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벼농사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제한된 지역에서 많은 인구가 집단을 이루며 생활했다. 좁은 지역에 많은 사람이 몰려 살다보니 유럽처럼 가족 단위로 넓은 땅을 점유할 공간이 없었다. 이런 조건에서 다수가 안정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개인보다 집단이 더 우선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단 자체의 질서가 필요했다. 아시아의 집단주의 사고방식은 이처럼 좁은 땅에서 많은 인간이 벼농사를 지으며 살아가야하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 밀 등 밭농사는 벼농사에 비해 수확량이 적고, 또 초지에서 가축을 기르기 위해서는 넓은 땅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단위 면적당 인구 밀도는 매우 낮은 편이었다.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이유가 없었다. 이 들이 서로를 필요로 할 때는 곡물과 고기 등 생필품을 교환할 일이 있을 때, 그리고 공동으로 다른 부족을 공격하거나 외적의 침입을 막을 필요가 있을 경우에 한정되었다. 그래서 목축과 밭농사 중심인 사회는 자연스럽게 가족 중심의 개인주의 문화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 유목민은 정착 농경문화가 뿌리내린 지 수천 년이 지난 시점에 초원의 풀을 따라 나타났다. 8 유라시아 대륙 북쪽 초원지대는 원래 춥고 건조해서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는데, 유 목민은 BC 4000~3500년 경 이러한 기후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이들은 동물을 키워 그 동물의 털과 고기, 우유를 얻고, 주변의 정착민으로부터 곡물이나 차, 향신료 등을 조달해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정착민에게도 유목민이 제 공하는 고기와 털, 가죽 등은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거나 추운 겨울을 지내는 데 꼭 필요한 생필품이 아닐 수 없었다.
- 유목민들은 보통 부족 단위로 초원을 이동하며 가축을 길렀다. 말을 길들여 넓은 초원을 누볐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청동기와 철기를 사용하였다. 이들은 곡식을 얻기 위해서 또는 초원에 장기간 가뭄이 계속되어 가축을 키우기 어렵게 되었을 때 주변 정착 농경민을 자주 공격하였다.
유목민과 정착 농경민의 갈등은 세계사 곳곳에서 목격된다.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살던 쿠르간족(族)이 BC 4400년 경 동부 유럽과 남부 유럽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당시 유럽의 정착 농경민 켈트족에게 청동기 문화를 전해 주었다. 또 아시아 북쪽 초원지대에 살던 훈족이 유럽을 침략하면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 하여 결과적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 다. 중국에서는 흉노(훈족)가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수시로 침략하였으며, 중국은 그 이후에도 오랜 기간 몽골, 돌궐(투르크), 여진족 등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2500년 전 러시아 알타이 고원지대에는 파지릭 문화라고 하는 유목 문화가 존재했는데, 이곳 무덤에서는 중국제 칠기와 거울, 그리고 곡식을 갈아 먹을 수 있는 휴대용 맷돌이 발견되었다. 이내려가서 중국 정착민들과 물건을 교환했다는 증거이다. 또 그들은 곡식을 갈아서 티베트인의 짬파(Tsampa, 보리가루 죽) 같은 음식을 만들 어 먹었고, 저승길에도 그 맷돌을 같이 넣어 보낼 정도로 곡식을 귀한 음식으로 여겼다. 중국 한나라 때 장건이 흉노를 공격할 동맹군을 찾기 위해 서역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다녀온 후로 서역 세계가 중국 에 알려지면서 실크로드(비단길)가 열렸다. 유목민들은 이 길을 따라 교역을 함으로써 동쪽과 서쪽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니스벳(Richard Nisbett)은 인간 행동 양식을 사회적 관점에서 서양의 개인주의와 동양의 공동체주의로 구별을 했는데, 이러한 차이는 주로 무엇을 먹고 살았느냐에 따라 서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다수가 모여 서로 협력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물을 가두는 저수지와 논까지 물을 대는 물길을 만들어야 했는데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는 과정에서도 서로 도와주는 품앗이 노동이 필요했고, 또 이 지역은 태풍과 홍수 등 자연 재해도 많은 편이어서 재해를 함께 복구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 결과 벼농사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 대부분 집단주의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 목축이나 밭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가축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넓은 공간을 필요로 했고, 농사를 짓는 데도 벼처럼 많은 물을 필요로 하지 않아 비교적 높은 지대를 선호했다. 그리 고 이들은 이곳에서 다른 가족이나 집단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목축 중심의 사회에서는 집 단주의 문화가 아닌 개인주의 문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영어권에서 흔히 번화가를 다운타운(downtown)이라고 표현하는데, 주거지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지대에 시장이나 사람이 모이는 장소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 벼농사 문화권에서는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은 장소에서 매일 부딪히며 살기 때문에 굳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말은 정보를 교환하거나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감정을 공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집단주의 문화권에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서로가 눈빛만 보아도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 는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쓸데없이 말을 잘못해서 집단 내에서 오해를 받거나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은 자기의 생존에 결코 이로울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로부터 침묵은 금이 되었다. 그만큼 말이라는 걸 아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술자리에 앉아서도 대화를 즐기기 보다는 술 마시는 일에만 열중해서 상대방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고 술자리가 끝나면 고주망태가 되기 일쑤다. 유럽 사람들은 모처럼 만난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호감을 사거나 필요한 정보를 얻어야 했기에 자연스레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그들의 대화에는 은유와 재치가 넘친다. 말을 하는 순서도 가장 중요한 말은 맨 끝에 나오기 때문에 경청해서 상대의 말을 듣게 된다. 참고로 우리말은 중요한 내용이 앞에 나오기 때문에 서로가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유럽인들은 가벼운 주제를 놓고도 몇 시간씩 앉아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어린아이들조차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을 보면 문화의 차이가 참 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 모르는 사람끼리 할 수 있는 인사
벼농사 문화권의 집단에서는 날마다 같은 사람을 또 만나기 때 문에 서로가 아는 사람끼리 하는 인사말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밤새 안녕하셨느냐, 아침 식사 잘하셨느냐, 이런 식이다. 요즘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곧잘 인사를 하는데, 원래 안녕(安寧)하시냐는 잘 아는 사람에게 그동안 편안하게 잘 지냈느냐고 안부를 묻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끼리 가볍게 나눌 수 있는 인사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아파트 위아래 층에 사는 사람들이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얼굴을 마주쳐도 첫대화를 트기 쉽지 않고, 그러다 보니 서로 잘 모르고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목축민들은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쉽게 나눌 수 있는 인사말을 만들었다. 바로 'good morning 좋은 아침이나 good night 좋은 저녁이 그것이다. 누구나 아무 부담 없이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인사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좁은 장소에서 마주칠 때는 모르는 사람끼리도 버릇처럼 인사를 하고, 그러다 몇 번 얼굴을 마주치면 쉽게 친구가 된다. 이제 우리도 더 이상 벼 농사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가볍게 나눌 인사 말을 만들어야 할 텐데 아직 적절한 표현이 등장하지 않았다.
- 토지를 매개로 신분적 예속을 강요했던 중세적 봉건체제는 어 떻게 무너졌을까?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제 군주들은 모든 땅이 왕의 소유라기나(王王思想) 신으로부터 위임 을 받았다며 왕의 허락 없이는 땅을 소유하거나 이용할 수 없다. 는 논리를 내세워 땅을 점유하고 이용하는 자로부터 지대(地代), 즉 토지 이용료를 기두고 충성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토지를 매개로 한 봉건적 신분제도는 유럽의 경우 십자군 전쟁으로 상업과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뿌리가 흔들렸다. 유럽에서는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 하기 위해 8차례의 십자군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동방 무역이 활성화되었고, 서로마제국 멸망 이래 자취를 감췄던 화폐경제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토지 사용료를 화폐로 지불할 수 있게 되면서 상당수의 농노가 영주의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또 많은 영주들이 참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장원을 저당 잡히거나 전쟁 중에 사망함으로써 그들의 토 지가 왕에게 귀속되기도 하였다.
왕의 권리는 영주나 귀족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점차 제약을 받 게 되었다. 1215년 6월 15일에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 하여 서명한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혹은 대헌장은, 일반 평의회의 승인 없이는 왕이 군역 대납금과 공과금을 부과하지 못 하도록 규정했다. 14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흑사병도 봉건 제도의 몰락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죽고 농노가 귀해진 상황에서는 영주라도 그들을 함부로 착취할 수 없었기 때 문이다.
- 1500년대 영국에서 일어난 인클로저 운동도 토지의 사적 소유권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소유의 종말을 쓴 제레미 리프킨에 의하면, 사람은 먼 옛날부터 땅에 귀속된, 그야말로 '땅 의 일부분이었다. 그런데 인클로저 법은 사상 처음으로 땅이 부 동산의 형태로 사람의 일부분일 수 있다는 발상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본다. 당시 영국 의회가 인클로저를 법령으로 규정한 의도 는, 토지를 개별 사유지로 나누어서 사고 팔 수 있도록, 즉 시장에 서 거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데 있었고, 이로 인해 토지는 비로소 사유 재산이 되었다.
- 근대에 들어서서 로크는 '자연적 천부인권(天賦人權)으로 소유 권 개념을 주장하였다. 그는 1690년 《정부론》을 썼는데, 그는 이 책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나의 것은 나의 몸이고, 나의 몸을 이용하는 노동 행위도 나의 것이며,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 도 나의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그에 의하면, 누군가가 자신의 노동을 투입하여 나무를 베고 돌을 골라 농지를 만들면 그것은 그 의 노동의 투입 결과물이므로 당연히 그의 것이라는 것이다. 사적 소유권이 천부인권으로 인정된 민주국가에서 농지 소유자가 국가에 내는 돈은 더 이상 지대(토지 사용료)가 아니고, 농사를 지어서 번 소득 또는 재산에 대해 부과하는 세금이 된다. 그렇다면 세금은 왜 내는 것인가?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 개인의 소유는 탐욕, 싸움 등으로 부당하게 침해될 우려가 있으므로 각자가 비용을 지 불해 국가를 형성하고 국가로 하여금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논리를 폈다. 소위 사회계약설의 핵심이다.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는 로크의 주장 이래 약 100여 년이 지 난 18세기 말 내지 19세기 초에 자유주의 운동이 완성됨으로써 비로소 확립되었다.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인간의 기본 조건으로 사유재산권의 보장을 요구했다. 사유재산권의 보장에 이르기까 지는 오랜 기간 기성 권력에 저항하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14세기 초부터 전 유럽에 퍼진 르네상스에서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 태동했고, 16세기에서 17세기 중반까지 종교 개혁과 종교 전쟁을 통해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확보되었으며, 이어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 말까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서 절대 군주제와 신분 차별 제도를 무너뜨린 시민 혁명이 차례로 성공하면서 비로소 토지의 사적 소유권이 확립될 수 있었다.
- 소빙기 도래와 식량 기근
중세기 초반과 중반에는 그나마 기후가 온난해 식량 생산 여건 이 좋은 편이었는데, 14세기 이후 약 400년간 지속된 소빙기는 유라시아 대륙에 극심한 식량난을 안겨 주었다. 지구는 1300년대 중반부터 1700년대까지 기온이 종전에 비해 1~2°C 낮은 소빙기를 맞았다. 최근 우리가 보는 기후 온난화 현상이 아니라, 기온이 종전의 평균치보다 떨어지는 기후 한랭화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기간 유럽에서는 알프스 빙하가 크게 증가하였고, 강과 운하는 수시로 얼어붙었으며, 여기저기 가뭄이 들어 식량 생산량이 대폭 감소하였다. 그 결과 기아에 시달리는 인구가 대폭 늘어났는 데, 이에 더해 1350년 경 대규모로 발생한 흑사병(페스트)은 당시 면역력이 약했던 유럽 인구의 4분의 1을 몰살시킬 정도로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기후의 문화사》를 쓴 볼프강 베링어는 17세기 유 럽에서 극에 달했던 마녀 사냥이 실은 당시 농산물 흉작이 극심 했던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분풀이를 하기 위해 발생한 사회적 광 란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마녀 사냥은 소빙기가 낳은 범죄였다”고 주장했다.
- 조선과 일본에서도 소빙기는 심각한 기근을 불러왔다. 일본의 경우 1674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엔포 대기근이 발생해 수많은 사람이 죽음에 내몰렸다. 조선에서는 현종 때인 1670년(경술년) 과 1671년(신해년)에 걸쳐 경신대기근이라 불리는 대흉작이 발 생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70년 상반기에는 냉해와 우박, 가뭄 등이 발생한 데다 메뚜기 피해가 극심해 구황 작물인 도토리마저 열매를 맺지 못할 정도였다. 여기에 6~7월 태풍과 폭우가 이어졌 고, 그 다음해에도 비슷한 흉작이 또 발생하였다. 설상가상 굶주 림으로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들에게 전염병마저 발생해 경신대기 근으로 인한 사망자 숫자는 100만 명 이상에 달한 것으로 추정되 고 있다. 당시 이 기근을 견뎌낸 사람들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보다 더 참혹한 상황으로 회상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참혹한 대기근은 약 25년 후 숙종 때도 을병대기근을 포함해 두 차례 반복해서 발생하였다. 그 결과 다수의 유랑민이 미개척지인 함경도 지방과 만주로 이주하게 되어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고(백두산 정계비 세워 국경 정리), 또한 상 당수 양반들도 기근으로 경제력이 약해지면서 농장이 해체되어 자연스레 농장에서 일하던 노비들도 풀려나고 노비 제도는 해체 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변화는 온돌이 전국적으로 크게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온돌은 우리나라에서 신석기 시대 이래 사용된 전통적인 난방 방식이지만, 조선 중기까지는 부유층이나 노인 등을 위한 방에만 제한적으로 보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빙하기라고도 불리는 16세기, 17세기를 거치면서 온돌은 점점 많이 보급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보통 백성의 초가집에도 온돌이 널리 사용되었다.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면서 체력을 유지하기 위 해 따뜻한 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때까지 조선에 상당수 남아 있던 2층짜리 한옥이 사 라지고 온돌을 설치할 수 있는 단층집이 일반화되었다. 한편 온돌 의 확산은 땔감용 나무 수요를 급증시켜 조선 후기 산림이 황폐해 지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 청어는 15세기 중반 이전에는 주로 발트해에서 잡혔는데, 해류가 변하면서 네덜란드 쪽 북해 앞바다로 몰려들었다. 당시 네널란드 사람들은 대부분 저지대에 살고 있어 목축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너도나도 청어 잡이에 나서게 되었다.
청어는 원래 기름진 생선이라 맛이 좋았는데, 말려서 과메기처
럼 만들거나 천일염으로 절여 팔았다. 1600년대에는 그 수요가 얼마나 많았던지 청어잡이 어선을 비롯한 네덜란드 선박이 이미 2 천척을 넘었다. 이처럼 많은 선박을 제조하다 보니 네덜란드에서 는 자연스럽게 조선업과 해운업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물류 산업과 금융, 보험 산업 등도 덩달아 활성화되었다. 토머스 프리드만은 그의 책 《코드 그린(Code Green)》에서 칼 포프의 말을 인용하여, “북유럽이 자본주의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17세기 북대서양의 대구잡이 어선들 덕분이었다”고 소개했다.
사실 대구와 청어는 배가 고팠던 유럽인들에게 귀한 식량으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 네덜란드 등을 해양 강국으로 끌어올린 주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곡물이 고대 도시를 있게 한 원동력이라면, 고기는 산업 도시 를 있게 한 동력이었다. 미국 시카고는 중부 지역에서 생산된 풍부한 곡물이 집결하는 곳인데, 이곳으로 철도가 연결되면서 세계 정육업의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곳에 집결되는 곡
물로 소와 돼지를 사육하여 고기를 대량으로 유통하는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시카고의 유니온톡스야드는 250ha 규모의 면적 위에 한때 7만 5천 명이 넘는 근로자를 고용한 '도시 안의 도시’ 일 정도였다. 냉동 기술의 발달은 도시에서 고기를 구입하는 것 을 더욱 쉽게 하였다. 1875년 뉴욕의 젊은 발명가 존 바테스(John I. Bates)가 쇠고기 수송을 위해 냉동 기술의 개발에 성공한 이래, 1878년 아르헨티 나 쇠고기가 냉동선에 실려 프랑스에 처음 도착하였고, 1880년에는 호주산 냉동 고기가 런던에 도착하였다. 냉동 기술은 쇠고기를 운송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냉동 기술로 인해 도 시에 다양한 식품을 안전하게 공급하는 것이 훨씬 용이해졌다.
- 식물에게는 온도 1도의 차이가 핵폭탄에 비유되는 엄청난 충격이다. 정부 간 기후 변화 협의체(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는 2011년 말 발표한 5차 보고서에서 지구 온난화가 현재 상태로 계속 진행된다면 21세기 말 지구 온도는 3.7°C 상승할 것으로 예측하고, 세기말 온도 상승을 2°C 이하 로 막기 위한 특단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촉구했다. 설사 목표대 로 2°C만 상승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새로운 기후 조건에 적응할 수 있는 식량 작물의 종자를 시급하게 다시 만들어야 한다. 농촌 진흥청이 2016년 6월 30일 제공한 보도 자료에 의하면, 현행 온 난화 추세가 계속될 경우(RCP 8.5 기준), 벼 생산성은 2040년대 13.6%, 2060년대 22.2%, 2090년대에는 40.1% 감소할 것으로 추 정되었다. 국제농업개발기금(IFAD)은 지구 평균 기온이 1°C 상승 할 때마다 세계 밀 생산량은 6%, 쌀은 3.2%, 옥수수는 7.4%, 그리고 대두는 3.1%까지 감소할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미래가 아 니라도 지금 당장 우리나라에서 기후 온난화를 실감할 수 있는 작물이 많다. 사과는 벌써 휴전선 부근까지 주산지가 확장되었 고, 여름철 우리가 즐겨 먹는 고랭지 배추는 대관령에서도 재배가 힘들어 북한의 개마공원으로 주산지를 옮겨야 할 정도이다. 점점 높아지는 기온에 적응할 새로운 품종을 시급히 만들어내야 한다 는 뜻이다. 기후 온난화는 또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병해충이 창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기온이 높을수록 그리고 습기가 많을수록 병원체와 해충이 왕성하게 활동한다. 20세기 중반 농약이 개발되기 전까지 인류는 동식물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병해충 으로 인해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리고 이 문제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 농지 개혁은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를 끌고 갈 수많은 인재를 키 워냈을 뿐만 아니라, 농촌의 과잉 인구를 산업 인력으로 재편하 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농지 개혁으로 지주가 농지를 빼앗 기게 되자 그동안 농촌의 지주에게 예속되어 있던 이른바 행랑살 이, 하인들, 그리고 부농 및 중농에 고용된 머슴들이 대부분 도시 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 도시에는 값싼 저임금의 노동력이 풍부해졌다. 1960년부터 1975년까지 농촌 인구의 도시 유출 규모 는 약 686만 명에 달했는데 이러한 규모는 당시 농촌 인구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특히 유출된 인구의 대부분은 35세 미만의 젊은 층이어서 도시의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급격하게 성장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강의 기적은 농지 개혁에서 시작되었다고 평가해야 한다. 농가 경제를 안정시켜 우수한 인재를 키워내지 않았다면 1960 년대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발전의 기회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을 것이다. 1960년대까지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던 필리핀이나 에 티오피아 등의 경우에는 농지 개혁을 하지 못해 대다수 국민이 배 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그래서 그 이후 발전 속도에서 크게 뒤 처진 것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강의 기적은 실로 "우수한 한국의 인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고, 그 우수한 인재는 농지 개혁 덕분에 양성될 수 있었다.
- 한편 농업인 입장에서 보면, 농산물 가격이 비쌈에도 불구하고 영세한 경영 규모 때문에 농업 소득이 매우 적다는 것이 불만이 다. 우리나라 농가 당 평균 농업 소득이 연간 1천만 원 수준인데, 이 정도의 소득으로는 젊은이가 농업을 직업으로 선택하기는 어 렵다. 결국 적은 소득으로도 생계를 꾸릴 수 있는 고령농만 남아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쌀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나라는 농가 당 보통 1ha 정도 의 규모로 벼농사를 짓는데 2017년 통계를 기준으로 보면 동 면 적에서 5.27톤의 쌀을 생산했으므로 여기서 얻는 1년간의 소득은 총 726만 원에 불과하다. 이처럼 낮은 소득으로는 젊은 후계농업 인을 농촌으로 불러오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농업 인력은 계속 고 령화의 길을 갈 수밖에 없고 그래서 농업은 점점 더 경쟁력을 잃 게 되는 것이다.
- 기상 조건의 변화나 각종 재해 등으로 농산물 가격이 변동하는 것은 인간이 대처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농산물의 재배 면적이나 가축의 사육두수 등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농 산물 작황이 좋아 일시적 과잉 생산이 이루어졌을 경우 시장에서 과잉 물량을 격리하는 일 등은 사람의 힘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 문제를 그토록 오랫동안 해결 하지 못하는가? 사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의 농업인은 협동 조합을 통해 농산물을 시장에 공동으로 출하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농업인이 한 명 한 명씩 따로따로 시장을 상대하고 있으니 전국적으로 공급량을 조절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우리나라 도매시장이 농업인 개인 단위로 농산물을 출 하하도록 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인은 생산량 대부분을 가 락시장을 비롯한 도매시장의 경매장에 출하한다. 현행 경매제도 아래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원하는 물량을 출하할 수 있다. 그 래서 농업인들은 판매처를 생각할 필요 없이 그해 형성된 농산물 가격 수준에 따라 다음해 농산물 재배 면적을 결정한다. 어느 해 양파 가격이 높게 형성되면 다음 해 너도나도 양파를 심어 가격이 폭락하고, 그 다음해는 양파 심는 사람이 너무 없어 오히려 가격 이 폭등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 해마다 비싼 돈을 들여 주요 품목별로 농업인의 재배 의향과 실제 재배 면적, 그리고 작황 까지 단계별로 조사해서 정보를 제공하지만 농업인들은 그 정보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적정 생산이 이루어진 해에도 출하 하는 날짜에 따라 어떤 날에는 도매시장에 물량이 몰리면서 가격 이 폭락하고 또 어떤 날에는 물량이 적게 출하되어 가격이 폭등하 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농산물의 시장 출하 량을 조절할 수 있는 어떤 장치도 작동되고 있지 않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 경매 방식이 이미 없어졌거나 아주 미미한 수준 으로 줄었기 때문에 농업인들은 물량이나 가격을 대부분 도매상 (우리나라의 시장도매인)과 협상해서 거래한다. 도매상과 상대하면 대부분 안정된 가격으로 장기간에 걸쳐 거래하기 때문에 경영규모가 아주 큰 농업인이 아니면 협동조합에 맡겨 거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협동조합은 재배 단계에서부터 농업인과 협 의해 미리 생산 면적을 조절할 수 있고, 또 기후 조건 등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과잉 생산이 이루어졌을 경우에도 사후적으로 시장 출하량을 조절할 수 있다. |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도매시장에서 농업인 한 사람 한 사 람의 소량 물량도 다 받아서 경매해주기 때문에 생산자가 굳이 협 동조합을 통해 출하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외관상 협동조합을 통해 도매시장에 농산물을 출하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기는 한데, 이 경우에도 대부분은 개별 농업인이 출하한 농산물에 이름표를 붙여 도매시장까지 운송해주는 역할에 그친다. 협동조합 단위로 농산물을 모아서 선별, 포장하고 도매시장과 가격 등을 미 리 협상해서 출하하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다.
둘째로, 우리나라 농업인은 농산물 공급량 조절을 내 책임'이라 고 인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부의 책임이라 는 것이다.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가격은 정부가 알 아서 보장하라”는 식이다.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 정부가 해외 농산물 수입을 막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거나 정부가 과잉 물량 을 매입해서 시장에서 격리하지 않은 탓이라며 정부를 비난한다.
사실 농업인들의 이런 생각은 농산물의 공급이 수요에 비해 항 상 부족했던 과거 시절에 형성된 것이다. 20~30년 전만 해도 소비 자들은 원하는 만큼의 농산물을 만져보기 어려웠다. 농업인들은 어떤 품목이라도 생산만 하면 판매하는 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 고, 오히려 정부가 적극적으로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증산을 독려 했던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농업인들은 지금도 농산물이 안 팔리 면 정부 책임으로 돌린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 우리나라도 2000년 대에 농산물 공급량이 수요에 비해 전반적으로 과잉인 시기에 접 어들었다. 지금은 생산자가 제값을 받기 위해 그리고 농산물 가격 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특단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인데, 안타깝게도 농업인들의 생각은 과거에 머물고 있다.
셋째로, 농업인이 협동조합이나 공동출하 조직을 신뢰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농업인 다수가 모여 시장으로 공동 출하를 할 때는 반드시 품질 기준을 정해 선별을 하고 농산물의 등급을 매기기 마련인데, 이때 협동조합과 농업인 간에 갈등이 생긴다. 왜 내 농산물을 1등으로 평가하지 않았는지, 옆 사람의 농산물 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도 왜 1등으로 평가했는지' 불만을 제 기하기 일쑤다.
선진국에서는 품질 평가자의 판단을 대부분 신뢰하는데 우리 나라는 오랜 기간 지속된 평등주의' 사고방식 때문에 내 상품이 다른 사람의 상품에 비해 품질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쉽사리 수긍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만이 하나둘 쌓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공동출하 조직은 와해될 수밖에 없다. 사실 농업인 입장에서 보면, 등급 판정에 불만을 품고 개별적으로 시장 출하를 하는 것 보다 차라리 그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공동출하를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더 이익이다. 하지만 많은 농업인들은 내 상품과 다른 사람 상품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결국 손실의 길로 가는 경우가 많다.
- 한편 농업 소득 보조는 고령농의 은퇴를 막아 농업인의 세대 교 체와 경영 규모 확대를 어렵게 하고 결국 한국 농업의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연간 240만 원 수준의 소득 보조는 고령 농가의 생계비에는 상당 한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고령이라도 농업 활동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든다. 더구나 벼농사 같은 경우에는 마을 젊은이에게 대 부분의 농작업을 대행시킬 수 있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거동만 할 수 있다면 농업인의 자격을 유지하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 니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 따르면, 정부에 등록한 농업 경영 체 숫자가 2015년 이후 오히려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15년 농업 경영체 숫자는 160만 개에 조금 미치지 못했었는데, 2018년에는 167만 개로 약 7만 개 늘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증가된 7만 개의 경영체는 대부분 70세 이상 농업인이 경영하는 것이었다(70세 이 상 농업인 경영체는 같은 기간 53만 4천 개에서 58만 6천 개로 5만 2천 개 증가), 사정이 이렇다고 한다면 젊은 후계자가 어디에서 경영 규모 확대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 벼농사는 들녘별 경영체다, 조직 경영체다 해서 마을 젊은이 몇 사람이 고령농의 농사까지 다 맡아 서 짓는데 이미 규모화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 한 농작업 대행의 규모화는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과는 거리 가 멀다. 마을 젊은이는 자신의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 람의 농작업을 대신 해주고 위탁 영농비를 받는 것에 불과하기 때 문에, 영세 소농 체제에 따른 문제점은 전혀 해소되지 않은 것이 다. 즉 농산물 값은 여전히 비싸고 농업인의 소득은 쥐꼬리만큼 밖에 안 되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또 이런 의견도 있다. 고령 농업인 등 기존 농업인에 대한 소득보조를 계속하면서, 한편으로는 젊은 농업 경영인을 첨단 농업 분 야에 적극 영입하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얼핏 보면 좋은 생 각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존 농업인이 농업 활동을 계속하는 한 젊은 후계자에게 농업을 직업으로 선택하게 할 기회는 거의 없다. 고 보아야 한다. 한국 농업은 벼농사, 노지 채소, 시설 채소, 과실 류, 유지류와 특용작물, 그리고 축산업이 거의 전부인데, 이들 작 물과 가축 대부분이 국내 시장에서는 공급 과잉 상태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첨단 시설 농업의 경우에는 초기 시설 투자액이 크기 때문에 수지를 맞추려면 비교적 큰 규모인 1~2ha 정도로 운영을 해야 한다. 만약 다수의 젊은이가 시설 농업에 뛰어 들어 여기서 생산된 시설 채소를 국내 시장으로 쏟아낸다면, 결 국 해당 농산물의 가격이 폭락해 기존 농업인과 스마트팜 투자자 모두 큰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샐러드용 채소나 일부 쌈 채소, 그리고 농산물 가공이나 건강 기능성 식품 분야 등에서 젊은 경영자가 틈새시장을 찾을 수는 있으나 그것도 국내 시장만으로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해외시장을 개척한다면 상당한 기회를 엿볼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국내 생산자, 그것도 고령농의 반발 때문에 다른 나라의 수출시장을 열기 위한 검역 협상을 공격적으로 추진할 수도 없는 사정이다. 국가 간 검역협상은 서로 관심 품목을 주고받지 않으면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파프리카 시장을 열기 위해 2007년부터 중국 검역 당국과 협상을 계속해 왔는데, 12년 이 지난 2019년 말에서야 겨우 합의를 보았을 정도다.
- 이제 농촌 인구는 농업만이 아니라 쾌적한 환경과 자연을 기반 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유지되는 시대에 와 있 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구 대다수가 도시에 거주하는 시대 상황에 서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농촌의 활용 방안을 어떻게 찾 을 것이냐에 관심을 두어야지, 농업 소득 보조를 통해 농촌 인구 를 유지하겠다고 시도하는 것은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할 것이다. 농업계의 정치적 영향력이 줄어드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농업 인의 숫자가 계속 줄어들면 소득 보조 예산을 늘리는 데 어려움 을 겪을 수밖에 없다. 국가 예산을 확보하는 것은 사실상 정치 행 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농업인의 표가 줄어들면 정 치적 영향력도 그만큼 떨어지고 그래서 예산을 확보할 가능성도 약해진다. 다시 말하면 보호주의 일변도 농정은 언제까지나 지속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호 농정을 계속하게 되면 아마도 20~30년은 더 현재와 같은 고령농 중심의 영세 소농 체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나라와의 농업 발전 격 차는 그만큼 더 크게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농업 경영은 갈수록 고도의 지식과 전문적 관리 능력을 요구하게 될 텐데 이러한 인력 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 낼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보호 농정 이 아닌, 농업 경쟁력을 높일 다른 대안이 정말 없는지 냉철하게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와 있다.
- 미래 농업의 대안으로 스마트팜이 크게 떠오르고 있다. 좁은 국토에서 많은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제한된 땅에서 정밀 농업을 지향하거나 땅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 시설 농업을 스마트하게 운영할 필요가 있다. 벼농사에 자율주행 트랙터나 드론을 활용하여 최소의 인력으로 대규모 경작을 실현하는 방식, 그리고 온실 및 축사, 식물공장 등에서 정보통신기술과 빅데 이터를 활용하여 동식물의 생육 환경을 정밀 제어함으로써 농업 생산성과 품질을 극대화하는 방식 등이 그것이다. 땅 문제가 아니라도 기후 변화가 더 심각해지면 잦은 태풍이나 가뭄 등으로 어 차피 노지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불리해질 수 있고, 축산 분야도 조류인플루엔자나 구제역, 돼지열병 등 전염성 질병으로부터 벗 어나려면 가축 사육장소를 외부 환경과 완전히 단절할 필요가 있 다. 불가피하게 노지에서 농업을 하더라도 땅속의 수분이나 식물 의 성강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또 식물의 병해충을 감시카 메라로 즉시 포착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스마트팜은 이제 선 택이 아니라 필수 조건으로 등장하고 있다.
- 농협이 바뀌어야 한다. 농협은 농산물 판매를 제대로 하 지 않으면 존재할 이유가 없는 조직이다. 농협에 은행 업무를 허용 한 것은 농산물 판매를 잘 하라고 하는 것이지, 농산물 판매 사업 을 소홀히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대부분의 지역 단위 농협은 농업인이 가져온 농산물에 이름표를 붙여 도매시장으로 운송해 주는 단순 서비스 업무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농산물 판매 사업이라고 할 수 없다. 선별도 되지 않은 농산물을 보내 놓고 경 매회사나 중도매인이 알아서 가격을 정해달라고 하는 것이 어떻 게 판매 사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판매 사업은 조합원 의 농산물을 모아 선별이나 가공 과정을 거쳐 상품을 만든 다음, 가격을 협상해서 제값을 받아주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회원 농협의 조합원 자격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1000m2 이상 농사를 짓거나 소 1마리를 키우는 조합원은 법상 농업인이긴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전업농일 수는 없다. 부업농 도 의결권 1표, 전업농도 의결권 1표인 여건에서는 조합의 중요한 의사 결정에 전업농의 의견이 반영되기 어렵다. 진정 농업인을 위 한 조직으로 농협이 거듭나려면 전업농의 의견을 존중하는 의사 결정 구조를 갖춰야 한다.
또한 지역 농협과 품목 농협의 역할 분담도 중요할 것이다. 예컨 대 지역 농협은 조합원으로부터 농산물을 수집하는 역할을 담당 하고, 판매는 품목 농협에서 전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 이다. 물론 도매시장에서 경매를 강요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산 지 농협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진정으로 농업인에게 제값 받고 농산물 팔아주기를 원한다면 농협 임직원이 한목소리로 도매시장 거래 제도의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 지금도 경매를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농산물 대표 가격이 경매 방식에서 나오므로 경매를 위축시키는 거래 방식의 다양화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경매 물량이 줄면 경락 가격이 떨어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농업인에게 손해라는 것이다. 또 농업인이 조직화되어 있지 않아 도매상과 동등하게 협상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거나, 도매상이 가격 정보를 투명하게 공 개하지 않고 또 출하자에게 거래 대금을 지급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그래서 경매회사들이 농업인으로부터 일정한 수수료를 받고 농업인의 보호자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현실의 변화를 애써 외면하고 경매회사 의 독과점 이익을 옹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농산물 대표가 격은 경매 방식이나 도매상 거래 방식을 불문하고 거래 물량이 가 장 많은 곳에서 나온다. 그래서 경매를 거의 하지 않는 유럽이나 미국, 일본 등은 대표 가격이 당연히 도매상 거래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경매를 강제하고 있어서 경매 가격이 대표 가격 역할 을 하고 있을 뿐이다. 경매 가격만이 대표 가격이 될 수 있다는 논 리는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폐기된 지 오래다.
농업인은 거래 협상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도 옛날이야기다. 우 리나라에서도 산지 유통센터나 영농법인을 통해 공동 출하를 하 는 농업인이 크게 늘어났다. 이렇게 조직화된 출하 단체는 협상력 이 충분한데 가락시장에서는 경매만 강요하고 있어 출하할 수 없 는 것이다. 이들은 도매상과 미리 가격을 협상할 수 없기 때문에, 가격을 얼마 받을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먼저 출하를 해야 하 는 경매 방식이 불안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도매시장을 피해 대 형 유통업체 등 다른 출하치를 찾고 있다.
- 경매의 더 큰 문제는 농업인의 조직화를 오히려 방해한다는 점이다. 경매는 개별 출하자가 소량씩 물량을 내도 다 받아주기 때 문에 농업인들은 공동출하 조직에 가입하지 않고 개별 출하를 고 집할 수 있다. 경매회사 입장에서는, 농업인이 조직화해서 공동출 하를 할 경우 경매회사를 이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농업인의 조 직화를 반가워할 이유가 없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는 가격 결정 을 오로지 경매회사에 맡기고 그 결과만 기다리는 소극적 농업인 을 양산하여 경매회사만 돈을 벌고 농업인은 손해를 보는 현실을 고착시키고 있다.
끝으로, 거래 가격의 공개나 거래 대금 지급의 안정성도 도매 상 거래방식이 경매회사를 통하는 경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제도를 이미 갖추고 있다. 현재 서울 강서도매시장에는 도매 상 거래 방식이 경매 방식과 병행해서 운영되고 있는데, 도매상 들은 공동 결제 시스템을 만들어 결제 은행에서 100% 대금 지 급을 보장함은 물론 거래 정보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도매 상의 공동 결제는 다수가 연대해서 출하자에게 대금 지급을 보 장하는 형식인데, 이 방식이 경매회사 단독으로 대금을 책임지는 것보다 오히려 더 든든하다. 만일 경매회사가 부도가 나면 출하 대금을 책임져 줄 주체는 그 어디에도 없다. 현재 경매 방식과 도매상 거래 방식을 병행하고 있는 서울 강서도매시장에서는 도매상 거래 방식이 경매 방식보다 크게 활성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은 농업인이 경매 회사의 보호를 받아야 할 이유가 크게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락도매시장에서는 여전히 농업인에게 경매 회사의 보호를 받도록 강제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농업인에게 스스로 유리한 거래 방식을 찾아 농산물을 출하하도록 왜 자유를 주지 않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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