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계속 여러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고 대가를 비교한다. 당신을 매일 화나게 하는 사장한테 사표를 내는 대가가 무엇일 까? 마침내 꿈을 실현하고 뉴질랜드로 이민 갈 것인가? 그러면 직장에 계속 다니는 대가가 무엇일까? 모든 결단은 냉정한 대가 비교로 수렴된다. 당신이 하나의 대안을 선택하기로 결단을 내 릴 때 당연히 나머지는 포기해야 한다. 슈프렝어는 이러한 사고 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밀고 나간다. 자기 자녀에 대한 책 임을 근거로 내세우며 아버지나 어머니의 입장에서 스트레스를 하소연하는 사람에게 슈프렝어는 "책임은 선택 가능하므로 원 하지 않는 책임은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잘라 말한다.
- '파이프라인'이라는 말은 우리가 직장생활에서 즐겨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다. 사람들은 갖가지 파이프라인에 접속된 상태로 다중 작업을 하며 일하고 있다. 누구나 혹은 무언가와 계속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없고 성공을 거둘 수 도 없다.
- 예전에는 사무실에서 전화 통화를 할 동안에는 통화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렇게 일하는 사람을 보면 사람 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보통은 통화를 하면서 이메 일과 보고서를 작성하고, 손짓으로 동료와 대화를 나누고, 자료 를 분류하고, 책상 서랍을 정리한다. 사무실에서 다른 일을 하면 서 통화하기에 용이한 핸즈프리 장치는 필수다. 각자 자신이 얼 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같은 층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또한 머리에 헤드세트를 착용하고 통화하며 커피를 타 러 주방으로 간다. 동료들과 아웃룩 달력에 스케줄을 공유함으 로써 서로의 스트레스와 압박도 공유한다.
- 점심시간은 네트워크 구축에 잘 활용할 수 있다. 출근길도 활 용도가 높다. 몇몇 사람들은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출근 길을 이용해 훈련한다. 그들은 스톱워치를 착용하고 조깅을 하 며 사무실에 출근해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일단 사무 실에 들어가서 노력의 흔적인 땀을 씻는 것,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에 탁월한 포 인트다! 그렇게 역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분명히 성공할 테니 까. 부득이한 경우, 출근길에 서류를 검토하고 지하철에 앉아 휴 대폰을 통해 큰 소리로 지시를 내리고, 시간 관리와 업무 효율에 관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일할 수 있다.
- 오히려 일의 부담에서 벗어난 은퇴자들도 한가 해 보여서는 안 된다. 주중에는 모임에서 포도주 특산지로 나들 이를 가고 운동을 한다. 주말에는 손자 손녀들과 수영장에 가고 교회의 성가대 연습에 참석하고, 집안일을 돕는다. 월요일에는 정원사와 새로 심을 정원 식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심지어 여가 시간 스트레스는 은퇴 연령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증가하 는데, 그 나이가 되면 스트레스가 정점에 달한다. 예전 연금생활 자들은 "난 시간이 있어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오늘 날 그런 말을 하면 동정 어린 눈길을 받는다.
- 여가의 목적은 더 이상 푹 쉬는 것이 아니다. 요즘 사람들은 다 써버린 에너지를 충전하고, 어떤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 고, 일할 수 있는 상태나 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을 여가의 목적으 로 여긴다. 이 모든 것이 철저하게 목적을 겨냥하는 행위다. 유 럽인들은 요가, 명상, 기공, 태극권과 같은 아시아적 기예를 통 해서만 긴장 완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것들은 스트레 스를 받는 여가생활에서 대단한 주목을 끌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에 사람들은 휴가에 대해 자율적이라는 개념밖에 몰랐다.
「슈피겔」지는 '디지털 시대의 빈둥거리는 기술에 대해 보도하고, 「포커스」지는 "긴장 완화의 생물학, 몸과 마음을 올바르게 충전하는 기술에 대해 조언한다. 두 가지 모두 10페이지가 넘 는 지면으로 구성된 머리기사였다.
첫째, 디지털 시대 사람들은 이전 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휴 식을 취한다. 둘째, 이처럼 휴식을 취하는 것도 배워서 익혀야 할 기술이지, 가벼이 생각하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휴식은 자신의 사생활에 약간 더 스트레스를 받더라 도, 주도면밀하게 계산하고 실행하고 의사소통을 하고 성취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 성서에서 지구가 만들어지던 첫날에만 일이 벌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자진해서 벌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이란 그 후에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처벌로 인식되었다. 엄밀 히 말하자면 일이 축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찬미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수십 년이 채 되지 않았다.
수렵채집 생활을 할 때 사람들은 일주일에 몇 시간만, 먹고사 는 데 필요한 만큼만 일했다. 사회학자 마샬 샐린즈는 석기시 대 경제학이라는 연구 논문에서, 당시에 일이란 기껏해야 아르 바이트 정도의 파트 타임 잡이란 사실을 밝혀냈다! 아무도 일 그 자체를 위해 일하지 않았다. 아무도 일이 행복이나 자기실현, 삶 의미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고대에는 일이란 무언가 지저분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었다. 노예와 농노는 일을 해야 했다. 돈이 있는 자, 사회의 엘리트계층에 속하는 자는 일할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일하지 않으려 고 했다.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하지 않는 것으 로 자신의 지위를 드러냈다. 그렇게 사람들은 일을 나쁜 것으로 간주했다.
일이 사람을 무디게 하고 타락시킨다고 단정 짓던 시기도 있 었다. 곰곰이 사색하며 토론할 시간이 있는 한가로운 삶을 누구 나 추구했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이러한 삶의 본보 기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육체노동으로 자신을 혹사하는 대신 물질적 요구 수준을 낮추고 통속에서 살았다. 그는 어떤 아이가 맨손으로도 물을 받아먹을 수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물컵을 내던져 버렸다.
중세에도 일은 여전히 인간에게 부담스러운 짐이었다. 수도원 의 승려들은 일을 무엇보다도 속죄로 간주했으므로, 여전히 일 을 추구할 만한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16세기에 들어서야 일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의 전체 역사를 살펴본다면 좀 늦은 감이 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인 마르틴 루터는 갑자기 일에 대해 직업 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직업이라는 표현으로 일은 신이 인 간에게 내린 의무의 이행이라는 고상한 의미를 부여했다. 갑자 기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아담과 이브에게는,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 신이 내린 형벌이었다면 이제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괴로 운 것이 되었다. 지금까지 늘 짐과 의무로 여겨졌던 일이 갑자기 특별한 아우라를 얻게 되었다.
산업화는 인간을 시계에 맞춰 움직이게 만들었고, 매일 더 효 율적으로 일하게 되었다.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특별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 오늘날에는 일하지 않는 사람, 일에 삶의 의미를 두지 않는 사 람, 일이 삶을 충만하게 해주는 핵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은 가치 있는 인간이 아니다. 전에는 실업이 유일하게 사회적으 로 허용 가능한 삶의 방식이었다면, 오늘날은 이로 인하여 사회 의 여타 구성원들에게 낙인 찍혀 특히 시달린다. 다음의 이야기 가 그런 사실을 알려준다.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 실업자 줄이기, 은퇴 연령 늦추기 등 사람들을 일하게 하는 것이 수십 년 동안 모든 정부기관의 목표이다. 선거 때마다 정당에서 온갖 공약으로 내세우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많은 정치적 결단에 영향력 을 끼치는 사화적 이슈다. 모든 사람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실업자를 언제 어디서나 해결해야 하는 문제점 으로 명백하게 규정할수록 '일자리가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 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곧 일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답지 못하다'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적으로 굳어졌다.
독특하게도 현대 사회는 실업자를 일자리를 찾는 사람, 정확 히 '구직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일자리가 없는 사람은 반드시 일을 찾아야 하고, 일자리를 찾는 사람만이 일을 할 수 있기 때 문이다. 반면에 일자리가 있는 사람은 직위를 갖고 품위 있게 살 아간다. 직위와 품위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 전에는 사람들이 특별히 애를 쓰지 않아도 당연히 모든 인간 은 유일무이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모두 개성 경쟁에 빠져 있다. 그 경쟁에 합류하지 않으면 금방 그렇고 그런 대중의 일원이 되고 만다. 요즘 어디서나 통용되는 '창조적 으로 생각하라'는 강제도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이 말은 모두가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그런 다음 쉽게 떠오르는 일을 결정하지 말고 깜짝 놀랄 만한 일을 결정해야 한 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어떤 작가를 좋아하더라도 작품을 구하 기 어렵고, 주문을 통해서나 현대의 고서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누구나 좋아하는 그런 취 향을 갖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평균적인 대중의 일원이 되는 지름길이다.

- 오늘날 사람들은 집을 사는 것도, 결혼식도, 아이를 낳는 것도 몇 년 후로 연기한다. 왜냐하면 그전에는 일하는 데 얽매여 제대 로 된 판단이나 결정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 좋은 무언가를 기다리느라 시간은 흘러간다. 나중에는 그것이 달라질 거라고 희망한다.
이때 문제는 '성과 강박'이 이것과 연관된다는 점이다. 잘해야 하기 때문에, 완벽해야 하기 때문에 결정을 미룬다. 그리하여 강 박들은 서루 다투면서 당신의 삶을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든다.
- 고통이 한편으로 불쾌하고 힘든 것임을 인정하자. 그리고 그것이 다른 한편으로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었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기회가 되었음을 인정하자.
갈등은 모든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이다. 갈등은 영양가가 높 으며, 우리가 살아가고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해준다. 갈등은 당신에게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당신을 힘껏 밀어 줄 수 있다. 당신이 새로운 시각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비롯한 기회를 잡을 용의가 있다면 말이다.

- "내가 야근하고 와서 두 시간을 욕실에 쭈그리고 앉아 틈새 를 깨끗이 닦고 있을 때, 당신은 인사도 하지 않고 집에 들어와 말 그대로 '여긴 돼지우리 같아'라고 하면(관찰), 나는 기분이 나 쁘고 실망하게 돼(감정). 나도 내가 한 일에 대해 인정과 가치평 가를 받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야(욕구).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집안일을 더 잘할 수 있을지, 오늘밤 당신과 같이 곰곰 생 각해보고 싶어(소망)."
이러한 종류의 의사소통의 명백한 장점은 이렇다.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일반화하므로 반격당할 위험이 없다.
*진정한 감정을 알림으로써 상대방이 이런 감정을 앗아 갈 수 없게 된다.
*욕구는 상대방에게 현 상황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해심을 불러일으킨다.
*다시금 이러한 이해심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당신의 구체적인 소망을 쉽게 실현해주게 한다.
*그리고 당신이 아무에게도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고, 아무에 게도 부당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욕구를 알림으로써 상대방은 바로 또 다른 욕구인 명확함을 얻게 된다. 사람들이 명확하게 파악하고,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들은 그 일에 관여하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준비가 된다. 이로써 자기 보고는 다른 이들이 당신의 문 제를 지각할 수 있도록 돕고, 당신의 세계에 한 걸음 더 다가와 욕구를 알게 하는, 상대방에게 보내는 일종의 초대장인 셈이다.

- 1970년대부터 독일어권에서 자아실현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자아실현은 누구에게나 바람직하고, 누구나 그것을 일구어 내야 하며, 자아실현이 이루어져야 지상 에서의 행복이 증가한다고 한다. 사실 그 말은 잘못된 것이다. 1928년 카를 융의 저서에서 처음 등장하는 자아실현이라는 용 어가 유행어가 된 것은 1949년 에리히 프롬에 의해서였다. 그는 『정신분석과 윤리』에서 인간의 핵심적인 과제란 "자신의 본질 이 터져 나오도록 하고, 자신 속에 잠재된 것을 실현하는 것"이 라고 주장했다. 프롬의 이러한 주장은 '세계혁명'과 자유로운 사 랑을 주장하는 '68세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귄터 그라스 는 개인적인 것과 자아실현을 지나치게 강조한 그들이 "사회를 좀더 투명하게 만들고 인습과 관습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분적으로 사회를 보다 무책임한 풍조로 이끌었다”라 고 비판한다. 특히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 려는 사람들은 통계적으로 실패할 확률이 아주 높고, 너무나 많 은 자아들과의 경쟁에서 탈진한 사람들은 대체로 우울증에 시달 리기 쉽다.
2009년 독일에서 일찍 연금 생활에 들어간 사람들의 삼분의 일이 훨씬 넘는 비율이 정신질환자였다. 1993년에는 그런 사람이 13퍼센트에 불과했다. 독일 근로자의 약 70퍼센트가 성과 능력의 한계 지점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오늘날 수백만의 사람들이 일상적인 직장 생활에서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해 인 위적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이는 정상적인 정도를 넘어서 는 일이고, 사실 인간적인 한도를 넘어서는 일이다.
또한 독일에서 집중력 강화제인 리탈린의 소비가 1990년대 이래로 50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약제로 점점 더 많은 성과를 내려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과 한계를 잘못 파악하게 된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하다가 일 때문에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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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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