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수주의 주류경제학은 환경경제학과 자원경제학이라는 분과에서 지구 생태계(환경오염이나 자원 희소성)와 경제의 관계를 다루고 있고 기후변화 역시 이 연장선에서 접근한다. 그런데 기존 주류경제학이 환경이나 자 원을 다루는 방식에는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인간의 경제활동 특히 시장경제가 환경을 포함한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 생태계로부터 얻는 에너지나 식량, 원료 등은 노동이나 자본 과 마찬가지로 시장경제 안에서 생산에 투입되는 하나의 생산요소로 간 주된다. 생태계의 구성요소가 시장경제의 구성요소로 바뀌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생태계에서 인정받았던 다양한 자연적 가치는 모두 무시되 고 시장에서 매겨주는 화폐가격만이 고려된다. 일단 시장 안에 가격표 가 붙어 들어온 화석연료나 자원들은 설령 너무 희소해지거나 고갈될 위험 상황에 놓이더라도 시장가격 신호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조정될 것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간주한다.
- 이처럼 보수주의 주류경제학은 원래 시장 밖에 있던 자원이나 에너 지, 그리고 시장 밖으로 버려지는 폐기물과 오염물질들을 모두 시장가 격 메커니즘 안으로 끌어들여 통제하려고 한다. 지독히 시장경제 중심 적인 이 같은 발상을 생태경제학자 허먼 데일리 Herman Edward Daly는 '경제 제국주의 economic imperialism' 사고방식이라고 불렀다." 극단적으로 보면 사회와 자연을 포함해서 세상 만물이 마치 모두 시장 메커니즘의 지휘 아래 작동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기존 주류경제 학이 오랫동안 쌓아놓은 방대하고 심오한 지적 체계나 수많은 정책 방 안들조차 결국 시장 중심적인 틀 안에서 구성되는 근본적인 한계를 피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그 막대한 지적 자산에도 불구 하고 경제활동이 초래하는 생태파괴를 해석하고 대처하는 방식이 기대 한 만큼 유능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지구 생태계와 인간의 경제를 정반대로 접근하는 관점이 이 미 1960년대부터 제기되었다. 아직도 일반 시민들에게는 매우 낯선 생 태경제학ecological economics이라는 비교적 새로운 경제학 조류가 그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인간 경제 시스템 안에 지구 생태 요소들이 속해 있는 것 이 아니라, 거꾸로 지구 생태 시스템의 부분집합으로 인간 경제 시스템 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의 경제 시스템이 지구 생태 시스템의 하위요소 로 편입되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정반대의 두 접근법에 대해서 허먼 데일리는 '천동설'과 '지동설'의 차이처럼 결정적인 차이라고 강조한다. 
- 기존 경제학 관점에서 생태경제학 관점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정치생태학자 부뤼노 라투르 Bruno Latour는, "사람들이 살아가 는 수단으로서의 세계"라는 과거의 우주론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장소로서의 세계"라는 관점으로 우주론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는 경제를 지구 생태계 안에 '뿌리 내려 있는 것embeddedness' 으로 보는 관 점이기도 하고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는 허먼 데일리의 문제의식과 완전히 일치하는 접근이고 생태경제학의 핵심원리이기도 하다.
사실 상식의 눈으로 보아도 인간에게 지구 생태계는 시장경제에 투 입되는 생산요소들의 집합소 정도가 절대 아니다. 인류가 살아갈 터전 이며 기반이다. 물질적 생산을 위한 원료 창고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 인류의 물질적,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존립을 위한 근본 전제 인 것이다. 허먼 데일리는 "지구 생태계가 100퍼센트 지분을 가지고 있기존 경제학 관점에서 생태경제학 관점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정치생태학자 부뤼노 라투르 Bruno Latour는, "사람들이 살아가 는 수단으로서의 세계"라는 과거의 우주론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장소로서의 세계"라는 관점으로 우주론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는 경제를 지구 생태계 안에 '뿌리 내려 있는 것embeddedness' 으로 보는 관 점이기도 하고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는 허먼 데일리의 문제의식과 완전히 일치하는 접근이고 생태경제학의 핵심원리이기도 하다.
사실 상식의 눈으로 보아도 인간에게 지구 생태계는 시장경제에 투 입되는 생산요소들의 집합소 정도가 절대 아니다. 인류가 살아갈 터전 이며 기반이다. 물질적 생산을 위한 원료 창고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 인류의 물질적,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존립을 위한 근본 전제 인 것이다. 허먼 데일리는 "지구 생태계가 100퍼센트 지분을 가지고 있는 자회사가 인간 경제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매우 직접적으로 표현 한다. 따라서 지구 생태계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생물학적, 물리학적, 화학적 과정에서 인간 경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생태 시스템 안에 있 는 인간의 경제활동 역시 지구 생태계와 주고받는 에너지물질의 흐름 으로 파악하고 해석해야만 한다. 생태경제학이 초기부터 지구 생태계와 인간 경제를 관통하는 열역학 법칙에 깊은 주의를 기울였던 이유도, 그 리고 경제 시스템을 스스로 무한 반복하는 기계역학 운동이 아니라 끊 임없이 외부와 상호작용하는 생물학적 물질대사로 비유하려 했던 이유 도 여기에 있다.
- 경제적 생산 규모가 에너지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먼저 통찰한 것은 사회과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이었다. 한 세기 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 던 두 명의 자연과학자들이 그 주인공이다. 이 두 명의 과학자들은 생태 경제학 창시자들인 로겐, 볼딩, 그리고 데일리 등보다 한참 앞서서 열역 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이 경제학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선구 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거대한 생산력을 과시했던 20세기 근대문명이 순전히 화석연료 덕분에 가능했음을 간파했을 뿐 아니라, 화석연료에 의존한 문명은 매우 짧은 순간에만 유지될 수 있을 뿐 다시 태양에너지 에 기대는 문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예언하기도 했다.
- 독일의 화학자 빌헬름 오스트발트Friedrich Wilhelm Ostwald가 첫 번째 인물이다. 그는 1912년에 출간한 저서 《에너지 명령》에서 "화석연료는 필연적으로 고갈될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경제는 전적으로 태양복사 Solar radiation 에너지 공급에 근거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인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 오스트발트는 "분명하고도 반박할 수 없는 지적을 했다. 화석연료라는 뜻밖의 유산이 지속적인 경제의 원칙들을 당분간 놓쳐 버리고 되는대로 살아가게 유혹한다고 말이다. 또 화석연 료가 필연적으로 고갈될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경제는 전적으로 태양 복사의 규칙적인 에너지 공급에 근거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인식을 부득 이 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오스트발트가 “화석에너지를 탕진하지 말 고 가장 유용한 곳에 사용하라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경 고에 따르면 자연법칙은 우리에게 어떤 선택도 허용하지 않으므로 자연 법칙의 무시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었다. 정말 미래를 한 세 기나 앞서 내다 본 얼마나 중요한 통찰인가? 오스트발트는 당시 세계적 으로 인정받는 과학자였음에도 세상은 그의 상식적인 경고를 못들은 했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역시 그의 경고를 되새기는 사람들은 헤르만 셰어 같은 소수를 제외하면 여전히 거의 없는 것 같다.
- 1921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던 영국의 프레더릭 소디 Frederick Soddy는 에너지의 한계를 인식 한 후 인생 후반기에 아예 스스로 경제학을 파고들어서 현대 경제, 특히 금융의 제도적 제약을 분석하는 데까지 도달한다. 특히 1926년에 출판 한 책 《부와 가상 부, 그리고 부채Wealth, Virtual Wealth and Debt》는 엄청난 논 쟁거리를 안고 있는 문제작이다.
소디에 따르면 생명은 에너지의 지속적인 흐름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다. 이렇게 필수적인 에너지를 나중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저장해두는 데 는 많은 물질적 제약들이 따른다. 그런데 화석연료라는 특별한 에너지 원은 이 제약을 단번에 벗고 화려한 20세기 문명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소디는 이렇게 경고한다. "자연이 석탄 속에 에너지를 저장해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지질학적 영겁의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꺼내 쓸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석탄이라는 자본스톡을 써버 리는 '화려한 기간'은 '매우 순식간'이라고 소디는 생각했다. 화려한 시대가 지나면 에너지 소득을 먹고 삶으로써 부과되는 제약이 점점 더 명 확해지고 분명하게 느껴질 것이다." 순식간에 끝나는 '화려한 시간' 뒤에 인류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소디의 대답은 햇빛이다. 그런데 햇 빛에너지에 의존해서 살기 위해 고생대나 지금이나 인간이 따라야만 하 는 규칙은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이다.
소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고의 도약을 시도하면서 현대 금융으 로 시야를 확장한다. 물리적인 경제가 열역학적 법칙의 한계 안에서 작 동하는 동안, 그 한계를 일시적으로 벗어버릴 수 있는 현대 금융경제의 오묘한 특징을 소디가 통찰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리적 자산과, 자산을 대출해서 만들어지는 '장부상의 채권'을 비교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 한다. 쉽게 돼지 농장 예를 들어보자. 실물자산인 돼지는 무한히 축적할 수 없다. 돼지 농장 규모의 공간적 한계는 물론이고 농장 규모를 키우다 보면 많은 돼지들 가운데 일부가 병들거나 죽거나 현실의 여러 물리적, 생물학적 제약이 폭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다른 사람에게 돼지를 빌려줘서 채권자가 되면 어떤가? 만약 돼지 2마리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면 나중에 돼지 2마리를 돌려 받을 채권을 갖는 셈이고 거기에 더해 이자까지 요구할 권리도 갖는다. 소디는 이를 '마이너스 돼지 2마리 채권'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실물 돼 지라는 자산과 달리 장부상의 숫자에 불과한 '마이너스 돼지'는 무한히 많아져도 상관없다. 농장을 늘려야 할 필요도 사료를 더 준비할 필요도 없고 병들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이게 바로 현대 금융의 다양한 신용 팽창 방식이다. 그 숫자가 아무리 커도 컴퓨터에서 숫자만 바꾸면 자산은 아무런 제약 없이 무한히 늘어날 수 있다.
원래 그냥 두면 썩어 없어져 무한히 축적할 수 없는 실물자산을, 이런 식으로 남에게 빌려줘서 채권으로 만들어 버리면 영원히 썩지도 않고 아무런 추가 비용도 없으며 영원한 복리 이자까지 얹어진 선물로 돌변 한다는 사실을 소디는 주목한 것이다. 소디는 이를 "썩을 수 있는 몸체 를 버리고 썩지 않는 외피를 입는다"고 표현했다. 그 결과 무질서, 황폐 함, 녹, 부패의 법칙인 열역학 제2법칙을 피해갈 기적을 만들었고 그게 현대 자본주의 경제, 특히 금융자본주의라고 통찰했던 것이다.
"부채는 복리의 속도로 성장하고 순수한 수량으로서 그 성장을 느리게 만들 아무런 제한도 없다. 실물자산은 한동안 복리의 속도로 성장할 수 있지만, 물질적 차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성장은 이내 한계에 부딪 힌다. 부채는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만 자산은 그럴 수 없다. 실물자산의 물질적 차원이 엔트로피라는 파괴적 힘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 축적한 거대한 자산을 이용해 또다시 자산을 무한정 확대하려고 애쓰 는 부자들의 모습에 대해 그는 "빵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씨앗에서 씨 앗으로 이어지는 밀알 같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존 러스킨을 인 용한다. "자본 말고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자본은 뿌리를 생산하 는 뿌리일 뿐이다. 결코 꽃을 피우지 못하고 알뿌리에서 알뿌리로 이어 지는 튤립이요, 빵으로 만들지 못하고 씨앗에서 씨앗으로 이어지는 밀 알이다." 그러면서 한마디 지적한다. 정치경제학은 지금까지 뿌리를 양 산하는 데 전념했고 튤립이란 건 본 적도 품은 적도 없다고.
다소 길게 인용했는데, 소디의 이 흥미로운 주장이 현대 생태경제학자 들이 직면한 중요한 고민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즉, 유한한 지구 위에 서 무한성장을 그만두게 하고 싶어도, 금융자본이 '복리로 늘어나는 이 자' 시스템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면 그게 가능할까? 투자에 대한 복리 수 익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금융자본의 압박을 받는 산업자본 역시 팽창을 멈출 수 있을까? 제약 없이 무한팽창하려는 금융의 욕구와, 물리적 제약 에 의해 한계 지워진 실물경제의 불일치는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 오랫동안 원자재와 환경에 대해 조사해온 프랑스 기자 기욤 피트롱Guillaume Pitron은 “오늘날 우리는 녹색기술과 정보기술을 결합하여 멋진 신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쉽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재생에너지나 배터리 생산에 필요한 희귀금속 채취를 위해 얼마나 지구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지 경고한다. 그는 "녹색기술에는 엄청난 양의 희귀금속 자원이 필요하다. 컴퓨터 기술로 유도되는 초고성능 통신 망 또한 희귀금속을 대거 사용한다"면서, "우리가 지금 추구하는 에너지 전환을 실행하려면 희귀금속 채굴량을 15년마다 2배씩을 늘려야 한다"
- 세상에 햇빛조차도 공짜로 얻을 수는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물론 기술혁신으로 자원효율성을 높여 기존보다 더 적은 자원과 에너 지로 동일한 산출을 만들어낼 수는 있고 이에 대해 기술과 자본이 에너 지와 자본을 부분적으로 대체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허먼 데일리도 이를 "자연자본을 제한적으로marginally 대체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최대한이다.더욱이 대규모의 강력한 기술은 대체로 생산 과정에서 더 많은 자원 (물질)을 필요로 한다. 실제 역사적 경험을 보더라도 자원과 에너지 효율이 계속 향상된 것은 맞지만, 그 이상으로 총사용량이 늘어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바로 제본스의 역설이다. 물론 기술혁신으로 자원과 에너 지의 사용을 줄이는 '자원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은 지구 환경에도 좋 고 열역학 법칙에 위배될 것도 없다. 하지만 자원생산성을 높이자는 것 이 곧 기술혁신으로 자연자원의 고갈을 막을 수 있다든지, 아니면 자본 (설비)으로 자연자원을 대체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해두자.
- 일찍이 탈성장의 사상적 원천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는 경제의 궁극적 목 적에 관해 허먼 데일리와 맥락을 같이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남겼다.
"경제적인 가치들을 중심에 두는 (또는 유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일을 중지하 고, 경제가 최종 목적이 아니라 인간 생활의 단순한 수단으로서 합당한 위치로 돌아간 사회, 따라서 끝없이 증가하는 소비의 이 미친 경쟁을 사 람들이 털어버리는 사회를 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지구 환경의 결정적인 파괴를 피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특히 현대인의 정신적, 도덕적 재앙에서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 그러면 지구 생태계의 하위 시스템으로서 경제 시스템이 점점 더 규 모가 커져서 지구 생태계의 수용능력에 근접하는 '꽉 찬 세상'에 직면했 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허먼 데일리는 지구 생태계가 스 스로 재생시킬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경제 규모를 유지하도록 거시경제 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인간에게 충분한 삶의 질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낮은 엔트로피 사용가용 에너지 사용인용자)을 최소화 하는" 수준으로 경제 규모를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혁신을 할 때 에도 꼭 필요한 인간의 삶의 질을 만족시키기 위해 낮은 엔트로피 사용 량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허먼 데일리는 경제의 궁극 적인 목적이 "(사치스런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을 위해 충분한 정도만큼만 부 를 유지하면서 오랫동안 삶을 유지하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충분성sufficiency' 원칙을 제시한다.
- 이제 본격적으로 경제성장 얘기로 들어가자. 경제성장이란 1년 동안 한 국가 안에서 생산된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화폐로 계산한 총액의 증 가를 말한다. 그리고 연간 실질 경제성장률은 물가상승을 감안해서 경 제가 얼마나 높은 비율로 성장했는지를 본다. 경제학자나 정책 전문가 를 막론하고 경제가 잘 돌아가는지 알아보는 단 하나의 지표를 꼽으라 면 누구나 '연간 실질 경제성장률'을 꼽는다. 경제가 어려움에 빠질 조 짐을 보이면 그들은 늘 성장률 전망부터 쳐다본다. 성장률은 마이너스 가 아니라 당연히 플러스이어야 하며, 플러스 수치가 얼마나 클 것인지 가 최고의 관심사가 된다. 이런 분위기로 짐작해보면, 성장률은 마치 자 본주의가 태어날 때부터 개발되어 항상 경제가 바람직한지를 확인해주 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기능하지 않았을까 착각하게 된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은 전혀 다르다. '경제성장률'이라는 용어 자체가 비교적 매우 최근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 역사에서 전년도 대비 성장률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이는 지 난 2,000년 동안의 세계 성장률 추이 곡선만 보더라도 확연히 알 수 있 다(그림 16 참조). 18세기까지만 해도 경제 규모는 오르락내리락 했으며 인 구가 조금씩 늘어난 탓에 매년 평균 고작 0.05퍼센트 정도만 성장했을 뿐이다. 사실상 성장하지 않는 경제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 다. 국민총생산GNP 혹은 국내총생산GDP을 연간 단위로 산출하는 방식이 개발된 것조차 사실은 1929년 대공황과 2차 대전 시점이라는 것은 이 미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어떤 의미에서 GDP는 전시의 군사물자 조달 을 위한 계산의 필요가 낳은 산물이었다. 그렇다고 GDP가 발명된 뒤 곧 바로 '연간 성장률 지표가 사용된 것도 아니다. 도마E. Domar나 해러드R. Harrod 같은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2차 대전 이후 경제에 대해 가장 크게 고민했던 것은 완전고용이었고 경제성장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고려했다는 것이다. 실제 '연간 경제성장률'이 처음으로 공공 영역에 등장한 것은 미국이 1949년이고 영국이 1950년이다. 그리고 1957년이 돼서야 유엔이 유럽 지역의 실질 경제성장률을 처음으로 비 교 발표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경제성장률이라는 지표는 대단히 짧은 시간 안에 그 자체가 수단이 아니라 최고 정책 목표로서, 각 정부가 고려해야 할 1차 과제로서 자리 잡기 시작했고 국제비교를 통해 경쟁을 촉진하는 지표가 되었다. 또한 당시는 비록 선진국들에 국한되었지만 고도의 경제성장이 불평등 감소와 동반했던 매우 예외적인 '대압착 시기Great Compression' 였 다. 이런 분위기 탓에 경제성장은 심지어 빈곤과 불평등, 복지 부족 등 모든 경제적 질병의 치료제로 격상되었다. 특히 냉전이 한창이던 이 시기에 경제성장률 지표는 미국과 소련의 체제경쟁으로 인해 중요성이 증폭된다. 자본주의 미국이나 사회주의 소련 모두 한결같이 누가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는지에 따라 자신들 체제의 우월성이 입증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 나아가 성장률은 각 국가의 위신을 세워주는 지표가 되었고 자본 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경제 규모 순위는 곧 국력과 동격이 되었다. 이 렇게 해서 "1960년대 말쯤이면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가장 중요한 정 부 정책 목표로서 경제성장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이 추세는 2020년대인 지금까지 크게 손상 받지 않고 견고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데 알고 보면 기껏해야 70년 정도의 역사에 불과하다. 짧은 역사에도 불 구하고 한번 굳어진 '경제성장 패러다임'과 '경제성장 헤게모니'는 경제 정책 일반은 물론이고 공공정책 전체에 걸쳐 전방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점에서 보면 적어도 20세기 후반 이후의 사회는 복지국가가 아 니라 '성장국가growth state' 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오죽하면 1973년 슈마허가 "병적인 성장, 건전하지 못한 성장, 파괴적인 성장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경제학자에게 표현조차 허용될 수 없을 정도로 그릇된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말했을까? 
- 18세기말 산업혁명으로 석탄의 대량 활용 시대가 열렸고, 이어서 1850년대에 러시아와 캐나다 그리 고 미국에서 거의 동시에 석유가 채굴되어 사용되기 시작한다. 내연기 관 자동차가 발명되고 전기 사용이 급격히 확대되었던 2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자 석탄보다 더 밀도 높고 효율적인 석유문명이 열렸다. 20세기 중반이 되면 중동을 포함한 전 세계 곳곳에서 석유가 대량 채굴되고, 이 어 천연가스까지 활용되면서 20세기를 석탄-석유가스라는 화석연료 의 세기로 만들었고 일부에서는 이를 '화석자본주의Fossil Capitalism'라고도 불렀다. 경제사학자 슈멜쩌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화석연료를 끊임없이 늘려서 생산 과정에 투입한 결과, 우리의 생활방식과 전쟁 방식, 식품생산 방식, 민족국가 구성 방식, 지정학, 젠더 역할 분담, 유행하는 '탄소문화'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을 전환시켰다.
이 사실을 이미 100여 년 전에 노벨 화학상 수상자 프레더릭 소디는 아주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기관사와 신호수, 관리자, 자본가, 주주, 노 동자들의 모든 노력을 더해도 "기차에 동력을 공급할 수 없다는 사실에 는 변함이 없다. 진짜 기관사는 태양에너지가 만들어낸) 석탄"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마치 유산을 물려받아 펑펑 써대는 행복한 상속자인" 넘칠 만큼 많고 값싼 석탄, 석유, 가스라는 화석에너지를 이용하게 되 자, 그토록 현대 경제에서 중요한 화석에너지가 마치 물과 공기처럼 당 연히 주어진 것으로 취급된다. 필요하면 무한정 값싸게 공급받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생태학자 찰스 홀Charles Hall은, "경제 학의 사회 모델에서 에너지가 생략되고 유한한 자원에 대한 언급 역시 생략되고 말았다"고 탄식했는데 그 배경이 여기에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 역시 화석에너지의 결정적인 역할을 빼먹은 산업혁명 의 역사를 지식으로 배우고 있는 중이다.
- 요약해보자. 인류가 약 200여 년 동안(특히 최근 70년 동안) 화석에너지를 대량으로 경제에 투입한 결과, 해마다 증가하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 뤄낼 수 있었다. 온갖 과학지식과 기술적 발명, 정치와 사회제도의 혁신 에도 불구하고, 만약 인류가 지금까지 안개와 같이 흩어져 지구에 도달 하는 실시간 태양에너지에만 줄곧 의존해왔다면 오늘날의 경제성장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인류가 거둔 놀라운 경제성장이 전적으로 화석에너지 덕택임 에도 불구하고, 너무 값싸고 많은 화석연료가 거의 무한정 공급되어온 탓인지 오직 '희소성'에 주목해온 경제학자들은 막대한 화석에너지의 역할을 무시했다. 그리고 자본과 노동, 기술만으로 생산함수를 고려하면서 무한 경제성장을 아무 의심 없이 낙관해왔다. 심지어 미래의 경제는 점점 더 탈물질화dematerialization할 것이므로 화석에너지나 자연자원의 한계가 미래 성장에 큰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기도 한다. 이 에 대해 제러미 리프킨은 "경제학자들은 비할 데 없는 물질적 부를 창출 한 효율성과 생산성의 가파른 상승이, 옛날 지질시대의 소산인 화석연 료의 발굴과 변환이 없었다면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바츨라프 스밀도 이렇게 확인해준다. “경제학자들은 물리적인 생산 과정을 위해 요구되는 에너지의 중요성에 대한 시스템적 인식을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은 경제에서 에너지 비용 비중이 무시할 만큼 작기때문에 에너지는 아무래도 좋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경제적 산출이 오직 노동과 자본만으로 생산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또는 에너지도(자연에서만 추출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노동과 자본에 의해 생산될 수 있는 인공자본의 한 형태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값싸다고 생각하고 대량으로 사용하여 현대문명의 이익을 누린 대가는 컸다. 인류의 생존 기반인 안정된 온도와 자연의 순환을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 어 쩌면 해법은 정해져 있다.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몰라도 화석자 본주의에서는 확실히 탈출해야 한다. 거대한 가속의 시기를 전격 반전 시켜 '거대한 감속'을 시작해야 한다.
- 유럽의 젊은 철학자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은 "각 시대는 그 시대에 맞는, 그 시대를 잘 대표하는 고유한 숫자와 지표가 있다(Every era needs its own figures)"고 말했다. 매우 적절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인류가 약 1만여 년 전 농사를 짓기 시작한 후 산업화가 시작되던 200 여 년 전까지만 해도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는 농사지을 땅 면적과 곡물 수확량이었지 GDP 같은 화폐량이 아니었다. 비교적 최근에 발명 된 GDP 지표는 2차 대전 시기에 다른 모든 요소들을 생략하고 전쟁 물 자를 대량 공급할 목적이 컸던 것이지 시민들의 삶의 질과 행복을 측정 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GDP는 태생부터 전쟁 시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GDP가 1950~60년대 아주 잠깐 동안 고도성장과 낮은 불평등을 동시에 만족시키면서 마치 모든 것의 해법인 양 착시를 일으켰고 그 여진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성장 국가의 시대'는 현실에서 점점 더 빛을 잃어가고 있다. 2008년 OECD조차 다음과 같이 보고서에 기록할 정도였다. "경제성장은 진보의 동의어였다. 성장하는 GDP는 틀림없이 삶이 더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제는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세 상이 인정하기 시작했다. 많은 나라들에서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50년 전보다 삶이 더 나아지고 행복해지고 있다고 만족스럽게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 우선 정상상태 경제의 정의부터 확인하자. 1976년 《정상상태 경제학》에서는 이렇게 요약한다.
정상상태 경제란 "낮은 비율의 처리량throughput으로도 꽤 바람직하고도 충분한 정도로 인구와 인공물artefacts을 일정 수준의 저량stocks으로 유지하는 경제다. 다시 말해서 생산의 첫 단계(환경에서 낮은 엔트로피 물질의 추출)에서부터 마지막 단계(높은 엔트로피 폐기물을 외부 환경으로 배출)에 이르기까지, 최저 수준의 적당한 물질과 에너지 흐름low만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상태 경제는 물리적physical 개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어떤 것이 비물리적이라면, 그때는 아마도 영원히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 한편, 생태경제학 교과서로 쓴 책 <생태경제학》의 2011년 두 번째 판에서 허먼 데일리는 조금 더 명료하게 서술한다.
"정상상태 경제의 주요 아이디어는 오랫동안 좋은 삶을 누리기에 충분한 정도로 부와 인구의 규모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이 규모를 유지하 는데 필요한 물질적 처리량은 높기보다는 낮아야 하고, 항상 생태 시스템 의 재생과 흡수용량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이 시스템은 따라서 지속 가 능하고 오랜 기간 이어질 수 있다. 정상상태에서 진보의 경로는 더 커지는 것to get bigger이 아니라 더 좋아지는 것to get better이다. 이 개념은 고전경제 학에 들어있었지만 신고전파 경제학에 와서 대체로 폐기되었다."
한마디로 '정상상태 경제'는 자연에서 얻는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자연으로 버리는 폐기물을 자연이 재생하고 흡수할 수준으로 최소화하는 경제다. 이를 위해 인구와 부를 더 늘리지 않고 자연이 감당 가능한 일 정한 수준으로 유지하자는 것이다. 즉, 정상상태 경제는 물리적 측면에서 더는 성장하지 않는 경제다. 그래서 정상상태 경제'인 것이다. 물론 어떤 영역은 투자가 줄어들고 다른 영역은 신규 투자가 늘어나 는 등 개별적 산업 영역들에서는 성장과 축소가 계속 다이내믹하게 일어날 수 있다. 또한 물리적 처리량은 최소한으로 유지하지만 비물리적 처리량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도 허먼 데일리가 강조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정상상태 경제에서는 이제 경제의 물질적 '파이'가 더는 늘지 않 으므로 성장 대신 분배가 특별히 중요해진다.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준 까지 '최소소득과 최고소득'을 제한하는 제도를 만들자고 정상상태 경 제학이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50여 년 동안 성장의존주의와 이론적으로 싸우면서 생태경제학을 발전시킨 허먼 데일리는 이 싸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지금 경제성장이 결코 무한히 계속될 수 없다고 하는 '물리적 불가능성'과, 성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지 멈출 수는 없다는 '정치적 불가능성' 사이의 갈 등을 목격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느 것이 이길 거 같은가? 허먼 데일리는 확신한 것 같다. 결국은 '물리적 불가능성이 이길 거라고. 왜냐고? 자연은 우리와 타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어쨌든 정상상태 경제'의 정의를 보면, 성장을 멈춰서 더 이상 커지면 안 되는 '최적 수준의 경제 규모' 유지라는 개념이 가장 중요하게 떠오 른다. 사실 허먼 데일리는 반복해서, 왜 기존 경제학의 거의 모든 곳에 는 최적 개념이라는 것이 있는데, 유일하게 성장에만 최적 지점이 없이 무한히 성장하면 할수록 좋은 것으로 간주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정상상태는 '최적 규모optimal scale'라는 경제 목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한 그의 은유가 바로 배가 선적할 수 있는 최대 화물의 양을 제한하는 '플림솔 라인plimsoll line' 또는 화물 적재 한계선load line, 배가 잠 기는 한계선water line이라는 개념이다. 19세기 중엽 새뮤얼 플림솔Samuel Plimsoll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인데, 그는 화물이 과도하게 적재되어 거친 바다에서 배가 전복되지 않도록 선박 허리에 가시적인 선을 그어놓았다(그림 31 참조). 
- 도넛 경제란 무엇일까?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이 그가 단 하나 의 도식으로 완성한 도넛 이미지가 도넛 경제에 대해서 사실상 거의 모 든 것을 말해준다. 도넛 이미지에 대한 가장 단순한 설명은 이렇다. “안 쪽 고리는 사회적 기초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 안으로 떨어지면 기아와 문맹 같은 심각한 인간성 박탈 사태가 벌어진다. 그리고 바깥쪽 고리는 생태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 밖으로 뛰쳐나가면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손실 등 치명적인 환경위기가 닥친다. 두 고리 사이에 도넛 이 있으니, 이 공간이야말로 지구가 베푸는 한계 안에서 만인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영역이다."
한마디로 도넛 경제는 시민들로 하여금 아래로는 '복지를 위한 사회적 기초 social foundation' 밑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고, 위로는 '생태적 한계ecological ceiling'를 넘지 않게 하여, 그 사이에서 '사람들의 삶을 위한 안전 하고 정의로운 영역'을 구축하자는 것이다(그림 33 참조). 그 결과 "최저 선에서 인간성을 박탈당하지 않는 삶을 살고, 한계선에서는 지구의 생 태를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인간 사회의 복리를 누리는 것"이라는, 복지 와 생태를 아우르는 간명하고 강력한 제안이다. 도넛 안쪽의 12가지 사 회적 기초는 "2015년 UN이 '지속가능발전목표'에 구체적으로 적시한 우선적인 과제에서 도출한 것이다. 또한 도넛 바깥쪽의 “생태적 한계는 요한 록스트룀과 윌 스테픈 등 지구 시스템 과학자 집단이 제안한 9가지 경계선을 차용한 것이다.
- 기후위기의 티핑포인트를 지날 2020년대가 점점 흘러가고 있고 기후 상황은 매년 달라지고 있다. 과연 2024년 국회의원 선거, 늦어도 202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기후가 아니 라 경제를 바꾸는 정치적 기획들이 실천될 수 있을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던 경제학자 부부 배너지와 뒤플로는 자신들의 책에서 케인스를 떠오르게 하는 이런 글을 남겼다.
"사상ideas은 강력하다. 사상은 변화를 추동한다. 좋은 경제학만으로 우 리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좋은 경제학이 없다면 우리는 어제의 치명적 인 실수를 반드시 반복하게 될 것이다. 무지, 직관, 이데올로기, 관성이 결합해서 그럴듯해 보이고 많은 것을 약속해주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배신하게 될 답을 내놓게 될 것이다.'
- 경제 '파이'를 더 이상 키우지 않고 정의롭게 분배하는 주제로 옮겨가 보자. 생태경제학의 최대 난제는 분배 문제다. 왜 자연과 경제를 고민하 는 생태경제학에게 사람들 사이의 생산물 분배가 최대 난제가 될 수 있 을까? 간단하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기존의 경제학 대부분은 분배 문제를 '회피하는 일종의 도피처가 있었다. 경제성장이라는 도피처 말 이다. 라투는 "경제성장의 존재 때문에 서구 국가는 분배와 정의의 기 본적인 문제에 맞서지 않고 지금까지 혁명 없이 버텨왔다"고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생태경제학은 시작부터 스스로 그 도피처를 꽉 막아놓고 분배를 얘기하자고 한다. 물리적 파이를 더는 키우지 말자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물질적으로 무한팽창하지 못하는 파이를 어떻게 공정하게 분배해서 사회구성원 모두를 만족시킬 것인지로 관심이 이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과감한 생태경제학자는 가장 과감한 분배주의자이어야 할지 모른다. 문제를 반대로 접근해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불평등한 사회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지구 생태의 수용능력 안으로 경제 규모를 제한하자고 하면, 더는 재산과 수익을 늘리기 힘들 어진 부유층은 적극적으로 반대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질적 필요조 차 제대로 충족되지 않은 서민들 역시 찬성할 리가 없다. 생태정의가 사 회정의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지금까지 기후운동이나 생태운동은 이전처럼 과소비하면 안 된 다고 경고만 했지, 한정된 자원으로 어떻게 파격적으로 분배를 개선하여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살수 있는지는 말을 아꼈다. 유복하게 살던 이들은 조금 더 검소하게 살고, 어렵게 겨우 생계를 이어가던 이들도 환경 을 생각해서 참으며 살라는 말로 오해하기 쉽다. 이제 분배 이슈에도 적극 적으로 개입하여 사회정의와 환경정의를 통합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 일찍이 경제학자 케인스 등은 기본적인 물질적 필요는 무한히 팽창하지 않지만, 이와 달리 지위재 등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기 때문에 물질 적 생산을 기본적 필요에 맞출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미 한국을 포 함하여 많은 선진국들은 무한 경제성장으로 익숙해진 관성과 삶의 태도, 즉 무한한 물질적 소비의 팽창을 삶의 질 개선과 동일시하는 관성에 깊 숙이 젖어 있는 상황이다. 울리히 브란트Ulrich Brand와 마르쿠스 비센Markus Wissen 이 통찰력 있게 지적한 '제국적 생활양식' 말이다.
이제 '제국적 생활양식'을 버리고 기후위기를 추가로 악화시키지 않 을 정도의 물질적 삶을 유지하는 '1.5°C 라이프스타일'로 전환하자는 케이트 레이워스 등의 제안이 이 대목에서 절실하다. 레이워스는 a든 시민이 '1.5°C 라이프스타일'로 전환하는 과정은 개인적 실천으로는 절대 달성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정부가 부유층의 사치성 소비나 탄소집약적 소비, 또는 과시적 소비를 사회적으로 배제하는 공공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서민들에게는 부족한 필수 소비를 충족할 수 있도록 보편적 기본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 결과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면 멈추는 '사적 충 분성'을 구현하고, 동시에 '공적 풍요로움' 원칙 아래 개인적인 필요를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는 사회계층과 개인에 대해서 공공의 보편서비스 를 확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캐딜락을 한 대 생산할 때마다 쟁기나 삽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낮은 엔트로피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다. 즉, 우리가 캐딜락을 한대 생산할 때마다 미래 인류의 삶을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산업적 풍요를 추구하는 경제발전은 지금 여기의 우리와, 그 풍 요를 누리게 될 가까운 장래의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될지 모른다. 하지 만 그건 전체적으로 볼 때 인류의 이익에 분명히 반하는 것이다. 만약 인류의 이익이 원래의 낮은 엔트로피를 가지고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고자 하는 것이라면 말이다(조르제스쿠-로겐, 생태경제학의 창시자)
- 로겐이 말하고 싶은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현재의 필요를 위해 당장 자원을 써버린다면, 미래의 아주 중대한 필요를 충족하는 것을 불가능 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세대의 기본적 필요가 미래세대의 필요보다는 우선할 수 있지만, 현세대의 낭비적 사치보다는 미 래세대의 기본적 필요가 우선한다. 또한 설령 미래세대에게 더 많은 인공의 물질자본과 지적 자본을 물려준다 한들, 그것이 자연자원의 퇴화 와 가용 에너지의 소실을 온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결국 세대간 정의를 자동으로 조정해주던 세대간 보이지 않은 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거 나 아예 근원적으로 열역학 법칙에 위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남은 해법은 사회적 숙의를 통한 '보이는 손'이 아닐까? 기후위기에 대한 대처 역시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는 손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 예를 들어 최첨단 혁신 분야로 자처한 플랫폼 기업이 만들어내는 일자리 역시 극히 소수의 괜찮은 일자리와 압도적으로 많은 불안정한 플랫폼 노동을 양산하는 현실을 보라. 녹색 일자리에서도 아마 이런 현상 은 그대로 재연될 수 있다. 탈탄소 산업이 자동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로버트 폴린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청정에너지 투자를 통해 만들어지는 일자리가 노동자들에게 괜찮은 보 수를 제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 일자리들이 작업장 환경 개선이나 노조의 대표성 강화, 여성과 소수 인종을 비롯한 소수 집단에 대한 고용 차별 감소를 이뤄 내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다만 신규 투자가 일어날 것 이라는 사실 덕분에 사회 전반에 걸쳐 - 고용의 질 개선과 노조 가입률 확대, 소수 집단 일자리 증가 등을 위한 정치 결집을 이끌어내기가 쉬 워질 것이다.”
폴린이 말하고자 하는 초점은 녹색 일자리가 새로 창출되는 것을 계기로 이 분야에서 고용 조건을 바꾸기 위한 정치적 노력이 따라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탈탄소 산업 전환에 따른 녹색 일자리 창출을 계기로 기존의 고용구조를 노동친화적으로 개편하려는 적극적인 노력과 기 획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임시 계절 하도급으로 태양광 설치기사를 늘리는 방식은 과거의 고용 패턴과 관행이 녹색산업에도 그 대로 이식되도록 방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직무 내용뿐 아 니라 일자리의 안정성도 녹색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시작부터 필요하지 않을까?
- 일자리에도 역사가 있다면 지난 20여 년은 글로벌 신생 분야 일자리 로서 디지털 일자리의 부상을 기록할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일자리의 역사는 노동자들에게 희망보다는 절망을 안겨 주었다. 디지털 산업 전 환은 양질의 많은 일자리를 주기보다는 일자리를 없애거나 아니면 플랫 폼 노동이라는 극히 불안정한 일자리를 주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앞으 로 20년 일자리 역사는 거의 틀림없이 녹색산업 전환에 따른 녹색 일자 리가 만들어나갈 것이다. 디지털 일자리의 불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생태경제학의 지혜가 절실하다.
- 경제가 지구 생태계와 연계되어 있을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장실 패는 또 있다. 원래 시장의 플레이어들은 시장에서 정해지는 가격을 수 용하기만 해야 한다. 그래야 시장의 가격 신호가 가장 효율적으로 수요 자와 공급자의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산업에서 독과점 등으로 인해 소수 기업들이 시장의 가격 수용자가 아니라 스스로 가격을 결정할 힘을 갖게 되면 시장 메커니즘은 무력화될 수 있다. 시장의 수요 공급에 따른 가격이 아니라 독과점 기업이 원하는 독점가격이 시장에 강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점으로 인한 시장실패다.
문제는 화석연료 시장이 대체로 독과점이 심한 경우라서 시장실패가 일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경제가 지구 생태계와 연계될 때 시 장실패는 간혹 또는 예외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반복 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시장의 가격기제에 의존해서 생태 문제나 기후위기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매우 무모해질 수 있게 된 다. 그래서 생태경제학자 피터 빅터는 이렇게 확인한다. “어떤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데 영향을 줄 유용한 정책 수단으로서 가격을 얘기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올바른 가격'이 계산될 수 있고 그 가격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또한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완전히 차 원이 다른 얘기다. 특히 경제 규모(자연과의 관계)나 사회정의를 대상으로 할 때는 더 그렇다" 
- 마무리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매듭을 지어보자. 지구가 견딜 수 있는 생태의 한계를 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정책을 '가격 메커니즘'으로 결 정할 수 없다고 생태경제학자들이 판단했으니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하 는 '탄소가격제' 역시 도입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온실 가스 배출을 억제하기 위해서 오직 탄소 가격에만 의존하는 정책은 잘못 된 것이지만, 이것이 탄소 가격의 보완적 역할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 다. 우리가 당장 시장을 없애버리지 않는 한 시장에서도 탄소 배출을 줄 이는 메커니즘이 작동할 필요는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이 아니라 자 원에 과세해야 한다는 생태적 조세 기준으로도 탄소 가격은 필요하다. 문제는, 사회적 비용을 반영하여 탄소 가격을 올바로 설정하면 시장가 격 신호가 수요와 공급에 영향을 주어 녹색혁신과 탈탄소화를 이룰 수 있 다고 믿는 보수주의 주류경제학적 환상이다. 일단 탄소 가격을 통한 시장 의 신호는 매우 제한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제한된 역할조차도 '모든' 온실가스에 '충분한 가격을 부과했을 때 가 능한 얘기다. 알다시피 이미 세계적으로 약 80여 국가나 지방정부들이 탄소세나 탄소배출권 거래제도ETS 등의 방식으로 온실가스 배출에 가격을 매기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전체 탄소 배출의 고작 약 20퍼센트에 대해 서만 탄소가격이 매겨지고 80퍼센트는 가격이 제로다. 가격이 매겨진 20 퍼센트조차도 그나마 3/4은 탄소 배출 톤당 10달러 미만, 석유 1리터로 계산하면 약 40원 정도다. 통상적인 시장의 유가 변동 속에 파묻혀버릴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다. 평상시의 유가 변동이 리터당 40 원보다 훨씬 그 폭이 크기 때문이다. 현재 탄소가격제가 기후위기 완화에 거의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도 지구 온도 추가 상승을 2°C 이하로 억제하려면 탄소 배출 톤당 탄소세가 200 달러에 가까워야 하는데 현재 글로벌 탄소가격이 고작 2달러에 불과하다 면서 어떻게 100배를 더 높일 수 있을지 몰라 탄식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나? 사실을 말하자면 '지구가 견딜 만큼' 탄소 가격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견딜 만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정도 가격이면 기업이 견딜 만하니까 기업은 탄소 가격으로 인해 행동을 바꿀 만한 유인이 없는 것이다. 대부분 기업들이 견딜 만한 데 왜 행동을 바꾸겠나? 따라서 기업의 이윤 몫이 침해당하지 않을 만큼 탄소 가격이 정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생태계가 위험하지 않을 만큼' 설정해야 한다. 그 비용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서 기업이 불가피 하게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기술혁신에 투자를 단행하거나 아예 탄 소집약적 산업에서 녹색산업으로 전환을 서두르게 해야 한다.
- 그런데 이제까지 글로벌 차원에서 기후위기 대응에 가장 심하게 저 항해온 세력은 (대)기업들이다. 앞서 기후위기 대응 30년 대실패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다보스 권력'이라고 생태경제학자들이 이름붙인, 탄소 집약적 기업권력들, 특히 화석연료 산업과 군수산업이었다고 확인했었다. 기후위기 대응에 기업들이 어떻게 저항해왔는지에 대해서는 경제 학자가 아닌 기후과학자 마이클 만Michael Mann이 가장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그에 따르면, 과거에 담배기업들이 담배의 건강 유해성을 부인 했던 것처럼 기후에 대해서도 기업들은 보수 싱크탱크나 학계를 뒤에서 지원하면서 기후위기를 정면 부인하는 내러티브를 퍼뜨려왔다는 것이 다. 그러다가 최근 기후위기가 너무 명확해지자 방향을 바꿔 기후운동 가의 위선을 공격하기, 기후위기 대응을 지연시키기 등의 전략으로 초 점을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마이클 만은 이를 '신기후전쟁 New Climate War' 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특히 기후위기를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문제를 매우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1960년대부터 담배회사들, 총기회사들, 음료회사들이 주로 써먹던 수법이, 흡연이나 총기사고 등을 '개인적 활동'이나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캠페인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예를 들어 총기 판매 기 업들은 "총기가 무슨 죄냐, 총을 쏜 인간이 죄지"라고 하면서 개인의 책 임으로 돌렸는데 기후위기에도 비슷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개인적 실천은 안하면서 기후위기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위선자' 딱지 를 씌우기도 했는데, 심지어 전 미국 대통령 후보이자 기후운동가인 앨 고어Al Gore도 그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이클 만은 개인들이 각자 플라스틱 안 쓰고, 자동차나 비행기 안 타고, 고기 안 먹고 하는 식으로 개인적 희생personal sacrifice을 강요하는 기후운동에 매몰되면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담배 피는 걸 창피하 게 만들어서 세계적으로 흡연이 급격히 줄었던 것이 아니라 정부의 일 정한 규제가 작동해서 실제 흡연 인구가 감소했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물론 그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같은 개인적 실천과 기업의 행동을 바꾸게 만들 제도 변화 둘 다 중요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결정 적으로 전자가 후자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시스템의 변화가 없는 개인적 실천은 거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 이처럼 생태경제학자들과 기후과학자들은 기후위기 대응 실패의 제1 순위를 (기업)권력의 저항에서 찾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대기 업들이 앞장서서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예를 들 어 애플을 포함한 국내외 디지털 플랫폼 기업들이 너도나도 환경을 고 려한 ESG 경영에 나서겠다고 하고 재생에너지 100퍼센트 사용(RE100) 을 자발적으로 하겠다고 할 뿐 아니라, 협력사들에게도 RE100을 요구 하면서 마치 기후위기 대응을 선도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런데 ESG 경영과 RE100은 과연 기후위기에 막대한 책임이 있는 거대기업 들이 진정으로 책임을 지는 유력한 방법일 수 있을까? ESG 경영이 유행 하다 보니 온갖 화려한 수식어와 복잡한 경영기법들로 요란한 출판물과 보고서들도 범람한다.
또한 과연 디지털 첨단기업들이 기후대응을 선도하는가? 심지어 시장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무한 수익 추구를 해야 하는 기업들이 수익을 억제하면서까지 사회적 가치나 환경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자발적으로? 이 대목에서 ESG 경영과 RE100에 대한 화려한 마케팅적 기법이나 수식어를 걷어내고 냉정하게 평가한 분석을 참고할 필 요가 있다. 우선은 캐나다와 영국 중앙은행 총재를 지냈고 '기후행동과 금융을 위한 유엔 특별대사까지 했던 마크 카니 Mark Carney가 자신의 책 《초가치》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ESG 경영에 대해 강조하고 있으 니 그의 주장을 확인해보자.
카니는 ESG가 기업 경영 원리보다는 금융의 투자 전략에 가깝다면서 기존의 사회책임투자CSR, 임팩트 투자mpact Investing, 공유가치 창출CSV 등 이 사실 모두 유사한 개념들이라고 확인한다. 그는 ESG가 환경과 사회 를 고려하자는 투자자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재무적 수익과 사회적 가치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장기적으로도 주주에게 더 많은 수익을 안겨줄 것이라는 인식을 전제한다고 주장한다. 
- 간단히 말해 ESG는 (1) 환경과 사회를 위한 비재무적 고려를 충분히 해달라는 선한 투자자들의 요구→ (2) 투자자의 요구를 대신해서 블랙 록Black Rock과 같은 자산운용사들이 투자기업들에게 ESG 경영을 요구 (3) 기업은 투자를 받기 위해 투자 펀드의 요구를 수용하여 ESG 경 영 실천이라는 메커니즘으로 관철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현재 운 영 중인 ESG 자산 총액은 100조 달러가 넘으며 이와 관련해 전 세계에 서 대형 자산 소유자의 1/3이 유엔 산하기구인 책임투자원칙Principles for Responsible Investment에 서명했다고 한다. 100조 달러 규모는 전 세계 한 해 GDP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다. 한편 정책연구자 아드리엔 불러 Adrienne Buller는 규모를 적게 잡아 2020년에 30조 달러, 2025년 50조 달러가 될 것으로 보았다. 그래도 엄청난 규모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얼핏 봐도 문제가 느껴진다. 연기금과 같은 일부 공공 펀드조차도 거의 재무적 이익만 따지는 판에, 과연 어떤 사적 투자자들이 ‘재 무적 이익'이 다소 줄어들더라도 '사회적 가치'를 균형 있게 추구하라고 끝까지 재촉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재무적 이익은 명확히 수치로 평가 가능하고 대체로 공시되지만, 비재무적 기여는 아직 제대로 평가되지도 엄격히 공시되지도 않는다. 나아가 단기나 중기적 시야에서 투자자의 재무적 이익과 사회적 가치가 직접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과연 재 무적 이익에서 양보를 한다는 보장을 어떻게 받을까? 결코 쉽지 않은 이 슈다. 심지어 마크 카니조차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높이는 수단으로만 생각해서 오로지 투자 자금을 끌어 모으거나 고객 관련 의무에 따르는 위험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ESG를 생각하는 투자 펀드가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을 정도니 말이다. 물론 ESG를 자발적으로 하겠다는 펀드나 기업에 대해 격려를 아낄 필요는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표 공공펀드인 국민연금은 관련법과 규정을 개정하고 선도적으로 ESG 투자에 나섬으로써 사적 펀드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하지만 자발적인 약 속에 앞서 일정하게 사회적으로 합의된 탄소 배출 규칙과 제도를 기업 이 지키는 것이 먼저다.
마크 카니와 달리 아드리엔 불러는 ESG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특히 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블랙록이나 뱅가드 같은 소수 자산운 용사들이 수십조 달러의 자본을 매개로 다수 기업들의 지분을 장악해 가고 있는 경향을 '자산운용사 자본주의 Asset Manager Capitalism'라고 규정한 다. 이들은 과거 행동주의 펀드Active Fund와 달리, 모건스탠리지수MCSI나 S&P500 같은 지수들에 편입된 지분 등을 대량으로 소유하여 전체 지수 흐름을 따라가는 패시브 펀드Passive Fund 성격을 띠고 있다. 언론에는 화 석연료 투자가 아니라 녹색투자를 하겠다고 공언하지만 실제 이들의 투자 풀 Pool에서 녹색투자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것이 아드리엔 불러의 지적이다. 이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가 세계 최대의 자산운용회사 블랙록에서 2018~2019년 사이에 지속가능투자 최고책임자를 맡기 도 했던 타리크 팬시 Tariq Fancy가 증언한 기업의 ESG 경영 실태다. 그 는 기업들의 ESG 노력이 실제로는 온실가스 감축에 거의 무시할 만한 효과밖에 거두지 못했다고 냉담하게 평가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오 직 정부만이 역량과 합법성을 갖고 기후위기에 집합적이고 체계적인 대 처를 할 수 있는데, ESG가 그런 정부의 노력이 마치 필요 없는 것처럼, 기업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었다는것이다. 그 에 따르면 "ESG를 둘러싼 유토피아적 스토리라인은 정부가 해야 할 역 할을 실질적으로 잠식하게 된다. ESG 기업들의 잘못된 PR광고는 지속 가능투자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그리고 자발적 이행 등이 해결책이라 고 사람들을 속이게 된다.” 그래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 이런 식으로 기후위기라는 역사상 가장 큰 시장실패에 대처하는 데 실패의 당사자인 시장이 다시 해결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 것 이 바로 ESG라는 것이 그의 종합적인 판단이다. 물론 그는 탄소 배출 감 축에 시장이 역할을 할 수는 있다고 긍정적으로 인식한다. 문제는 정부 가 규제와 과세, 인센티브를 적절히 배치해서 공적 여건을 조성해야 기 업 ESG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업과 국 가의 역할을 구분한다.
"기업이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하고 그럴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반칙으로 엉망이 된 게임이 끝난 후, 좋은 스포츠맨십이 뭔지를 끝없이 훈계해서 다시 좋은 게임을 기대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다. 반칙이 벌어지면 통상 선수들은 심판을 찾는다. 그런데 이 경우는 기업들과 시장이 심판 역 할까지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사기업들은 자기들 역할만 잘하 라고 하고 국가가 할 역할을 해야 한다."
그는 "시장실패를 ESG라는 마케팅으로 교정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진실을 확인해주고 있는데, 다른 많은 연구에서도 기업이 ESG를 하겠 다는 자발적인 조치는 환영하지만, 정부가 전반적인 방향, 목표, 지침, 인센티브, 규범을 제공하고 철저한 모니터링을 가동할 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주관적인 '그린위싱green wishing'만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 100퍼센트 지급준비금제도는 사실상 사적 은행들이 신규로 신용창출 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효과가 있다. 일반인들은 흔히 중앙은행이 지폐나 동전을 찍어내야 화폐가 발행되고 따라서 화폐는 국가만이 발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대단한 오해다. 현대 경제에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본원통화는 매우 적은 비중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상업은행들이 부 분지급준비금제도에 의존해서 재량으로 대출을 일으킨 신용창출이 차 지한다. 전체 예금의 10퍼센트만 지급준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현 행 제도 아래에서는 90퍼센트의 새로운 신용화폐가 아무런 노력도 없이 허공에서 창출되어 사적 은행이 대출의 형태로 시장에 공급하고 이에 대한 이자 수익을 얻는다. 하지만 100퍼센트 지급준비금제도로 바뀌면 이런 상황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과격한 주장이 말이 되냐고? 사실 100퍼센트 지급준비금제도 는 유명한 미국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나 어빙 피셔의 '완전 화폐' 이 론이기도 하므로 기존 주류경제학계에서도 사실은 낯설지 않다. 피셔는 이렇게 주장한다. “100퍼센트 지급준비 시스템은 급진주의와 정반대되 는 제안이다. 원칙적으로 이 제안은 과도하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대 출을 증가시키는 현행 시스템에서 예전 금세공업자의 보수적인 안전금 고 시스템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다. 즉, 금세공업자가 자신에게 보관된 예치금을 부적절하게 대출해주기 시작하기 전으로 말이다. 은행에 대한 고객의 신뢰를 오용하는 이러한 영업 행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표준적인 관행이 되었고 오늘날 예금은행업으로 발전하였다.
- 요약해보자. 경제 규모를 지구 생태계가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묶어두자면 "성장을 강화하는 되먹임 회로들을 약화시키면서, 균형을 낳는 되먹임 회로들을 강화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무한팽창 을 속성으로 갖는 금융은 더 많은 성장, 무한성장을 강화하는 되먹임 회 로를 촉진한다. 대출에 대한 복리 이자, 투자에 대한 더 높은 수익률을 요구하는 금융은 기업들에게 끊임없는 수익을 압박할 것이고 그 결과 전체 경제를 성장과 규모 팽창으로 몰아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태경 제학자들이 금융경제에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탈성장론자 요르고스 칼리스는 자신의 짧은 책 《한계들Limits》에서 이 영화를 소개한다. 그는 지구 생태계가 우리에게 강제로 '한계'를 지우는 것처럼 받아들이지만 사실 그런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불편하 게 생각해온 언어인 '한계'를 긍정의 언어로 재해석한다.
"한계는 목적을 전제로 한다. 중력 그 자체는 한계가 아니라 그냥 팩트 다. 하지만 우리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목적을 세우면, 자살할 생각이 아닌 이상 그때부터 중력은 뛰어내릴 수 있는 높이에 한계를 지운다. 바 닷물은 물고기에게는 생명을 주지만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지 운다. 한계는 주체와 주체의 의도에 있는 것이지, 우리 의도와 무관하게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한계를 지우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결정이지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한성장을 향해 질주하는 화석연료 문명에 대해 '추가 온도 상승 1.5°C'라는 한계를 지운 것도 우리의 삶과 미래세대의 더 나은 삶을 선택하려고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리스는 "자연은 우리에게 한계를 부과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해주는 엄격한 어머니가 아니"라고 덧붙인다. 지금까지 생태경제학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선택의 여지가 없이 무한성장을 포기하고 한정된 물질과 에너지의 처리량에 의존하는 경제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구 라는 닫힌계 안에서 움직이는 '열린 인간 경제'가 열역학 법칙을 위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리 법칙과는 협상할 수 없으니 '수용해야' 한 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생태경제학자들과 특히 탈성장론자들은 우리가 만들어 갈 새로운 생태경제, 성장 없는 경제와 어울리는 새로운 삶의 가치관 과 사회적 규범을 설계하는 데 도전하고 있다. 수동적으로 지구 한계 안 에서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 하는 삶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자발적으 로' 선택하는 다른 삶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지구의 한계선 planetary boundaries' 에 직면해서 어쩔 수 없이 경제구조를 재편하고 기존 방 식의 삶을 포기하기 이전에, 우리 스스로 안전한 삶을 위해 자발적으로 '사회적 한계선societal boundaries'을 정하고 새로운 상상력을 동원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나가자는 것이다.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대공황  (0) 2023.08.08
머니니스  (6) 2023.06.05
거대한 변화  (0) 2023.05.24
금리의 역습  (5) 2023.05.24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1) 2023.04.20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