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사키 박사는 1994년 린다우 노벨상 수상자회의에서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기 위해 해서는 안 되는 5가지를 언급했 다. 이것이 바로 매우 유명한 에사키의 '학자 오불五不’ 이다.
일불-不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속박이나 굴레에 얽매이면 통찰력이 둔해지고 창조력이 발휘되지 않는다.
이불不 권위 있는 선생을 존경하는 것은 좋으나,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삼불=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필요 없는 것까지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사불四不 자신의 주관을 관철시키는 데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오불五不 순수한 감성과 호기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 "왜 독일이 강한가?”라는 질문에 독일 사람들은 히든 챔피언을 필두로 한 미텔슈탄트.Mittelstand의 파워 덕분이라고 답한다. 미텔슈탄트 는 독일의 중소기업을 가리킨다. 독일을 풍요로운 국가로 이끌어준 중산 계급이라는 존경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독일의 산업화 과정에서 농업과의 겸업 형태로 수공업을 영위하던 직인들이 미텔슈탄 트로 진화했다. 마이스터로 불리는 고기능 장인들이 고품질의 제품 을 생산했다. 그러나 독일 산업화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독일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제임스 와트가 증기 기관을 발명하고 약 100년이 지난 후부터다. 보불전쟁(1870~1871)에서 독일이 승리하고 배상금으로 받은 50억 프랑으로 철도 등 사회 인프라를 확충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철강 같은 중공업이 발전했고, 화학 및 기초 연구에 집중 투자를 하면서 급속한 발전이 가능했다. '메이드 인 저머니 Made in German)'라는 원산지 표기는 품질이 떨어지 는 독일 제품을 쉽게 알아보기 위해 1887년 영국이 요구를 해서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독일의 산업화는 많이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독일은 누구나가 신뢰할 수 있는 고품질, 하이테크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
- 독일인들은 스스로 중소기업의 나라라고 부른다. 전체 중소기업 수를 보면 독일이나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큰 차이가 없는데 자랑스럽게 중소기업의 나라라고 한다. 나는 그 이유를 독일에는 계열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기업에 의존하고 생산만 담당하는 경우가 많은 우리나라나 일 본과 달리 독일의 중소기업은 생산은 물론 전략·기획·연구·마케팅 · 수출 등 모든 경영 활동을 스스로 해야 한다. 독자적으로 경영하고 생존해야만 하는 것이다. 독일에는 부실 기업 지원 제도가 없다. 만약 중소기업이 부실해지면 정부의 어떤 구제도 받을 수 없고 자동 퇴출된다. 대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면 중소기업의 생존 능력은 매우 강해질 것이다. 이는 수익성 증가로 나타난다. 혹자는 독일 중소기업이 전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 독일의 주 정부는 1990년대 말 하버드대학 마이클 포터 교수가 산업 클러스터를 주창한 이후 지방 중소기업 지원 움직임을 더욱 체계화했다. 예를 들면 벤츠, 포르쉐의 본사가 있는 슈투트가르트 지역은 슈투트가르트대학과 자동차 부품 기업 간 공동 연구가 더욱 활발해졌고, 괴팅겐대학은 수학과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계측 기기 클러스터 형성을 주도하기도 했다. 시계 산업이 전통적으로 발달한 서남부의 소도시 투틀링엔은 정밀 공학으로의 발전을 거쳐 지금은 의료 기기 집적지로 발전했다. 독일 기업이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인지 글로벌 금융 위 기 등 경영 여건이 악화되었을 때도 종업원을 거의 해고하지 않았 다. 노동 시간 저축 제도, 정부의 조업 단축 보조금 등을 활용해 고용 유지에 힘썼다. 노조원이 200만 명을 넘는 독일서비스노조연맹도 성과급제 도입과 임금 동결에 합의하는 등 경영 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보탰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독일 기업은 숙련 노동자를 유지할 수 있었고 경제가 호전되었을 때 더욱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
- 일반적으로 M&A의 목적은 산업 흐름을 선도하기 위해 그 분야에서 가장 유망한 기업을 인수하는 것과, 경영상 어려움에 직면한 기업을 인수해 재생시킴으로써 기업 가치를 높이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나가모리가 인수한 기업은 거의 대부분 경영상 어려움에 처한 후자에 해당한다. 나가모리는 종업원을 거의 해고하지 않고 기존 직원들의 힘으로 경영을 정상화시킨다. 그는 혁신을 주도하지만 비상임으로 급여를 받지 않는다. 니혼덴산이 파견하는 인력은 임원 두세 명에 불과하 고 경영이 정상화되면 다시 복귀한다. 철저한 비용 절감을 추진하고 단기간에 흑자로 전환시킨다. 그 결과는 63승 0패'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 성공했다.
M&A 성공은 의식 개혁에서 출발 2003년에 인수한 산쿄정기제작소의 사례로 나가모리식 혁신을 들 여다보자. 나가모리는 직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적자 기업을 흑 자로 탈바꿈시킨다. 경영을 정상화시키려면 직원들의 의식 개혁이 가장 중요하고 의식 개혁만이 경영 정상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 각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의식 개혁부터 시작했다. 먼저 이세 마사오미伊勢雅가 "세계가 칭찬하는 일본 경영》에서 말하는 나가모리식 의식 개혁이다.
나가모리는 산쿄정기제작소 직원들이 자주 가는 라면집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라면 맛을 다른 가게보다 5배 맛있게 만들거나 5배 빨리 서비스하기는 어렵지만, 종업원의 접객 태도에 따라 손님 기분을 100배 좋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며 의식 개혁을 주문한다.
- 나가모리식 경영의 기본은 6S다. 정리, 정돈, 청결, 청소, 작법, 예의 범절'의 일본어 앞글자가 S로 시작하기 때문에 6S로 표현하는데, 이 를 평가해 60점이 넘으면 반드시 흑자를 기록한다는 게 나가모리의 설명이다. 당시 산쿄정기제작소의 점수는 5점이었다. 대부분의 부 실 기업이 그러하듯 부품이 정리되어 있지 않고, 나사는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아무도 없는 회의실엔 하루 종일 불이 켜져 있었다. 자기 주위를 정리하지 않으면 물건 귀한 줄 모른다는 게 나가모리의 생각이다. 그래서 의식 개혁은 정리·정돈 청소 등에서 출발한다. 하루 일과가 시작하는 아침 8시부터 10분간 자기 주위의 청소 부터 시작하게 했다. 임원과 관리 직원이 먼저 화장실 청소를 시작하고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당번제로 화장실을 청소하도록 했다. 주 변이 정돈되자 물건이 보이고 원가에 대한 의식이 생겨났다.
- 세계 소형 정밀 모터 시장을 장악한 니혼덴산이 끝내 이기지 못한 기업이 있으니 바로 마부치모터라는 강소기업이다. 마부치모터는 자동차의 파워 윈도, 사이드 미러, 도어 록 등 편리성을 추구하는 분야에서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니혼덴산의 공격을 막아낸 마부치모터 니혼덴산과 마부치모터의 싸움은 2000년대 초 니혼덴산이 마부치 모터가 선점하고 있던 자동차의 파워 윈도용 모터 시장에 진입을 시도하면서 발생했다. 모터는 전류 방향을 바꿔주는 브러시라는 부 품의 사용 여부에 따라 브러시 모터와 브러시리스 모터로 구분된 다. 브러시를 사용하는 브러시 모터는 저가로 소음이 높고 수명이 짧은데 마부치모터가 생산한다. 이와 견주어 브러시리스 모터는 전자 회로에서 전류를 제어해 회전시키는 모터로 소음이 적고 수명이 길며 고가인데 니혼덴산이 주로 생산한다. 니혼덴산은 파워 스티어링 구동용 모터를 통해 자동차용 모터 시장 진입에 성공하면서 같은 자동차 분야의 파워 윈도용 모터 분야로 시장 확대를 추진했다. 파워 윈도용은 이미 마부치모터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기업의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두 기업 모두 모터 전문업으로 품질이 우수해 승패의 관건은 가 격이었다. 니혼덴산은 가격을 낮추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마부치모터의 가격 경쟁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니혼덴산의 가격이 마부치모터의 2배에 달할 정도로 마부치모터의 가격 경쟁력은 압도적이었다.
- 가전제품을 중심으로 모터의 수요처가 다양해졌지만, 완구용 모터 생산이 메인이었기 때문에 생산이 계절적으로 편중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특히 여름에 일감이 집중되고 겨울에는 주문이 끊기면서 숙련도 유지 등 인력 관리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1954년 4,700만 개였던 모터 생산이 1968년에는 1억 개를 넘어섬 으로써 제품 관리에서도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오늘의 마부치 모터를 있게 한 표준화가 이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모터 기업은 완구 기업의 주문대로 모터를 생산하는 것이 당연했다. 감히 표준화를 제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격 인하와 품질 유지를 조건으로 표준화를 제안했다. 마부치는 5~6종의 모터를 표준으로 하면 주문의 약 70%는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겨울철에 표준품을 생산해 적정 재고를 확보했다. 표준품을 사용할 경우 20% 가격 할인이 가능함을 제시하자 고객의 절반 정도가 표준품을 선택했다. 제일 먼저 표준품 제안을 받아준 곳은 지금은 세계 최대 완구 기업으로 성장한 미국의 마텔이었다.
- 가격을 대폭 인하해 단위당 이익은 줄어들었으나 계획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생산성 향상과 불량률이 줄어드는 등 품질이 크게 개선 되었다. 모델별 수량이 늘어나면서 부품의 생산 원가 또한 더욱 낮 아져 가격 인하 전보다 이익이 늘어났다. 자신감을 얻은 마부치는 표준품에 대해 30% 가격 인하를 단행했다. 이 방식으로 3년 정도 에 걸쳐 고객의 80%를 표준품으로 전환시켜갔다. 주문 생산에서 표준품으로 전환한 것은 요즘 자주 이야기되는 고객 수요 맞춤형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시대의 흐름과 반대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주문 생산으로 취급 품목이 통제 불가능할정도로 증가하는 경우라면 표준화 · 규격화가 답이 될 수 있다.
- 베이스 모터를 기본으로 다양한 수요에 대응: 모터는 케이스가 되는 하우징Housina에 회전을 담당하는 로터Rotor를 넣고 뚜껑 역할을 하는 엔드벨로 마감을 한다. 마부치모터는 이들의 결합을 통해서 약 350개의 베이스 모터를 구비하고 고객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고객의 수요를 확인하면 먼저 스펙 요구서를 작성 하고, 이를 영업 부문과 기술 부문의 전문가로 구성된 마부치모터의 검토를 거쳐 베이스 모터로 대응이 가능한지 여부를 판단한다. 베이스 모터로 대응이 어렵다면 베이스 모터에 옵션을 추가한 특 수 사양으로 개발할 것인지 아니면 신제품으로 개발할지를 결정하는 단계별 의사 결정 체계를 갖추고 있다. 마부치는 다양한 용도에대응하기 위해 모터의 성능을 최대화함과 동시에 소형, 저소 음, 낮은 전력 소모, 긴 수명 등 모터의 기능을 극대화하는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면서도 표준화로 저가격을 실현하고 있다
- 유니클로와의 협력은 성공적이었다. 첫 제품 후리스는 2,600만 개 가 팔리며 국민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도레이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연간 6,000톤의 원료를 공급했는데 단일 고객으로는 최대 물량을 기록했다. 두 번째 성공을 기록한 히트텍은 시제품만 1만 벌을 테스트할 정도로 소재 개발에 공을 들였다. 까다로운 유니클로의 요구에 철저히 대응했다는 표현이 맞다. 통상적으로 소재 기업은 고객과의 거래 관계에서 다소 고압적인 자세를 보이는데, 후리스에서 히트를 기록함으로써 두 기업 사이에 상당한 신뢰가 형성된 덕 분에 수평적 협력이 가능했을 것이다. 2006년에는 원사부터 최종 제품 판매까지 총괄하는 일관 상품 개발 체제 구축을 기본으로 하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울트라 라이트 다운 및 UV 차단 카디건 등 인기 상품을 속속 개발하는 시점이다. 전략적 파트너십은 5년 단위로 갱신하는데 지금은 제3기(2016~2020)에 접어들었다. 제3기 전략적 파트너십 기간 동안에는 2기 파트너십 때의 매출액 6,000억 엔보다 대폭 늘어난 1조 엔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유니클로와 도레이 모두에게 커다란 성장 모멘텀을 제공하고 있다.
- ITO 필름은 전도성 필름으로 스마트폰 터치 패널용으로 쓰이고 있는데 닛토덴코가 세계 시장의 70% 정도를 장악하고 있다. 닛토덴코는 ITO 필름에 적용되는 산화물 코팅 기술의 연구 개발을 30년전부터 시작했다. 1980년대에 이미 제품화에 성공했으나 당시에는 수요가 거의 없었다. 1990년대에도 가라오케 단말기에 쓰이는 정도로 수요는 미미한 니치 마켓이었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2000년대에 들어서자 터치 패널 수요가 급팽창했다. 그 결실은 세계 시장 석권이라는 형태로 고스란히 닛토덴코의 몫이 되었다.
- 닛토덴코는 고객 우선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면서 지금은 세계 편광 필름 시장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2000년대 후반 글로벌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액정 TV 수요가 급감하면서 계기가 마련되었다. TV 수요가 줄어들면서 가격 인하 압력이 거세졌고, 자연스럽게 편광 필름을 포함한 부품소재의 납품 가격도 인하 요구가 많았다. 생산 효율 개선만으로는 가격 인하 요구에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에 서 나온 해답이 롤 투 패널이었다. 당시 광학 필름 메이커는 폭 2m의 롤 상태로 필름을 생산한 후 사이즈별로 절단해 TV 메이커에 제공했다. 닛토덴코는 여기서 그치 지 않고 고객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롤 상태의 필름을 고객인 TV 생산 공장으로 가지고 가서 현장에서 절단하고 액정 패널에 부착 하는 것까지를 포함한 토탈 서비스를 제안했다. 고객 기업의 반응 은 뜨거웠다. 비즈니스가 이런 수준까지 일체화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납품 기업을 다른 기업으로 변경할 수 없다.
- 오일 쇼크 후 가장 어려운 시기에 로빈테크의 지분을 인수해 신테 크를 100% 자회사로 만드는 안에 대한 신에츠화학공업 이사회의 반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신테크 사장으 로 취임하는 가나가와 치히로金川千尋 상무가 인수 안을 적극 찬성했 다. 오다기리 신타로小田切新太? 사장이 이를 승인해 1976년 1,000만 달러(약 30억 엔)를 지불하고 자회사로 편입시킨다. 신테크 지분을 매입하고 2년 후 신에츠화학공업 본사도 오일 쇼 크의 영향을 피해가지 못했다. 종업원 2,800명의 20%가 넘는 600명 을 구조 조정할 정도였으니 당시의 M&A가 얼마나 어려운 결단이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테크 M&A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1990년 연간 생산 능력이 90만 톤으로 늘어나면서 미국 최대의 PVC 기업으로 발돋움 한다. 2000년 루이지애나주 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해 2001년부터 연간 생산 능력 200만 톤을 돌파하면서 세계 최대의 PVC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된다. 1974년 미국 13위에서 시작해 27년 만에 세계 1위 를 차지한 것이다. 2018년 원료인 에틸렌 공장까지 완성함으로써 일 관 생산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신에츠화학공업의 성공을 숫자로만 본다면 행운이 따라와서라고 할 수 있겠지만, PVC 같은 범용 제품으 로 기술력 차이도 크지 않은 분야에서 고속 성장을 하게 된 데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 가나가와 사장은 처음부터 소수정예주의를 관철시킴으로써 철저 히 비용 절감을 추진했다. 세계 1위의 기업이 되었는데도 미국 전체 를 영업 담당자 8명이 커버했고, 재무 담당자는 2명에 불과했다. 고 객 기업은 당연히 영업 직원 1명이 방문했다. 어떤 고객은 “신테크 가 우리 회사를 경시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할 정도였다. 1980년대에 신테크의 사외이사를 담당했던 다우케미칼 전 회장 벤 브랜치Ben Branch는 신테크를 “처음부터 리엔지니어링이 완성된 기업”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신테크는 비용 절감이 체질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기술 경쟁력에서도 경쟁 기업을 압도하고 있다. 경쟁 기업은 중합기 1기에서 9만 톤을 생산하는 데 비해 신테크는 15만 톤을 생산한다. 원료 투입에 서 제품 생산까지의 사이클 타임도 신테크는 4.5 시간인 데 비해 경 쟁 기업은 5.5시간으로 경쟁이 되지를 않는다. 이제 규모의 경제라 는 날개까지 달았으니 그 독주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다.
- 닛토덴코는 고객 우선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면서 지금은 세계 편광 필름 시장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2000년대 후반 글로벌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액정 TV 수요가 급감하면서 계기가 마련되었다. TV 수요가 줄어들면서 가격 인하 압력이 거세졌고, 자연스럽게 편광 필름을 포함한 부품소재의 납품 가격도 인하 요구가 많았다. 생산 효율 개선만으로는 가격 인하 요구에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에 서 나온 해답이 롤 투 패널이었다. 당시 광학 필름 메이커는 폭 2m의 롤 상태로 필름을 생산한 후 사이즈별로 절단해 TV 메이커에 제공했다. 닛토덴코는 여기서 그치 지 않고 고객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롤 상태의 필름을 고객인 TV 생산 공장으로 가지고 가서 현장에서 절단하고 액정 패널에 부착 하는 것까지를 포함한 토탈 서비스를 제안했다. 고객 기업의 반응 은 뜨거웠다. 비즈니스가 이런 수준까지 일체화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납품 기업을 다른 기업으로 변경할 수 없다.
- 신에츠화학공업의 성공의 힘 신에츠화학공업은 화학 기업으로는 글로벌화가 상당히 진행된 기 업이다. 매출의 50% 이상을 해외 시장에서 올리고 있고 생산의 40%는 해외에서 이뤄진다. 신에츠화학공업은 재벌계 화학 기업들 이 국내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 후발 주자로서 해외 시장이 당연한 선택이었을 수 있지만, 비교적 빠른 시기인 1960년대부터 글로벌화를 추진했다. 부족한 경영 자원을 외국의 선진 기업과 제휴함으로 써 극복해온 것이 오히려 경쟁력이 되었다. 신에츠화학공업의 초절약 경영, 경쟁사를 압도 또 하나의 성공 요인으로 오다기리 신타로, 가나가와 치히로 등 신 에츠화학공업의 경영진이 추진해온 초절약 경영을 들 수 있다. 신테 크가 미국에 설립된 이래 한 번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소수정예주의라는 철저한 초감량 경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통상 대기업의 임원이 되면 세 가지가 달라진다. 별도 사무실이 생기고, 비서가 딸리고, 승용차를 지원받는다. 그러나 연간 매출액 이 17조 원에 달하는 신에츠화학공업은 전무 이하 임원에게 '3점세트'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철저한 비용 절감 노력 덕분에 신에츠화학공업은 가격 경쟁력에서 경쟁사를 압도해왔고,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 1972년에 화낙은 수치제어장치에 미니 컴퓨터를 내장하면서 소프트웨어에 의한 제어가 가능해졌다. 즉 하드웨어는 그대로 사용하고 소프트웨어를 변경해 기능을 조정하는 것이다. 덕분에 생산의 유연 성을 확보하면서 비로소 CNC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컴 퓨터가 너무 고가였기 때문에 이를 감당할 만한 산업이 제한적이었다. 항공기 등 일부 첨단 분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인텔, MPU 개발 시작 당시 디램을 주력 산업으로 하고 있던 인텔은 신규 사업으로 초소형 연산 처리 장치MPU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공작기 계 업체들은 MPU 도입에 소극적이었다. 공작기계를 사용하는 고객 기업이 자동차, 항공기 등을 제조하는 대기업이고 특히 품질을 중시하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개발 초기인 MPU를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텔로서는 MPU의 용도 확보가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반면 일본의 공작기계 업체들은 자체적으로 수치제어 개발을 주 도할 여력이 부족했다. 공작기계 업체들의 규모가 아직은 크지 않 았고 기계 가공 기술을 기반으로 한 공작기계 업체에게 전자 제어 기술은 익숙하지 않은 분야였다. 따라서 일렉트로닉스 기반의 화낙 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환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 화낙과 인텔의 협력, 수치제어장치에 MPU 도입 컴퓨터가 워낙 고가여서 CNC 수요가 제한되는 문제를 안고 있던 화낙과 MPU의 새로운 용도를 확보해야 하는 인텔의 협력은 매우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1975년부터 수치제어장치에 MPU 도입을 추진하게 된다. 개발 초기 단계의 MPU가 수치제어장치의 두뇌에 해당하는 제어 기능을 담당하기에는 문제점이 많았지만, 3년간의 개선과 보완을 통해 1978년 현재 생산하고 있는 CNC의 원형에 해 당하는 시스템 6'를 출시한다. 성능이 향상된 MPU 8086을 사용함 으로써 소프트웨어 제어와 소형화를 모두 달성하게 된 것이다. 1965년 공작기계 시장의 28%를 차지했던 미국은 1982년 일본에게 최대 생산국 자리를 넘겨주어야 했다. 가장 큰 이유는 민생용 공작기계에서 수치제어화의 흐름에 뒤처졌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 공 작기계 기업은 수치제어 기술을 접목시키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한번 일본으로 기울어진 주도권은 다시 미국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2009년부터 중국이 공작기계 최대 생산국의 위치에 있으나 CNC 공작기계는 아직도 일본이 세계 시장의 60%를 차지한다.
- 키엔스는 다키자키가 두 번의 창업과 도산을 거친 후 29 세인1974년에 리드전기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회사에서 출발한다. 공장자동화에 필요한 센서, 화상 처리 시스템, 계측 기기 등을 생산하고 있다. 대리점을 두지 않고 전 세계 25만에 달하는 기업에게 직접 판 매하는 직판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46개국 210개 거점의 글로벌 영 업 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매출의 53%는 해외에서 발생하고 있다. 1986년에 '과학의 열쇠key of Science'에서 따온 상품명과 일치시키기 위해 회사 이름을 키엔스로 변경했다. 직판 체제는 회사 설립 초기부터 도입했다. 키엔스는 1982년에 선 제 자동 절단기 사업을 매각하고 광센서 등 전자 부품용 센서 사업 에 집중하게 된다. 당시 첨단 제품에 속했던 센서는 대리점을 경유 할 경우 판매 마진이 매우 높고 정확한 고객 수요 파악이 어려워 직 접 판매하는 형태를 취해왔다. 그래서인지 키엔스의 마케팅은 출발점부터가 독특하다. 시판하고 있는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집중한다. 따라서 키엔스의 영업 사원은 카탈로그를 열심히 설명하는 것과 같은 마케팅 활동은 하지 않는다. 고객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이를 '니즈 카드Needs Card'에 정리 하는 것부터 마케팅이 시작되는데, 영업 담당자는 한 달에 2건 이상 니즈 카드를 보고해야 한다. 이렇게 파악한 고객의 잠재 수요를 본사 DB로 취합한 후 검토 과정 을 거친다. 여기서도 키엔스의 독특한 제품개발 철학이 나타난다.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그대로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고객도 유사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즉 제품을 개발했을 때 일정 규모 이상의 수요가 존재하는지를 먼저 검토한다. 다른 고객 기업의 생산 현장에서도 같은 제품을 필요로 한다는 결론이 나와야만 개발에 들어간다. 따라서 수요자가 한정되는 주문 생산 방식이 아닌 범용 제품으로 제품을 개발하게 된다. 즉 특정 고 객의 수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제품을 개발하지만 다른 공장에서 도 필요로 하는 제품만 개발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결과 키엔스가 판매하는 제품은 다른 기업에서 취급하지 않는 제품이거나 세계 최초 또는 업계 최초의 제품이 대부 분이다. 매출의 30%는 개발된 지 2년 이내의 제품이 차지한다. 제품 규격을 자동 인식하는 3차원 검사 장비, 품질 검사를 위한 화상 판별 센서, 레이저 변위 측정기, 잔류 정전기 제거 장치, 미세 먼지 측 정기, 디지털 마이크로스코프 등이 키엔스가 개발한 제품이다. 가격 결정도 비교적 자유롭다. 키엔스는 매출액 총이익률, 즉 매출 에서 직접 원가를 뺀 이익률이 2019년에 81.8%를 기록했다. 매출 원 가가 18.2%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1만 원짜리 제품 의 원재료 등 직접 원가가 1,820원이라는 말이다. 키엔스는 매출액 총이익률 80%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 매년 비슷한 이익률이 지속되 고 있다. 세계적인 고수익 기업인 애플이나 소니의 매출액 총이익률 이 30~40%임을 감안하면 키엔스의 수익성은 놀라울 따름이다.
- 키엔스의 고수익 비결은 대부분 제품을 외주 생산한다는 데 있다. 그러면서도 100% 자회사인 키엔스엔지니어링을 통해 생산 원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 합리적인 가격 산출이 가능하다. 키엔스엔지니어링은 당초 퀵 리스폰스quick Response에서 앞글자를 따온 쿠레 포QUREPO라는 회사명으로 출발했다. 기술 보호 또는 적정한 외주 가 격 결정을 위해 시제품 생산이 필요한 경우에만 생산을 담당하고 있다. 키엔스의 전체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미만이다.
- 키엔스의 영업에는 3가지가 없다. 접대가 없고, 가격 할인이 없고, 주문서 작성이 없다. 대부분 고객의 필요에 따라 새로 개발한 제품 이니 고객을 접대해야 할 필요가 없다. 고객이 지불할 용의가 있는 가격을 설정하므로 가격 할인도 없다. 도리어 경쟁 제품이 시장에 출시되어 가격 인하 압력이 생기면 생산을 중단하는 것에서도 부가 가치를 중시하는 키엔스의 경영 철학을 느낄 수 있다. 영업 사원은 고객이 고민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다. 경쟁 기업이 유사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하나라도 더 판매해야 하는 고액 연봉의 영업 사원에게 접대나 주문서 작성으로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수는 없다. 주문은 전담 부서에서 대신 받아주면 되는 것이다. 굳이 또 하나 키엔스에 없는 것을 들자면 세습을 싫어해서 창업 자의 친족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임원을 포함한 모든 직원의 3촌 이내 친족은 입사를 거부하는 전통이 있다.
- 디지털화의 흐름과 함께 엔화 강세, 리먼 쇼크에 따른 세계 불황이 겹치면서 소니는 2008년부터 4년 연속 적자를 기록한다. 적자 폭도 매년 커져 급기야 2011년에는 4,500억 엔을 넘어섰다. 그야말로 위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시장에서는 소니에 대한 각종 루머들이 나돌면서 우려를 증폭시켰다. 위기 상황에서 2012년 히라이 가즈오平井一夫 사장이 등장해 소니 의 구조 조정을 추진한다. 히라이 사장은 '소니를 바꾼다, 소니는 바 뀐다'를 테마로 중기 경영 계획을 발표하면서 1만 명 인원 조정, 본 사 빌딩 매각 등 본격적인 구조 조정을 한다. 바이오/AID로 유명했던 컴퓨터 사업부터 매각한다. TV 사업을 분사화하는 등 사업 단위별 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신속한 의사 결정이 가능하도록 전 사 업의 분사화를 추진했다. 이를 통해 TV 사업은 2014년에야 10년간 적자를 탈피하고 흑자를 기록한다. 그러면서도 스마트폰, 게임, 이미지 센서를 중기 경영 계획의 3대 핵심 사업으로 정한다. 이들의 사업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미국 클 라우드 컴퓨팅 게임 업체인 가이카이 AKAI를 매수하고, 올림푸스와 자본 제휴를 강화하는 등 공격 경영의 초석을 다진다.
이때부터 소니는 이미지 센서에 집중적인 투자를 했다. 이미지 센서 는 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을 디지털 신호로 변환해 이미지로 보여 주는 반도체다.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기기로 사진을 촬영할 때 반드시 필요한 부품이다. 이미지 센서는 전하결합소자cCD 방식과 상 보성 금속 산화막 반도체cMos 방식이 있다. 초기에는 CCD 방식이 주로 사용되다가 화상 노이즈 제거 기술이 발달하면서 지금은 휴대전화 기기에 적합한 CMOS 방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소니는 이미지 센서 시장에서 2009년 세계 6위에 불과했으나 2018년에는 시장 점유율 50.1%의 압도적 1위를 달성한다. 이미지 센서는 단번에 소니의 부활을 이끄는 효자 품목으로 떠올랐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3년간 6,000억 엔을 투자해 2025년 점유율 60%를 달성하겠다며 자신감을 불태우고 있다.
- 무엇이 소니의 부활을 가능하게 했을까. 먼저 소니의 기술력을 꼽 을 수 있다. 소니는 2008년 세계 최초로 이면 조사식 센서ais 형 CMOS 이미지 센서를 개발했다. CMOS 이미지 센서는 촬영한 화 상에 노이즈가 발생하기 쉬운데 이러한 현상은 어두운 곳에서 두드러진다. 소니는 빛의 신호를 읽어 들이는 배선을 뒷면에 배치함으로써 빛의 효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노이즈 문제를 해결했다. 2012년 세계 최초로 적층형 CMOS 이미지 센서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경쟁기업과 해상도 차이를 벌리기 시작했다.
- 소니가 시사하는 교훈. 소니는 디지털 시대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세계적인 기업 소니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시대 변화에 대한 대응 실패의 이면에는 과거의 성공이라는 유산이 자리 잡고 있다. 디지털 TV 실패의 이면에는 평면 브라운관 TV라는 성공신화가 있었고, 디지털 음원 시장 실패에는 워크맨, CD로 이어지는 음악 산업에서의 성공 스토리가 있었다. 호황기에 다음 세대를 대비해야 한다고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소니만큼 영광과 좌절과 부활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기업도 많지 않다. 기업의 부활은 특히 어렵다. 그러나 소니는 5G, 자율 주행, 가상 현 실, 의료, 드론 등 다양한 분야의 수요를 바탕으로 미래 성장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이미지 센서를 중심으로 부활의 스토리를 만 들어가고 있다. 소니의 영광을 가능하게 했던 벤처 정신 → 성공 경험이 오히려 혁신을 방해하는 과정 → 부활을 가능하게 했던 저력’ 등 소니가 겪어온 일련의 과정은 우리 부품소재 기업의 글로벌 전략에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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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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