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4년에는 상위 3%의 지층이 약 64%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1955년에는 상위 6%의 지주층이 소유한 토지가 18% 로 줄어들었다. 반대로 이 기간에 소작농의 비율은 49%에서 7% 로 감소했다. 15 이렇게 자작농이 늘어나면 사회가 안정되기 마 련이다. 왜냐하면 '지킬 것이 생긴' 사람들은 재산권을 위협하는 이에 대해 저항할 것이며, 더 나아가 사회적 지위를 향상하기 위 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1950년 4월, 주한 미국 대사 존 무John Muccio는 농민이 더는 사회적 불만 계층이 아니라 "사회 안정을 가장 바라는 계층"이라고 분석했다. 16 6.25 남침 이후 북한의 기대와 달리 남한 지역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벌어지지 않은 데에는 농지 개혁이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물론 한국의 농지 개혁이 긍정적인 면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농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정부의 권력 독점이 심화되었다. 24 이승만 대통령은 오랜 기간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의 외면을 받았기에 미국 정부 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미군정 출신의 관료를 집권하자마자 몰 아냈다. 이후는 잘 아는 바와 같이 사사오입 개헌에 이어 3.15 부 정 선거까지 저지르며 한국의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
그러나 농지 개혁으로 육성된 자영농의 자녀들은 이승만 정부의 독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4.19 혁명 당시 시위대의 주력은 중학생과 고등학생 등 이른바 광복 세대(혹은 해방둥이)였는데, 이들은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 길러진 세대였기에 이승만의 독 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나아가 많은 고등 교육 기관이 생기며 취 업난이 심각해진 것도 혁명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1948년부터 1958년까지 약 10년 동안 대학생 수가 3만 5,000명에서 14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지만, 이들에게 제공된 일자리는 한정적이었기에 사회 전체적으로 불만이 높아졌다.
물론 이들 광복 세대는 이후 등장하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으로 변신하게 되지만, 이로 인해 박정희 정부는 끊임없이 경제 성장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압박도 함께 느끼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적산 기업을 민간에게 매각하는 법(귀속 재산 처리법)이 1949 년 12월에 제정되었지만, 곧바로 한국 전쟁이 터져 본격적인 매 각은 한국 전쟁 이후로 미뤄졌다. 1954년부터 이승만 정부는 군 수 물자 공급을 늘리고 재정 적자를 보충하기 위해 적극적인 매 각에 나섰다. 1958년 5월까지 총 263,774건의 적산이 매각되어 90% 이상 처리가 완료되었다.27 귀속 사업체는 생산 시설이 좋 은 대규모 기업이 대부분이었고, 대한석탄공사와 대한조선공사 등 일부 기업만 매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직후에 적산 매각이 이뤄졌기에 매우 저렴 하게 매각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조선방직 부산 공장의 경우, 정부가 평가한 가격은 35억 원이었으나 실제 매각액은 22억 원에 불과하였다.  삼척 시멘트 공장의 경우 감정가가 7억 원임에 도 판매가는 4억 5,000만 원에 그쳤다. 귀속 사업체의 매각 가격 은 책정 가격에 비해 평균 62% 수준이었다. 더 나아가 15년 동 안 분할 납부하게 되어 있었고, 이마저도 은행의 특혜 대출을 받 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흥은행 등 당시 5대 시중 은행의 대출에서 15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1953년 1~5% 수준에서 1960년 10~30% 수준으로 높아졌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 특히 한국 전쟁 이후 물가가 수십 배 상승하는 동안 15년에 걸쳐 매각 대금을 갚았기에, 귀속 재산을 매수한 이들은 엄청난 차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적산 매각은 정경 유착과 부 패의 온상으로 여론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적산 매각이 한국 경제의 성장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왜냐하면 이때를 고비로 제조업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기 때 문이다. 제일 먼저 성장 궤도에 올라탄 것은 이른바 '3백 산업(밀 가루, 설탕, 방직)'으로 식료품은 연 15.7%, 방직은 10.9%의 연평균 성장률을 기록했다.

- 결국 5.16 쿠데타(1961년)는 민주주의 싹을 꺾은 비극임이 분 명하지만, 경제 발전의 측면에서는 큰 전기를 마련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쿠데타 세력(이후 '군사 정부')이 집권하자마자 제일 먼저 환율 인상을 단행한 것이 그 전환점이었다. 물론 군사 정부는 1963년 10월 민정이양(제5대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 2년간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2부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1962년의 증권 파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급격히 경제 구조를 바꿀 목적으 로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이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금융 시장이 불안정해지고 군사 정부도 부패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부 정적 인상을 심었다.
그러나 1962년 12월부터 수출이 갑자기 증가하기 시작하 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달의 수출은 839만 달러에 이르러 평 년 수준보다 거의 두 배 수준이었다.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1963년 1~4월 신용장(수출 주문) 내도액이 3,400만 달러로 전년 도동 기간의 2배나 되었다. 5월 초 상공부 장관은 기자 회견에서 "수출 실적이 기록적"이며, 이런 추세라면 금년도 목표치를 달성하는 것은 무난하다고 장담하였다. 그는 수출이 갑자기 증 가한 것이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가 근대화하여 공산품의 수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수출선이 종래의 일본 중심에서 미국, 동남아시아, 홍콩 등으로 다변화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수출 증가의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이 면방직 제품에 대 한 수출을 허가했기 때문이지만, 환율이 인상되는 등 군사 정부가 적극적으로 제조업 육성에 나선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군사 정부가 이른바 '부정부패 척결'을 외친 것도 수출의 증가 요인으로 작용했다. 

- 1962년 화폐 개혁은 1945년 해방 이후 3번째 단행된 것이 었다. 첫 번째 화폐 개혁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수도 서 울을 잃었을 때 북한이 혼란을 가중시킬 목적으로 화폐를 발행한 데 대응할 목적으로 이뤄졌다. 두 번째 화폐 개혁은 1953년 한국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화폐단위를 기존 원에서 '환'으로 변경하는 한편, 식민지 시기에 발행되었던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3차 화폐 개혁은 투자 재원을 마련하고 인플레이션을 완화할 목적으로 시행되었으나, 미국의 반대 및 국민들의 불신으로 큰 실패를 경험했다. 은 행에 대한 신뢰만 추락한 상황에서, 결국 군사 정부는 다시 미국에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50년대처럼 한 국에게 무상 원조를 해주기 어려운 여건이었기에, 군사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 대신 미국의 지원을 요구했 다. 전쟁은 끔찍한 일이지만, 타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종 종 경제에 큰 호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 1964년부터 시작된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한국 경제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 미국의 추가적인 자금 지원 및 전 쟁 물가 공급 등의 직접적인 혜택뿐만 아니라, 컨테이너로 대표되는 거대한 물류 혁명에 올라탈 기회를 잡을 수 있었 기 때문이다. 만일 세계 경제의 블록화 흐름이 높아지고 무 역 장벽이 새롭게 세워지는 시기에 수출 주도 산업화 전략 을 채택했다면 비슷한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국의 산업화는 운도 상당히 따랐고, 그 운을 잡아내는 역량 덕분에 이뤄낸 결과였다고 도 볼 수 있다.

- 1965년 체결된 한일 기본 조약은 한국 경제의 발전 경로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인접한 일본과의 교역이 급격히 늘어 났을 뿐만 아니라, 청구권 자금을 활용해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등 숙원 사업을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 히 수출 제조업 육성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자본과 기 술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는 면에서 역사적 전환점이라는 평가가 결코 낮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정적 면도 적지 않았다. 해외에서 낮은 금리의 자금 도입이 이뤄지다 보니 기업들의 방만한 경영이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고, 일본에 대한 경제적 종속 위험이 높아졌던 것이다. 특히 경 제 규모에 비해 과도한 자금 유입이 벌어지며 '과잉 투자' 문제가 발생해, 이후 박정희 정부는 포용적인 정책 기조를 버리는, 이른바 '8.3 조치'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 1997년에 발생했던 외환 위기의 원인을 둘러싸고 여러 주장 이 있지만, 필자는 1972년의 사채 동결 조치가 가장 중요한 배 경에 있다고 판단한다. 연이율 40% 이상의 사채를 은행 대출 금리 수준(16.2%)으로 인하하고 3년 동안 갚지 않아도 되며 이후 5년에 걸쳐 분할 상환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특혜였고, 이는 한국기업들이 부채에 의지한 '브레이크 없는' 성장 전략을 더욱 강하 게 추종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8.3 조치 이후 기업들 의 경영 실적은 크게 개선된 반면, 금융비용 부담률은 5% 아래 로 떨어졌다.
그러나 기업들의 반대편, 즉 가계와 자산가들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 없었다. 은행 이자율이 인플레이션 수준보다도 낮은 상황에서 예금자들은 은행에 돈을 맡기기보다 사채 시장에서 운용하는 게 훨씬 이익이었다. 특히 자본 시장의 발달이 미약해 안정적인 배당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70년대 초에 는 저축 자금을 고리 사채로 운용하는 것이 가장 수익이 높고 안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8.3 조치로 자금이 묶이고 심 지어 낮은 금리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졌으니, 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 8.3 조치 등 박정희 정부의 정책이 큰 효과를 거두기는 했지 만, 세 가지 문제를 일으켰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첫 번째로 산권이 상시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국내 저축이 늘어나고 자본시장이 성장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정부가 은행 중심의 경 제 구조를 바꾸기 위해 기업의 상장을 촉진하는 등 다양한 노력 을 기울이긴 했지만, 그 성과는 미미했다.
두 번째는 성과 부진 기업에 채찍을 휘두르는 과정에 '사심' 이 개입될 여지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정부가 저금리 대출을 배 분해 주는 과정에서 많은 부패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점 점 한국 경제의 짐으로 작용하게 된다. 중화학 공업의 공급 과잉 문제가 부각되어 이른바 산업 합리화 조치가 취해질 때 많은 기업이 부당한 처우라고 반발하는 일이 잦았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더 나아가 기업들이 많은 대출을 받아 공격적인 경영에 나섬 으로써 외부 충격에 취약한 경제 구조로 변모하게 된 것도 무시 하지 못할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은 1984년부터 시작되는 3저 호황으로 보상받게 되지만, 이때부터 경기 변동의 폭 이 커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 1972년 8월 3일 단행된 사채 동결 조치는 한국 경제에 많 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높은 사채 이자에 신음하던 수출 대기업들은 기사회생의 계기를 잡았지만, 재산권에 대한 심대한 침해를 일으킨 것은 물론 정부의 힘이 다른 경제 주 체에 대해 일방적인 우위를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70 년대 중후반 한국 경제는 연평균 7.3%의 고속 성장을 기록 할 수 있었지만, 1979년 발생한 이란 혁명을 계기로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게 된다.

- 1979년에 발생한 두 가지 사건은 한국 경제를 백척간두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1979년 2월에 발생한 이란 혁명으로 국제 유가가 급등한 데다, 10월에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 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1980년 미국의 볼커 의장 이 강력한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외채 이자가 급등한 것 도 외채 위기의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다행 히 1980년 1월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을 대폭 인상하고 강 력한 통화 긴축 정책을 펼침으로써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 화하고 무역 적자의 확대를 억제할 수 있었다. 특히 전두환 정부가 추곡 수매가 인상을 억제하는 등 강력한 재정 긴축 을 펼친 것도 대외적인 평가를 높인 계기로 작용했다. 1982 년에 멕시코와 브라질 등 상당수 신흥 공업국이 외채 위 기를 겪었던 반면, 한국은 위험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는 1984년부터 시작된 3저 호황의 기틀을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 1982년 멕시코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수많은 신흥 공업국 이 외채 위기를 겪을 때, 한국은 이에 휘말리지 않은 소수의 국 가에 해당되었다. 1980년 1월에 단행된 강력한 긴축 정책(환율 및 금리 인상)으로 무역 수지가 개선된 데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1982년부터 낮아지며 은행 예금 금리를 인하할 여력이 생긴 덕 분이었다. 물론 미국이나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했던 것 도 외채 상환 독촉을 피해 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라는 격언 그대로, 한국 경제는 1983 년부터 본격적인 회복세가 시작되었다. 가장 큰 도움이 된 것 은 수출 여건의 개선이었다. 연준의 볼커 의장이 1983년부터 금 리를 인하하자 미국 등 선진국의 소비가 살아난 것이다. 1967 년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을 살펴보면 의류(18.4%)와 섬유 제 품(13.4%) 등 경공업 제품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1982년이 되면 의류(17.3%)의 비중이 조금씩 낮아진 대신 운송기계(15.4%)와 전자 기기(9.9%)의 비중이 올라온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의류와 자동차 그리고 전자 제품은 경기가 좋을 때 매출이 늘 어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제품군은 한 번 구입하고 나면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옷은 조금 낡았다고 해도 수 선하면 입을 수 있고, 전자 제품은 자주 고장 나더라도 바로 바 꾸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금리 인하다.
- 1965년 한일 기본 조약 체결 이후 대일 무역 적자의 누적으 로 한국이 고통받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이는 일종의 '복권 당 첨'에 비길만한 소식이었다. 일본 엔화의 가치가 상승하지만 원 화 가치가 안정적이었기에 기업들의 경쟁력이 크게 개선되었던 것이다. 현대자동차가 만든 베스트셀러 모델인 포니의 미국 수출 이 1986년에 이뤄진 것도 원화 가치의 하락에 힘입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일본 도요타 자동차의 코롤라가 대당 2만 달러에 팔리고 있는데, 현대의 엑셀이 1만 달러라면 이에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현대자동차는 미국에서 "신차 한 대 값이면 엑셀 두 대를 살 수 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판매에 나설 정도였으니 말이다. 115 공격적인 판촉 활동에 힘입어 1986년에만 16.8만 대가 팔렸고, 1987년에는 무려 26.3만 대 를 팔 정도로 히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끝이 없는 잔치는 없는 법.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정 점으로 호황이 저물기 시작했다. 경제 성장률이 정점을 치고 떨 어지는 가운데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진 것이 가장 큰 문제였 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2~3% 수 준으로 안정되었지만, 1988년에는 7.1%까지 상승했다. 특히 1987년 6월 이후 민주화 열기가 높아진 가운데 임금 상승률이 급격히 높아진 것도 경쟁력을 약화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정부가 1979~1982년 같은 강력한 긴축 정 책을 펼쳐야 했으나, 대통령 선거와 미국의 시장 개방 압력 등의 문제로 실현되지 못했다. 

- 1983년의 미국 금리 인하, 1984년의 국제 유가 폭락 그리고 1985년의 플라자 합의로 한국 경제는 역사상 가장 강력 한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유가가 하락하고 국제 금리가 인하하며 대외 지출이 크게 줄어든 반면, 엔화 가치가 급격 히 상승하면서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크게 개선된 것이 다. 이 영향으로 한국의 무역 수지가 통계 작성 이후 처음 으로 흑자로 전환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기가 과열됨에 따라 인플레이 션이 발생했고, 이는 시장 금리의 상승을 유발해 경기의 탄 력을 약화시켰다. 특히 민주화 흐름 속에서 대기업 근로자 들의 임금이 급등하며 기업들의 경쟁력이 약화된 것도 이 후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 1988년 한국 경제는 '절정'의 호조를 보였다. 경제 성장률이 12.0%에 달했을 뿐만 아니라,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88.9억 달 러에 이르렀으며, 주식 가격도 역사상 최고 수준을 연일 경신하 는 강세였다. 그러나 몇 가지 면에서 불안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 었는데,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인플레이션이었다. 1988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7.1%를 기록해 1982년(7.2%) 이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금리 의 상승이다. 신용도가 높은 우량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 즉 기 업이 발생한 차용증서에 표시된 이자율이 1987년 12.6%에서, 1988년에는 14.2%로 치솟은 데 이어, 1989년에는 15.2%로 올라서고 말았다.
- 그럼 1980년대 후반에 한국 경제의 경쟁력은 얼마나 약화되었을까?
여러 연구 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1986~1990년 한국의 생산성은 8.5% 높아졌지만, 임금은 10.1% 상승한 것으로 나타난 다. 119 반면 같은 기간 일본의 생산성은 4.5% 개선되었는데 임금 상승은 단 3.2%에 그쳤다. 그리고 이런 추세는 1990년대 전반기 까지 계속되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의 엔화 강세로 획득했던 대일 경쟁력 개선이 불과 10년 만에 모두 소멸된 셈이다.
단위 노동 비용의 급격한 상승이 이뤄지는 가운데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이 급락한 것도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88년 미국 정부는 한국과 대만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 함으로써 큰 충격을 주었다.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되면 미국 해외민간투자공사OPIC. Overseas Private Investment Corporation를 통한 자금 지원이 금지되고, 미국 정부의 조달시장에 참여가 금지되며, 무역 협정 협상에서의 압력이 강화된다.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 된 데 따른 직접적 충격은 크지 않았지만, 한국 정부도 원화 가 치가 저평가 상태임을 인정하고 환율 인하에 나서게 된다. 1987 년 말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은 861.4원이었지만, 1988년 말에 는 684.1원으로 떨어졌고, 1989년 말에는 679.6원을 기록했다. 더 나아가 1988년에 미국이 무역 적자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내놓은 이른바 '슈퍼 301조'도 큰 변화를 가져온 요인이었다. 121 슈퍼 301조는 무역 상대국을 우선 협상 대상국으로 지정하는 한편 광범위한 보복 조처를 할 수 있게 허용한 법안이다. 
- 물론 원화 강세 및 시장 개방 그리고 강력한 임금 상승이 경제에 나쁜 영향만 미친 것은 아니다. 원화의 가치가 높아지고 임금이 가파르게 상승한 덕분에 1989년과 1990년 한국 경제 성장률은 각각 7.1%와 9.1%로 고성장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때를 고비로 국내 기업들의 생산 설비 해외 이전이 본격화되고 기업들의 매출액 대비 영업 이익률이 뚝뚝 떨어졌음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다. 
- 금리가 상승하는 가운데 원화 가치도 오르는 데다 임금마저 급등하는 이른바 '3고 현상'이 시작되었다는 평가가 1988년 하 반기부터 제기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124 3고 현 상의 충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1979~1982년 같은 적극적인 긴축 정책이 필요했지만, 당시 노태우 정부는 더욱 강력한 경기 부양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이는 한편 무역 수지의 악화를 유발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압력으로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을 떨어뜨리는 중이었던 데다, 1986~1989년 발생한 주택 가격 급등 현상으로 인해 분당과 일산 등 '1기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기 때문이 다. 1989년 2월 24일 노태우 대통령은 "서민들을 위한 영구 임 대주택 25만 가구를 포함해 주택 200만 호를 짓겠다."라고 약속 한 후, 이를 실행에 옮겼다. 125 이 부분은 부동산 시장을 다루는 3 부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겠지만, 경제에 미친 충격은 대단히 컸 다. 단번에 200만 호에 이르는 주택을 공급하느라 인플레이션이 더욱 심화되었고 인건비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특히 인력난이 심각했던 건설 부문의 임금이 폭발적으로 상승해 단위 노동 비용이 급격히 상승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경제는 겉은 화려하지만 속이 곪아가기 시작했으며, 이 문제는 결국 1997년 외환 위기로 폭발하게 된다.
- 1988년부터 한국 경제는 세 가지 장애를 만나게 된다. 첫 번째 장애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금리 상승이었고, 두 번 째는 미국의 압력 속에 원화 가치가 상승한 것이며, 마지막 은 민주화 흐름 속에 시작된 가파른 임금 상승이었다. 이 결과 한국 기업의 수익성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단위 노동 비용이 상승해 경쟁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1979~1982년 같은 공격적인 긴축 정책이 요구되었지만, 당시 노태우 정부가 신축 주택 200만 호 건설 정책을 실행 에 옮김으로써 건설업을 중심으로 인건비 부담이 더욱 커 지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것만으로 한국 경제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96년 반도체를 비롯한 한국 전자 산업이 큰 불황을 겪으면서 외환 위기의 역풍을 맞게 된다.

- 일본 기업들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반도체기업의 방심 그리고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 덕분이었다. 129 1984년 미국의 FBI가 인텔 본사에서 불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서 함정 수사를 벌여 인텔의 설계 비밀을 구입하려 한 히타치와 미쓰비시의 직원을 체포한 것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일본 반도체 업계의 승전보를 막을 수 없었다. 특 히 1984년 업계를 덮친 심각한 공급 과잉은 일본 기업들이 노린 바였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일본 기업들이 자국 내에서 파는 메 모리 칩의 가격은 높게 책정하고, 외국에서 파는 가격은 경쟁 기 업들이 도저히 제시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낮추는 식이었다. 130 이에 미국의 반도체 업계는 1985년 6월 14일 무역대표부에 일본 정부가 민간 기업을 지원하는 반도체 정책이 부당하다며 제소했다.  같은 해 9월 플라자 합의까지 체결되며 일본 반도 체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1986년 미국 정부와 일본 반도체 기업은 "일본 반도체 업체는 생산 원가를 공 개하고 미국 업체의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높인다."라는 내용 을 담은 제1차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는 한 국 기업들에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 서 일본 반도체 회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인텔이 메모리용 반도 체 시장에서 철수한 공백을 한국 기업이 밀고 들어간 것이다. 132 한국 기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적기에 저렴한 제품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반면 당시 일본 기업들은 기업용 컴퓨터에 사용하는 고성능 반도체를 만들었기에,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쌌 고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 이상의 오버 스펙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때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게 행운이 따랐다. 윈도우 3.1 과 윈도우 95로 대표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새로운 운영 체제가 90년대에 출시되며 개인용 컴퓨터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고, 이는 2~3년마다 제품 교체 주기에 맞춰 대규모 수요가 발생한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한국과 대만 등 반도체 업계의 후발 주자들은 오버 스펙의 기업용 시장보다 개인용 중저가 시장에 집중함으로써 시장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경제의 주력 수출품으로 부상한 반도체는 소비자들의 사소한 지출 변화에도 가격이 크게 흔들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994년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금리 인상, 1995년 이후의 엔화 약세 속에 한국 기업들의 설비 투자 붐까지 겹쳐 1996년 반도체 수출 가격이 폭락하 는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때 정책 당국이 환율 조정 및 산업 구조 조정 등의 조치를 신속하게 취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97년에 접어들며 기아와 한보 등 주요 기업의 연쇄 도산이 시작되고, 태국 등 아시아 외환 위기가 발생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고 말았다.

-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경제의 주력 수출품으로 부상한 반도체는 소비자들의 사소한 지출 변화에도 가격이 크게 흔들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994년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금리 인상, 1995년 이후의 엔화 약세 속에 한국 기업들의 설비 투자 붐까지 겹쳐 1996년 반도체 수출 가격이 폭락하 는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때 정책 당국이 환율 조정 및 산업 구조 조정 등의 조치를 신속하게 취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97년에 접어들며 기아와 한보 등 주요 기업의 연쇄 도산이 시작되고, 태국 등 아시아 외환 위기가 발생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고 말았다.
-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경제의 주력 수출품으로 부상한 반도체는 소비자들의 사소한 지출 변화에도 가격이 크게 흔들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994년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금리 인상, 1995년 이후의 엔화 약세 속에 한국 기업들의 설비 투자 붐까지 겹쳐 1996년 반도체 수출 가격이 폭락하 는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때 정책 당국이 환율 조정 및 산업 구조 조정 등의 조치를 신속하게 취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97년에 접어들며 기아와 한보 등 주요 기업의 연쇄 도산이 시작되고, 태국 등 아시아 외환 위기가 발생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고 말았다.
- 외국과 활발하게 무역하고 자본이 자유롭게 오가는 가상의 나라를 생각해 보자.  어느 날 이 나라의 주력 수출 제품(가령 반도체) 가격이 갑자기 폭락해 수출이 급격히 줄어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제일 먼저 무역 수지가 악화되는 한편 고용과 GDP가 감소할 것이다. 이 나라의 중앙은행이 경기를 살릴 목적 으로 금리를 인하하면, 이 나라에 투자했던 돈이 더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나라로 대거 유출될 것이다. 무역 및 자본 수지가 함께 악화하여 달러 공급이 크게 줄어들 것이며, 달러에 대한 환율이 급등할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 정부가 고정환율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면 심각한 문제가 빚어진다. 왜냐하면 환율을 일정 수준에서 유지하 기 위해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외환 시장에서 내다 팔아 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부가 달러를 팔고 자국 통화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시중의 돈이 정부로 모이게 된다. 이 결과 시 중에 풀린 돈이 줄어들고 경기가 더욱 악화될 것이다. 경기가 나 빠지니 해외 상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어 무역 수지가 다시 호 전되며 위기가 종료된다. 그러나 무역 수지의 개선에 시간이 걸 릴 경우, 이 나라 정부가 가지고 있는 외화가 고갈되며 결국 국 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 등 국제기구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는 상황에 몰릴 수도 있다.
반면 이 나라가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통화 가치가 낮아지는 것을 방치하기만 하면 된다. 달러에 대한 환율이 급등하는 가운데 해외 상품에 대한 수요는 자연스럽 게 줄어들 것이고, 수출 기업들은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여 더 많 은 수출을 달성하며, 무역 수지가 흑자로 전환될 것이기 때문이 다. 물론 환율이 급등해서 달러로 환산된 1인당 국민 소득의 감 소가 나타날 수는 있지만, IMF에 굴욕적인 조건으로 도움을 청 하는 일은 막을 수 있다.
- 그러나 태국과 한국 모두 고정 환율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게 문제가 되었다. 무역 적자가 심화되는 가운데 해외 투자자들 의 이탈이 이어지는 데도 환율을 일정 수준에서 유지하려 노력 하다 외환 보유고가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1997년 7월 태국이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것을 보면서도 위기의 심 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때라도 고정 환율 제도를 폐지하고 금리를 인상했다면, 외환 위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97년 8월에 기아그룹이 사실상 파산하고, 10월에 홍콩마저 외 환위기를 겪으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지경이 되고서도 고정 환율 제도를 유지하려 집착했던 이유를 정확하게 알 방법은 없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4월 감사원은 "정부가 1인당 국민 소득 1만 달러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환율방어에 나선 것이 외환 위기를 가중시킨 원인"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조사 결과만으로 모든 의문이 풀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외환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에 따라 정책의 우선순위 조정이 당연히 이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 환 위기 위험이 높아질 때 1인당 국민 소득을 유지하기 위해 발 버둥 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더 나아가 '무능한 정부'라 는 후대의 평가를 받는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 국 당시 김영삼 정부가 고정 환율 제도를 유지하려 노력했던 것 은 글로벌 금융 시장의 상황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거나 혹은 종금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 당시 종금사는 해외에서 만기 1년 미만으로 돈을 빌려왔기에 구조상 해마다 대출의 만기가 도래했었다. 반면 종금사의 대출 은 통상 10년 만기 대출이었기에 만에 하나 해외에서 빌려온 돈 의 만기 연장이 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에 빠진다. 그런데 해외 의 금융 기관 입장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연이어 외환 위기를 겪 는 데다, 한보와 기아 등 대기업마저 연쇄 부도가 나는 것을 보 면서 한국 종금사에 대출을 연장해 주는 게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결과 종금사들은 원화를 달러로 환전한 다음 해외 금 융 기관에게 원금을 갚아야만 했다. 1996년 말에 단기 외채가 1,000억 달러에 달했는데, 1997년 11월에 889억 달러로 줄어들고, 12월에 685억 달러까지 떨어진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한국 경제를 홀로 지탱하던 반도체 산업마저 1996년에 무 너지면서 한국 경제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특히 종금사 를 활용해 해외에서 빌린 돈의 만기가 짧아서, 만기 연장이 되지 않는다면 곧장 위기에 처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게 문제를 심화시켰다. 1997년 7월에는 태국이 외환 위기 를 맞았고, 8월에는 기아그룹이 파산했으며, 10월에는 홍 콩이 외환 위기를 맞았다. 이 흐름 속에서 한국 정부가 제 대로 된 정책을 시행하지 못하는 가운데 외환 보유고가 고 갈되고 말았다.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함으로써 외환 부 족 사태를 해결하기는 했지만, 한국 경제는 고금리와 재정 긴축 시행으로, 한국 전쟁 이후 가장 어려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 1997년 12월에 IMF는 한국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가로 가혹한 조건을 내걸었다. 144 IMF가 한국에게 요구한 조건은 돈 을 빌려준 사람이 돈을 갚지 못한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과 비슷 했다. 민사 소송을 걸어 재산을 압류하고 상대의 소득 일부를 떼 가는 방식처럼, 한국이 빚을 갚아 나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러면 국가는 어떤 조치를 취하게 될까? 2010년 재정 위기 이후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이 겪은 일처럼 지속적인 내핍을 강요당한다. 즉 금리를 인상하고 재정 지출을 줄여서 어 떻게든 저축을 모아 무역 수지를 흑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저축이 늘면 무역 수지가 흑자가 될까? 금리가 인 상되고 재정 지출이 줄어들면 소비와 투자가 급격히 줄어든다. 즉 저축액은 늘어나고 지출은 줄어드니, 경제 전체적으로 돈이 남아돈다. 특히 기업 투자의 상당 부분은 해외에서 수입되는 기계와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해외로부터의 수입이 줄어든다. 더 나아가 국내 소비가 급격히 줄어드니, 유통업체는 남아도는 재고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보다 해외로 수출하는 게 더 이익 이 될 것이다. 이 결과 무역 수지가 급격히 개선된다. 145 무역 수 지가 개선되면 외화가 유입되니, IMF로부터 빌린 돈을 신속하게 갚을 수 있다.

- 1998년 여름부터 한국 경제는 두 가지의 호조건을 맞이했 다. 대규모 무역 흑자를 기록하며 IMF의 개혁 프로그램이 완화되었고, 미 연준이 LTCM 사태로 인한 금융 시장의 혼 란에 대응해 금리를 인하한 것이다. 이 덕분에 1998년 한국 은 400억 달러에 가까운 무역 흑자를 기록했고,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전자 제품의 수출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 등 선진국으로의 수출 기회를 갖지 못한 기업 들의 어려움이 지속된 끝에, 1999년 7월에 대우그룹 사태 가 터졌다. 외환 위기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채 주 도 성장 전략을 고집하던 대우그룹의 파산은 한국 경제의 방향을 바꾼 전기로 작용했다. 이후 한국의 고용률은 지속 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는 중이며, 기업들의 투자는 과 거에 비해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가 2001년부터 시작된 카드 관련 규제 완 화였다. 다음 편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본다.

- 1999년 여름, 대우그룹 사태를 전후해 강력한 금융 규제 완 화가 이뤄졌다. 신용 카드사의 현금 서비스한도를 폐지하 는 한편, 신용 카드 소비가 많은 사람에게 연말 정산 혜택 을 부여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이후 약 2년에 걸 쳐 비약적인 카드 소비의 증가가 출현했다. 그러나 국민 대부분이 카드를 보유하게 되고 일부 자영업자들이 카드 돌려막기에 나서면서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1년 말부터 정부가 카드사의 과도한 마케팅에 제동을 걸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 2003년 말에는 무려 370만 명의 1999년 여름, 대우그룹 사태를 전후해 강력한 금융 규제 완 화가 이뤄졌다. 신용 카드사의 현금 서비스한도를 폐지하 는 한편, 신용 카드 소비가 많은 사람에게 연말 정산 혜택 을 부여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이후 약 2년에 걸 쳐 비약적인 카드 소비의 증가가 출현했다. 그러나 국민 대부분이 카드를 보유하게 되고 일부 자영업자들이 카드 돌려막기에 나서면서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1999년 여름, 대우그룹 사태를 전후해 강력한 금융 규제 완 화가 이뤄졌다. 신용 카드사의 현금 서비스한도를 폐지하 는 한편, 신용 카드 소비가 많은 사람에게 연말 정산 혜택 을 부여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이후 약 2년에 걸 쳐 비약적인 카드 소비의 증가가 출현했다. 그러나 국민 대부분이 카드를 보유하게 되고 일부 자영업자들이 카드 돌려막기에 나서면서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지목한 미국의 부시George Walker Bush 행정부는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며 급등했던 유가가 안정을 되찾음에 따라 한국 경제에도 회복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유가가 하락하면 물가 상승 압 력이 약화되고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특 히 이라크 전쟁의 승전 분위기가 조성된 데다 금리 인하까지 가 세하자 폭발적으로 소비 증가가 나타났다. 한국은 선진국을 대 상으로 수출하는 산업(반도체, 자동차 등)을 대거 보유한 나라이 기에, 선진국 소비 회복은 바로 수출 증가로 연결된다.
여기에 한 가지 호재가 발생했으니, 바로 중국 경제의 가파른 성장이었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 가입이후 중국의 수출 주도 성장이 시작되자 조선과 화학 등 이른바 중화학 공업의 대중 수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의 세계무 역기구 가입은 중국의 시장 개방이 본궤도에 오른 것을 의미하 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호적인 조건에서 중국 제품이 해외 시장 을 공략할 수 있게 된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중국 경제 성장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복합적이다. 당 장은 한국산 배와 기계, 원재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니 이른바 '중국 붐'을 만끽할 수 있었다. 2002~2008년의 연평균 대중 수출 증가율이 26.6%에 달하고, 누적 무역 흑자가 1,173.2억 달러에 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런 강력한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90년대부터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적극적으로 진출해 생산 기지를 만든 것 그리고 2000년대 초반의 불황에서 선진국 경제가 회복된 덕을 동시에 누렸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중반의 대중 수출 붐은 외환 위기와 카드 대란 의 충격을 씻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2006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의 벽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발흥은 우리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만 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국이 가공 조립형 경제 구조에 마냥 머물러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가 공 조립형 경제 구조는 수출의 대부분을 외국계 기업이 담당하 고 생산직 근로자는 중국인으로 구성되는 형태의 산업을 뜻한 다. 1990년대 한국의 섬유 및 신발, 의류 산업이 중국에 대거 진 출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된다. 한국의 설비를 뜯어서 중국의 해 안 지역에 공장을 새로 설치하고 월 50달러도 되지 않는 임금을 지불하는 근로자들을 모아서 만든 물건을 미국이나 유럽에 수출 하는 식이다. 참고로 1993년 중국의 평균 연봉은 3,371 위안으로, 달러로 환산하면 583달러 남짓했다. 월 5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 는 월급을 주어도 수많은 사람이 일하겠다고 연안 지역 공장으 로 몰려들던 시절이었다.
-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한국 경제는 약 10년 가까 운 시간 동안 큰 호황을 경험했다. 중국의 부품 및 원자재 그리고 각종 기계 장비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 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카드 대란과 SK주식회사의 분식 회계 사태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대중 수출 붐이 끝 없이 이어질 수는 없었다. 중국의 인건비와 토지 가격이 급 등하면서 과거처럼 가공 조립에 치중하는 방식으로는 성 장세를 이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70년대 한국 처럼 중화학 공업 및 정보 통신 산업 육성에 거대한 자본이 투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부분 중국이 한국의 기술 수 준을 따라잡았고, LCD 디스플레이처럼 아예 압도적인 경 쟁력을 확보한 산업도 생겨났다. 그러나 중국의 미래가 그 렇게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생산 요소 가격의 급 등세가 지속되는 데다, 명령-지시 체제가 지니는 문제가 점점 더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한국이 어 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중국을 따돌릴 기회를 갖고 있는 시기로 판단된다.

- 한국 경제가 세계적인 불황 이후 경쟁력이 개선되는 두 번째 이유는 환율 때문이다. 1999년 말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은 1,138.0원이었지만, 2000년 초반 정보 통신 거품이 붕괴된 이 후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다. 2000년 말에는 1,264.5원으로 상승 한데 이어, 2001년 말에는 1313.5원까지 수직 상승했다. 이런 현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다르지 않았다. 2007 년 말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은 936.1원이었지만, 2008년 말에 는 1,259.5원으로 급등했다. 이처럼 환율이 금융 위기 때마다 상 승하는 이유는 1997년 외환 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한국에 투자했던 외국인 투자자들은 환율 상승과 주식 가격 폭락으로 큰 고통을 겪었기에, 이때부터 한국 원화 자산을 '불황에 약한 위험자산'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즉 불황이 닥칠 때마다 한국 에서 해외로 달러가 빠져나가기에 환율이 급등하는 것이다. 물 론 수출이 잘 안되면서 무역 수지가 악화되는 것도 환율 상승 요 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까닭에 한국 경제는 세계 경기의 하강이 마무리된 다음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한다. 경쟁자들이 연구 프로젝트를 접고 심지어 개발 인력을 해고할 때도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기 때문 이다. 더 나아가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마저 급등함으로써 수출 기업의 경쟁력이 개선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 결과 한국의 세 계 수출 시장 점유율이 꾸준히 상승했으며 이제는 일본을 추월 할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다.

- 시장 경제는 끊임없이 호황과 불황을 반복한다. 2000년 정보통신 거품의 붕괴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대 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세계적인 불황이 닥치면 한국이나 대만처럼 내수 시장이 작은 수출 공업 국가들은 큰 곤경에 처한다. 내수 시장으로는 도저히 소화하기 어려운 막대한 생산 설비를 보유하고 있는 데다, 수출 제품 대부분이 경기 에 민감한 전자 제품 및 자동차 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 이다. 따라서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는 글로벌 경기의 변화 에 따라 수출이 급증하고 급감하는 사이클을 피하기 어렵 다. 그러나 한국은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도 약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불황에 더 공격적으로 연구 개 발 투자를 단행하는 데다,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도 급등하 기 때문이다. 즉 남들이 투자 안 할 때 더 열심히 투자하고 체력을 길러 경기가 회복될 때 세계 시장 점유율을 매번 올 렸던 과거의 경험도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0년 이후 한국 경제는 역사상 가장 물가가 안정된 시기 를 누렸다. FTA 체결에 따른 시장 개방과 지속적인 생산성 향상 노력 그리고 세계 경기의 둔화가 저물가 구조를 만든 주역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2022년 발생한 러시아-우크라 이나 전쟁 이후 강력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앞으로도 저물가 현상이 지속될 것인지 논란이 제기된다. 필자의 입 장은 한국 경제가 당면한 강력한 인구 고령화의 압박을 감 안할 때 앞으로도 여전히 저물가 기조가 이어진다는 것이 다. 물론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점차 확대되는 가운데 이전 처럼 해외에서 값싼 공산품과 농산물이 무제한으로 공급되 기는 어려워졌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삼성 전자를 비롯한 한국의 거대 수출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혁 신을 추구하는 만큼, 지난 10년만큼은 아니더라도 물가가 지속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 저축은행 사태는 직접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경제에 미친 후 유증도 컸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13년에 발생한 동양그룹 사태가 될 것이다. 동양그룹 사태란 2013년 10월에 동양그룹의 주요 계열사인 동양,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 동양네트웍스, 동양시멘트가 잇달아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기업 어음과 회사 채를 보유한 4만여 명이 1조 7,000억 원 규모의 피해를 입은 사 건이다. 이 사건 뒤에는 동양그룹의 경영 환경 악화가 자리 잡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축은행 사태로 금융 시장이 꽁꽁 얼 어붙지 않았다면 그토록 고금리 부채에 허덕이지 않았을 것이라 는 아쉬움도 있다. 

- 2002년에 발생했던 카드 대란과 2010년에 벌어진 저축은 행 사태는 여러 면에서 판박이다. 정부가 금융 규제를 완화한 이 후 공격적인 마케팅 및 사업 확장이 발생하고, 이게 경기 여건이 악화되면서 부실로 전이되는 전형적인 흐름을 보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 외환 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주기적인 '소형 금융 위기'를 겪었다. 2002년의 카드 대란 그리고 2010년의 저축은행 사 태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 는 이유는 조급증 때문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이를 정 공법으로 해결하기보다 손쉬운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위 기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이다. 1999년 대우그룹 사태 이후 카 드 규제가 완화되고, 카드 대란 이후에 저축은행에 대한 규 제가 완화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모든 금융 규제 완화가 위기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규제 완화가 개입되지 않 은 금융 위기를 찾기 힘든 게 현실인 것 같다. 

- 1962년 5월의 증권 파동 이후 주식 시장은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다. 왜냐하면 주식 가격이 왜 급등하는지도 모르 고 유상 증자(신주를 발행하여 돈이나 현물을 받아 자본금을 늘리는 일)에 참여했던 수많은 이들이 심각한 손실을 본 데다, 1963년에 진행된 특별 조사단의 수사 결과가 너무나 실망스러웠기 때문이 었다.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이 이끄는 특별 조사단의 발표에 따 르면, 1962년에 이뤄진 중앙정보부 강성원 조사실 행정관(소령) 과 윤응상 일흥증권 사장 간의 만남에서 정부 주도의 작전이 시 작되었다. 당시 '투자의 귀재'로 불리던 윤 사장은 "농협중앙회 소유 한국전력 주식을 빌려주면, 이를 크게 불려주겠다."라는 취 지의 말로 증시 문외한이었던 중앙정보부를 꼬드겼다. 이후 한 국전력 주가를 끌어올린 뒤 팔아서 폭리를 취했고, 이 돈으로 다시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을 매점매석해 폭리를 취하려다 실패했다는 것이 특별 조사단이 파악한 증권 파동의 실체였다.
특별 조사단의 발표 이후 윤응상, 강성원 등 14명이 구속되고 검찰로부터 징역 7년 등의 구형을 받았으나, 그 후 군법회의에 서 '의혹의 원인이 없다'며 전원 무죄를 선고받았다. 즉 증권 파 동으로 손실을 본 국민들은 넘쳐나지만, 사태를 만든 이들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셈이다. 윤응상을 비롯한 증권 파동의 주범들은 이후 일상으로 복귀했으며, 윤응상은 1997년에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증권 파동을 겪은 후 국민들은 "주식 시장은 못 믿을 곳”이라 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후 10년 동안 한국 주식 시장은 개점 휴업 상태가 되었다. 특히 주식 시장에 상장해 자금을 조달하려 는 기업들도 자취를 감춰 1971년 상장 기업의 숫자는 단 50개에 불과할 정도였다.
- 기업의 주주는 회사가 잘못되더라도 자기 지분만 포기하 면 끝이다. 그런데 하영기 부총재는 기업의 경영진과 기업을 하 나로 취급하고 기업이 잘못되면 기업주도 망하는 게 당연하다고 역설했다. 사채 동결로 이득을 보았으니 보유한 주식을 시장에 싸게 내놓음으로써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라는 이야기다.
결국 거듭되는 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한국의 주요 대기업들 이 1974년부터 대거 상장하게 된다. 1971년에는 상장 기업이 단 50개에 불과했으나, 1974년에는 128개로 불어나고, 1978년에는 무려 356개 기업이 주식 시장에 상장하면서, 한국 주식 시장은 외형적인 면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재벌 총수' 혹은 '사주'라는 말이 일상화된다. 왜냐하면 하영기 부총재가 지적했듯, 기업의 주 인으로서 기업의 흥망성쇠에 책임을 지는 이가 존재하기 때문이 다. 총수나 총수 일가는 기업의 경영에 책임을 질 뿐만 아니라, 헐값에 주식을 상장시키는 등의 큰 희생을 겪었기에 당연히 기 업의 경영권을 쥐고 중요한 의사 결정을 누리는 존재로 격상된 셈이다. 특히 1976년 12월에 '증권거래법이 개정되면서 기업이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 경영권을 둘러싼 적 대적인 기업 인수 합병M&A, Merger and Acquisitiond을 기대하기는 어 렵게 되었다. 
이후 한국 주식 시장은 중요한 특성을 한 가지 갖게 된다. 총수와 그 일가는 아주 소수의 지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소불위의 경영권을 행사한다. 월급쟁이 최고 경영자를 임명하 고 해고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사회에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 들을 자유자재로 채워 넣을 수 있다. 반면 소액 주주는 경영 참 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아무리 IRInvestor relation (증권 투자자들 에게 경영 활동과 그에 따른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활동) 담당자에게 전화해도 의견이 상층부로 전달되는 일은 드물고, 주주 총회에 서 발언하는 것도 대단히 힘들다. 소송을 통하지 않는 한 기업의 최상층부에 의견을 전달하고 또 압박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 사태가 이렇다 보니 한국 주식 시장은 적어도 '주주 보상'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하위권에 위치하게 된다. 주 주 보상이란 순이익에서 배당금 및 자사주 매입 · 소각이 차지하 는 비중을 뜻한다. OECD에 가입한 선진국은 대부분 그 비율이 60% 선에 있지만, 한국은 수십 년째 20% 선을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다.
기업이 성장하고 발전하면 자본금을 투자해 준 이들에게 보 답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 총수들은 "귀한 주식 을 너무 싸게 시장에 내놓았다."라고 판단하기에, 자신의 지분을 매입한 이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며, 더 나아가 그들을 귀 찮은 손님 정도로 취급하는 게 현실인 것 같다. 물론 7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상장한 기업 총수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상장 가격에 대한 규제가 풀린 다음에도 주주에 대한 보상은 지속적 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 1972년부터 시작해 1978년까지 이어졌던 건설주 장세는 한국 증시의 특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부실기업이 대 거 상장되며, 금방 부자 될 꿈에 부푼 투자자들이 시장에 유입되고, 큰 손의 주식 매도가 합쳐지며 거품이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특히 주가 상승의 막차를 탔던 이들은 1/4 혹 은 그 아래 수준으로 떨어진 주가를 보며 넋을 잃었고, 주 식 시장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이로부터 6 년 뒤에 시작된 3저 호황 상승이 끝날 때도 1978년 같은 일 이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운 경험이 되었다.

- 1977년에 기록했던 KOSPI 고점을 1986년에 만회할 수 있었지만, 증시의 봄날은 생각보다 짧았다. 1989년 봄에 KOSPI가 1,000포인트를 기록한 직후 주식 시장이 붕괴되 었는데, 국민주 상장과 부실기업의 연쇄적인 부도가 시장 의 수급 불균형 심화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988년 부터 시작된 환율의 급락과 금리 상승은 기업의 실적 부담 을 악화시켜, 시장의 폭락을 막으려는 정부의 개입에도 불 구하고 1992년까지 50% 이상의 주가 폭락을 경험하고 말 았다. 1977년 건설주 버블의 붕괴에서 나타난 '한국형 거품 붕괴' 패턴이 1988년부터 다시 나타난 것을 알아차린 투자자가 있다면, 그는 1989년부터 시작된 주가 붕괴가 뜻밖의 사건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 1992년은 한국 주식 시장의 역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벌어진 해였다. 첫 번째 사건은 1989년부터 시작된 주식 시장의 하락세가 멈추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을 매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이다. 물론 1980년 대부터 코리아 펀드 형태로 외국인의 간접적인 한국 주식 매수 가 가능했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직접 한국 주식을 매입하는 것 은 불가능했고, 코리아 펀드가 폐쇄형 펀드라는 특성이 있었기 에 투자자들의 불편함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이에 노태우 정 부는 1991년 9월 3일에 주식 시장의 점진적인 개방을 발표하고, 1992년 1월 3일부터 시행하였다.
외국인 투자자에 의한 경영권 위협을 막기 위해 정부는 종목 별 외국인 한도를 설정했다. 기관이나 개인 투자자 등 외국인 전 체 기준으로 상장 기업 지분의 10% 한도 내에서만 투자할 수 있었으며 금융, 항공, 통신 등은 사업의 공익성을 감안해 지분 한도가 8%로 제한되었다. 더 나아가 외국인 1인당 투자 한도는 3% 그리고 공익성이 강한 기업에 대한 한도는 1%로 제약되었다. 매 우 타이트한 규제였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의 미래 를 낙관하며 개방 첫해부터 대규모 순매수를 기록했다. 1992년 한 해 동안의 순매수 규모는 1.5조 원에 달했고, 1993년에는 4.3 조 원까지 확대됨으로써 1992년 여름부터 증시가 본격적인 상승세로 돌아서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 1992년부터 시작된 주식 시장 개방은 한국 증시의 구조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무엇보다 해외의 주도주 및 주도 테마 가 한국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주식 시장 도 해외 요인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필 자를 비롯한 수많은 경제 분석가들이 전날 밤 미국에서 발 표된 경제 지표를 분석하느라 밤잠을 못 이루게 된 것도 이 때의 일이며, 앞으로도 이런 흐름에는 변화가 없을 것 같다.

- 1996년 말부터 시작된 미도파 경영권 분쟁은 한국 증시의 흐름을 갈라놓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신동방 측은 결정적 승기를 잡았음에도 전경련과 정부의 개입으로 결국 화해 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발생한 외환 위기 과정에서 경영권 분쟁에 참여한 모든 주체들이 파산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 문이다. 이후 '투기 세력에 의한 경영권 위협'이라는 표현 이 일상적으로 언론 지상에 등장했고, 재벌 총수의 경영권 에 도전하는 국내외 세력은 매번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외 국인의 지분율이 낮은 기업 총수는 흔들림 없는 경영권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상속세와 증여세를 회피할 목적으로 이뤄지는 물적 분할과 지주사 전환 그리고 전환사채 발행 등 수많은 방식으로 투자자들의 손실을 강요하게 되었다.

- 1998년부터 시작된 강력한 주가 상승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촉발되었다. 첫 번째는 미국 나스닥 시장의 강 세, 두 번째는 저금리 환경 속에서 시작된 '바이 코리아 펀 드 붐' 때문이다. 특히 국내 주식 시장으로의 대규모 자금 이동이 기업들의 주가를 밀어 올림으로써 기업들이 자금 을 조달하기에 용이한 환경을 가져왔다. 1998년부터 5년간 시가 총액의 10% 이상에 달하는 대규모 자금 조달이 벌어 진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당시 주가가 액면가를 밑도 는 기업들은 유상 증자가 어려웠기에 주가 수준이 높은 기 업들에만 혜택이 집중된 면이 있었다. 특히 대우그룹은 대 부분의 계열사가 액면가를 밑돌았기에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2002년을 고비로 한국 주식 시장은 5년에 걸친 대세 상승 을 기록했다. 세계적인 저금리 현상과 매력적인 밸류에이 션 그리고 중국 주식 버블 때문이었다. 특히 SSECI는 2005 년 말 1,000포인트에서 2007년에 6,000포인트까지 상승하 는 역사적인 상승세를 펼치며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신 흥국 주식 시장을 뜨겁게 달궜다. 그러나 비유통 주식의 매 각이 늘어나고, 신규 상장 기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가 운데 시장의 수급이 무너지며, SSECI는 2009년에 2,000포 인트 선까지 폭락하고 말았다. 중국 증시에서부터 시작된 신흥 시장의 거품은 현재까지도 악영향을 미치는 중이며, 신흥 시장에서는 한국과 대만 정도만 역사적인 고점을 넘어선 상태다.

-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오랜 기간 고통 받았다. 2009~2018년 세계 경제 성장률은 단 3.4%로, 금융 위기 이전 10년 동안(4.2%)에 비해 거의 0.8%포인트 낮아 졌기 때문이다. 즉 경기 회복이 신속하게 이뤄지기는 했지 만, 성장 잠재력의 훼손이라는 대가를 기록해야 했다. 그러 나 한국 주식 시장은 이런 경제 환경에 굴하지 않고, 2011 년 봄에는 KOSPI 최고점 기록을 갈아치웠다. 한국 증시가 다른 나라보다 빠르게 전고점에 도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세계 경기의 빠른 회복뿐만 아니라 '불황에 투자하는' 한국 기업들의 도전 정신도 큰 영향을 미쳤다. 금융 위기 이후 최악의 불황이 닥쳤음에도 연구 개발 투자를 멈추지 않고 근로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하지 않았기에, 호황이 시작되 는 순간 누구보다 빨리 품질 좋은 제품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물론 단호한 결단 뒤에는 총수 경영 그리고 소 액 주주에 대한 짜디짠 주주 보상이 자리 잡은 것 또한 사실이다.

- 신규 사업에 진출하는 기업이 늘어날수록 해당 산업의 공급과잉 가능성이 커지며 태양광 업계처럼 고통받을 가능성이 높아 질 것이다. 더 나아가 투자자들의 자제심이 무너졌다는 신호로 도 볼 수 있다. 화장품을 비롯한 주요 산업에는 이미 진입한 플 레이어들이 존재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해자를 만들어 놓았다.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형성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대규모 생산 설비를 마련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막 시장 에 진입한 기업이 기존의 강자를 이겨낼 수 있을까? 설령 운이 따른다 해도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자금이 투입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 '성장 산업 진출이라는 발표 하나만으로 주가가 급등하는 것은 이 테마에 거품이 끼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2021 년 하반기의 NFT 테마, 즉 대체 불가능한 토큰Non-Fungible Token 관련 주식의 급등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93 블록체인을 활용 해 디지털 콘텐츠에 별도의 고윳값을 부여해 세상에 단 하나밖 에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아이디어는 멋있었지만, 경쟁 자들이 뛰어들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가격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기아가 2022년 3월에 출시한 NFT 작품은 자사 디자 이너가 직접 디자인하고 구매자에게 신차 체험 기회를 주는데도 점당 가격을 40만 원대로 낮게 책정했다.
필자가 아무리 역사적인 테마주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한들 앞 으로도 테마주는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사람들의 귀에 착 달라 붙는 신기한 이름(태조이방원? BBIG?)을 만들어 낼 사람들이 넘 쳐나는 데다, 미래 전망이 밝아 끝없이 상승할 것처럼 생각되는 기업의 리스트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자문사 7공주' 혹은 'NFT 장세'가 준 교 훈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경쟁자가 일제히 공급 확대에 나서고, 신규 진입자가 나날이 늘어날 때는 테마주에서 언제든지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

- 2020년 봄, 코로나 팬데믹 발생 이후 한국 주식 시장은 격렬한 주가의 등락을 경험했다. 2020년 봄에는 KOSPI가 1,500포인트 아래로 무너졌지만, 2021년 봄에는 대망의 3,000포인트를 넘어서는 강세장을 기록했으니 말이다. 수 출 경기가 부진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 시행으로 내수 경기 마저 침체되었음에도, 세계적인 저금리 현상으로 인한 성 장주 강세 현상이 주가 상승을 견인했다. 성장주는 현재의 재무적 성과가 뛰어나지 않지만, 미래 성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간주되는 기업으로, 정부가 적극적인 경기 부양 정책을 펼칠 때 각광받는다. 그러나 2021년 이후 상황은 정반 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인플레이션 위험이 부각되는 가 운데 금리가 상승하고 주식 시장에서의 자금 조달 규모가 늘어나며 수급 여건이 악화되었던 것이다. 2020년에 세계 에서 가장 큰 폭의 주가 상승을 기록했던 한국 증시가 2022 년에는 세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 든 것을 보면, 시장의 전환점마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인식하는게 성공 투자의 핵심 요인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 강남 개발이 가능했던 또 다른 이유는 '공유수면 매립 덕분 이었다.10 60년대 후반 강남에서는 "남편이나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잦은 홍수에 시 달렸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조선총독부가 쌓은 제방이 있긴 했지만, 이 제방은 강북에 만들어졌기에 강남 지역은 항상 홍수에 시달렸다." 지금 서울 종합 운동장이 자리 잡은 잠실이 60년대에는 섬이었다. 잠실섬 북쪽에는 신천강이 흘렀고, 지금 의 석촌호수 방향으로 흐르던 강은 송파강이라고 불렸다.
한강에 이렇게 큰 섬들이 즐비했던 이유는 60년대 중반까지 한강의 강폭이 100미터에서 최대 2,000미터 안팎으로 왔다갔다 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홍수가 발생하면서 한강의 여러 모래 섬이 물에 잠기고, 둑이 없는 곳으로 강물이 범람하는 게 일상이 었다. 이렇게 물에 잠겼다 가뭄에 뭍이 되는 주인 없는 땅이 공 유수면인데, 여기에 둑을 쌓아 땅을 말리면 훌륭한 택지가 될 수 있다. 서울 강남의 대표적인 부촌인 압구정과 반포가 바로 공 유수면 매립으로 만들어졌다. 13 압구정은 세조를 도와 쿠데타를 일으킨 한명회가 지은 정자 이름에서 비롯된 곳으로, 60년대 초반에는 현재의 압구정동과 강 건너 옥수동 사이의 저자도라는 섬에 위치해 있었다. 이 섬은 풍광이 아름다워 자산가들이 별장 을 지어 놓고 즐기던 곳이었지만, 1925년 대홍수 이후 폐허가 된 채 버려진 상태였다.
현대건설은 "건설 공사용 콘크리트 제품 공장을 위한 대지조성"을 명목으로 1968년 하반기에 압구정 일대에 매립 면허를 신청했고, 1972년 12월까지 제방 및 매립 공사를 진행한 후 해당지역은 곧바로 택지로 변경되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세워졌 다. 공유수면 매립 사업은 무조건 남는 장사였기에 1970년 1월 부터 시작된 반포 매립은 현대건설 외에 삼부토건과 대림건설 등 3개의 건설사가 사업을 진행해 역시 큰 수익을 남길 수 있었다.
- 60년대 후반에 대한민국 역사상 첫 번째 부동산 붐이 발생 했는데, 이는 경제 발전 및 대규모 신도시 공급이 유발했 다. 통상적으로 공급이 확대될 때는 주택 가격이 하락하기 마련이지만, 60년대의 강남 개발 및 고속도로 건설은 부동 산 시장의 미래에 대한 낙관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 다. 더 나아가 신도시 착공에는 시간이 걸리기에 입주가 후 행적으로 진행된다는 점도 주택 가격 급등 원인으로 작용 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후에도 지속적으 로 한국 정부를 괴롭히는 요인이 된다. 공급이 주택 가격을 장기적으로는 잡을 수 있지만, 건설 초기에는 토지 보상금 을 노린 매수세뿐만 아니라 밝은 미래를 꿈꾸는 전국의 실 수요자들이 모두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 1967년 그리고 1978년 두 차례의 부동산 정점을 보면 크게 두 가지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주택 공급의 확대는 단 기적으로 더 강력한 가격 상승을 유발할 수 있다. 둘째, 주택 가 격의 급등세를 꺾은 것은 강력한 주택 시장 안정 대책 시행과 함께 경기가 나빠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0~70년대 한국 부동산 시장의 사이클을 연구한 이들에게 80년대 후반의 주택 가격 급등은 또 한 번의 기회를 제공했음이 분명했으리라 생각된다.
- 70년대 중반 시작된 강력한 부동산 상승 사이클은 경기 둔 화 및 정부의 부동산 억제 대책으로 꺾이고 말았다. 실질 금리가 마이너스 수준까지 떨어지는 가운데 대대적인 개 발 붐이 시작되며 주택 가격이 폭등하고, 이에 대응한 정부 의 강력한 억제 대책 시행 그리고 경기 악화가 주택 가격 의 급등세를 꺽었다. 이러한 '한국형 주택 시장 사이클'이 1978년에 더욱 확실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는 1990년의 부 동산 시장 3차 사이클에도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숨 가쁘게 부동산 시장 안정 대책이 발표된 끝에, 1991년부터 주택 시장이 안정세로 돌아섰다. 주택 시장 안정 대책 발표 이외에 경기 여건이 악화된 것도 주택 가격 의 급등을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89년 이후 3저 호황 이 저문 데다, 국민주택 200만호 건설 과정에서 강력한 인플레 이션이 발생한 것도 주택 가격의 급등을 억제했다. 건설 부문에서 촉발된 인플레이션은 결국 시장 금리의 상승으로 이어져, 경제성 장률을 낮추고 미래 소득 전망을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 1978년 이후 12년이 지난 1990년에 한국 부동산 가격은 또 한 번의 큰 봉우리를 만들었다. 80년대 초중반의 주택 공급 부족과 3저 호황으로 촉발된 강력한 주택 수요가 거침없는 가격의 상승을 이끌었다. 특히 전세 가격 상승이 주택 매매 가격을 끌어올리는 한국 주택 시장 특유의 현상도 이때 시 작되었다. 주택 공급과 경기(실질 금리 등) 그리고 전세 가 격의 변화가 주택 시장의 흐름을 좌우하는 일은 1997년 외 환 위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한국 부동산 시장 의 법칙이니 꼭 기억해 두면 좋을 것 같다.

- 1991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동안 한국 부동산 시장에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약세 국면이 이어졌다. 한국을 대표하는 주택 통계 작성 기관인 KB부동산에서 발표한 아파트 매매 가격 지수를 보면 1991년 평균이 33.2포인트인데, 2000년에도 30.3포 인트에 불과하다.32 반면 같은 기간 소비자 물가는 70.8% 상승했 으니 실질적인 전국 아파트 매매 가격은 거의 반토막 난 셈이다. 긴 시간에 걸쳐 부동산 가격이 꼼짝하지 못하면서 가계의 고통 은 날로 심해졌고, 미분양 주택이 급격히 늘어나는 가운데 한양 부터 우성, 신동아 등 한국을 주름잡던 건설사들이 차례대로 파 산하고 말았다. 1997년 외환 위기는 반도체 불황과 종금사의 해 외 대출 연장 실패가 주된 원인이기는 하지만, 건설 경기의 장기 불황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 결국 20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수도권과 지방의 양극화는 수요와 공급뿐만 아니라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된 중국 붐의 몰 락 그리고 혁신도시 건설 효과 소멸에서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2022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중화학 공 업의 업황이 개선되는 중이니, 2020년대에는 다시 지방 부동산 시장의 부활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식 경제로의 전 환이 가속화되는 중인데 과연 2010년 초반처럼 강력한 상승이 나타날지는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 2010년을 전후해 동남벨트를 중심으로 지방 부동산 가격 의 반등이 나타났다. 특히 보금자리 주택 공급 충격 속에 수도권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었기에 지방 부동산 시장의 호조는 더욱 관심을 끌었다. 당시 동남벨트 부동산 시장의 호조는 혁신 도시와 행정 중심 복합 도시 건설 그리고 중국 붐에 기인한다. 중국 경제 성장으로 촉발된 조선과 철강, 자동차 등 중화학 공업 제품에 대한 수요가 지방 주택 수요 를 증가시킨 데다, 혁신 도시의 건설로 촉발된 인구 이동이 심리를 개선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 흐름은 2010년대 중 반에 중국의 수요 위축과 함께 빠르게 소멸되고 말았다. 그림자 금융에 대한 규제와 공급 과잉 우려가 부각되는 가운 데 혁신도시 건설의 효과도 서서히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 부동산 시장은 강력한 가 격 상승을 경험했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저금리와 공 급 부족 그리고 임대차 3법의 효과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 결과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주요 도시 주택 가격은 소득이나 이자율에 비춰볼 때 심각한 버블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버블이 형성된다고 해서 곧바로 붕 괴되는 것은 아니지만, 부실한 기초 체력은 외부 충격에 손 쉽게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인구 감소로 '잃어버린 30년'을 보내고 있다는 일본 동경의 아파트 가격이 최근 급등세를 보이는 것처럼, 주택 시장은 어떤 단일한 지표로 설명되기 어려운 복잡한 곳이다. 2022 년에 한국 부동산 시장이 금리 상승과 정부의 강력한 규제 그리고 수출 부진으로 무너진 것처럼, 잘 나가던 시장도 환 경이 달라질 때는 언제든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행히 한국은 거대한 클러스터가 존재하 며 공급도 축소되는 중이기에 인구 감소로 인한 역풍을 잘 이겨낼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모든 지역의 부동산이 함께 상승할 거라 기대하기보다는 일자리의 증감 여부 그리고 공급 문제 등을 따져 가며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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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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