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만이 무기다

인문 2024. 4. 24. 07:16

- 엉뚱한 발상을 하는 사람이나 예술가, 작가 등 일종의 문화인들 이 다소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융통성 없는 성격이거나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 이다. 자기 자신이 자유로워지면 그에 따라 사고의 연상도 자유로워 진다.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것은 온갖 일에 대해 '일 일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일일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일이 벌어지거나 뭔가를 보았을 때 일일이 이러쿵저러쿵 마음속으 로 감상을 말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푸념도 일일이 생각하는 것에 포함된다. 타인에 대한 소문 도 그렇다. 기분이나 신체의 사소한 불편함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다. 날씨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중에서도 걱정하는 게 가장 독성이 강하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보호해 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 만 실제로는 그 누군가에게 뭔가 나쁜 일이 벌어지기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상을 질리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누군가가 무사히 돌아오기라도 하면, "어디 갔었어? 계속 걱 정하고 있었잖아." 하고 진심으로 화를 낸다. 마치 나쁜 상황을 상 상했던 게 중요한 일이거나 헌신이라도 되는 듯 말한다. 이런 태도는 어리석기 그지없다.

자신에 대한 걱정도 거의 마찬가지다. 좋지 않은 상상을 하며 불 안해하거나 실망한다. 그 불안이나 실망을 위무하거나 얼버무리려 는 데 또다시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그사이 눈앞에 맞닥뜨린 문제 는 딴전이 되고 만다. 이런 버릇은 심한 낭비벽과 같으니 반드시 버 려야 한다. 이런 나쁜 습관을 버리면 생활이 달라진다. 책임감을 가 지고 꼭 판단을 내려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다 른 일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 채 그냥 인정하는 태도로 변할 필 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기분도 흐트러지지 않고 하루를 개운하게 보낼 수 있다.
- 한 가지 팁을 주자면, 노트 등에 뭔가를 쓸 경우 처음에는 펼쳤을 때 왼쪽 페이지에만 기입하는 게 일반적인 방식이다. 오른쪽 페이지 에는 아무것도 기입하지 않는다. 뭔가 나중에 기입할 필요가 있을 때 활용한다.
즉 왼쪽 페이지에 기록한 메모에서 촉발되어 발전한 사고에 대한 문장, 그 메모와 관련된 사안, 그 메모에 대한 주석, 관련 도서 등을 오른쪽 페이지에 기입한다. 따라서 왼쪽 페이지는 기원, 오른쪽은 그것의 확대, 발전, 파생, 주석, 보충이 되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노트나 수첩을 여유 있게 사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빽빽하게 기입하면 모처럼 떠오른 발상이나 사고가 문자 속에 파묻혀 쉽게 잊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수첩을 쓰더라도 지면을 여유 있 게 계획적으로 활용해야 하며, 그에 따라 1년에 몇 권의 수첩이 필 요할 수도 있다.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노트를 이렇게 사용하면 효율적이다. 왼쪽 페이지에는 수업을 받으면서 적은 메모 등을 기입하고, 오른 쪽에는 나중에 주석이나 설명을 기입한다. 이 방법만으로도 지식에 탄력이 붙고 기억력도 증대한다.

- 다만,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는 독서 방식에는 큰 약점이 있다. 그것은 그 책을 읽는 시점에서 자신이 가진 세계관과 동일한 수준의
독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신에 호응하는 부분만 책에서 읽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약성서》를 읽고 나서 감동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물리적으로 터무니없는 기적이나 기묘한 이야기라며 질색을 할지 도 모른다. 그리고 그 책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인상임에도 불구 하고, 그 책 자체가 그렇다고 믿어 버리는 것이다.
그 책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는지는 독자의 지식과 식견에 따라 다르다. 삶의 방식이나 나이에 따라 이해와 독후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유명한 소설 <죄와 벌>만 해도 그렇다. 그  을 읽은 모든 사람이 <죄와 벌>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이단적인 사상이 총망라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인간의 심리를 파헤친 걸작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으며, 전체적 으로 그로테스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죄와 벌>뿐만 아니라 다른 책에 대한 감상 또한 옳고 그름 이란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독후감이야말로 정상적이라 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빈약한 이해에 불과하 다. 그 이유가 지식과 식견이 부족하거나 편향되어 있기 때문이지만 정독은 이를 보완해 준다. 일단 책을 한 권 정독함에 따라 지식이 급속히 불어나거나 두 번째 책을 읽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지식 부족 현상을 보완해 준다.
한 권도 정독하지 않고 두 권째 읽을 경우 어떻게 될까. 첫 번째 책과 똑같이 낮은 수준의 이해력으로 일관할 것이다. 책을 많이 읽 었다고 해서 많은 지식을 흡수했다는 증거가 되지 않으며, 책을 계 속해서 오독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소장한 서적의 양을 자랑 해서는 안 된다.

- 논리적이라 해서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책이나 학문이든, 사상이나 주장이든 그것들을 이해할 때 큰 오해가 전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로 '논리적이기 때문에 옳을 것이다'라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쓰여 있다고 해 서 옳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논리적이라서 옳게 보이지만 전혀 현 실 상황에 걸맞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논리적이다'는 말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과학적이라 는 의미가 아니다. 수학적이거나 또는 문법적으로 옳은 경우가 논 리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간단한 문장은 어떨까.
'모든 수상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아베 아무개는 수상이다. 따라서 아베 아무개 역시 어떤 오류도 범하지 않는다.'
이는 잘못된 문장이 아니다. 논리적이다. 삼단논법대로다. 문법적 으로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논리정연하다. 하지만 내용이 옳지 않 으며 현실적이지 않다. 논리적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왜 옳지 않 고 현실적이지도 않은가.
여기에 전제로 쓰인 '수상은 결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주장 이 지금까지의 우리 경험과 식견에 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을 읽거나 타인의 의견을 들을 때 거의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 이 진지한 것인지, 아닌지 자신의 경험과 식견에 비추어 옳고 그름 혹은 타당성을 판단한다.

- 사람들은 보통 물건을 살 때 망설인다. 망설이는 동안 생각을 하 는 것이다. 어떤 상품을 선택해야 이득이 되는지 고민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놀이다. 아주 고가의 명품 브랜드 제품 이 아닌 이상 어떤 것을 선택하든 결과는 대동소이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스스로 고민해서 선택했다며 만족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냥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 선거의 경우도 이와 똑같다.
일상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이러한 가짜 사고와 비교하면, 책 을 읽는 것은 정말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책을 읽기 때문에 더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바로 책에 쓰여 있는 내용이 전부 옳다고 믿는 사람이다. 또는 책에서 전개하는 저자의 사고를 자신의 사고와 완전히 혼동해 버리는 사람이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지적했다. ...... 독서할 때는 생각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거의 없다. 스스로 사색하는 일을 그만두고 독서로 옮겨 갔을 때 안도의 기분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독서에만 전념하는 한, 사실 우리의 머리 는 타인의 사상이 뛰노는 운동장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거의 통째로 하루를 다독에 허비하는 부지런한 사람은 서서히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 간다. ...............(중략) ・・・・・・ 끊임없이 계속 읽기만 할 뿐,
읽은 것을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지 않는다면 정신 속에 뿌리를 내 리지 못한 채 대부분 다 잃고 만다.'
- 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은 대개 금전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고민밖에 하지 않는다. 온몸으로 기뻐하지 않고 머릿속 화학반응이나 이해득실을 따지는 차원에서만 기뻐한 다. 죽음이나 이별, 사랑이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는 이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희박해진 혹은 가짜 인생을 체험하고 있는 게 아닐까.
파리 컬렉션에서 발표된 옷과 비슷한 싸구려를 몸에 걸치고, 진 짜 맛과 비슷한 요리를 진짜라고 생각하며, 세금을 식량으로 삼는 무리에 의해 자의적으로 결정된 법을 최소한의 윤리라고 오해한 채 인습화된 모금 행사를 전통적인 종교 행위라고 생각하고, 자식을 키우거나 집을 짓는 걸 정상적인 인생이라고 여긴다. 이런 삶이 가짜는 아닐까.
가짜 인생을 살기 때문에 문학의 가짜인 대중소설을 재미있어 하는 것일 게다. 대중소설은 의도와 효과, 논리로 쓰여졌다. 그 상업 적인 세계에서는 어떤 일도 사랑이나 섹스, 배신조차 명백한 이유 가 있다. 그래서 추리소설에 나오는 살인범이라 해도 진짜 살인범 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얄팍한 인형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현대인의 인공적인 가짜를 모두 집어던질 수는 없다. 하지만 세계문학을 읽음으로써 인간과 세상의 심연에 숨어 있는 신비를 알고, 진정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온갖 연구와 지성에 반드시 필요한 인간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되지 않을까 한다.

- 취미를 잠깐 멈추면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 것이다. 뭔가 부족한 기분이 가시지 않을지도 모른다. 취미가 있는 편이 더 충실한 삶처 럼 생각될 것이다. 실은 그 느낌이야말로 의존의 증거다. 알코올중 독자가 알코올이 없는 인생을 무미건조하게 느끼는 현상과 같다. 하지만 취미가 자신의 일이나 공부와 연관되어 있다면 더 이상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자신이 성장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므로 그 시간을 줄일 필요는 없다. 시간을 늘리기 위해 자신의 취미를 버 려야 할지 말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 다. 이력서의 칸을 채우거나 누군가에게 떠벌릴 만한 취미는 거의 대부분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활동에 불과하다.

- 30대부터 40대 이후에 공부를 시작하려는 사람이 찾아와 진심 어린 충고를 부탁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곧바로 어떤 공부를 시작할 준비를 할 게 아니라 우선 사회와 떨 어져 볼 것. 즉 완전히 고독해질 것. 생계를 위한 직업이 있다면 어 려울 수 있다. 그렇다면 쉬는 주말 이틀 동안만이라도 사회에서 벗 어나 혼자 있어 보면 된다. 가능하다면 5일에서 일주일 정도 고독한 시간을 가져 본다.
그 기간에는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는 모든 수단을 멀리해 주변의 인공적인 소리와 정보를 차단한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도 보지 않는다. 전화도 받지 않는다. 직접 밥을 해먹으며 홀로 지낸다. 자신 을 이 세상과 격리된 상태에 놓는 것이다.
왜 이런 고독에 침잠할 것을 권하는가 하면, 자신이 자신으로 돌 아오기 위해서다. 평소의 우리는 막연히 자신이 늘 똑같은 자신이 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진정한 자신이었던 적이 거 의 없었을 수도 있다.
평소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사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혹은 뭔가에 의존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당장의 역할을 부여 받고 어떤 요구가 있으면 거기에 걸맞게 행동한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 은 그 연속이 일상이 된다. 스스로 생각하는 일 없이 늘 뭔가 문제에 맞닥뜨려야만 해결책을 모색한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습관이나 욕망의 요구대로 따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진다. 그래서 빈 시간이 생기면 게임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SNS로 연락을 한다. 그러한 갖가지 대응을 인간적인 유대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사실 자신만으로 존재하는 생활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는 교묘한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고독해지라고 권유하는 이유는 온갖 사회적 요구와 자극에 의해 흩어지고 사라진 자신의 단편을 모두 되찾아 다시 자기 내부로 수렴하기 위해서다. 바쁜 스케줄을 삶의 보람으로 착각하는 현 대인에게 최초의 고독한 하루는 견디기 힘들지도 모른다. 자신만 홀로 남은 기분이 들 테고, 하는 일 없이 비생산적으로 시간을 보 내는 방식에 화가 날 수도 있다. 또 수많은 충동에 사로잡혀 괴로워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태가 되면 참지 말고 충동과 기분을 실컷 발산하면 된다. 사회적인 잔재에 매달리고 싶은 자신을 내팽개치는 것이다. 그리고 홀로 앉아 조용히 숨을 쉰다. 배가 고프면 식사 준비를 한다. 자연을 바라본다. 시간의 1초를 음미한다. 그렇게 자신만으로 하루를 보낸다.
이틀째가 되면 경쟁 사회에서 일하며 사람들을 만나 온 지난날 이 왠지 아득하게 느껴질 것이다. 또 자신이 자신으로 정리되어 바 로 앞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차분히 시간을 들여 자신과 대화를 한다. 정말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까지 남몰래 이유를 붙여 계속 미루고 미뤄 왔던 진짜 욕구는 무엇인가. 자신은 어떻게 되고 싶은가. 무엇 을 공부하고 무엇을 알고 싶은가

- 재능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조건 중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단 하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다음 조건은 그 단 하나에 대해 계속 관여하는 것이다. 덧붙여 일반적으로 재능이 있 다 없다 하고 말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언어의 분절화 작용에 의해 크나큰 오해를 부를 수도 있는 표현이다.
언어의 분절화 작용이란 언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 본래 나눌 수 없는 대상을 나눠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아이와 어른이다. 세계 각지의 문화에 따라 의식이나 나이를 기준으로 편의상 아이와 어른을 나누지만, 실제로 그 경계는 없다. 나이 역시 언어의 분절화 작용의 한 사례이다.
동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는 민족 간에 무자비한 전쟁이 많지만, 민족 또한 본래 나눌 수 없는데 인간을 민족의 명칭으로 나누어 언 어의 분절화 작용이 적용된다. 물론 학교 성적을 포함해 등급을 매 기는 모든 것이 분절화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초등학생들은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가 일곱 색깔이라고 배운다. 아이들은 일곱 가지 색깔로 선명하게 나뉜 무지개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진짜 무지개는 결코 색깔이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다. 좀 더 애매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린아이들은 배운 관념을 그 림으로 그린다.
- 그렇게 인간은 언어의 분절화 작용에 의해 생겨난 관념이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고 만다. 그런 식의 착각을 수없이 축적하며 성장한 결과 차별이 생긴다. 즉 세계는 바로 여기에 있는데, 우리는 언어의 분절화 작용에 의한 착각 렌즈를 통해 바라보므로 제대로 세계를 볼 수 없다.
다시 재능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재능이 있다 없다 하는 표현 자체가 분절화된 이후의 표현인 것이다. 이 표현대로 한다면 인간 에게 재능의 유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래서 '저 사람에게는 재능이 있지만 '이 사람에게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다.
신의 유무 문제도 마찬가지다.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 가. 이 물음 자체가 이미 분절화이다. 신의 존재를 묻는다는 것, 즉 상자 속 슈뢰딩거의 고양이 schrodinger's Cat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 뢰딩거가 1935년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증명하기 위해 고안한 사고 실 험-옮긴이)의 존재를 묻는 것처럼 인간은 단순히 있느냐 없느냐 하는 분절화만으로 사물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론자나 무신론자 모두 똑같이 안이하다.
- 혹은 독학하는 생활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헤르만 헤세의 단편소설 《클라인과 바그너》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고 싶다.
사실 사람들이 불안하게 느끼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즉 몸을 던지는 것, 미지의 것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 모든 게 보장되어 있 는 안전지대를 아주 조금이라도 넘어가는 것이다. 한 번, 단 한 번 만이라도 자신을 내동댕이친 적이 있는 사람은 위대한 신뢰를 느끼 고, 자신을 운명의 손에 내맡긴 사람은 불안으로부터 해방된다. 그 들은 더 이상 지상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우주에 낙하하 여 별들과 함께 윤무를 추는 것이다.'
- 오히려 자신의 삶에 대한 진정성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기성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버려야 한다. 또 자신에게 의미 있는 세계와 인 생을 찾기 위해서라도 독학을 하거나 생활할 때 관찰의 눈을 날카 롭게 벼리고, 생생한 통찰을 가능케 할 만한 새로운 자신을 매일같 이 창조해 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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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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