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걷기수업

인문 2023. 9. 20. 12:00

- "지혜로운wise" 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글에 서 가장 처음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무언가를 잘 아는'이라는 뜻이었다. 호메로스는 배를 건조하는 장인의 기술을 묘사하는 데에 도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지혜롭기 위해 많은 책을 읽을 필 요는 없다. 삶의 모든 측면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 운다면 어디에서든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플라톤이 7명의 현자 중 한 사람으로 꼽는 뮈손은 순박한 농부였으며 글을 읽거나 쓰 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가 열자는 "어딘가를 걷는 일의 즐거움은 바로 목적 없음을 향유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걷기의 본질적인 특징은 바로 일상을 잠시 멈출 수 있다는 점이 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목적 지향적 활동으로 우리를 꼼짝 못 하게 하고, 종종 우리의 생각과 감각마저도 잠식해버리는 일상 말이다. 잠시 시간을 내 공원이나 산책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계와 같은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속으로 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획하고 조직하고 처리하고 준비하는 삶에서 는, 쉬는 시간이나 여가 시간에도 일거리에 대한 생각이 계속 머릿 속에 맴돌기에 제대로 쉴 수가 없다.
- 자연 속에서 걷는 일은 자기 자신과 함께하는 소풍이면서 자신만의 은신처를 소유하는 것과도 같다. 외로움에 힘겨울 때라면 오롯이 홀로 있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탄탄한 사회적 유대감에 기반한 채로 자기 자신을 숙고하고 성찰하고자 의식적으로 홀로 있음을 추구한 다면, 이는 풍부한 힘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고대 중국의 경서인 《예기》에 이렇게 나온다. "홀로 있음은 내면이 안온한 상태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늘 혼자만이 간직한 것을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자기 혼자만 간직한 것이 무엇인지 걷는 가운데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 베트남의 불교 승려 틱낫한은 걷기가 주는 명상적인 힘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걸으면 몸과 마음이 하나로 모인다. 이렇게 될 때만 이 우리는 진정으로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 걷는 자는 집으로 가는 것이요,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서 안식하기에 어디에서나 집에 있 는 듯 편안함을 느낀다.
- 걷기, 방랑하기, 앞으로 나아가기. 이것은 우리 몸에는 균형과 힘을, 마음에는 의미와 방향을 선사한다. 또한 우리를 더 만족스럽게, 더 명랑하 게, 더 저항력 있게, 더 명확하게, 더 평온하게,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몸과 마음은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는데, 우리는 걷기로써 이 두 영역 모두에서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 관점, 전망 을 바꾸고, 지평을 확장한다. 우리는 하나에서 떠나 새로운 것으로 향한 다. 매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모든 여정의 궁극적 목적은 스스로 만족함을 느끼며, 내면의 안정을 찾고, 내적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속 응어리는 정화되어 갈등은 차차 해소된다. 비로소 우리는 자신과 하나가 된다.
외면과 내면이 일치와 조화를 이루며 마침내 자기 자신과 타인, 운명 과 화해한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세상의 불공평이나 불의 앞에서까 지 초연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내면의 평화와 강인한 태도는 우리가 세상에서 결연하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마음의 평화는 고대 사상가들에게 모든 지혜의 궁극적 목표 였으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도보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다.
- 끊임없는 분주함은 겉보기에는 생동감이 넘쳐 보여도 실상은 산만함, 도피, 헛수고에 불과할 때가 많다. 오히려 삶의 본질은 내면 의 평온, 진정성, 영혼의 안식, 좋은 인간관계 같은 몇 안 되는 근본적인 것들에 있다. 이것들이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물질적인 것은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다. 쾌락주의 철학 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굶주리지 않고, 목마르 지 않고, 추위에 얼어붙지 않는 것. 이런 상태를 유지하거나 바라는 자는 제우스와 행복을 겨룰 수 있다.” 물론 이 말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비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안에서 행복을 찾고 일궈나가야 한다. 하지만 외부의 사물과 재화에서 행복을 헛되이 찾는다. 부와 소유물은 삶을 더 쉽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듯 보인다. 그러나 때때로 삶을 더 힘들고 걱정스럽고 복잡하게 만들 때도 있 다. 재산의 필요성과 효용을 긍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재산이 행복한 삶에 도움되기는커녕 방해가 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본질 적인 것은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내면에서 여러 가 지힘, 충동, 저항이 올바른 균형을 이루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외 적 소유와 외적 관계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 우리는 내면의 균형 과 평온, 마음의 평화를 진정 동경한다.
- 타인을 아는 자는 영리하고, 자신을 아는 자는 지혜롭다. -노자
- 인격 성장과 자기 인식에서도 질문이 우리를 더 멀리 나아가게 한다. "좋은 여행자는 자신이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좋은 여행자와 완전한 여행자의 차이점은 완전한 여행자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국 도가의 경전인 《열자》에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구절이 있다. 지고의 목표를 향해 방랑하라! 방랑의 목표에 이른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더 는 알지 못한다. 경탄의 목표에 도달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보는 지 더는 알지 못한다. 그는 방랑하며 모든 것을 만난다. 이런 식으 로 모든 것을 본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방랑과 '봄'이다. 그리하여 말하노니, 지고의 목표를 향해 걸으라!"
- 고대 철학자들에게 행복에 이르는 열쇠는 바로 주의 깊은 자기 인 식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아는 자는 행복을 아는 자다."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 말은 자신의 마음을 아는 자에 게 행복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통찰을 철학자이자 황제 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약간 다르게 표현했다. "자신의 영혼 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탐구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 치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자기 인식의 가치를 가장 분명하게 표명 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자신의 철학의 중심에 두었다.
- 걷기는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고요를 허락해준다. 특히 혼자 걸을 때 이런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그러나 "시체들이 누워 있는" 영혼의 어두운 지하실로 내려갈 용기와 솔직함이 필요하다. 마음 한편에 덮어둔 문제나 어두운 일을 그저 외면하고 싶은 유혹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지 않는다는 뜻이다"라는 《예기》의 구절처럼, 우리는 여유를 가지고 걸을 때 스스로를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마음의 집을 깨끗이 정돈하면 "내면의 안도감에 이른다. 여유 있게 사색하며 걷는 일은 우리를 그와 같은 상태로 인도한다. 걷 는 동안 우리는 신체적으로 생기를 되찾고 원기를 회복할 뿐 아니 라, 마음의 질서를 되찾고 내적인 일치와 조화에 도달한다. 나아 가, 삶의 가치들을 재발견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 모든 것이 제자리 를 찾아 우리는 다시금 자기 자신이 된다. 니체는 말한다. "이제 내 가 어떤 운명에 처하고 어떤 체험을 하든 방랑과 등산은 그 안에 포 함될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경험할 뿐이니. (...) 다만 돌 아갈 뿐이며, 결국 스스로에게 올 뿐이니. 나 자신에게로, 오랫동안 낯설고 소원해졌으며, 모든 일들과 우연 가운데 흩어져 있던 것에 게로. "
- 물 한 잔이 갈증을 해소하고, 한입의 채소가 심장을 튼튼하게 한다. 하나의 좋은 것이 모든 좋은 것을 보여주고, 아주 작은 것이 전체를 보여준다.  -고대 이집트의 격언
- 고대 인도와 중국의 현자들은 매우 비슷한 생각을 공유했다. 부처는 "그대는 정신력의 균형을 추구하고, 이를 목표로 삼으라"고 제자들에게 권한다. 고대 인도의 힌두교 경전 중 하나인 《바가바드 기타》에는 계속해서 내적 욕구에서 우러나와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되, 그 결과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권유가 나와 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그대의 사명 일진대,
그 성패에는 신경을 쓰지 말라.
결코 행동의 열매를 탐내지 말라.
하지만 게으름에 빠지지는 말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세속적인 욕심에서 벗어나라.
일이 잘되든 안 되든
늘 침착함을 유지하라. 
물론 우리는 추구하는 외부의 목표를 이룰 수 있기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고대의 현자들도 이와 같이 소망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행복이 외부의 목표 실현 여부에 따라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자연을 유유히 거닐 때처럼 길을 걷는 것 자체가 목표이지,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 는 안 된다. 우리는 정상에 도달하는 것보다 정상에 오르는 길 자체를 더 사랑하기에,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오르는 대신 때로는 몇 시간에 걸쳐 힘든 길을 걸어간다. 또한 이를 악물고 아등바등 나아가 는 사람보다는 초연하고 침착하게 한 발 두 발 내딛는 사람이 목표 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높다. '목표를 못 이루면 어쩌지?' 하고 불안 해하며 힘을 낭비하지 않고, 고요하고 평안한 태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성실하고 적극적이지만, 이루고자 하는 성 공을 과대평가하지도 않는다. 공자는 말한다. "적절한 정도를 지킬 줄 아는 사람. (...) 그의 마음은 자기 자신으로 가득하지 않다. 그리 하여 그는 꾸준히 제 할 일을 할 수 있다."
- 고대 그리스와 인도의 철학자들과 중국의 공자가 강조한 자기 교육의 목표는 내면의 조화를 이루고, 중용에 다다르는 것이었다. "지혜로운 사람의 길은 그 자신의 인격에 뿌리를 둔다.” 중국의 한 문헌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길을 하늘과 땅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추니, 걸림돌을 보지 못한다." "희로애락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중용이라 하고, 이런 감정이 일어났 더라도 모두 절도에 맞는 정도일 때를 조화라 칭한다. 중용은 천하 만물의 뿌리이고, 조화는 천하 만물의 공통된 바른 길이다. 중용이 조화에 이르면, 하늘과 땅은 그에 합당한 자리를 찾고, 만물이 꽃핀다.
- 장자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탄생과 소멸,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가난 과 부유함, 격이 높음과 격이 낮음, 상과 벌, 배고픔과 목마름, 더위 와 추위는 운명의 흐름에 따라 서로 번갈아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런 것들이 내면의 조화를 무너뜨리게 내버려두는 것은 참으로 무가 치한 일이다. 이런 것들이 영혼의 집을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내면의 조화를 망가뜨리지 않고, 늘 기쁨으로 봄날 같은 온화함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온전한 품성을 가진 자다."
- 쾌락과 기쁨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을 이루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고통의 부재와 마음의 평안이다. "이러한 것들을 명확하게 고려하면 모든 행위와 무위가 몸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최종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면 여정의 일부라도 기운차게 걸어가라!"라고 했다. 가이바라 에키켄은 말한다. "지고의 목표를 추구하면 그 목표의 중간까지 도달할 수 있지만, 중간까지만을 목표로 삼으면 결국 아무 데에도 이르 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멀리 방랑할수록 삶에 더 만족하게 된다. 목표는 곧 길이다.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인간 역시 살아 있는 한 길을 간다. 길을 걷는다.
- 세네카는 "도시의 성벽을 뒤로하고, 숲을 사랑하는 삶보다 더 아름답고 악덕에 물들지 않은 삶은 없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행복이 사실은 아주 단순한 것이며, 자연과 간소한 삶의 방식이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경험한다. 걷는 동안에는 그저 걸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그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크나큰 행복이 깃든다. 걷기의 즐거움을 "목적 없음을 향유하는 것이라고 본 열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족하기를 배우는 것, 그것은 도보 여행의 가장 높은 단계다. 이를 경험하고 배우고 내면화한 사람은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하고, 외부의 상황이 힘들다고 해도 일상을 즐길 수 있다. "삶의 단순한 것들에 기뻐하는 것이 곧 인생을 즐기는 것"이라고 가이바라 에키켄은 말한다. 
- 자연은 우리에게 겸손의 덕을 가르쳐주는데, 바 로 이럴 때, 자연스럽게 평정심이 생기며, 이와 함께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물의 흐름에 복종할 수 있는 상태가 가능해진다. 걸을 때 는 지나온 것이나 앞으로 다가올 것을 보지 말고 그저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해야 한다. "당신의 생명은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다"라 고 열자는 말한다. 《장자》에 나오는 노나라의 현인 자래는 죽기 전. 문병을 온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하늘과 땅은 커다란 용광로요, 조물주는 위대한 주물공으로 생각한다면 나야 어떤 형태로 변하든 좋지 않겠는가. 나는 편안히 잠들고, 고요히 다시 깨어날 것일세."
- 우리는 걷다가 힘든 상황에 부딪혔을 때 이를 타개해나가는 연습 을 통해 인생의 힘든 시절에도 "견딤의 기술"을 발휘할 수 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운명의 타격을 참을성 있게 견디는 "치료법"을 말해준다. "불행을 당했을 때 가능한 한 침착함을 유지 하고 자제력을 발휘하여 아픔을 지나치게 내비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왜냐하면, 첫 번째는 그런 불행이 결국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전전긍긍하는 행동은 모든 면에서 득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인간적인 손실이란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네 번째는 계속해서 탄식하고 비애에 잠겨 있으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판 단하는 정신 능력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정신 능력이냐 하 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스스로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주어진 상황에서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이성이 최선의 조치를 취하게끔 하 는 능력이다. (...) 불행한 일을 만났을 때 가능하면 빨리 치유와 회 복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늘 마음을 준비해둬야 한다."
이런 인식은 우리 눈에 '불행'으로 다가오는 일을 만났을 때 더 초연하게 견디게 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특히 불행으로 여겼던 일이 훗날 긍정적인 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 탄식만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 침착성을 유지할 때 불행에 최선의 방법으로 대응할 수 있으며 심지어 "화를 복으로 바꿀수도 있다는 생각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많은 도움이 된다
- 죽음을 경멸하지 말고, 그와 친구가 되라. 죽음 역시 본질적으로 자연이 의도한 것이니. 그대는 그대를 만들어낸 것 안에서 사라지리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고대인들도 인생의 덧없음을 절절히 경험했다. 기원전 2000년경,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에 실린 하프 연주가의 노래는 이 러하다. "태양신이 아침 일찍 모습을 드러내고 저녁에 대양으로 지는 것처럼, 조상의 대부터 한 세대는 지나가고 다음 세대가 그 자리 를 차지한다. 남자들은 만들고, 여자들은 잉태한다."
무상과 관련한 조언에는 종종 그로 인해 슬퍼하지 말라는 당부가 따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영영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과도하게 슬퍼하지는 말아야 한다. 열자는 이에 대해 인상 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위나라에 동문오라는 사람이 있었다. 아들이 죽었는데도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동문오의 집사가 그에게 물었다. '천하에서 자신의 아들 사랑하기를 나리처럼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드님이 세상을 떠났는데, 나리는 왜 슬퍼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동문오가 말했다. '내게는 일찍이 아들이 없었던 때가 있었네. 아들이 없었던 그때, 나는 슬퍼하지 않았네. 이제 아들이 죽고 다시 예전처럼 아들 없이 살게 된 걸세. 그러니 내가 어찌 슬퍼해야 한다는 말인가?"
- 기원전 2000년경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우리에게 덧없음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권면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삶의 모든 아름다움과 풍요로움, 덧없음 속에서 삶을 즐기고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도와준다.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신들은 인간을 죽는 존재로 정하고, [영원한] 삶은 자신들의 것으로 취했다. 그러므로 길가메시여, 그 대는 먹고 마시고, 몸을 채우고, 밤낮으로 그저 기뻐하라! 매일을 기쁨의 축제로 만들라! 수금과 피리를 연주하고, 춤추며 밤낮으로 기뻐하라! (...) 그대의 손을 잡는 자녀들을 즐겁게 볼지어다! 아내의 품을 즐거워하라!"
지혜로운 사람들은 무상을 우울하게 인식하지 않았다. 세네카가 말했듯, "무자비한 삶의 충동"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해방으로 여겼다. 삶에 끝이 있다는 사실은 삶이 주는 즐거움을 좀처럼 흐리 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좀 더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사심 없이 삶을 즐길 수 있도록 돕는다.
세네카는 그의 비극 중 하나에서 죽을 수 있는 능력, 죽음을 견디는 능력을 변덕스러운 운명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과 동일하게 본다. 만물이 덧없다는 사실을 알면, 외적인 행복이나 재물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 즉 본능적인 생의 충동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다. 세네카에 따르면, 이런 상태가 되면 걱정, 두려움, 시기, 탐욕, 적대감과 같은 수많은 악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런 악은 자신의 유한을 의식하지 못하는 무절제한 삶의 충동과 과시욕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 앞서 《길가메시 서사시》가 넌지시 보여주듯이, 죽음은 삶의 경이로움에 우리를 열려 있게 하고, 삶이 주는 선물을 감사하며 누릴 수 있게 한다.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는 죽음을 관조하고 "죽음을 연습" 하여 친숙해지는 것이 기쁨의 원천이며 유쾌한 삶을 살아가는 지혜 라고 믿었다.
“(그러나 일단] 당신이 죽음을 연습하고 나면, 그 연습은 그대가 여기에서 그리로 거처를 옮겨야 할 때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야 할 때, 즉 죽어야 할 때] 당신을 동반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선은 당신의 삶이 즐거워질 것이다. [육체적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속에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살 아가게 될 것이며, 곧 육체에 속한 모든 것을 떨쳐버리게 될 것이 다. (...) 그러면 전체의 조화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침묵하는 가운데, 신들이 게으르고 거친 삶을 경계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 을 준비해놓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 무상을 깨달아 외적인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은 고대 인도, 특히 불교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틱낫한은 이렇게 말했다. "무상을 깨 달으면 욕망, 집착, 절망의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런 깨달음 을 바탕으로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을 바라봐야 한다."
유한과 무상, 죽음을 생각하면 고통스러운 집착이 줄어든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힘과 능력에 부치는 일을 무리하게 도모하거나 스스로를 과도하게 몰아붙이거나 압박하는 일을 피하게 된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데모크리토스는 "인간의 삶은 덧없고 짧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그러니 너무 많이 소유하려고 애쓰지 말 것이며, 필요한 정도로만 수고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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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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