가 좀 극단적이라면,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당 신의 정신은 지금 삶이 진행되는 그곳에 있지 않다. 당신은 얼 마나 자주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고민하는가? 프레젠테이션은 오후인데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초긴장 상태이다. 문제를 해결 하고(더 정확히 말하면 문제와 연관된 감정을 떨쳐버리고 싶지만, 두뇌 는 방법을 모른다.
두뇌의 두 번째 오작동은 구토를 모른다는 점이다. 과식하거 나 상한 음식을 먹으면 위장은 제동을 걸고 몸에 들어온 것을 밖으로 토해낸다. 두뇌는 그럴 줄 모른다. 당신의 두뇌는 온갖 문제와 다툼, 지난 경험과 미래 걱정으로 이미 터지기 직전까지 찼으면서도, 불안을 조장하여 관심을 끌려는 미디어들의 자극 적 정보를 계속해서 받아들인다.
당연히 두뇌는 만성 소화불량 상태이다. 그러니 여기에 이혼 이나 실직 같은 더 심각한 문제가 추가되면 완전히 과부하에 걸 린다. 두뇌는 쉬지 않고 고민하느라 재충전이 절실한 순간에도 도무지 당신을 재우지 않는다.
- 잠 못 드는 밤을 보낸 후엔 또 어떤 짓을 할까? 휴식을 취해 몸을 쉬게 하고 소화가 잘되는 음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해야 할 것을, 불쾌한 기분을 외면하겠다며 더 많은 자극과 문제를 머릿 속으로 밀어 넣는다. 두뇌도 신체와 같다. 이럴 때 최고의 해결 책은 휴식과 고요이다. 대표적인 방법이 명상이다. 명상은 두뇌 가 푹 쉬며 원기를 회복할 시간을 제공하고, 더불어 지금 이 순 간에 머무는 능력을 가르친다.
- 붓다는 그런 끈질긴 생각은 그냥 무시하라고 가르치셨다. 생각이 나타나면 잠깐 인지는 하되, 오래 붙들지 말아야 한다. 일 이건 대화건 지금 중요한 일에 초점을 맞춘다. 생각이 또 떠오 르거든 다시 잠시 인지하고 바로 무시한다.
이런 인지와 무시의 과정은 정신 훈련이기도 하다. 예전 같 았으면 정신이 온 힘을 다해 자기 생각을 관철했을 것이다. 당 신은 생각의 말을 믿고 행동하거나 기분이 안 좋아졌을 것이다. 당신이 이성을 왕좌에서 내쫓고 하인의 임무를 맡긴 지금조차 도 이성은 여전히 많은 것을 중요시한다. 해묵은 경험에 각인된 이런저런 생각을 당신에게 내민다. 하지만 당신의 의식은 이제 충분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결정할 수 있다. 이제는 같은 눈높 이의 싸움이 아니다. 아니 애당초 싸움이 아니다. 당신이 권력 을 주지 않는다면 하인은 아무런 힘이 없기에.
- 정서적 고통은 감정 자체가 아니라 감정을 대하는 방식 때문 에 생긴다는 사실을 나는 오랫동안 몰랐다. 당신도 나처럼 언젠 가는 힘든 감정을 다 쫓아낼 수 있으리라고 망상한다면 앞으로 도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감정은 인생의 일부이다. 사 람됨의 일부이다. 때로는 징글징글하게 불쾌하다. 나도 안다. 하지만 지금 불쾌하게 느낀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 장은 없다. 건강한 방식으로 힘든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의 의미이다.
잊지 말아야 할 감정의 진실
*불안에서 애써 도망칠 필요 없다. 불안해도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다.
*분노는 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 그 에너지로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
*슬픔을 억압할 필요가 없다. 슬픔도 인생의 선물이다.
*탐욕과 자만, 질투에 쫓기지 않는 자신을 상상해보라.
*죄책감은 치유가 임박했다는 신호이다.
*고독은 진정한 당신의 본성을 상기시킨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감정은 모두 당신을 위해 존재한다.
- 불안이나 고독 같은 힘든 감정은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불쾌해야 마땅하다. 수천 년 전 우리는 그 감정들 덕분에 살아남았다. 불안은 우리가 맹수와 맞서 싸우거나 빠르게 도망 치도록 몸을 일으켜 세운다. 외로움이 불쾌한 이유는 배척이 곧 죽음을 의미하던 시절, 집단에 순응하는지가 생존과 직결되었 기 때문이다.
우리가 힘들다고 부르는 대부분의 감정은 신체적으로도 불쾌 하다. 맞다. 불쾌하다. 하지만 안전하다. 낯설지만 명백한, 꼭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다. 실제로 부끄러워서 죽은 사람을 본 적 있는가? 물론 불안이나 고독이 해로운 결과를 낳을 수는 있다. 하지만 원인은 감정 그 자체가 아니다. 당신이 불쾌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작 몸과 마음을 해치는 것은 감정을 허용하지 않는 당신의 마음이다.
감정은 소화와 혈액순환처럼 몸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과 정이다. 감정은 안전하다. 때로는 불쾌하다. 이 불쾌함을 우리 는 피하려 애쓴다. 문제는 요즘 세상에는 생명을 위협할 맹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집단에서 배척당하는 일이 좋지 는 않겠지만, 사회구조상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온갖 위험을 모조리 피하려고 애쓴다면 두뇌는 이런 불리한 패턴에 서 벗어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절대 안 하면 발표가 곧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지 못하는 것과 같다.

- 정서적 감각의 지속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짧다. 정확히 말하면 감정의 수명은 90초에서 120초 사이이다. 정말이다! 당신의 감정 두뇌가 화학 칵테일을 혈관으로 쏘아 보내라고 명령을 내 리는 순간부터 그 물질이 자연적으로 다시 분해되는 순간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2분이다. 한 시간도 아니고 하루도 아니고 한 주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한 번 시작된 감정은 잘 그치지 않는다 고 믿는 이유는, 감정을 대하는 방식이 건강하지 못한 탓이다. 강렬해진 감정이 의식으로 밀려오면 당신은 본능적으로 그동안 배운 건강하지 못한 전략을 집어든다. 감정을 억압하고 회피하 고 투사하고 고민하면서 감정을 붙든다. 감정을 계속 살려두면 서 먹이까지 제공한다. 그러니 바람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 는 것이다.
감정에 저항하지 않으면 감정은 파도처럼 당신의 몸을 지나 고 자연스럽게 떠난다. 신경계는 조절 기능을 회복하고, 감정 두뇌는 예상만큼 심하지 않은 것을 보니 다음에는 이 정도로 격 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격한 감정에 휩싸여보았을 것이다. 심한 불안을 느끼다 못해 공황에 빠진 적이 있을 수도, 깊은 슬 픔이나 실존적 고독에서 허우적댄 적도 있을 것이다. 감정이 얼 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다들 한 번쯤은 경험한다.
- 그런데 우리 몸은 몸의 통증과 마음의 고통을 구분하지 못한 다. 뇌에서 같은 부위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고통은 불쾌하 다. 당연히 우리 뇌는 어떤 고통이든 피하려고 애쓴다. 이런 진 화의 이점이 현대사회에서는 도리어 해가 된다. 앞서 말했듯 우 리 조상이 고독이라는 감정을 최대한 피한 것은 최선의 전략이 었다. 공동체의 상실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감정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고독도 깊은 내 면에서 사랑으로 바뀐다. 모든 감정은 자신과 세상을 더 심도 있게 이해하는 문이 되어준다. 그 문을 지나갈지, 거기서 그치 지 않고 더 나아갈지 결정은 당신의 몫이다. 모두 당신에게 달 렸다.
- 정직하게 감정을 경험하고, 그 선물을 받을지 말지는 당신 의 선택이다. 그뿐 아니라 감정으로 괴로워할지 말지도 당신의 선택이다. 고통은 앞으로도 늘 있을 것이다. 고통은 생존 보장 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다하기 위해 만들어진 진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당신이 고통으로 괴로워할지 말지는 전혀 다른 요인에 달렸다. 신젠 영Shinzen Young은 2016년 《깨달음의 과학The Science of Enlightment》에서 멋진 방정식을 선보였다.
괴로움= 고통 X 저항
괴로워할지 말지는 고통의 강도가 아니라 고통을 밀어내는 저항에 달렸다. 고통에 맞서 싸우거나 온 힘을 다해 억압하려 하면 괴로움이 따른다. 저항을 그치고 고통에 자신을 맡기면 그 저 재미난 감각만 남는다.

- 명상은 근본적으로 꾸준한 놓아버림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 이 통제력을 잃을까 봐 겁을 낸다. 감정을 풀어주면 '사회에서 용인할 수준을 넘어설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화가 나고 눈물이 솟구치는 건 지극히 정상이고 내버려두면 그친다. 그런 데도 많은 사람이 남 앞에서 그런 감정을 드러내기를 겁낼 뿐 아니라 감정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달을까 봐 겁을 낸 다. 혹은 감정 탓에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까 봐, 맡은 일을 해 내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심지어 감정을 다 끌어내면 정신적 인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다.
한 마디로 감정을 허용할 경우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가 풀려나서, 그대로 벼랑으로 몰릴까 봐 불안해한다. 이 자리에서 다 시 한번 되새기자. 감정은 안전하다! 무의식은 당신이 지금 처 리할 수 있을 만큼만 풀어준다. 그러니 시작하자! 조금씩 조금 씩, 이런저런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천천히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시 믿어보자. 자신을 믿어보자. 신뢰가 자라면 삶을 사랑하는 마음도 자라나며, 삶과 자신을 더 깊게 경험하고픈 의욕과 호기 심도 자라난다.
- 감정을 만날 때는 일체의 생각을 무시하라. 감정이 떠오르면 우리는 자동으로 이성에게 달려간다. 어차피 의식 전체가 온종일 생각에 골몰하므로, 불쾌한 기분이 들자마자 곧바로 달려가 는 장소도 그곳이다.
생각은 감정과 신체감각을 불러오지만 반대로 감정 역시 생 각의 기초이다. 기쁠 때는 불안할 때와는 다른 생각을 한다. 슬 플 때는 고마울 때와는 다른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우리는 힘 든 순간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를 찾거나 자책하고, 왜 지금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아보겠다고 골머리를 싸맨다.
- 역할을 자신과 너무 동일시하다 보면 때가 되어도 역할을 내 려놓지 못한다. 수많은 퇴직한 남성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 하는 이유이다. '쓸모 있는 인간'의 역할을 더는 할 수가 없고, 자유로운(그들이 보기에는 쓸모없는) 은퇴자의 역할을 받아들이기 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기에 가슴에 큰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공 허하고 괴롭다. 아이가 충분히 자랐는데도 어머니는 간섭을 그 치지 않는다. 경찰이 퇴근한 후에도 정의구현에 힘쓴다. 기술 자가 세상 모든 고장 난 전기제품을 자신이 다 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고단할 것 같지 않은가? 당사자뿐 아니라 옆 사람도 힘 들다. 당신의 직업이나 신분은 한 가지 역할에 불과할 뿐, 실제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 아들에게 나는 아빠지만 동료 들에게는 아빠 노릇이 먹힐 리 없다. 집에서도 명상 선생의 역할을 못 버리고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퇴근한 아내에게 명상과 마음챙김을 설교한다면 아내가 반길 리 있겠는가?
- 역할은 당신이 하는 일이지 당신이 아니다. 역할과 자신을 동 일시하면 언젠가는 고통을 겪는다. 역할을 맡았을 때에는 배우 처럼 성심을 다하다가 역할이 끝나면 미련 없이 벗어던지고 다른 역할로 들어가면 된다. 아니면 모든 역할을 다 버리고 명상을 하거나.
- 모순적이지만 '나'가 약할수록 더 행복하고 기쁘다. 삶과 하나 가 되면 행복하고 평화롭고 활기차다. 역설적이게도 '나'의 허상 을 꿰뚫어 보고 삶에 자신을 던질 때 당신은 늘 바라던 그곳에 도달한다. 꼭 아름다운 해변이 아니어도 좋다. 더러운 화장실이 라 해도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붓다는 우리가 느끼는 '나'를 아타나, 즉 무아라 불렀다. 처음 그 말을 들었 을 때 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생각했다. '나'를 찾겠다고 힘든 명상의 여정에 들었는데 '나'가 없다니! 아마 당신도 낯설 것이다. 1초만 자신을 의식해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내가 존재하지.” 그런데 무아라니? '나'를 칭할 때 무엇을 떠올리는지 자세히 관찰해보면 대부분 이 내적 듣기, 보기, 느끼기의 결합이다. 하지만 인지하는 모든 것이 자신일 리는 없다. 어떤 것을 관찰한다면 우리는 관찰자이 지 관찰 대상이 아니다. 이 말이 핵심이다. 당신이 관찰하는 모 든 것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가 없다는 생각은 난해하다. 하지만 그 경험은 숨 막힐 듯 황홀하다. 당신은 자기 몸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보고 느끼는 대상은 보고 느끼는 당사자일 수 없다. 당신은 피곤하거나 건강할 수 있고, 에너지가 넘치거나 우울할 수 있다. 그렇다 고 당신이 피곤이나 건강, 에너지나 우울은 아니다. 당신은 불 안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감정을 경험할 뿐 감정 자체는 아니다. 당신은 몸이 무겁거나 가볍다고 느끼는 등 몸을 인지하지만, 몸은 아니다. 당신은 생각을 인지할 수 있지만, 생 각은 아니다. 그저 생각을 인지할 뿐이다.
모든 것이 다 떨어져 나가면 무엇이 남을까?
모든 것을 다 제거하면 무엇이 남을까?

- 지금까지 읽은 내용을 잘 새겨보자. 당신이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아니다. 다시 말해 당신이 지금껏 자신에 대해 했던 모든 생각은 치워버릴 수 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자유인가? 우리는 수백만 가지 자괴감 과 불안, 걱정 근심과 생각,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당신 은 지금 그 모든 생각을 한꺼번에 내려놓을 수 있다. 생각이 내 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당신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몸도 인지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자. 당신의 몸은 인식의 대상이지 인식하는 당사자가 아니다. 이런 깨달음 역시 엄청난 해방감을 선사한다.

- 자신에게 다정하기 
불교에서는 정신을 어린 짐승에 비유한다. 당신의 머릿속에 어린 강아지가 뛰어다닌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 녀석을 곁에 붙들어 두는 것이다. 강아 지가 수천 번 달아나도 당신은 수천 번 녀석을 다시 끌고 와야 한다. 녀석이 당신 곁에 가만히 있을 때까지.
어떻게 하느냐고? 다정하게 데리고 오면 된다. 화내지 말고 짜증 내지도 말아야 한다. 되돌아오면 사랑이 기다린다는 사실 을 알면 강아지는 제 발로 돌아온다. 돌아와봤자 고함과 손찌검 만 기다린다면 강아지가 무엇 하러 돌아오겠는가?
당신의 정신도 똑같다. 정신이 딴 곳에 팔릴 때마다 자책한다 면 정신이 뭘 배우겠는가? 계속해서 무의식적으로 살아가기를 택할 것이다. 자신이 또다시 중요하지 않은 생각을 뒤쫓았다는 사실을 의식하자마자 자책이라는 고통이 따라올 테니 말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다정하자! 명상의 처음은 자기애 훈련이다.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데르센 잔혹한 동화속 문장의 기억  (1) 2024.04.20
미라클 씽킹  (1) 2024.04.16
사람들이 죽기전에 후회하는 33가지  (1) 2024.04.14
리더의 인문학  (1) 2024.04.05
니체와 걷다  (0) 2024.04.04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