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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경제학

경제 2015. 3. 26. 20:42

 


대통령의 경제학

저자
이장규 지음
출판사
기파랑 | 2014-09-05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대한민국 경제를 살릴 다음 대통령은 누구여야 하는가? 이승만부터...
가격비교

 

 

(1) 이승만
- 도대체 얼마나 못살았던 것일까? 일본 식민지 시대에 가장 경제가 좋았던 때가 41년이었다고 하는데, 1인당 GDP기준으로 41년 수준까지 경제가 회복된 것이 68년이었음. 막대한 미국원조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엉망이었던 한국경제는 6/25 전쟁 통에 쑥대밭이 되었고, 이에 따라 박정희 시대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일제강점기 말기 수준으로 회복되었음
- 미국은 6/25 전쟁의 휴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승만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애를 먹음.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고집하며 미국에 강력히 저항. 6/25 전쟁으로 인한 남북분단은 고착되었으나, 크게 봐서 좌익과 우익의 싸움은 일단락된 셈. 특히 남한 입장에서는 참혹한 전쟁을 겪음으로써 좌익이 설 수 있는 여지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 따라서 전쟁 이후의 권력투쟁은 좌우익의 갈등이 아니라, 독재와 장기집권을 쟁점으로 하는 민주화 차원의 정치적 대립으로 바뀌게 됨. 이승만 정권은 54년 11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대통령 중임제를 허용토록 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확보했으나, 이로 인해 심각한 민심이반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 선거 때마다 이기기 위해 무리를 했고, 그 부작용은 더 큰 부작용을 불러옴. 이기붕의 부상과 자신의 건강악화로 비서정치가 갈수록 더해감. 이승만 정부의 독재적 무리수는 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로 극에 달함
- 만약 농지개혁이 이뤄지지 않은 채 6/25 전쟁을 맞았었다면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을 통해 그 결과를 단정할 수는 없어도 점령군 북한에 대한 남한 농민의 지지가 훨씬 적극적이었을 테고, 그리하여 전쟁은 북한의 조기 승리로 끝났을 공산이 컸다.

(2) 박정희
- 반대가 심하면 독재의 힘으로 밀어붙였고, 관료들이 소신을 발휘하도록 대통령 자신이 정치적 바람에 방패막이 노릇을 자임. 논란이 심하거나 시간을 끌며 결론이 나지 않을 때는 자신이 결단. 바로 이런 점이 박정희 특유의 리더십이었는데, 이론적으로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 부분임. 합리적, 민주적 논의 절차를 무시하면 결과가 나빠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 박정희의 첫 결단으로는 혁명 직후 부정축재 처벌대상이었던 대기업 총수들을 처벌은 커녕 경제개발 선봉장으로 내세웠던 것을 꼽을 수 있음. 거기에 더해 1년 뒤에는 정부지불보증제도를 도입. 민간기업이 외채를 얻어오는데 정부가 빚보증을 섰던 것. 보통의 경제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특혜조치였음. 박정희로서는 한국기업 자체의 신용만으로는 차관도입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판단에서 재계의 요청을 과감히 수용한 것. 물론 측근의 조언과 재계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었지만 전례없는 결단은 그의 몫이었다. 60년대 초반, 수많은 곡절을 겪었던 한국경제의 외자도입 체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정부가 빚보증을 서줘가면서까지 기업들에게 투자를 독려한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군부의 힘을 바탕으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가 기업과 짝이 돼서 경제개발을 성공시킨다는 시나리오는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 더구나 대부분의 개도국의 경우, 정부와 기업간 파트너십 구축은 이른바 정경유착으로 인한 부패정권의 불행한 말로로 접어들기 십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박정희가 리더로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은 반대를 무릅쓴 주요 정책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험스런 정책들을 많이 썼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대부분이 성공했기 때문. 대일청구권 협상을 비롯해 종합제철사업,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화학공업 육성, 부가세 도입 등 모두가 격렬한 반대나 논란을 무릅쓰고 태어난 정책들이었음. 그러했기에 박정희를 더 특별히 주목하는 것이다. 이처럼 박정희 경제는 60년 초반의 시행착오를 거쳐 중반에 접어들면서는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해가면서 한국경제의 산업혁명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고, 또 성공시켰음.
- 경제정책에 관한 한 박정희는 철저하게 행정부 우위원칙을 지켜나갔음. 관료들이 최선을 다해서 검토한 정책은 정부안으로 대통령 결재를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의회의 심의과정은 형식에 불과했음. 박정희는 기본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에 회의적이었고, 의회정치의 비효율에 부정적이었음. 의회에서의 토론절차는 자신의 경제개발 노력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여겼음. 오히려 정치인들의 부당한 개입을 차단시켜, 직업관료들이 소신껏 정책을 펴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음. 이 같은 그의 정책 태도는 유신체제로 접어들면서 그 정도를 더해갔음.
- 사채동결조치는 워낙 충격적 조치였던 만큼. 오랫동안 논란이 꼬리를 물음. 긍정론자들은 기업들의 연쇄 도산사태에 정부가 선제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더 큰 위기를 막았을 뿐 아니라 그 뒤에 몰아닥친 1차 오일쇼크도 견뎌냈으며 중화학공업 투자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고 말함. 반면 비판론자들은 가장 극단적인 대기업 살리기 정책이었으며 시장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한 부작용이 두고두고 심각했고, 사채수입에 의존했던 중산층의 붕괴현상도 상당했음. 어쨌거나 8/3 조치의 최대 수혜자는 기업이었음. 시장원칙을 크게 손상시키면서까지 사채동결을 통해 정부가 집단도산을 노골적으로 막아주었던 것. 따라서 정부로서는 혜택을 입은 기업들의 상응하는 조치를 기대. 기업의 빚 부담을 덜어줘서 위기를 넘기고 사업이 잘되면 기업공개를 통해 그 이익을 신세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 북한변수는 한국경제에 플러스였는가, 아니면 마이너스였는가? 남북분단 현실은 한국경제에 여러모로 큰 영향을 미쳤고, 계속 그래왔음. 없는 살림에 힘겨운 국방비를 감당하느라 자원배분에 심각한 왜곡을 일으켜온 측면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한국경제로 하여금 끊임없는 긴장과 도전의 끈을 늦출 수 없게 만든 긍정적 측면도 존재. 이승만의 농지개혁 정책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북한의 공산화 위협이 결정적 역할을 했듯이, 박정희 경제에도 다방면에 걸쳐 큰 영향을 줌. 경제개발계획이나 중화학공업 육성 등도 그런 사례
- 70년대에 들어오면서 추진한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은 단순히 경제정책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음. 엄밀히 말하자면 중화학공업 육성이 아니라, 방위산업 또는 군수산업 육성이었고, 무기공장을 만드는 것이었음. 따라서 단순한 경제정책이라기보다는 국가 안보정책이요, 군사대책 쪽에 더 무게가 실린 정책이었음. 북한의 위협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미국이 빠른 속도로 한국의 방위부담을 줄여가는 상황 속에서 취한 박정희 나름의 고육지책이었음. 한쪽은 10월 유신을 통한 집권연장이고, 다른 한쪽은 중화학공업 육성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군 기본화기는 2차대전 때 미군이 쓰던 MI소총이었음. 박정희는 청와대 기습사건을 계기로 미국으로부터 M16자동소총 생산공장을 한국에 세워준다는 약속을 어렵사리 받아냄. 그것도 3년여의 실랑이를 벌인 끝에 71년 건설을 시작해 72년에야 완공. 무기산업의 어려움을 절감했다. 박정희는 본격적인 무기 국산화를 진두지휘하며 박차를 가함. 70년 8월 무기개발을 전문적으로 연구할 국방과학연구소를 창설하고, 부총리 김학렬에게 특수강 공장을 비롯해 무기생산에 필요한 공장건설을 계획하고 그에 필요한 소요자금 조달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
- 중화학 공업 육성은 엄청난 도전이자, 그 시대로서는 위험부담이 높은 벤처사업이었음. 부하의 암살로 정권이 종말을 맞자, 중화학공업 추진은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라했고, 실무 총책이었던 오원철은 신군부로부터 경제를 망쳤다는 죄목으로 심한 고초를 겪음. 박정희 정권이 졸지에 막을 내렸을 당시, 그의 경제개발 공적은 막판의 중화학공업 투자 실패로 몽땅 날아갔다는 분석이 정설처럼 여겨졌음. 그만큼 중화학공업 육성의 부작용이 심각했음. 그랬던 것이 시간이 지나고 구조조정을 거쳐, 한국경제가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도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 결과적으로 77년 반짝 호황은 오히려 박정권에 독화살이 되어 돌아온 셈. 호황의 끝이 바로 코앞인 줄도 모르고 기업들은 과잉투자에 더욱 열을 올렸고, 2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수출은 급속히 추락하고 이에 따라 수출로 먹고살던 국내기업들의 도산이 줄을 이음. 부동산 투기는 물론이고 불황 속에도 물가는 폭등이었다. 여기에 부가세 도입에 대한 조세저항으로 민심도 어느 때보다도 흉흉하게 돌아갔음. 정치는 차치하고, 경제 쪽에서만도 이처럼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박정권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 박정희 정권말기 경제안정화 정책으로의 변화는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할 만큼 획기적이었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던 것일까. 이런 전환이 전적으로 직업 관료들에 의해 시작, 추진되었다는 점이 주목거리임. 박정희 경제에 앞장서왔던 그들이 박정희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안 제시와 새로운 처방을 주장하고 나섰던 것. 도대체 어찌해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익숙한 관료집단이 상당한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와 같은 반정부적인 일을 주도했던 것일까. 한마디로 박정희 키즈의 반란이었다. 박정희 시대가 키워냈다고 할수 있는 경제기획원 핵심관료들 사이에는 바로 박정희식 경제정책에 대한 위기의식이 확산되어가고 있었음. 76년 이후 77년, 78년에 불어닥친 호황국면은 박정희 경제체제의 문제와 한계가 오히려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음.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과잉투자의 부작용 등이 그랬음. 돈이 흘러 넘치고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리는가하면 기업들은 은행 빚으로 채산도 맞지 않는 과잉투자 속에 통화긴축은 시늉만 내고 있었음. 강경식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78년 당시 경제관료들의 염원은 어떻게 하면 물가안정을 이루면서 국제수지가 흑자를 내는 경제를 만들 수 있는가였다. ... 독일, 일본, 대만이 성공사례로 늘 공부거리였다. 1차 석유파동 때 우리는 물가안정보다는 부양에 더 역점을 두었는데, 일본, 대만은 물가안정에 우선순위를 뒀다. 그래서 우리도 79년 2차 석유파동 때는 불황을 감수하더라도 물가안정 위주의 정책을 펴자고 했던 것이다."
- 경제학자나 연구기관, 언론 등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리는 정책건의나 비판을 내놓고 하기 어려운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기획원은 기획차관보 강경식, 기획국장 김재익 등을 중심으로 78년부터 안정화 정책으로의 전환에 시동을 걸기 시작. 실무관료들의 사고전혼, 계획 전환을 지원하고 방어해준 최후의 보루는 뒤늦게 부총리가 된 신현확뿐이었음. 기획원이 중심이 돼서 안정화 계획에 불을 지피고 KDI의 경제학자들이 가세해서 본격화하는 과정에는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경제기구들의 어떤 건의나 경고도 없었음. 선진국의 전문가들이 한국경제에 대한 경고등을 켜기 전에 한국의 경제관료가 스스로 빨간불을 켜고 비상을 건 셈. 후임 대통령 전두환이 안정화 정책의 절대적인 신봉자가 된 것도 경제관료들이 처음부터 교육시킨 결과였음
- 78년 선거 패배를 계기로 김정렴, 남덕우, 김용환 팀을 모두 경질하고 신현확 신임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에게 지휘봉을 맡기고 나서, 박정희는 그 전 같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음. 인사를 믿고 맡기는 것도 정책방향이 자신의 철학이나 추구하는 바와 같거나 통해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아무리 용인술이 뛰어나고 통이 큰 리더라 해도, 자신이 주도해온 것을 뿌리째 부인하고 뒤집는데 어찌 마음 편히 믿고 맡길 수 있겠는가. 박정희는 신현확 부총리의 보고에 자주 짜증을 냈고, 막판에는 아예 그의 청와대 보고 자체를 기피. 결국 신현확을 경질하고 역시 자신의 종래 철학을 잘 소화해냈던 김용환 전 재무장관을 다시 기용할 생각도 했음. 자신이 선택한 경제사령탑을 믿지 못하고 1년만에 바뿔 생각을 했을 정도로 말기에 이른 박정희의 총기는 빛을 바래가고 있었음. "박정희 대통령의 용병술은 감히 누가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그야말로 적재적소에 사람을 썼고, 기용한 사람은 믿고 맡겼음. 그러나 막판에 와서는 안타깝게도 인사 면에서 그런 총기가 흐려졌던 게 사실이다." 남덕우의 회고다. 정권말기에 이르러서 박정희의 총기가 흐려지고, 용병술이 정상궤도를 벗어나 흔들렸던 것은 비단 경제분야뿐이 아니었음. 기본적으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정부장 김재규로 3인방 측근을 짤 때부터 심각한 사달이 나기 시작했던 것. 인사의 달인이 결국 인사를 잘못하는 바람에 불행한 종말을 자초한 셈

(3) 전두환
-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하마터면 없어질 뻔했음. 적자에 허덕이는 자동차 회사들에 대한 전두환의 경제선생으로 등장한 김재익이 비교우위론을 내세우며 "자동차 산업은 한국에 맞지 않으니 외국의 큰 회사에 넘기자"고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던 것. 따라서 정부차원에서 현대자동차를 미국 GM에 넘기기로 결론이 났었는데, 정주영 회장이 배째라는 식으로 버티는 바람에 무산됨. 김재익의 최대실책으로 꼽히는 대목이다. 500만호 주택 건설 계획은 국보위가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첫 번째 선물이었음. 80년 9월 23일 국내 신문과 방송은 대대적으로 보도해야 했고, 물론 어떤 비판기사도 금지됐음. 국보위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공정거래제도의 도입. 재벌에 대한 특혜와 시장의 독과점을 본격적으로 규제감시하는 제도적 장치가 비로소 만들어진 것. 재벌을 본격적으로 규제하게 되는 공정거래위원회제도가 군인들 힘으로 탄생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경제관료들이 오래전부터 말만 꺼냈을 뿐, 엄두를 못 내던 일이었음. 그나마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 안에 과장급 공정거래담당관을 두어서 기업들의 독과점이나 지나친 가격담합 문제 등을 형식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 김재익이라는 탁월한 경제학자는 잡티 하나 없는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려나가듯이 소신껏 자신의 그랜드 디자인을 펼쳐나갔음. 전두환은 경제에 문외한이었으나 학습소화능력이 뛰어났음. 소위 세마리 토끼라고 하는 성장, 물가, 국제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호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확실히 깨우침. 물가안정이 최우선 과제이고, 시간이 걸리고 어렵더라도 금융을 자율화시키고 개방정책을 펴나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전두환의 과외선생이 되기 전의 김재익은 실패한 관료였다. 76년 부총리 남덕우의 예외적인 발탁으로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자리에 앉아서 여러모로 자신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정책으로 만들어보려고 애를 썼으나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음. 직업관료들의 집단 따돌림 속에 그는 외로운 백로같은 존재였다. 결국 공무원 청산을 결심하고 KDI에 가서 연구나 할 작정을 했었다. 그런 처지에 세상이 와장창 뒤바뀌고 새 실력자의 가정교사가 된 것이다.
- 정부가 최우선 정책으로 강조한 슬로건은 "한 자릿수 물가"였음. 언론도 꿈같은 소리를 한다며 유치한 정권 홍보쯤으로 치부했음. 그러나 그해(81년) 물가는 결과적으로 도매 11.3%, 소비자 13.8%였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비자 물가 기준으로 82년 2.4%, 83년 -0.8%였다. 상상도 못하던 일이 현실로 벌어진 것. 전두환 정권의 물가안정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비록 반대와 비판을 억누르는 가운데 밀어붙였다 해도 정부 스스로가 고통을 감내하는 비인기 정책을 장기간 일관되게 추진한 끝에 맺은 결실이라는 점에서다. 총지휘자 김재익은 마약같은 30년 인플레이션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시점에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특단의 전기가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으며, 힘과 기회를 얻은 그는 소신대로 대통령의 이름으로 이를 실현시켜나갔던 것.
- 개방이 대세가 된 것은 3저호황 덕분이기도 했음. 막대한 국제수지 흑자를 경험하면서 이젠 싫어도 수입증대 정책을 써야 하는 상황으로 세상이 달라진 것. 그럼에도 수입을 죄악시하는 인식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음. 양담배처럼 국민감정에 민감한 품목은 수입규모에 상관없이 개방불가 품목으로 간주됨. 이 일을 추진하던 상공부 고위간부는 심한 고역을 치르기도 했음. 86년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설 무렵 박운서 상공부 통상진흥국장은 해외공관장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국산담배만 피울 것이 아니라 이제 양담배도 피워야 한다. 컴퓨터나 전자산업은 당분간 더 보호해야 하지만, 양담배 같은 소비재쪽은 개방해서 외국의 통상압력에 대처해야 한다." 고 했다고 큰 봉변을 당함. (보안사로 호출당해 고역을 치름)
-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의 순수한 권익보호 차원을 벗어나 이데올로기적 투쟁양상을 띠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시대 말기인 70년대 후반부터였지만, 전두환 정권에 들어오면서 탄압이라는 자양분을 토대로 더 본격화하기 시작. 정부 일각에서는 노동부를 중심으로 경제가 호전되고 하니 노동조합 정책도 완화해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청와대의 검찰 출신, 군 출신 강경파들에 의해 번번이 묵살당함. 그러나 전두호나 시대의 잘못된 노동정책 탓을 신군부에게만 돌릴 순 없다. 물가안정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만큼, 정부의 중요 기본정책 중 하나가 임금억제를 뜻하는 이른바 소득정책을 강력히 펴왔던 점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음. 김재익을 비롯한 정부 이코노미스트들은 만성적 인플레이션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서 강력한 임금억제 정책을 구사했고, 따라서 당연히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음. 물론 이 같은 임금억제가 물가안정에는 큰 역할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의 탄압을 초래했던 점을 부인할 수 없음. 86년 들어오면서 경제기획원을 중심으로 강봉균 기획국장 등 실무자들 사이에서 노동법에 대한 최소한의 개정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역시 청와대의 냉담한 반응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감. 속으로 곯아들고 있는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아무도 챙기지 않음. 결국 그것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87년 6/29 선언 이후 엄청난 노사분규 사태를 불러오게 됨

(4) 노태우
- 노태우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존재감이 약한 대통령이라 할 수 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노태우 시대는 마치 잃어버린 5년처럼 여겨짐. 그러나 이 시기야말로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들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변화무쌍한 격변의 시기였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26년간의 군사독재 시대가 드디어 막을 내리고, 민주화의 향연 속에 각종 개혁이 홍수를 이룸. 올림픽이 치러졌고, 소련과 중국 등 공산국가와 처음 국교를 맺었으며, 북한과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역사적 사건도 바로 노태우 집권 시대에 일어난 일. 게다가 정치적으로는 민주화 회오리 속에 야당이 국회를 장악하는 여소야대 세상이 전개됨. 정보기관의 실질적인 언론통제가 사라진 것도 이때부터였음. 정치민주화는 물론이고 경제 쪽에서도 민주화 쓰나미가 밀어닥쳤음. 기존의 경제개발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고, 분배와 복지가 모든 정책의 화두였다. 이승만은 건국, 박정희는 산업화, 전두환은 물가안정이 각 시대의 키워드라고 한다면 노태우 시대의 그것은 역시 민주화였다. 민주화 열풍은 대통령의 리더십 변화에서 시작해, 의회의 역할 그리고 기업과 노조, 일반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개발경제 시대의 기존인식들을 뿌리째 흔들었다.
- 서울올림픽 이후 경제는 비실대기 시작. 경고등은 역시 수출 부진 현상에서 먼저 켜졌음. 가파른 원화절상이 수출에 큰 타격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환율 때문만이 아니었음. 노사분규의 혼란속에 임금이 급속히 오른데다 다시 찾아온 인플레이션으로 수출경쟁력이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었음. 3저 호황(86~88년)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이 항만, 도로 등의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소홀히 했던 탓에 물류비용이 급속히 오르고 있었음. 밖에서는 일본이 그간의 엔고를 극복하는 구조조정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 특히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동남아의 값싼 노동력, 풍부한 자원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국제협업체계를 구축했고, 이것이 그동안 한국이 주력해온 미국과 유럽의 중저가 시장을 협공하는 데 큰 성과를 올리고 있었음. 국내에서는 이런 세계경제의 새로운 판도변화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부 당국자들조차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수출 감소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저 "이상한데..."하는 정도였다. 90년 이후 내리 3년간은 국제수지 적자가 계속되는 가운데 수출은 속절없이 줄어갔으나 아무도 손을 쓰지 않았다.

(5) 김영삼
- 김영삼은 개혁을 결단하는 데는 능했던 반면,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일머리 즉, 내용, 방법, 절차를 너무 소홀히 했다. 사건사고 처리하듯이 경제정책도 우지끈 뚝딱 해치우려 했다. 그러다가 잘 안되고 여론이 좋지 않다 싶으면 이내 사람을 갈아치웠다. 5년 재임기간 중 경제부총리를 7명이나 기용한 것이 바로 그런 증거다. 자신의 좌우명처럼 강조해왔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을 스스로 무색하게 함. OECD에도 가입하고 1인당 국민소득 1만부로 달성해 보였으나 결국 정권 중반기를 지나면서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국가적 외환위기로까지 치닫게 됨. 그 과정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미연에 막을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은 적지 않았으나, 김영삼의 리더십은 절실할 때마다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음. 오히려 위기를 재촉하는 가속페달을 밟기도 했다. 본인이 직접 능력을 발휘하던가, 아니면 사람을 잘 쓰든가, 그는 두가지 모두 실패했다.
- 세계화는 정치적으로 말만 무성했을 뿐 집권 후반의 개혁 피로현상과 함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아무튼 김영삼 시대에 한국경제는 여러 역사적 이정표를 세움. 95년 수출 1000억불을 돌파했고, 1인당 국민소득 역시 1만불을 넘겼고, 종합주가지수 1000선을 뚫었다. 더구나 그 다음해 96년말에는 선진국 그룹인 OECD에 정식으로 가입했음. 이로써 한국은 선진국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한국경제는 어디까지가 진정한 성장이고, 어디서부터가 거품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상황으로 계속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김영삼 경제의 실상은 시간이 갈수록 안정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혼란스러워져 가기만 했다. 집권초기에 내걸었던 신경제 건설의 포부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고, 치유를 다짐했던 이른바 한국병 증세는 더욱 심해져 갔다. 대통령은 집권 마지막해까지도 개혁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지냈으나 시간이 갈수록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급기야 97년에 접어들면서 대기업들이 한 달에 하나꼴로 줄지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김영삼 대통령은 한보를 부도낸 것을 후회하면서 어떻게든 부도만은 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 현직 대통령의 당부를 그냥 무시하고 갈 수는 없었다. 부도내지 말라는 대통령의 거듭된 지시를 어기지 않으면서 실제로는 부도 처리해가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 대안이 부도유예협약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부도처리나 마찬가지지만 형사문제로 신문에 크게 보도되는 것을 막겠다는 묘안이었다." (강경식, 국가가 해야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부도유예협약은 묘약이 아니라 독약이었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부도금지 지시와 강경식의 편법 대처는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신인도를 결정적으로 추락시켰다. 정부 지시에 따라 은행들은 진로를 부도처리하지 않고 부도유예협약으로 미봉한 데 이어서, 재계순위 7위인 기아자동차까지 여기에 적용시켰다. 부도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부도유예협약이란 편법을 동원한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기아가 국민기업임을 내세워 채권은행이 요구하는 구조조정을 거부하면서 시간끌기 전략으로 나간 것이 결정타였다.
- 국가부도위기는 현대 한국경제사에서 처음이 아님. 70년을 전후로 차관기업들이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다가 세계시장에 불황이 닥치면서 무더기로 빚더미에 올라앉아 은행의 연쇄도산 위기로까지 몰고 갔었고, 그 이후 중화학 공업의 과잉투자, 석유파동, 국내정치 불안 등으로 80년에 또 한차례 큰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앞의 경우는 모두 독재정치 시대에 일어났던 위기상황이었고, 위기대처 방법 또한 대통령의 최종결심으로 결정되는 것이었으며, 정책의 집행 또한 일사불란하게 진행됨에 따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소위 선제적 죄가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73년 박정희의 8/3 사채동결조치가 그랬었고, 80년 전두환의 국보위 강제 구조조정들이 그랬다. 부작용이 생기더라도 방향을 정해놓고 밀어붙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 뜻에서 국가부도위기는 종래의 개발연대식 대처가 애당초 불가능했던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이 풀었던 방정식에 비해 김영삼이 풀어야 하는 방정식은 훨씬 어렵고 복잡했다.


(6) 김대중
- IMF 신탁통치가 아니었다면 한국경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또한 대통령 김대중의 경제정책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국가부도위기를 극복해내는 과정에서 발휘됐던 김대중의 탁월한 리더십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임. 혼란 속 김대중의 리더십은 전임 대통령들, 노태우와 김영삼에 비교해 특히 돋보였음. 그러나 대통령의 리더십만으로 한국경제가 살아난 것은 아니었음. 금 모으기 같은 국민적 분발과 각고의 노력이 그 기본이었으며, 자존심 상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외부로부터의 강력한 압력 또한 결정적 역할을 했음. 한국경제를 중환자실에 집어넣고 과감하게 대수술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강제적 외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 2차대전의 패전국으로 전락한 일본경제가 일본경제가 맥아더 사령부의 각본과 감시속에서 과거를 해체하고 변화와 개혁의 판을 완전히 다시 짜나갔던 형국과 유사한 점이 많았음. IMF가 부도만 막아주고 개혁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가정할 때, 김대중 정권은 과연 어떤 정책을 펼쳤을까. 그랬을 경우에도 30대 재벌의 절반이 무너지고 은행들이 무더기로 간판을 내리는 사태가 벌어졌을까. 결코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임.
- IMF위기 때문에 김대중이 자신 특유의 경제관, 즉 DJ노믹스를 실천해나가는 데 차질을 빚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함. 어찌 보면 김대중은 경제위기 덕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DJ노믹스가 추구해왔던 경제개혁 작업 또한 IMF의 강압적 지침 덕에 자신의 손으로 성취해낼 수 있었음. 사실 김대중이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시장경제의 창달은 관치경제의 부작용을 규탄하기 위한 정치적 구호였음. 처음에는 민주주의가 시장경제의 전제조건이라고 했다가, 80년대 중반부터는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유의 병행추진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쪽으로 바뀐다. 논리로 뒷받침된 경제관이라기보다는 양쪽의 좋은 것만 골라서 취한 짜집기식 주장이었음. 김대중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현실정치인이었다. 야당 총수로서는 재벌의 폐단을 줄기차게 공격하고 외채 의존적 개발전략을 극력 반대했으나, 대통령 김대중으로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현실적인 저항이나 부작용을 감안하지 않는 무모한 개혁을 밀어붙이는 정책 선택과는 거리가 멀었다. IMF가 제시한 재벌개혁과 금융개혁의 일정과 기준은 김대중에게 개혁의 명분과 방법론을 동시에 제공해준 셈
- 김대중은 정치의 달인이었고, 풍부한 경제지식을 과시했으나, 행정은 아마추어를 면치 못했다. 왜곡된 의료보험수가가 근본문제였는데 이것은 그대로 둔채 난마처럼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의약분업을 밀어붙이려 했던 것부터가 순진한 발상이었음. 자신도 시인했듯이 보건복지부를 믿었던 것도 관료사회의 실상을 몰랐던 탓이다. 경제행정이 2차방정식이라면 복지행정은 3차방적식이라 할 정도로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인데, 당시의 복지행정은 연륜도 짧을 뿐 아니라, 의식만 앞서 있고 현실문제의 해결역량은 매우 미흡했었음. 그러니 시민단체에 중재를 맡기는가 하면, 관련 경제부처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정치권을 동원하는 자충수를 두기까지 했던 것. 김대중으로서는 그 어려웠던 IMF 위기도 거뜬히 극복해냄으로써 국제적으로도 칭찬이 자자했건만, 전혀 뜻하지 않았던 의료대란으로 2년여를 연일 언론으로부터 질타당하는 수난을 감수해야 했음.
- 가장 아쉬운 것은 IMF 조기졸업이 결코 바람직한게 아니라는 점. 물론 김대중에게도 IMF 조기졸업은 경제적 의미 못지 않게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했음. 단 졸업을 너무 서둔 나머지 지나친 부양책을 동원했고, 그것이 방법과 과정은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강력한 정부주도와 별로 다를 바 없었음. 고통스런 수술은 서둘러 봉합해야 했다. 어렵사리 판을 벌였던 구조조정이 도중에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겨울은 충분히 추워야 하는 법인데, 그렇지 못했던 것. 그 후유증은 고스란히 다음 정권으로 넘겨졌다. 고삐풀린 부동산 투기와 또다시 금융위기를 몰고 올 뻔했던 카드대란이 그것이다.

(7) 노무현
- 노무현은 "반미를 하면 안되는가"라는, 종래의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말을 주저없이 했고, 박정희 경제의 해체를 공공연히 천명. 노무현은 김대중에 비해 훨씬 비타협적이었으며, 더 이념적이었고, 직선적이었고, 거칠었다. 주변의 심한 저항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옳다는 판단만 서면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노무현은 한마디로 박정희식을 전면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 박정희식이라는 것은 성장우선 정책의 박정희 경제개발 모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시대에 기득권을 누렸던 사람들, 그리고 이를 존재케 했던 시스템과 질서까지도 비판, 부인하고 나섰음. 박정희를 뒤따랐던 유일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의존 탈피를 뜻하는 자주국방을 추진했다는 사실이다. 안보나 정치분야에서도 큰 전환을 시도했지만, 경제분야가 가장 오래 시끄러웠음. 그는 정책기조 면에서도 성장 없이는 복지 없다를 걷어내고 복지 없이는 성장 없다로 바꿈. 외국정책 참고하는 것도 미국 사례엔 거리를 두고 유럽 사례에 더 관심이 많았음. 노동과 복지정책에 대한 기본입장을 달리했으며, 정책 운영에 노조나 시민단체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했음. 지역주의 타파와 사회통합을 참여정부의 기치로 삼았고, 서민 대통령을 자임. 전임 정권에서 물려받은 양극화 심화현상을 개선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임. 노사관계에 있어서는 노조편임을 분명히 했고, 재벌에게는 노골적으로 대립각을 세움. 국민의 정부부터 그러한 경향이 시작되긴 했으나 참여정부에 와서는 사람이나 정책면에서 훨씬 더 직접적이고 강력한 변화를 실천해 나감
- 노무현은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익혀나가면서 여러모로 진화를 거듭해나감. 기업관, 노조관, 관료관 등에서 상당한 변화를 보임. 경제정책에 관한 한 시간이 지나면서 빠른 속도로 이데올로기 과잉현상에서 벗어나 실무형 행정 대통령으로 바뀌어감. 자신의 정치적 지지세력들이 반발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과의 FTA를 결심한 것이야말로 그 전의 노무현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음. 집권전반의 담론의 주제가 분배와 복지였다면, 중반 이후부터는 오히려 성장 잠재력 확충과 국가경쟁력 제고와 개방 쪽으로 중심축이 옮겨갔음. 고용없는 성장을 문제시하고 양국회 해소를 추구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없이는 일자리 창출이 없음을 이내 깨달음. 특히 노조에 대한 각별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집권 중반에 들어서기도 전에 생각이 달라져 갔다. 자신이 추진하는 노동정책에 대해서까지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는 주류 노동세력에 대해 80년대식 낡은 투쟁방식이라며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했음. 초기의 노무현은 노조에 대해 김대중보다 더 깊은 애정을 표시했었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더 큰 실망을 표시. 기업편으로 전향했다는 뜻이 아니라, 가급적 삼갔던 노동계에 대한 비판을 정면으로 하고나선 것. 노동계가 자신의 정부까지 줄곧 무시하는 태도에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참여정부를 좌파 신자유주의 정부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점점 과잉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실용주의적 입장으로 변해감
- 부동산 정책은 갈수록 꼬여갔다. DJ말기에 불기 시작한 아파트 가격상승 바람은 04년에 가서는 극에 달함. 다른 많은 개혁정책을 아무리 쏟아내도 부동산 투기바람이 계속되는 한 빛을 낼 수 없었음. 노무현 정부에 와서 잘못 대응하는 바람에 부동산 투기가 더 기승을 부렸던 것도 사실이지만, 굳이 책임소재의 원천을 따지자면 김대중 정권이 IMF 조기졸업을 목표로 서둘러 부양책을 썼던 데서 비롯된 일. 참여정부로서는 잘못된 유산을 물려받은 데다 그것의 대처 또한 그르친 꼴이었다. 서민정부를 자임하고 양극화 극복에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했으나 가장 아픈 대목은 다름 아닌 부동산 정책의 실패였다
- 노무현이나 기예처장관 변양균은 한마디로 너무 순진했고 일머리를 몰랐다. 국가장기 청사진 제시는 박정희 시대에도 정부가 직접 하지 않았다. KDI를 시켜서 애드벌룬을 띄우게 하고 정부관료들이 그걸 토대로 가능한 사안을 선택적으로 실천에 옮겨가는 방식을 썼다. 절대권력자인 박정희가 그런 우회적인 방법을 썼음에도 국가장기발전 계획이란 것이 원래 여러모로 정치적 오해나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데, 힘도 없는 노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그것도 레임덕이 한창인 시기에 장밋빛 청사진을 그려 보인 것 자체가 일머리를 모르는 너무나 순진한 발상이었던 것.

(8) 이명박
- 기세좋게 출발한 MB노믹스는 10리도 못가서 발병이 났다. 정권 출범 3개월만에 터져 나온 촛불시위로 대통령의 권위가 실추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미국발 금융위기, 국제 유가 폭등, 그리고 유럽발 세계경제위기로 이어지는 대외여건 악화는 성장촉진에 초점을 맞춘 747공약을 초장에 주저앉혔던 것. 어찌보면 세계경제가 구조적 불황에 빠져든 판국에 성장을 모토로 하는 747 공약이 무위로 돌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음. 오히려 역풍이 불기 시작. 성장정책은 졸지에 나쁜 정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경제가 나빠지면 당연히 기업투자 촉진책을 우선적으로 쓰기 마련인데, 정반대 현상이 벌어진 것. 종전 방식의 경기부양 정책이 기업특혜 정책으로 매도되는 분위기속에서 지속성장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분배와 복지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세를 주도. 경기부양을 할 때 정부가 취하는 정책 선택도 달라진 것이다. 다시 참여정부로 복귀하는 분위기가 생김
- 한국의 대통령들은 대체로 국내보다도 외국에서의 평판이 더 좋음. 이명박 대통령도 그러했다. 국내에서는 747 공약의 좌절이나 촛불사태의 혼란 등으로 지지도가 급전직하 현상을 보였던 것에 비해, 밖에서는 미국발 금융위기와 석유파동, 그리고 유럽의 재정위기 등을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해 보인 지도자로 그를 치켜세움. 게다가 G20 정상회담의 서울개최를 주도함으로써 2차대전 이후 세계경제를 끌어온 G7체제가 새롭게 진화하는 길목에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괄목상대로 끌어올렸다는 점 또한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만했다.
- "세종시 문제는 정치적으로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이대통령의 기본적 발상 자체부터 잘못된 인식의 출발. 정치적으로 민감한 골치아픈 문제를 순진하게 경제논리로만 내세워 관료들 중심으로 국회의원의 기존결정을 뒤엎으려고 했으니 잘될 리 없는 일이었다. MB정권으로서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만 허비하고 만 셈. 대통령으로서 야당의 반대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이 아니라 여당의 지지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명박의 정치능력은 결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이 계속 비정치적 행보를 포기하지 않은 점은 성공실패여부를 떠나 매우 주목할 만하다. 세종시 수정안이 좌절된 후에도 잘못된 정치적 약속은 재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 11년 3월에도 역시 선거공약이었던 영남권 신공항 건설계획을 오랜 논란 끝에 사과성명과 함께 백지화로 결론지음. "신공항 건설을 약속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하지만 10~20조 투자해서 매년 적자를 본다는 어려움이 있다.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다." 이에 반해 박근혜는 "신공항 건설은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고, 약속했으면 지켜야 한다"며 또다시 반기를 들었고, 급기야는 차기 대통령 선거공약에까지 다시 포함시킴.
- 주요정책이 심각한 정치현안이 될 때마다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 세종시 문제도 그랬고, 한미 FTA 협상비준때고 마찬가지였다. 세종시를 행정수도화하는 대신 과학기술이나 교육중심 도시로 바꾸고자 했던 이명박의 판단은 사실 옳았다. 그러나 국회에서 다수의 여당의원조차 설득못함. 충분한 정치적 사전조율이 전제되어도 힘든 일을 자기 소신만 믿고 밀어붙였던 것. 문제의 향방이 정치인들 손에 달려 있는 판에 정치적 접근을 금기시하는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좋게 해석하자면 중대한 사안을 합리적으로 냉정하게 처리해야 하며, 경제를 정쟁의 대상으로 삼거나 표를 의식한 나머지 인기영합주의로 처리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세종시나 한미 FTA같은 문제야 말로 정치적 중대 쟁점이요, 따라서 정치적 논의와 타협노력이 선결과제였다. 박정희나 전두환 시대처럼 국회의원은 거수기에 불과하고 행정부가 옳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얼마든지 밀어붙였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마땅한 대안도 없이 국회를 피하거나 멀리하기만 했던 것임. 국회의원들이 이런 대통령에 호의적일리 없었으며, 여야를 가릴 것없이 마찬가지였음. 비록 87년 민주화 이후의 정치적 불안정이 경제에 부담을 줬다 해도, 세상이 달라져서 정치적 합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엄연한 현실을 간과했던 것. 정치를 싫어하고 멀리하려 했던 CEO대통령의 근본적 한계이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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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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