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중동수업

사회 2023. 12. 16. 18:33

- 중동을 바라보는 우리의 불편한 시선
중동의 민주주의를 둘러싼 통념은 대체로 부정확할 뿐 아니라 논란 의 중심에 있다. 아랍 국가는 역사적으로 권위주의의 경향을 보였다', '이슬람은 중동 민주주의의 핵심 걸림돌이다', '여성 인권의 증진은 중 동 민주화에 필수다', '아랍의 친서구 자유주의자는 민주화의 핵심 세 력이다', '중동 민주주의는 이슬람 테러리즘의 치료제다', '미국은 중동 민주주의를 원한다', '이라크 전쟁은 중동 민주주의의 대의를 발전시켰 다' 등이 그것이다.10 무엇보다 이런 명제는 흑백논리로 설명할 수 없 다. 논리적 접근법의 출발이자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써 이들 명제의 진의를 백분율로 나타내보는 연습이 유용하다. 이 책 곳곳에서 이 통념들을 다룬다. 물론 콕 집어 백분율 숫자를 제공하지 는 않지만 독자가 사실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공 하고자 한다.
- 미리 짧은 힌트를 주자면 첫째,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다수의 나라가 역사적으로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해왔다. 미국도 1964년이 돼 서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민권법을 통과시켰 다. 하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은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며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 전 미국 대통령은 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배치하는 차별 발 언을 억눌린 시민의 마음이라며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둘째, 이슬람주 의 운동의 원조인 '무슬림형제단'은 부패하고 무능한 자국의 독재 타도 를 핵심 목표로 삼았고, 결성 초기에는 시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슬람주의 운동은 많은 시민에게 변혁의 희망을 안겨줬으나 냉전 이후 이슬람 극단주의 진영의 '빌런villain'에게 뿌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셋째, 중동의 여성 인권 단체 대다수가 미국과 유럽 국가의 지원을 받 는다는 이유로 토착 시민단체는 이들과 연대하는 것을 꺼린다. 권위주 의 정권은 반정부 조직 대신 이들 여성 인권 단체에 소극적인 유화책 을 제시하며 서구의 압박 앞에 체면치레하는 동시에 시민사회의 분열 을 조장한다. 넷째, 아랍의 친서구 자유주의자 세력은 대체로 강한 엘 리트주의 성향을 띠며 대중과 함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조직한 경 험이 매우 적다. 다섯째, 민주주의가 발전한다고 테러가 줄지는 않으며 테러가 빈번하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발전한 것은 더욱 아니다. 민주화 이행 시기에 사회가 개방되면서 오히려 일정 기간 테러가 더 기승을 부릴 수 있다. 권위주의 체제의 통제 시스템이 테러를 막는 데 더 효과적 일 수 있다지만 집권 세력은 테러 방지라는 공익보다는 정적 감시라는 사익 추구에 전력을 쏟는다. 여섯째, 미국의 대중동 정책은 국내 권 력 지형의 산물이며 국가는 한목소리를 내는 단일 행위자가 아니다. 미국의 대외 정책은 정당과 의회를 둘러싼 정치 다이내믹의 결과물이 며 공화당과 민주당 정부의 핵심 기조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일곱째 이자 마지막으로, 2003년 미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정권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며 민주주의와 선거제도를 이식했다. 그러 나 전후 국가 안정화와 재건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종파주의를 동원함 으로써 일반 시민의 반미 감정을 확산시켰고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조 직인 ISIS 출현에 계기를 제공했다.

- 헌팅턴의 문명충돌론과 이슬람 문명
문명충돌론에서 문명권은 중국, 일본, 힌두, 이슬람, 정교, 서구,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로 나뉜다. 이 가운데 이슬람 문명권이 서구 문명이 발전시킨 보편 가치에 가장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이슬람 문명권이 고 유 가치를 버리고 서구 보편주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제로다. 폭력을 미화하는 문화에 기반해 거대한 단일 이슬람 공동체 건설마저 추구한 다. 이슬람 문명권 내의 인구는 폭증하는데 중심을 잡을 핵심 국가가 없으니 갈등과 전쟁이 '기본값으로 따라온다. 헌팅턴은 중국 문명권 역시 서구식 보편주의를 거부하고 막강해진 경제력을 앞세워 중화주의로 뭉칠 것이라고 진단한다. 최악의 상황은 이슬람과 중국 문명권이 힘을 모아 서구 문명권이 이끄는 세계 질서에 대항함으로써 지구 평화 가 흔들릴 때라고도 했다. 헌팅턴은 서구의 오만, 이슬람의 편협, 중국 의 독단이 만나 문명이 충돌하는 최악의 조합을 매우 걱정했다. 《문명의 충돌》은 미국 내에서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초대형 베스 트셀러다. 이 책에서 헌팅턴은 무슨 말을 가장 하고 싶었을까? 그에 따 르면 1990년대 미국의 민주당 정부가 국내외 정치에서 다양성을 장려 하며 문제를 일으켰다. 문명충돌론에서 다양성의 수용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헌팅턴은 이 책에서 당시 빌 클린턴William Jefferson Bill Clinton 정부의 대외 정책 실패를 예로 들며 보스니아 전쟁에서 순진한 이상 주의와 도덕주의, 발칸반도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이슬람 문명권인 보스니아에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한다. 인류의 대재앙이었던 보스 니아 전쟁에서 서로 싸운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는 각각 이슬 람, 서구, 정교 문명권에 해당하며, 그중 보스니아 무슬림 민간인의 학 살 피해가 가장 컸다. 서구 문명권에 속하는 국가는 크로아티아를 지 원하면서 세르비아를 질책했고 보스니아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은 문명적 패턴을 따르지 않은 채 보스니아를 향해 말뿐이 긴 해도 연일 지지를 보냈다. 정작 물리적 지원은 많이 하지 않았다. 전 쟁이 깊어가던 무렵에 독일은 크로아티아에게, 러시아는 세르비아에게 평화 협상에 참여하라고 압박할 수 있었으나 미국은 보스니아와 문화 적 공통점이 부족해 특별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헌팅턴은 이 대목에 서 다시 한번 강조한다. 서구 문명이 다른 문명과 충돌하는 것은 세계 평화와 국제 질서 유지에 가장 큰 위협이 되며, 한 문명을 대표하는 핵심 국가는 다른 문명이 연루된 갈등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책의 결론 부분은 다문화 이민 사회에 사는 미국 독자에게 주는 메 시지로 가득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는 다문화 국가가 지닌 다양성 을 내부 안정과 협력을 해치는 문제점으로 봤다. 문명충돌론은 나라의 태생적인 취약점을 극복하려면 서구 문명의 보편 가치와 규범을 확고 한국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명의 충돌은 국제 질서의 안정 은 물론 나라 안의 원활한 통치에도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문명에 기반한 국제 질서는 세계 전쟁을 막는 가장 확실한 보호 장치다. 때문 에 미국 내 질서 안정 역시 서구 문명에 기반해서 얻을 수 있다. 동화주의 이민정책인 '멜팅 팟melting pot'이 다문화주의에 기반한 '샐러드 볼 Salad bowl' 정책보다 갈등을 피해 통합 사회를 이뤄가는 데 더 효과적이다. 지역사회에 '리틀 아라비아'나 '차이나타운'이 생겨나는 건 좋은 징 조가 아니다. '프티 프랑스', '리틀 이탈리아면 몰라도.
9·11 테러 발발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른 미국이 최근 중국을 견제하려고 미중 경쟁을 주도하자 문명충돌 론의 선견지명에 무릎을 치는 사람이 늘어났다. 중동에서 분다는 친 중 바람 소식에 여기저기서 헌팅턴의 혜안이 재소환되기도 한다.

- 서구는 왜 오리엔트를 타자화하는가
《오리엔탈리즘》에 따르면 서구는 오리엔트를 단순하게 열등한 것으 로 규정하지 않는다. 서구가 오리엔트의 이미지를 묘사하면서 사용한 언어는 남성이 독점하는 땅, 잔혹함, 적대감, 증오, 기이함, 신비로움, 지 칠 줄 모르는 관능, 무한한 욕망, 하렘harem, 베일veil, 노예, 춤추는 소년 에 이른다. 《오리엔탈리즘》의 초판 표지인 장 레옹 제롬Jean Leon Gerome 의 그림에도 눈이 풀린 병사 무리 앞에서 뱀을 조련하는 알몸의 미소 년이 서 있다.
서구는 왜 오리엔트에 허구 이미지를 씌워 비하했을까? 이 책에서 서 구는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근대정신을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오리엔트라는 야만의 세계를 타자화했다. 오리엔 트로 옥시덴트Occident의 부활을 꾀한 것이다. 유럽이 중세 암흑기에 갇혔을 때 오리엔트는 학문, 예술, 군사적으로 강력한 경쟁자였기에 두려운 상대이기도 했다. 따라서 서구 권력자가 오리엔트를 향해 집착에 가 까운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했다.
또 하나의 의문점, 왜 일반 독자는 전문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일까? 사이드에 따르면 일반인은 권위에 약하다. 오리엔탈리즘은 작 품과 작가를 인용하는 체계적 시스템인데, 사람은 낯선 대상 앞에서 방향을 잃는 것보다 이미 지적 권위를 인정받은 텍스트에 안심한다. 이 과정에서 친숙한 공간을 '우리', 낯선 공간을 '그들의 것'으로 지정하는 임의적이지만 보편적 방식을 선호한다. 오리엔탈리즘의 힘과 권력은 매 우 강렬해 과학적 일반론을 강조한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마저 오리엔트를 전제정치의 상징으로 보고 오리엔트 사람을 스스로 대표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비하했다.
-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힘의 배분 구조를 중동 분석의 핵심에 두었다는 점에서 문화의 우열을 따지는 이론보다는 더 과학적이다. 하 지만 제국주의의 폐해를 폭로하는 데 몰두한 나머지 '사실'보다는 념 선전과 진영 논리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한다. 나름 독창성과 설득력 을 갖추고 있음에도 감성과 당위에 치우친 구호를 앞세운다면 '진실'은 찾을 수 없다.
사이드를 추종하던 몇몇 학자는 조금 더 과학적인 분석에 집중하고 이념적 도그마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각 나라 내부 권력의 불평등과 모순에 주목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과거의 불평등한 권력 배분 구조가 현재의 격차와 갈등으로 오롯이 이어졌다며 거대한 역사적 구조의 덫을 지나치게 강조한 채 인간의 의지와 결단을 간과했다.
인간은 이해관계와 손익 계산에 따라 주판알을 튕기며 그에 맞는 선택을 취한다. 그 배경이 중동 이슬람 세계든 서구든, 중세든 현대든 간에 상관없다. 국내외 정치 현상은 손익계산서 관점으로 바라봐야 가 장 정확하고 명쾌하게 보인다. 단 인간의 인식이 항상 완벽한 것은 아 니므로 비합리적인 행동이 종종 나타난다. 중동의 변혁과 격변을 이해 하는 데 핵심은 인간이 합리성을 바탕으로 비용과 편익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비합리성을 자주 드러낸다는 것이다.

- 아랍에미리트의 획기적 개혁 양상
아랍에미리트는 2016년 정부 규모 축소와 젊은 여성 인재 영입을 핵 심으로 한 연합정부 개편안을 발표했는데, 알막툼 총리가 이 역시 트위 터로 알렸다. 신임 장관급 8명 가운데 22세의 청년부 장관, 29세의 과 학위원회 위원장을 포함해 5명이 젊은 여성이었다. 또한 아부다비 경 제부의 국장 40여 명을 젊은 인재로 교체했다. 나아가 2019년에는 연 방 평의회 의석 절반을 여성에게 할당했다. 2020년 11월에는 형법, 형 사소송법, 기업법, 가족법, 민법 등에서의 이슬람법 적용 완화 및 개인 의 자유 확대를 명시한 연방법 개정안을 발표해 사법 체계의 현대화를 꾀했다. 명예 살인과 여성 대상 범죄의 강력 처벌, 미혼 남녀의 동거 허용, 주류 면허 없이도 술 구매 허용 등의 내용이 들어갔다. 또 항공우주, 재생에너지 등 13개 산업, 122개 분야에서 외국 기업이 아랍에미리트 내에 법인 설립 시 현지 파트너 없이 지분 100%를 보유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했다. 과거에는 지분 보유 상한선이 49%였다. 이러한 변 화 결과 아랍에미리트는 국가별 혁신 성과를 보여주는 지표인 '2020년 글로벌 혁신 지수'에서 131개국 중 34위에 랭크됐다.
아랍에미리트는 걸프협력회의 6개국 가운데 군사, 외교 안보, 경제, 사회 분야 개혁을 가장 먼저 독보적인 속도로 추진한 나라다. 2022년 대통령이 된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아부다비 통치자는 아랍에 미리트의 실질적 지도자로 2000년대 중반부터 능동적인 군사 안보, 투 명 외교, 산업 다각화, 개방 사회 달성을 목표로 한 국가 체질 개선에 힘써왔다. 무함마드 빈 자이드는 2022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총리가 된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Mohammed bin Salman Al Saud 왕세자의 멘토로 알려져 있다. 2011년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가 민주화 시위를 유 혈 진압하자 아랍에미리트는 카다피를 응징하려는 나토(NATO, 북대서 양조약기구)의 '오디세이 새벽 작전'에 적극 참여해 미군과 나토 장성으 로부터 '작은 스파르타', '미국의 오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다행히 수니파 대표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달리 대외적 위상을 고려해야 하 는 제약이 덜한 나라다. 아랍에미리트의 이러한 역량과 지위는 친미 수 니파 아랍 쿼텟Arab Quartet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이집트로 구성) 내에서도 독보적인 면모이자 이스라엘과의 협력을 추진하는 원동 력으로 작용한다. 2020년 아랍에미리트는 이스라엘과 아브라함 협정 을 맺고 국교를 수립해 기념비적인 '아랍-이스라엘 데탕트'를 이뤘다.

- 사우디아라비아의 미래, '비전 2030'
아랍에미리트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빠르게 변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광폭 변화는 2016년 당시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선포한 개혁 프로젝트 '비전 2030'과 함께 시작했다. 2017년 25년 만에 대중 콘서트가 열리고 2018년에는 35년 만에 영화 상영이 재개되어 남녀가 나란히 앉아 함께 즐기는 풍경을 연출했다. 그 뿐 아니라 여성의 축구장 입장과 여성 운전도 허용됐으며, 일상 속에 서 시민의 이슬람법 준수를 감독하는 종교 경찰도 거리에서 사라졌다.
- 2019년에는 수도 리야드Riyadh에서 BTS 콘서트가 개최돼 주변국 젊은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공립 초등학교에서 여자 선생님이 3학년 남 학생을 가르치고 남자 코치가 10학년 여학생 농구팀을 지도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비전 2030이 시작되기 전에는 외국인 대상의 최첨단 초호화 호텔에 서도 꽉 막힌 보수 이슬람 문화가 만연했다. 과거 사우디아라비아 외교부 주최의 국제 콘퍼런스가 열리는 유명 체인 호텔에 가봐도 남녀 공용 헬스클럽은 물론, 여성전용 피트니스 센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으 리으리한 남성용 헬스장과 선명하게 비교됐다. 호텔 서비스 담당은 여 성 인권과 국제 규범까지 들먹이며 항의하는 외국인 여성 학자에게 러 닝머신을 호텔 방으로 직접 배달해줬다. 괴상하고 요란한 해결책이었 다. 많은 외국인 여성이 방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객실 한가운데에 놓 인 러닝머신에서 열심히 뛰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2019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기업이자 세계 최대 석유회사인 아람 코Aramco의 주식 상장이 최초로 이뤄졌다. 개혁 프로젝트의 재원 마련 을 위해서였다. 정부는 역사상 처음으로 관광 비자 시스템을 도입했으 며 이어 사우디아라비아 첫 여성 대사가 임명됐다. 2021년 여성의 경 제활동 참가율이 32.4%를 기록하며 4년 전보다 두 배 증가했다. 항구도시 제다Jedda에서는 홍해 국제영화제가 열렸고 최첨단 친환경 미래 도시 '네옴Ncom' 프로젝트에 탄소 제로 지역의 건설 계획이 추가됐 다. 네옴 프로젝트는 홍해 지역에 친환경 에너지로만 운영하는 도시를 짓는 계획인데 그 면적이 서울 면적의 44배로 이웃 나라인 쿠웨이트 나 이스라엘보다도 크다. 네옴 안에는 주거용 메가 단지인 '더 라인The Line', 해상 첨단산업단지인 '옥사곤0xagon', 산악 관광단지인 '트로제나 Trojena', 휴양지인 '신달라Sindalah'가 들어서며 하늘을 나는 에어 택시 를 대중교통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2023년 사우디아라비아는 국 제우주정거장에서 우주 비행 임무를 수행할 첫 여성 우주인을 임명 했다.

- 재정 위기와 청년 세대 변화에 따른 선택
두 나라의 이례적인 개혁 행보의 배경에는 2010년대 중반부터 이어 진 저유가 시대가 촉발한 재정 위기가 있다. 2000년대 초반 미국은 최 첨단 공법을 이용해 셰일shale에서 원유를 생산하는 '셰일 혁명'을 일으 켰다. 재정의 80% 이상을 석유와 가스 자원 수출로 충당해온 걸프 산 유국에 천연자원 시장의 지각 변동은 치명타였다. 미국발 셰일 혁명은 외부 충격에 속수무책으로 취약한 자원 부국의 저주를 불러냈다. 14 단 기적인 수익성에 치중한 단일 산업에 주력함으로써 외부 의존도가 높 은 경제구조를 지닌 불로소득 국가는 유가 변동과 국제금융시장의 위 기와 같은 대외 충격에 취약하다.
- 비오펙(OPEC, 석유수출국기구) 국가가 오펙 회원국의 원유 생산량 을 앞지르자 회원국 중 최대 생산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증산으로 원 유 시장의 주도권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난립하던 셰일 업체는 치열 한 시장 논리에 맞춰 오히려 경쟁력을 키웠고 저유가 기조는 계속됐다. 2018년에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 산유국에 올랐고 2019년에는 원유 수출국이 됐다. 결국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 를 비롯한 오펙 회원국은 적자의 긴 터널로 들어갔고 재정수지와 실질 성장률의 하락을 쓰라리게 경험했다. 무상 의료, 무상교육, 저가 주택 공급, 보조금 지급 등 대규모 복지 정책으로 유지하던 통치 권위가 흔 들렸다. '납세 없이 투표권 없다'의 통치 기반마저 전례 없는 재정 위기 앞에 재고해야 했다.
게다가 갑자기 덮친 코로나19 팬데믹 앞에서 걸프 산유국은 석유 의존 경제의 취약성을 다시금 절감했다. 이들 나라는 미국의 셰일 에너지자원 개발 이전부터 석유 자원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탈석 유 시대를 대비했으나 외부의 변화가 더 빨랐다. 코로나19 시기 동안 걸프 산유국은 초유의 저유가 사태로 이중고를 겪었다. 전 세계가 국경 폐쇄와 통행 제한을 시행하고 공장 문을 닫았다. 원유와 천연가스 수 요 절벽으로 유가가 급락했고 추락을 거듭하던 유가는 마이너스를 기 록하기도 했다. 자원 의존율이 낮은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듯했으나 물류와 관광허브화에 '올인' 한 두바이 역시 직 격탄을 맞았다. 이러한 충격은 이웃한 비산유국으로 이어졌다. 걸프 산 유국에서 일하는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모로코 출신 노동자들이 월 급을 자국으로 제때 송금하지 못하면서다. 산유국발 송금은 이들 비산 유국 경제에 큰 부분을 차지해왔다. 그러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 나를 침공하자 유가가 고공 행진했다. 고유가로 국고는 두둑해졌으나 산유국은 자원 의존 경제의 불안정을 다시 한번 각인했다.
- 이웃 국가의 독재 정권을 순식간에 무너뜨린 민주화 혁명에 위협을 느낀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산유 왕정은 청년층의 여론을 정책에 반영해 화답의 제스처를 보이고자 했다. 정치적 롤러코스터를 지켜본 중동의 위정자는 정권 생존의 위기를 미리 방지하고자 젊은 세 대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는 등 심적 압박에 시달린다. 이들 걸프 산유 왕정의 과감한 개혁이 아랍의 봄 혁명의 성공이라는 평가도 있다. 무 함마드 빈 자이드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통치자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는 공식 연설에서 자국 청년을 향한 찬사를 빼 놓지 않는다.
산업화 단계를 거친 사회에서 전통적 권위는 힘을 잃고 자기표현의 자유를 향한 합리적 욕구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아랍에미리트와 사우 디아라비아의 국가 체질 개선 프로젝트는 되돌릴 수 없는 티핑 포인트 를 넘어섰다. 바로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청년 세대의 변화 때 문이다. 개혁의 속도가 빠르다는 우려가 있으나 이미 맹렬한 기세로 진 입한 경로에서 빠져나오는 비용이 더 많이 든다. 무엇보다 아랍에미리 트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처한 여러 위기를 타개할 옵션이 빠른 개혁 외 에는 없다. 그리고 이들 국가의 개혁 질주는 젊은 세대의 전폭적인 지 지를 받고 있다. 청년층이 납세와 보조금 삭감까지 감수하면서 개혁을 지지한다니 기대해볼 만하다.

-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개혁 추진
1985년생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살아 있는 '절대 권력'이 된 무함 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중동에서 개혁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왕 세자의 주도로 석유 의존 경제의 위기 도래와 청년 세대의 인식 변화 에 맞춰 산업의 다각화와 개방 사회를 목표로 과감한 개혁이 숨 가쁘 게 진행되고 있다. 왕세자는 시민의 이슬람법 준수를 단속한다며 무소 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5천여 명에 달하는 종교 경찰을 거리에서 사라지게 했다. 여성의 운전과 축구장 입장, 남녀 혼석, 영화 상영과 콘서 트 개최를 허용하고 태형을 금지했으며 사형제 폐지를 논의했다. 새로 운 국영방송에서는 동성애 주제를 다루고 데이트 앱에 대한 금지도 풀 었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세금을 걷었고 보조금 제도를 없앴다. 왕세 자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네옴 프로젝트 발주에 전 세계가 앞다퉈 경 쟁에 나섰다.
해외 유학파가 다수인 왕실 유력층과 달리 베두인 부족 출신 엄마 를 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자국에서 이슬람법을 전공했다. 이 런 배경 덕분에 왕세자는 개혁과 열린사회에 반발하는 강경 이슬람주 의의 와하비Wahhabi 세력을 대거 숙청하고 이슬람 정책을 밀어붙 일 수 있었다. 왕세자는 와하비즘Wahhabism의 이슬람 해석이 크게 왜곡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역사와도 무관하다고 선언했다. 와하비 세력은 건국 초기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 연합해 왕실을 향한 순응이 이슬람 의 실천이라는 지배 담론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점차 비대해진 와하비 세력은 급진화되더니 알카에다를 조직해 9.11 테러를 일으켰다. 이 테 러를 벌인 알카에다 대원 19명 중 15명이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었다. 물론 왕세자의 출신 배경 외에 그의 젊은 나이도 획기적인 개혁 추진 을 가능케 한 요소였다. 왕세자는 자신을 포함해 전체 인구의 70%에 이르는 청년층이 보수 이슬람 체제에 지쳤다며 자신을 향한 비판은 청 년의 미래를 막는 것이라고 공포했다. 지난 40여 년간 왕세제는 70대였 고 가장 젊은 왕세자라 해봐야 50대였다.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 실세의 개혁과 관련해 유독 국내 사회·경제 부문만 집중 조명을 받았다. 사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대외 정책의 획기적인 변화도 천명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의 팽창주의와 미국의 역내 역할 축소 선언으로 안보 위기를 맞았 다. 러시아의 영향력 부상, 미중 경쟁의 심화도 지정학적 불안정을 선 명하게 만들었다. 대외 정책 환경의 변화 속도가 저유가에 따른 재정 압박보다 훨씬 빨랐다. 왕세자는 투명하고 다양한 외교 안보 처방을 선 언했다. 친미 밀실 외교를 고집해온 사우디아라비아로선 파격적 일탈 이다.
-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를 '무슬림 혼인'에 비유하는 것을 즐긴다. 미국과 이혼하지 않고도 다른 세 명과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다는 말이다. 2016년 사우디아라비아는 비오펙 산유국인 러시아와 함께 '오펙플러스OPEC+' 구성을 결정했다. 셰일 혁명에 성공한 후 세계 원유 시장에서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 미국을 겨냥한 결정이었다. 물론 오펙 플러스 내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와 러시아는 종종 충돌했으나 오펙 플러스의 출범은 단연 사우디아라 비아 외교의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2017년에는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Salman bin Abdulaziz Al Saud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 왕국 수립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를 방문해 지대공미사일 시스템인 'S-400' 구매를 약속했다. 그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계산이었는데, 이때 구입하기로 한 러시아 무기는 미국의 사드 옆에 배치된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국제사회는 이를 규탄했고 많은 나 라가 미국 주도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 는 미국이 요청한 제재 참여와 원유 증산을 거절했다.
무슬림 혼인에 빗댄 외교정책의 다변화는 아시아 지향 정책인 '룩이 스트Look East' 정책으로도 나타난다. 왕세자는 2015년 미국의 오바마 정부 주도로 타결된 이란 핵 합의에 항의하며 중국을 핵 기술 협력 파트너로 고려한다고 했다. 혁신 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치 열하게 불붙는 시기에 중국을 디지털 기술 협력 파트너로 여긴다고도 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려고 중동을 떠난다지만 중국은 일대일로 一帶一路 전략을 펼치려고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스라엘, 튀 르키예, 이란과의 경제협력을 확대했다.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 정보 통 신 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의 통신회사와 함께 5G 네트워크를 구축하 고 중국의 인공지능 첨단 기술과 보안 감시 시스템이 사회 안으로 파고 들었다.
- 외교 안보 다변화를 선언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도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높다.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반정부 언론인인 자말 카슈 끄지 살해 사건으로 젊고 자유로운 왕세자의 개혁 개방의 이미지가 바 닥으로 곤두박질쳤다. 2018년 일단의 사우디아라비아 정보국 요원이 이스탄불 주재자국 총영사관에서 카슈지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이 사우디아라비아 왕실로 향했고 무 함마드 빈 살만 체제의 정당성은 크게 흔들렸다. 권력의 정점에서 과도 한 자신감에 취해 있던 왕세자는 개혁 개방의 가치와는 한참 동떨어진 비상식적 사건에 연루됐다.
-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연대와 러시아와 중국이 주도하는 반미 연대의 대결 구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치열한 탐색전을 벌여 왔다. 2022년 여름에 바이든 대통령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나 려고 리야드를 찾았다. 공식 회동으로는 처음이었다. 과거 카슈끄지 살 해 사건을 두고 바이든 대통령은 인권의 기본도 모르는 수준 이하의 애송이와는 절대 대화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국제 유가 폭등으로 미국 내에 40년 만에 최악이라는 인플레이션이 엄습했다. 바이든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 문 제에 눈감기로 했다. 왕세자를 찾아가 달래며 원유 증산을 부탁하고 에너지 안보 위기를 해결해야 했다. 이참에 중동을 떠난다던 정책도 뒤집고 중동 안보에 끝까지 헌신하겠다고 깜짝 발표까지 했다.
그러나 젊은 왕세자는 미국의 180도 변신을 냉대했다. 증산 가능성 에는 단호하고 싸늘하게 선을 그었다. 왕세자와 사우디아라비아 핵심 인사의 눈에 미국은 믿음이 안 가는 우방국이며 따라서 양국 간 신뢰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바이든 대통령과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는 만나지 않았어야 좋았을까? 그렇지 않다. 최악의 양국 관계가 개선 의 계기를 갖게 된 것만으로 좋다. 오랜 우방인 두 나라는 서로가 필요 하다. 불확실성의 시기인 지금은 더 그렇다.
- 걸프 산유국의 축구 투자가 권위주의 정권의 우민화 정책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시민의 관심을 축구로 돌려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의도라고 보기 때문이다. 축구는 공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어디서든 쉽게 즐길 수 있는 만큼 문턱이 낮은 종목이므로 우민화 수단으로 제 격이기는 하다. 하지만 축구에 열광하는 중동 시민은 경기에 적용되는 엄격한 규칙과 공정한 경쟁에 대해 환호한다. 권위주의의 억압 아래서 사는 이들은 현실에서는 보기 어려운 법치 대신 경기 속 정의를 만끽 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누구든 룰을 어기면 예외 없이 벌칙을 받 는 모습에 중동 시민은 세상의 부당함을 잠시 잊고 살아 있는 정의에 안도하는 것이다.

- 아브라함 협정과 놀라운 아랍-이스라엘 데탕트가 가능했던 배경에 는 바로 요동치는 중동 지정학이 있다. 아랍에미리트와 이스라엘의 전 략적 연대는 무엇보다 미국의 '중동 떠나기'를 대비한 자구책이다. 걸 프 산유국의 리더는 미국만 믿고 안보를 맡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배신감과는 별개로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는 위기 섞인 목소리가 앞다퉈 나왔다. 게다가 이란의 패권 추구 행보가 더욱 거세졌다.

- 반복되는 무력 충돌과 끝나지 않는 참극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력 충돌은 맹렬한 기세로 거의 매년 익 숙한 스토리를 따라 일어난다. 서안 지역과 가자 지구에 거주하는 팔 레스타인 주민 또는 이스라엘 내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과 동예루살렘 의 팔레스타인 거주권자가 이스라엘 군경과 충돌한다. 이를 빌미로 가자 지구의 무장정파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로켓을 발사한다. 이스 라엘은 로켓 대부분을 요격한 후 가자 지구를 향해 대대적인 공습을 벌인다. 결국 가자 지구 내 민간인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고 국제사회 는 이스라엘을 비난한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미국과 유럽, 중동 국가 가 중재에 나서 양측은 휴전에 합의하고 이스라엘과 하마스 모두 승리 를 선언한다.
- 바이든 시대의 중동 정책에 최대 난관은 무엇보다 실타래처럼 얽히 고설킨 역내외 관계에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무슬림 형제단을 반대하지만 이란은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한다. 이란은 시리아 알아사드 정권을 지지하고 알아사드 정권은 무슬림형제단에 반대한다. 튀르키예는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하지만 알아사드 정권에는 반대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알아사드 정권에 반대한다. 하마스 는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하나 반미고, 카타르는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하 나 친미다. 여기에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고 중국이 새롭게 떠오르며 시리아·예멘 ·리비아 내전의 대리전 양상이 굳어졌다. 바이든의 중동 정 책이 성공하려면 큰 운이 따라야 할 듯하다.

- 혁명이 일어나 독재를 무너뜨리는 일은 엄청나게 충격적 사건임에도 예측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진다. 1979년 이란에서 일어난 혁명과 독 재의 몰락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미국 CIA는 이란혁명이 일어나기 6개월 전의 보고서에서 '샤의 권력이 한층 공고화됐기 때문에 1980년 대에도 이란 내 정치 상황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샤가 이란을 빠져나가기 나흘 전에 작성된 보고서 역시 '샤의 반대 세력은 서로 경쟁하느라 함께 저항을 조직할 수 없다. 최근 일련의 반샤 시위 가 혁명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다.28 도망치듯 이집트로 떠난 샤의 탈출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왜일까? 독재는 별다른 기미 없이 극적으로 무너진다. 체제 특성 때 문이다. 억압, 감시, 통제 체제 아래서는 정확한 여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폭발을 미리 감지하는 게 매우 어렵다. 따라서 사회 내부 불만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든 한계를 향해 치달아도 독재자, 엘리트, 시민 모두 그 징후를 느끼지 못한다. 정권 엘리트는 거짓 충성 경쟁에 바쁘고 일반 시민은 공포정치 아래서 폭발 직전의 불만을 철저히 숨길 수밖에 없다. 한쪽으로의 갑작스러운 쏠림을 일으키는 티핑 포인트에 이르기 직전까지 폭발의 압력은 쌓이기만 할 뿐 표면적인 정치 상황은 그대로다.29 불안하게나마 유지되는 협력과 안정 속에서 독재자와 측 근 엘리트, 시위 선도 그룹, 일반 시위대, 미국 정보국 누구도 장기 독 재자가 비무장 시위대 앞에서 모든 걸 포기하고 주저앉으리라고는 예 상치 못했다. 체제를 유지하려고 만든 억압 기제 때문에 체제 몰락의 예고를 눈치챌 수 없다는 것이 독재의 아이러니다.
- 혁명은 원래 그렇다. 매우 사소한 계기로 촉발돼 오래된 절대 권력을 갑작스럽게 몰락시킨다. 1789년 프랑스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 1949년 중국 공산혁명 모두 전조 없이 일어나 전근대 체제를 순식간에 무너뜨 렸다. 근대 이후에 일어난 1979년 이란혁명, 1989년 동유럽 혁명, 2011년 아랍 혁명과 이에 따른 독재의 몰락 역시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매우 안정적으로 보이던 장기 독재는 예고 없이 발발한 혁명 앞에서 극적으 로 무너졌다. 독재를 무너뜨린 혁명은 극적인 출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지만 이미 체제 내에서 혁명 발발의 조건은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 다 만 체제 속성 탓에 독재자와 엘리트, 시민 모두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을 뿐이다.
- 혁명은 어느 시점에 일어날까? 독재자가 겉으로 보이는 안정과 실제 의 취약함을 구분하지 못할 때 정권은 무너진다. 폭압 정치, 부패, 빈곤 은 독재 정권의 약점이지만 몰락의 결정적 원인은 아니다. 독재 정권이 매우 우발적인 사건으로 여론 장악력을 잃는 순간 정권을 향한 불만 이 폭발하고 위기는 시작된다. 일반 시민은 가족이나 아주 친하고 가 까운 사이에서만 억누른 불만을 매우 조심스럽고 비밀스럽게 털어놓 았다. 억압 체제에서 노골적인 비난 대신 흔히 나타나는 일이다.30 그 러나 주변 사람 대다수 역시 폭발 직전의 불만을 오랫동안 숨겨왔다는 걸 알게 되면서 반정부 시위라는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장기 독재 체제에서 침묵하던 시민은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서 면 시위에 나선다. 혁명은 일단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숨 가쁘게 진행된다.
겉으로 보이는 평온함에 안심하던 독재자는 우연한 기회로 폭발한 시민의 거센 분노를 접하고 당황한다. 장기 독재의 여론 통제와 감시로 독재자는 자신의 지지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 한다. 냉혹하던 독재자가 우왕좌왕하며 단호한 태도를 누그러뜨리면 엘리트는 정권의 미래를 의심하고 시위대는 혁명의 성공 가능성을 보게 된다. 강력한 철퇴 대신 유화책 카드를 꺼낸 독재자의 변화에 측 근 엘리트와 시위대 모두 흔들리고 만다. 독재자가 긴박한 상황에서 강 경 엘리트를 처벌하고 내각 총사퇴를 단행하며 대국민 연설로 우물쭈 물 개혁을 약속하면 측근 엘리트는 더욱 불안해하고 시민은 저항 수위 를 높인다. 오랜 폭압 정치가 잠시 주춤한 순간 불안한 균형이 빠르게 들썩인다.
- 독재자의 단호한 정권 수호 의지를 기대했던 엘리트는 이에 딴마음을 먹는다. 독재자의 새로운 메시지는 엘리트가 기대했던 결연한 의지와는 거리가 멀다. 숙청이 난무한 가운데 눈치 보기로 유지된 엘리트의 과잉 충성과 집단행동은 쉽게 변한다. 독재자의 마음을 잘못 예상하면 바로 숙청되는 체제에서 엘리트는 동료의 눈치를 치열하게 살피며 다음 행보 를 결정해왔다. 엘리트 몇 명이 정권의 생존을 불안해하자마자 독재자 를 향한 변심이 빠르게 확산하고 엘리트 전체의 결속을 깨뜨린다. 엘리 트의 이탈이 이어지며 결국 군의 중립 선언이 뒤따른다.
일반 시민은 더욱 과감하게 퇴진을 요구한다. 일반 시민이 시위 참여 를 두려워할 때 신념에 찬 소수 전위 그룹이 위험을 무릅쓰고 시위를 선도하며 주위의 참여를 독려한다. 시위대 규모는 점점 더 커지고 폭압이 잠시나마 약해지는 유화 국면에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봇물 터지 듯 나오며 혁명 성공에 대한 기대가 가파르게 상승한다. 상황이 일관 되게 나쁘면 체념하지만, 뜻밖의 유화책이 선언되면서 기대 수준 역시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재자의 약속은 빠르게 높아진 기대 수준 에 미치지 못하게 마련이고 시위대는 더욱 분노한다. 현실과 기대 사이 의 틈이 커질수록 시민은 상실감을 더 크게 느끼고 더욱더 거세게 저 항을 조직한다. 상황은 나아졌지만 저항은 거세지는 역설적 상황이 발 생한 것이다. 엘리트의 집단적 이탈과 시위대의 거센 저항에 이어 독재 몰락의 희망적 여론이 분기점을 향해 신속히 확산한다.

- 몰락하는 샤 체제와 호메이니의 복귀
1953년 이란의 팔레비는 미국 CIA가 지원한 쿠데타 덕분에 왕정 체 제를 굳건히 다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첫 민주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총리가 된 모함마드 모사데크Mohammad Mosaddeq가 쫓겨나면서 이름뿐인 샤는 절대군주로 군림했다. 석유 국유화 운동을 이끌던 모 사데크는 1949년 민족 전선을 조직해 좌파는 물론 이슬람주의 세력과 도 손잡고 넓은 지지층을 확보했다. 민족 전선이 공산주의 투데Tudeh당 과도 협력하자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정부 는 소련의 영향력이 이란에 미칠 것을 두려워해 이란 내정에 개입했다.
- 1953년 쿠데타는 샤에게 대미 종속의 족쇄, 이란 국민에게는 반미 감정 의 뿌리가 됐다. 팔레비왕조의 2대 샤는 혁명으로 물러날 때까지 25년 간 미국에 의존해 미군 주둔과 방위 동맹, 미국산 무기 구매, 미국 주요 석유회사의 이권 보호에 힘썼다.
샤는 직속 정보국 사바크Sâzemân-e Ettelâ'ât va Amniat-e Kešvar에 기대어 폭압 정치를 일삼았다. 사바크는 샤 체제에 대한 어떠한 비판이나 저 항을 용납하지 않았고 국제사면위원회는 1970년대 내내 이란을 최악 의 인권 탄압국으로 선정하며 비난했다. 사바크 국장은 부총리급이었 고 정규 요원 1만 5천 명과 비밀 정보원 수천 명을 거느렸다. 샤는 사 바크 내부에 또 다른 정보국을 두고 사바크 자체에 대한 감시도 소홀 히 하지 않았다. 쿠데타가 발발할 수 있다는 편집증적 공포에 시달렸 던 샤는 강권기구에 집착했다.
- 프랑스에서 이슬람 혁명론을 공부한 후 반샤 운동을 이끌던 알리 샤리아티Ali Shariati가 1977년 6월에 의문사한 데 이어 샤 정권이 추방 한 호메이니와 함께 이라크 나자프Najaf에 머물던 장남 모스타파 호메 이니Mostafa Khomeini가 10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자 사바크의 소 행이라는 여론이 빠르게 퍼졌다. 1978년에 들어와 대학생 시위의 규모 가 점차 커지자 샤는 당황했다. 당시 암에 걸려 몸과 마음이 황폐했던 샤는 유약한 태도를 보이며 정권 수호에 사력을 다하지 않는 듯했다. 샤는 6월 사바크의 국장을 교체했고, 8월에는 총리마저 종교계와 친분 이 있는 온건한 인물로 바꿨다. 종교계를 달래고자 카지노를 폐쇄하고 기년법을 이슬람력으로 되돌렸으며 투옥된 성직자 일부를 석방했다. 이어 국가화해위원회를 급조하더니 다당제 시행을 선언했다. 전례 없는 유화책이었다.
그러나 9월 군이 평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한 '검은 금요일' 사건이 일어나자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10월부터 석유 회 사를 포함한 국영기업과 의료계, 교육계, 언론계의 전국 총파업이 뒤따 랐고, 사바크 해체와 정치범 석방 요구가 거세졌다. 이에 샤는 왕실부 장관을 해임하고, 총리 교체 석 달 만에 또 총리를 바꿨다. 1965년부 터 1977년까지 12년간 샤 정권의 총리는 아미르 아바스 호베이다Amir Abbas Hoveyda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1978년부터 샤 체제의 붕괴 직전 까지 18개월 동안 총리가 네 번이나 잇따라 교체됐다. 잇단 유화책에 도 파업과 시위로 국정이 마비되자 11월 샤는 대국민 담화에서 민주 화 시위대와 함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고위급 관료와 강경 엘리트 60여 명을 직권남용 혐의로 체포해 국면 타개를 노렸다. 이들 중에는 샤의 어릴 적 친구이자 사바크 3대 국장인 네마톨라 나시리Nematollah Nassiri도 포함됐다. 나시리는 대표적인 강경파로 호메이니가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됐을 때 즉각적인 사형 집행을 주장했고, 1978년 봄 시위가 확산될 때 단호한 진압을 역설했다. 결국 샤가 떠나 고 왕실 근위대와 몇몇 장군이 최후의 저항을 벌일 때 나시리는 감옥 에 갇혀 있었다.
단호함을 잊고 당황하는 샤의 유약한 태도는 엘리트에게 결정적인 신호였다. 샤의 엘리트는 충격에 빠졌다. 샤가 허둥거리며 강경책을 수 정하고 시위대에 사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상류층 엘리트는 바로 재 산을 챙겨 이란을 떠날 준비에 들어갔다. 샤가 이란을 떠난 직후 '테헤 란의 도살자'로 불렸던 보안군 사령관은 프랑스로, 직전에 해임됐던 세 총리는 미국으로 떠났다.
군부는 정권의 미래가 불확실해지자 재빨리 독자 행보를 결정했다. 육군 참모총장과 장성 25여 명이 모여 군의 중립화를 선언하자 장교 대부분이 혁명 세력에 투항했다. 최정예 엘리트 집단인 공군 장교 사이 에서도 내부 반란이 일어났고 많은 수가 투항했다. 군의 투항은 지배 엘리트의 분열과 시위의 폭발적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제로 고위급 장교 모두가 샤의 충복은 아니었다. 쿠데타의 두려움에 시달리 던 샤가 군부 전체를 사바크 감시 아래에 두자 군의 불만이 높아졌다. 또한 대령급 이상의 군 수뇌부는 샤의 사적 후원 속에서 호화 생활을 누렸으나 중간급 이하 지휘단의 처우는 열악했다. 상급 지도부가 호화 스러운 서구식 생활을 누렸던 것에 비해 일반 사병은 여전히 전통 가 치를 중시했고 문맹률 또한 50%에 달했다.
- 측근 엘리트가 살길을 찾아 해외로 도주하는 동안 시위대는 호메이 니의 대형 사진을 앞세우고 샤의 즉각적인 퇴진을 더욱더 거세게 요구 했다. 샤의 유약한 태도는 민심을 달래지도 못했다. 게다가 1977년 새 로 취임한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공화당 정부가 묵인했던 이란의 인권 상황을 비난하자 샤의 권력 약화설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특히 이슬 람 성직자가 죽음을 무릅쓰고 시위를 이끌었으나 시위에 참여한 많은 사람이 사바크 요원에게 붙잡혀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위험하기 짝 이 없는 시위를 초기에 조직하는 데는 남다른 사명감으로 무장한 소 수의 전위 그룹이 필요하다. 이슬람 법학자인 울라마 몇몇은 순교를 마 다하지 않고 군과 비밀경찰의 물리적 폭압에 맞섰으며 이들의 영웅적 행위는 저항 확산의 촉매제가 됐다. 전통 시장인 바자르bazaar처럼 폐쇄적이고 촘촘한 네트워크 역시 보안이 중요한 초기 시위의 조직화에 효과적이었다.
급진 울라마 그룹은 시위를 선도하며 광범위한 반체제 연합을 이끌 었다. 부패한 독재자의 퇴진이라는 구호 아래 성직자와 신학교 학생, 바자르 상인과 수공업자, 공산주의 투데당을 포함한 좌파 연합, 대학생 과 중간 관료층이 중심이 된 세속 자유주의 그룹이 함께 모였다. 당시 이란의 시민운동은 모사데크가 결성한 다양한 정파의 연합체인 민족 전선에 뿌리를 뒀다. 혁명이 확산하는 과정에서 성직자 전위 그룹은 전 통 가치와 이슬람에 친화적인 사회경제적 중하층 시민을 동원했다. 바 자르, 모스크, 이슬람 법원, 복지 재단 등 일상에서 접하는 기관이 거점이었다. 반면 서구식 정치 시스템에 기반해 권력 분산을 강조하는 좌파와 세속 자유주의 세력은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했다. 혁명의 성공 가능성을 향한 시민의 기대가 상승했고, 시위 참여자의 수도 점 차 증가했다.
결국 샤는 1979년 1월 치료를 핑계로 이란을 떠났다. 건강이 나빠졌 다며 조금도 버텨보지 않은 채 이집트로 피했다. 민족 전선 출신의 중 립적 인사에게 총리직을 맡긴 지 열흘만이었다. 샤는 국내 권력 자원 이 크게 약화되기도 전에 쉽게 포기해버렸다. 샤가 떠나고 호메이니가 15년의 망명 생활 끝에 돌아왔다. 군의 중립화 선언 이후 정치인과 관 료가 줄이어 호메이니의 임시정부에 충성을 선언하면서 샤 체제는 막을 내렸다.
- 혁명 이전의 상황은 독재 체제가 폭발 직전의 압박을 겨우 버티는 단계다. 공안 정치, 인권유린, 부정부패, 무능과 비효율성, 불평등과 빈 부격차, 생활고와 실업 등 독재에서 흔히 나타나는 여러 문제점은 혁 명이 일어나게 할 충분한 조건이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은 체제의 약 점일 수 있으나 정권 몰락의 핵심 요인은 아니다. 정권 생존의 가장 큰 위협은 독재자와 측근 엘리트가 체제의 인위적인 안정성과 현실의 취 약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 독재 정권을 흔드는 우발적이고 우연한 계기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일단 충격이 더해지고 균열이 일어나면 그 파급력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며 체제 붕괴라는 극적 변화로 이어진다. 1979년 이란혁명이 그 랬다. 인류사의 모든 혁명처럼.
- 1979년 이란혁명과 마찬가지로 2011년 아랍의 봄 혁명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전 이란혁명 글에서 살펴봤듯이 혁명은 원래 그렇다. 아랍의 독재는 프랑스 절대왕정, 제정 러시아, 이란 팔레비 왕정, 동유 럽 공산주의 체제처럼 갑자기 몰락했다. 독재 정권 대부분은 특별한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붕괴한다. 공포정치 아래서는 정확한 여론이 존 재하기 어렵기에 독재자, 엘리트, 시민 모두가 서로의 속마음을 몰랐고 정권의 빈약한 토대를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의 안정은 소수 정권 엘리트의 억압과 통제로 쉽게 유지될 수 있다. 독재 정권에 가장 큰 위협은 겉으로 보이는 평온함을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데 있다.
-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 리비아의 카다피, 예멘의 살 레는 격렬한 반정부 시위에 우왕좌왕하며 강경책을 철회했고 이는 정 권 붕괴의 촉매제가 됐다. 특히 아랍의 봄 혁명 발발 당시 위압적 권위 주의 국가군으로 같이 분류되던 튀니지와 이집트의 정권은 매우 비슷 한 시기에 유사하게 극적으로 몰락했다. 두 나라 독재자의 강경책 철회 에 군부는 재빨리 군의 중립화를 선언했다. 독재자가 체제 수호에 자신 없어 하는 순간 엘리트 간의 협력은 바로 사라진다. 독재자가 민심을 달래려고 자유화를 공약하자 반독재 여론은 더욱 빠르게 퍼졌고 독재 자 퇴진에 대한 희망도 높아졌다.
- 혁명 발발과 독재 몰락의 원인을 다르게 보는 해석도 있다. 혁명 전 후 독재자, 엘리트, 시위대 간의 촌음을 다투는 손익계산이 아닌, 장기 간에 걸친 사회경제적 구조의 변화를 중요한 변수로 보는 설명이다. 이 분석은 혁명 발발의 우발성이 아닌 필연적인 인과성에 초점을 맞춰 혁 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원인을 사후에 추적해 나열한 다. 혁명의 원인으로 특정 사회 세력의 영향력 변화와 이에 따라 서서히 진행된 권력 구조의 불균형을 제시한다.
구조적 설명은 2011년 아랍 혁명의 원인을 경제 저성장, 청년 실업,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를 향한 젊은 세대의 불만 고조로 본다. 분노한 아랍 시민은 SNS의 활성화 덕분에 시위를 더욱 효과적으로 조직해 혁 명으로 이끌 수 있었다고도 분석했다.
그러나 사후 인과관계를 거꾸로 추적하는 분석은 왜 20~30여 년 간 지속된 아랍 권위주의 정권이 하필 2011년에 갑작스럽게 몰락했는 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장기 집권을 하던 철권 독재자가 왜 본격 적인 시위가 일어난 지 한 달도 안 돼 부와 권력을 순순히 포기했는지, 왜 아무도 장기 독재 정권의 갑작스러운 붕괴를 예측하지 못했는지도 만족스럽게 분석하지 못한다.
- 게다가 아랍 국가의 저성장과 부정부패는 제3세계 전반에서 나타나 는 공통적 문제점이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신생 엘리트는 제국주의 가 만들어놓은 강권기구를 복원하면서 정치적 경쟁자를 견제하고 시 민을 배제했다. 이는 탈식민국가의 공통된 특징이다. 토착 부르주아 계 급과 다원주의의 부재 속에 국가의 우위는 지속되고, 근대화의 거대한 목표 아래 국가의 권력은 더욱 커졌다. 소수 엘리트가 장악한 국가는 석유나 외부 원조와 같은 불로소득에 의존했고, 국가의 행정 역량과 정권의 정당성, 은행과 재정 기관의 신용도는 바닥을 밑돌았다. 따라서 개발도상국에서 비슷하게 나타나는 구조적 문제가 왜 유독 튀니지와 이집트, 리비아, 예멘에서만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설명해야 한 다. 게다가 혁명의 발생지인 튀니지가 아랍 세계에서도 부유한 나라인 반면, 혁명이 비껴간 알제리는 경제난과 실업난이 극심했다.
- 미국에 이어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중국도 탈레반의 재집권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접하는 중국이 보기에 탈 레반 정권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疆维吾爾自治區의 위 구르 분리 독립 세력을 자극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중국은 정권을 차지한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하루빨리 안정적으로 통제하기를 바 란다. 미국의 부재와 힘의 공백으로 생긴 탈레반의 독주가 내심 당혹 스럽기도 하다. 미국의 전례를 지켜본 중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장기 전의 늪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탈레반의 이인자인 바라다르를 톈진으로 초대해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독립운동 단체인 '동투르키스탄이 슬람운동'과의 단절을 촉구하면서 일대일로 전략에 따른 아프가니스 탄 재건 사업과 경제 지원을 당근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이슬람 급진주 의의 확산이 존재 이유인 탈레반은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 자행되는 중국 정부의 무슬림 탄압에 침묵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지도부 내 초강경파와 이들과 연계된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인 IS-K는 중국에 커 다란 안보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
- 중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급진주의 및 극단주의 조직 간에 갈 등이 생길 경우, 미군이 철군하면서 남긴 수많은 무기가 여차하면 중 국을 겨냥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비수가 될 수도 있다. 아프가 니스탄은 캅카스 Kavkaz, 베트남과 더불어 '제국의 무덤'으로 불린다. 대 영제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보호국으로 만들었지만 엄청난 희생을 치렀 고, 미국에 앞서 소련은 냉전이 한창이던 1979년 아프가니스탄의 사회 주의 세력을 지원하고자 전쟁을 일으켰다. 미군 철수와 탈레반의 귀환 은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거대한 체스판 위의 민감한 화약고에 새로 운 충돌의 불씨를 심었다.
- 이슬람주의 운동의 부상과 변형은 아랍 민족주의의 쇠퇴와도 맞물 렸다. 1950~1960년대 아랍 국가는 비동맹 사회주의 공화국과 친서구 보수 왕정으로 양분됐다. 공화국과 왕정의 대립은 1978년 이집트의 캠 프데이비드협정 체결 이후 대이스라엘 강경국과 온건국 간의 대결로 변했다. 아랍 민족주의의 상징인 이집트의 변심으로 실망과 회의가 확 산하면서 민족이 아닌 무슬림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이슬람주의가 떠 올랐다. 1980년대 내내 이어진 이란과 이라크 간 전쟁을 둘러싸고 반 미 이슬람주의가 선동의 핵심 구호로 자리를 잡으면서 아랍 민족주의 는 더욱 설득력을 잃어갔다. 아랍 국가인 이라크와 이란이슬람공화국의 전쟁을 둘러싸고 대이스라엘 강경국인 시리아, 리비아, 예멘, 알제리 는 미국 공화당 정부의 지원을 받던 아랍 형제국 이라크에 반대하며 이란을 지지했다. 1990년에 발발한 걸프 전쟁을 기점으로 1990년대에 는 아랍 내부의 갈등이 더 깊어졌다. 이라크가 아랍 형제국인 쿠웨이 트를 침공하자 요르단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라크를 두둔했지만 아랍 민족주의는 아무도 믿지 않는 공허한 구호가 됐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숨어 있던 알카에다 의 우두머리 오사마 빈라덴의 신병을 원했으나 탈레반 정권은 이를 거절했다. 미국은 바로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해 탈레반을 몰아냈다. 2011년 미국 특수부대는 파키스탄에 숨어 지내던 빈라덴을 사살했으며, 알카에다의 나머지 핵심 멤버는 미국 교도소에 갇혀 있다.
- ISIS의 프랜차이즈화 현상이 ISIS 자체가 아닌 각 나라 고유의 사 회경제적 취약점과 연동된다는 사실이 더 무섭다. 세기말적인 ISIS 모 방 테러는 각 나라의 특정한 국내 문제와 맞물리며 더욱 확산했다. 시 리아와 이라크에 근거지를 둔 ISIS 수뇌부가 사라져도 각 나라의 부정 부패, 치안 부재, 이민자 통합, 총기 허가 등 특정 취약 고리와 사회 불 만이 만나 자생적 극단주의의 프랜차이즈화가 나타난 것이다. 2016년 튀르키예 이스탄불 국제공항 테러 역시 에르도안 대통령의 부정부패 와 권위주의 정치가 결정적인 촉발 요소로 작용했다. 물론 튀르키예가 반ISIS 국제 연합 전선에 참여하고 시리아와 긴 국경선을 접하는 데다 가 과거 '이웃 국가와 문제없이 지내기zero problems with neighbors' 정책으 로 이슬람 극단주의 격퇴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것도 배경이다. 그러나 당시 유독 튀르키예에서 ISIS 테러가 집중적으로 일어난 까닭은 에 르도안 대통령이 유능한 테러 전담 인력을 정적과 시민단체를 관리하 는 공안 부서로 대거 이동 배치해 생겨난 안보 공백에 있었다. 미국에 서 연속적으로 일어난 ISIS 연계 테러는 총기 규제의 허술함이 방아쇠 역할을 했다. 9·11 테러 이후 보안 검색이 강화됐으나 미국의 고질적인 총기 규제 실패가 온라인 극단화를 거친 외로운 늑대에게 빌미를 제공 했다.
ISIS는 국제사회의 이목을 모으고 건재를 과시하려고 민주주의국가 를 상대로 테러를 시도할 것이다. 이들의 후속 테러 가능성은 늘 존재 한다. 하지만 ISIS는 낮은 응집력 문제로 점차 약화할 것이며 간헐적인 서구 테러로 명맥만을 유지할 것이다. 그래도 ISIS 테러 문제는 그 조직 자체보다는 각 나라에 누적된 국내 고유의 정치, 사회, 경제 문제와 깊 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근본적인 해결에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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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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