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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의 경제학

경제 2014. 11. 4. 22:29

 


강대국의 경제학(Balance)

저자
글렌 허버드, 팀 케인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4-07-11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경제학자의 시각으로 밝혀낸 국가 흥망성쇠의 패턴 모든 번영의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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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드리아노플 전투가 벌어진 서기 378년 8월 9일은 로마가 쇠퇴와 멸망으로 돌아선 전환점으로 삼기에 좋은 날. 발렌스 황제가 직접 이끈 로마둔은 침략해 온 고트족을 아드리아노플로 몰아넣음. 황제는 고트족을 확실하게 물리치고 싶어했음. 그러나 그날 로마는 전투에서 완패. 황제는 대다수 최고급 장교와 호민과 그리고 병사들과 함께 전사. 로마의 취약성은 위대한 도시 자체가 무너질 때까지 제국의 국경을 밀어붙인 1세기에 걸친 게르만 민족의 침략을 촉발.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정확하지만 요점이 빠짐. 우선 로마사회는 발렌스가 전투에서 죽기 수십년 동안이 아니라 수세기전부터 안에서 썩고 있었음. 더 중요한 점은 애초에 고트족이 싸운 이유를 오해하고 있다는 것. 그들은 로마를 침략한 것이 아니라 동맹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것. 약탈이 굶어 죽지 않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 376년 훈족을 피해 도망친 고트족은 로마의 새 동맹으로서 도나우 남쪽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락받음. 그러나 발렌스는 약속한 토지와 식량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거부하는 다른 도시로 죽음의 행군을 보냄. 그러니 고트족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놀랄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공했다는 사실은 로마제국이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증명. 이 역사의 장은 폴 케네디의 주장과 달리 로마 쇠퇴의 원인이 과잉팽창이나 외부의 위협이 아님을 말해줌. 이에 따르면 고대제국부터 현대 유럽에 걸친 역사가 그렇듯이 위대한 문명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은 문턱에 도사린 이민족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초한 경제적 불균형이다.
- 하버드대 카르멘 라인하트와 케네스 로고프가 근래 실시한 연구는 국내총생산 대비 총 부채 비율이 90%를 넘는 국가는 쇠퇴의 전환점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보여줌. 현재 연간 적자가 연간 GDP의 5~10%에 이르고, GDP 대비 부채비율이 70% 수준인 미국은 불균형이 심각한 수준으로 빠르게 높아지고 있음. 이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합의된 사실. 그러나 정치인들의 합의는 많이 다름. 그들은 "적자는 문제가 안되며" 나중에 바로 잡을 수 있다며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으려는 초당파적 의지부족을 드러냄. 근래에 미국이 저금리 정책으로 걷잡을 수 없는 국가부채를 감당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훨씬 더 위태로운 유럽의 국가부채와 대조되었기 때문. 미국은 빚쟁이 국가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안전지대에 남은 마지막 채무자였다.
- 이스털리의 주장은 세계은행의 개발전문가들이 데이터의 상관관계를 정책적 인과관계로 무리하게 바꾸려다가 크게 실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 국가적 데이터를 확보한 후로 학자들은 애덤 스미스와 다른 학자들이 설명한 대로 자본투자와 성장률 사이의 상관관계를 확정. 그러나 더 세심한 근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자본투자가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음. 오히려 성장이 먼저 시작되고 투자가 뒤따름. 이 말이 혼란스럽다면 공산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역사적 사례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산업 투자에 집착했지만 성장은 미약했다.
- 성장에는 여러 종류가 있음. 첫째는 새로운 교역로의 확보와 같은 상업적 확장. 경제사가인 조엘 모키어의 분류에 따르면 그에 따른 노동의 전문화는 애덤 스미스의 이름을 딴 스미스식 성장으로 불림. 모키어는 규모의 효과에서 기인하는 성장을 다른 유형으로 정의. 그러나 이 유형은 스미스식 성장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구분하지 않을 것이다. 두번째 유형은 투자, 또는 로버트 솔로의 이름을 딴 솔로식 성장으로, 소득을 소비에서 생산량 증가를 위한 내구설비로 돌리는 방식. 어떤 사람들은 엄밀하게 기술이라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아이디어라고 부르는 혁신적 성장은 가장 설명하기 쉬움. 더 나은 쟁기를 만들면 수확량이 늘어남. 이 세번째 유형은 슘페터식 성장이라 불림. 인류사에서 모든 종류의 성장은 대단히 느렸으며 사실상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음. 진보는 너무나 느렸고, 생산성 증가가 인구증가에 흡수되는 바람에 평균소득은 수세기동안 변하지 않았음. 수천년 동안 인류의 1인당 일 평균 소득은 3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 가령 윤작처럼 수확량을 늘려 번영을 이루기에 충분할 만큼 폭넓은 혁신이 등장하면 추가 수확물은 평균소득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인구증가를 초래. 생산량이 10% 증가하면 인구가 10% 늘어난다는 맬서스식 함정에 빠진 것. 규모의 이점은 경계이득이 사라질 때까지 더 큰 규모에 의해 약화됨. 그리고 대규모 문맹 인구를 감안할 때 증가한 인력은 대개 지력으 늘리지 못했음. 세기가 지남에 따라 세갈래 성장 과정이 모두 착실히 진행됨. 한편 부족에서 국가가 생겨나는 가운데 각 국가는 약간씩 다른 제도를 시험. 한동안 몇몇 국가들은 번성하여 정복헤 나섰고, 다른 국가들은 거기에 흡수됨. 이 국가들의 제도는 종종 세갈래 성장을 방했으나 때로 강화하기도 했음.
- 유권자와 정치인 그리고 국가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제한된 합리성은 새로운 의의를 가짐. 입법자가 말 그대로 수백가지 사안을 다루는 것은 버거운 일이다. 게다가 완전히 다른 일로도 제약을 받음. 그렇다면 입법자는 어떤 것을 최적화할까? 대체로 대다수 입법자가 추구하는 목표는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두 목표가 일치하는 경우에도 최선의 경제정책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심장외과의나 쇼핑에 목마른 소비자만큼 이성적으로 무지하다. 대중적 농담과 달리 평균적인 입법자는 엄청나게 똑똑하고 바쁘다. 그들은 농업, 무역, 정보통신, 보건, 산업규제, 세금같은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전문성을 가졌다고 기대된다. 또한 자금모금과 사무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언론, 수사학, 연합구축을 포함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직무에도 전문가이여야 한다. 한 입법자가 실업보험을 개선하는 혁신적 제안을 검토한다고 가정해보라. 그는 우리가 식료품점에서 시리얼을 살 때 활용하는 것과 같은 어림법을 통해 이 복잡한 결정을 쉬운 결정으로 바꿀 것이다. 가령 첫번째 어림법은 당의 방침대로 또는 과거에 했던 방식대로 투표하는 것이다. 완전한 정보로 뒷받침된 선택을 하기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음. 그에 따른 결과가 혁신적인 정책이될 가능성은 낮다. 그래서 정체가 시작된다.
- 성장을 보장하는 완벽한 경제규칙은 없다. 1820년의 자본주의 규칙은 1820년의 성장을 촉진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1920년의 산업자본주의와 2020년의 기술자본주의에는 불충분할 것. 기업이 노동자에게 주식을 주는 것은 최건의 현상으로, 노동과 자본의 구분을 흐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초기 미국의 상상력과 제도를 뛰어넘는 핵심. 마찬가지로 1930년대에 제정된 노동법은 수십년 동안 노동자들이 집단적 목소리를 내는 데 유용했지만 21세기에는 직장 유연성을 제한하는 것으로 드러났음. 1940년대에는 개인노동장 3명중 1명이 노조원이었던 반면 지금은 15명중 1명이 노조원임. 미국이 국제경쟁력 확보를 위해 단체교섭 감독규정을 개정하지 않는다면 이 모델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음
- * 제한적 합리성은 지도자가 이상적인 경제정책을 선택할 능력이 제한되어 있음을 뜻함. 무지는 궁극적인 속박이다. 특히 아직 경제원칙이 발견되기 전에 경제위기에 시달린 국가들에게 더 그러함. 또한 대중이 리더를 정할 때에도 선택할 수 있는 후보가 한정되어 있고, 그 후보의 정책이 무엇인지 잘모른다는 한계가 있음.
* 국가적 정체성은 성장과 국력에 필수적인 강력한 문화, 정치, 경제제도를 만듬. 그러나 이 힘은 구조적 변화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보수적인 태도를 암시하기도 함. 정치적 정체성은 양극화와 정체의 핵심요소임.
* 지도자들은 손실회피 성향 때문에 지위를 잃을까봐 혁신에 나서지 않음. 역동적인 세계에서 경제적 변화는 종종 정치적 변화보다 빠르게 일어남. 그러나 손실 회피성향은 선도적 경제가 개혁을 주저하게 만듬
* 시간적 선호도 중요함. 관료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해도 다른 날이나 다른 해로 필요한 변화를 늦춤. 유권자들 역시 누릴 수 있는 번영의 미래가치를 습관적으로 할인하고 오늘 고통스러운 선택을 피한다
-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14년까지 41년간 로마를 통치함으로써 2세기 내내 역사상 유례없는 번영을 누린 팍스 로마나의 토대를 마련. 이 시대를 객관적으로 조망해보면,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의 전체를 지배한 문명은 로마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음. 스페인도, 영국도 그러지 못함. 거의 2000년 동안 어떤 사회도 로마가 이룬 정교한 기술적 수준에 이르지 못함. 경제사가 모키어에 따르면 "서기 100년의 로마는 1800년의 문명화된 유럽수도들보다 나은 포장도로, 하수처리시설, 상수도, 소방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로마의 인구는 19세기에 런던이 등장하기까지 어디에도 경쟁자가 없었던 수준인 100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1세기 후 로마는 성장을 멈춤. 또한 아우구스투스와 예수가 죽은 지 4세기 반 이후 로마라는 도시와 같은 이름을 지녔던 제국의 서반구가 몰락했다.
- 때로 로마의 기술적 성과가 간과되는 경우가 있음. 물론 로마의 기술이 17세기 계몽시대에 견줄만한 수준은 아니었음. 콘크리트가 로마의 유일한 주요 발명품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발명의 정의를 하드웨어에 국한할때만 그러함. 사실 경제성장과 관련해서는 전문적인 군대, 연방제 통치, 재산권 같은 로마의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 그리고 콘크리트가 지닌 영향력을 무시해서는 안됨. 콘크리트는 두가지 주요 측면에서 상업적 성장을 뒷받침했다. 첫째, 더 높은 건물, 더 나은 위생, 송수로로 공급되는 물을 통해 갈수록 밀집된 도시를 만들어갔다. 둘째, 더 튼튼한 도로를 통해 도시간 교역을 강화하는 한편 수중 콘크리트로 해상교역에 적합한 항만을 구축할 수 있게 해주었다. 1세기 동안 공공재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투자는 황제들이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상업을 촉진. 아우구스투스는 "나는 로마를 만든 벽돌을 대리석으로 바꿨다."라고 자랑. 후계자들은 그가 인프라 부문에서 이룩한 성과를 따라잡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14~37년까지 재위한 티베리우스는 새로운 국경을 따라 대규모 군사기지를 건설해 정복지를 확보. 악명높은 칼리굴라는 4년이라는 짧은 통치기간 동안 로마에 두개의 송수로를 건설하는 공사를 시작. 뒤이어 41~54년까지 재위한 클라우디우스는 도로, 송수로, 운하를 적극 건설하여 제국 전체의 속주들을 연결. 나중에 다른 목적으로 전환되기 전까지 로마의 국고는 주로 인프라 건설에 투입됨.
- 문명이 1세기 동안 기술적 성장을 이루면 절대적으로 퇴보할 가능성은 아주 낮음. 그러나 성장의 토대로 삼는 상업적 규모가 무너질 경우 경제적 붕괴가 일어날 가능성은 아주 높음. 모키어는 로마경제에 대해 이렇게 말함. "로마의 성장은 그리스와 로마가 명성을 얻은 조직, 교역, 질서, 화폐활용, 법규같은 측면에서 기인했다. 이런 성장은 경제를 장기적으로 이끌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경제가 딛고 선 정치적 토대가 흔들리자 스미스식 성장에만 기초한 번영은 빠르게 사라졌다."
- 제국시대 로마의 군주들은 수백가지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특별히 악영향을 미친 세가지 실수를 고를 수 있음. 이중 하나라도 달리 결정되었으며 훨씬 풍요로운 역사가 1000년동안 경제적 퇴행이 진행되는 암흑기를 대체했을지도 모름. 122년 시작된 첫번째 실수는 영국 중부를 가로지르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건설한 것. 이 방벽은 정복과 국경에서 물러나 안으로 움츠러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통치를 상징. 두번째 실수는 2세기 초에 세베루스가 은화의 가치를 절하한 것. 경화를 깡통처럼 얇게 만들면 단기적 예산적자를 떠받칠 수는 있지만 급속한 인플레를 초래. 세번째 실수는 3세기 초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제국의 약점을 바로잡을 치유책으로 경제를 지휘하고 통제한 것. 그 결과 민간경제는 이점을 안겼지만 장기적으로는 상당한 비용을 초래. 로마사람들은 제국이 약화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름. 경제의 성장과 쇠퇴는 대단히 느리게 진행되어서 논의의 주제조차 되지 않음.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본질적인 제도가 조금씩 무너지는 동안에도 빵과 서커스로 유희를 즐기고 거기에 회유되는 사람들이 보인다.
- 로마는 과잉팽창으로 멸망했을까? 그렇지 않다. 분명 경제적 쇠퇴는 있었지만 그 뿌리는 명백히 부실한 통치제도에 있었다. 처음에는 교체기마다 황제의 지위가 불안했고, 이후에는 통치기간 중에도 불안했다. 폭군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과대망상과 부패, 무능의 위험도 상존. 성장은 물론 경제적 번영을 누리기에도 불리한 환경이었음. 이 체제가 오래 지속된 것은 보편성, 법, 콘크리트, 저울 같은 혁신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런 혁신의 효과도 계속될 수는 없었다.
- 역사학자들의 공통평가는 로마군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민과 군 사이의 구분이 약화되었고, 결국 군이 황제승계를 완전히 통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 로마군은 지대추구 전술을 활용하여 안정, 번영, 시민의 자유, 국가안보를 비롯한 다른 모든 것을 대가로 자신들의 급여와 권력을 극대화. 그들의 요구는 세금인상으로 이어졌고, 종국에는 과세기준과 통화가치, 심지어 화폐경제까지 무너뜨림. 군대, 특히 근위대는 국가의 구조에서 취한 작은 이권을 지키기 위해 맹렬하게 싸움. 손실회피성향은 지대추구를 위한 제도를 뿌리뽑기 어렵게 만듬. 로마인들은 자신을 오이쿠메네, 즉 알려진 세계의 주인으로 여김. 물론 그 세계는 특별하고 방대했지만 그들이 보지 못한 것도 많았음. 화폐가치 절하가 가져오는 단기적 혜택에 정신이 팔린 황제와 관료들이 장기적 결과를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려움. 그들은 경제적 개념과 경제의 작동방식에 대해 제하노딘 경험적 이해만을 갖고 있었음. 군주들은 통치방식의 변화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무지했으며, 그 결과 로마 문명을 엄청난 실패에 직면하게 만듬. 어떤 의미에서 이는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경제학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학문이었고, 그후 1000년 동안이나 더 그랬다. 인플레이션 비용, 규모의 경제, 지대추구 및 산업 국유화의 위험에 대한 무지는 온갖 비극적 결과를 초래. 문제를 바로잡으려 할때조차 도덕적 해이에 대한 황제의 무지는 종종 나쁜 전례를 남겼음. 새로 등극한 황제는 시민이 정부에 진 모든 부채를 탕감해주려 했음. 아우렐리아누스는 모든 부채기록을 담은 공적 장부를 모아 불태움. 인센티브 효과에 대해 생각해보라. 그에 따른 첫번째 교훈은 최대한 많은 빚을 지고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절대 갚지 말라는 것. 그리고 두번째는 황제를 자주 죽이라는 것.
- 로마제국의 쇠퇴과정 요약
* 전환점 : 117~317년
* 경제적 불균형 : 재정, 통화, 규제의 불균형
* 정치적 기원 : 사회복지의 증가, 통치의 중앙집권화, 군사독재체제
* 행태적 역기능 : 인플레이션과 자유노동시장에 대한 극단적인 제한적 합리성, 로마군의 집단행동 문제
- 중국의 왕조는 자초한 경제난으로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보다 중앙집권화된 관료체제를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높은 비용때문에 망하는 경우가 더 많았음. 중국의 탁 트인 내륙 지리가 안기는 한가지 큰 이점은 유럽, 남아시아, 중동, 미주보다 통일을 이루기 훨씬 쉽다는 점. 이 지역들은 유럽 중심부의 알프스처럼 두터운 천연장벽을 지녔음. 통일이 용이하다는 점은 중국의 약점이기도 했음. 중국은 상대적인 피드백이 거의 없는 가운데 단일 군주의 변덕에 따라 진전을 이루었음. 노스웨스턴대 조엘 모키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 "960년 이후 중국에서는 내부정치단위 사이의 유럽식 전쟁이 드물어졌다. 정치적 경쟁이 없다고 해서 기술적 진전이 이뤄질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명의 정책 결정자가 치명적 타격을 입힐수도 있었다."
- 로마는 시대에 비해 놀라운 문명을 일궜지만, 다른 많은 요소들 때문에 맬서스식 함정을 극복할 기술적 도약을 이루지 못함. 로마가 요새화된 도시들로 갈라진 것은 비극이자 축복. 비극인 이유는 이후 1000년 동안 퇴행적 빈곤에 시달렸기 때문이고 축복인 이유는 불가피한 경쟁이 뒤따랐기 때문. 그래서 영국이 프랑스와, 피렌체가 빈과 경쟁. 중국은 거의 아시아 대륙 전체를 지배했기 때문에 유럽처럼 국가들이 경쟁하는 환경이 아니었음. 그러나 로마와 달리 중국은 농업에서 산업으로 기술적 도약을 이룰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음. 실제로 영국이 아니라 중국이 산업혁명을 이끌 수 있었고, 이끌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음. 앵거스 매디슨이 추정한 바에 따르면 400년부터 1000년까지 중국의 1인당 GDP는 당대의 서유럽보다 약 3분의 1이 많은 연간 450달러였음. 자체적인 경제적 이점 때문에 중국의 소득은 1300년까지 평균 600불로 꾸준히 상승. 그러나 그 이후 500년간은 증가도 감소도 없었다. 중국의 소득이 다른 국가들보다 높았던 이유는 방대한 규모로 평화롭게 상업을 영위했기 때문만은 아님. 물론 이점이 한 축을 형성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중국은 고유한 기술도 갖고 있었음. 105년 채윤이라는 환관이 최초로 종이를 발명. 하지만 200년 전 진한시대에 이미 종이가 만들어졌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으므로 이는 재발명인 셈. 외바퀴 수레 아이디어는 서양에서 발명되기 1000년 전인 232년 일찌감치 한 중국인에게 떠올랐다. 목판 인쇄술은 당왕조 때 발명됨. 덕분에 책뿐 아니라 놀이용 카드와 지폐가 세계 최초로 대중화됨. 이 시대에 순수한 자기와 복잡한 화학산업도 발명, 전파됨. 1041~1048년에는 필승이라는 평민이 낱활자를 발명
- 일곱차례에 걸친 정화의 원정에서 놀라운 점은 그 독보성이 아니라 규모임. 평균 90명이 승선한 317척의 범선단이 1405년 난징에서 첫 항해에 나섬. 6~8개의 돛대를 가진 상선들에는 비단, 자기, 칠기 등이 몇 톤씩 실려 있었음. 가장 큰 범선은 그 너비가 콜럼버스가 탄 배의 길이보다 길었음.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원정을 우월 컴플렉스를 가진 황제, 실은 제국의 국력 과시용이었다고 규정. 그러나 이런 규정은 고고학적 사실뿐 아니라 상식에도 어긋남. 이 원정은 교역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중국의 화법은 완곡했다. 그들은 외국군주들에게 보선에 싣고 온 조공을 바친다고 말함. 그러나 답례로 조공을 바람.
- 1500년 무렵 두개 이상의 돛대를 가진 배를 만드는 일은 사형감이었으며, 1525년에는 연안 당국에 모든 외항선을 파괴하고 외항선을 운영한 상인을 체포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칙령이 내려짐. 1551년 무렵에는 교역을 위한 것이라도 돛대가 둘 이상인 배로 바다에 나가는 것은 범죄가 됨. 결국 100년이 채 못되어 역대 최강의 해군은 명령에 따라 자멸. 이유가 무엇일까? 항해와 해외교역은 전통적으로 환관들이 관리하는 분야였다. 유학자들은 이 사업을 무너뜨림으로써 경쟁자들이 지닌 권력과 소득의 핵심원천을 제거
- 중국제국의 쇠퇴과정 요약
* 전화점 : 15세기
* 경제적 불균형 : 해외교역의 심각한 축소
* 정치적 기원 : 중앙집권화된 통치, 독재적 정책결정, 분파적 관료체제
* 행태적 역기능 : 제로섬 사고를 지닌 관료들의 손실회피, 상인과 이윤, 낯선 사상을 적대시하는 정체성 어림법, 성장을 위한 교역의 중요성에 대한 제한적 합리성
- 국민국가로서의 스페인은 북대서양 연안에 접한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이 이탈리아 일부와 남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아라곤 황 페르디난트와 결혼하면서 형성. 1469년 두 사람이 결합함에 따라 1세기 넘게 스페인을 괴롭힌 음모가 종식됨. 페르디난트와 이사벨이 신생 스페인 제국을 다스릴 때 콜럼버스가 찾아와 대서양 지도의 경계를 넘어 발견을 위해 떠나는 일에 투자해 달라고 간청. 다음 한세기 동안 스페인은 크게 성장. 최소한 지리적 확장이라는 방식으로 말이다. 호안나 공주는 1504년 이사벨이 죽자 카스티야 여왕이 되었고, 1516년 페르디난트가 죽자 아라곤의 여왕이 됨. 긜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젊은 왕인 펠리페 1세와 결혼해 저지대와 부르고뉴에 걸친 왕국을 스페인 영토와 통합. 1506년 펠리페 1세가 사망하면서 호안나는 훗날 신성로마제국 전체의 군주가 되는 아들 카를 5세와 함께 이후 50년 동안 최고통치자로 군림.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1556년부터 1598년까지 국력이 가장 멀리 뻗어나간 시기에 스페인을 통치. 16세기의 이 황금시대에 스페인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림. 요즘 사람들은 이 표현이 영국에 대한 이야기라고 잘못 알고 있음. 그러나 영국은 이 왕관을 쓴 두번째 강대국이었음. 스페인은 알려진 모든 대륙에 자국 영토를 갖고 있었음. 즉 이베리아 반도 전체,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대다수 지역, 헝가리, 남미와 북미 절반, 필리핀, 그리고 말라카와 마카오뿐 아니라 서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인도의 해안을 따라 산재한 포르투갈령 교역항을 포함하는 영토를 말이다.
- 97년 이코노미스트는 네덜란드에서 대규모 천연가스 매장지가 발견되면서 국가경제가 호황을 맞았지만 이 때문에 제조업 같은 다른 분야의 쇠퇴가 가려졌다고 보도. 그리고 이 현상에 네덜란드 병이라는 이름을 붙임. 자원 부문에 해외자본이 유입되면서 내부적 노동력 확보를 위한 다른 부문들의 경쟁력이 약화됨. 그에 따라 수출 경쟁력도 약해짐. 자원의 저주가 미친 악영향은 스페인 제국의 경우 특히 더 강했음. 아메리카의 은에서 얻은 이익이 금융부문을 개발하는 데 투입되지 않았기 대문. 대신 그 이익은 왕실과 군대로 흘러들어감. 그 덕에 군인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과 지위를 누림. 흔히 신세계를 발견하고 해상 은교역을 독점한 스페인 제국에서는 해운 산업이 빠르게 성장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 쉬움. 그러나 스페인 항구에서 상선이 사라진 것은 당시 구조적 불균형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말해줌. 해밀턴에 따르면 1588년에 "스페인의 상선 규모는 네덜란드와 비슷하거나 더 컸고, 독일의 두배였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세배였다." 그러나 다음 세기 동안 총 톤수가 약 75%나 줄었다. 스페인 항구로 들어오는 해상 교역량의 대다수는 외국 선박이 실어날랐다. 선박건조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 스페인의 쇠퇴과정 요약
* 전환점 : 1550년
* 경제적 불균형 : 재정적자와 국가파산, 잘못된 재산권
* 정치적 기원 : 중앙집권적 군주제
* 행태적 역기능 : 조합의 손실 회피에 따른 고착, 생산적 부의 속성에 대한 제한적 합리성
- 오스만은 오랫동안 유지된 제국으로 수많은 위기를 극복. 그러나 1800년대에는 유럽의 병자로 묘사됨. 1차대전의 패배는 수세기에 걸친 경제적 쇠퇴를 마무리지음. 어떻게 튀르크의 힘은 그토록 일찍(슐레이만 1세 치하인 1566년경) 절정에 이르렀다가 그토록 오래 지지부진했을까? 서양에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산업혁명이 일어났음. 그러나 술탄들은 이 모든 세기 동안 문화와 경제부문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변화를 목도하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음. 그 가운에 한 예로 고리대금업은 진보적 개혁을 거친 기독교의 금융제도에서 수용되었으나 이슬람에서는 금지됨. 우리는 재산권의 결여나 1등 시민 및 2등 시민의 존재 또는 만연한 징세도급관행을 원인으로 제시하는 것이 정확하기는 하지만 충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음. 결정적으로16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서유럽 제국둘은 혁신을 이뤘는데 오스만은 그러지 못한 이유는 무얼까?
- 일본은 섬나라여서 허약해도 문제가 없음. 반면 튀르크는 사방의 적에게 노출됨. 1850년대 초 러시아가 한편에 서고 튀르크가 서유럽 연합국과 다른 편에 서서 맞붙은 크림전쟁은 튀르크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 보여줌. 러시아는 1877~78년 벌어진 전쟁에서 다시 공격해 왔으며, 이번에는 튀르크 혼자 싸워야 했음. 튀르크는 이 전쟁에서 많은 것을 잃었고, 더 많은 영토를 독립운동에 나선 발칸과 나머지 동유럽에 떼어줌. 과거에 자주 그러했듯이 국방비용을 대기 위해 창의적인 부채에 의존했으며, 이번에는 국방비용을 대기 위해 외국 대부업자로부터 돈을 빌림. 경제사가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튀르크는 1854년 처음 해외 부채를 끌어옴. 이후 20년만에 해외부채는 지나치게 늘어나서 예산의 절반을 상환에 써야 했음. 결국 튀르크는 곧 파산을 선언했고 심지어 부채지불을 중단하기도 함
- 오스만 제국 쇠퇴과정 요약
* 전환점 : 1550~1600년
* 경제적 불균형 : 재정적, 기술적 불균형
* 정치적 기원 : 중앙집권화된 통치, 신권정치, 지대추구 관료계급
* 행태적 역기능 : 제로섬 관료체제의 손실회피, 외국 아이디어에 적대적인 정체정 어림법, 성장을 위한 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제한적 합리성
- 폴 크루그먼은 94년 포린 어페어스에 실은 글에서 아시아의 경제기적이 지니는 한계를 지적하며 "동아시아가 기록한 성장의 현실은 몇가지 유명한 교훈을 잊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해준다."라고 씀. 그는 소비를 높은 국가저축률과 기꺼이 바꾸고자 하는 대중의 지연된 만족이라는 단순하고 흔한 특징을 칭송하는 한편 특히 산업정책과 선택적 보호주의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냄. 이 선견지명을 담은 글이 나온 직후 일본의 불경기와 부동산거품 붕괴가 경기순환에 따른 일시적 역행을 넘어서는 문제임이 명확해짐. 새로운 기준이 생기면서 비관론자들은 일본이 정책수립을 크게 잘못하는 바람에 10년을 통째로 잃었다고 경고. 90녀대의 잃어버린 10년 동안 전반적인 성장률은 연간 1%로 서양에 뒤쳐짐. 이 지지부진한 회복 후에 또 다른 10년도 잃어버린 것으로 선언됨. 생산력은 더이상 수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음. 그러나 이 일반적인 인식은 사실이 아니었음. 일본의 실제 GDP성장률은 평균적으로 거의 서유럽과 나란히 나아갔음. 잃어버린 것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신화적인 초모델에 따른 특춣나 성장이다.
- 레스터 서로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빠른 경제성장을 이끌어 왔다는 점에서 일본 특유의 관리자본주의를 칭송. 그러나 80년대 다수 분석가들은 따라잡기식 자본주의와 기업가 정신이 추동하는 자본주의를 이해하거나 구분하지 못함. 일본식 초모델은 빈곤수준과 상관없이 초고 선진국 수준의 80%까지 끌어올리는 성공적 방식이 있음을 증명. 그러나 이 따라잡기 모델은 강압적이고 중앙집권화된 산업관리와 수출조작, 집중적 인프라 투자에 의존. 이 각각의 접근법은 최고수준 근처에서는 더이상 효율적이지 않음. 속도야 다르겠지만 향후 20년 안에 한국에 이어 중국이 일본을 따라 천장에 부딪힐 것임. 이렇게 생각해 보라. 국가전체에 고속도로 인프라를 건설하는 일은 내적 규모를 확대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이를 두배로 늘리는 데 따른 한계편익은 훨씬 작음. 경계 경제는 중앙에서 승자를 고르는 것과 반대로 첨단 부문에서의 탈중앙집권화된 경쟁과 강력한 소비문화, 그리고 비교적 낮은 정부지출을 요구함
- 일본이 처한 딜레마는 경제적 불균형의 뿌리가 정치적 정체에 있다는 이론을 뒷받임. 일본 유권자들은, 오랫동안 운명론적이었음. 뉴욕 타임즈 기자 마틴 패클러는 일본 국민의 느높았던 야심이 미래에 대한 피로와 불안 그리고 숨막히는 체념으로 바뀜. 일본은 국제무대에서 서서히 퇴장하는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껍질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 대기업과 대형은행 그리고 대규모 관료체제로 구성된 트로이카의 지대추구는 정치체제가 구조개혁을 이루지 못하도록 막음. 근본적으로 일본은 현재 150년 전과 같은 딜레마에 처한 것으로 보임. 경제는 위기가 기존의 정치구조를 뒤흔들기 전에는 개혁되지 않음. 일본에게는 21세기 버전의 명치유신이 필요하다.
- 돌이켜보면 일본이 개척한 아시아식 모델은 기술적 경계를 따라잡기에는 유용하지만 앞서기에는 별 쓸모가 없음. 바둑에 비유하지만 일본은 개발경제를 위한 포석을 창조하는 데 진정 특별한 일을 했다. 그러나 이제 바둑판은 가득 찼다. 제도적 요소와 패턴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일본은 바둑판을 치우고 선진경제를 위한 새로운 포석을 짜야한다. 두자리수 성장률을 기록하는 중국을 모방하는 것을 새 모델로 삼는 일은 일본에게 가장 큰 실수가 될 것이다. 이 실수는 과거의 자신에 대한 이중반사에서 나온다. 1905년이나 1960년에 보낸 영광의 시기를 되돌릴 길은 없다. 기술적 경계, 즉 미국과의 간극 20%를 메울 성장을 다시 시작하려면, 실패를 용인하고 소규모 신생기업에 개방적인 자본시장을 갖추고, 기업가 정신과 혁신을 강조하는 완전히 다른 제도들을 조합해야 함
- 일본의 쇠퇴과정
* 전환점 : 1994년
* 경제적 불균형 : 재정적, 구조적 불균형
* 정치적 역기능 : 특수 이익집단과 중앙집권화된 관료체제에 따른 허약한 민주주의
* 행태적 역기능 : 성장에 대한 신중상주의적 어림법, 대기업과 대형은행의 손실회피
- 많은 학자들이 영국이 쇠퇴한 원인이 자유의 전사들에게 식민주의가 패배했기 때문이라는 이론을 받아들임. 그러나 니얼 퍼거슨은 식미주의 대 자유는 잘못된 이분법이라고 주장. 19세기 대다수 국가에게 영국의 식민지가 되지 않는 것의 대안은 독립이 아니라 벨기에, 프랑스, 포르투갈, 독일이라는 아주 다른 제국의 통치아래 고통 받는 것이었음. 경제학자들은 실제로 영국의 과거 식민지들이 다른 국가의 과거 식민지들보다 더 큰 번영을 누린다는 사실을 인정. 영국의 제도는 달랐다. 퍼거슨은 영국이 쇠퇴한 진정한 이유는 고귀한 명분을 위해 싸운 양차대전 때문이라고 말함. 그의 말에 따르면 제국주의 경쟁국과 싸우는 데 들어간 엄청난 비용이 결국 대영제국을 망하게 했음.
- 영국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물리친 후 전세계의 식미지에서뿐 아니라 유럽전역에 대해서도 평화로운 패권을 누림. 2위 경쟁국의 두배에 달하는 규모의 해군을 갖춘 영국은 1차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99년 동안 팍스 브리태니가를 확립. 올슨은 이 오랜 평화가 특수이익집단이 생겨나기에 최적화된 환경이었다고 말함. 시간이 흐르면서 너무나 많은 조직이 생겨나고 결탁함에 따라 영국 사회는 변하는 환경과 기술에 대한 적응속도를 늦추는 제도적 경화증에 걸렸다. 더 혁신적인 미국경제의 기술적 진전에 뒤처진 영국 경제는 전성기보다 기업가정신을 훨씬 덜 뒷받침하는 구조로 바뀜. 영국은 예나 지금이나 위대한 과학자와 발명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으나 20세기말에 상대적으로 정체됨. 영국의 고비용 국가보건체제는 납세자들에게 비싼 대가를 요구하고, 악명높게 비효율적이며,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경종을 울림. 80년대에 대처가 수상으로 일하면서 리바이어던에 맞서기는 했다. 그러나 1인당 GDP는 움직이지 않고 미국의 80% 수준에 머무름. 그래도 대형 금융거래 같은 몇몇 부문에서는 세계적 리더 자리를 차지. 유럽연합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독립통화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역시 긍정적임. 그렇다면 영국의 미래는 어떨까? 영국은 대륙의 불안정한 협력국들, 미국을 위시한 다른 많은 후손들의 모국이라는 특별한 관계에 묶여 그럭저럭 나아갈 가능성이 높아보임. 그러나 영국의 미래는 이런 관계가 아니라 제도적 선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재발견하는 능력에 좌우될 것임.
- 영국 쇠퇴과정 요약
* 전환점 : 1770~1780년
* 경제적 불균형 : 영토별 불균형
* 정치적 역기능 : 지배층의 계급적, 지리적 손실회피
* 행태적 역기능 : 시민과 속민을 구분하는 지나치게 협소한 영국적 정체성
- 지금은 모두 냉전주의자이지만 당시 많은 논평가들은 중앙에서 경제기획을 전담하는 1당 독재체제인 공산주의 제도가 낡은 입헌민주주의나 자유시장보다 우월하다고 생각. 미국 언론인 링컨 스테펀스는 소련을 방문한 후 "나는 미래를 보았고, 미래는 잘 돌아가고 있다"고 주장. 서양 경제학 저자들은 소련의 성장률과 내구성을 폭넓게 과대평가함. 새뮤얼슨이 쓴 대표적 교과서인 경제학은 독자들을 소련과 미국의 잠재력을 비교하는 논의로 이끈다. 61년판에는 60년에 100대 50으로 시작점을 설정한 가운데 소련의 GNP가 1960~2000년에 걸친 40년 동안 미국의 GNP를 따라잡는 모습을 그린 도표가 포함되어 있음. 후속판에서는 출발시점을 바꿨지만 GNP비율은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70년판까지 100대 50으로 설정되어 있었음. 그러다가 80년에 수치가 100대 55로 바뀜. 오랫동안 이 도표는 많은 학생들이 처음 접하는 미국과 소련의 경제상황에 대한 이미지를 제공. 이후 판본에서는 소련경제가 미국경제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로 나쁜 기후가 제시되었다가, 80년에는 불행한 과거로 바뀜. 또한 89년 판에는 이런 내용이 추가됨. "소련 경제는 이전에 많은 회의론자들이 믿었던 바와 달리 사회주의 명령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며 심지어 번성할 수도 있다는 증거다." 이제 우리는 진실을 더 잘 안다. 국가주의는 시대를 초월한 매력을 지닌다. 그러나 실증적 경험은 그 약속이 강압적 토대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강제노동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 민/관을 막론하고 노예제는 비도적적일 뿐아니라 결코 효율적이지도 않다. 소련의 제도는 자국민과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점령당한 이웃국가의 국민들까지 희생시켜 빠른 산업화를 이루었음. 이제 우리는 이런 성장이 생산력 경계의 약 50% 수준까지 따라잡는 데 기초하며, 제도적 동기를 대가로 총 GDP를 단기적으로 급증시키는 전형적 패턴에 따른 것임을 안다. 다행히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시간을 거슬러 온 조언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국가가 관리하는 경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했음.
- 유럽연합의 쇠퇴과정
* 전환점 : 2010년
* 경제적 불균형 : 재정 불균형
* 정치적 역기능 : 무절제한 예산적자 및 쉽게 얻은 부채, 반독립적 권한을 지닌 국가들의 도덕적 해이
* 행태적 역기능 : 선출직 관료들의 제한된 시간적 기준, 손실회피,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어림법
- 캘리포니아의 쇠퇴과정
* 전환점 : 92년부터 현재
* 경제적 불균형 : 재정 불균형
* 정치적 역기능 : 개리맨더링과 임기제한에 따른 당파적 양극단, 극단적 누진세율과 강력한 공공부문 노조
* 행태적 역기능 : 선출직 관료의 제한된 고려기간, 특수 이익집단의 집단적 행동문제
- 연방정부는 235년 역사동안 여섯번이나 큰 부채문제를 해결했음. 그러니 이번에도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과거 다섯번의 위기에서 해결한 부채규모가 현재 직면한 부채규모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전에 부채가 급증한 이유는 독립전쟁(1789년 건국시 부채), 1812년 전쟁, 남북전쟁, 1차대전, 2차대전 같은 전쟁 때문. 유일하게 고려할 사항은 2차대전으로 부채가 급증하기 전에 발생한 공황이. 다섯번 모두 전쟁이 끝난 후에는 GDP대비 부채규모도 줄어듬. 반면 지금의 부채는 수십년 동안 누적되었으며, 단일사태, 특히 전쟁을 원인으로 볼 수 없음.
- 미국사 대다수에 걸쳐 양당은 양극화되지 않았음. 70년대까지만 해도 공화당 내에 넬슨 록펠러 부통령의 이름을 따서 록펠러 공화당 의원으로 불리는 자유주의 분파가 있었음. 마찬가지로 남부의 딕시 민주당 의원뿐만 아니라 다른 보수적인 민주당 의원도 많았음. 워싱턴 주 의원인 헨리 스쿱 잭슨 같은 친국방 민자당 의원들은 폭넓은 존경과 흠모를 받음. 미국정치가 대단히 흥미로운 이유는 선거전에 비공식적으로 연합이 형성되기 때문. 유럽의 비례대표 체제에서 연합은 선거 이후에 공식적으로 형성됨. 1790년대 연방파대 공화파로 시작된 두 지배정당은 인종적 파벌, 지역적 파벌, 종교적 파벌, 경제적 파벌, 이념적 파벌을 뒤섞는 비공식적 연합체의 성격을 띤다. 그래서 한 정당이 서부인, 노동자, 카톨릭, 아시아인, 참전용사 등의 지지를 동시에 받을 수 있다.
- 미국의 쇠퇴과정 요약
* 전화점 : 75년
* 경제적 불균형 : 재정 불균형
* 정치적 역기능 : 당파적 양극화
* 행태적 역기능 : 진취적 정책을 희생시키는 정당들의 손실, 특수 이익집단의 집단행동
- 모든 사례연구에서 강대국이 외부의 위협에 무너지기 수세기전부터 내부적으로 쇠퇴한다는 사실이 확인됨. 로메제국의 쇠퇴는 3세기의 만연한 인플레와 과도한 징세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중앙기획에 따른 비극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경제적 원인에 따라 진행됨. 경제적 불균형은 교역, 혁신, 통화 등 여러 측면에서 발생가능. 재정불균형이 거듭 중심적 역할을 함. 캘리포니아는 재정적 욕구와 사라져가는 세수기반을 맞추지 못한 최신 사례임. 캘리포니아를 위기에 빠트린 것은 외부의 위험이 아니다. 그 경계에는 이민족이 아니라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떠나가는 기업가들의 행렬이 있을 뿐이다.
- 현명하고 용맹한 군주가 그들 경제의 핵심내용을 몰라서 강대국이 쇠퇴하는 일이 거듭되었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그 내용을 몰랐다. 로마인들은 통화정책을 전혀 몰랐기에 인플레와 싸울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인플레를 잡기 위해 제시된 처방은 효과가 없었고 가혹했으며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거했다. 중국인들은 교역, 특히 수입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스페인인들은 인적자본에 무지했으며, 국가의 부는 단지 유동자산이라는 믿음 아래 생산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현대 세계는 번영의 열쇠이자 지도자들이 갑작스런 충격과 쇠퇴를 피하게 해주는 풍부한 경제적 지식으로 무장해 있다. 그래도 현대경제는 우리 자신의 눈가리개 때문에 분명 새로운 오류를 저지를 것이다. 이 저주는 국가적 차원에서 드러나는 제한적 합리성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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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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