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멍청한 인간은 한 치의 의심도 없다. 많이 아는 사람은 의심한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세르주 시코티)

- 무지하다고 멍청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지는 지식을 흡수하는 강력한 원동력이다. 단, 우리가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정보처리 오류 혹은 사고의 오류를 대부분 눈치 채지 못한다. 이런 오류는 밝혀진다고 해도 계속 작동한다. 그러나 자신이 충분히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멍청 한 인간이다. 해리 프랑크푸르트 Harry Frankfurt가 《헛소리에 대하여 On Bullshit》에서 상세히 설명한 것처럼, 멍청함은 거짓말보다 끔찍하다.
멍청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진실 따위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 이다.
멍청함과 맞서려면 멍청함을 비난하고, 멍청한 것을 향해 멍청 하다고 해야 한다. 자신에 대해서도 멍청하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함이 창피하다 고 고백해야 스스로 말과 행동을 절제하게 된다. 상대방이 멍청한 말과 행동을 하면 멍청하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멍청하다고 할 때는 반드시 농담조로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말이 경고의 역할을 하고, 우리의 결함을 알아보게 해주며, 행동을 조심하게 해줄 테니까.

- 민주주의에서 합리적인 인간이라는 신화가 여전히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완벽한 합리주의가 없어도 민주주의는 작동합니다. 민주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 는 것을 위해 찬성표를 던지는 사람들만 있으면 충분하니까요.
그러나 추상적이고 위험 확률이 애매한 분야에서는 민주주의 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 문제가 대표적이지요. 시스템 1은 추상적인 위협 앞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위협이 구체적 이지 않으면 감정을 일으킬 수 없고, 감정이 없으면 행동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현재는 잘 와 닿지 않는 위협도 심각하게 인식하려 면 시스템 2가 작동해야 합니다. 따라서 시스템 2를 자극하는 적절 한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 진화론적으로 봤을 때 멍청함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렇지 않다면 멍청함이라는 낙인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어야 한다! 멍청한 인간은 토끼보다 빨리 번식하고 늘어난다. 일반적으로 그렇다. 그렇다면 약한 인간이 자연선택설에 따라 도태되지 않으려면 멍청함이 필요한 것일까? 여기서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멍청한 인간이 위험하기는 해도 사회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래서 사회가 멍청한 인간에 관대한 것이다.
우리의 두뇌는 사회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누군가를 멍청한 인 간으로 취급하는 순간, 그 사람을 멍청한 인간이라는 틀에 가두게 된다. 그러나 멍청이라는 낙인은 바로 찍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멍청한 인간을 오랜 시간에 걸쳐 알아본다. 그래서 낙인을 찍어도 죄책감이 들기는커녕 멍청한 인간에게 멍청하다고 지적했다는 사실 에 뿌듯하다. 그리고 멍청한 인간에 대해 우월의식을 느낀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이처럼 지지해주는 사람들 덕에 멍청한 인간을 알아본 여러분은 으쓱해진다. 이때는 두뇌도 괜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분위기를 따라간다. 여러분과 동조자들은 멍청이로 낙인찍힌 사람을 가리키며 시시덕거린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은 멍청한 인간을 알아본 우월한 리더로 집단 내에서 자리를 잡는다. 

- 당신이 멍청하든 멍청하지 않든, 언제나 누군가에게는 멍청이일 것이다. (피에르 페레)

- "민주주의 사회마다 교육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만 정작 지식에서 중요한 비판 정신 교육은 빠져 있는 것 같다. 아무리 교육적인 노력을 기울여도 비판 정신이 길러지지 않으면 쉽게 맹신에 빠질 수 있다. 의심을 하면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의심이 지나치면 주체적인 정신이 키워지기보다는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제럴드 브로네르 Gérald Bronner, 맹신자들의 민주주의 La Démocratie des crédules,

- 날카로운 비판이 돋보이는 책 《육식을 즐기면서 지적인 척하는 사기꾼L'Imposture intellectuelle des carnivores》에서 저자 토마 르플티에 Thomas Lepeltier는 인간의 모순 앞에서 당황하는 척하며 순진하게 구는 자신의 심리를 밝힌다. “새끼 고양이들을 믹서에 갈거나 개를 마취 없이 거세하거나 말을 햇빛도 들지 않는 작은 우리에 평생 가둬놓는 것을 즐긴다면 동물학대죄로 2년 형을 구형받는다. 그런데 왜 정부는 수평아리들이 분쇄기에 갈리고 암탉들이 좁은 닭장에 평생 갇혀 있으며 수백만 마리의 토끼, 어린 양, 돼지가 칼로 목을 베여 죽는 데도 그대로 보고만 있을까?" 르플티에는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에 당황한다. 동물들도 감정이 있는 생명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 “동물보호법에 따라 동물이 사용된다"라는 프랑스 민 법 515조 15항의 내용을 소개한다. 예를 들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토끼들을 공장식으로 사육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 용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모순 뒤에는 또 다른 차원의 합리성이 숨어 있다. 실제로 동물은 도구로 사용되느냐 인간과 함께 사느냐에 따라 가격 이 매겨진다. 동물의 가격은 인간이 해당 동물에 대해 느끼는 이미 지에 따라 매겨진다. 동물보호 운동가들 역시 모든 동물을 똑같이 대하지 않는다. 어느 수의사가 관찰한 내용에 따르면, 동물 실험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은 쥐보다는 영장류나 개를 실험하는 연구실과 연구원을 더욱 비난한다. 동물보호 운동이 초점을 맞춰야 하는 활 동에 '모피 의류 사용 금지'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약 3분의 2가 가죽옷이나 가죽신발을 착용하고 있다. 동물 의 가치를 인간의 이익에 따라 매기는 인간중심적 사고를 바탕으로 우리는 동물의 서열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 인간이 일상적으로 보여주는 무지함 중에 의도적인 무지함도 있다. 고기를 먹지만 고기로 소비되는 동물들의 생전 모습을 떠올 리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동물들의 이미지를 바꿔버리는 손쉬 운 방법을 선택한다. 이를 가리켜 인지부조화 이론이라고 한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지능의 높낮이에 따라 먹어도 되 는 동물들을 분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암소나 돼지는 고양이, 사 자, 영양보다는 지능이 낮기 때문에 '식육'으로 분리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이 두 가지 정보 중 하나를 듣는다. 하 나는 양이 목초지를 바꾸어 이동할 수 있다는 정보, 또 하나는 양고기 메뉴가 나올 것이라는 정보다. 그 다음에 참가자들은 양의 지능을 예측했는데, 양고기가 메뉴로 나올 것이라는 정보를 들은 참가 자들이 양의 지능을 더 낮게 평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세 번째 연구는 인간이란 미뢰로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드 러낸다. 참가자들은 뉴기니에서 마주치는 포유류가 베네트 나무에 사는 캥거루라는 설명을 간단하게 들었다. 이 외에도 참가자들은 캥거루에 대한 여러 정보를 들었다. 예를 들어 뉴기니 주민들이 캥 거루 고기를 먹는다는 정보다. 반대로 캥거루 고기에 대한 정보를 전혀 듣지 않은 참가자들도 있었다. 이어서 참가자들에게 캥거루가 다치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캥거루는 윤리 기준에 따라 대해야 하는지 생각한 대로 대답해달라고 했다. 그 결과 캥거루 고기도 먹 을 수 있다는 정보를 들은 참가자들은 캥거루를 연민 어린 시선으로 보지 않았고, 반대로 캥거루 고기에 대해 듣지 못한 참가자들은 캥거루를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인간은 육류 소비를 정당한 것으로 포장하기 위해 생각을 바꿀 수 있다(“식물은 동물을 위해서, 동물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아리스토텔레스). 동물에 대한 동정심을 차단하기도 한다("동물들에게 죽음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의 고통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성 오귀스탱Saint Augustin). 동물이 동의한 것처럼 미화하기도 한다(인간이 잘 돌봐준 대신 동물은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동물의 고통을 부정하기도 한다 (동물은 무의식 상태보다는 의식 있는 상태에서 목을 베어야 고통을 덜 느낀다). 동물의 희생은 더 높은 목표를 위해서라고 주장하거나(동물은 인간의 식 량, 혹은 암환자 어린이를 위한 의학 연구를 위해 존재한다), 인간의 생존을 위 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인간은 채식만 해서는 살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기도 하고(당근도 비명을 지를 수 있다), 채식주의를 나쁘게 묘 사하기도 한다(채식주의를 인간 혐오 행동으로 의심하거나 나치즘과 연결시킨다). 이외에도 많다.

- "멍청한 인간들이 무슨 말을 하냐고? 그들은 스스 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 다. 멍청한 인간의 말은 의미도 없고 부정확하다. 멍 청한 인간의 말은 수다에 가깝다. 멍청한 인간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멍청한 인간은 마치 아슬아슬 하게 밧줄을 타는 술 취한 곡예사처럼 진부한 말에 매달린다. 멍청이는 이미 만들어진 문장을 난간처럼 꽉 잡으며 의지한다." 조르주 피카르, 《멍청함에 관하여>

- 독자층의 관심을 끌기 위해 미디어가 사용하는 미끼는 지금이나 50년 전 혹은 100년 전과 똑같다. 신문을 팔거나 기사의 클릭 수 를 늘리기 위해 미디어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야 광고 주나 사이트 인수자의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런데 홀리데이에 따 르면 생각보다 그럴 방법은 쉽고 아직까지 변하지 않았다. 진짜 정 보지만 독자들을 낚기 위한 다음의 제목들을 보고 판단해보자.
[과거의 신문 기사 제목들 1898년에서 1903년 사이]
15분 만에 선포될 전쟁
애송이, 도박가, 불량배, 과한 화장을 한 여성들 집단
집단 술주정, 끝없는 싸움, 악덕의 카니발
권총 한 발로 자살 시도한 노인: 귀를 팔지 못하다
부엉이 때문에 병원에서 공포에 질려 사망한 여성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죽이려고 달려든 불독
한밤중에 세입자들을 공포에 떨게 한 고양이
[요즘 온라인 뉴스 제목들]
마약과 비혼을 주제로 나체쇼를 벌인 레이디 가가 Lady Gaga
휴 헤프너 Hugh Hefner: "더러운 맨션에 사는 성노예를 폭행한적은 없다."
방귀를 뀌거나 아기 고양이들과 장난치는 아기들의 베스트영상9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가 매독에 걸렸다는 소문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영상: 동굴 안에서 첼시 핸들러Chelsea Handler에게 옷을 벗으라고한 퍼프 대디 Puff Daddy
피자 조각으로 어머니의 따귀를 때려 목숨을 구한 딸
상원의원 사무실에서 펭귄 똥이 발견되다

- 우선 우리는 멍청함에 지나치게 자비를 베푸는 것 같다. 누군가 아무 말이나 막 하면 우리는 먼저 그 말에 의미를 찾으려 하고, 그 상황에서는 이 말이 어떻게 타당한지 생각해보는 등 필요한 해 석을 하려고 한다. 멍청한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처럼 대부분 멍청 이가 한 말을 꼼꼼히 분석하느라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멍청이는 주변의 문화를 이용한다. 명확하고 옳은 말을 하는 것보다 뻔뻔하고 자신감 있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높이 평가되는 문화 환경이라면 멍청한 말을 해도 그대로 넘어간다. 심하면 멍청한 말을 하는 사람이 더 늘어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는 분석의 결론을 이렇게 내렸다. 진짜라고 믿어 달라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야말로 멍청한 짓이다. 감정에 호소하 는 것, 열정을 갖고 자기표현을 하는 것,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 로 말하는 것,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하는 것, 당당하게 말하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현대사회에서 정확함과 신중함보다 높이 평가되 는 가치다.
팩트보다는 감성이 우선인 시대다. 진짜라고 믿어달라며 감성에 호소하며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이에 대해 '자비를 베풀며 들어 주는 사람들이 합심해, 엄청난 멍청이들도 공개적으로 쉽게 발언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 분석이 옳다면 옥스퍼드 사전에 나 온 '탈진실Post-truth'이 왜 도래했는지 알 것 같다. '객관적인 사실보 다 감성적인 호소와 개인의 믿음이 여론 형성에 더 영향을 끼친다' 는 의미의 '탈진실'은 2016년에 '올해의 단어'로 꼽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든 자신의 말만 옳고 상대방의 의견은 틀 렸다 생각한다. 누구든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려 하고 상대방의 믿 음은 진실이 아니라며 존중하지 않는다. 아비규환 같은 토론 분위 기 속에서 각자 자기 말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틀렸으며 자기 의 견만 옳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같은 진영에서도 각자 자신의 결심과 윤리 가치만이 맞는다고 주장한다.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자연히 진실과 사실은 무시당하고 의심까지 받는다.
공정한 관찰자가 이 상황을 보면 정말로 멍청하다고 생각할 것 이다. 아무렇게나 하는 말, 왜곡된 사실, 가짜 뉴스, 음모론 등은 그 저 멍청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 로제는 멍청함을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멍청함은 합리성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반대로 논리를 과도하게 내세우는 상태라고 결론을 지었다. 멍청함이란 '돈은 돈', '어쨌든 종교는 종교', '다른 사람이 나보다 멍청하지'처럼 단정적으로 하는 생각이다. 멍청함을 샅샅이 해부해보면 특이한 원칙이 성립한다. 'AA'. 이미 이야기한 것과 생각한 것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밀고 나가는 것이다.
멍청한 인간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생각 한다. 멍청한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말과 생각만이 중요하다. 멍청 한 인간은 자신이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 거나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멍청한 인간은 자신과 관계된 말,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만을 이해한다. 멍청한 인간은 자신의 말과 생각에 반박하는 사람을 적이라고 생각하며 비판을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단정적으로 생각하는 멍청이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자기만족 이 중요하며 매우 주관적인 입장을 견지해 틀에 박힌 생각이나 편 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멍청한 인간에게 이성은 박제된 것이나 다름없다. 멍청한 인간은 'AA'라고 단정적으로 확신하는데, 여기 에는 논리적인 요점도 없다. 그저 생각 없이 "아무리 그래도 유대인은 유대인이지"라고 내뱉을 뿐 이다.
멍청한 인간은 이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자기중심적이기에 오직 자신의 증언, 경험과 느낌만 중요시한다. 멍청한 인간은 감성에 호소하고 주관적인 판단을 주로 하며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상태에 만족한다.

- 멍청한 인간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착 각일 뿐이다. 멍청한 인간은 아무리 증거가 나와도 자신이 확신하 는 것은 계속 밀고 나가며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멍청한 인간 은 필요한 지식이 있어도 배울 생각 없이 그저 확증 편향에 빠져 살 뿐이다.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것을 무시하거나 교묘하게 재해석 하며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는 것 말이다. 멍청 한 인간은 웬만해서는 생각과 환경을 바꾸지 않는다. 멍청함과 적 게으름, 자기만족, 자기도취는 함께 나타나며 직감의 역할이 커 진다. '나의 생각과 반응은 무조건 옳아 멍청한 인간의 생각이다. 그러나 멍청한 인간도 제대로 우기지 못하거나 뻔뻔하게 자기 생각을 밀고 나가지 못하면 갑자기 자신감을 잃는다. 이때 멍청한 인간은 진실에 신경 쓰고 정확함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말이 아니라 사실과 논리만 내세우는 사람은 쉽게 주변 사람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는 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포퓰리즘이 통한다. 거짓말을 하는 후보도 우리와 공감하면 지지하 거나 뽑는 것이다. 멍청이는 멍청이를 알아본다. 그리고 이것이 널 리 퍼져나간다.
멍청함은 머리가 얼마나 똑똑하냐와 별 관계가 없다. 전반적 으로 교육 수준은 낮아지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점점 집단적으로 멍청해지는 이유다. 오히려 이제는 좋은 머리가 멍청한 시스템을 받쳐주는 데 이용된다. 특히 자기중심적인 시각이 강해지면서 멍청 한 시스템이 작동한다. 자기중심적인 시각은 지혜가 아니라 직감을 중시한다. 내가 믿는 것은 무조건 진실이라고 본능적으로 확신하며 믿는다는 의미다.

- 멍청한 인간은 자아도취와 자기맹신에 빠져 있다. 이 때문에 멍청한 인간들이 쉽게 늘어난다. 이들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치 며 신중함과 정확성을 중시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들은 목소리를 높여 확신에 찬 목소리로 감정에 호소하며 이야기해야 주목받는다 고 믿는다.
그런데 멍청한 인간이라고 다 똑같지는 않다. 이 분야도 경쟁 이 치열하다. 멍청이라도 다른 멍청이들과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당혹스러운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바로 멍청한 인간이 지적인 사람으로 위장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멍청한 인간은 자신감이 지나치다 못해 자신이 하는 멍청한 짓을 지혜, 통찰력, 깊은 생각의 결실이라고 소개하며 진지한 척을 한다.
이를 위해 멍청한 인간이 생각해낸 것이 '그럴듯한 논리'다. 어 떤 결론을 내리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자기방어 논리다. "멍청한 인간은 결론을 내고 싶어 한다." 플로베르가 했던 말이다. 플로베르의 희극 《부바르와 페퀴셰Bouvard et Pecuchet》에 등장하는 부바르와 페퀴 셰도 멍청한 인간은 그럴듯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보았다. 특이하게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심지어 자신을 천재이자 철학과 신경과학의 대가로 생각하는 멍청이도 있다.

- 무늬만 과학인 가짜 학문이 그럴듯한 옷을 입고 과학 행세를하기도 한다. 가짜 뉴스는 되레 공식 언론을 비판하며 자신들이 믿 을 만하고 검증된 뉴스인 척한다. 음모론은 진실을 밝히려는 진지 한 조사로 둔갑하지만 실제로는 진실 탐구에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멍청함도 이성, 지식, 진실 같은 거짓 모습으로 둔갑한다."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모방술이 필요하다. 즉 멍청한 인간이 만 든 논리가 진정한 철학으로 보여야 한다. 그리고 멍청한 인간은 스 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며 내세울 수 있다. 멍 청한 인간이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혹은 생각한 것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는 독설가가 되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식인이 되기도 한다. 최악으로 이 모든 모습이 한꺼번 에 나타나기도 한다. 거만함과 속물주의가 멍청함의 실체다.

- 멍청함은 비겁한 모방으로 살아간다.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놓은 미덕, 인간의 이성에 대한 기대를 멋대로 사용하는 것이 멍청함이다. 멍청함은 가짜 합리성으로 무장한다. 로베르트 무질이 이야 기한 것처럼 멍청함이란 지능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다. 목적 때문에 지성을 포기하는 상태, 감성과 이성이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다. 따라서 멍청함과 맞서려면 어느 정도 지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할 말이 없으면 그럴듯한 말을 지어낸다. 이런 말들이 사회에서 통할 때 탈진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 메타 규칙은 본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갈 때가 많아서 흥미롭다. 예를 들어 우리는 본능적으로 지휘관 혹은 조종사를 믿는다. 조종사는 기내의 유일한 지배자다. "만일 비행기를 탔는데 위험한 상 황을 맞닥뜨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마도 우리는 즉각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조종실에서 하라는 대로 무조 건 해야죠!" 아니, 틀렸다! 지나치게 권위에 순종하면 오히려 위험 할 수 있다.
대한항공이 좋은 예다. 1990년대 대한항공에서는 연속된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조사 결과 조종실 내의 지나친 권위의식이 사고의 원인이었다. 조종사는 부하 직원들을 무시하며 군림했다. 부조종자도, 정비사도 조종사의 실수를 감히 지적하며 고칠 수 없었다.
그런데 2000년대 초에 새로 부임한 대한항공의 대표는 1990년 대 일어났던 사고에서 교훈을 얻어 한국식 전통과 문화를 완전히 깨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소통이 권위보다 우선시되었고 승진은 연공서열이 아니라 능력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모두 실수 방지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실수를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원칙이 도 입된다. 그 결과 대한항공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항공사 반 열에 올랐다.
실수를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원칙은 언뜻 일반적인 의견과 반대되기도 한다. 보통 사고가 일어나면 '누구 책임이야?' 하면서 책임 추궁을 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의 항공을 관장하는 항공행정연맹도 대한항공과 마찬가지로 승무원들에게 실수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익명으로 세세하게 보고 하도록 하고 있다.
여러 의료 시스템도 같은 원칙을 도입했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실수를 처벌하지 않는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이 적용되면서 실수를 쉽게 잡아내 재발을 방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은 어른은 멍청한 인간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유용한 정보가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네 살짜리 어린이처럼 행동한다고 비판하는 <뉴욕 타임스>의 기사를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유는 진짜 네 살짜리 어 린이들에게는 모욕입니다!
오히려 어린이들은 모든 가능성과 새로움을 받아들일 정도로 매우 개방적입니다. 그러나 커가면서 시각이 좁아지고 세계관도 막 히게 되지요. 불교 전통을 생각해보세요. 불교 전통은 인간이 얼마 나 자신의 생각, 순간적인 욕망, 자신의 고집에 빠져 바깥세상을 포 용하지 못하는지 지적합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필요해, 나는 저것이 갖고 싶어.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당장 손에 넣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지?" 정확히 어른들이 이 이유로 아이들을 비판했지요!
그런데 정작 어른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멍청한 인간은 자아도취가 심하고 자기목표에만 매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반대입니다. 아이들은 멍청함을 치유하는 약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시험에 관한 악몽을 꾼 의대생들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자. 그러나 실제로 이들의 시험 점수를 봤을 때 악몽은 오히려 반대 결과를 낳는 것 같다. 시험 꿈을 꾼 학생일수록 시험을 잘 봤다!
이혼 소송 중인 여성들에 관한 예전 연구 결과도 비슷하다. 이 혼에 관한 꿈을 많이 꾼 여성일수록 새로운 생활에 잘 적응했고 우 울증도 적었다. 어느 이론에 따르면 위협적인 상황이나 걱정스러운 상황이 나타나는 꿈은 현실에서의 삶을 잘 헤쳐 나갈 방어막 역할을 한다. 앞으로 걸릴지 모르는 바이러스를 예방해주는 항체를 만들어내는 백신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꿈은 가상현실이자 행동을 준비할 수 있게 돕는 방어막이다. 뿐만 아니라 꿈을 통해 감정을 잘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꿈속에서 는 감정적인 찌꺼기가 걷히고 중요한 정보만 남은 기억이 재현되 기 때문이다(감정에서 해방된 기억). 캐나다의 정신의학자 토어 닐슨Tore Nielsen은 꿈을 꾸면 불안한 경험이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경험에 서 부정적인 감정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꿈속에서는 경험이 중 립적으로 재현되기 때문이다.
- 이 과정에서 작동하는 두뇌의 부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두뇌의 깊은 곳에 위치하는 편도체이고, 또 하나는 두뇌의 앞부분에 위 치한 중간 전뇌 피질이다. 불안한 내용이 꿈에 나오면 두려움이라 는 감정이 생긴다. 이때 중간 전뇌 피질로 감정적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데(그 불안한 이야기가 다른 상황, 즉 좀 더 중립적인 상황에서 일어났다면 지 금처럼 불안하지는 않다), 그 과정에서 두려움은 억제된다.
이 같은 모델에 따르면 감정이 지나치게 격하거나 심리적으로 약해지면 잠을 자다가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깬다. 악몽이 이런 경 우다. 따라서 잠을 자는 동안 감정 치유 과정이 실패하면 악몽을 꾼다고 할 수 있다.

- 휴스턴대학교의 브르네 브라운Brené Brown은 취약함의 힘에 관한 연구에서 불편함, 죄책감, 수치심 사이의 차이점을 다루었다. 이 세 가지는 멍청한 실수를 했을 때 우리가 전형적으로 느끼는 감정 이다.
불편함은 쉽게 해소될 때가 있다. 불편함이 지나가면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멍청한 실수를 생각하며 웃을 수 있다. 죄책감은 좀 더 오래간다. 실수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데 멍청한 실수를 하는 바 람에 민폐를 끼친 것이다. 따라서 죄책감을 통해 우리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불편함과 죄책감은 상대적으로 해소가 되는 감정이다.
그러나 수치심은 극복이 힘들고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다. 수 치심은 감정적, 인지적, 심리적으로 감당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자 존감에 타격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오래간다. 심지가 굳은 사람은 수치심이 생겨도 꿋꿋하게 이겨나간다. 이것이 여러 단계로 발전한 다. 그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해 수치심을 느낄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는 태도다. 그다음에 자기 자신은 받 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수치심을 통해 우리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극복하며 우리의 약점과 실수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 무조건적 자기수용, 즉 자신을 무조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은 우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 가지고 있는 믿음과 충돌할 수 있다. 자신이 이룬 성과의 가치와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동일시 할 때 그렇다.
때로는 무조건적 자기수용이 자존심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결 코 그렇지 않다. 자존심은 성과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시간에 따 라 변할 수 있는 불안한 개념이다.' 성과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 도 충분히 나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조건적 자기 수용은 언제나 일정하다.
더불어 무조건적 자기수용은 체념, 수동적인 태도, 자기만족, 이기주의, 중요한 목표 앞에서 느끼는 권태와 혼동되기도 한다. 그 러나 무조건적 자기수용은 우리의 부족한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 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더 나은 자기 자신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따뜻한 태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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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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