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수록 풍요롭다

경제 2023. 8. 11. 16:10

-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서울을 걸으면서 한국 경제의 엄청난 생산 역량을 살펴보세요. 이 모든 에너지와 자원들이 매일의 생 산을 위해 동원되고 있습니다. 광고판과 텔레비전을 뒤덮은 광고 상품들을 보세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바랍니다. 이 모든 생산 역량이 무엇을 위해 쓰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핵심적 필 요를 충족하기 위해 쓰이고 있나? 아니면 기본적으로 자본축적 의 이해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나? 이렇게 생산력이 큰데도, 인 구의 15퍼센트가 빈곤선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실은 고소득 국가들이 오래전에 지나간 일정한 지점을 넘어 서면 GDP와 사회적 지표들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깨진다는 것 입니다. 좋은 삶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무엇이 관건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양질의 공공 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 괜찮고 저렴한 주택 공급, 적절한 수준의 임금 등이죠. 좋은 소식은 경제를 자본축적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생태적 안정성을 중심으로 재조직함으로써, 이런 것들이 훨씬 적은 에너지와 자원을 가지고 도 충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제의 모든 부문들이 언제나 성장해야 한다고 전제하는 대신 에, 우리는 좀더 합리적인 접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경제의 어 떤 부문들(대중교통, 재생에너지, 저렴한 공공주택 등)이 여전히 확대될 필요가 있고, 어떤 부문들(SUV, 호화 주택, 공장식 축산 으로 생산된 소고기, 개인 전용기, 패스트 패션, 광고, 군비 등)이 사회적 필요성이 적으며 적극적으로 축소되어야 하는지를 결정 해야 합니다.
- 탈성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고소득 국가들이 불필요한 형태의 생산 규모를 축소하고, 동시에 공공 서비스와 주택에 대한 접 근을 확대하며, 소득 불평등을 줄이고, 노동시간을 단축하거나 완 전고용을 위한 일자리 보장제를 도입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는 어머어마하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구의 위험 한계선 내에서 모두를 위한 좋은 삶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 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를 성장주의의 폭정에서 해방시키고 보다 나은 길을 개척해야만 합니다.

- 생태적 가치를 내재한 애니미즘 논리는 자본주의의 핵심 논리에 직접적으로 반한다. 자본주의의 핵심 논리는 빼앗는 것이며, 더 중요한 점은 당신이 돌려준 것보다 더 많이 빼앗는 것이다. 사 실상 이것이 우리가 보게 될 성장의 기본 메커니즘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한때 애니미즘을 후진적이고 비과학적이 라고 경시했다. 그들은 애니미즘 사상이 자본주의 확장에 장애물 이라 여겼고 필사적으로 애니미즘 사상을 근절하려고 했다. 하지 만 오늘날 과학이 따라잡기 시작했다. 생물학자들은 인간이 독립 된 개체가 아니라 주로 소화작용 같은 기본적인 기능을 의존하는 미생물 유기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정신과 의사들은 식물 주변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중요하다는 것과 특정 식물이 인간의 복잡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생태학자들은 나무가 생 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 소통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토 양 속 균근 네트워크를 통해 영양분과 치료제까지 공유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자물리학자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 이는 개별 입자들이 심지어 먼 곳에 있는 다른 입자들과 뗄 수 없 을 정도로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지 구시스템과학자들은 지구 자체가 살아 있는 거대한 유기체처럼 움직인다는 증거를 발견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생명의 그물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생각하는 방 식을 바꾸고 있고, 새로운 존재 이론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고 있 다. 지구가 생태적 재앙으로 빠져들어가는 바로 이 시점에, 우리 는 나머지 생명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래전에 잊었던 비밀, 선조들의 속삭임처럼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비밀을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 자본주의의 등장은 자연스럽고 불가 피한 과정이 아니었다. 흔히들 짐작하는 것과 같은 점진적인 '이 행'은 없었으며, 분명히 평화롭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조직화된 폭력, 대규모 빈곤, 자급자족 경제의 체계적인 파괴에 기반해 등 장했다. 자본주의는 농노제를 종식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농노 제를 폐지한 진보적인 혁명을 없애버렸다. 실제로 생산수단 전 반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농민과 노동자들의 생존을 빌미 삼아 그들을 자본가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어, 농노제의 원리 를 새로운 극단으로 바꾸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스템을 두 팔 벌려 환영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것에 저항했다. 산업혁명으로 향 하는 15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의 기간은 세계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격동의 시기였다.
- 요점은 유럽의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이 무릎에서 발생하지 않았 다는 것이다. 그것은 피식민자들로부터 빼앗은 토지에서 노예 노 동자들이 생산하고, 인클로저에 의해 강제로 쫓겨난 유럽 농민들 이 배치된 공장에서 가공된 상품에 의존했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별개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두 같은 프로젝트의 일부이며, 동일한 기본 논리로 운영되었다. 인클로저는 국내에서 일어난 식민지화의 과정이었고, 식민지화 는 인클로저의 과정이었다. 유럽의 농부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선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땅에서 쫓겨났다(비록 명백히 후자 가 인권, 더 나아가 인류의 영역에서조차 배제되면서 더 나쁜 대 우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노예무역은 무엇보다 신체의 인클로 저와 식민화 과정이었다. 이때 신체는 토지와 마찬가지로 잉여를 축적할 목적으로 사용되며, 토지와 동일한 방식으로 자산으로 다루어졌다.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었던 폭력의 순간들을 단지 일탈로 경시 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순간들 은 자본주의의 기반이다. 자본주의하에서 성장은 새로운 개척지 를 필요로 하며 늘상 개척지로부터 가치를 뽑아내고는 가치에 대한 지불은 하지 않는다. 즉 자본주의는 성격상 본질적으로 식민주의적이다.
- 식민지 개입은 자본주의 등장에 마지막 퍼즐 조각을 더했다. 유럽의 자본주의자들은 대량생산 체계를 만들어냈다. 그러고 나 니 어딘가 팔 곳이 필요했다. 누가 이러한 생산물을 전부 소화해 줄 것인가? 인클로저가 부분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인클로저는 자급자족 경제를 파괴함으로써 대량의 노동자뿐 아니라 대량의 소비자도 양산했다. 소비자는 식량, 의복, 그밖에 다른 필수품을 얻기 위해 자본에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나 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자들은 해외의 새로운 시 장에 침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반구, 특히 아시 아는 세계에서 가장 품질이 좋다고 인정받는 수공업을 갖고 있었 고, 자국에서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물품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식민주의자들은 남반구의 지역 산업을 파괴하는 불균형한 무역 규칙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식 민지가 유럽의 대량 생산품을 위한 원자재 공급처뿐 아니라 전속 시장이 될 것을 강제했다. 이것으로써 자본의 순환이 완성되었다.
- 영향력 있는 스코틀랜드 상인 패트릭 콜크훈은 빈곤을 산업화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으로 보았다.
빈곤은 개인이 잉여 노동을 예비해놓지 않은 사회, 다시 말해 삶의 다양한 직업에서 늘 근면하게 일함으로써 얻는 것 외에 재산상의 잉 여나 생계수단을 갖지 못한 상태와 조건이다. 그러므로 빈곤은 사회 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빈곤이 없으면 국가와 공동체가 문명 상 태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빈곤은 인간의 운명이다. 부의 원천이다. 빈곤이 없으면 노동이 있을 수 없고, 그러면 부를 소유하는 사람들에 게 재물, 교양, 안락, 이익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데이비드 흄(1752)은 이러한 정서를 기반으로 '희소성'에 대한 이론을 딱 부러지게 구축했다. "지나치게 심하지 않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희소성의 시기에 더 많이 일하며, 진정으로 더 잘 살게 된다는 사실이 항상 관찰된다." 27 이러한 구절들은 주목할 만한 역설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지지자들은 성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유럽이 식민지를 개척하는 기간 동안 이와 같은 전략이 전세계 의 수많은 지역에 적용되었다. 인도에서 식민지 개척자들은 자급농업을 아편. 인디고·면·밀·쌀 같은 영국 수출용 환금 작물로 전 환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변화 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저항을 꺾기 위해 영국 정부는 세금을 부과했다. 세금이 농부들을 빚더미로 밀어넣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영국 동인도회사 그리고 이후 영 국의 인도 통치는 사람들이 의존하는 공동의 지원 체계를 해체함 으로써 변화에 속도를 내려 했다. 그들은 곡물창고를 파괴했고, 관개시설을 사유화했으며, 사람들이 목재·사료 · 사냥감을 얻는 데 이용했던 공유지에 울타리를 쳤다. 전통적인 복지제도가 음식 을 쉽게 구하고 여가를 누리는 데 익숙해지게 해 사람들을 '게으 르게' 만든다는 이론이었다. 따라서 그것들을 제거함으로써 굶주 림의 위협을 가르치고, 토지에서 더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 농업 생산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자 급 농업과 공동의 지원 체계를 파괴함으로써 농부들을 시장 변동 과 가뭄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였던 19세기 의 마지막 25년 동안 인도인 3000만명이 헛되이 굶어 죽었다. 역 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를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홀로코스 E’Late Victorian Holocausts 라고 불렀다. 헛되다고 한 것은 기아가 최고 조에 달했을 때에도 식량의 순 잉여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로 인도의 곡물 수출은 1875년 300만톤에서 1900년 1000만톤으로 세배 넘게 증가했다. 인도인들의 죽음은 인위적 희소성이 초래한 새로운 극단으로, 유럽에 가해졌던 그 어떤 것보다도 끔찍했다
- 더 부족할수록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돈 을 빼앗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물처럼 풍부한 자원을 차단하고 독 점권을 얻으면, 사람들에게 사용료를 부과할 수 있으므로 사적 인 부가 증가한다. 동시에 메이틀랜드가 '개인적 부의 총합'이 라고 칭했고, 오늘날 우리가 GDP라고 부르는 것을 증가시킬 것 이다. 그러나 이는 한때 풍부하고 자유로운 이용이 가능했던 것 에 대한 접근권을 빼앗아야만 달성될 수 있다. 사적인 부는 증가 하지만 공공의 부는 감소한다. 이것은 '로더데일의 역설' Lauderdale Paradox로 알려지게 되었다.
메이틀랜드는 이 역설이 식민지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식민지 개척자들이 과일과 견과류를 생산하던 과 수원을 불태웠고, 그래서 자연의 풍요로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임금노동을 하게 되었으며, 유럽의 식량을 구매할 수밖에 없 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한때 풍부했던 것이 부족하게 되 어야만 했다. 아마도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영국이 인도를 식민 통치할 당시 인도에 부과한 소금 세금일 것이다. 소금은 인도의 전 해역에서 자유롭게 얻을 수 있었다. 허리를 굽혀 주워 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식민지 정부의 세입을 창출할 계획 의 일환으로 사람들이 소금을 얻을 권리에 돈을 지불하도록 만들 었다. 공공의 부는 사적인 재산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했다. 즉 커먼즈는 성장을 위해 파괴되었다.
-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연상시키는 생산주의적인 행동은 자연스럽거나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러한 피조물은 500년 동안 문화적으 로 다시 프로그래밍된 산물이다.
몸에 관한 데카르트의 이론으로 인해 인간 노동이 자기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추상화될 수 있으며, 자연과 마찬가지로 시장에 서 교환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해졌다. 대지와 자연이 그랬던 것처럼 노동도 단순한 상품으로 바뀌었다. 이는 한세기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었던 개념이었다. 인클로저가 낳은 난민들은 권리를 지닌 주체로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성장을 위해 훈련되고 통제되어야 할 노동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 인클로저와 식민지 건설은 값싼 노동의 전유도 가능하게 했다. 자본은 보잘것없는 정도라 해도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들 (주로 남성들)에게 임금을 지불했던 반면, 그들을 재생산하는 노 동자들(대부분 여성)에게는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았다. 여성들 은 남성들의 음식을 만들었고 아픈 남성들을 돌보았으며, 다음 세대에 노동자가 될 이들을 양육했다. 사실상 생계수단과 임금노 동으로부터 여성을 단절시키고 재생산의 역할로만 제한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가정주부의 전형을 처음으로 만든 것이 인 클로저였다.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지배층은 잠재적인 여 성노동자 집단을 사실상 공짜로 착취했다. 이러한 과업에도 데카 르트의 이원론이 활용되었다. 이원론적 틀 안에서 육체는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펼쳐졌다. 여성은 남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다고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여성들은 종속되고 통제되고 착취당하는 대우를 받았다. 41 보상은 필요 없었다. '자연'의 범주로 치환된 모 든 것과 마찬가지로, 추출의 비용이 외부화되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이 식민지에서도 나타났는데 그곳에서는 한층 더 나 아갔다. 식민지 시대에 남반구의 민중들은 언제나 '자연'과 같은 것, '야만적'이고 '야생적'이며 인간 이하의 것으로 묘사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의 선주민들을 자연과 같은 것naturales 이 라고 지칭한 것은 시사적이다. 식민지의 대지와 식민화된 그들 의 육체에 대한 전유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원론이 이용되었다.
- 이원론은 유럽의 노예무역에서도 확실한 역할을 했다. 결국 어떤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려면 우선 그들의 인간성을 부정해야 한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과 아메리칸 선주민들을 물건으로 묘사 했고 그렇게 착취했다. 마르티니크 출신 작가 에메 세제르가 말 한 것처럼, 식민지 건설은 기본적으로 물화의 과정이다. 
한편 또다른 일도 일어나고 있었다. 식민화된 이들은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적 원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원시적'이라고 간주되었다. 43 유럽의 식민지 개척자들과 선교사들의 저술에서 우리는 그들이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세 계가 살아 있고, 산·강·동식물 심지어 대지조차 주체성과 정령을 가진, 의식이 있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그들이 경악했 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민주의적으로 전유함으로써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 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배출량에 관한 자료는 북반구의 산업화가 '대기 절도행위'atmospheric theft라 할 수 있는, 대기권을 전유하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식민지화의 첫 단계가 남반구 전 역에서 생태 파괴와 인간 파괴를 낳았던 것처럼 현재의 대기 식 민화도 마찬가지로 파괴를 낳고 있다. 기후위기에 사실상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음에도 남반구가 기후 붕괴에 따른 영향의 대부 분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우리는 북반구가 겪는 피해를 알고 있다. 미국을 강타하는 허 리케인, 겨울마다 영국을 물에 잠기게 하는 홍수, 유럽을 타들어 가게 하는 폭염, 호주를 황폐하게 만드는 사나운 산불. 북반구에 서 벌어지는 파괴적인 이야기들이 우리의 헤드라인을 독차지한다. 언론들이 이 이야기들을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호들갑은 남반구에 가해진 재난 앞에서 무색해진다. 카리브해 지 역과 동남아시아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파괴한 태풍, 중앙아메리 카·동아프리카·중동에서 사람들을 굶주림에 빠뜨리고 고향을 떠 나도록 만드는 가뭄 등의 재난은 우리의 텔레비전 화면에 아주 잠깐 등장할 뿐이다. 비교해서 말하자면 북아메리카·유럽·호주 는 기후변화의 영향에 가장 취약하지 않은 나라에 속한다. 실질 적인 피해가 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정말로 디스토피아급 규모다.
이러한 불평등을 설명하는 한가지 방식은 화폐로 환산된 비용 의 분포를 살펴보는 것이다. 기후 취약성 모니터 climate Vulnerability Monitor 라는 단체의 데이터에 따르면 남반구는 기후 붕괴로 인한 전체 비용 중 82퍼센트를 부담했다. 2010년 가뭄·홍수·산사태 · 태 풍·산불로 인해 총 5710억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28 연구자들은 이러한 비용이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30년까지 남반구는 9540억달러에 달하는 전세계적인 재난 비용 중 92퍼센트를 부담하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와 관련한 사망자 역시 남반구에 편중되어 있다. 2010년 데이터에 따르면 기후 붕괴와 관련된 위기, 주로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인해 약 40만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사망자의 98퍼 센트는 남반구에서 발생했다. 또한 사망자의 대다수인 83퍼센트 는 세계에서 탄소배출량이 가장 낮은 나라에서 발생했다. 2030년 까지 기후로 인한 사망자 수는 연간 53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 된다. 사실상 이 모든 일이 남반구에서 일어날 것이다. 기후 관련 사망자 중 단지 1퍼센트만이 부유한 국가들의 국경 안에서 발생할 것이다.
- 기후변화의 영향은 왜 이렇게 불균일하게 분포하는가? 첫번째 이유는 기후변화로 인해 강우 패턴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 문이다. 그 결과 남반구의 가뭄에 취약한 지역은 지금보다 더 물 이 줄어들 것이다. 이로 인해 농작물 수확량이 세계 평균보다 빠 르게 감소할 것으로 예측되는 이 지역의 농업은 파괴적인 결과 를 가져올 것이다. 질병은 또다른 요인이다. 기온 상승은 말라리 아·수막염 · 뎅기열·지카바이러스 등 열대성 질병의 영향 범위를 확장시킨다. 한편 이는 오랜 기간의 식민지배와 구조조정을 겪은 남반구의 지역사회가 기후 붕괴에 대한 적응력이 가장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뭄과 홍수에 취약한 경작 한계지에 살 가능 성이 높고, 재난을 뚫고 나갈 재정적인 여유가 없으며, 쉽게 이주 하거나 새로운 생계수단을 찾기 어렵고, 자신들의 인권을 옹호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히 그렇다. 몇몇 부유한 나라들의 과도한 배출이 가난한 나라의 수십억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것 은 비인도적 범죄이며, 우리는 분명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 야 한다. 유엔의 극빈과 인권에 관한 특별보고관 필립 올스턴이 했던 것처럼 말이다. “기후변화는 다른 어떤 것보다 가난한 사람 들에게 가하는 부도덕한 공격이다. "
- 성장에 대해 말하자면, 성장은 너무 좋게 들린다. 성장은 자연 의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데 있어 깊이 뿌리박힌 강력한 비유다. 아이가 자라고, 작물이 자라고. 그러므로 경제도 자라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프레임은 잘못된 비유로 작용한다. 성장의 자연스러운 과정은 항상 유한하다. 우리는 아이들이 성장 하기를 바라지만 9피트(약 2.74미터)까지는 아니다. 끝없는 기하급 수 곡선을 그리듯 크는 것을 절대 원치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이 성숙한 지점에 다다른 다음에는 건강한 균형을 유지하기를 바란 다. 우리는 농작물이 자라기를 바라지만 다 익으면 수확하고 새 로 심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세계에서 성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균형을 유지하는 성장이다.
- 우리가 성장의 한계에 언제 부딪힐 것인지 예측하려고 애쓰는 것이야말로 실은 성장의 한계에 대한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우리 는 성장의 한계에 부딪히기 훨씬 전에 생태계 붕괴로 빠져드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한계에 대해 생 각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뀔 것이다. 정치생태학자 요르고스 칼리 스가 말한 것처럼 문제는 단기적인 성장의 한계가 아니다. 그런 건 없다. 인류세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성장이 외적 한계에 부딪 힐 때까지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다. 우리 스스로가 성장을 제 한하기로 선택해야 한다. 경제가 지구의 위험 한계선 내에서 작 동하도록 재조직하고, 우리가 생존을 위해 의존하는 지구의 생명 시스템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 핵융합 동력에 관해 늘 하는 농담이 있다. 엔지니어들이 지금 까지 약 60년 동안 줄곧 10년 남았다고 말해왔다는 것이다. 우리 는 성공적인 융합 반응을 만들었으나 융합 과정이 에너지를 생산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현재 프랑스에서 진 행 중인 대규모 핵융합 실험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근접했을지 모르지만(그리고 어쩌면 대단한 일일 수도 있지만) 가장 낙관적 인 예측조차도 핵융합은 앞으로 10년 동안은 일어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한다. 그 이후에 핵융합 전력을 그리드에 공급하는 데 에 10년이 더 걸리고, 확대하는 데는 수십년이 더 걸린다. 흥분되 는 전망이지만 지금까지의 기록은 고무적이지 않다. 어떤 경우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금세기에 핵융합 동력을 갖게 될지 모 르지만, 안전한 탄소 예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핵융합 동력에 의존할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기적적인 기술혁신이 없다면 에너지 전환은 주로 태양과 풍력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 이미 드러났다시피 부유한 나라의 자원 집중에 관한 한, 서비스업으로의 전환이 어떠한 개선도 가져오지 않았다. 서비스업은 1990년대 제조업이 쇠퇴하기 시작한 이후 급격하게 성장했다. 고 소득 국가에서 서비스업은 GDP의 74퍼센트를 차지하지만 고소 득 국가의 물질 사용은 GDP 성장을 앞지르고 있다. 실제로 고소 득 국가는 GDP 기여 측면에서 서비스 점유율이 가장 높지만 1인 당 물질 발자국도 가장 높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전세계적으로 도 마찬가지다. 세계은행의 데이터에 따르면 서비스업은 1997년 GDP의 63퍼센트에서 2015년 69퍼센트로 증가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전세계적으로 물질 사용이 가속화되었다. 즉 서비스로 전환하는 동안에도 세계경제에서 물질 사용은 증가했다.
이 이상한 결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부분적인 이유는 사 람들이 서비스 경제에서 번 소득을 결국 물질적인 재화 구매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유튜브에서 돈을 벌 수 있지만, 그 돈으로 가구나 자동차 같은 물건을 구입한다. 또다른 이유는 서 비스업 자체가 자원 집약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관광 부문을 예로 들어보자. 관광업은 서비스업으로 분류되지만, 관광업을 계 속 유지하려면 물질적으로 엄청난 인프라, 즉 공항·비행기·버스· 유람선 · 리조트·호텔·수영장· 테마파크(전부 서비스업이다)가 필 요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가진 데이터를 고려해볼 때, 서비스업으로 전 환하면 어떻게든 마법처럼 자원 사용이 줄어들 것이라고 믿을 이 유가 없다. 그 신화는 내려놓을 때가 됐다.
또다른 일도 일어나고 있다. 해가 갈수록 지구에서 동일한 양의 물질을 추출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지표면에 가깝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물질은 이미 다 손에 넣었다.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광물과 금속의 매장량을 소진함에 따라 우리는 더 많 은 것을 얻기 위해 점점 더 깊은 곳을, 더 격렬하게 파헤쳐야 한 다. 석유회사들은 남아 있는 매장 석유에 도달하기 위해 파쇄, 심 해 시추, 타이트오일(셰일오일) 추출 등으로 방식을 전환할 수밖 에 없다. 동일한 양의 연료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와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채굴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유엔환경계획 UNEP 에 따르면 오늘날 한세기 전보다 금속 단위당 세배 더 많은 물질이 추출되었다." 이 중 일부 금속은 금속 광석 의 품질이 저하되었는데 지난 10년 동안에만 최대 25퍼센트 감소 했다. 이는 동일한 양의 완제품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양의 광석을 추출하고 가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8 다시 말해, 광산 기술 은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채굴의 물질 집약도는 점점 더 나빠질 뿐 나아지지 않았다. 유엔의 과학자들은 이 골치 아픈 현상이 계속 될 거라고 이야기한다.
- 1865년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 는 다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제임스 와트는 단지 이전 방식보 다 훨씬 더 효율적인 증기엔진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와트의 증 기엔진은 산출량 단위당 석탄이 덜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와트의 엔진이 총석탄 소비를 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정확히 이와 반대되는 일이 일어났다. 영국의 석탄 소비가 급증했다. 제번스는 효율성 개선이 비용을 절감했고 자본 가들이 절감된 비용을 재투자하여 생산을 확장했기 때문임을 발 견했다. 효율성 향상은 경제성장으로 이어졌고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더 많은 석탄을 소비했다. 이 이상한 결과는 제번스 역설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현대 경제학에서는 카줌 브룩스 공리 Khazzoom-Brookes Postulate 라고 부른 다. 1980년대에 이 현상을 묘사한 두 경제학자의 이름을 땄다. 카 줌 브룩스 공리는 단지 에너지만이 아니라 물질 자원에도 적용된 다. 에너지와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혁 신하면, 총소비는 잠시 감소했다가 훨씬 더 높은 비율로 빠르게 반등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기업들이 절감된 비용을 재투자하여 생산을 늘리기 때문이다. 결국 성장이 미치는 엄청난 효과는 가 장 극적인 효율 향상조차도 무력화한다.
- 분명하게 말하지만 기술혁신은 우리 앞에 놓인 싸움에 절대적 으로 중요하다. 사실상 필수적이다. 경제의 자원 집약도와 탄소 집약도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 얻을 수 있는 모든 혁신과 효 율성 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기술과 관 계가 없다. 문제는 성장과 관련되어 있다. 거듭 반복하건대, 성장 의 정언명령이 최고 기술이 주는 모든 이익을 없애버린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혁신을 장려하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는 그렇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혁신에 잠재된 생태적 이익이 자본 자체의 논리에 제약을 받는다. 혁신 이 꼭 이럴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성장 중심 경제가 아닌 다른 종류 의 경제에 살고 있다면 기술혁신은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작동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포스트 성장경제에서 효율성 개선은 실제로 인류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것이다. 우리가 성장의 정언명 령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여러 종류의 혁신에 집중하는 데 자유로 워질 것이다. 추출과 생산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고안된 혁신이 아닌 인간의 행복과 생태적 행복을 증진하기 위한 혁신 말이다.
- 끊임없는 확장에 대한 자본의 필요가 더 나은 제품만을 만들 것이라고 가정하지 말자. 너무 순진한 가정이다. 과거에 자본이 이윤 증가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자본은 식민화, 구조조정 프로 그램, 전쟁, 제한적인 특허법, 사악한 공채증서, 토지 탈취, 민영 화, 물과 종자 같은 커먼즈 차단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이번에는 왜 다른가? 실제로 생태경제학자 베스 스트랫퍼드의 연구는 자 본이 자원 제약에 직면했을 때, 정확하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 난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본은 공격적으로 지대를 추구하는 행동 을 한다. 38 자본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공적 영역의 수입과 재산을 개인의 소유로,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부유한 사람에게로 빨아들 여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등 교묘한 메커니즘을 통해 기존 가치를 차지하려고 한다.
자, 이제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가 이론적으로는 완전히 비물질적인 재화에서 성장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 표면상으로는 좋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비물질적인 재화란 이미 풍부하고 자유롭게 구할 수 있는 경향이 있거나 공유하기가 매우 쉽다. 새로운 가치가 모두 비물질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서 어려움 없이 이윤을 계속 늘리기 위해, 자본은 현재 풍부하고 공짜인 비물질적 커먼즈를 인위적으로 부족하게 만들어 사람들 에게 비용을 지불하게 할 수 있다. 물이나 종자뿐만 아니라 지식, 노래, 녹색 공간, 심지어 육아, 신체적 접촉, 어쩌면 공기 자체도 사적으로 소유되고 상업화되어 돈을 받고 사람들에게 되파는 경제를 상상할 수 있다. 나머지 우리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공짜로 얻던 비물질적인 것의 이용권을 구매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더 많이 해야 할 테고, (어쩌면) 판매할 비물질적인 것을 생산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일반적인 해결 방법(자연으로부터 추출)을 차단하면 다른 해결책을 찾도록 만드는 자본의 압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장이 지닌 폭력적인 측면이다. 500년 동안 의 데이터가 현실과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하는 해결책이라고 해서 마법처럼 해롭지 않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은 순진하다.
- 의미는 사람들의 삶에 현실적 · 물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2012년 스탠포드 의과대학 연구팀은 코스타리카의 니코야 반도를 방문 했다. 이 지역에서 나온 흥미로운 데이터를 해석하기 위해서였다. 코스타리카인들은 평균 수명 80세 정도로 오래 산다. 하지만 연구 자들은 니코야 지역 사람들이 그보다도 오래 산다는 것을 발견했 다. 이 지역의 기대수명은 85세에 달하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상한 결과다. 재정적인 면으로 보자면 니코야는 코스타리카 내에서도 가장 빈곤한 지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니코야는 전통적으로 농업 기반의 생활양식을 가지고 사는 자립 경제 subsistence economy 지역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과들을 설명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코스타리카는 최상의 공중보건 체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니코야 사람들의 긴 수명이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 다. 식생활도 유전자도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공동체 말이다. 가장 장수하는 니코야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가족·친구· 이웃들과 견고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들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스스로가 가치 있다고 느낀다. 실제로 가장 빈곤한 가구들이 가장 긴 기대수명을 갖는데, 왜냐하면 그 들은 함께 살며 서로에게 의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0
상상해보자. 코스타리카 농촌에서 자립 생활양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경제 속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건강한 삶을 누린다. 북미와 유럽은 고속도로, 마천루, 쇼핑몰은 물론 큰 저택과 자동차, 화려한 제도들을 가졌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발전'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 중 어느 것도 인간 진 보의 핵심 지표에 관한 한 니코야의 어부나 농부들보다 이점을 제공하지 않는다. 데이터는 차고 넘친다. 거듭 말하지만, 가장 부 유한 나라들의 특징인 넘치는 GDP로는 정말 중요한 그 어느 것도 얻지 못한다.
-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총량적 성장이 필수적이 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우리를 끔찍한 진퇴양난 속으로 밀어넣 는다. 인간의 복지와 생태적 안정성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든 다. 누구도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불가능한 선택지다. 그러나 불 공평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고 나면, 갑자기 선택이 훨씬 쉬워진다. 좀더 공평한 사회에서 사는 것과 생태적 재앙의 위험 을 감수하는 것 사이의 선택.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선택이라 면 거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공평한 사회를 성취하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을 것이다. 이는 현 상태를 지속함으로써 어 마어마한 이익을 챙겨온 이들에 맞서는 거대한 투쟁을 요구한다. 어쩌면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우리가 이런 행동 경로를 피하기 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들은 지금과 같은 세계 소득분배를 유지하기 위해 지구를 희생시키는 편을 택할 것이다.
- 물질과 에너지 사용은 정치인과 경제 학자들이 GDP 성장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증가하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가 끊임없는 팽창의 정언명령에 기 반하여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좋은 삶의 계측 을 선택할 수 있겠지만, 이제까지 그랬듯 그 배후에 산업 활동이 계속 확대된다면, 생태적 곤란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이는 신체 건강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당신이 혈압을 점검하는 대신 매주 술집에서 열리는 퀴즈 점수나 매일 웃는 횟수 점검에 치중한다면, 해당 지표상으로는 삶이 향상될지 몰라도 당신의 신체는 여전히 어려운 상태에 처할 수 있다.
여기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핵심이 있다. GDP는 경제적 성과에 대한 임의적인 계측이 아니다. 일종의 실수, 그저 수정되기만 하면 되는 계산상의 오류 같은 게 아니다. GDP는 자본주의의 복 지를 측정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되었다. GDP는 사회적·생태적 비용을 외재화한다. 자본주의가 사회적·생태적 비용을 외재화하 기 때문이다. 정책가들이 GDP 측정을 멈춘다면 자본이 계속 증 가하는 이득에 대한 끝없는 추구를 자동으로 멈출 것이며, 우리 의 경제가 보다 지속가능하게 될 거라는 상상은 순진하다. 좋은 삶의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며 이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이 요점을 비켜가는 경향이 있다. 우리 사회를 성장의 정언명령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더 현명해 져야 한다.
-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해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다. 채굴·생산·폐기의 미친 속도를 늦추고, 우리 삶의 미친 속도를 늦춰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의미하는 '탈성장'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탈 성장은 GDP를 줄이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경제의 물질과 에너지 처리량을 줄여 생명세계와 균형을 이루도록 되돌리는 것, 그러면서 소득과 자원을 더 공정하게 배분하고, 사람들을 불필요 한 노동에서 해방시키며, 사람들이 번영하는 데 필요한 공공재에 투자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이는 보다 생태적인 문명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GDP가 천천히 성장하거나, 또는 성장을 멈추거나, 어쩌면 하락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더라 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GDP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상적 상황하 에서라면, 불황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황은 성장 의존 경제가 성장하기를 멈출 때 일어나는 재난이다. 탈성장은 완전히 다르다. 탈성장은 전체적으로 다른 종류의 경제로 전환하는 것이 다. 일단 탈성장 경제는 성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의 끝없 는 축적 대신, 인간의 번영과 생태적 안정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경제다.
- 여기에 역설이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합리적 효율성에 기반 하여 건설된 체제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정확히 반대다. 계 획적 진부화는 일종의 의도된 비효율성이다. 비효율성은 이윤을 극대화한다는 측면에서 (기괴하게도) 합리적이다. 하지만 인간 의 필요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고 생태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는 미친 짓이다. 낭비하는 자원의 측면에서도 미친 짓이고, 불필 요한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측면에서도 미친 짓이다. 단지 계획적 진부화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빈 구멍을 채우기 위해 스마 트폰·세탁기·가구들을 만들어내느라 수백만시간을 쏟아붓는 것 을 생각해보면, 인간 노동의 측면에서도 미친 짓이다. 이건 마치 생태계와 인간의 생명을 밑 빠진 수요 항아리에 퍼넣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 빈 구멍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가장 부유한 1퍼센트가 이 나라 부의 40퍼센트 가까이를 가지고 있다. 하위 50퍼센트는 겨우 0.4퍼센 트만 가질 뿐이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39 세계적 수준에서는 불 균형이 더욱 악화된다. 가장 부유한 1퍼센트가 전세계 부의 거의 50퍼센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불평등이 갖는 문제는 부유층이 채굴 임대업자가 된다는 점이다. 돈과 자산을 쓸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축적하게 되면서, 그들은 자신의 부를 외부로 임대한다(그것이 주택이나 상업 자산이든, 특허권이든, 대부든 상 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부유층이 이것들을 독점하고 있는 탓에, 다른 사람들은 임대료와 부채를 갚아야만 한다. 이는 노동력 없 이 자본만 가진 이들에게 자동적으로 축적되기 때문에 '불로소 득'passive income 이라 불린다. 하지만 부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이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단순히 마이너스 정도가 아니다. 사람들 은 단지 부자들에게 임대료와 빚을 갚기 위해, 실제로 필요로 하 는 것 이상을 얻으려고 더 많이 일을 하고 돈을 모아야 하기 때문 이다. 거의 현대판 농노제나 다름없다. 그리고 농노제와 똑같이, 이는 우리의 생명세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농노제는 영주들 이 농민에게 토지에서 필요한 것 이상으로 생산물을 뽑아내도록 강제하는 생태적 재앙이었다. 이 모든 게 공납을 바치기 위해서 였다. 공납은 산림과 토양의 점진적 황폐화로 귀결되었다. 오늘날 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저 백만장자와 억만장자들에게 공물을 바치기 위해 지구를 약탈해야 한다.
- (부채탕감은) 그것이 실제 인간의 고통을 경감해주기 때문만이 아 니라, 화폐가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점을 우리 스스로에게 환기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유익하다. 부채를 지불하는 것은 윤리의 핵심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배치한 장치이다. 만약 민주주의가 뭔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다른 방식으로 배치하는 데 동의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하지만 부채 탕감은 일회성 해법일 뿐이다. 그것은 문제의 뿌 리를 건드리지 못한다. 우리가 다뤄야 할 더 깊은 이슈가 있다.
우리 경제가 부채를 이고 있는 주된 이유는 그 자체가 부채인 화 폐체제 위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은행에 가서 대부를 받을라치면, 은행이 다른 누군가의 예치금들을 모아서 어딘가의 보관 금고에 저장해둔 보유고에서 돈을 꺼내 빌려준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부채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은행들은 대부하 는 화폐의 대략 10퍼센트 가치 또는 그 이하의 보유고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부분 지급 준비금 제도'라고 알려진 방법이다. 말하자면, 은행들은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보다 대략 열배 이상의 돈을 빌려준다. 돈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추가적인 화폐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은행들은 당신의 계좌를 평가하여 허공에서 돈을 만들어낸다. 말 그대로 빌려서 만드는 것이다.
우리 경제 속에 돌고 있는 화폐의 90퍼센트 이상이 이런 방식 으로 창출된 것이다. 즉 우리의 손을 거쳐 가는 거의 모든 달러 한 장 한장은 누군가의 부채를 표상한다. 그리고 부채는 이자를 쳐서 되갚아야 한다. 더 많은 노동, 더 많은 채굴, 더 많은 생산을 통해 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기이한 일이다. 은행은 무에서 공짜 로 생산한 제품(화폐)을 효과적으로 판매한다. 그런 다음 사람들에게 현실 세계로 가서 이를 지불하기 위해 실제 가치를 채굴하 고 생산하도록 요구한다. 상식을 침해할 정도로 기괴하다. 사람 들은 이게 진실일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 한다. 헨리 포드가 1930년대에 썼듯이, “아마도 이 나라의 사람들이 은행과 화폐 시 스템에 대해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보 는데, 만약 그들이 안다면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혁명이 일어 날 거라고 생각한다."
자,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은행들은 대부하는 모든 것에 원칙을 만들지만, 자기들이 지불해야 할 이자에 필요한 돈은 만들지 않 는다. 언제나 적자고 언제나 희소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희소성은 격심한 경쟁을 만들고, 모든 이들이 더 많은 빚을 지는 걸 포함 해서) 부채를 되갚기 위해 돈을 벌 방법을 찾아 나서게 한다.
- 다수의 원주민 공동체에서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기술은 특히 주술사에 의해 연마된다. 20세기 대부 분 동안 인류학자들은 주술사의 역할이 인간과 조상들 사이의 매 개에 국한된다고 생각했다. 이제 많은 경우 주술사들은 인간 공 동체와 인간이 의존하는 더 넓은 존재 공동체 사이도 매개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주술사들은 다른 존재들을 친밀하게 인식하면서 성장한다. 아 마존의 주술사들은 최면과 꿈을 통해 다른 존재와 소통하며, 메다수의 원주민 공동체에서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기술은 특히 주술사에 의해 연마된다. 20세기 대부 분 동안 인류학자들은 주술사의 역할이 인간과 조상들 사이의 매 개에 국한된다고 생각했다. 이제 많은 경우 주술사들은 인간 공 동체와 인간이 의존하는 더 넓은 존재 공동체 사이도 매개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주술사들은 다른 존재들을 친밀하게 인식하면서 성장한다. 아 마존의 주술사들은 최면과 꿈을 통해 다른 존재와 소통하며, 메시지와 의도를 서로에게 전달한다. 그들은 비인간 존재 이웃들 과 상호작용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생태계가 어떻게 작 동하는지에 대해 전문가적 식견을 갖고 있다. 주술사들은 한 계 절에 어떤 종류의 물고기를 얼마나 많이 잡아도 되는지를 정확히 알며, 다음 해에는 얼마나 많이 나올지를 예견할 수 있다. 무리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원숭이를 얼마나 사냥해도 좋을지를 안다. 유실수가 언제 건강하고 언제 병들었는지를 안다. 주술사들은 숲 이 안전하게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식물과 동물 이 웃들로부터 취하지 않도록 하는 데 이 지식을 활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술사는 일종의 생태주의자와 같이 기능한다. 그들은 정글의 생태계를 구성하는 깨지기 쉬운 상호 의존성을 이 해하고 유지하는 전문가이며, 가장 명성 있는 대학 교수가 자랑 하는 것을 훨씬 능가하는 식물학과 생물학 지식을 지니고 있다.
-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의 산림보전학과 교수 수잰 시마드 박사는 식물들 사이의 균근 네트워크가 인간이나 다른 동 물들의 신경연결 네트워크처럼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균근 네트 워크는 신경연결 네트워크와 놀랄 만큼 유사한 방식으로, 나무의 마디 사이에 정보를 흐르게 한다. 그리고 신경연결 네트워크가 동물에게 인지와 지능을 가능하게 하듯이, 균근 네트워크는 식물 에 유사한 능력을 부여한다. 최근 연구는 균근 네트워크가, 인간 의 신경연결이 그렇듯이, 전달·소통·협동을 촉진할 뿐 아니라 문 제해결 ·학습· 기억·의사결정까지도 촉진함을 보여준다."
이런 표현들은 그저 비유적인 것이 아니다. 생태학자 모니카 갈리아노는 식물의 지능에 관한 파격적인 연구를 출간했는데, 식 물들이 일어난 일을 기억하며 이에 따라 행동을 바꾼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식물이 학습한다는 것이다. 『포브스』와 가 진 최근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다. "나의 작업은 결코 비유가 아닙니다. 제가 학습이라고 말할 때 그건 학습을 의미하는 거예요.제가 기억이라고 말할 때 그건 기억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식물들은 새로운 도전을 만나고 주변의 변화하는 세계 에 관한 메시지를 받아 적극적으로 행동을 바꾼다. 식물들은 감 각한다. 식물들은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으며, 이에 따라 반 응한다.  덩굴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담은 저속촬영 사진을 본 적이 있다면,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덩굴은 자동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감각하고, 움직이고, 균형을 잡으며, 문제를 해결하여, 새로운 영역을 어떻게 탐험해나갈지를 알아가려고 노력한다.
- 우리가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혹은 아마 더 친숙해진다). 시마드의 작업은 균근 네트워크를 통해 나무가 이웃들을 인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이 든 '엄마' 나무들은 자신의 씨앗에서 자란 가까운 어린 나무들을 식별하며, 이런 정 보를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데 활 용한다. 시마드는 식물이 동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트라우 마에 '감정적' 대응을 갖는지도 설명한다. 칼질을 당한 후, 진딧 물의 공격을 받을 때, 식물의 세로토닌 수치가 변화하며(그렇다, 식물은 동물의 신경 시스템에 공통적인 다수의 신경화학물질과
더불어 세로토닌을 갖고 있다), 그래서 다른 이웃들에게 비상 신 호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 탈성장은 땅과 사람 심지어 우리 마음의 탈식민화를 나타 낸다. 커먼즈의 인클로저 해체, 공공재의 탈상품화, 노동과 삶의 탈집약화를 나타낸다. 인간과 자연의 탈물화를, 그리고 생태 위 기의 가속화 중단을 나타낸다. 탈성장은 덜 취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결국 가능성의 지평 전체를 열어젖힌다. 탈성장은 우 리를 결핍에서 풍요로, 추출에서 재생으로, 지배에서 호혜로, 외 로움과 분리에서 생명이 약동하는 세계와의 연결로 데려다준다. 결국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서로와 맺는, 그리 고 생명세계의 나머지와 맺는 물질적 관계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관계가 어떠하기를 바라는가? 지배와 추출의 관 계이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호혜와 돌봄의 관계이기를 바라는가?

- 이 책을 시작할 때, 나는 탈성장을 핵심 프레임으로 쓰는 것을 우려했다. 탈성장은 결국 단지 첫걸음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여정을 생각해보면, 탈성장 또한 그 이상의 것인지도 모르겠다. 탈성장은 우리로 하여금 이 도전에 접근하는 길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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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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