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사회

사회 2023. 9. 5. 12:18

- 본업을 두고 부업을 하는 것이 언제부터 당연한 일이었을까? 'N잡러'가 능력의 상징이자 자랑거리로 받아들여지기도 하 지만, 실상 이는 고용의 질이 떨어졌고 안정적인 일자리가 줄 어들었다는 증거다. 취미 이상의 부업을 모색하는 이유는 대부 분의 경우 본업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거나, 먹고살 만하더라 도 향후 더 나은 삶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에서 성공을 도모하는 대신 모두가 '부캐'를 탐색해야 하고, 동시 에 부동산과 주식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 정상은 아닐 테 다. 현 세태는 돈이면 다 된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돈 많으면 장땡이다, 이런 분위기라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지난 3년여 시 간 동안 한국 사회가 병치레한 것은 코로나19만이 아니었던 셈 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 기저에는 신뢰의 부재가 있다. 돈이 외에는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는 세상이다. 애초에 국가가 버팀 목이 되어주지 못했던 사회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도움을 주는 한편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주변 집 단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이어주며 삶의 지지대 역할을 하던 공동체의 흔적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나의 생존 따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공간에는 의지할 곳 없는 개 인들이 파편화되어 점처럼 존재하고, 전반적인 신뢰 수준이 떨 어진 자리에서 각자의 불안은 점점 심화된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나와 우리 가족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엄밀히 꼭 돈에 국한된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돈으로 환산 가능한 자산, 혹은 미래에 돈을 벌어들일 만한 유무형의 자산이 어야 한다. 자신의 직업이나 소속, 학벌, 부모님의 직업과 재산, 살고 있는 아파트의 평수와 입지 및 브랜드, 몰고 다니는 차종 등 한국은 돈으로 환산 가능한 자산의 가치를 나타내는 '숫자'가 전부인 사회가 되었다. 심지어 중노년층 사이에서 서열을 가리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자녀의 대학 간판이라고 하니, 은퇴하고 나 서도 평생 이러한 비교에서 자유로워지기란 매우 어렵다. 사회적 신뢰가 사라지고 숫자로 표현되는 물질적 · 외형적 가치만 남은
현실에서는 오직 경제적 자유만이 나와 내 가족을 살리는 확실한 수단이 된다.

- 요즘에는 예전과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기는 했다지만 여전히 야근을 당연시하는 조직이 많은데, 어차피 주어진 일을 빨 리 끝내봤자 칼퇴근은 꿈도 못 꾸고 야근을 해야 한다면 남들보 다 먼저 끝낼 동기가 전혀 없지 않나. 이런 점이 우리나라가 항상 장시간 근무에 시달리면서도 노동 효율성은 떨어지는 것으로 나오는 근본적 원인이기도 하다.
이런 경향이 최근의 일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품앗 이라는 전통을 지닌 우리네 농촌에서도 예부터 마을 주민들이 모여 모내기를 할 때 해당 논의 주인이 잠깐 자리를 비우기라도 하면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을 멈춘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만약 일을 빠르게 해내는 데 대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공사 현장에는 야리끼리라는 은어가 있 는데 이는 '근무시간에 관계없이 주어진 분량의 일을 마치면 집 에 가도 좋다'는 의미다. 이 '야끼리'가 주어지면 인부들의 일 집중도는 높아지고, 심지어 종일 걸릴 일을 오전 중에 다 마치 기도 한다. 그리고 일을 끝내기 무섭게 공짜 점심도 마다하고 집으로 가버린다. 한국의 노동 효율성 통계 수치가 낮은 이유를 단순히 노동자들이 게으르거나 비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해서, 다시 말해 그들 대부분이 '일을 못해서'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는 뜻이다.

- 재미있는 것은 한국인들의 이중성이다. 중간과 평균을 다른 말로 하면 평범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평범을 선망하면서도 싫어한다. 조금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사회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소위 '튀지 않는 선에서 다른 사 람들과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남들과 다른 점을 발견하고 개성을 추구하며 존재감을 인 정받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욕구이자 보편적 욕망이라 고 한다면, 아무 특색 없는 '다수 중 하나'로 남기보다 자신만의 무언가를 부각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자연스럽다. 우리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점은 튀는 것을 싫어하고 지양하는 성향이다.
'남들과 같은 거 싫어하면서도 튀는 것 역시 싫어하는 이 중성이 한국인만의 특징은 아닐지라도 거의 모든 한국인이 이 러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우리 대다수는 이러한 역설적인 특성을 지 닌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를 나대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나댄다'의 폭은 상당히 넓어서 단순히 분위기 파악 못하고 설치는 사람만 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튀다'와 '나대다'는 각각의 뜻을 가진 다 른 어휘이지만 좋은 쪽으로든 좋지 않은 쪽으로든 튀는 사람들 은 주변인으로부터 나대는 인간으로 찍히기 쉬우며, 많은 경우 두 단어는 거의 동의어에 가깝게 쓰인다.
질문을 하면 나댄다고 여겨지는 것이 그 대표적 예다. 학창 시절부터 그렇지 않나. 질문이나 발표를 지나치게 많이 하면 눈총을 받는다. 그렇게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훈련된 한국인은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

- '부심'은 본디 자부심에서 왔지만, 자기 자신 또는 자기와 관련 된 것에 대해 스스로 그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 음이라는 원래의 긍정적인 의미와는 달리 지나친 자부심을 조 롱할 때 사용되는 부정적인 은어다. 좋은 차를 자랑하는 차부심 부터 소소하게는 냉부심(냉면 맛을 제대로 아는 자부심, 특히 슴슴한 평양냉면), 맵부심(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는 자부심), '술부심'(술을 잘 마신다는, 즉 술이 세다는 자부심) 등 '그래도 이건 내가 평균 이상이지' 싶은 것이 있다면 크든 작든 '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부심'의 침투력은 실로 어마어마한데, 이러한 마음의 본질 은 남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차별화를 통한 존재감 확인과 인정 욕구의 충족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자신이 가진 무엇 하나 (특히 물질적 가치를 지닌)라도 내세워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열등 감이 숨어 있다. 그마저 없다면 남들보다 나은 점을 찾기 어려 운 까닭이다.

- 획일화된 가치를 바탕으로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판별해 온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손쉬운 방안은 소비를 통한 차별화와 과시 뿐이다. "남들이 갖지 못하는 제품을 사라, 그것이 너를 특별하 게 만들어줄 테니. 동시에 남들 다 사는 제품 역시 기본적으로 갖춰라." 모두가 원하고 소유하는 상품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곧 중간이라고 명명된 사회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이는 양보할 수 없는 사회적 생존의 문제가 된다. 다른 사람에 게 뒤처질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이 빚어내는 결과는 '소비 행 태'마저 따라 하는 모방 소비, 그리고 능력을 벗어나는 무리한 구매를 하면서도 그러한 소비가 자신을 특정 계층에 속하도록 해준다는 착각이다. 이러한 행위에 대한 문제의식이 옅어진 공 간에는 그게 뭐 어떠냐는 인식이 확산되어 가고 있다.

- 영화 <기생충>의 개봉 이후 주인공 가족 아들이 친구와 과외 이야기를 나누던 아현동 슈퍼와 그 가족이 폭우 속에서 반 지하 집으로 돌아갈 때 내려간 계단 등 영화 촬영지는 관광지 가 되었다. 몇 해 전에는 모 지자체가 쪽방촌 체험 기획을 시도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백지화한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에 나쁜 의도가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곳을 삶의 터 전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 없이 내가 그들과 '같지 않다'는 인식을 품고 있기에 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기 본적으로 소비의 대상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나는 저런 삶을 살 리 없다는 의식을 전제로 한다. 힙플레이스에는 가난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는 물론 지난한 삶과 일상의 무게가 거세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새롭고 특별한 이벤트로 소모되고 소비될 수 있다

- 모든 것을 소비하는 한국 사회는 이제 시간과 공간, 분위기마저 그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사람들은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 방문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신선한 활동을 원한다. 동시 에 남들보다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유행에 뒤 처지고 싶지 않아서 소비한다. 삶의 필요need와 자신의 욕구want 를 넘어 단지 대세를 따르기 위한 소비가 이루어지고, 구매하는 물질적 가치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확인한다. 모든 행동에는 '돈'이 들고, 시간과 공간을 사고 난 흔적은 인스타그램에 사진 몇 장으로 남는다. 과시를 위한 온라인 게시물은 오프라인 공간 과 상호 작용하며 이러한 추세를 부채질한다.

- 먹고사는 것이 전부였던 조선 백성들이 개인의 고유성과 가치, 자신만의 삶을 추구한다는 생각을 평생 몇 번이나 해봤 을까? 남들과 다른 나만의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해 봤을까?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비교가 일어나는 좁은 집단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남들보다 많은 수확물을 거둘지 여부가 중요했을 것이다. 이웃보다 더 많은 수확물과 토지를 갖 고 최소한 마을 공동체 평균에 뒤처지지 않았다면 인생에서 특 별히 크게 괴로울 일이 없는 것이다.
만약 농민의 자식이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별자리를 잘 기 억한다거나, 음감이 좋다거나 하면 어떨까? 농사에 도움이 될 만한 재능이라면 충분히 인정받고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농사일과 그다지 관계없는 능력이라면 애초에 개인의 고유성이 드러나기도 힘들지만 드러난다고 해도 주목받거나 발 전시키기 쉽지 않을 확률이 높다. 사회적, 경제적, 계급적 인정 은 고사하고 공동체에서 배척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남들에게 없는 독특한 자질을 살리기보다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재능이 있건 없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마을'에 이스'에게 농업기술이나 전수받는 것이 최선일 테다.
비교와 차별화 욕구 자체는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요점은 비교 대상이나 차별화 수단의 다양성에 있다. 과거라는 시험에 합격해 신분 상승을 이루면 최고의 차별화일 테지만, 이러한 수 단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대 다수는 무엇으로 차별화할 것인가? 토지와 수확량, 돈이 되는 작물, 농기구와 농업기술 등 여러 방법이 있겠으나, 그게 무엇이든 마을 공동체 내부의 상상력을 벗어나는 방식은 사용할 수 없다.
서로의 사정을 꿰고 있는 이웃들로 연결된, 대안적 삶의 경 험이 부재한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했던 조상들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다른' 꿈을 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조상들 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양상과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 '과거 급제-토지 확보-수확량 증대'라는 조선 시대의 성공기제는 현재 한국 사회의 성공 공식으로 여겨지는 '고시 · 정규 직 합격(시험을 매개로 한 간판)-아파트(자산) 보유-소득(돈) 증 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과거 급제가 단순히 벼슬이나 순수한 명예만을 의미하지 않고 높은 계급으로서의 권세는 물론 막대 한 부를 축적하고 세습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는 점과 20세기 의 고시 합격이 고위 공직자나 소수 전문직으로서의 사회적 신 분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제적 이득과 잠재적 이권 접근권까지 보장했다는 점도 퍽 닮았다.
더 일반적인 성공으로 가는 길에는 과거 급제가 아닌 토지와 수확량에, 고시 합격이 아닌 자산 취득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는 점과, 시간이 갈수록 고시와 정규직 합격이 경제적 부를 보장하지 않게 되면서 매력이 감소하고 돈과 아파트로 대표되 는 자산이 사회적 신분 상승의 주된 발판이 되었다는 점까지도 역사의 흐름에서 크게 비껴가지 않는다.

- 역사적으로 국가가 개인과 개별 가구를 지켜주지 못했고, 사회 안전망에 대한 구성원 간 합의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그 역할은 일차적으로 가족에게 주어졌다. 직계가족과 가까운 친척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던 부분을 메워주던 마을 공동체가 소멸하다시피한 현재 상황에서 가족은 가장 원초적이자 최후의 복지 수단이다. 결혼과 육아를 해야 할 때 가족은 경제적 지원을 해주고 손주를 봐주며, 실업과 질병 등 경제적 위기 시에는 무이자 구제금융기구 역할까지 도맡는다. 그러나 국민 절반 가까이가 혼자 사는 세상에서 가족에 의지하 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이러한 사적 복지 역시 충분한 여유가 있는 상위 계층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 개인의 욕망을 건강하게 추구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공유하는 목표를 잃어버린다면, 각자의 내 면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욕망들이 그 압력만큼 강하게 분출하 게 된다. 더 많은 소득과 자산을 향한 갈망, 외적 가치에 기반한 비교와 질시, 중간과 평균에 대한 강박, 과시를 통한 존재감 확인, 뒤처지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 서로 뒤섞이며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가 강하지 않았던 사람마 저 사회 전체를 물들이는 욕망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휩쓸리게 된다. 함께 사는 세상에서 자신의 욕망을 무한대로 추구하며 공 존하기란 매우 어렵지만,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한 우리의 선택은 상대에 대한 진정한 배려나 존중, 신뢰가 아니라 평판 관리와 비난을 피하기 위한 눈치 보기였다.
모두가 개인주의자로 살고자 하지만 무엇이 건강한 개인주의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 적 합한 개인주의를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 모든 사람은 결국 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끝내 섬으로 남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섬들이 붙어 거대한 대륙 이 되기까지는 엄청난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고, 현대사회를 살 아가는 우리에게 그 정도의 정신적 여유는 없다. 사람들은 '우 리'라는 단어를 일상에서 참 쉽게도 사용하지만, 정작 '우리'라 는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된다. 살아남기 위해 잔뜩 움츠린 동안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경계는 갈수록 선명해진다. 그렇게 서로를 잇는 선은 사라지고 서로를 가르는 선만 남는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우리가 원하는 삶일까?
-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출한 이후 자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해왔던 생활 양식이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음을 발견한 이들에게 는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향유했던 평범한 삶을 어떻게든 다시 손에 넣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곧 '사회적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연결되며, 게임의 승리 요건은 남들에게 뒤처지 지 않을 정도의 물질적 가치와 사회적 인정 획득이다.
현재 젊은 세대는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누렸던 '삶의 기본 값'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있다. 결혼과 육아 기피 역시 이 러한 불안과 두려움의 연장 선상에 놓여 있다. 결혼하고서도 내 가 원하는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아이를 낳는다면 그러한 삶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 는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집값 안정은 물론 각종 육아 수당 제공, 육아휴직 활성화, 경력 단절 대책 등 여러 실질적 지원이 필요하나 이 모든 것에 앞서 기저에 깔린 심리를 읽어내야 한 다. 부동산 대책은 물론 출산율 제고 역시 이러한 인식 변화를 정면에서 마주하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풀어야 할 것이다.
- 국가나 사회의 공적 안전망을 대신하던 공동체의 해체는 사람들이 마음 깊이 감추고 있는 연대의 욕구가 가족의 울타리 를 넘어서지 못하도록 막는 동시에 타인에 대한 경계 수준을 높 이는 결과를 불러왔다. 사람들은 차가운 사회 어딘가에서 따뜻 한 손길을 찾아 헤매다 가끔씩 나타나는 미담에 그래도 아직 세 상은 살 만하다며 위안과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사회 안전망의 부재가 불러오는 불안 속에서, 연대와 소속감을 바라면서도 남 들을 믿을 수 없기에 그 누구도 먼저 나설 용기를 내지 못한다.

-  우리는 한국인 대다수의 소득 수준이 1장에서 설정했던 '소득-행복 비례 상한선 아래 위치할 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수의 근로자들이 몰려 있는 구간이 한국 사회의 평균 연봉보다도 밑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 다수는 전반적 만족 혹은 일상의 행복감은커녕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빡빡 하다는 것도 확인했다. 삶의 기본적인 필요조차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마당에 돈과 자산에 대한 욕망을 줄이기란 매우 까다로운 과제다.
- 심지어 SKY로 대표되는 학벌이나 안정적인 정규직 등 사회적 '간판'의 획득보다 돈이나 돈으로 환산 가능한 가치로 초 점이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더 직관 적인 '재력'으로 쏠리는 현상도 여러 사례를 통해 알아보았 다. 2020년대 한국 사회에서 자산 소유 정도는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결정짓는 사실상 첫 번째 요소가 되었다. 이전에도 '돈' 은 변호사와 의사 등 전문직을 선택하는 데 주요 고려 사항이 었다. 하지만 그러한 자격 혹은 간판이 모든 직역에 걸쳐 급격 하게 떨어지고 있는 '안정성'을 그나마 높은 확률로 보장한다는 점이 여전히 많은 이들로 하여금 이러한 직종을 선망하도록 만든다
- 사람들의 욕망을 완화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안은 돈과 자산을 기준으로 나와 남을 가르고 그들과 비교해 더 많은 외적 가치를 확보하는 데서만 만족을 얻는 '만족 메커니즘'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결핍 혹은 인정욕구를 채울 수 있는 다른 방도를 확립해 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면 끝 없는 경쟁의 치열함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지고, 과시적 소 비를 통한 우월감 획득 레이스를 멈출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상(理想)이다. 우리가 가진 '중산층'에 대 한 인식과 기준이 바뀔 수 있을까? 중간은 가야 하고 평균은 넘 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한 쟁투를 멈출 수 있을까?
개인 단위에서는 마음 편하게 욕망을 다스리며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행복에 이르는 여러 방안을 일상의 삶에서 실천하 며 타인에 대한 신의와 선한 마음을 가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자산 축적과 모든 종류를 망라한 소비의 이면에 감추어 진 과시욕을 다스리려는 노력은 분명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삶의 질을 올리는 데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 구조 적 해법으로 논할 만한 방안이라 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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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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