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의 종말은 없다

경제 2023. 3. 16. 12:05

- 스윙프로듀서: 석유 공급 변화에 따라 석유 생산을 증가 혹은 감소시켜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는 산유국을 말한다. 1960년 출범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최대 산 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스윙프로듀서를 담당했다. OPEC은 1973년 자체 감산 및 금수조치를 단행하면서 1차 오일쇼크를 촉발하며 스윙프로듀서의 역할을 강 화했다. 하지만 저유가가 장기화되면서 그들의 위상이 악화되고 있다. 또한 미국 은 셰일오일 shale oil의 수요·공급을 조절하면서 세계 원유 시장에서 차지하는 영 향력을 넓히고 있다.- 초기의 석유 굴착업자들과 토지 소유자들은 주로 빠른 시추에 집중했다. 신속한 시추의 필요성은 '포획의 법칙'으로 알려진 지배적인 법적 원칙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누군가의 인근 지역 재산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지면을 소유한 자가 땅에서 수집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법이었다. 포획 규칙은 영국의 관습법에서 비롯되었으며, 종종 토지 소유자들이 사슴이나 다른 야생동물을 포획할 권리를 누리는 것과 관련이 있다. 천연자원을 수확, 추출 또는 '포획한 최초의 토지 소유자가 소유권을 얻었다." 포획의 법칙은 지하자원에도 적용되었다. 당시 석유 매장량에 대한 지질학적 이해도는 높지 않았고, 석유는 지하 웅덩이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후 석유가 암석과 퇴적물 속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 석유를 합법적으로 소유하기 위해 굴착업자들은 다른 누군가보다 먼저 지하의 '연못을 배수해야 했다. 민간 굴착업자들 과 열성적인 땅 주인들은 모두 빠르게 굴착할 당위성을 얻었다. 한 전문가가 묘사한 것처럼, 지하 퇴적물을 빼내기 위한 쟁탈전은 두 명의 목마른 소년, 두 개의 빨대, 그리고 한 잔의 레모네이드를 닮 았다. "가장 덜 먹는 사람이 제일 바보가 되는 겁니다.” 결과는 서부 펜실베이니아 석유산업의 조잡한 시추와 과잉 생산이었다.' 지하 웅덩이에서 가장 많은 양의 석유를 채취하기 위해 작업자 들은 지하 석유가 다른 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지하 석유를 차단하 고, 배수하기 위해 소유지의 가장자리에 여분의 또는 '벌충'용 우 물을 파냈다. (가끔씩 물이 유정에 침수되어 유정을 손상시키거나 파괴할 때 도 있었다. 정말 악랄한 사업가의 경우 인접한 소유지의 유정에 가까운 갱도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유정 갱도에 배관을 제거하여 함께 공유하는 유정을 손상시 키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 석유 수요가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굴착업자, 운송업자, 정유업자 등 새로운 석유 사업에 관련된 모든 사람은 불안정한 원유 생산으로 인한 유가 변동성의 두려움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과잉 공급은 단지 조급한 부동산 소유주들과 포획 규칙 경쟁 하에서 운영되는 광적인 굴착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다. 석유 생산, 운송, 정제의 모 든 단계에서 투자자와 운영자들은 모든 것을 생산해야만 했다.
원유를 시추하고 운송한 다음 정제하기 위해 미리 투자했던 자본에 관한 수익을 창출하려면 먼저 굴착기를 구입하고, 파이프라인을 설치하고, 정유소를 건설하기까지 하면 운영비는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높은 초기 자본 비용과 낮은 운영비의 조합은 생산자와 정유사가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석유를 계속 끌어올리고 정제하도록 유도했고, 최소한의 투자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현금 흐름을 창출하였다. 그 결과 생산 과잉이 지속되어 파멸적이고 장기화된 가격 침체로 이어졌고, 결국 크고 작은 생산자들을 전멸시키는 광범 위한 파산을 초래했다. 수요가 살아나면 공급이 부족하고 물가가 급격히 올라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을 반복하게 되었다."
-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며, 석유는 인류에게 '조명'을 쓸 수 있는 수단에서 '운송'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 였다. 산업과 정부 모두 석유를 필수적이고 전략적인 상품으로 생 각했다. 2장에서 우리는 석유에 대한 워싱턴의 관심이 적었다는 것 을 살펴보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석유가 점점 중요한 역할을 차 지하면서, 석유산업 안팎에서 유가의 변동 또한 지대한 관심을 얻 게 되었다.
초기 수십 년 동안 유가 변동을 악화시켰던 몇몇 상황이 개선 되었다. 예를 들어 반출 기반 시설이 개선되었고, 파이프라인, 유조 선 및 기타 저장 방법의 수와 효율성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로 인하 여 새롭게 시추한 석유는 정유소나 마케팅 센터와 더 원활하게 연 길되었다. 다만 유가 변동성의 근본 원인은 여전했다.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은 것을 생산하겠다는 굴착업계의 동기부여가 거대하고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업계는 새로운 유정을 주요 파이프라인과 정유 시설을 점점 더 능숙하게 연결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유정의 발견은 여전히 저장하거나 반출하는 용량을 압도했 다. 업계 기반은 발전하고 있었지만 석유산업은 과잉 공급을 제대 로 통제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신규 공급이 계속되면서 가격은 폭락했다. 가격 불황을 겪으며 꾸준히 증가세 를 보였던 수요가 가용 공급을 초과하자, 유가는 다시 치솟았고, 정 부 관리자와 소비자인 국민 사이에서 인류의 중요한 자원인 석유 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다. 분명 석유산업과 시장 사이의 어떠한 연관관계가 유가 변동성의 구조적 패턴을 만든 것이다.
- 1920년대 후반, 미국과 세계적인 역학관계로 인해 유가가 하 락하였다. 텍사스와 오클라호마에서는 새로운 유정이 발견되었고, 정제한 러시아 원유의 중요 시장인 인도에서는 등유 가격 전쟁이 벌어졌다. 로열더치셸과 모빌(Mobil Corporation, 미국의 모빌석유의 지주회 사)' 간의 경쟁으로 미국과 영국 시장의 주요 마케팅 회사들은 시 장 점유율을 유지하기 위해 가격을 억지로 인하해야만 했다. 이로 인한 가격 폭락으로 1930년대 초까지 볼 수 없었던 가장 공격적인 공급 규제와 카르텔 시스템을 초래하는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후 40년 동안 전 세계에 유례없는 유가 안정의 시대가 왔다.
- 석유시장을 관리하던 텍사스 시대는 대략 1927년부터 1972년까지 지속되었고, 석유에 대한 세계적인 공급과 수요의 놀라운 성장이 동시에 일어났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유가가 하락하는 가운데 조명에 사용하는 등유의 성장을 만들었고, 교통수단으로써 가솔린의 전환을 끌어냈듯 말이다. 그리고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며 중동, 미국, 러시아의 저렴하고 거대한 새로운 공급품인 석유는 현대 문명을 바꿔 놓았고, 소비 붐을 이끌었다. 석 유시장에서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거나 촉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두 차례의 시대적 전환은 산업과 정부 또는 양쪽이 보여준 확실한 석유 공급 통제와 여기서 비롯된 상대적 시장 안정이라는 연관성을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석유 소비의 붐은 새로운 용도와 오래된 용도에서 비롯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값싼 새로운 공급품이 나오면서, 석유는 난방과 전기 생산을 위해 석탄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는 '자동차의 대중화'가 수요를 이끌었다. 1950년부터 1973년까지 전 세계 자동차 및 기타 승용차의 수는 5300만 대에서 2억 5000만 대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유럽과 일본은 동력 수송을 위한 석유 사용이 크게 증가했다. 민간 항공의 급속한 확대와 플라스틱 산업의 탄생도 석유사용을 증가시켰다. 저명한 석유시장 학자 다니엘 예긴이 말한 '탄화 수소의 시대Hydrocarbon Man'가 도래한 것이다.
- 1870년대 석유시장은 록펠러에 의해 혼란에서 안정으로 바뀌 었다. 100년이 지난 1970년대 역시 변혁적이었지만, 방향은 안정 에서 혼란으로 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1970년대 초, OPEC은 미국 대법원이 1911년 록펠러 시대를 끝낸 것처럼 구질서를 파괴 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원유 가격은 텍사스 시대보다 훨씬 더 높고 불안정했다.
역사상 석유시장 첫 100년 동안 몇 가지 절정의 공포와 예외적 사건을 제외하고, 석유산업의 주요 문제는 '과잉 공급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가격 폭락으로 이어지는 과잉 공급을 막기 위해, 기관과 석유회사 카르텔은 채유를 억제하거나 '폐쇄'할 의무가 있었다. 그 러나 1960년대부터 세계 석유 수급의 추세는 반대 방향으로 바뀌 기 시작했다. 세계 석유 수요는 1960년대 후반에 급격히 증가하여 연평균 8%씩 상승했고 1969년에만 거의 9% 올랐다' 많은 분석 가는 석유 수요가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1971년 미국 석유 위원회는 공산주의 세계 밖의 수요가 1970년 하루 3700만 배럴에서 1985년에는 하루 9200만 배럴까지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다. 새로운 석유 산유량이 소비량을 계속 앞지르는 동안 소비와 공급의 격차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외교 정책관들은 막대한 석유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대부분 OPEC 회원국인 중동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해 걱정했다.
- 1979년의 위기
1977년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 Mohammad Reza Shah Pahlavi의 권위 주의적 군주제에 대한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 이란인들의 불만 이 쌓이며 1978년 초, 정권을 향한 격렬한 시위로 분출되었다. 이듬해 석유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이란의 석유 수출은 하루 450만 배럴에서 100만 배럴 미만으로 감소했다. 팔라비의 군사 정부는 산유량을 회복했지만, 1978년 말에 이르러 폭력과 파업이 격화되었고, 해외 석유사의 노동자들은 대피를 시작하며 석유 수출이 완전히 중 단됐다. 1979년 시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완전한 혁명으로 발전 했다. 1979년 1월, 군주는 이란을 탈출했고 그해 돌아온 최고 지도 자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가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란 혁명은 1973년 중동의 석유 금수조치보다 석유 공급에 훨 씬 더 심각한 차질을 야기했다. 이란은 당시 사우디에 이어 세계 2 위의 석유 수출국이었다. 사우디를 비롯한 OPEC 생산국들은 이란 의 손실을 부분적으로 상쇄할 수 있었다. 1978년 세계 석유 산유량 은 실제로 증가했지만 이란의 급속한 감소는 시장을 놀라게 했다.
1979년 실제 세계 산유량은 증가했지만 당시 전년 공급량의 3%에 달하는 이란의 하루 200만 배럴 손실이 가격을 126%나 끌어올렸다." 재고와 비축량이 충분했음에도 수입업자들은 훨씬 더 많은 양 의 재고를 쌓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게 하나의 분석이었다."
특히 일본은 갑작스러운 공급 손실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일본은 우선적으로 이란의 틈새시장을 노렸고 물량의 20%를 공급받았다. 20년간의 놀라운 성장 이후, 일본은 이란 혁명으로 인해 자국의 핵 심 취약점이었던 석유 자원 부재 문제에 직면했다. 갑작스러운 장 기계약 취소에 충격을 받은 일본 정유사들은 현물시장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원유를 사들이며 위기를 겪었다." 성장세를 이어나가면 서도 균형적인 방식으로 이용되던 현물시장이었지만, 공급량이 부족할 때면 물류나 다른 방법으로 구매자들이 수급량을 확보할 수 있었고, 따라서 현물시장의 거래 역시 늘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점 점 더 유동적이 되어가는 현물시장에서 독립 석유사 외에 "월스트 리트 정유사, 국영 석유회사, 무역 회사, 석유 무역업자 등과 거래 하던 일본에 새로운 바이어들이 앞다투어 원유를 조달하고자 접촉 하였다." 구매자들은 즉시 이란에서 확보하지 못한 만큼의 원유를 찾기 위해 현물시장으로 몰려들었고 곧 대혼란이 이어졌다. OPEC 은 석유의 '실제' 시장가격을 나타내는 지표로 현물가격을 점점 더 자세히 감시하고 있었고, 실제 시장가격은 계속해서 상승세를 보 이고 있었다.
장기 계약하에 OPEC 생산자들은 관리가격에 근거하여 석유를 팔아야 했다. 그러나 1979년 2월까지 현물시장 가격은 관리가격보다 두 배나 높았다. 따라서 OPEC의 원유를 더 낮은 가격으로 구입하여 현물시장에서 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무역상들이 큰 이익을 얻었다. 이들의 판매로 인하여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첫 째, 일부 OPEC 회원국이 더 높은 현물가격으로 제3자에게 더 많 은 양의 원유를 직접 판매하기 시작했다. 둘째, OPEC 회원국은 현 물가격을 인상하기 위해 관리가격을 올렸고, 이는 결국 현물가격
인상으로 이어지며 엄청난 공황과 사재기를 일으켰다. 가격 강화 사이클이 발동되었다.
- 이란 혁명과 석유 파동, 가격 상승으로 인해 미국과 사우디를 더 가깝게 만들었고, 그로 인하여 사우디와 이란은 민족적, 종교적, 지정학적 대립 관계가 심화되었고, 이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우리가 겪을 OPEC 석유 정책의 영구적 특징이 되었다. 사우디는 이 슬람 수니파의 중심이며 종교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메카와 메디 나의 본거지다. 그러나 이란 국민의 대다수는 이슬람 시아파를 믿 는다. 이라크와 바레인 역시 시아파지만, 전 세계 16억 이슬람교도 중 15% 정도 차지하고 있다." 더 나아가 테헤란과 리야드는 19세 기 이전까지만 해도 정치적 연계와 외세의 개입, 경제적 부족과 지 리적 거리감을 이유로 직접적으로 경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러 나 1950년대 두 나라가 주요 석유 강대국이 되면서 두 나라 사이 의 중요한 이해관계가 촘촘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1979년까지는 두 나라 사이에 긴장감이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1979년 이란 혁명 으로 수니파, 특히 사우디 왕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이어졌다. 이 란이 혁명 국가를 수립함에 따라, 간접적인 분쟁과 대리전쟁이 연 이어 발발하기 시작했다.
- 1973년 그리고 1979년부터 1980년의 충격적인 가격 폭등 은 비슷해 보이지만 맥락은 매우 달랐다. 1973년 산유국이었던 OPEC은 관리가격을 통제하며 의도적으로 유가를 올렸다. 폭력적 이면서 상당히 의도적인 조치였다. 당시엔 원유 공급도 원활하였 다. 원인은 석유 수입국가와의 관리가격 그리고 지분 협상 파행이 었다. 그러나 1979년 이란 혁명과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의 경우, 재고는 충분했으나 큰 공급 차질이 벌어졌다. 혼란과 공황으로 시장 가격이 상승했고, OPEC은 단순히 인상된 가격을 따랐다. 결과적으로 1981년까지 OPEC의 관리가격은 배럴당 34달러로 3년 만에 약 3배 상승 폭을 보였다.
- 1980년대 초 원유의 수요 감소와 시장 기반 현물 거래가 증가 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석유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1970년대 석유는 탐욕스러운 소비와 한정된 자원이라는 인식 때 문에 거침없이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는 특별한 상품으로 여겨졌 다. 그런데, 1980년대 사람들은 석유를 더 이상 시장의 힘에 영향 을 받지 않는, 시장의 힘에 종속되는 또 다른 상품으로 간주하기 시 작했다. 치솟은 유가는 결국 수년간의 기다림 끝에 소비 성장을 깨는 데 도움이 되었고, 곧 대규모 신규 공급을 불러일으키며 빈곤에서 과잉으로 다시 뒤바뀌었다.
- 펜실베이니아 서부 유전 지역에서 100년 전 시도했던 증명처럼, 석유 카르텔은 특히 다른 회원의 부정행위를 제한할 수 없다 는 점 때문에 유독 붕괴될 위험이 컸다. OPEC도 마찬가지였다. OPEC은 지난 7대 석유사가 달성한 만큼의 지속적인 규제와 응집 력을 갖지 못했다. OPEC은 거래되는 석유의 양을 통제하지 않았고, 경제적이나 정치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회원국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서로 간의 와해는 당연했다. 당시 회원국이었던 이라크와 전쟁 중이었던 이란은 할당량을 준수하는 척조차 하지 않았고, 다른 회원국 대부분 현물시장에서 석유를 계속 팔았다.
한편, OPEC 외부의 경쟁 압력이 높아지면서 회원국들은 다시 협력하려고 모였다. 1983년 2월, 영국은 또다시 북해 산유량의 급 상승으로 인한 가격 인하를 발표했고, 대서양 유역 원유 가격에 더 많은 압력을 가했다. 1983년 3월, OPEC은 공식 판매 가격OSP을 배 럴당 29달러로 낮추기로 합의했고, 사우디가 스윙프로듀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리야드는 북해와 멕시코로부터 강력한 공급 증가에 직면하여 의무적으로 생산을 줄였다. 그러나 OPEC 회원국들은 계속해서 원유의 생산을 늘렸고, 가격은 자연히 폭락했다. 이러한 부정행위에도 불구하고 사우디는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생산량을 계속 줄였다. 1985년 8월까지 사우디 산유 량은 OPEC이 1982년 3월 집단 감축을 시작한 이후 하루 산유량 600만 배럴에서 72%를 감소한 하루 230만 배럴을 기록했다."
-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사우디가 스윙프로듀서로 나서면서 해당 기간 연말까지 가격은 배럴당 33달러에서 28달러로 서서히 하락하며 현물시장 가격 붕괴를 막았다. 유가는 월별 가격 변동 폭 을 기준으로 측정했을 때 상대적으로 안정세를 보였다. 1983년 4 월부터 1985년 11월까지의 월평균 유가 변동률은 4%로 OPEC의 시대가 시작된 이래 가장 낮았다.
그러나 사우디는 OPEC 회원국 중 유일하게 공급을 중단해 다 른 모든 국가의 물가를 떠받치고 있었고, 당연히 막대한 비용을 감 수했다. 왕국은 재정 비축량을 사용하는 악수를 뒀고, 국제적 지위 를 잃었으며, 자국보다 다른 회원국의 이익을 지지하는 정책으로 자국 내 불만을 야기했다. 사우디 왕가는 산유량을 낮추며 계속해서 산유량을 조정하지 않으면 사우디도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거듭 경고했다. 자키 야마니 사우디 석유장관은 1985년 9월 연설 에서 사우디도 질릴 만큼 질렸다고 주의를 주었다.
OPEC 회원국 대부분은 사우디에 의존하고 있다. 이제 상황 이 바뀌었다. 사우디는 더 이상 그 무거운 부담과 의무를 기 꺼이 떠맡거나 감당할 수 없으며, 따라서 회원국도 사우디의 역할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는 OPEC 전체가 석유 가격을 보호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 1980년 9월부터 격렬하게 전개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8 년 승자 없이 끝났다. 이라크는 사우디,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연 합국UAE에 1000억 달러의 빚을 지고 있었다. 1986년 붕괴 이후 유 가 하락은 이라크 세입을 감소시켜 독재자 사담 후세인 saddam Hussein 의 불행과 절망을 심화시켰다. 사담 후세인의 분노에, 쿠웨이트와 UAE는 당시 할당량에 비해 엄청나게 과잉 생산을 하고 있었다. OPEC의 총산유량은 총 할당량 상한선보다 하루 약 200만 배럴 이상 높았고, 1990년 상반기 당시 이라크산 원유를 대부분 거래하 던 지중해의 원유 가격이 3분의 1로 떨어지며 사담 후세인이 절실 히 원했던 수입이 월 5억 달러 이상 증발했다. 사담 후세인은 또 한 쿠웨이트가 국경 아래에서 시추하고 이라크 유전을 호시탐탐 노린다는 보도에 격분했다." 이라크는 역사적, 지리적으로 쿠웨이 트를 항상 견제했다. 이라크 바그다드Baghdad는 쿠웨이트를 자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주변 지역을 흡수하여 36마일(약 58km)이었던 해 안선을 거의 10배가량 늘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란과의 전쟁에서 사담 후세인을 지지하던 걸프만의 수니파 강대국은 유가 폭락과 재정난에 빠진 이라크에 대해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다. 1990년 7월 마지막 회의에서 쿠웨이트와 UAE는 감산을 약속했지만, 즉시 이를 어겼다. 결국 사담 후세인은 1990년 8 월 2일 쿠웨이트를 침공해 세계 최초의 석유 전쟁을 시작했다."
쿠웨이트 원유는 시장에서 사라졌고 이라크 석유는 즉시 거래가 금지되었다. 두 생산국 모두 시장에서 갑자기 사라지면서 9월 가격 은 애초 17달러에서 36달러로 두 배로 뛰었다. 대규모 지정학적 혼 란에 예비 용량의 유용함이 다시 한번 분명해졌다. 사우디는 생산 을 늘렸고, 산유량은 7월 하루 540만 배럴에서 9월에는 하루 800 만 배럴로 증가했고, 1년 이상 그 수준을 유지했다. 이라크와 쿠웨 이트의 석유 손실에도 불구하고, OPEC의 총공급량은 1990년 11 월까지 침략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OPEC의 추가 공급량과 재고량은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공급 부족을 메운 것이다."
- 1980년대는 1970년대만큼 석유시장과 유가에도 격동적이고 변혁적이었다. 이 10년은 페르시아만의 주요 분쟁으로 시작되었 고 끝이 났다. 이 시기 유가 불안정은 상당히 거센 편이었고, 이는 석유시장의 변화를 가속했다. 1970년대, 새롭게 얻은 권력을 어 설프게 휘두르던 OPEC 회원국과 다소 엉성하던 OPEC의 연합은 1980년대 들어서며 원유 수출 관리가격 설정을 통제하여 시장 가 격에 영향을 주는 불쾌한 공급 카르텔로 변화했다.
그러나 공급 규제 기관으로서의 TRC의 역할을 복제하여 초창기 성공을 거두었던 OPEC의 미래는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 1985년과 1986년, 사우디의 스윙프로듀서 역할에 의존하며 가격 붕괴를 촉발했고, OPEC은 외부의 공급 감소와 수요 증가라는 호재로 상대적 가격 안정의 시대를 누릴 수 있었다. 걸프전은 OPEC 내 사우디의 우위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그러나 1980년대 OPEC 의 시대가 생산과 소비국이 염원하던 유가 안정의 목표를 달성 하기 위해서는 사우디의 리더십과 행운이 전부 필요하다는 사실만 부각시켰다.
- 자카르타의 유령
1996년과 1997년의 예상치 못한 유가의 상승은 베네수엘라와 다른 OPEC 회원국들 사이의 충돌을 무마시켰다. 그러나 1997년 말 아시아에 금융 위기가 강타하였고 그로 인하여 석유 수요는 갑 자기 타격을 입게 되어 OPEC과 다른 산유국들은 다시 위기 대응 에 나섰다. 아시아 금융 위기는 앞서 언급한 강력한 성장 때문으로, 부동산 거품으로 전환된 대규모 자본 유입을 끌어들였다. 1997년 7월 태국 통화(바트)가 붕괴되면서 다른 아시아 통화와 은행이 연쇄적으로 쓰러졌고, 연말까지 광범위한 경기 침체와 파산이 이어졌다." 그러나 OPEC이 1997년 11월, 자카르타에서 회의를 준비 하며 회원국들은 유가 급등보다 아시아의 위기에 집중하였다. 11 월 27일, OPEC 회원국 대표들은 원유의 수요량이 가격을 안정시 킬 만큼 충분하다고 확신하며 하루 산유량 250만 배럴 또는 생산 할당량 10% 인상을 승인했다." 그러고 나서 OPEC은 곧 당시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수요 둔화와 공급 증가의 불일치가 1998년 초, 소비국의 석유재고를 빠르게 증가시켰다. 몇 년 전 발표되었던 국제에너지기구 의 보고서 이후, 1998년 2/4분기 전 세계 원유 공급량이 수요량을 비정상적으로 크게 웃돌 것이란 예상이 관측되며 유가는 폭락했 다. 1999년 초까지 일부 등급의 원유 가격은 배럴당 8달러까지 떨 어졌다. 1999년 3월 《이코노미스트》는 OPEC 회원국들이 자신들 의 실수를 재빨리 깨달았다고 보도하며, 가격을 안정시킬 만큼의 수요량을 충분히 정확하게 평가하지 못했고, 할당량을 느슨하게 잡는 우를 범한 '자카르타의 유령'에 시달리게 되리라 자신했다.
- 1970년대를 살펴보면 유가는 공급량 고갈까지는 아니더라 도 석유시장에 긴축이 온다는 인식 때문에 급등한 측면이 있었다. 실제 혼란이 적었던 2000년대 초반에는 유독 이런 현상이 짙었 다. 이란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공급이 줄어들었을 때도 OPEC의 미사용 비축량이 상당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물리적 긴 축이 실제 유가 급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 러나 2005년 이후, 석유시장은 구조적으로 위기를 겪고 있었다는 게 분명했다. 빠른 상승세와 불안정함의 지속, 그리고 생산 위기와 위험이 발생할 때 유가는 급등한다.
- 세계적 관점으로 볼 때, 지구에 매장된 석유 자원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아직도 부족하다. 세계 매장량에 대한 정확하지 않은 데 이터로 인해 허버트는 2000년에 다다르면 지구의 최대 공급량은 하루 약 3,400만 배럴 정도가 될 것이라고 오인했다. 그리고 실제 2014년, 석유 산유량은 허버트의 예상보다 두 배나 많았다."
옛날 사람들은 저장소에서 채유를 중단해야만 얼마나 많은 양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즉, 석유산업은 과거의 빈번했던 피크 예측에 번번이 반박하며 산유량을 늘리는 동시에 석유 매장량도 늘려왔다. 1980년에 세계 비축량은 28년치 산유량과 맞먹었다. 현재 확인된 매장량은 약 1조 7000억 배럴 로 추정되며, 이는 58년간의 산유량과 맞먹는다. 2014년 매장량은 향후 58년간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 예측했지만, 기술의 발전과 새 로운 유전 발견이 매장량 증가에 기여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만 한다." 국제에너지기구는 기술적으로 회복 가능한 자원(즉, 당장 채유를 하지는 않아도 존재하는 자원)이 현재 지구 지하에 6조 배럴 정 도 묻혀 있다고 추정한다." 기술적으로 회복 가능한 자원은 기존 의 기술로 지금 당장은 채유할 수 없으나 미래에 채유 가능한 자원 이란 의미로, 석유시장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변동하는 원유 의 가격과 기술의 변화, 석유 탐험가와 채굴업자의 집념을 절대 과 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질학자들과 석유 공급 전문가들은 땅속의 새로운 원유를 찾아서 개발할 가능성에 관하여 금세기 중반까지는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석유가 있다는 것에 일치 된 견해를 보였다.
- 새로운 시대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세계 석유시장에서 유가 안정을 목표 로 생산을 기꺼이 규제할 수 있는 스윙프로듀서가 없다는 것이 분 명해지면서 엄청난 전환이 일어났다. 사우디는 2008년 가격 폭등 을 막지 못했고 2014년 가격 폭락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이 두 번 의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스윙프로듀서도 가격 안정을 위해 생산을 조정할 수 없고, 발 벗고 나설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 실제로 석유시장에는 1986년 이후 진정한 스윙프로듀서가 부재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눈에 띄지 않았다. OPEC은 일시 적인 비상사태와 가격 붕괴에 대응했으며 만성적인 공급 과잉은 발생하지 않았다. 사우디와 OPEC은 1998년부터 1999년까지의 가격 붕괴 이후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목표 내에서 가격을 안정시 키고 산유량을 조절함으로써 세계적인 원유 수요와 공급의 변화를 예상하고자 하였다. 1980년대 초반 사우디가 유가를 지탱하기 위 해 공급량을 대폭 줄인 것과 비교하면, 미미하지만 2008년 이전의 사소한 조치들로 미루어 OPEC, 즉 사우디가 석유시장을 책임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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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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