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문학사에 훌륭한 작품을 남긴 괴테, 하이네, 토마스 만, 헤세, 카프카, 그리고 페터 한트케 같은 작가들은 살펴보자. 이들은 자신들에게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글을 썼다. 이들의 글쓰기는 죽음의 유혹을 극복하는 치유의 글쓰기였다. 특히 이들의 남다른 예민한 자의식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었다. 그런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젊은 날의 괴테는 『젊은 베르터의 고뇌를 써서 베르터를 죽음의 길로 몰 아넣음으로써 위기와 죽음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하이네 역시도 자신의 사촌 여동생과의 사랑의 실패를 토대로 쓴 『노래의 책』에서 사랑의 아픔을 노래하면서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했다.  한편 토마스 만은 「산고産苦의 시간」에서 글쓰기를 산고의 고통에 비유하면서 그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는 실러를 주인 공으로 내세운 그 단편에서 글이 제대로 쓰이지 않는 심정을 자신의 입장에 대비하여 토로한다. 즉 병고에 시달리며 『발 렌슈타인』을 쓰는 성찰적인 시인 실러가 괴테는 글을 쉽게 술술 쓰는 것 같은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며 한탄하는 것이 다. 헤세 역시도 글쓰기를 구도의 길에 비유한다. 그의 작품 「시인 에서 중국의 시성詩聖 한혹이 안락한 생활과 소소한 행복을 버리고 시의 길을 찾아 먼 길을 떠나는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헤세는 작품의 주인공들을 대체로 익사시키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은 죽음의 유혹에서 벗 어난다. 카프카에게도 작품 활동은 단순한 글쓰기의 행위를 넘어서는 살기 위한 존재 방식이었다. 그는 결혼 생활과 창작 생활을 갈등 구조로 보고 자신의 약혼을 번번이 깨뜨리고 만다. 그의 선택은 창작을 위해 일상적인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 위대한 작가란 훌륭한 내용의 글을 쓸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체가 있는 작가를 말한다. 니체 역시 문체를 중시하여 글을 쓸 때마다 글의 내용에 적합한 문체를 찾았다. 그는 『인간적 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서부터 아포리즘 형식으로 글 을 쓰기 시작했다. 아포리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 는 사물을 낯설게 제시해서 다르게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그 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무너뜨리고 충격을 준다. 즉 아포리즘은 진리에 가장 빨리 도달하는 형식이고 그것은 번 개처럼 진리에 도달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깨우칠 수 있 는 사람만 선택하고 그렇지 못하는 자는 쫓아내는 기능을 하 는 것이 아포리즘이다. 훌륭한 문체는 동일한 파토스를 지닐 능력과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전제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심 중을 털어놓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 니체는 아포리즘 형식으로 글을 쓰는 이유를 『차라투스트 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피와 잠언으로 글 을 쓰는 자는 그 글이 읽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암송되 기를 바란다. 산에서 산으로 갈 때 가장 가까운 길은 봉우리 에서 봉우리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다리가 길어야 한다. 그리고 잠언은 봉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몸집이 크고 키가 껑충 큰 자라야 잠언을 알아들을 수 있다.” 이처럼 잠언을 이해하려면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걸어갈 수 있는 정 신의 거인이라야 한다. 자기 시대에서만 친구를 찾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 아니다. 거인은 발밑의 난쟁이 소리는 듣지 못 하지만 멀리 떨어진 위대한 친구의 목소리는 분명히 듣는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그런 친구 중의 한 명이 스피노자였다. 스피노자는 두 사람의 진정한 선구자였고, 시대를 앞서 걸어간 위대한 친구였다.
- 쇼펜하우어는 저자를 세 가지 부류로 나눈다. 첫 번 째 유형은 사고를 하지 않고 글을 쓴다. 그들은 기억과 추억 을 바탕으로 하거나, 또는 남의 책을 직접 이용해서 글을 쓰 기도 한다. 두 번째 유형은 글을 쓰면서 사고하는 사람들이 다. 그들은 쓰기 위해 사고한다. 그 수는 매우 많다. 세 번째 유형은 사고하고 나서 집필에 착수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고를 했기에 글을 쓸 뿐이다. 보기 드문 세 번째 저술가의 글쓰기는 몰이사냥과 같아서, 짐승이 이미 우리 속에 잡혀 들 어가 있으므로 사냥꾼은 이제 목표를 정하여 쏘기(서술)만 하면 된다.
-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웃고 춤추는 것을 가르치는 책을 원 한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글 에서 번번이 잔잔한 웃음과 유머, 기지를 보여 준다. 그는 자 기 자신에 대해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웃음은 그의 철학의 정점이었다. 채플린의 코미디 연기도 쇼펜하우어의 웃음론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쇼 펜하우어는 사람들이 어둡고 금욕적인 책이라고만 알고 있 는 자신의 주저에서 의외에도 웃음론을 펼친다. “웃음은 매 번 어떤 개념과 그로 인해 생각된 실재의 객관 사이의 불일 치를 갑자기 알아차린 데서 생긴다.” 웃음은 개념과 실재의 불일치의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주저의 서문에서 그 책의 용도에 대해 이미 유머러스하게 말한다. “이 책의 서문 까지만 읽고 그만둔 독자는 현금을 주고 이 책을 샀으므로 자신의 손해를 무엇으로 배상할 것이지 물을지도 모른다. 그 러면 이제 나의 마지막 도피처는 책이란 읽지 않아도 여러 모로 이용할 수 있다고 그에게 일러주는 것이다. 이 책은 다 른 많은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장서의 빈곳을 메워 줄 것 이고, 장정이 훌륭하면 확실히 보기에도 좋을 것이다. 또는 그에게 박식한 여자 친구가 있으면 그녀의 화장대 위나 차 마시는 탁자 위에 놓아두어도 좋을 것이다. 또는 마지막으로 분명 가장 좋은 용도이자 내가 특히 권하는 것은 이 책을 비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너무나 삭막한 삶 속에서 어느 페이지를 넘 겨도 농담 한 마디 할 여지없이 너무 진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농담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 책이 그 진가를 알 만한 사람들의 손에만 들어가게 될 것을 확신하 며 아주 진지한 마음으로 책을 내놓는다고 밝힌다. 
- 구체적인 환경은 독서와는 달리 어떤 특정한 사고를 정신에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천성과 그때의 기분에 맞는 것을 생각하도록 소재와 계기를 제공해 줄 뿐이다. 때문에 용수철에 무거운 짐을 계속 놓아두면 탄력을 잃게 되듯이, 많은 독서는 정신의 탄력 을 몽땅 앗아간다. 그러니 시간이 날 때마다 아무 책이나 덥 석 손에 쥐는 것은 자신의 사고를 갖지 못하게 하는 가장 확 실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학식을 쌓을수록 대부분의 사람 들이 원래의 자신보다 더욱 우둔하고 단조로워지며, 그들의 저작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것도 이러한 독서 습관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포프가 말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 "모두의 머릿속에 산더미 같은 책이 담겨 있어 끊임없이 읽고 있지만 도무지 읽히지 않는다." (포프, 『우인열전愚人列傳』)
학자란 책을 많이 읽은 자들이다. 사상가, 천재, 세상 사람을 깨우쳐 주는 자, 인류의 후원자는 직접 세상이라는 책을 읽은 사람을 말한다.
- 자신의 생각과 독서에서 얻은 생각 :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의 기본사상에만 진리와 생명이 깃든다. 우리는 그것만을 제대로 온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독서에서 얻은 남의 생각은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이나 남이 입 다가 버린 옷에 불과하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생각과 책에서 읽은 남의 생각의 관계는 마치 봄에 꽃이 피어나는 식물과 돌멩이 속에 든 태곳적 식물 화석의 관계와 같다.
-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견해가 지닌 권위를 나중에서야 알게 되는데, 그때 그 권위는 자신의 견해에 힘을 실어 주고 그것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반 면에 책에만 매달리는 철학자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주워 모 은 견해들을 가지고 하나의 전체 체계를 만들기에 그 견해들 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그 체계는 서로 다른 재료로 짜 맞춘 로봇과 같은 반면, 독자적 사고로 만든 체계는 갓 태어난 살아 있는 인간과 같다. 전체 체계가 생겨나는 방 식은 인간이 태어나는 방식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외부세계가 사고하는 정신을 수태시킨 뒤 그 정신이 체계를 쭉 품고 있다가 낳은 것이다.
- 독자적 사고가 중요하긴 하지만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있 는 게 아니므로 약간의 애로 사항이 있다. 책은 언제든지 책 상에 앉아 읽을 수 있지만, 생각은 그렇게 할 수 없는 법이다. 다시 말해 생각도 사람과 마찬가지라서, 언제든지 마음대로 불러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오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 려야 한다. 다행히도 외적 동기가 내적 기분이나 긴장과 조화 를 이뤄 잘 어우러지면 저절로 어떤 대상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책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이 좀처럼 되지 않는다. 우리의 개인적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를 생각해 보면 그런 사실이 설명된다. 우리가 그와 같은 사건에 대해 결심을 해야 할 때 마음대로 택한 시점에 자리에 앉아 여러 근거를 숙고한다고 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럴 경우 우리의 생각이 그 문제에 고정되지 않고 다른 쪽으로 빗나가기 일쑤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문제에 반감이 생겨 그런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억지로 생각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각할 기분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뜻하지 않게 자꾸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하는 법이다. 그리고 다른 시기에 다른 기분으로 생각하면 사안을 다르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결단이 무르익을 때처럼 더디게 일어난다. 왜냐하면 힘든 과제는 나누어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전에 못 보고 지나친 것이 새삼스레 생각나기도 한다. 또한 명확하게 주시하면 문제가 대부분 훨씬 견딜 만한 것으로 생각되어 반감도 사그라질 것이다.
-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생각한 것만 진정한 가치가 있 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사상가는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사고 하는 사람과, 대뜸 남을 위해 사고하는 자로 분류할 수 있는데, 전자의 사람들이 진정한 사상가이며, 단어의 이중적 의미 에서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철학 자인 것이다. 그들만이 사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한 그들 의 삶에서 즐거움과 행복은 바로 사고에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사람들은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은 그럴싸하게 드러 내 보이기를 원하고, 그리하여 세상 사람으로부터 얻을 수 있 다고 기대하는 것에서 행복을 구한다. 그들은 이런 점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 위대한 인물의 가장 뛰어난 작품은 모두 아직 돈을 받지 않거나 또는 극히 적은 원고료를 받고 글을 써야 했을 때 나왔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도 “명예와 돈은 같은 자루에 들어 가지 못한다”는 스페인의 격언이 옳다는 것이 입증된다. 독일이나 그 밖의 나라에서 저작물이 현재 극히 참담한 상태에 있는 근원은 글을 써서 돈을 벌려는 데 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 그런데 대중은 어리석게 도 그 책을 산다. 이와 같은 현상의 부차적인 결과로 언어를 망치게 되었다.  질이 떨어지는 수많은 저술가는 신간 서적만 읽으려 하는 대중의 어리석음에만 의존해 살아간다. 즉 그들이 저널리스 트이다. 그들을 일컫는 적절한 명칭이 있다. 그들을 날품팔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마지막에 한 말이 항상 옳은 말이고, 나중에 쓴 글은 모두 이전에 쓴 것을 개선한 글이며, 모든 변화가 진보라고 믿는 것만큼 큰 잘못은 없다. 사고하는 두뇌의 소유자, 올바른 판단을 하는 사람들, 진지하게 사안을 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 외에 불과한 반면, 세상 어디서나 버러지 같은 인간이 일반적 규칙이다. 이런 사람은 전자의 사람들이 충분히 숙고해서 한 말을 언제나 자기 식으로 개선하겠다며 열심히 노력해서 결 국 개악하고 만다. 그 때문에 어떤 문제에 대해 가르침을 얻 으려는 자는, 학문이란 언제나 진보한다고 전제하거나, 이 책을 쓸 때 이전의 책들을 이용했으리라 전제해서 대뜸 그 문제를 다룬 최신 서적만 움켜잡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어느 사상의 본래적인 삶은 그 사상이 언어의 한계점에 도달할 때까지만 지속될 뿐이다. 그때 사상은 화석이 되고, 그 후 생명을 잃고 만다. 하지만 태고 시대의 화석이 된 동식물 처럼 파괴할 수 없게 된다. 사상의 순간적이고 본래적인 삶은 결정結晶이 생기는 순간 수정의 삶에 비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사고가 언어를 발견하는 즉시 사고는 이미 더 이상 마음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고 깊디깊은 근저에서는 진지하지도 않다. 사고는 다른 사람을 위해 존 재하기 시작하는 경우 우리 마음속에서 살아가기를 멈춘다. 갓난아기가 독자적인 삶을 시작하는 순간 어머니의 모태에 서 분리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 펜이 사고에 하는 역할은 지팡이가 걸을 때 하는 역할과 같다. 그러나 지팡이 없이 걷는 것이 가장 가벼운 발걸음이 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사고는 펜 없이 일어난다. 나이가 들 기 시작할 때야 비로소 인간은 지팡이와 펜을 즐겨 이용한다. 
-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처럼 사고해야 하는 반면 누구나 같 은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인식이 독일 문필가에게는 대체로 도움이 될지 모른다.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여 비범한 사상을 말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문필가들은 그 반대의 방법을 선 택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들이 시시한 개념을 고상한 언어 로 싸고, 그들의 매우 평범한 사상을 지극히 비정상적인 표현 과 지극히 멋 부리고 가식적이며 이상한 상투어로 치장하려 노력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의 문장은 끊임없이 거들먹거 리며 걸어간다. 호언장담, 아무튼 허풍 떨고 거만하고 멋 부 리고 과장된, 공중곡예 식의 문체를 이처럼 좋아하는 것과 관 련하여 그 전형은 기수旗手 피스톨Pistol인데, 그의 친구 폴스태 프Falstaff는 언젠가 참지 못하고 이렇게 소리쳤다. “자네가 무 슨 말을 하려는지 말해보게, 이 세상 출신의 사람처럼 말이 야!"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
- 형용사는 명사의 적이다 (볼테르)
- 문필가가 모든 것을 다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독자를 지루하게 만드는 비결은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는 데 있다.” (볼테르의 『인간론) 그러므로 될 수 있는 한 문제의핵심과 중요 부분만 얘기하고 독자가 혼자서도 생각할 수 있 는 것은 말하지 않아야 한다. 빈약한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어디서나 평범함을 드러내는 틀림없는 징표이다. 반면에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는 많은 사상을 얼마 안 되는 말로 마무리 짓는다. 진리는 적나라할수록 더없이 아름답고, 그것이 주는 인상 은 간단한 표현일수록 더욱 심오하다. 첫째로, 그래야 진리는 부수적인 사상에 의해 전혀 흩트려지지 않은 독자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래야 독자는 수사적 기교에 농락당하거나 기만당하지 않고, 전체 효과가 사실 자체로부터 시작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 보통 독일 작가는 되도록 모호하고 불확실한 표현 을 하는 데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로 인해 모든 표현이 안 개속의 형상처럼 흐릿하게 나타난다. 그 목적은 모든 문장에 뒷문을 열어놓으려는 계산인 것 같다. 또는 생각한 내용보다. 말을 더 많이 하려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기질이 실제로 우둔하고 굼떠서 그런지도 모른다. 외국 인들이 독일 작가가 쓴 모든 글을 싫어하는 것은 바로 그 때 문이다. 그들은 암중모색하며 글의 뜻을 파악하는 것을 좋아 하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 독일인들은 그런 표현에 기질적으 로 맞는 모양이다.  독일어의 긴 복합문에는 삽입문이 차곡차곡 풍부히 들어 가 있다. 마치 사과로 속을 채운 구운 거위 고기 같다. 미리 시계를 보지 않고는 복합문을 읽는 데 착수해서는 안 된다. 복 합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기억력이 탁월해야 한 다. 그러려면 오히려 지성과 판단력이 필요할 텐데 말이다. 하 지만 지성과 판단력의 활동은 바로 그런 이유로 힘들어지고 약화된다. 그와 같은 복합문은 찢어진 편지의 종잇조각처럼 독자의 기억력이 면밀하게 모으고 보관해야 하는 반쯤 완성 된 어구를 그에게 제공할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어구들 은 그 뒤에 따르는 각각의 다른 절반에 의해 보충된 다음에 야 하나의 의미를 획득한다. 따라서 그때까지 독자는 무언가 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동안 읽어야 하며, 오히려 마지막에 가서 진상이 밝혀지기를 기대하면서 그냥 모든 것을 기억해 야 한다. 독자는 진상이 밝혀지면 이제 생각할 거리도 받아들 여야 한다. 독자는 무언가를 이해하기 전에 그토록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독자의 인내력을 악용하는 행위이다.
- 비유는 미지未知의 관계를 기지旣知의 관계로 환원시킬 때 큰 가치가 있는 표현법이다. 우화(寓話, Parabel)나 우의(寓意, Allegorie)로 발전하기도 하는 보다 상세한 비유 역시 어떤 관 계를 가장 간단하고 구체적이며 알기 쉬운 서술로 환원시키 는 표현법일 뿐이다. 심지어 모든 개념 형성은 기본적으로 비유에서 출발한다. 여러 사물의 비슷한 점을 파악하고 비슷하지 않은 점을 내버 리는 것에서 개념 형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떤 종류의 이해를 막론하고 이해란 결국 관계의 파악이 그 본질 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이한 경우나 완전히 이질적인 사물들 사이에서 같은 관계를 인식하는 경우 모든 관계를 더욱 분명하고 순수하게 파악할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어떤 관계를 하나하나의 경우에 존재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한 그와 같은 관계에 대해 다만 개별적인, 그러므로 직관적인 인식만 가능 하다. 하지만 내가 또한 두 가지 상이한 경우에서 같은 관계 를 파악하는 즉시 그와 같은 관계의 모든 종류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며, 그러므로 보다 깊고 완전한 인식을 하게 된다. 이처럼 비유는 인식을 위한 강력한 지렛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놀라우면서도 적절한 비유를 내세우는 것은 깊은 지성의 증거이다. 아리스토텔레스 45도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비유를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위대한 일이다. 비유만은 다른 삶에게서 배울 수 없으며, 그것은 천재적인 천성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좋은 비유를 들기 위해서는 같은 성질을 인식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학』)
이 밖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비유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철학에서도 확연히 다른 사물에서조차 같은 성질을 발견하는 것은 명민함의 징표이다. (『수사학』)
- 언젠가 동사의 시칭과 화법, 명사와 형용사의 격을 생각해 내고 구별한 우리의 선조들과 이 모든 것을 창밖으로 던지고 싶어 하는 한심한 작자들의 차이는 얼마나 현격한가! 그들은 이처럼 대충 표현함으로써 자신에게 알맞은 미개인 은어를 후세에 남기려고 한다. 이들은 현재 모든 정신이 파탄한 문학 시대의 싸구려 매문업자賣文業者들이다. 신문기자들로부터 시작된 언어 파괴는 문학 비평가와 책 들에서 순종하고 경탄하는 추종자를 발견했다. 그들은 적어 도 그런 행위와 상반되는 예를 통해, 그러므로 훌륭하고 진정 한 독일어를 수호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며, 현 상황에 저항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단 한 사람도 더없이 저열한 문 학 천민에게 학대받는 언어를 도우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양떼처럼 바보들 뒤를 따르고 있다.
- 많은 독서와 배움이 자신의 사고를 중단시키듯이 많은 글 쓰기와 가르침도 지식과 이해의 명확성과 철저함의 습관을 자 연히 버리게 한다. 명확성과 철저함을 얻을 시간이 없기 때문 이다. 그래서 그는 강의를 할 때 명확한 인식이 부족한 것을 말과 미사여구로 채우려고 한다. 대부분의 책이 말할 수 없이 지루한 것은 주제가 무미건조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때문이 다. 훌륭한 요리사란 낡은 구두 밑창을 가지고도 맛있는 요리 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듯이 훌륭한 저술가는 무미건조한 주제를 재미있게 만들 수 있다.
- 인생의 고갯길을 힘들여 올라갈 때 다리를 부러뜨리는 경우는 드물다. 편하게 살아가며 안락한 길을 선택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 모든 철학 학파에는 다음과 같은 세 명의 사상가가 잇달아 나타난다. 다시 말해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의 몸에서 체액과 정액을 만들어내고, 두 번째 사람은 그것에서 실을 뽑아 정교한 그물을 만든다. 세 번째 사람은 이 그물 속에 숨어 자기에게 걸려드는 제물을 노린다. 그리고 철학으로 생계를 이어가려고 한다.
- 학문의 세계에서 매일 매순간 벌어지는 현상이지만, 문제가 해결되기 직전 자신의 노력이 완전히 허사였다고 확신하 고 일을 멈추는 자가 있다. 이것은 나비매듭을 풀면서 풀리기 직전 머뭇거리는 자와 같다. 바로 그때 매듭이 가장 단단히 매어졌다고 생각해서다.
- 정신의 고갈에서 생기는 냉정함과 절제에서 생기는 냉정 함을 혼동하지 않으려면 전자는 기분이 언짢고, 후자는 쾌활 하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 좋은 표현, 좋은 사상이란 같은 부류의 것 사이에서만 뛰어나 보인다. 훌륭한 인용구를 섞은 글은 전체 페이지, 그러니까 책 전체를 망쳐 버릴 수 있다. 젊은 작가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인용구는 독자에게 경고해서, 이렇게 소리치는 것 같기 때 문이다. “주의하라, 나는 보석이다. 그리고 내 주위에는 납, 색 바랜 창피스러운 납이 있다.” 
- 문체를 망치는 주된 요인 : 어떤 사물에 대해 실제로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느낌을 나타나려고 할 때 언어나 모든 예술에서 양식을 망친다. 오히려 모든 위대한 예술은 그 반대의 경향을 보인다. 위대한 예술은 윤리적으로 훌륭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 정을 억제하고 끝까지 발산하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감정을 반쯤 드러내는 이런 조심성은 예컨대 소포클레스에게서 가장 아름답게 관찰할 수 있다. 감정이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냉정하게 드러낼 때 감정의 표정은 아름답게 변용 하는 것 같다.
- 저자들의 충만함: 훌륭한 저자가 마지막으로 얻어야 하는 것이 충만함이다. 충만함을 지니고 다니는 자는 결코 훌륭한 저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가장 좋은 경주마는 승리를 거둔 후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때까지 여윈 상태로 있는 것이다.
- 병약病의 효용 : 자주 앓는 사람은 그 만큼 자주 건강을 회복하는 까닭에 건강한 상태를 훨씬 크게 향유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나 타 인의 일과 행위 속의 건강함과 병약함에 대해 극도로 예민한 감각을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예컨대 병약한 문필가들(그런데 위대한 문필가들은 거의 모두 병약하다)의 저작은 건강에 대한 훨씬 확실하고도 균형 잡힌 색조를 띠곤 한다. 그들은 신체가 튼튼한 사람들보다 정신적 건강과 쾌유의 철학 및 그 스승, 즉 오전, 햇빛, 숲과 샘물에 통달해 있기 때문이다.
- 선택된 현실:  훌륭한 산문 작가는 일상용어에 속하는 말만을 취하지만, 그렇다고 그 일상 용어의 모든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선택된 문체가 생긴다. 이처럼 미래의 훌륭한 시인도 현실적인 것만 묘사하고, 이전의 시인들 이 힘을 발휘했던 모든 환상적인 것, 미신적인 것, 반쯤 솔직 한 것, 퇴색한 대상은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 현실만을 취하지만, 모든 현실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현실만 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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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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