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곡가정책
고도성장기의 경제정책으로, 쌀을 일부러 저가에 팔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주식인 쌀이 저렴해야 월급을 적게 받아도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기 때문에 시행했죠.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임금 상승을 억제하는 저임 금정책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켰습니다. 식비가 오르면 생활비가 올라 저임금 을 더는 유지하기 어렵다는 논리로 저곡가정책을 폈어요. 한편 값싼 노동력을 도시로 불러올리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농사만 지어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 으면 굳이 고향을 떠나 열악한 공장으로 들어오지는 않을 테니까요. 농사를 지 을수록 빚이 늘어나기 때문에 1970년대에는 농가부채가 큰 문제였습니다. 국 회에서 식량자급률 붕괴가 저곡가정책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어요.
- 광주대단지 사건은 꽤 독특한 시위입니다. 우리나라 시위에서 찾아보기 힘든 폭력성을 띤 동시에 정치구호가 없는 생존권 시 위였죠. 당시 보수우익 세력은 광주대단지 사건을 폭력 난동이 라고 불렀고, 진보 좌익 세력은 민중항쟁이라고 불렀습니다. 정 치적 역동성이 큰 우리나라의 경우 민주화운동 이외의 시위는 풍부하게 재해석되거나 오래 주목받기 쉽지 않아요. 주류인 민 주화운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놓고 싸우기도 시간이 모자 라거든요. '8.10성남(광주대단지)민권운동'이라는 공식 명칭도 성 남시청 주도로 2021년에야 결정되었을 정도입니다.
으레 그렇듯 시위 주동자들이 경찰서에 끌려가서 간첩으로 몰려 고문받기도 했지만, 시위대의 요구는 시위 이후 모두 관철 됩니다. 요구 조건은 1 토지 가격을 평당 1,500원 이하로 인하 해줄 것, 2 총대금을 10년 동안 매년 나눠 갚게 해줄 것, 3 향후 5년간 각종 세금을 면제해줄 것, 4 영세민 취로사업(공공근로) 일자리를 제공해줄 것, 5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한 환경을 개선 할 구호 대책을 세울 것 등이었습니다.
요구 조건에 따라 정부는 1974년과 1976년 성남에 산업공단 세 곳을 만듭니다. 서울 성수동에 있던 공장들이 많이 이전해 왔죠. 도시 자급자족을 위해 독자적인 산업단지를 세우려는 성 남시의 노력은 이때부터 시작된 도시 특성이에요. 정부의 부당 한 조치에 반발해서 개선을 이뤄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인 만큼,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열악한 노동 환경도 참지 않았습니다.
- 1980년대 초반 성남공단은 서울 구로공단, 인천공단과 함께 수 도권 노동운동의 3대 거점으로 불렸어요. 이때 성남공단에서 노 동운동을 주도한 성남노련이 나중에 우리가 아는 경기동부연합 이 됩니다. 동시에 1968년부터 계속된 도시 개발은 폭력조직이 둥지를 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합니다. 2020년대까지도 조직 이 름이 언론에 오르내렸던 성남 국제마피아파는 1970년대부터 모 란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해요.
1973년 7월, 경기도 성남출장소가 경기도 성남시로 승격하면 서 상권이 발달합니다. 수도권 폭력조직 입장에서는 여기가 바 로 새로운 건축물과 새로운 유흥업소가 들어서는 블루오션이었 어요. 1980년대 후반에는 도시 개발에 따라 수십 개의 폭력조직 이 생겨났다는 보도가 있었죠. 물론 고도성장에 따라 전국에서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됐기 때문에 폭력조직의 성행은 성남뿐 아니라 거의 모든 도시의 문제였습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할 만큼, 그리고 조직폭력배와 정치권의 유착이 우리나라 영화의 클리셰가 될 만큼 큰 문제 말이에요. '천당 위에 분당, 분당 위에 안남!'이라는 영화 대사 한 마디에 이렇게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1960년대 정부의 저곡가 정책이 나비효과를 부르고 다시 나비효과를 불러서 오늘날의 성 남이 탄생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가난해지니 사람들 이 농촌을 떠나 서울로 와서 일자리를 찾았고, 일자리를 찾다 보 니 살 곳이 없어서 무허가 판자촌을 지었고, 무허가 판자촌이 문 제가 되니 정부가 이를 철거하고 사람들을 황무지로 이주시켰고, 철거 및 이주 과정의 부당함에 맞서 저항하는 과정에서 성남 시 특유의 거친 정체성이 생겼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의 성남은 도시 안의 산업단지 성격과 높아진 도시 소득, 서울보 다 비싼 아파트를 가진 도시로 자리 잡았습니다.
- 강남을 서울의 중심으로 만든 정책이 북한과의 전쟁준비에서 시작됐다면 믿으시겠어요?
현 강남지역은 1962년 12월까지만 해도 행정구역상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시흥과 경기도 광주였습니다. 정부가 강남지역을 서울로 편입하고 개발 계획을 세운 것은 1 이촌향도로 인한 서 울 인구 급증, 2 한강대교 폭파라는 한국전쟁 트라우마를 자극 한 북한 무장공비 출몰, 3 영남권 공업단지 경제개발이라는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어요. 1970년대와 1980년대 정권이 두 번 바 뀌는 사이 강남지역을 효과적으로 개발해 낸 도구 역시 세 가지 였는데, 바로 교육과 교통과 아파트였습니다.
- 명문고 강남 이전 계획이 처음 발표된 1972년, 명문고와 명문 고 동창들의 사회적 반발은 어마어마했습니다. 하지만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 정부를 상대로 오래 저항하기 어렵지요. 결국 경기 고를 시작으로 10여 개의 명문고가 지금의 강남 3구로 오게 돼 요. 이런 흐름은 서울올림픽 직후인 1989년까지 계속됐습니다. 1974년, 서울에서는 고교평준화 정책으로 고등학교 입시가 완 전히 폐지되고 11개 학군으로 나눠 주거지 근처 고등학교에 배 정하는 학군제가 시행됩니다. 8학군이라는 번호를 부여받은 강 남 학군의 인기는 하늘을 찌릅니다. 이미 강남 3구에 명문고가 몰려 있는데, 학군제에서는 강남에 살아야만 8학군에 배정받을 수가 있으니까요.
명문고 이전과 함께 등장한 정책이 바로 아파트 건설입니다. 학생들과 그 가족을 불렀으면 살 집도 마련해줘야죠. 1974년에 는 현 동작대교 남단에 위치한 매립지에 반포주공아파트가 완공 됩니다. 1976년에는 아파트 말고 다른 건물은 지을 수 없는 아파 트지구제도가 신설돼 반포, 압구정, 청담, 도곡 등 영동지구(지금 의 강남)가 아파트지구로 지정됩니다. 여기에 한신 · 대림·한양·경남우성 아파트가 들어서지요. 은마아파트(1978)도 이 시기 강남에 완공됩니다. 당시 영동지구 부동산을 구매할 때는 양도소득 세나 취득세 같은 세금 면제 혜택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건설된다는 건 다른 인프라도 따라온다 는 이야기죠. 단독주택이나 소규모 연립주택과 달리 아파트단지 는 도로 계획과 상권 형성이 무척 편리합니다. 동시에 사대문 안 구도심인 종로구·중구·서대문구에는 결혼식장, 호텔, 술집, 백 화점, 도매시장, 제조업체, 대학 및 학원의 신설과 증설을 금지합 니다. 도로 신설과 확장도 금지했고요.
게다가 중동에서 벌어온 돈까지 아파트 개발에 투기 자본으 로 밀려들어 오면서 강북은 쇠퇴하고 강남이 무서운 속도로 발 전하기 시작합니다. 1963~1979년 사이 중구의 땅값이 20배 오 르는 동안 강남구의 땅값은 1,000배 이상 올랐답니다.
- 경기도 시흥군과 광주군은 한강만 건너면 바로 서울과 연결 되는 지역이었습니다. 정부는 한강에 다리를 놓고 서울을 확장 해 인구를 분산시키기로 합니다. 1962년, 일제강점기부터 번화 했던 영등포의 동쪽이라서 '영동지구'라 불리던 경기도 시흥군 과 광주군이 서울로 편입됩니다. 1965년에는 강북과 (영등포를 거 쳐) 영동지구를 잇는 다리 중 양화대교가, 1969년에는 한남대교 가 완공됐어요. 한남대교가 완공되면서 영동지구 개발이 본격적 으로 시작됩니다.
당시 영동지구가 얼마나 낙후되어 있었는지는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수기에 잘 나타납니다. 농업이 국가 경제를 지탱하던 시기인데 뭘 심어도 안 자라는 땅이라든가, 갈대밭이 고 뻘밭이라 아주 개흙이라고 투덜거리는 내용(대치동)이 많아 요. 일본인들이 뽕나무를 심어서 누에를 치고, 누에에서 나온 생 사로 스타킹을 짜서 미국에 수출했다는 내용(잠원동)도 있습니 다. 서울 강북 개발이 한창일 때 남쪽에서 일자리를 찾아 인부들이 올라왔는데, 싼값에 셋방을 찾는 인부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 었다든가(청담동) 강남까지 개발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한동안 룸 살롱이나 다방뿐이어서 '색시들이 세를 내고 사는 집들이 몰려 있었다는 내용(신사동)도 있지요.
- 이제 우리는 1970년부터 오늘날까지 50년 넘는 강남 발전의 역사를 이런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거예요. 경부고속도로가 강남에서 출발하거나 도착하기 때문에 물건이 귀하던 시절 강남 에 모든 물건이 모여들고, 또 물건이 모여드니까 회사도 모여들 게 됩니다. 회사가 모여드니까 사람도 모여들고, 사람이 모여드 니까 정부가 자꾸 인프라를 짓고, 인프라가 지어지니까 부동산 값이 더욱더 상승 자극을 받는다고요.
물론 강남의 부동산 투기가 경부고속도로 준공과 연관된 방 식은 조금 더 직접적입니다. 앞에서 명문고 이전도, 아파트지구 지정도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이 아니라면 어려웠을 거라고 했 죠? 이 영동지구 구획정리는 경부고속도로 준공이 아니면 불가 능한 일이었습니다.
- 고속도로를 준공하려면 정부는 도로를 놓을 땅을 마련해야 해요. 보통 땅 소유자에게 보상금을 주고 땅을 수용하지요. '토지 보상'이라고 하는데, 1960년대에는 정부도 돈이 없었습니다. 그 래서 생각해 낸 기가 막힌 방법이 바로 체비지 (替費地)예요. 특 정구역을 개발할 때 정부 돈이 아니라 원래 토지 보유자의 돈으 로 개발 비용을 마련하는 거죠. 그럼 토지 보유자는 그 돈을 어 디서 만드냐 하면 개발 예정으로 지정된 땅 일부를 팔게 됩니다. 그 땅이 체비지예요. 이해를 돕기 위해 쉬운 예를 들어볼게요.
영동지구에서는 체비지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땅값이 오르면 오를수록 체비지를 비싸게 팔 수 있으므로 체비지를 나눠 가진 서울시와 땅 주인 모두 땅값이 크게 오르기를 바랐어요. 이런 바람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당장 현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체비지를 활용해 공공사업 재원을 마련했다면 정말 영리한 방식이라는 칭찬을 받아야 해요.
문제는 당시 정권과 서울시에서 체비지를 이용해 조직적인 투기 행각을 벌였다는 거예요. 1970년 1월, 서울시장은 헬기로 영동지구를 순찰하면서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윤진우를 대동했 어요. 도시계획과장은 돈이 될 만한 곳을 물색해 청와대 돈 12억 8,000만 원으로 삼성동 일대 약 25만 평을 사들였습니다. 이 땅 은 다음 해 일부만 남기고 되팔아 18억 원의 차익을 얻었는데, 당시 18억 원이면 남산2호터널 공사에 들어간 비용과 맞먹습니 다. 물론 이 돈은 정치자금으로 사용됐지요. 민간인의 투기를 막 을 대책도 없어서 오늘날 강남 일대 투기 과열의 문을 열어젖히기도 했어요.
- 그린벨트가 서울 땅값이랑 집값을 올려줬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린벨트 지정이 서울을 비롯해 그린벨트에 감싸인 도시 땅값을 크게 올리고, 아파트 선호 성향을 강화했다는 연구 결과가 많습니다. 도시 확장을 엄격하게 제한한 상황에서 한정 된 너비에 더 많은 주택을 건설하려면 역시 아파트가 답이죠. 수 요는 끝없이 늘어나는 반면 공급에는 제한선이 분명히 그어져 있으니, 그만큼 가격이 오르게 되고요. 그리고 그린벨트가 도시 근교에 녹지를 유지해주기도 하니 도시를 쾌적하게 만들어 값을 올리기도 한답니다. 서울은 여기에 하나 더 얹었습니다. 바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에요.
- 경부고속도로를 놓으면서 서울 강남을 개발할 때 정부는 민 간 소유 땅을 모두 사들일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체비지라는 개념을 도입했다고 앞에서 말했죠. 체비지가 제 몫을 하려면 체 비지로 지정된 땅을 누군가가 사줘야 합니다. 서울 외곽이 그린 벨트로 묶였기 때문에 어떤 부동산회사든 서울을 더 개발하고 싶다면 체비지를 사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린벨트가 지정된 다른 대도시도 마찬가지죠. 도시를 개발하고 싶다면 외곽으로 확장하는 게 아니라 체비지를 사야 하고, 민간 자본 사이에서 체비지 매매가 일어날수록 정부가 개발하고 싶었 던 지역의 땅값은 올라갑니다.
1971년부터 1997년까지 그린벨트로 지정된 지역은 전국 국토 면적의 5.4%인 5,397km2였습니다. 그린벨트는 외환위기 발 생 직후인 1998년 부분 해제됩니다. 특히 수도권을 중심으로 그 린벨트가 풀리기 시작했어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건설산업을 활성화하고, 신도시를 개발해 서울의 인구과밀과 지나친 부동산 가격 상승세를 막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린벨트가 해제 되고 신도시가 들어서면 그 과정에서 토지 수용과 보상이 일어나면서 또 부동산 시장이 커지게 되지요. 2000년대 이후에는 그린벨트가 꾸준히 축소되는 추세입니다. 그린벨트가 해제되면 당연히 개발이 뒤따르고요. 그린벨트가 본의 아니게 대도시 부동산 개발의 중심에 서게 된 거죠.
- 2020년대 들어서면서 전세가 소멸할 거라는 전망이 나왔는 데, 2010년대와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다들 빚을 내서 집 을 사는 바람에 가계 부채가 빠르게 늘어나 우리나라 경제의 건 전성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터져 나간 유동성도 가계 부채의 폭발적 증가에 한 술 얹었어요. 그래 서 정부는 웬만하면 주택 관련 대출을 내주지 않는 쪽으로 방향 을 설정했지요. 그러면 갭투자도 어려워지고 전세를 새로 구하기도 어려워집니다. 대출을 받을 수는 있어도 금리 상승기라 이자가 부담스러우니 차라리 월세를 구하기도 하지요.
어쨌든 전세 수난 시대라는 이야기인데, 앞으로도 월세 거래 비중이 늘어나고 전세 거래 비중은 줄어들겠지만 전세가 단기 간에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예요. 전세가 사라지려면 현재 전세를 주고 있는 모든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전세자금을 돌려줘 야 하는데, 전세보증금으로 받은 목돈들 대부분은 갭투자에 활용되느라 어딘가 묶여 있을 테니 말이에요.

- 알맞게 낳아서 훌륭하게 기르자(1961~1965)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1962)
내 힘으로 피임하여 자랑스런 부모되자(1970~) 
나 한사람 빠진 통계 나라살림 그르친다(1970~)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1973~) 
하나 낳아 젊게 살고 좁은 땅 넓게 살자(1980~) 
낳을 생각 하기 전에 키울 생각 먼저 하자(1980~)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1983) 
무서운 핵폭발, 더 무서운 인구폭발(1983)
숫자가 보여주는 현실과 달리 1980년대에는 아직 인구 증가에 대한 공포가 사회에 만연했습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4,000만 명을 넘긴 1983년 7월 신문 보도를 보면 1990년에는 인구가 4,400만 명이 되고 2000년에는 5,000만 명을 넘어서고 2050년 에는 무려 6,100만 명이 되기 때문에, 땅덩어리는 좁고 부존자원 도 없는 처지에 이렇게 과한 인구라니 답답한 마음이 든다는 비 관이 드러나 있기도 해요. 인구 증가 억제를 위해 정부에 강력한 대책을 요구해야 한다는 논조도 등장합니다. 출산율이 낮아지고 는 있으나 가임여성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평균수명이 길어져 "2050년 6,130만 명에 이를 때까지 계속 불어난다는 우울한 예고"라는 문장을 현시점에서 보니 좀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요. 또 다른 보도를 살펴볼게요. 당시 우리나라는 국토 평균 면적 으로 따졌을 때 km2당 404명이 살고 있었고(세계 3위), 산지를 제 외한 가용면적만 따지면 km2당 평균 1,198명으로 인구밀도가 세 계 최고라고 했어요. 높은 인구밀집도에 따라 극심한 생존경쟁 이 벌어지고, 이에 따라 국민의 정신적 불안이 커질 것으로 우려 된다고 했죠. 무척 맞는 말이긴 한데, 2020년 기준 서울의 인구 밀도는 km2당 무려 1만 5,839명이거든요. 부산은 km2당 4,389명, 경기도는 km2당 1,326명이 살고요.
- 산업화가 완료된 국가는 보통 출산율이 높지 않습니다. 자녀 가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는 노동력이기보다는 투자의 대상이기 때문이에요." 자녀가 일종의 '사치재'가 되는 거죠. 하지만 우리 나라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인구 변화 를 겪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생활 수준을 개선하고 구직난 을 해결하기 위해 산아제한을 실시했고, 고도의 경제발전에 성 공했으나 출산을 장려해야 할 시점에 가족 친화적인 분위기를 도입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도시-농촌 격차와 지방 소멸에 시달 리고 있습니다. 인구가 줄어드는 것도 문제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구조 변화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 훨씬 큰 문제예요. 변 화 속도가 너무 빠르면 사회도 시장도 변화에 적응할 시간이 부 족해 충격이 흡수되지 않습니다.
1980년대까지 출생아 감소에 큰 역할을 한 사회현상이 초혼 연령 상승이었다는 말 기억하세요? 인구 증감은 어쩔 수 없이 큰 부분 가임기 여성에 달렸습니다. 우리나라처럼 혼외출산율이 낮은 국가에서는 여성의 혼인 연령이 높아지면 출산가능인구가 자연스레 줄어듭니다. 가임기 여성의 수가 줄어들면 합계출산율 이 같아도 출생아는 줄어들지요. 그런데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여성 태아를 골라 임신중절을 했기 때문에 이후 가임기 여 성의 모수 자체가 적어졌어요. 게다가 이제는 늦게 결혼하거나 아예 결혼하지 않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 편이 사 회적 경쟁에서 유리해진 시대가 와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녀를 갖게 하려면 가족정책과 사회 분위기 가 도와주어야 하는데, 우리나라가 출산과 육아에 친화적인 상 황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1980년대에 그토록 걱정하던 인구 과밀에 따른 사회적 경쟁 과열은 부존자원 부족과 인구과잉이 아니라 수도권 집중 현상으로 인해 심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 최저임금제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노동운동의 중심 이슈 중 하나였습니다. 노동계와 사회의 요구에도 정부는 최저임금을 부활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임금이 인상되면 저임금에 기 초하고 있는 기업경쟁력이 약해지고 물가가 오른다고 생각했으 니까요. 하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는 박정희 정부도 임금이 지 나치게 적다는 점을 인정하고 임금 인상 기조를 마련합니다. 그 러나 1980년대 들어 전두환 정권은 다시 강력한 임금통제 정책 을 시행합니다. 결국 최저임금제도는 1986년, 법정근로시간 주 44시간(연장근로 미포함)은 1989년, 이렇게 민주화를 전후해서야 도입됩니다. 비로소 헌법상 기본권으로서 우리 피부에 와닿는 노동권이 마련된 거지요.
- 제도 하나를 두고 국가와 정부, 사람을 바꿔가며 오랫동안 실 랑이가 이어져 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요. 최저임금에 매달 려 사는 사람이 많기에 최저임금을 올려야만 많은 사람의 생계 가 이어진다는 노동계, 최저임금을 무리하게 올리면 영세 자영 업자들이 한계에 내몰리고 결국 전체 고용이 줄어든다는 기업계 의 입장이 매년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최근 수년간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영향률은 최대 20~25%로 추정됐습니다(최저임금위원회). 쉽게 말해 최저임금보다 적게 받 는 사람이 전체 임금근로자 네다섯 명 중 한 명꼴이라는 뜻이에 요. 최저임금 영향률만 보면 여전히 저임금 흐름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에요.
-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게요.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법률을 보 면 노동이 근로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동법에는 임금채권보장법, 근로복지기본법, 고용정책기본법, 최저임금법, 근로기준법 등이 포함되거든요. 결국, 고용주에게 직접 고용되 어 임금을 받고 움직일 때는 근로가 자연스럽고, 돈을 받거나 안 받거나 내가 일을 하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노동이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일을 노동이라고 부를지, 근로라고 부를지 결정하는 것이 현실에서 법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혼 자 일하는 영세업체 사장님을 근로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프 로젝트별 단기 계약을 맺은 프리랜서는 어떨까요? 만약 프리랜 서에게 근로성이 인정된다는 법적 판결이 나오면, 그 프리랜서와 계약을 맺은 상대방은 바로 고용주가 되는 셈입니다. 고용주는 근로자에게 법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편의가 많아요. 하지만 근로성 이 인정되지 않는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따지기 시작하니까 머리가 복잡해지죠? 평소에 이런 주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노동법이 제정된 해가 1953년이고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된 해가 1987년, 우리나라에 서 가장 큰 노동조합 두 개 중 하나인 민주노총이 합법노조가 되 고 교원노조법이 제정된 해가 각각 1997년과 1999년이에요. 다 시 말해 이 주제는 민주화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사회적인 논 의와 합의 과정을 통해 한 차례 정리가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0년대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대체 어디부 터가 근로이고 어디까지가 노동인 건지, 다시 헷갈리게 되어버 렸습니다. 이런 키워드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에요.
공유경제, 긱 이코노미, 라이더, 플랫폼, 온 디맨드, 크리에이터, 사이드잡, N잡러, 부캐.
- 1997년 이후 IMF가 구제금융 제공 조건으로 요구한 구조조 정중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 요건 완화, 그리고 민간 직업소 개 사업 및 임시고용소개 사업 허용이 바로 이런 이중구조의 기 원이었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통하고 있어요. 위기를 겪으면서 기업은 비용을 절감해야 했고, 인건비 절감을 위해 정규직을 대 량 해고합니다. 그런데 정규직이었던 자리에 인력을 다시 채용 할 때는 비정규직으로 채용하죠. 정규직 대량 해고와 빠른 회복, 비정규직 대량 채용이 일어난 겁니다. 이런 변화는 주로 영세기 업과 저학력자. 청년·여성을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이 런 양극화가 IMF 체제가 도입한 '노동유연화'에서 시작되었다 고 생각하는데, 이건 오해입니다.
- 2010년 IMF 총재가 외환위기 당시 아시아 국가들에게 필요 이상의 고통을 요구한 부분이 있다고 사과했듯이, 외환위기와 IMF 체제가 양극화를 심각하게 악화시키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비정규직 증가나 노동 시장 이중구조의 모습은 외환위기 이전인 1990년대 초중반부터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여기에 따른 기업과 노동조합 사이의 정치적 갈등도 외환위기 직전에 절정을 맞았습니다. 친인척 비리와 함께 김영삼 대통령의 레임덕을 불 러온 사건 중 하나, 1996년 노동법 날치기 사건입니다.
- 외환위기 직전부터 임금 불평등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 극화가 진행되며 더욱 심화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여기 대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경제의 밑그림 자체를 바꿔놓은 사건이 바로 외환위기예요. 당시 우리나라 고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중소기업은 일단 대량 해고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에는 인건비를 들여 사람을 채용하는 대신 자동화에 투자했습니다.
- 중소기업의 산업구조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 중심의 자본 집약적 산업으로 고도화되면서 이런 추세는 더욱 빨라졌습니다. 새로 채용하는 인력은 1996~1997년의 노동법에 근거해 비정규 직을 늘렸지요. 수출을 주로 하는 대기업들도 적극적으로 자동 화에 투자하고 하도급을 확대하며 공장을 해외로 옮겨 저렴한 노동력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경영 전략을 세웁니다. 이러면 경 제성장을 해도 좋은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아요. 고소득자의 비 율도 줄어들겠죠.
노동법 날치기로 노동계만큼이나 타격을 받은 쪽이 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신한국당이에요. 2011년 12월, 당시 한나라 당 최고위원이던 홍준표는 한나라당의 2011년도 예산안 날치기를 비판하면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1996년 12월 26일 아침에 노동법을 기습 처리한 뒤 당시 우리는 승리했다고 양지탕에 가서 축배를 들었는데 이것이 YS 정권 몰 락의 신호탄이 됐고 곧바로 한보 사건이 터지고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50년 보수 정권을 진보에 넘겼다.
김영삼은 당시로부터 약 20년 전인 1979년 YH 여성 노동자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에서 노동자의 편을 들어 군사독재 세력에 맞선 덕분에 정치적 거물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노동법을 날치기했으니 역풍이 더욱 거셌을지도 모르죠.
- 1970년대 후반에는 국가 주도 경제개발이 한계에 부딪힙니다. 경제도 클 만큼 커져서, 이제는 기업의 개별적인 경쟁력과 개개 인의 소비력도 중요해진 시점이었어요. 수출이 아무리 늘어나도 무역수지 적자 폭이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났어요. 노동력을 제 외한 다른 생산 요소는 모조리 수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소재 도 부품도 장비도 수입해서 조립·가공해 수출하니까 수출이 늘 어날수록 수입도 늘어나는 거예요. 기술도 매년 사용료를 주고 빌려 왔으니까요. 이걸 수입대체 공업화와 수출지향 전략이라고 하는데, 환율을 강제로 낮춰놓고 임금도 억누르지 않으면 지속 이 불가능한 경제 전략입니다. 아무리 성공적이라 해도 영원히 지속 가능한 전략은 아니죠.
- 경제 규모가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내수도 키우고 기술 독립도 해야 산업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일단 사람들의 생활 수준과 학력 수준이 받쳐줘야 하지 않겠어 요? 197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는 바로 그 시기를 지나가고 있었 던 거예요. 낮은 임금에도 기꺼이 일하러 도시로 이동할 농촌 인 구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2차 오일쇼크까지 터 져 물가가 치솟으며 누적된 불만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부 산과 마산처럼 경공업 공장이 많았던 지역은 중소기업들이 흔들 리면서 민심이 나빠졌어요. 여기에 부동산 가격까지 폭등한지라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은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을 버립니다. 즉 1978년에 치른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과 무소속이 민 주공화당을 이기고 부산과 경남에서 4석이나 더 가져가죠.
- 1979년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가 됩니다. 이때 앞서도 언급했 던 YH무역 사건이 터지는데요, 이 사건은 YH무역의 부당 행 위에 반발한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면서 시작됐습니다. YH무역은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회사 문을 닫아버리려고 했 어요. 일자리를 잃기 싫었던 사람들은 공장에서 농성을 벌이며 신민당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김영삼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서 YH무역 사람들에게 임시로 지낼 수 있도록 신민당사를 내주기 도 해요.
정부는 이 사건을 강경 진압했습니다.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 가 나오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도 폭행을 당해 골절상을 입을 정 도였어요. 파업의 배후라며 의원직마저 박탈당했고요. 다행히 미국 국무부가 나서서 우리나라 정부를 뜯어말리는 바람에 사태가 더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 197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 경제는 외국 차관 도입과 정책금융,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외화 자본을 축적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중공업 대기업이 수출경쟁력을 갖추게 됩니다. 이전에 경공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노동력 제공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받았으면 좋았겠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 기업 사이의 차이는 이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했고, 커다란 흐름 은 변하지 않았거든요. 1987년 민주화까지는 저임금 장시간 근 로 정책이 지속되었고, 웬만한 노조 활동은 계속 불법이었습니 다. 따라서 노동운동도 노동자 개인이 광범위하게 활동할 수 있 는 산업별 노조에서 업장에 묶이기 쉬운 기업별 노조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어요. 탄압에 버틸 수 있던 노조는 그나마 대 기업 노조뿐이었죠.
민주화 이후, 노조는 근속연수에 따라 직급과 임금이 오르는 연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어요. 기업 노조로서는 조합원의 직업 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중요한 일이었으나, 외부적으로 는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과 격차를 벌리는 방향이었습니다. 모 든 기업이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었다면 괜찮았을 테지만 고른 성장과 분배라는 면에서 우리나라의 장래는 썩 밝지 못했지요. 10년 후인 1997년, 우리는 무리한 차관 도입과 대기업의 양적 부풀리기가 불러온 외환위기를 맞았습니다. 민주화 이후 줄어들 던 임금 불평등은 외환위기로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고, 특히 기업 규모별 임금 격차가 크게 벌어졌습니다. 고용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성장할 시간은 너무 나도 짧았어요.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노동 시 장 이중구조가 탄생한 순간이에요.
노동 시장 이중구조란 노동 시장이 임금이나 고용안정성 등 여러 가지 근로조건에서 큰 차이가 나는 두 개의 세상으로 나뉘 어 있다는 뜻이에요. 노조가 있는 대기업 정규직이 1차 노동 시 장을, 노조가 없을 가능성이 큰 대기업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정 규직, 중소기업 비정규직이 묶여 2차 노동 시장을 이룹니다. 1차 노동시장과 2차 노동 시장 간 이동은 자유롭지 못해요.
노조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실증 연구마다 다르지만 노조의 존재가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 런데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은 전체 회사의 10~14% 정도이기 때문에 중소기업 대부분은 노조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다시 말 해 노동자 대부분에게 노조 가입 선택권이 없다는 거예요. 노조 가 있어서 무엇이 어떻게 좋고, 무엇이 얼마나 나쁜지를 따지기 이전에 도사린 문제예요.
-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8월 12일 오후 8시를 기해 대통령 긴급 재정경제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습니다. 원래대로 라면 입법권을 가진 국회에서 여당과 야당이 논의를 통해 법안 을 상정하고 시행령을 만드는 등의 절차를 거치게 되죠. 하지만 금융실명제는 이전에 논의를 많이 했던 데다, 국민 찬성 여론도 높았거든요.
부정부패가 원체 심하다 보니 금융실명제는 금융개혁을 넘어 사회개혁에 가까웠습니다. 김영삼은 대선 공약에 금융실명제를 포함시킬 만큼 강력한 정책 의지를 갖고 있었어요. 다만 언제, 어떻게 실시할지는 비밀로 하고 있다가 한 달 보름 만에 후다닥 준비해서 실시하도록 합니다. 재무부와 KDI가 대치동 휘문고등 학교 앞 빌딩과 과천 시내 주공아파트에 비밀 작업실까지 마련 해가며 첩보작전 하듯 정책을 설계한 뒷이야기들을 찾아보면 굉장히 재미있어요.
이렇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때, 그리고 정기국회가 개최 되기도 전에 긴급명령권을 행사해 빠르게 실시한 덕분에 행정 부며 정치권, 재계에까지 널리 존재하는 반대 세력의 저항을 넘 어설 수 있었다고 해요. 아마 정보가 샜으면 어려웠겠죠. 우리와 여러모로 비슷한 사회구조를 가진 일본만 해도 아직도 비실명제 를 유지하고 있어요. 개혁을 시도했다가 실패했거든요.
- 거대한 지하경제의 원인으로 지목돼 왔던 비실명제가 이렇게 사라집니다. 실상을 까보니 비실명거래는 전체 금융 거래자의 단 2%가 저지르던 관행이었어요. 그동안 2%의 목소리가 나머 지 98%보다 컸던 셈입니다. 금융 시장 혼란은 1년 안에 수습됐고 실명거래는 자연스러운 관행으로 정착됐습니다. 그간 금융전산화가 진전되어 기술적 여건이 뒷받침해 준 것은 덤입니다. 다 만, 우리나라의 금융실명제는 자금세탁 방지 기능이 다소 약해 요. 일단 금융실명제 자체에는 차명 계좌를 금지하는 조항이 없 습니다. 차명 계좌, 즉 실사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 리거나 도용해 만드는 대포통장은 2014년에야 금지됩니다. 그 전까지는 여러 대기업이 차명 계좌를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하 거나 불법적인 거래를 행하며 문제를 일으켰어요. 금융위원회 도 주민등록상 실명으로 개설된 계좌는 차명이라고 해도 금융 실명제에 따른 비실명이 아니어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 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만든 통장이라도 일단 그 이름이 누군가의 실명이기만 하면 괜찮았습니다. 그러니까 1993년의 금융실명제 실시는 정말 첫걸음이었을 뿐이죠. 하지만 시작이 반이란 말은 언제나 유효한 것 같아요. 방향성이 분명해지는 거 잖아요.

- 은행이 대출 돌려막기를 하고, 경영 상태를 공시할 때 허위 정 보를 공시하고, 수사를 못하도록 정치권에 로비하는 등 부정부 패가 만연했어요. 그 와중에 대출을 가장 많이 해준 회사들이 제 때 원리금을 갚지 못하게 됐죠. 저축은행은 높은 이자를 받고 건 설사를 위주로 대출을 해줬거든요.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이라고, 아파트 한 단지 짓는 프 로젝트, 지하철 몇 구간 건설하는 프로젝트, 한강 다리 하나 만드 는 프로젝트 등 건설 프로젝트에 비싼 이자로 대출을 해주는 거 예요. 그런데 2008년에 세계 금융위기가 터졌잖아요. 그 뒤로 부동산을 포함해 세계 경기가 침체됩니다. 저축은행의 PF도 건설사의 부도로 이자도 제대로 못 받게 되죠. 그렇게 2011년, 원래 안 좋았던 경영 상태와 PF 부실화가 지옥의 이름으로 합체합니다.
사실 이렇게 경영이 부실하면 한국은행이나 금융감독원, 금 융위원회가 감독해서 걸러내야 해요. 현실은 비루했죠. 감독기관들이 분식회계도 못 알아채, 정밀검사를 했다고 하는데도 뭐가 잘못됐는지 잡아내지도 못해. 이 과정에서 금융감독원 출신 검사가 장부조작을 도와주기까지 했다고 해, 뱅크런이 벌어지고 있을 때는 일반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은행 문을 막고 정치인이 나 대주주, 임직원 친인척부터 현금을 빼가게 해. 정부와 기업 의 부정부패가 화려한 꽃놀이를 벌이고 있었던 거죠.

-  계는 제도권 금융에 접근할 수 없는 여성들 의 사금융 조직이었는데, 1960년대까지는 계의 자금 동원력과 정교함이 제도권 은행보다 뛰어났습니다. 당시 산업은행 조사에 의하면 부산 시내 상공업자금의 약 70%가계와 기업용 계인 무 진(無盡)을 통해 조달됐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소기업 다니는 계주 김 대리에게 대기업이 연 리 50%를 줘가면서 사채를 빌려 쓰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 습니다. 이러다 보니 기업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는 전문 사금융 이 생깁니다. 기업 상대 사채업자는 대개 옛날 경찰 간부라든가 일제강점기에 군수나 면장을 지낸 지역 유지라든가 하는 토호인 데, 개발도상국이란 대개 학연·지연·혈연이 시스템을 대신하는 인맥 천국이죠. 금융회사가 돈이 필요해 찾아온 기업에게 아는 기업 사채업자를 연결해 주겠다며 '커미션'을 받고 소개해 줄 정 도가 됩니다. '삼거리투자금융 모 지점이 과장이 소개해 줬다고 하면 그분이 사정 잘 봐주실 거야.' 다른 금융회사뿐 아니라 은 행에서도 벌어지는 일이었어요.
언제나 그렇듯이 사채는 세금을 안 내니까 탈세도 문제지만 일단 이자율이 너무 높아서 사고 나기 쉽습니다. 아무리 기업이 제대로 된 법이 없어 회색 지대에서 민간인들끼리 돈을 주고 받은 걸 정부가 개입해서 마음대로 조정했다는 건, 사실 민주주 의 시장경제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독재 정권이니 까 할 수 있었던 일종의 국가폭력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고된 금액만 당시 통화량의 80%나 됐던, 시중은행이 갖고 있 던 총잔고의 절반이나 되는 금액(5,000억 원 이상 추정)의 고리 사 채를 그냥 내버려 뒀어야 할까요? 우리나라 경제사를 평가할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런 데에 있습니다.
거시적으로 옳은 방향이고 결과적으로 성공했으니까 정당했 던 것 아니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아니죠.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이자로 생활비를 감당하고 있었는데, 정부가 갑자기 3년간은 이 자도 원금도 받을 생각 하지 말라는 바람에 생활이 어려워지거나 거리로 나앉은 소액 투자자들이 많았으니까요. 신고된 사채 건수의 약 90%가 300만원 미만 소액 채권자들의 사채였다고 해 요. 사채를 빌려 쓴 기업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으니, 기업 이 서민의 돈을 떼어먹고 달아났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녜요.
- 어쨌든 8.3 사채동결조치는 대기업 연쇄 부도를 막고 떨어지 던 경제성장률을 다시 끌어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해 당 조치 이후 저축은행(상호신용금고)에 이어 신용협동조합, 마 을금고 같은 단기금융회사가 생기면서 제도권 금융이 다양해졌고요.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채 시장은 다시금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오일쇼크라는 외부적 충격이 컸기 때문에 말이죠. 은행과 사채업자는 외환위기 직전까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어요. 사채업자들은 단자회사(투자금융회사)라는 합법적이 지만 원래 하던 사채업과 다를 바 없는 금융회사를 차립니다. 은 행은 정부로부터 저금리를 강요받았기 때문에 수익을 내기 위 해 '꺾기'를 하는데, 실제로 내주는 돈을 명목상 대출금보다 적 게 주는 거예요. 1조를 대출받으면 7천억 원만 주고, 실제로 7천 억 원도 현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음으로 줍니다. 그 어음을 들고 단자회사로 가면 단자회사에서 수수료를 떼고 현금으로 바 줬습니다. 이 단자회사가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된 종금사 예요. 이처럼 '꺾기' 과정에서 돈세탁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채업자들이 합법적으로 기업의 돈을 갈취할 수 있었습니다.

- 한진해운의 갑작스러운 파산은 세계적인 물류대란을 불러왔 어요. 세계의 어느 누가 한국 정부가 고작 4,000억 원을 지원해 주지 않아 회사를 그냥 망하게 둘 거라고 예측했겠어요? 그때 한진해운이 운반하던 화물들이 전 세계 어느 항구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유령선처럼 바다를 떠도는 모습이 충격적인 장면으로 남 아 있어요. 배에 실린 화물 주인 수만 2,000명에 달하던 한진 그 리스호는 열흘이나 공해를 맴돌았습니다.
이후 세계의 화물 주인들은 우리나라 선사에 보이콧을 선언 하기도 합니다. 한국 해운, 못 믿겠다는 거죠. 2022년 초에는 중국 등 다른 나라 선사들이 우리나라 물건을 잘 실어주지 않아 수출용 컨테이너가 대부분 취소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해외 영업망은 붕괴했고 한진해운 소유의 알짜배기 물류 인프라는 해 외 글로벌 선사들에 헐값에 팔려나갔어요. 우리나라 해운업계가 몰락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한진해운 을 왜 파산하도록 놔뒀는지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다 음 정부가 또 다른 국적 선사인 HMM에 수조 원의 공적자금을 지원해 배를 20척이나 주문하면서 죽어가던 산업은 위기를 넘 겼고, 팬데믹 시기 다시금 호황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한진해 운이 파산하기 전의 물동량이나 세계시장 점유율은 여전히 회복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 기분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생각해 보면 '권력자 마음 대로 내리는 결정'의 위험은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적어도 불확 실성이 최고의 적인 경제 분야에서는 말이에요.

- 막상 누군가가 나에게 수돗물을 정수기 없이, 끓이지 않고 그냥 마시라고 하면 마음이 영 불안하기 때문이에 요. 물론 각 지역마다 수질을 꼼꼼하게 관리하는 기관들이 있지 만, 여전히 내가 마시는 수돗물이 안전하다고 확실하게 믿을 수 는 없습니다.
반면 사 마시는 생수는 비교적 책임 소재가 명확합니다. 품질 관리에 실패하면 소비자가 돈을 주고 사 먹지 않을 테니, 수돗물 보다는 더 엄격하게 관리할 거라는 믿음이 생기죠. 공장이 아무 리 커도 전국의 수돗물을 다 관리하는 것보다는 힘이 덜 들 것 같고요. 어떻게 보면 편의점이나 슈퍼에서 사 마시는 물값은 이 런 책임과 신뢰에 지불하는 비용이랍니다.
- 서로를 믿지 못하는 저신뢰는 문화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 시에 경제적인 맥락을 품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시장거래는 신뢰를 기반으로 이뤄지므로 이렇게 사고가 잦거나 문화적으로 충돌하는 문제가 생기면 비어 있는 신뢰를 채우기 위해 그만큼 의 비용이 더 듭니다. 이렇게 문화와 경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신뢰 사회가 치러야 하는 비용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사 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와도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죠. '유능 하면 조금의 부정부패와 비리는 괜찮아!'라는 사고방식이 위험 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기적으로 엄청난 비용으로 돌아 오거든요. '믿을 수 있는 상품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장 치와 가동인력 등이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시장에는 명확한 규제가 필요하고, 그 규제를 어길 땐 강력한 처벌이 뒤따라야 합니다. 미래의 더 큰 비용을 막기 위한 현재의 작은 노력인 셈이죠

- 1945년 패전 분위기가 짙어지자 조선 거주 일본인들은 일본 본토로 도망갈 준비를 하며 그간 벌어놓은 돈을 인출하려고 은 행에 달려가죠. 그렇게 한반도 최초의 뱅크런이 일어납니다. 일 본 본토와 조선총독부가 이 뱅크런을 어떻게 해결했냐면, 돈을 사람들이 달라는 만큼 무차별적으로 찍어내서 뿌립니다. 순식 간에 통화량이 두 배 가까이 불어났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런 환경에서 미군이 들어와서 자유로운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해 버린 거예요. 1945년 하반기, 서울의 도매 물가는 1944년 대비 2,364% 상승합니다. 놀란 미군정이 얼른 다시 통제경제를 도입 했지만 인플레이션을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 1945년 패전 분위기가 짙어지자 조선 거주 일본인들은 일본 본토로 도망갈 준비를 하며 그간 벌어놓은 돈을 인출하려고 은 행에 달려가죠. 그렇게 한반도 최초의 뱅크런이 일어납니다. 일 본 본토와 조선총독부가 이 뱅크런을 어떻게 해결했냐면, 돈을 사람들이 달라는 만큼 무차별적으로 찍어내서 뿌립니다. 순식 간에 통화량이 두 배 가까이 불어났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런 환경에서 미군이 들어와서 자유로운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해 버린 거예요. 1945년 하반기, 서울의 도매 물가는 1944년 대비 2,364% 상승합니다. 놀란 미군정이 얼른 다시 통제경제를 도입 했지만 인플레이션을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 1950년대 미군은 한국전쟁을 치르기 위한 기지를 가까운 일본 에 건설하고 군수물자를 대량으로 주문했습니다. 일본의 공장은 미국의 주문을 받아 쉴 새 없이 돌아갔죠. 인플레이션 따위는 미 국에서 직접 받은 달러로 충분히 해결 가능했습니다. 일자리도 어마어마하게 생겨났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때의 부활을 '조선 특수'라고 부르죠. 조선 특수를 통해 일본은 한때 G2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1970~1980년대 버블시대 때만 하더라도 일본이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할 거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어요.
- 국가 자원을 전쟁 수행에 쓸어 넣는 경제 시스템을 전쟁경제 라고 합니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쟁 을 통해 전쟁경제를 이용했어요.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동북아 시아 경제질서를 일본 중심으로 재편하고, 주한미국경제협조처 (USOM)나 한미합동경제위원회(CEB)를 통해 우리나라 경제에 개입했어요. 이 개입이 느슨해진 것은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에 파병한 이후입니다. 미국이 그린 그림은 기본적으로 일본이 기 술과 자재를 제공하면 한국이 단순 가공해서 미국에 수출하는 한·미·일 트라이앵글이었어요. 물론 이승만 정부부터 박정희 정부까지 모두 자립적 공업화를 원한다는 입장이었지만요. 여기 서 시작된 정치·경제적 맥락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 미국이 우리나라와 일본의 갈등을 싫어하는 것도 GVC 때문 입니다. 일본 기업은 GVC에서 주로 소재·부품·장비를 공급합 니다. 우리나라는 반도체와 함께 일본산 소재·부품·장비를 이용 한 중간재를 생산하죠.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GVC가 깨지면서 글로벌 산업 전반이 삐걱거리게 됩니다. GVC 팀플의 팀장인 미국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갈등이에요. 우리 나라와 일본으로서는 결국 미국의 의향을 따라가게 되겠지만, 미국의 힘이 예전만 못한 모습을 보면 좀 불안하긴 해요.
2020년 이후 세계적인 역병이 글로벌 공급망을 무너트리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GVC는 다시 지역가치사슬 (RVC)과 신뢰가치사슬(TVC)로 분화합니다. 똑같은 가치사슬인 데, 세계적으로 효율성에 기반해 일거리를 나누겠다는 게 아니라 안보를 함께하는 동맹국끼리만 중요한 무역을 하겠다는 이야 기예요.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일본과 함께 미국의 정치·경제·군 사적 동맹에 참여하는 한 일본과는 완벽하게 화해할 수도, 아주 끝장을 낼 수도 없는 애증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겠지요. 일본 하 나 때문에 모든 경제 시스템을 버리고 미국 주도의 RVC와 TVC 에서 이탈할 순 없잖아요. 오히려 전쟁 억제를 위해서는 GVC에 서 더욱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이 현실이 에요.

- 박정희 vs 전두환
정책을 만들어 시행하고 그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데요, 이 를 정책시차(policy lag)라고 해요. 한국 경제의 골조를 만든 게 박정희 정권 때 인데, 경제 성적이 눈에 띄게 좋았던 건 전두환 정권 때거든요. 박정희를 지지 하는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 때 중화학공업 수출 중심 산업구조가 정착했으니 까 전두환 정권에서는 그대로 수출만 순조롭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나 하고 여깁니다. 전두환은 정책시차의 수혜자라는 거죠. 일단 박정희 정권 말기에 체 감할 수 있는 경제 사정이 나빴어요.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다고 어떻게든 돈을 빌려와서 공장 세우고 설비 집어넣고 하다 보니 과잉 투자, 과잉 설비 문제가 생겼거든요. 거기다가 오일쇼크까지 일어나서 유가는 치솟고, 물가는 하늘 높 은 줄 모르고.. 정책시차도 있지만 전두환 정권 당시 산업합리화 노력이 있었 다는 점은 짚고 넣어가야 할 거 같아요. 부실기업을 정리하면서 경제성장이 아니라 경제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경제자유화를 추진하기도 했죠. 그 결과 1980년대엔 1970년대보다 대기업들이 정권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알아서 경영하는 면이 있었어요. 권력형 비리와 부정부패는 훨씬 심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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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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