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알베르 카뮈 Albert Canus, 사뮈엘 베케트 Samuel Becket는 삶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삶은 하나의 커다란 ‘우주적 장난 Cosmic Gag' 이다. 우리는 이 장난에 웃다가 숨이 막히기도 한다. 사르트르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사물과 달라서 '미리 정해진 본질'이 없다. 예를 들어 재떨이는 담뱃재와 꽁초를 담는다는 '존재의 이유'가 있지만, 인간의 삶에는 객관적인 의미가 없다. 우 리가 담뱃재와 꽁초를 들고 있다고 하면 그것 또한 우리의 선택 이다. 바로 인간 재떨이가 된다는 선택, 인간에게는 선택지도 다양하다. 예컨대 우리는 히피가 될 수도 있고, 변호사가 될 수도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선택을 하는 이유가 “실존이 본질에 우선 하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삶의 의미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불가피한 책무다. 사르트르의 선언에는 인간에게 불리한 면도 있다. 원하지 않 을 때에도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 좋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 자유 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관한 객관적인 지침이 없다. 히피가 되는게 나을지 변호사가 되는 게 나을지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인간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진다. 객관적인 지침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선택은 임의성을 띤다. 이건 웃긴 일이다. 솔직히 이거야말로 인간의 실존이 부조리하다. 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안타깝지만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의 수많은 사물처럼 인간 역시 미리 정해진 본질을 가진 객체”라는 생각도 부조리하긴 마찬가지다. 일부 실존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삶의 모든 부조리를 당연한 걸로 받아들이고 어찌 됐든 계속 살아나가자.” 카뮈는 시시포스의 신화 The Myth of Sisyphos)라는 독창적인 글에서 부조리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의 실존을 그리스 신화에 나 오는 시시포스에 비유했다. 시시포스는 무거운 바위를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 인물이다. 바위가 떨어지면 처음부터 다시 밀어야 한다. 즐거운 파티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카뮈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만 한다.” 이거야말로 부조리 그 자체다.
- “아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온갖 것을 다 찾아낸다. 어른들은 온갖 것이 다 있는 데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다.” (레오파르디)
- 20세기 독일의 실존주의자이자 현상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에게 일상성 everydayness'의 문제는 '세계 내 존재 being in the world'의 핵심 특징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존재의 의미도 모른채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봤다. 그래서 인간은 만족스러운 존재가 되고자 분투하는데, 하이데거는 그것을 기투project라고 불 렀다. 보통은 종교라든가 이데올로기(객관적인 과학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봐야 한다는 견해도 여기에 포함된다)가 기투의 수단이 된다. 
- 쾌락주의자들은 항상 추종자를 잔뜩 끌어 모았다. 쾌락의 극대화를 삶의 목표로 간주했다고 최초로 기록된 철학자 중 하나는 그리스계 리비아인이었던 철학자 아리스티포스 Aristippus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어떤 것이 좋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아리스티포스가 말하는 쾌락에는 예외도 없고 조건도 없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대 그리스의 다른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가 독특하고 새로운 쾌락주의 이론을 제시했다. 그의 쾌락주의는 어떤 쾌락을 피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침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걸 읽고 있노라면 주일학교 수업에 온 기분이 든다.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격언(그는 함축적인 표현의 대가였다)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면 그의 풍요를 늘려주지 말고 그의 욕구를 줄여라.” 하나 더. “우리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온 세상을 가진 기분일 테고,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그것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집중될 테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쾌락은 바로 앞에 놓여 있으니 눈앞의 쾌락을 실컷 즐겨라. 더 강한 쾌락을 찾으러 떠날수록 우리는 끝없는 갈망의 길에 놓일 것이다. 그러면 하나도 즐겁지 않다.
- '카르페 디엠'의 시작은 호라티우스가 다음과 같은 걸작 시를 썼던 기원전 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명하게 생각하고, 포도주를 마셔라. 
짧은 우리네 인생에 긴 욕심일랑 잘라내라. 
오늘을 즐기고, 내일을 되도록 의심하라.
호라티우스는 고대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던 시대 에 살았다. 당시에는 개인의 정치적 역할이 축소되는 상황에 적 응하기 위해 철학도 인간의 내면을 향했다. 수백 년 전 플라톤이 아테네에 설립한 아카데미에서 호라티우스는 자기조절과 절제 를 중시했던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저서를 접했다. 그 래서인지 호라티우스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절제하지 말고 무조 건 오늘을 붙잡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사회에 어떤 여하으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그도 별다른 설명을 하지 못했다. 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호라티우스가 말했던 '카르페 디엠’ 은 순간에 충실하라'는 의미보다 '당장 행동하라'에 더 가깝다. 
- 1920년대에 독일계 미국인이자 게슈탈트 심리학자 Gestalt psychologist(인간은 자신이 본 것을 조직화하려는 기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심리학자-옮긴이)인 카를 던커 Karl Duncker는 인간의 창의성을 연구하던 중에 '기능적 고착functional fixedness' 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기능적 고착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물의 사용법에 대한 고정된 생각 때문에 그 사물을 새롭게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못 하는 현상' 흥 미롭게도 이 정신적인 장애를 가장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은 5세 이하 아이들이라고 한다. 던커가 기능적 고착이라는 개념을 창안했을 무렵, 현상학자이 자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의 대표 저서인 《존재 와 시간 Being and Time)에서 '도구적ready to hand' 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하이데거는 개인이 주체로서 세상의 사물을 바라볼 때 그 사물의 특징(둥글다, 회색이다, 딱딱하다 등)을 냉정하게 이성적으 로 파악한다는 전통적인 관념을 부인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본인이 접하는 사물에 감정을 쏟으며 그 사물과 특정한 연계를 맺는다. 각각의 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그 사물 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따라 생각을 달리하며, 그 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가지고 논다. 인간은 냉정한 관찰자가 아니라 거대하게 굴러가는 세계의 일부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한 '세계 내 존재의 상태에서 사물은 도구적이 된다. 사물을 도구적으로 바라보고 관계를 맺을 때의 문제점은 상황이 달라지면 그 특성이 갑자기 의미를 잃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물과 항상 관계를 맺기 때문에 그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 사물은 숨 쉬기나 눈 깜박이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세 계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생각을 못 한다. 라이터 역시 그저 흡연에 필요한 도구였을 뿐이다. 우리는 라이터로 맥주병을 따볼 생각은 한 번도 못 해 봤다.
- 고도로 추상적인 헤겔철학은 모든 사물과 사건이 부분적으로만 실재한다는 관념을 바탕으로 한다. 헤겔철학에 따르면 논리학, 예술, 정치, 세계사, 자연 등의 모든 사물 또는 현상의 내부에는 그 자신에 대한 부정이 포함되며, 사물 또는 현상은 그 부정을 거쳐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한다.  이를테면 헤겔은 세계 역사가 전제정치에서 귀족정치로, 귀족 정치에서 다시 입헌군주제로 진화했다고 본다. 역사가 이처럼 진 화한 이유는 역사의 특정한 단계를 거치는 동안 인간의 자유의지 가 서서히 작동하면서 변증법 dialectic'이라는 일종의 대화를 나눴 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은 현실과 일종의 대화를 나누 며, 그 대화 속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발견하고 전진 또는 발전 한다.  헤겔의 변증법을 압축해 설명해보자. 헤겔이 제시한 합synthesis'(진 테제)이라는 개념이 다소 특이하고 임의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역사 속에서 사회·정치적인 힘이 실제로 어떻게 합을 이뤘는가를 연구했고 실제 일어난 과거를 토대로 이야기한 것이므로 헤겔의 개념이 틀릴리는 없을 것이다.  우선 '정 hesis' (테제)이 있다고 하자(전제정치. 여기서는 전제 군주 한 사람만 자유를 누린다). 이 정은 '반antithesis (안티테제)에 의해 부정당한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지? 더 많은 자유! 우리가 언제 그것을 원하느냐고? 지금!” 이 투쟁의 결과로 합이 탄생한 다. 여기서 합이란 귀족정치인데, 귀족정치 체제에서는 일부 사람들만 자유롭다. 귀족정치는 이제 새로운 정(현재 상태라고도 한다)이 된다. 새로운 정은 다시 새로운 반의 도전을 받는다. “귀족정치를 자유라 고 할 수 있나? 여보게, 우리 입장에서는 자유롭지 않다네. 우리는 귀족정치에 찬성하지 않아. 우리는 더 큰 자유를 원해! 그래서 언제 그것을 원하느냐고? 당연히 지금이지!” 이러한 충돌로부터 새로운 합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합은 입헌군주제인데, 헤겔의 주장에 따르면 입헌군주제에서는 모두가 자유롭다. 하지만 헤겔, 하마터면 당신에게 속을 뻔했어요. 헤겔은 이 변증법이 무한히 반복되다가 끝나는 지점을 절대 정신 absolute spirit 이라고 불렀다. 절대정신은 도덕에도 있고, 예술에 도 있고, 정치에도 있다. 어떤 사람은 절대정신이 곧 '신'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였다. 다른 기독교인들은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겠지만, 헤겔은 스스로를 기독교 신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 글을 쓰는 작업과 고쳐 쓰는 작업은 독자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의도를 반영한다. 하지만 만약 독자가 텍스트의 단어 하나하나, 구절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낸다면 새로운 의미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렇게 생성된 의미들 중 어떤 것도 객관적이지 않다. 당신이 애인이나 배우자에게 보냈는데 잘못 해 석된' 문자 메시지를 모두 떠올려보라.  예컨대 당신이 동거 중인 애인에게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낸다고 가정하자. “자기야, 나 오늘 늦게 들어갈 거야. 내 걱정 말고 저녁 먹어.” 그런데 애인은 당신의 메시지를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난 오늘 당신이랑 저녁을 먹고 싶지 않아. 그래서 다른 사람이랑 먹을 거야.” 그래서 당신은 메시지를 고쳐 쓴다. “오늘 당신이랑 저녁을 같이 먹고 싶었는데,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가 있어서 못 갈 것 같아.” 하지만 문자를 받는 그는 이 메시지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당신이 언짢아할까 봐 당신이랑 저녁을 먹고 싶었다고 말하긴 하지만,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이랑 먹고 싶어.” 이제는 제3자, 예컨대 이혼 전문 변호사가 이 메시지들의 객관적인 의미를 찾아보려 했고, 그 의미는 이혼 사유가 된다고 가정한다
- 외부 세계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고 이론을 형성하기 위해 선험적 추론을 해야 한다는 믿음을 역사의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사람은 18세기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이었다. 특히 스코틀랜드 철학 자였던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설득력 있는 이론을 제시했다. 사 실 합리주의가 완전히 폐기처분된 적은 없다. 합리주의는 끊임없 이 부활했다. 예컨대 우연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으로 사람 눈동자의 복잡한 구조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오 늘날의 반다윈주의 이론들처럼(합리주의자들은 불가능' 이라는 표현을 제일 좋아한다). 흄은 “사실과 관찰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시스템은 아무리 섬세하고 독창적이라도 모조리 거부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오 늘날의 기준으로 이것은 상식에 가깝지만, 당시에 흄은 이런 주 장을 내놓았다는 이유로 '무신론자'와 '회의론자' 라는 손가락질 을 받았다. 에든버러와 글래스고에서는 교수 임용을 거절당했다. 사실 그는 어느 대학에서도 교수직을 얻지 못했다. 흄의 혁명적인 생각들 중 하나는 인간 본성에 관한 과학 연구 가 다른 모든 학문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인간 본성인가? 다른 지식은 인간이 어떤 종류의 질문에 답할 수 있으며 어떤 종류의 질문이 우리 능력 밖인지 아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험적 추론이 아닌 경험적 관찰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따라서 흄은 인식론자로 알려져 있다. 인식론자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회의적인 시선으로 관찰하며, 외부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험과 관찰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흄의 이론은 아이작 뉴 턴'saac Newton 을 비롯한 위대한 자연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다. 그리고 흄의 철학 역시 과학의 혁명적 발전에 공헌한 바가 있다.
- 서양 문명 속의 철학자들은 수천 년 전부터 자연법 natural law 에 관해 논의했다. 고대 로마의 키케로 Cicero가 시작해,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가 다시 꺼냈고, 그 후에는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 존 로크 John Locke 그리고 장 자크 루소 Jean Jacques Rousseau가 자연법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자연법은 미국 독립선언문에 도 등장한다. 선언문에 따르면 모든 미국인은 “자연의 법칙과 자연의 신이 부여한 독립적이고 평등한 지위를 받아들여야 한다. 자연법 철학의 기본 개념은 인간의 윤리가 타고난 본성에서 우러난다는 것이다. 자연 세계를 창조한 신성한 존재가 인간의 본성을 도덕적으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론과 분 석을 통해 자연의 법칙이 무엇이며, 이 법칙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  토머스 홉스는 자연법과 '자연 상태'를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 했다. 홉스의 견해에 따르면 자연법과 자연 상태는 불가피하게 충 돌한다. 정부와 문명이 부재하던 시절, 인류의 자연 상태는 야비 하고 포악하며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때 인류의 자연법은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인류가 자신의 생명을 해치지 않으려면 자연 상태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하며 개개인의 자주권을 권위주의 국가의 통치에 양도해야 했다. 반면 존 로크는 인간의 자연 상태란 대체로 평화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성의 자연법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침해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자연 상태는 불안정하다. 모든 사람이 자연법을 따르 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의 자연 상태에 대해 홉스보다 낙관적인 견해를 지녔던 로크는, 헌법 테두리 안에서 제한된 권한을 행사하는 정부만으로도 평화와 질서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크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선호하는 자연법 철학자는 18세기 스위스 제네바의 사회정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다. 루소는 인간의 자연 상태에 대해 한층 순진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정글에 당장 뛰어들어 주위를 살펴보라고 충고했다. 특히 때 묻 지 않은 도덕성을 간직하고 있는 원시인들을 잘 보라고 말했다. 원시인의 도덕은 왕과 지주, CEO와 리얼리티쇼 같은 것으로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썼다. 원시적인 상태의 인간처럼 평온한 존재는 없다. 원시 상태의 인간은 어리석은 야만인과 사악한 지식을 가진 문명인의 딱 중간 지점에 있다." 특히 루소는 문명인이 살아가는 방식보다 원시인이 살아가는 방식이 낫다고 주장했다. 원시인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 심통 사나운 활동'에 오염되지 않았고 이기적으로 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플라톤의 주장에 따르면 군인 계급은 용기라는 미덕을 지니고 있지만, 사회 지도자나 수호자에게 요구 되는 미덕은 지혜다. 따라서 사회를 다스리는 사람은 철학하는 군주여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삶의 조용한 즐거움을 추구하려면 정치에서 손을 떼라고 충고했다. “당신은 당신의 집 뜰을 보살피고, 세상은 세상이 스스로 보살피도록 놓아두라.”
마키아벨리는 권력이 한군데로 집중되는 체제를 지지했다. “어떤 왕자가 권력을 유지하기를 바란다면, 항상 선한 행동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갈 때는 그 교훈을 실천해야 한다.”
근현대 철학자들 가운데서는 니체가 인간의 권력 의지 will to power'에 주목했다. 니체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권력 의 지를 긍정하는 일은 건강하고 고귀한 것이며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평범한 대중에게 권력을 행사할 자격이 있다. 
20세기 프랑스 사상가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는 권력이 정치 체 제에만 있지 않고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푸코는 생각의 한계를 정하는 일에도 권력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트랜스젠더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점점 변하고 있다면, 그것은 학교와 또래집단 등 공식적 및 비공식적 권력 집단들이 사람들의 태도를 특정한 방향으로 통제하려고 애쓴 결과일 것이다.
- 자유의지냐 결정론이냐.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궁극적인 질문으로 결정한(아니면 그들이 결정했다고 착각한) 순간부터 지 금까지 이 문제는 줄곧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20세기에 시작된 이 논쟁은 정신분석학과 과학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됐다. 하버드대학교의 유명한 심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였던 버러스 프레더릭 스키너 Burthus Frederic Skinner는 '급진적 행동주의 radical behaviorism’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조작된 조 건 안에서 일어난 결과”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벌이는 모든 행동 을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보상과 처벌에 대한 반응으로 본 것이다. 스키너는 비둘기들이 부리로 버튼을 누를 때마다 보상으로 먹이를 조금씩 받도록 훈련시켰다. 스키너의 논리에 따르면 결국 우리도 그의 실험에 사용된 비둘기와 다르지 않다. 물론 우리에게는 깃털이 없다는 차이가 있긴 하다. 스키너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행동과학은 인간이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한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갖고 인간은 결국 환경에 통제당한다고 주장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키너는 모욕적인 의도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단지 사실을 기술하려고 했을 뿐이다. 당연히 스키너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행 동할까? 가만히 앉아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기다릴까? "아니다” 라는 것이 스키너의 대답이다. 자신을 조종하는 환경 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면 된다. 이 부분에서 스키너의 이론은 난해해진다. “자유의지에 의한 내 최초의 행위는 자유의지를 믿는 것이었다” 라는 윌리엄 제임 스의 철학적 명제도 아리송하긴 마찬가지지만. 칸트의 이론에 따르면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주장하는 두 진영 의 주장은 모두 상대편이 이상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모든 것 이 사전에 결정되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우리가 그 정보를 가지 고 무엇을 하겠는가? 가만히 누워 있으란 말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그리고 이 가정에 따르면 가만히 누워 있는 것 또한 자유로 운 선택이 아니다. 우리는 우주의 명령에 따라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 로운 행동을 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그것이 100퍼센트 무작위로 이뤄지는 행동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의문이 든다. 으아. 철학은 항상 이런 식이다.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던진다. 그래도 철학의 질문들은 정말 재밌지 않은가?
-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심장이 두근두근했던 시절부터 서양 철학자들은 '사랑'의 여러 가지 의미를 정확히 구별하려고 노력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인간이 경험하는 다양한 사랑의 감정을 여덟 가지 단어로 각기 다르게 표현했다. 여신 에로스와 이름이 똑같은 에로스(우리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에로스에는 육체적인 사랑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가진 것을 원하는 모든 사랑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장인을 향한 도제의 사랑도 에로스로 분류된다), 친구 간의 따뜻한 사랑을 가리키는 필리아 phlia (필로소피아 philosophia는 '지혜로운 사랑' 이라는 뜻이다), 가족 간의 사랑을 가리키는 스토르게 stroge(예컨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장난이나 게임처럼 즐기는 유희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루두스ludus(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감정),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가리키는 마니아 mania(에로스와 루두스의 균형이 맞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랜 세월 지속되는 사랑인 프라그마 pragma (40년 넘게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부부의 사랑), 필라우티아philautia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사랑의 가장 높은 경지인 아가페 agape(이타적 사랑)가 그것이다.
- 제임스가 살던 시대에 심리학은 철학에서 이제 막 분리되기 시작했으므로 제임스의 《심리학 원리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역시 매우 철학적인 책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제임스는 감 정이란 무엇인가? What Is an Emotion?>라는 에세이에서 육체적 본능과 감정 사이의 인과관계를 자세히 설명했다. 제임스가 예로 들었던 유명한 사례에 따르면 우리는 곰이 보인다, 곰은 무섭다, 그래서 나는 달아난다' 라는 순서로 반응하지 않는다. 실제 순서는 곰이 보인다, 본능적으로 달아난다, 이 생리학적 반응 때문에 나는 무 서움을 느낀다'에 가깝다. 빠르게 앞뒤로 움직이는 다리, 빨라진 심장 박동, 아드레날린의 분출을 의식한 결과가 바로 무섭다는 감정이다. 울음을 터뜨리는 행동과 슬픈 감정도 같은 순서를 따 른다. 프라시노가 그린 새도 동일하다. 이 새는 본능에 따라 노래하며, 노래하기 때문에 행복을 느낀다.
-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 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서구 사회의 경우 기원전 5세기까지 회의론자는커녕 의심 많은 사람조차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 디아고라스 Dingoras가 무신론이라는 개념을 처음 언급했다. 여러분도 알고 있겠지만, 디아고라스는 철학자였다. 그러니까 말썽을 일으켜야 정상이었다. 디아고라스의 뒤를 따라 무신론자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무신론자인 프로디쿠스 Prodicus는 다소 오만한 태도로, '신은 정말 있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원시시대의 인류는 단순한 경외심 때문에 대지가 제공하는 열매를 비롯해 자신들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온갖 것을 신격화했음.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시점에 오스트리아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로이트가 환상의 미래에서 프로디쿠스의 심리학적 분서을 심화했다.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을 소망 실현 wish fulfilment 이라고 불렀다. 즉 인간은 가공의 현실을 통해 본인의 열렬한 소망을 충족한다. 프로 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는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렬 하며 가장 다급한 소망을 심리학적으로 실현하는 도구다.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렬하고 가장 다급한 소망이란? 바로 영 원한 삶에 대한 소망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떤 믿음의 심리학적 기원을 밝혀냈다고 해 서 그 믿음이 반드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신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의 심리 메커니즘을 활용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신은 이런 혼잣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모세가 나의 존재를 믿게 할 방법은 단 하나, 내가 불타는 덤불 안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 밖에 없어. 에이, 모르겠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지" 그리고 신의 존재를 믿을 때 어떤 심리적 장점이 있다는 것은 긍정적 부수효과일 수도 있다. 마치 사랑의 존재를 믿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이 중 어떤 가설이 옳든 간에, 무신론자가 등장한 이후로 어떤 철학자들은 무신론자들의 말이 틀리고 신이 정말로 존재함을 입증하는 과제에 달려들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다시 존재론적 논증을 꺼내들었다.
- 소크라테스가 끊임없이 철학적 질문을 던져 아테네 청년들의 정신을 오염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였다. 그는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멋들어지게 표현했다. “음미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물론 소크라테스를 심판하던 재판관은 그 답변에 감동하지 않 고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섀너핸의 만화에 나오는 불쌍한 멍청이의 운명도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더 큰 희망을 주는 답변은 러셀의 에세이 〈철학의 가치 The Value of Philosophy)에 나오는 함축적인 문장이다. “철학의 연구 대상인 세계도 위대하지만, 철학하는 사람의 정신 역시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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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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