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니스

경제 2023. 6. 5. 16:39

- 영어에서 현금을 의미하는 캐시cash는 과거에 전혀 다른 뜻이었다. 1490년대 포르투갈 사람들이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유럽에서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이후 합금이 아닌 철로 만든 작은 동전이 중국에 전래됐다. '캐시cash'로 불리는 주화였다. 캐시는 고대 인도의 드라비다족이 썼던 타밀어에서 유래한 말로 '저급한 주화'를 뜻한다. 타밀어가 지리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더 넓은 지역 으로 확장된 셈이다. 은행권이 등장한 18세기 이후에 캐시는 은행이 가지고 있는 금화나 은화를 뜻하게 되었다. 지금은 중앙은행이 발행 한 은행권이나 주화를 의미한다. 캐시는 거래 상대를 믿지 못하는 불안감에 마침표를 찍는 제왕(cash is king)으로 불리기도 한다.
- 인류 역사에서 돈은 거대한 변화 또는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낸 장치다. 돈의 DNA 속에 위기가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위기는 새로운 도전 과제이기도 하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 겠지만 인류학자들이 보는 돈은 기원전 3000년 전후 바빌로니아에 서 발명됐다. 그때 위기 또는 해결 과제는 도시화였다.
이전까지 식량을 채집하거나 경작한 곳과 거주지 사이에 거리가 멀지 않았다. 부족 구성원은 마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열매 등을 채집했다. 재배한 농작물도 지척에 있었다. 가족이나 부족 구성 원이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충분히 수송 가능했다. 옆 마을이나 이웃 부족과 교역을 해도 거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이뤄졌다.
그런데 부족국가가 전쟁 등을 통해 통합됐다. 지배자인 왕이나 제사장은 농경지 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궁궐과 신전을 짓고 거주 했다. 왕의 가족, 시녀, 시종, 제사장, 신녀뿐 아니라 이들에게 필요 한 물품을 만드는 다양한 직공이 식량 생산지에서 떨어진 곳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이들을 먹이고 입히며 머물러 살게 하는 일은 그 시절 지배자에겐 대단한 과제였으리라.
실제 엄청난 골칫거리였다. 당시 지배자들은 신에 대한 빚을 강 조하며 세금을 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 납세 의무를 백성에게 심 어주기까지 했다. 또 빚을 제대로 갚지 않으면 징벌하는 무력까지 과시하며 엄포도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흉년이 들어 밀 등의 수확이 줄어들면 신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은 배부른 소리였다. 게 다가 왕이 거둬들인 세금은 추수기 이후에나 납부 가능했다. 왕과 제 사장뿐 아니라 궁녀, 시종, 신녀 등이 추수가 끝날 때까지 물만 먹고 지낼 수는 없었다. 지배자는 밀 등 농산물이 농촌에서 도시로 흘러들 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농촌 백성이 낼 세금 을 근거로 진흙 토큰을 만들어 상거래를 일으켰다. 돈의 등장이다.
- 돈의 역사에서 reserve'는 아주 넓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 앙은행의 탄생과도 밀접하다. 중앙은행 이론의 개척자인 영국의 월 터 베지헛Walter Bagehot이 1870년대 발표한 <롬바드 스트리트Lombard Street》에는 수많은 여윳돈 체제(a many-reserve system)'라는 말이 등장 한다. 그는 "수많은 여윳돈 체제가 괴물스러울 수 있다................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베지헛의 눈에 비친 '리저브reserve'는 19세기 월스트리트인 런던의 롬바드 스트리트 에 자리 잡은 수많은 은행 등이 보유한 '웃돈'이었다. 은행들이 각자 보유하고 있는 독립적인 여웃돈이다. 그래서 수많은'이란 뜻의 a many'라는 말이 붙었다.
- 경제 교과서에 따르면 은행들은 각자 여윳돈을 빌려주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돈을 빌리는 사람들도 서로 경쟁한다. 수요-공급 원리 에 따라 돈의 가격(금리)이 형성된다. 은행들이 금리라는 '보이지 않는 손(가격)'의 신호에 따라 더 빌려주고 덜 빌려준다. 애덤 스미스 등 고 전 경제학자들은 은행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하면 돈의 공급이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을 것으로 봤다. 이른바 자유은행(free banking) 독트린'이다.
애덤 스미스의 꿈은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은행들은 중앙은행도 없고 금융감독기구도 없던 시절 각자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호황기에 마구 대출해줬다. 그 바람에 시중에 유동성이 급증하면서 거품이 발생했다. 그 끝은 금융위기였다. 위기의 순간 은행가들은 두 려움에 떨었다. 부실과 파산의 두려움이었다. 그로 인해 은행들이 대 출을 극도로 꺼린 결과 나타난 것이 여윳돈의 증발과 실물경제의 침 체였다. 호황기에 여윳돈이 급증하고 위기의 순간 돈이 마르는 악순 환이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여윳돈을 각 은행가들의 이윤 추구 동기에 맡겨둬야 하는지를 놓고 말이다. 존 우드 교수는 “19세기 영국의 대형 시중은행인 영란은행이 중앙은행으로 서서히 진화하는 과정은 여윳돈(reserve) 관리 책임을 영란은행이 조금씩 떠 맡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 미국은 영국의 시행착오와 논쟁을 거의 한 세기 동안 목격했다. 1913년 국가 기구로 중앙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지역별, 개 별, 은행별 여윳돈(a many reserves)'을 '미 연방 단위의 단일 여윳돈(a Federal reserve)'으로 통일해 관리하기로 한 것이다. 관리의 주체로 만 든 조직이 바로 이 시스템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연방준비제도이 사회(FRB, Federal Reserve Board of Governors)이다. Fed의 주요 임무 가운 데 하나가 여윳돈의 가격을 조정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것 이다. 금융회사들은 애덤 스미스가 그린 '자유은행업을 포기하고, Fed가 결정한 기준금리에 따라 예금을 받고 돈을 빌려준다. 그 대가 로 위기 순간 Fed의 도움(긴급자금, 유동성 지원을 받아 자유로운 낙원' 에서 툭하면 겪었던 파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유 대신 보호를 선택한 셈이다.
- 국채의 1차 고객은 주요 시중은행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1차 고 객은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는 도매시장에 참여하는 금융회사들이다.
금융용어로 프라이머리 딜러(PD, primary dealer)다. 이들이 주로 참여 하는 도매시장의 또 다른 이름은 발행시장이다. 정부가 국채를 찍어 도매업자인 시중은행들에게 공개입찰 방식으로 팔아치운다. PD는 국채시장의 선수들이다. 국채를 상대적으로 싼값에 사들여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대가로 여러 의무를 진다.
“PD로 지정된 시중은행 등은 국고채 발행시장에 의무적으로 참 가해야 하며, 일정 물량 이상을 반드시 인수해야 한다. 특정 채권의 정해진 물량을 거래해야 하며, 관계 기관에 거래 내역을 보고하고 중 앙은행이나 금융 당국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가할 의무가 있다. 대신 국고채 입찰 과정에서 독점적 지위를 얻을 수 있고 금융 당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장점이 있다. 또 PD로 선정됐다는 것은 금융기관의 전문성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이므로 대외적으로 금 융기관의 평판을 높이는 데도 일정 부분 역할을 한다." 
애초에 PD는 시중은행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금융시장 구 조가 바뀌어 지금은 국내에서는 종합 증권사(투자은행)까지 PD로 참여 한다. 국내에서 PD는 20여 곳에 이른다. 이들은 국채 발행시장에서 도매로 사들인 정부의 빚 증서를 펀드 회사와 개인투자자들이 참여 하는 유통시장(일반 채권시장에 내다 팔고 차액을 이익으로 챙긴다. 기까지는 국채란 증서가 발행 유통되는 과정의 ABC다. 정부-시중 은행의 비즈니스가 그 정도라면, 굳이 책까지 쓰면서 설명할 필요 없다. 래리 랜덜 레이Larry Randall Wray 교수는 "국채는 정부가 자금을 조달해 쓰는 단순한 장치가 아니다"며, "돈 공급 장치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원"이라고 말했다.
에너지원! 현대 시중은행은 돈을 꿔줄 때 예금만을 활용하는 것 이 아니다. 국채를 내다 팔아 조달한 자금도 많이 사용한다. 국채를 내다 파는 기법은 다양하다. 단순히 처분하는 방식은 기본이다. 며칠 뒤 되사는 조건으로 국채를 내주고 현찰을 조달하는 것이 금융인들 이 부르는 환매조건부채권(RP)이다. RP시장은 21세기 가장 중요한 도매 금융시장이다. 이전에는 콜시장이 중요한 자금시장이었다. 선진국에서는 20세기 초에,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에서는 요즘도 중시된 이것은 재할인 메커니즘으로 재할인제도라고도 불린다. 은행이 국채나 최우량 기업의 회사채를 사들인 가격보다 싼값에 중앙은행 에 팔고 현금을 받아가는 시스템이다. 이곳에서는 일반 머니마켓(단기 도매자금시장)처럼 경쟁 방식으로 가격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중앙은행 이 사전에 정한 재할인율에 따라 돈이 풀리는 양이 조절된다.
RP 시장은 머니 트라이앵글의 한 축인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펼 쳐지는 공간이다. 한국은행(BOK)이 RP 금리를 기준금리(정책금리)로 삼 고 있을 정도다. 한국은행이 '일주일 뒤에 되사는 조건(RP 7일물'을 달 고 국채를 사고판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1%로 정했다면, 국채를 바탕으로 RP 거래를 할 때 금리가 1% 선에서 유지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실제 시장에서 RP 7일물 금리가 한국은행이 정한 1%에 정확하게 거래되는 경우가 드물다. 1.001%일 수도 있고, 0.9999%일 수도 있다. 이런 실제 금리를 기준금리와 구분하기 위해 실효금리라고 한 다. 실효금리가 한국은행이 내부적으로 정한 범위를 벗어난 수준으 로 기준금리보다 높아지면, 머니마켓의 돈이 마르고 있다는 신호다. 이 경우 한국은행은 국채를 되파는 조건으로 사들여 돈을 푼다. 반대 로 실효금리가 기준금리보다 너무 낮으면 돈이 넘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러면 한국은행은 약속한 기간에 되는 조건으로 국채를 팔아 돈을 흡수한다.
- 머니마켓의 가장 큰 손은 누가 뭐라 해도 중앙은행이다. 뒤이어 시중은행들이 두 번째 큰손이다. 요즘 머니마켓에서 메이저 플레이 어 구실을 하는 세력이 있다. 바로 머니마켓펀드(MMF)다. MMF는 시중 단기 여웃돈이 머니마켓으로 흘러드는 또 하나의 채널이다. 한마디로 머니마켓은 머니 트라이앵글의 중앙은행과 시중은행(금융회사) 등이 각자 이익이나 정책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게임을 벌이는 장 이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주요 채권자들의 놀이터인 셈이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는 "머니마켓(금융시장)은 자본주의 사령부"라고 말할 정도였다.
- 21세기 현재도 중앙은행이 직접 공급한 돈(본원통화, high powered money)으로 모든 상거래를 해결할 수 없다. 한국은행이 2020년 공급 한 본원통화는 205조 원 정도였다. 그런데 아주 넓은 의미의 돈인 금융회사 유동성(L)'은 4300조 원에 이른다. 21배 정도 불어났다. 무슨 매직일까? 한국은행이 주입한 돈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뻥튀 기가 된 게 틀림없다. 바로 국내에는 '신용창출(Credit Creation) 14로 알 려진 과정이다. 머니money란 말이 '신용'으로 번역됐다. 오역일까? 아니면 의역일까? 오역은 아니다. 오역이었으면 수십 년 동안 바로잡지 않았을 리 없다.
그렇다면 누가 돈을 의미하는 '머니money'를 신용으로 번역했을 지가 궁금해진다. 이 또한 미국 Fed를 '연방준비제도'라고 단어 치환 수준으로 번역했던 일본인들이 했다. 근대 초기 일본인들의 눈에 '통화 공급은 중앙은행이 하는 일로 비쳤다. 시중은행이 중심이 된 money creation을 '통화 창출'이나 '화폐 창출'로 번역하기가 마뜩 찮았던 게 분명해 보인다.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서구화(근대화) 과정을 시작했다. 이때 서구에서 사용되는 개념을 한자 어로 옮기는 일을 먼저 했다. 한국뿐 아니라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마 저 일본식 경제용어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본인들의 어설 픈 번역은 결과적으로 오해를 낳았다. 돈이 창출돼 공급되는 과정이 흐려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중앙은행이 돈을 공급한다'는 상식이 자리 잡았다. 이 상식대로라면, 한국은행이 주입한 205조 원만 돈이 고, 시중에 나돌고 있는 4300조 원은 돈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의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교수는 베스트셀러 《사피엔스Sapiens》에서 사회적 분업화 구조 속에서 돈의 구 실을 생생하게 설명한다. “돈은 보편적인 교환의 매개다. 인간은 돈 을 이용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다른 것으로 전환할 수 있다. 예비역 지원자금을 받은 근육질의 남자가 대학 교육을 받아 지적인 인간으로 전환된다."" 이어 “돈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전환할 수 있도 록 하는 것뿐 아니라 가치를 저장할 수도 있다. 인간이 소중하게 여 기는 것들 가운데 저장이 쉽지 않은 것들이 많다. 시간이나 아름다움 같은 추상적인 것들이다. 저장할 수 있어도 장기간 저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돈은 사회적 경제적 관계망을 바탕으로 한다. 관계망은 줄 의무와 받을 권리로 구성돼 있다. 영국 외교관이자 사회학자인 알프레드 미첼 이네스Alfred Mitchell Innes는 “A가 쥐고 있는 돈은 B의 부채다. B 가 그의 부채를 지불하면(상품이나 서비스를 건네주면), 돈은 A한테서 떠난 다"고 말했다. 여기서 줄 의무와 받을 권리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계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사회적 분업 이후 사회 구성원들이 원치 않아도 맺고 있는 관계다. 개인이 원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란 얘기다. 생존을 위해 서로 생산물을 교환해야 하는 관계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은 "자본주의에서 개인은 다른 사람과 비즈니스를 할 수밖에 없다"며, "비즈니스는 상품(서비스)을 교환하는 것으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교환을 통해 한 상품의 가치가 실현된다. 한 상품의 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이 바로 돈이다. 돈으로 표현된 가치가 바로 가격이다. 가격은 한 상품 의 내재가치가 아니다. 다른 상품과의 교환비율, 다른 말로 사회적 관계를 보여준다. 이런 관계망 속에서 돈은 청구권이다. 돈에 적힌 금액이 대표하는 구매력만큼 재화나 서비스를 살 수 있다. 보편적인 돈은 한 사회의 생산물과 서비스에 대한 청구권이기도 하다. 돈을 가진 사람은 액수만큼 받을 권리가 있다. 이는 돈보다 받을 권리와 줄 의무, 가치, 구매력 등이 먼저 탄생했다는 얘기다. 돈이 생겨나면서 받을 권리와 가치, 구매력이 탄생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 돈은 줄 의무와 받을 권리를 정산하고 가치를 A에서 B로 이전시킨다. 또 생산물을 현재에서 미래로, A지역에서 B지역으 로 흐르도록 하는 '사회적 장치' 또는 '사회적 표현'이다. 이런 돈은 바이러스처럼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양한 숙주에 기대서 생존한다. 한때는 진흙으로 만든 토큰Token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커다란 바위 였다. 어느 시대엔 조개껍데기였고, 어떤 나라에선 나무 조각일 때 도 있었다. 하라리는 "돈은 종이든 디지털 신호이든, 아니면 조가비 이든 가치를 표현하고 이전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때 조가 비이든, 돌멩이든, 아니면 미국 달러로 불리는 종이쪽지이든 사람들 이 가치가 있다고 이심전심으로 공유하는 믿음(Trust)'을 바탕으로 한다. 하라리는 그 믿음을 '심리적 구성물(Psychological Construct)'이라고 설명했다.

- 메소포타미아 지배자들은 왕국 내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생산물 의 가치를 비교해 교환할 수 있는 단위를 개발했다. '계산 단위로서 돈(money of account)'이다. 이 단위를 바탕으로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증표를 개발했다. 바로 진흙 토큰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제프리 잉엄 교수에 따르면 진흙 토큰 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들이 반드시 소유해야 했다. 왕국의 지배 자인 제사장이나 왕이 점토판으로 세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메르 인들은 신전이나 왕실에 세금을 내기 위해 밀 등의 생산물을 팔고 진흙 토큰을 마련해야 했다. 진흙 토큰을 마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었기에 자연스럽게 생산물이 유통되면서 왕국 안팎에서 상거래(시장) 가 활성화됐다.
- 상징화폐는 기원전 3000년이나 지금이나 정부, 좀 더 정확하게 말해 '중앙권력'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중앙권력은 다양하다. 제사장, 왕, 황제, 대통령, 총리 등 정부 형태와 구조에 따라 여러 모습을 띤다. 하지만 경제적 실체는 동일하다. 한 지역 또는 국가 안에서 '죽음만이 면제해줄 수 있는 원초적 채무(세금)'를 사회 구성원들에게 매길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는 인물 또는 조직이다. 중앙권력이 막 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발행한 증표가 바로 진흙 토큰이거나 현대 법정화폐(fiat money)다.
- 경제학 교과서에서 금속화폐는 인간들이 물물교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대안이다. 이런 가설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금속화폐는 물물교환의 문제점이 아니라 돈의 영토 내 갈등이 낳은 산물이다. 미첼 교수는 "주화(coin)가 발명된 지역을 보면 진실이 드 러난다"고 말했다. 주화는 기원전 7세기 지금의 터키 지중해 연안 리 디아Lidya 지역에서 발명됐다. 그 시기 범그리스 지역은 전쟁의 도가 니였다. 도시국가들이 연일 전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쟁은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신뢰와 호혜 등 추상적인 가치를 증발시켜버린다. 상징화폐의 주요 축인 중앙권력의 재정에 엄청난 압박이 가해진다. 이런 와중에 거래 공간이 확대된다. 대규모 군대가 해외 원정을 떠나기 때문이다.
제프리 잉엄 교수에 따르면 전쟁을 계기로 마주친 공동체 밖의 상대는 불신과 사술의 대상으로 비친다. 실제 아테네 등 그리스 도시국가 시절에 본격화된 주화는 왕정 또는 제국의 붕괴 이후의 상황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이런 시대에는 외상거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 거래를 마치자마자 상대를 잊어버릴 수 있는 결제수단이 필수다. 고대사회에는 그러한 결제수단이 금이나 은이었다. 반면 상징화폐는 사실상 외상거래다. 매매 당사자가 아닌 제3자(정부)의 신뢰를 바탕으로 사고판다. 이 신뢰가 유지되는 조건과 상황에서만 매매 당사자가 상대를 잊어버릴 수 있다. 전쟁은 제3자의 신뢰를 부숴놓기 일쑤다. 전쟁으로 탄생한 금속화폐 시대에는 상징화폐 시대와는 전혀 다 른 머니 트라이앵글이 작동했다. 귀금속 채굴업자-주화 주조업자 세금을 바탕으로 작동한 트라이앵글이다. 이는 머니 트라이앵글 원 형이었다. 고대 아테네에 라우리온Laurion이란 유명한 은광 지대가 있었다. 아테네 등이 페르시아와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세기 라우 리온 은광에서 거의 3천 톤에 가까운 은이 채굴됐다. 고고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해본 결과 전성기에 노예 2만 명 정도가 은광 200여 곳에서 일했다. 은광 소유자들은 노예 노동으로 캐낸 은을 주화를 주조하는 곳에 팔았다. 주화를 주조하는 사람들은 아테네 등 국가가 정 한 규격에 맞춰 주화를 만들어냈다. 덕분에 아테네 동맹 세력은 전쟁에 필요한 물건을 조달할 수 있었다.
금이나 은을 바탕으로 한 금속화폐 시대는 기원전 7세기부터 1970년까지 2700년 정도 이어졌다. 그렇다고 모든 거래가 금이나 은으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금이나 은은 주로 땅을 사고팔거나 해외 교역에서 결제수단으로 쓰였다. 일상적인 상거래는 물물교환이나 잡 금으로 만들어진 주화로 이뤄졌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이나 인간의 기억은 성글기 마련이다. 금과 은이 최종 결산 단위로 쓰였기 때문에 금속화폐가 모든 상거래에 쓰인 줄로 안다.
- 또 하나의 오해가 있다. 금본위제 복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금 화나 은화 시대에는 인플레이션이나 자산 거품, 금융위기가 없거나 덜한 줄 안다. 그 시절에도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금융위기가 일어나 기도 했다. 국가는 재정난이 심해지면 귀금속 함량을 줄이곤 했다. 심지어 금이나 은으로 태환이 되지 않는 종이돈을 찍어내기 위해 인 쇄기를 돌리기도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김없이 돈의 가치가 급 락했다. 물가가 급등하여 극심한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왕 등 권력자 들은 양질의 새 돈을 만들어 돈의 가치가 급락한 것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작업을 했다. 나중에는 돈의 유통 속도(화폐수량 MV=PT 에서 V)를 떨어뜨리는 방법이 동원되기도 했다. 상거래 자체를 어렵게하는 방식이다.
돈의 양이 늘어남과 동시에 질이 좋아진 때도 있기는 했다. 주로 해외무역이 확장되거나 정복 전쟁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시기다. 이 런 일은 고대 그리스 지역인 리디아에서 최초로 주화가 발명되고 지 중해 연안에서 광산이 개발된 이후에 나타났다. 아테네 등의 그리스 도시국가는 양질의 주화를 만들어 사용했다. 양질의 다양한 돈을 일 정 비율에 맞춰 사고판 그리스의 돈 장사꾼들은 고대에 가장 뛰어난 은행가들이었다.
- 금속화폐 시대 후반에 인간은 상징화폐 부활로 이어지는 중요한 발명을 한다. 바로 부분지급준비금 제도와 은행권이다. 중세 말기에 시중은행이 고객한테 받은 예금 가운데 일부만을 떼어놓고 나머지 를 대출해주기 시작했다. 영국 금세공업자 출신 은행가들이 부분지 급준비금 제도를 발명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또 17세기에 시중은행들이 자신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종이증서(은행권)를 발행하 기 시작했다. 시중은행이 머니 트라이앵글의 한 축으로 떠오르기 시 작한 것이다. 금속화폐 시대에 상징화폐의 싹이 싹트기 시작했다. 은행권은 탄생 순간 혼돈을 불러일으켰다. 18세기 사람들은 은행권이 돈인지 아니면 어음이나 환어음 같은 신용수단인지 알지 못했 다. 인간의 역사에서 한 시스템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일상화 되어 기정사실이 된 사례가 종종 발견된다. 은행권이 그런 사례 가운 데 하나다. 19세기는 은행권의 정체뿐 아니라 관리 문제를 놓고 치 열하게 논쟁이 벌어진 시대였다. 그 과정에서 시중은행 하나가 점차 중앙은행 기능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바로 영국의 영란은행이다. 머니 트라이앵글의 또 하나 축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위기와 논쟁, 대책 마련이라는 과정이 한 세기 동안 이어졌다. 돈의 역사에서 19세기는 대논쟁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인류는 대논쟁과 실험을 거쳐 중앙은행의 기능을 터득했다. 그리 고 20세기 초에 머니 트라이앵글이 확실하게 갖춰졌다. 상징화폐 생 태계의 뼈대가 갖춰진 셈이다. 그렇다고 금속화폐가 곧바로 상징화 폐로 전환되지는 않았다. 19세기 고전적인 금본위제는 제2차세계대 전 이후 미국 달러-금 태환을 중심으로 세계 종이돈의 위계서열이 결정되는 과도기 형태를 띤다. 고전적인 금본위제보다 금에서 더 멀 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71년 금과의 연결이 단절됐다. 이 면에는 현대 국가의 징세 능력과 경제 운용 노하우, 갈등 완화 등이 자리 잡고 있다.
- 돈의 영토는 화폐단위 지정으로 확인된다. 중국 진시황이 통일제국을 수립한 이후 도량형을 단일화했다. 화폐단위는 도량 형의 핵심이었다. 화폐단위는 곧 셈의 기본이라고 했다. 한 나라에서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를 계산할 때 통일된 화폐단위가 쓰인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우선 '원' 단위로 측정된다. 국제적으로 비교 할 때는 달러로 환산된다. 한 나라의 재화와 서비스의 총량을 파악 하는 일은 정부의 근원적인 일이다. 경제성장률을 계산해 집권세력 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 해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 총량을 알아야 세금을 매길 수 있다.
- 세금의 또 다른 이름은 '원초적 부채(Primordial Debt)'이다. 인간이 무리 지어 살기 시작하면서 개인의 몫이 아닌 공동체 몫을 따로 떼 어놓아야 했다. 원시공동체에서는 선의를 바탕으로, 지배 - 피지배 관 계가 형성된 이후에는 제사장이나 왕 등 공권력의 힘으로 공동체의 몫을 구성원들한테서 받아내기 시작했다. 세금은 인간 사회에서 가 장 먼저 생겨난 채권채무관계 가운데 하나였다. 기업의 매출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는 여러 선택 대상 가운데 하 나다. 한 나라 정부의 세수가 영토 내 어떤 기업의 매출보다 많고 사 실상 확정적인 이유다. 한 기업이 강제력(압수수색, 강제징수, 형사처벌 등)을 동원해 수입을 강제할 수 있다면, 그 기업이 내놓은 종이증서는 사실상 돈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17세기에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는 영국 정부를 대신해 사실상 인도 지역의 상당 부분을 지 배했다. 자체 군대까지 보유했고, 사법권까지 쥐고 있었다. 동인도회 사는 인도에서 여러 가지 은화를 발행했다. 그 가운데 1860년대 찍 어낸 인도 루피 (Indian rupee)는 은 함량이 90% 이상이었다. 인도에서 정식 돈이나 마찬가지였다. 은 함량 때문에 신뢰도가 높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동인도회사가 쥐고 있는 강제력을 바탕으로 수입이 확실 했기에 사실상 통화 구실을 했다.
- 바로 '재화와 서비스가 화폐단위로 표현된 것(money of account)'은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말한 '화폐이론의 기초 또는 출발 점'이다. 이때 개별 상품이나 서비스 가격이 가치를 제대로 반영한 것인지는 일단 접어둔다. 세상 모든 것이 화폐단위를 바탕으로 가격 표가 붙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화폐경제 가 숙성됐다는 얘기다. 심지어 불평등 상태마저도 '상위 10%의 평균 재산 ○○달러'처럼 화폐단위로 표현된다. 순간 '당연한 것 아닌가?' 라고 되묻는 독자가 적지 않을 듯하다. 맞다. 21세기 현재 인간이 생 산하고 공급하는 모든 것에 화폐단위로 표현된 가격표가 붙어 있는 상황에서 불평등마저 화폐단위로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 바람에 '모든 경제 문제의 원인은 돈'이라고 믿는 이들이 적 지 않다. 이런 접근법이 작가의 상상력과 결합하면 놀라운 묘사가 나온다.
러시아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Fyodor Dostoevskii는 "돈은 주조된 자유다(Money is coined liberty)!"라고 말했다. 우리말로 직역한 듯하다. 나는 '돈은 표면에 찍힌 액수만큼 자유를 누리게 한다'는 번역이 더 좋다. 돈이 한 시점의 재화와 서비스 가운데 금액만큼 누릴 수 있는 청구권이라는 의미와 사실상 같다. 도스토옙스키 말고도 수많은 작가와 사상가, 혁명가들이 돈과 금융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현상을 질타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론(Capital)> 1권의 화폐를 다룬 장에서 각주에 돈의 위력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글을 인용한다.
"황금을 말하는 건가? 노랗고 반짝거리며 값진 황금?...... 많은 금은 검은 것을 희게 만들 수 있고, 반칙을 정당한 것으로, 잘못된 일 을 올바른 것으로, 천한 것을 고귀하게, 늙은이를 젊게, 바보를 용감 하게."
마르크스가 이 대목을 인용한 이유는 돈을 대하는 인간의 통념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쯤 되면 돈을 움직이면 모든 경제 현상을 좌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싹틀 만하다. 실제로 그랬다. '기존 돈이 불평등을 낳는다'며 '새로운 돈을 채택하면 불평등을 완화하거나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2022년 현재 그런 주장을 외치는 가장 대표적인 그룹이 바로 코인 지지자들이다. 비트코인 등 이 단순한 자산을 뛰어넘어 보편적인 돈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코인주의자들은 현재 화폐 시스템에서는 '돈에 대한 접근권(access to money)'이 제한된다고 비판한다. 중앙은행 - 시중은행으 로 이뤄진 금융 시스템이 중앙집권적이고 폐쇄적인 네트워크여서다.
- 매닝 교수는 "1980년대 이전에는 기업인이나 상인 등이 이익을 올리기 위해 자본을 늘릴 목적으로 빚을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고 말했다. 개인이 대출받는 일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가계대출이 전 혀 없지는 않았다. 미국 대부조합(S&L)과 시중은행 등에서 주택담보 대출이 이뤄졌다. 금융회사로서는 리스크가 거의 없는 돈벌이였다. 소득이 낮은 사람들은 전당포 등에서 고리대금을 쓰는 게 일반적이 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신용카드가 일반화했다. 시중은행도 기 업대출 대신 가계대출을 돈벌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매닝 교수 는 설명했다. 한국에서 빚의 대중화가 시작된 것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다. 나는 그때 주니어 기자로 금융 구조조정을 주도한 금융감독위원회를 취재했다. 시중은행 몇 곳이 문을 닫았다. 대기업인 대우 등이 분할돼 이곳저곳으로 매각됐다. 경제적 외과수술 시기 에 시중은행은 '미래 경영전략을 금융감독위원회에 제출해야 했다. 당시에 신한은행 등 시중은행의 경영진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소매 금융'을 주력 비즈니스로 내세웠다. 소매 금융은 기업이 아니라 개인 에게 대출(신용카드)을 해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한국의 가계부채가 늘어난 가장 큰 요인은 경제 상황과 금융회사의 전략이었다. 개인의 낭비벽 등을 가계부채의 증가 원인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 한 나라 화폐가 기축통화이면 금융위기 면역성을 타고날까. 당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금융위기 외환위기'라는 등식이 각인돼 있었 다. 1997년 IMF 외환위기 탓이었다. 게다가 요즘 경제기자와 경제분 석가들이 추상적인 경제 모델이나 수식으로 만들어진 분석 틀에 익숙하다. 역사적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이 세계 경제를 호령했을 때 10년마다 금융위기를 겪은 사실을 그들은 망각 한 듯했다. 알고 있어도 너무 오래전이라 현대 경제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금융위기는 기축통화와는 상관없다. 경제의 불균형이 신용의 증폭과 축소를 낳아 발생한다.
- 금융시장의 성숙은 산업화 정도에 비례한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고 장기 투자를 하면 시중은행과 투자은행의 규모도 커진다. 자연스 럽게 자국 통화를 바탕으로 한 채권과 주식, 파생상품 시장이 성숙해 진다. 일본이 산업화 과정에서 금융시장이 성숙해진 대표적인 사례 다. 일본 정부는 달러나 유로화 대신 엔화 표시 국채를 대량으로 발 행할 수 있었다. 결국 달러화로 화폐 질서가 회복된다고 해도 산업화 와 금융시장 성숙이 금방 이뤄지지는 않는다. 행키 교수가 처방하는 달러화가 단기처방으로 불리는 이유다. 달러화를 오랜 기간 이어갈 수는 없다. 달러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긴축 때문에 사회적·정치 적 위기가 깊어진다. 저항이 불가피해진다. 달러화는 산업화와 금융 시장 성숙이 어느 정도 이뤄진 나라에 맞는 처방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결국 돈의 영토 내부에 상징화폐 시스템을 지탱할 조건들이 갖춰져야 달러화도 성공할 수 있는 셈이다.
- 종이돈을 위기의 원흉으로 꼽는 논리가 금본위제 부활론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의 생각도 소박하다. '돈이 금이란 닻을 달고 있으면, 종이돈 남발 등 유동성 과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금이 돈이던 시대에도 위기 는 발생했다. 굳이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서유럽은 17세 기 이후 느리지만 꾸준히 자본주의로 바뀌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 초 산업혁명까지를 이행기라고 부르는 이유다. 금융위기의 역사가 찰스 킨들버거에 따르면 17세기부터 최근까지 400여 년 사이에 40 여 차례 주요 경제위기가 발생했다. 얼추 10년마다 위기에 시달렸 다. 주기성은 19세기 후반 들어 더욱 또렷해졌다. 1873년에는 산업 화한 주요 나라가 거의 동시에 위기에 빠졌다. 경제위기의 세계화의 시작이다. 이때가 바로 미국 등 주요 국가들의 통화와 금융이 영국을 중심으로 한 금본위제 아래 재편된 시기였다. 경제역사가들이 말하는 '고전적인 금본위제(Classical Gold Standard) 시기다. 
- 영국의 경제학자 모리스 돕Maurice Dobb은 "철기시대에도 돌로 만 들어진 도구가 두루 쓰였다"며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시대에도 이전 시대 시스템들이 재활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돈과 금융, 시장 등이 대표적인 예라며 "자본주의는 돈과 금융, 시장 등을 재활용하 고 있다"고 설명했다." 돈과 금융은 노동의 사회적 분업이 이뤄진 이 후 등장한 사회적 시스템이다.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금융위기가 자 본주의 이전부터 발생한 까닭이다. 단지 자본주의 시대 금융위기는 이전 시대와 다른 맥락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맥락의 차이를 무 시하고 모든 금융위기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이 는 인간과 원숭이의 유전자가 90% 이상 일치한다고 인간과 원숭이 는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금융위기는 자본주의 탄생 이전에도 벌어지곤 했다. 고대 금융위 기 패턴은 현대와 너무나 닮았다. 현대 금융위기의 원형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금융위기는 기원전 49년에 일어났다.
- 큰 사건은 담론의 지형도 뒤흔들어놓는다. 1929년 세계경제는 대참화를 겪었다.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시작된 것이다. 공 황은 이전까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던 말이었다. 주식을 비롯한 자산 가격이 폭락한 뒤 실물경제가 둔화하는 현상을 모두 공 황이라고 했다. 대공황이란 그런 공황들 가운데 가장 심하다는 뜻이 다. 사실 가장 심하다'는 말은 상대적이다. 1929년 이전까지 대공황 은 1873년의 공항이었다. 그해 미국과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주요 국가뿐 아니라 이들의 식민지 전체가 디플레이션deflation에 빠졌다. 당시 디플레이션은 1896년까지 23년 동안 이어졌다. 주식과 채권가격만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농산물과 각종 원자재 가격이 추 락했다. 1990년대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에 빠지기 이전까지 역사 상가장 긴 디플레이션 기록이다.
그러나 1873년 공황은 '대공황에서 강등됐다. 1929년 공황의 후 유증이 너무나 크고 깊어서 제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1873년의 공황은 '장기 공황(Long Depression)'으로 개명됐다. 그런데 "1929년 이후 경제학자들이 공황이란 말 자체를 쓰기를 두려워했 다""고 <월스트리트 제국>의 저자 존 스틸 고든John Steele Gordon은 말 했다. 대공황의 상흔이 너무 크고 깊은 나머지 경제학자들이 이후 발 생한 자산 가격 추락과 경기 둔화를 공황 대신 '침체(recession)'라고 부 르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 경제는 1936~1937년 다시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줄줄이 파산하고 실업자가 급속도로 늘었다. 대 공황 이전이었다면 공황으로 부를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경제학 자들이 1936~1937년 사건을 침체라고 불렀다"고 고든은 말했다.
- 신용은 현실 경제에서 사실상 금융이다. 자금 조달(주식이나 채권 발행), 외상거래(어음, 신용카드, 신용장 할인, 보증 등), 결제(이체나 송금 등)가 모두 신용을 전제로 이뤄진다. 이 가운데 가장 민감한 금융 활동이 바로 자금 조달이다. 외상거래나 결제는 실물거래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 영역에서 발행된 어음이나 환어음 등 각종 증서가 바로 애 덤 스미스 등 고전파 경제학자가 말한 진성어음(Real Bill)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론가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다. 신용이 일반화하면서 자금 조달을 위한 금융이 실물과 고리를 끊고 팽창하기 시작했다. 돈 벌기 위해 빚을 끌어다 베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역사적으로 보면 19세기 초반에 본격화한 현상이다. 바로 앞선 장에서 말한 '패닉 1825'라는 최초의 자본주의적 버블이 그때 일어난 이유다.
- 민스키는 실물경제가 침체 또는 공황 단계에서 회복해 확장 국면에 들어서거나 신기술의 등장 등으로 평균 이상의 수익이 기대될 때 금융 활동이 급증한 점을 간파했다. 금융이 실물경제 규모보다 웃자 란 현상(오버슈팅)이 발생하는 것이다. 금융거래는 순식간에 투기 단계 를 넘어 폰지 Ponzi 파이낸스 단계에 들어선다. 폰지는 영업이익 등으 로 갚을 능력이 없는데도 빚을 내 빚을 갚는 행위다. 이 단계 이르면 금융은 실물경제보다 눈에 띄게 웃자란다. 그 정점이 바로 민스키 모멘트Minsky Moment다.
- 민스키 모멘트에 금융 버블이 붕괴한다. 금융이 실물보다 웃자란만큼 금융자산 가격이 가파르게 떨어진다. 신용경색과 금융 버블 붕 괴 때문에 실물경제 활동도 위축된다. 금융과 실물의 간격이 좁아지 는 거품 붕괴 과정이 파괴적이면서 연쇄적인 까닭이다.
교환 과정에서 판매와 구매의 분리가 위기의 씨앗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분리가 위기의 원인이란 뜻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판매와 구매 분리 이후에 등장한 지불수단이라는 돈의 기능에는 모순이 있다. 반 을 돈과 줄 돈을 서로 비교하는 순간 돈은 가치척도 또는 화폐단위 로만 기능한다. 그런데 차액을 결제하는 순간 돈은 교환의 매개 수단 이 아니라 가치 저장수단으로 기능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실물경제가 나빠져 장사가 시원찮으면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것이 어느 수준에 이르면 "파열음을 낸다"며 "산업과 상거래의 위기가 금융위기 양상을 띤다"고 마르크스는 설명했다. "요즘 수학 개념으로 가득한 경제 용어에 익숙한 사 람들에게는 낯선 표현 방식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일상용어로 바꾸 면, 돈은 교환의 매개, 가치 저장, 가치 척도, 지불수단 등 여러 기능 이 하나로 통합된 사회적 장치다. 각 기능이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르 게 부각된다. 실물경제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돈의 기능 가운데 가치 저장 수단 같은 하나의 기능만 한다. 경제주체들이 돈을 돌리지 않고 움켜쥐려고만 한다. 갑자기 현금거래와 매매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것이 바로 위기 순간 많이 듣는 '돈이 돌지 않는다'의 진짜 의미다.
- 마르크스의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Frederick Engels는 "농부와 소읍의 대장장이가 생산물을 거래할 때 그들은 상대가 물건을 만드는 데 얼 마나 긴 시간을 일했는지 잘 알았다. 소읍의 대장장이도 절반은 농사꾼이었다. 농부의 농산물과 대장장이의 연장의 가치 비율을 경험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때만 해도 물물교환 방식으로 상품의 가치가 '밀 2리터 대낫 1개' 식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두 재화 사이에 돈이 끼어든 경우가 드물었다. 그 시절 돈은 주로 은 화나 금화였다. 대부분 벌크 결제에 쓰였다. 큰 상인들이나 제후끼 리, 국가 간의 결제에 쓰였다. 일상 거래에서 고액권인 은화나 금화 가 쓰일 리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돈이 일상 상거래에 등장한다. 이때도 은화나 금화가 아니었다. 구리를 바탕으로 한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이것마저도 귀했다. 글린 데이비스의 《돈의 역사》에 따 르면 상품과 상품의 가치 비교가 화폐단위로 이뤄졌다. '밀 2리터 대 낫 1개'가 '밀 2리터=3페니' 그리고 '낫 1개=3페니' 식으로 진화했 다. 상품 가치가 돈의 단위로 표현되면서 뜻밖의 교란이 발생했다. '밀 2리터=낫 1개의 교환에서는 가치 비교가 직접적이다. 교환 비 율이 바뀌기 위해서는 밀이나 낫의 가치가 변해야 한다. 여기에 화폐 단위가 개입하면 변수가 하나 더 늘어난다. 돈의 가치가 변하면 상품가치의 비율도 바뀐다.
게다가 화폐단위가 은이나 금의 무게 단위에서 멀어지기 시작했 다. 영국 화폐단위 파운드pound는 애초에 금이나 은의 무게 단위였 다. 화폐와 무게 단위 사이에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금본위제 시절 에도 파운드의 가치가 실제 금 1파운드와 거리가 멀었다. 현대에 와 서는 아예 관련이 사라졌다. 요즘 영국 동전 1파운드는 상당히 묵직 하다. 그렇다고 금이나 은 1파운드와 재질이나 무게가 같지 않다. 마 르크스는 "한 물건의 명칭은 물건의 재질이나 속성과는 별개"라며 "어떤 사람의 이름이 제이콥Jacob임을 알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성 을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상품의 가격(명칭)이 2만 원이라 고 해서 실제 가치가 2만 원이라고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것은 가장 근원적인 단계에서 확인된 버블의 가능성이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다. 버블이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 호화폐 이론가 가운데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자인 폴 비냐 등은 예외다. 그들은 단계설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다. 그들은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에서 흥미로운 두 학파를 소개한다. 메 탈리스트(metallist, 가치주의)와 차탈리스트(chartalist, 국정주의)다. 화폐이론 가의 양대 산맥이다. 학술 개념이 늘 그렇듯이 두 학파의 우리말 번 역은 원문보다 더 어렵다. 메탈리스트는 돈의 가치가 실물, 특히 금 이나은 같은 금속(metal)을 바탕으로 한다고 믿는다. 돈의 자궁이 시장이라고 본다. 상거래 방식이 물물교환에서 진화하는 과정에서 화폐가 태어났다는 쪽이다. 상식화한 단계론을 인정한다.
반면 차탈리스트는 토큰token 또는 증표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 어 차타 charta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돈의 자궁은 지불 의무와 받을 권리로 이뤄진 연쇄 사슬이라고 본다. 물물교환은 신화로 치부 한다. 비냐가 저널리스트여서 그랬을까. 그는 두 학파의 주장을 공평 하게 소개하는 데 치중했다. 자신이 논리를 전개하는 데 필요한 대목 만을 끌어다 쓴 것이다.
저널리스트의 균형이 늘 미덕은 아니다. 양쪽의 주의나 주장을 평면적으로 비교해놓으면 독자의 혼란이 더욱 심해질 때도 있다. 특 히 돈의 기원 또는 돈의 역사성에 대한 주의나 주장을 단순 비교하 면 혼돈은 더욱 심해진다. 여기서는 케인스의 말대로 과거 한 이론가 의 말을 출발점으로 삼아 돈이 어디서 어떻게 탄생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추적해보려 한다. 바로 케인스의 말이다.
"돈은 문명의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오래전에 탄생한 제도(시스템)이다. 빙하가 녹아내리는 바 람에 돈의 기원은 베일에 가려졌다. 인류가 살았던 간빙기 시대까지 기원을 쫓아가야 할지 모른다. 간빙기 시대의 온화한 날씨 덕분에 인 간은 새로운 것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웠다. 그리스신화에서 세상 저쪽 끝에 있는 낙원인 헤스페리데스 동산이나 아틀란티스 대 륙, 에덴동산에서 돈이 탄생했을 수 있다."
- 역사의 증거를 찾는 사람들은 이론가들과는 달리 "빙하가 녹아내려 돈의 기원이 베일에 가려졌기 때문에 상당한 애를 먹었다. 그들 은 지금의 터키나 그리스, 이집트, 이스라엘, 시리아의 사막을 파며 돈의 기원을 추적했다. 고고학적 증거들이 상당히 발굴됐다. 인간의 머릿속 추정이 아니라 유물과 기록 등을 바탕으로 돈의 기원을 상당 히 밝혀냈다. 하지만 케인스 이후 세대의 경제학자들은 고고학이나 인류학이 밝혀낸 사실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현재 돈의 바다(금융시장)에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수확할 수 있을지에 더 집중한다. 돈의 기원은 그저 지적 호기심으로 치부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네!'라는 한마디와 함께.
- 고츠먼 교수는 <문명을 위한 금융(Financing Civilization)》에서 "진정한 도시화의 주인공들은 기원전 4000년쯤 수메르인들이었다. 그들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비옥한 땅에 우루크Uruk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사회학과 제프리 잉엄교수가 쓴 《돈의 본성》에 따르면 사회적 계급이 지리적 차이로 드러났다. 수메르인들이 건설한 사회는 제정일치 사회였다. 신석기 혁명 (농업의 시작)으로 생산하는 대중과 엘리트(지배계급)의 분화가 이뤄졌다. 여기에 도시화의 변수가 끼어들었다. 생산하는 대중은 주로 농촌 지 역에, 엘리트는 주로 도시에 모여 살았다. 도시에는 엘리트만 사는 게 아니었다. 엘리트들을 수발할 인력이 필요했다. 수메르 지배자들 은 많은 백성들이 도시에 모여 살게 했다. 우루크 문명의 전성기인 기원전 2900년 즈음에 5만~8만 명 정도가 도시에 모여 살았다. 청동 기 시절로서는 메트로폴리스다.
수메르의 지배자들은 농촌과 도시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 의 간극을 극복하고 자신과 도시인들의 생존을 위해 재화와 서비스 를 이동하고 재분배해야 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외적을 막는 데 재화와 서비스의 이동은 필수였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당 시로서는 버겁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수메르는 자급자족 경 제(Autarchy)와 거리가 멀었다. 생활필수품을 역내 또는 원격지 교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원목과 구리, 아연 등 청동기 무기를 만드는 전략 물자를 해외에 의존해야 했다. 재화와 서비스를 이동하고 재분 배하는 일은 진부하지만 영국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 Arnold Joseph Toynbee가 말한 도전이었다. 수메르 지배자들은 응전해야 했다.
수메르인들은 돈이란 장치를 발명했다. 농촌에서 생산된 밀 등 식량을 제사장이나 왕, 그의 식솔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다. 재화와 서비스에는 발이 없다. 스스로 이동할 수 없다. 제 사장이나 왕은 돈이란 장치를 활용해 물질적 대사(재화와 서비스의 순환) 가 이뤄지도록 했다. 이는 근대경제학자들의 믿음과 다른 사실이다. 근대경제학자들은 돈을 그림자 또는 베일veil쯤으로 본다. 돈은 적극적인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접근법이다. 이른바 화폐중립설이다. 돈이 실물경제의 생산과 소비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의 결론은 돈을 많이 풀어봐야 결국 물가 상승만 일으킨다는 주장이다.
- 이미 세상이 변했다. 원시공동체 시절의 경제적 순수 또는 호혜를 바탕으로 한 나눔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 만으로는 생산물의 교환이 지속되지 않는다. 사회구성원의 자발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 자발적 동의의 뿌리는 바로 부채 의식이다. 개인 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는 관념이다. 영국 LSE 의 데이비드 그레이버 David Graeber 교수의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Debt: The First 5,000 Years)>에 따르면 지배자들은 백성들에게 종교적인 언어로 부채 의식, 달리 말하면 부채 이데올로기를 심어줬다. 그레이버 교수가 소개한 힌두교 경전(Satapatha Brahmana)은 고대인들의 의식 속에 뿌리내린 부채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모든 존재는 신들과 성자, 성직자들, 사람들에게 빚을 진 채로 태어났다." 
흥미로운 점은 채권자가 신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자와 성직 자, 사람들이 고루 포함돼 있다. 사실상 사회구성원 전체가 받을 권리를 지닌 존재로 설정된 셈이다. 그렇다면 채무자, 달리 말해 줄 의무를 지닌 존재도 사회구성원 모두이다. 이쯤 되면 사회구성원 모두가 채권자이면서 채무자다. 사회 자체가 분업 때문에 '채권채무 네트워크(Debt-Credit Network)'로 바뀌었다. 모든 채권채무 관계가 수평적이지는 않았다. 분업화와 함께 이뤄진 도시화 과정에서 생산지인 농촌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 했던 제사장은 신에게 진 빚을 죽은 뒤에야 벗어날 수 있는 의무로 규정했다. 제사장은 수동적으로 백성들이 제물을 바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 수메르인들이 남긴 와르카 물병의 맨 위에는 신들의 대리인들이 새겨져 있다. 그레이버 교수는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에 는 거대한 신전이 들어서 있었다. 신전은 대규모 산업 시설이었다. 양치기와 바지선을 끄는 인부, 천을 짜는 인력, 무용수, 신전의 일상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 등 수천 명이 머물며 일했다"고 설명했다. 재 정일치 시대에 신전은 생산 허브였다. 그 시대에 가장 중요한 생산수 단은 토지와 농기구였다. 이것들 대부분이 신전의 소유였다. 신전은 거대한 순환 고리의 중심이었다. 종교적 언어로 채색된 의무를 바탕 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징발하는 것이 신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신 전이 물류를 순환하는 장치였다.
제사장과 사제들은 치밀했다. 그들은 불완전한 기억에만 의존하 지 않았다. 누가 얼마를 신에게 바쳐야 하는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인류 최초의 채무 기록은 신전에 보리를 바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 술 더 떴다. 자신들 권력의 원천인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원격지 무역까지 했다. 상인들에게 먼 나라에 가서 물건을 사오라고 주문했다.
이 모든 과정은 기록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자연스럽게 문자와 숫자 가 발명됐다. 윌리엄 고츠먼 교수의 《문명을 위한 금융》에 따르면 인 간은 사랑하는 마음을 연인에게 전하려고 문자를 발명하지 않았다. 숫자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 학파들이 생각하는 것처 럼 순수한 정신적인 작용을 촉진하기 위해 발명한 것이 아니다. 개인 또는 집단의 생존과 직결된 생산분배 소비 과정에서 문자와 숫자 가 개발됐다.
제프리 잉엄 교수에 따르면 초기에 곡물의 낱알을 세는 방법이 개발됐다. 추상화 능력이 필요한 무게란 개념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 다. 가축이나 농작물을 단순히 세는 단계였다. 개수를 세는 것만으로 도 신전에 빚을 갚는 데 충분했을 수 있다. 하지만 생산물이 다양해 졌다. 노동도 셈을 해야 했다. 이 모든 문제는 서로 다른 생산물과 서비스를 비교 평가하고, 받을 권리와 줘야 할 의무를 청산하는 일이다. 단일한 기준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한 사회뿐 아니라 이웃나라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를 비 교해 질적 비율이 아닌 양적 비율로 이뤄진 메트릭스'를 만들어야 하는 일이다. 복잡하고 현기증 나는 작업이다.
잉엄 교수에 따르면 가치는 다름을 전제로 한다. 근대경제학자들 은 다름을 개인의 선호 차이라고 본다. 개인이 선호하는 것이 다르려 면 재화와 서비스를 고를 수 있을 만큼 공급되어야 한다. 미국 유타 대학교 E. K. 헌트Hunt 교수가 쓴 《경제학설사(History of Economic Thought:A Critical Perspective)》에 따르면 경제이론 가운데 효용이론이 등장한 시점은 19세기 후반이었다. 영국 등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시장에 다양한 물건이 가득 쌓였다. 인류가 경제역사가들이 말하는 생존 단계에서 벗어났다. 개인이 돈만 있으면 고를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시계를 돌려 기원전 3000년 전후로 돌아가 보자. 말 그대로 원시적인 수준으로 노동 생산성이라고 할 게 없었다. 소수의 지배계급 외에는 개인의 선호를 운운할 형편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 는 족족 확보해야 했다.
더욱이 기원전 3000년 인간은 경제적 순수 상태에서 갓 벗어났 다. 서로 돕고 힘을 모아야 했던 호혜의 시대가 저물었다. 사회적으 로 서로 다른 신분, 즉 계급이 탄생했다. 인간이 가치의 많고 적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바로 가치의 탄생이다. 잉엄 교수는 '가치의 서열(hierarchy of value)'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가치를 숫자로 표현하는 기능, 즉 셈의 단위(Money of Account)로서 돈이 탄생했다.
- 기원전 3000년 점토 토큰은 단순히 곡물이나 양, 염소 등을 상징한 게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당시 사회관계를 상징했다. 바로 사회적 분업이 낳은 채권채무 네트워크다. 또 점토 토큰은 가치의 서열을 양적으로 표현했다.
점토라는 재료 자체는 그때나 지금이나 흔했다. 희소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재료다. 하지만 사회적 분업이 낳은 채권채무 네트워크, 줘야 하는 의무와 받을 권리에 대한 기록과 가치의 비교, 신의 권위 와 무시무시한 공권력을 바탕으로 한 중앙권력이 강제하는 세금 납 부 등이 하나의 생태계(시스템)로 작용해 보잘것없는 진흙으로 만들어진 토큰이 돈으로 구실했다. 금이나 은처럼 내재가치가 있어야 미래의 어느 시점에 가치를 이전할 수 있다는 주장과 다른 대목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왕국의 시스템 덕분에 아무런 내재가치가 없는 점토만으로도 가치를 저장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바빌로니아 왕국의 농부가 올해 풍년이 들어 밀을 예 년보다 더 팔아서 점토 토큰을 많이 마련했다. 지엄한 왕이 매기는 세금을 내기 위해서다. 그가 마련한 토큰은 그해 세금을 내고도 남았 다. 그는 토큰을 잘 보관했다. 그런데 이듬해 밀농사가 잘되지 않았 다. 흉년 정도는 아니었지만 평년작 수준이었다. 그는 작년에 마련해 놓은 점토 토큰을 더해 세금을 냈다. 세금을 걷는 관리들은 토큰의 연도를 따지지 않았다. 모두 동등한 가치로 인정했다. 점토가 훌륭하게 가치를 저장한 셈이다.
일반경제학에서 물물교환 다음 단계는 현물화폐다. 아리스토텔 레스의 가설에 따르면 상징화폐 단계는 1970년대 이후 신용화폐 시 대에서나 본격화했다. 그런데 벨기에의 화폐이론가 베르나르 리에테 Bernard Lietaer는 흥미로운 말을 했다. 현대인들은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그리스 로마 신화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그림과 문자를 보면 그들은 아주 추상적인 생각까지 했다"며 "고대인들이 상상력이 부족해서 물물교 환 뒤에 현물화폐로 넘어갔다고 여기는 시각은 현대인들의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 그리스 사람들이 전통 윤리를 바탕으로 주화에 적잖이 저항한 흔적이다. 이런 저항을 이겨내고 주화가 확산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전쟁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은 비상 상황이다. 전쟁만큼 빠르게 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하는 경우가 없다. 게다가 전쟁은 주로 국경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다. 여차하면 수많은 병사를 지리적으로 나 문화적으로 아주 낯선 지역에 보내야 한다. 굿하트 교수의 말대로 거래 상대의 신용을 전혀 알 수 없는 지역으로, 솔론 등 아테네 지도 자들은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최악의 방법은 군대가 먹고 쓸 용품을 아테네에서 전장으로 수송하는 것이었다. 교통과 통신이 원시적인 시절 현물 수송은 거의 불가능했다. '어렵지 않게 옮길 수 있고 외국 에서도 '즉시 현물과 교환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달리 말하면 무게가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크고 무거운 물건은 전쟁이 잦은 고대 그리스에서 저주받은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금화나 은화가 제격이었 다. 금과 은은 점령지에서도 조달할 수 있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올빼미 동전으로 급여를 주고 전투 지역에서 물자를 조달했다. 이들은 급여로 가족을 먹여살려야 했다.
제프리 잉엄 교수는 돈의 탄생, 특히 주화의 등장에서 기묘한 시스템이 작동했다고 한다. 전쟁이 잦았던 시절, 병참을 위해 주화가 절실했다. 사실상 주화 없이는 전쟁이 불가능했을 정도였다. 주화를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서는 금이나 은 광산을 확보하는 게 필수였다. 따라서 전쟁을 할수록 약탈로 금이나 은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었 다. 그만큼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주화의 양도 늘어났다. 병사들의 약 탈 대상이 단순 물품과 사람에서 금이나 은 등 귀금속으로 자연스럽 게 바뀌었다. 군인들은 모국이나 점령지에서 경제의 중심이었다. 그 들이 지급받은 주화나 약탈한 금과 은이 지역경제를 활성화했다. 심지어 시장이 없던 곳에 시장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를 잉엄 교수는 '군대-주화 복합체(Military-coinage complex)'라고 불렀다. 복합체는 여 러 가지 요소들이 한 체제 내에서 밀접하게 서로 의존하는 양상을 이른다. 어느 순간 어느 요소가 먼저인지 또는 독립변수인지를 구분 하기조차 불가능하다. 군대-주화 복합체는 2천여 년이 흘러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달러가 정부 차원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 사이에 기축통화로 자리 잡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도 요긴하다. 제2차세계대 전 직후 미군은 한반도와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거의 50여 개국에 주둔했다. 미국은 이들에게 달러로 월급을 지급했다. 미군 부대 주변 에는 달러로 작동하는 지역경제가 형성됐다. 나라 경제의 상당 부분 이 주둔 중인 미군의 달러 지출에 의존한 곳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와 지금의 터키 지역 도시국가 등은 전쟁에 대비해 따로따로 주화를 만들었다. 돈도 제각각이었고 화폐단위도 다양했 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출현하는 것이 환전상이다. 한 걸음 더 나 아가 도시국가들 모두에서 통용되는 보편적인 통화 시스템이 필요 했다. 실제로 군사동맹을 맺은 곳들은 단일 통화를 썼다. 자기들 돈 뿐 아니라 동맹국의 화폐도 정식 통화로 인정했다. 아테네는 한 술 더 떠 자기네 돈을 쓰도록 강제했다. 기원전 456년 아테네는 아이기 나섬을 압박해 자체 화폐 '거북이' 주조를 중단하고 '올빼미'를 정식 통화로 삼도록 했다. 기원전 449년에는 모든 외국 주화를 정부 조폐 창에 내는 법령을 만들었다. 모든 동맹국이 아테네 시스템으로 돈을 계산했다. 영국 화폐역사가 글린 데이비스가 말한 '아틱 은화 본위제(Attic Silver Standard)'의 등장이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국제통화 시스템이다. 금융위기 때마다 달러 체제 붕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한 번 쯤 살펴볼 필요가 있다.
- 고대 전쟁은 원가가 많이 드는 비즈니스였다. 알렉산드로스 군대 에서 최정예 기마병은 하루 2드라크마를 받았다. 보병의 일당은 1드라크마였고, 용병은 2/3드라크마 또는 노역꾼 일당의 2배를 받았다. 모든 병사에게 식사는 무료로 제공했다. 이들이 소아시아 지역에 진군했을 때 들어간 비용은 하루 20달란트였다. 은으로 0.5톤, 즉 12만 드라크마 정도였다.
정복 초기의 비용은 대부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자원(자기자본)이 었다. 하지만 그보다 몇 곱절 더 많은 전리품을 확보했다. 은화 5만 달란트에 더해 죽어가던 다리우스 3세가 생포된 기원전 330년에 7천 달란트를 추가로 얻었다. 현지에서 조달한 금과 은은 마케도니아로 이송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에서 데리고 간 화폐 주조공들이 주화로 만들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 지역에도 조폐창을 설치했다. 마케도니 아의 암피폴리스Amphipolis에 있는 조폐창에 이어 두 번째로 컸다. 이 밖에 점령지에는 많은 군소 조폐창이 있었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주 화 규모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규모를 능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원정을 단순히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선진 문명 을 전파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과학자, 엔지니어, 조사관, 몸종 등 지원 인력이 어마어마했다. 이들을 먹여 살릴 돈을 만드느라 조폐 창은 쉼 없이 가동됐다. 알렉산드로스의 신전이나 왕실 금고에 잠든 금과 은을 꺼내 동전으로 만들었다. 양질의 돈이 급증했고 유통 속도도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제국 곳곳에 설치된 조폐창에서 나온 돈이 각 지역에 배분되는 방식은 아주 효율적이었다. 돈을 유통하는 주요 채널은 병사와 용병들이었다. 현대 경제 용어로 말하면 병사들이 화 폐경제화의 첨병이었던 셈이다.
- 윌리엄 1세의 '최후의 날 책'은 현대 머니 시스템이 탄생하는 데 중요한 주춧돌이다. 현대 돈은 넓은 의미에서 정부의 신용을 바탕으 로 한다. 시장에서 처음 만난 A와 B는 서로의 신용을 알 수 없다. 서로를 믿기도 힘들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믿을 만하다고 인정하는 제3의 사람이나 기관이 발행한 어음이나 수표 등으로 대금을 지불하 고 거래를 마감해야 한다. 영토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존 재는 정부다. 정부는 '죽어서야 벗어날 수 있는' 빚(세금)을 받아낼 수 있는 기관이다. 영토 안에서 어떤 개인들이 보유한 무기를 합한 것보 다 월등한 공권력마저 쥐고 있다.
정부가 세금을 제대로 받아내려면 누구한테 얼마를 받아내야 할 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공권력은 센서스란 방법을 개 발해 사용해왔다. 3세기에 고대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세금 을 얼마나 거둘 수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 제대로 된 센서스를 실시 했다. 로마는 그것을 바탕으로 처음 예산을 편성했다.
윌리엄 1세의 센서스 덕분에 영국은 유럽 대륙의 어느 나라보다 세원을 잘 포착할 수 있었다. 영국이 중세 말기부터 징세 대행업자 (Tax Farmers)에 의존하지 않고 정부가 직접 세리(세무 공무원)를 임명했다. 유럽 역사에서 가장 빠른 조세의 중앙집권화였다. 현대 재정학 용어로 조세 효율성이 한결 높아졌다. 이것은 파운드가 국제무역에서 결제통화로 사랑받은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 새로운 돈이 나타났다
은행돈(bank money)은 '모든 돈은 중앙은행이 공급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낯선 개념이다. 고대 중세 시대에 모든 돈은 왕 이나 제후가 찍어낸 주화였다. 하지만 대항해시대가 본격화하면서 서유럽에 돈의 수요가 급증했다. 왕이 찍어낸 주화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런 공백을 메운 주역이 바로 시중은행이었다. 시중은행 이 처음에는 어음 등 신용수단으로, 나중에는 은행권(bank note)을 발 행해 왕의 주화가 감당하지 못한 공간을 채웠다.
은행돈을 부르는 말은 다양하다. 왕이 찍어낸 금화나 은화를 국 가의 돈(state money)이라고 부르며 은행이 공급한 돈을 민간 돈(private money)으로 구별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국가의 돈을 상품을 바탕으 로 한 돈(commodity based money), 은행돈을 명목 단위를 바탕으로 한 돈(nominalist mone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의 조지타운대학교 슈테판 아이히 교수는 <정치학 관점에서 본 통화에서 "중세 대부분의 시기는 2가지 통화 시스템이 작동했다. 금화나 은화 등 귀금속 화폐는 외국과 교역에, 반면 화폐의 명목 단 위만을 바탕으로 한 돈은 영토 내 상거래에 쓰이는 방식이었다"고 설 명했다.
슈테판 아이히 교수가 말한 명목 단위만을 바탕으로 한 돈이 바 로 은행돈이다. 이 돈의 양은 18세기 후반 왕의 돈보다 많아졌다. 돈 이란 바이러스의 진화 과정에서 중대한 변화이다. 새로운 숙주의 탄 생이다. 정부-중앙은행-시중은행(금융회사)으로 이뤄진 머니 트라이 앵글의 싹이 튼 셈이다. 머니 트라이앵글은 은행돈이 없으면 작동하 지 못하는 구조다.
- 윌리엄 1세의 센서스를 바탕으로 영국 왕실은 세수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현대 국가의 완벽한 중앙집권적 조세 시스템을 갖춘 것은 아니다. 프랑스 등 유럽 대륙 국가와 견줘 상대적으로 세금을 잘 거뒀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탤리도 한몫했다. 랠리는 버드 나무로 만든 채권채무 증서였다. 탤리에는 왕실 인장이 찍혀 있다. 메소포타미아 왕국이 발행한 점토 토큰만큼이나 재질이 소박하다. 사실 기능은 거의 같았다. 영국 왕실은 세금 고지서로 탤리를 썼다. 세금 내용을 적은 랠리를 절반으로 나눠 한쪽은 왕실이 보유하고 다 른 한쪽은 세금을 내는 쪽이 보관했다. 자연스럽게 받을 권리와 줘야 할 의무를 상징했다. 중세 영국에서 돈은 곧 은화나 금화였다. 탤리 는 돈으로 태환되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영국 왕이 전쟁 등 급전이 필요하게 되었다.
돈의 진화에서 전쟁은 변곡점 구실을 하곤 했다. 17세기 유럽은 루이 14세 등 절대군주가 지배하는 시대였다. 예외적으로 1690년대 영국이 명예혁명을 거치며 입헌군주제를 채택했을 뿐이다. 어쨌든 17세기 유럽 권력자들은 30년전쟁 등으로 여념이 없었다. 전쟁이 일 상이 되던 시대였다. 거대한 상비군은 힘의 상징이었다. 프랑스는 40 만 명이 넘는 상비군을 보유했다. 영국도 대규모 용병에다 성인 7명 가운데 1명을 징발해 전쟁을 벌이곤 했다. 다시 말하지만 인류의 행 위 가운데 가장 소모적인 것이 바로 전쟁이다. 1690년대 중반 영국 세수의 80%가 전쟁에 소모됐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주화 대란(coinage crisis)이 상당 기간 이어졌다. 은화 공급이 부족했다. 은화는 일상상거래에 금화보다 많이 쓰였다. 이런 은화가 부족했다. 그 시절 돈(money)으로 여겨진 금화나 은화를 대신할 것이 절실했다. 바로 탤리와 은행권이 자금 조달과 결제수단 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 국가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전쟁 비용을 금화나 은화를 찍어내는 정도로는 감당하지 못했다. 민간 자금을 끌어들여야 했다. 영란은행 이 1694년에 설립된 이유다. 영란은행 설립은 국가가 민간 돈에 본 격적으로 의지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돈이 국가의 돈에서 민간 돈으로 바뀌기 시작한 셈이다. 그 대가는 돈을 공급하는 권력을 시중은행(채권자)과의 분점이었다. 머니 트라이앵글 이 싹트기 시작했다.
세금 내역이 적힌 탤리를 돈 가진 사람(moneyed man)들에게 내놓 고 전쟁 자금을 빌렸다. 왕이 내놓은 1만 파운드짜리 탤리를 담보로 잡고 선이자 100파운드를 뗀 나머지 9900파운드를 빌려주는 식이었 다. 돈 가진 사람들은 왕실에 자금을 빌려주고 받은 탤리를 시중에 되팔았다. 9900파운드짜리 탤리를 9800파운드에 다른 사람에게 팔아 빌려준 돈의 상당 부분을 회수했다. 탤리를 살 사람은 차고 넘쳤다. 아리 아논 교수는 "영국인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탤리를 구입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순환구조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 고, 그 국채가 돈으로 구실하면서 세금 납부 수단으로 쓰였다.
탤리의 등장 · 할인 · 유통 등은 20세기 중반에 본격화할 현대 머 니 트라이앵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21세기 현재 우리가 쓰는 돈 은 은행 예금과 대출을 바탕으로 창출된다. 그렇다고 완전히 민간 돈 은 아니다. 최후의 순간 중앙은행이 보증한다. 정부는 민간 돈이지만 중앙은행이 보증하는 돈을 세금이나 국채를 발행해 조달한다. 한마 디로 현대 돈은 정부나 중앙은행이 찍어낸 증서가 아니다. 시중은행 시스템에서 민간의 빚이 화폐화한 것이다. 이를 중앙은행이 보증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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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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