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의 역사(상)

etc 2016. 1. 28. 10:01

- 세계적으로 문명이 발달하고, 상업적 또는 문화적 교류가 확대되면서 식생활은 더욱 다양하고 정교하게 변했다. 필요하지 않았던 것들이 필수품이 되면서 문명이 발달한다고 한다. 먹거리가 사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요인으로 자리잡게 됨. "당신이 무엇을 먹는가를 알려주면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맞히겠다"는 말처럼 사람들이 어떤 식품을 어떻게 요리해서 먹는가가 그 집단의 특성을 나타냄. 도덕적 규범이 철자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소식하는 경향이 있음. 돼지고기에 피, 식초, 소금만 넣어 끓인 스파르타의 블랙 브로스나, 미국의 부유한 몰몬교도들의 검소한 식생활, 또는 16세기와 17세기에 일어났던 반종교개혁 운동에 참여했던 신학자들의 엄격하게 절제된 식생활이 바로 그런 사례
-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30)에 따르면 "러시아 남부에 살던 유목민이던 스키타이인들은 고기를 모두 발라서 죽인 짐승의 배에 채운다음, 물을 붓고 그 밑에 말린 뼈로 불을 지폈다. 뼈를 발라내면 뱃속에 고기를 전부 넣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죽은 소를 이용해 쇠고기를 요리했다"고 했다. 미국 북부와 캐나다 인디언들도 이런 방법을 사용. 몽골인들은 가죽과 돌을 함께 이용. 이들은 양의 목을 베고나서 목을 통해 뼈와 고기와 내장을 모두 꺼낸 후에, 고기를 잘게 썰어 뜨겁게 달군 돌과 함께 가죽 속에 다시 넣는다. 두시간을 기다리기만 하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익는다. 자이르의 발로우바스족은 나무껍질을 이용해서 조리한 아우 플라트라는 음식을 먹음. 말레이인들을 바롯한 열대지역 사람들은 대나무에 쌀을 넣고 숯불을 이용해 밥을 지어먹기도 함
- 술에 취하는 의식은 꿀의 상징과 마찬가지로 다산, 수확, 성공과 관련. 고대에는 술에 취하는 일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스스로 신이라 느낌. 아메리카 인디언은 물론 그리스인, 로마인, 켈트인, 게르만인, 슬라브인, 스칸디나비아인들도 서로를 친구나 협력자로 느끼기 위해서 함께 술을 마심. 벌꿀술은 불멸의 술이기도 했다. 신전에 모셔진 어떤 신도 이 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고대 아일랜드인들은 죽은 왕들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 왕의 시신을 큰 통에 담긴 벌꿀술에 넣고 궁전을 불태우기도 했다. (특히 웨일스인들은 켈트족의 벌꿀술 양조가를 예언가나 심령치료사로 여겼다. 발효와 마찬가지로 병을 낫게 하는 일도 역시 신과 인간사이를 연결해주는 전문가들에게만 주어진 마술적 힘이었다)
- 17세기부터는 일반인들도 시장에서 고급 사냥감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농부의 수는 물론 경지면적도 충분치 않았지만,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먹을 우유와 육류의 수요가 증가. 곡물경작을 위주로 했던 당시에 이런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사냥이 성행하면서 작은 짐승들은 멸종위기에 처함. 직업적으로 사냥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총을 이용한 사냥도 시작됨. 전문적 사냥꾼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에 걸친 도제생활을 해야했고, 사냥은 대규모로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훌륭한 산업이었다. 유럽의 지주들은 사냥을 잡은 고기를 도시와 노동자들, 특히 하층계급의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함. 작센의 제후는 노동자들이 주로 먹는 산토끼, 여우, 새와 같은 작은 식용 짐승과 귀족들이 좋아하는 곰, 스라소니, 야생 고양이 같은 큰 짐승을 가공하기 위해 대규모 훈제공장을 세우기도 함. 귀족들은 큰 짐승의 고기를 먹고, 평민들은 작은 짐승의 고기를 먹는다는 이분법은 짐승의 힘이나 교활함에서 나온 것으로 매우 흥미로운 관습이었따. 그런 이유 때문에 "당신이 무엇을 먹는가를 알려주면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맞히겠다"는 말이 나옴
- 전통적으로 사냥한 고기는 너무 신선해서 잡은 날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겨왔다. 실제로 사냥꾼에게 쫓기면서 잔뜩 겁에 질리고 피로해진 짐승은 스트레스로 인한 근육의 긴장을 풀기 위해 많은 양의 젖산을 분비. 근육으로 분비된 젖산은 질소 산화물인 요산으로 바뀌면서 고기의 질에도 영향을 미침. 고기를 바깥에 걸어두면 근육속 요산이 증발하므로 중독의 위험이 줄어듬. 그러나 사냥하는 중에 내장이나 방광이 손상된 경우에는 그 내용물이 고기를 오염시킴. 따라서 심한 상처를 입은 짐승은 내부를 깨끗하게 닦아내고 즉시 먹는 것이 좋다
- 1966년에 미국 농학자 잭 할런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터키의 카라카닥 화산 부근에 있는 원시 밀밭에서 채취실험을 행함. 한시간 동안 맨손으로는 2.5킬로그램의 야생밀을 채취할 수 있었고, 약 9천년전 사용하던 것과 같은 돌낫을 쓰면 3킬로그램을 수확할 수 있었다. 탈곡을 해서 껍질을 벗기고 나면 2킬로의 밀이 얻어짐. 이렇게 수확한 원시밀은 품질도 좋았고, 단백질 함량은 미국산 최고급 밀보다 더 높았다. 이런 정도라면 구석기인들이 3주일만 일하면 다음해 여름까지 먹을 수 있는 양식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선사시대 유적자 자료를 살펴보면 기원전 20세기에서 기원전 7세기나 6세기까지 선사인들의 영양상태는 계속 향상되고 있었다. 선사인들은 점차 소, 유제류, 염소와 같은 큰 짐승들 대신 토끼, 쥐, 새, 심지어는 달팽이와 같은 작은 짐승들을 더 많이 잡아먹게 됨. 식생활에서 그런 변화는 기후가 변했기 때문일수도 있지만, 야생동물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한편 이 시기의 사람들은 액과, 견과, 씨앗과 같은 식물성 식품도 많이 먹기 시작했다. 당시의 식물성 식품은 단순한 보조식품 이상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임. 그 이후에 외알밀이나 에머 밀 등에서 유래한 진정한 의미의 곡물이 등장. 선사 유적지에서는 초식동물의 뼈와 함께 곡물의 흔정기 많이 발견됨. 이 시기에 이미 짐승을 가두어 키웠던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인 목축을 했다고 하기에는 어려움
- 고고학자 고르동 쉴드는 인간과 가축의 밀접한 관계는 빙하기가 끝나면서 근동지역의 기후가 매우 건조해지고, 가젤이 많이 살던 네게브 지역의 사막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추정. 그런 지역에서는 인간과 동물이 모두 물이 있는 오아시스에 함께 모여 살아야만 했고, 인간은 그렇게 발전된 공생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것.
- 페니키아, 크레타, 그리스, 라틴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레프는 가장 중요한 재산의 소의 머리를 상징. 잦은 가뭄에 시달리던 이들 지역에서 소에 버금가는 유일한 가축은 낙타였다. 그래서 세번째 글자인 감마는 독특한 모양의 낙타를 상징. 두번째 글자인 베타는 텐트나 집을 의미. 그러니까 알파멧의 첫 세글자로부터 고대사회에서 목축업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고대로부터 전해왔던 소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채식주의자들이 많은 인도에서는 지금도 성스러운 소에 대해 각별한 존경을 표함.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날개달린 소나 아피스나 오시리스처럼 짐승의 모양을 한 이집트의 신 또는 중국에서 성스럽게 여겼던 소도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음. 동물에 대한 저서를 남긴 소피스트였던 히피아스(기원전 5세기)나 플리니우스에 의하면, 보스포니아의 축제에서는 화관으로 장식한 소를 제물로 바치기도 했고, 쟁기를 끌던 소를 죽인 노예는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고대 게르만 부족들은 신부의 지참금으로 금이 아니라 귀중하게 여기던 소를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소를 지참금으로 지불하는 관습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단백질 결핍증이 만연하고 있고, 다른 나라와의 교역도 거의 없는 아프리카의 신생국에서는 유목민들에게 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라고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다. 아프리카 동부에 사는 건장한 마사이족은 이집트인들로부터 이어받은 긴 뿔을 가진 소를 죽이지 않고, 목에 속이 빈 화살을 꼽아서 피를 뽑아 그대로 마시거나 곡물에 섞어 죽을 끓여 먹는다.
- 암흑기에도 유럽의 농업을 지켜주던 수도사들은 치즈뿐만 아니라 포도주의 전문가이기도 했다. 치즈가 포도주와 잘 어울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리모드 라 레니에르는 치즈를 술고래의 비상식량이라고 했다. 수도원에서 생산된 포도주와 치즈에는 수도원의 이름을 붙임. 나중에는 다른 곳에서 생산된 치즈에도 수도원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음. 예를 들면 포르-살뤼와 마르왈이라는 치즈이름은 수도원에서 유래된 것. 치즈포장에 수도사의 그림을 쓰는 것도 소비자와 생산자들이 모두 무의식중에 그런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 플랑드랭은 버터를 먹는 나라는 16세기에 카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했던 나라와 거의 일치한다고 주장. 영국에는 왕이 일부다처제를 선호했던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파문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맛있는 카술레를 먹는 편이 낫다고 여기던 프랑스의 랑그도크 지역은 둘로 나뉘어짐. 남부 사람들은 올리브유를 좋아했고, 북부 사람들은 호두기름을 좋아했다. 그러나 랑그도크 사람들은 모두 거위기름을 먹었기 때문에 버터가 없어도 큰 문제는 없었다. 이 지역에 신교가 발을 붙이기 어려웠던 이유는 아마도 거위기름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 신교로 개종했던 북유럽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낙농을 많이 했음. 교회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사순절 동안에 먹을 기름을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교회의 요구를 수용하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매년 유제품의 판매량이 일시적으로 크게 줄어드는 것도 주민들을 힘들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여론이 자연스레 형성됨. 그 후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등으로 이주한 백인들은 자신들의 출신지역에서 익숙했던 지방을 먹고 싶어했다. 식민지의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기도 했지만, 함께 살게된 서구인들의 발전된 음식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함. 영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버터를 많이 먹고,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선느 기름을 많이 먹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프랑스처럼 반반으로 나누어짐. 버터가 생산되지 않는 지역에서는 수입을 해서라도 먹었다. 유럽연합에서는 지금도 버터 재고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에는 탈지우유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대용버터도 등장. 주로 상품명만으로 알려지는 대용버터는 대부분 버터밀크나 유장에 달걀 노른다, 콩기름, 간, 뇌 등에서 추출한 레시틴과 대두를 넣어 만듬. 이런 대용버터는 지방성분이 50% 이하이기 때문에 콜레스테롤 섭취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있다. 그러나 대용버터는 요리할 때 버터나 기름처럼 쓸 수는 없고, 토스트에 발라서 카페인을 제거한 커피와 마시는 것이 일반적. 이런 것이 진보라고 할 수 있다. 금식은 과거가 되었지만,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찾아냈다.
- 듀럼밀이라고도 부르는 경질밀과 연질밀의 차이를 살펴보자. 가을에 씨앗을 뿌리는 경질밀은 가을밀이라고도 부르고, 빵보다는 파스타를 만드는 데 주로 쓰며, 녹말이 적고 단백질이 많음. 연질밀 또는 봄밀은 주로 온난한 지역에서 재배되고 단백질이 적으며 빵, 비스킷, 케이크 또는 발효 알콜을 만드는 데 적당. 전 세계 생산량 중 90% 정도가 연질밀이다. 세계적으로 3만여종의 밀이 알려져 있음.
-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기원후 14) 시대에 히포크라테ㅡ의 제자 중에서 유명한 의사였던 켈수스는 곡물가루를 체로 잘 거를수록 몸에 좋다고 했다. 현대의학 발전에 기초가 되었다고 하는 갈레노스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현대의 영양학자들은 이 점에 대해서는 히포크라테스 제자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75%로 찧은 흰 밀가루는 빻는 과정에서 껍질 부분에 밀집되어 있던 좋은 영양분이 제거되어 버린다. 그 결과 75%의 미네랄 염, 35%의 지질, 10%의 단백질, 50%의 비타민E, 75%의 비타민B가 없어짐. 그러나 밀 왕겨의 95%가 제거되기 때문에 소화는 더 잘됨. 95%로 찧은 밀가루는 아무 영영분도 없어서 소화될 것도 없이 그냥 배설되어 버림. 찧지 않은 통밀을 먹던 시대에는 내장암이나 결장암의 원인이 바로 흰 밀가루라는 주장도 있음. 그러나 왕겨가 내장의 점액성 막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살충제와 피트산이 남아 있어 오히려 더 나쁘다는 주장도 있음. 피트산이 통밀가루에 들어 있는 미네랄 염과 결합해서 소화하기 어려운 물질을 만들어내고, 매우 위험한 칼슘 결핍증을 일으킬수도 있기 때문에 통밀가루로 만든 빵은 하루에 세조각 이상 먹으면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가장 이상적인 선택은 독일의 경우처럼 85%로 찧은 밀가루를 먹거나, 부르키나 파소에서처럼 단백질이 풍부한 기장과 섞어서 먹는 것이다. 그런 방법을 선택하면 옛날의 수도사는 수녀들처럼 음식을 먹을 때 말을 하지 않고, 빵을 오래 씹어먹을 수 있게 됨
- 통밀빵을 즐겨 먹는 오늘날에는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앵 레짐 시대나 심지어는 19세기 시골사람들이 빵을 만들어 먹었던 검고 거친 잡곡가루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거의 모든 것을 사용했다. 물론 잡곡가루도 널리 쓰였고, 완두, 엉겅퀴 밤, 너도밤을 쓰기도 했고, 기근이 심했을 때는 각종 잡초를 쓰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 공화국의 장군들에게는 곡물부족이 유럽의 적군들 만큼이나 중요한 적이었다. 가루의 양을 늘리기 위해서 체로 거르는 과정을 최소화했다. 호밀이나 야생귀리에 기생하는 곰팡이 때문에 생기는 맥각병에 걸린 곡물가룽 중독되었던 일은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17세기 이탈리아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는 사기꾼들이 몸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환각효과도 있는 야생빵을 팔기도 했다. 흰 밀가루를 먹을 정도의 여유가 있던 프라토의 상인이나 메나지에 드 파리의 편집자와 같은 사람들은 당연히 가루의 품질에도 관심이 많았다. 집안은 물론 사회에서도 빵 색깔은 수백년 동안 사회계급을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었따. 밀가루를 체로 거르는 일은 제분소의 일이 아니었다. 제분소에서는 방아에서 나온 것을 그대로 내줄 뿐이고, 그것을 집에 갖고 와서 체로 거른 다음 영주가 운영하는 제빵소에 보낸다. 자신이 갖고 있는 밀가루를 쓰는 제빵사들은 빵을 주문하는 사람의 신분에 맞도록 밀가루를 체로 쳐서 빵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12세기 말까지도 프랑스의 제빵사들은 밀가루를 거르는 사람이라 불렸다.
- 전통적인 쌀 재배는 인내심 강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쌀을 주식으로 먹는 사람들의 성격과 행동에 영향을 미침. 이런 주장은 많은 영양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타민B가 많이 들어있는 왕겨를 완전히 벗겨내고 먹지는 않는다. 동양 사람들은 벼의 왕겨를 살짝 벗겨내는 정도로만 찧어서 먹음. 왕겨를 완전히 벗여내 먹으면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각기병에 걸리기 쉬움. 실제로 비타민은 각기병을 연구하던 중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은 흰쌀에 합성 비타민 B1을 넣어 먹는다.
- 3~4미터까지 자라는 테오신테는 멕시코의 옥수수밭에서 쉽게 볼수 있는 잡초임. 옛날 옥수수를 재배하던 사람들은 이 잡초를 좋아했다. 옥수수 근처에 테오신테 덤불이 있으면 옥수수의 낟알도 커지고, 수확량도 늘어나기 때문. 정확한 이유는 모르겟지만, 기원전 1500년경에 이런 변화가 대규모로 일어났던 것 같다. 갑자기 아메리카의 옥수수는 중요한 곡물이 되었따. 테우아칸의 인구와 문화수준은 물로 멕시코 다른 지역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훌륭한 문명을 이룩하게 됨. 물론 그런 일이 단순히 신비한 사랑의 힘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지 않는 현대 과학자들은 옥수수의 정확한 역사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옥수수와 테오신테 사이에 생긴 잡종이 번식력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도 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서 재배되는 모든 옥수수와 테오신테를 교배시켜 보았지만 잡종은 생기지 않음. 그렇지만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는 오지에서 채취한 딱딱한 고대 옥수수를 이용한 실험결과는 희망적이었다. 남미 티티카카호 부근의 오지에서 채취한 옥수수의 경우에는 성공적으로 잡종이 만들어졌다. 이런 실험결과로부터 옥수수의 역사를 재구성해볼 수 있음. 테우아칸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야생 옥수수와 테오신테의 교배가 이루어져서, 뛰어난 특성을 가진 잡종이 타나난 것은 3500년 전이었을 것이다. 인디언들은 그런 잡종 옥수수를 놓치지 않고, 채집해서 재배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잡종 옥수수의 꽃가루가 바람에 날려가서 다른 야생 옥수수에 닿으면서 씨앗이 쉽게 흩어지지 않는 새로운 세대가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제 옥수수 채취는 더욱 쉬워졌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야생 옥수수는 모두 잡종으로 변해 버리고, 원래의 야생종은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물론 그런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2천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일어났다.
- 멕시코 인디언들의 잔인한 의식을 경험한 스페인인들은 옥수수를 끔찍한 이교도의 상징으로 여겼다. 국민들에게 기독교식 음식을 먹이고 싶어했던 카를 5세는 밀을 가져가는 사람들에게만 신대륙의 땅을 배분해 주었다. 그러나 신대륙에서는 밀 농사가 잘 되지 않았고, 개척자들은 안달루시아 선조들이 가축사료로 썼던 인디언의 식량에 의존해야만 했음. 그러나 옥수수 신은 개척자들의 무참한 살육에 대한 보복을 내렸다. 다른 것은 먹지 않고 옥수수만 먹으면 비타민 B의 결핍으로 인해서 펠라그라라는 피부병에 걸리기 쉽다. 옥수수는 비타민 함량이 매우 낮은 곡물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인디언들은 옥수수죽에 야채를 넣어 먹었다. 인디언들은 지금도 그런 풍습을 갖고 있는데, 유럽의 개척자들은 물론 다른 유럽지역까지 펠라그라가 만연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새로운 식품에 너무 열광했던 셈이다.
- 약초에 대해 많이 알고 있던 수도사들은 약초를 넣는 여러가지 비법을 개발. 홉을 이용하는 기술이나 짓이긴 맥아를 연속적으로 넣을 수 있는 이중양조통을 개발한 것도 이들이었을 것이다. 독특한 향기를 지니고 있는 홉을 사용하면서 에일은 맑은 진짜 맥주로 발전. 레오 물랠은 8세기 후반 "면역지대로 홉을 받았던 수도원들이 있었지만, 그 홉으로 맥주를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가. 그렇지만 그 양으로 보아서 다른 목적에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던 지역들을 기록해 두었다. 그런 수도원들이 있었던 플랑드르나 독일에서 홉을 사용한 맑은 맥주가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통의 걸쭉한 갈색 에일과 구별하기 위해서 비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 고대 알파벳에서 첫글자 알레프는 소를, 베타는 집을, 감마는 낙타를 나타내고, 네번째 글자 자이는 올리브를 나타냄. 가축, 집, 운송, 농업은 문명을 발전시키는 네가지 요소였다. 그러나 농업을 대표하는 농작물로 곡물대신 올리브가 포함된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올리브유 거래는 고대사회의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페니키아, 크레타, 이집트와 같은 올리브유 생산국의 상인들은 지중해 유역은 물론 더 먼 지방까지도 올리브유를 팔러 다녔다. 기원전 6세기 이후부터 러시아 남부 초원의 스키타이인들은 흑해의 그리스 무역도시에 올리브유를 비축해 두었따. 크레타의 코모에 있는 올리브유 항아리 저장소들이 올리브유 무역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 빵은 모든 식사의 기본적 음식이 되었따. 중세부터 르네상스까지는 트렌처라 부르던 두꺼운 빵 조각에 고기나 소스를 얹어놓고 먹었다. 두사람이 하나의 '빵'접시를 같이 사용했다. 중세의 부유한 사람들은 접시로 썼던 빵을 먹지는 않았다. 좋은 소수에 젖은 빵을 개에게 주거나, 문 밖에서 기다리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줌. 그 빵은 농부들이 낮에 밭에서 먹던 두거운 빵조각보다 훨씬 맛있는 횡재였따. 농부들은 저녁식사로 죽을 먹었음.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묘사한 젊은 여자들이 아침에 싸구려 포도주에 젖은 빵을 먹는 장면들이 기록에 남아 있다. 잔다르크도 포도주에 적신 빵을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대의 식품영양학자들은 빵과 포도주를 함께 먹으면 소화가잘 안된다고 경고한다.
- 빵이 개발되기까지의 4단계
(1) 찧은 곡식 : 손으로 곡식을 먹음. 곡식을 그대로 먹거나 말린후에 쪼개거나 부수어 먹음.
(2) 달임, 으깸 또는 죽 : 곡식을 그대로 물에 넣어서 반죽하거나, 말린 곡식을 익힌 후에 가루로 빻아서 반죽. 물의 양에 따라서 숟가락으로 떠 먹거나 마심
(3) 마자 : 된 반죽으로 납작하거나 둥근 케이크로 만들어서 뜨거운 돌이나 숯불에 얹어 놓은 석쇠에 종 모양의 뚜껑을 덮어서 굽거나 미리 가열한 오븐에 넣어 굽는다
(4) 빵 : 스펠트 밀, 밀, 보리, 호밀, 귀리, 메밀, 옥수수 같은 곡물을 이용. 반죽에 효모를 넣어 부풀림. 철판이나 틀에 넣고 종 모양의 뚜껑을 덮거나 미리 가열한 오븐에 넣어서 굽는다
- 식탁에 오르는 빵은 기술적으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만들어짐. 빵은 밀가루에 여러가지 첨가물(프랑스에서 허용된 것은 2%의 콩가루, 0.5%의 아스코르브산, 2%의 대두 레시틴, 25의 소금, 60%의 물)을 넣고 1~2%의 효모를 넣어 발효시킨 반죽을 익힌 것이다. 밀가루와 첨가물을 혼합해서 물을 넣으면 가용성 성분은 물에 녹고, 불용성 성분은 부풀게 된다. 반죽을 주물러서 부드럽고 균일하게 만듬. 옛날에는 손으로 반죽을 주물렀지만 요즘은 전기반죽기를 이용. 반죽을 주무르면 공기가 들어가서 흰색이 된다. 밀가루에 포함된 글루코스가 발효되어 탄산가스 거품이 발생하면서 반죽이 부풀어 오름. 옛날에는 남겨두었던 반죽을 효모로 썼으나, 오늘날에는 산업적으로 생산된 농축 효모를 사용. 농축 효모는 맥주효모인 사카로미케스 케레비시아이로 활성이 더 커서 더 빨리 작용함. 발효된 반죽을 조각으로 나누어 빵 덩어리를 만듬. 따뜻한 온도에서 다시한번 더 부풀도록 숙성시킴. 숙성시간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 숙성시킨 반죽을 섭씨 250도에서 구우면 발효에서 생긴 탄산가스가 열 때문에 다시 한번 더 부풀어 오르면서, 열에 의해 녹말이 덱스트린으로 바뀔 때까지 부피가 늘어남. 반죽에 들어 있는 물이 더 이상 증발하지 않게 되면 빵 표면이 캐러멜처럼 되면서 단단한 껍질이 만들어짐. 프랑스의 시골빵은 옛날처럼 남긴 반죽을 이용해서 만든다. 빈 지방의 빵은 특별히 고운 가루에 맥아와 우유를 넣어 만듬. 밀기울빵은 보통의 밀가루에 밀기울을 섞어 만듬. 글루텐 빵은 글루텐을 더 넣어 만든 것으로, 단백질 함량이 보통 빵의 7%보다 훨씬 높은 20%나 된다. 무염빵은 녹말을 더 넣어 만듬. 밀가루에도 약간의 미네랄 염이 들어 있기 때문에 소금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보통 빵보다 잘 부풀지 않음. 통밀빵은 체로 거르지 않은 밀가루로 만든다. 영양빵은 감미료를 넣어서 양철용기에 넣어 구운 것이다.
- 정말 좋은 빵은 냄새를 맡거나, 보거나, 자르거나, 씹거나, 삼켜보면 알 수 있다. 그런 빵을 사기 위해 먼곳까지 가거나, 조금 더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아깝지 않다. 전통적으로 좋은 효모를 써서 구운 바게트는 황금색이고, 밀냄새가 나며, 속은 크림같고, 불규칙적인 구멍이 많고, 짙은 맛이 있다. 그런 바게트는 빵을 먹는 일이 거의 종교적 행사였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서서히 맛을 느끼게 한다. 이런 구식 제빵소에서 만드는 둥근 빵, 갈색 빵, 효모빵들도 입안에 기분 좋은 신맛을 남겨주고, 구운 후에 시간이 좀 지나더라도 과일이 익는 것처럼 숙성된 맛을 낸다.
- 전기반죽기로 반죽을 하면 빵이 더 쉽게 부푼다. 그러나 실제로는 너무 많이 발효되어, 스스로 소화되어 버리기 때문에 향기가 없어진다. 첨가물 때문에 빵의 향이 없어지거나, 가짜 항이 나기도 하고, 빵이 줄어들기도 한다. 오늘날의 빵에는 0.3%의 맥아 밀과 2%의 콩가루가 들어 있으며, 아스코르브산, 대두 레시틴, 프로피온산 칼슘, 살충제, 방부제, 표백제도 들어 있다. 제빵사들은 '오늘날의 밀가루는 품질이 떨어져서 첨가물을 넣지 않으면 빵을 만들기 어렵다. 농부들의 책임이다'라고 한다. 농부들은 잉글리쉬 메리 헌트맨이나 더치 클레멘트처럼 수확량이 많은 품종을 심어야 한다. 다수확 품종을 재배하면 같은 면적에서 수확량이 10~25% 정도 늘어난다. 그렇게 해야만 빚을 갚고 새 기계를 살 수 있다. 제빵사들은 다수확 품종의 밀로는 좋은 프랑스빵을 만들 수 없다. 그런 밀은 스칸디나비아의 부드러운 방을 만드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바게트를 만드는 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한다.
- 세계 어느지역에서나 대부분의 전설에는 대홍수의 이야기가 있다. 길가메시 시대의 바빌로니아 기록에 의하면 그곳 방주의 지도자는 우트나피슈팀이었고, 창세기에 나오는 방주 주인은 노아였다. 두 인물이 모두 포도주에 대한 최초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우트나피슈팀은 "나는 일꾼들에게 에일과 맥주를 주었고, 기금과 포도주도 강물처럼 넉넉하게 주었다"고 말했다. 이 전설에서는 방주를 지었던 일꾼들이 모두 방주에서 나와 고통을 나누었다. 그러나 성서의 노아는 자신과 가까운 가족만을 방주에 태움. 다른 인간들이 모두 죽은 후, 대홍수가 끝나서 물이 줄어들었을 때 "노아는 포도원을 가꾸는 첫 농군이 되었는데, 하루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였다"고 전해진다. 성서에 포도나무나 포도주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노아의 시대부터였다. 대홍수 이전에도 포도나무가 있었겠지만, 포도주는 없었던 것일까? 대홍수의 전설에 해당하는 실제사건은 기원전 4000년 경에 있었다. 두 전설을 글자 그대로 믿는다면 메소포타미아에서 포도주가 발명된 것은 대홍수 이전이었겠지만, 히브리인들의 경우에는 대홍수 이후였던 셈이다
- 포도주 양조기술. 포도주를 만드는 방법은 우연히 알려졌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개선되었을 것이다. 포도주스에 사카로미케테슬는 효모가 작용하면 포도주가 됨. 포도껍질에 먼지처럼 묻어 있어서 과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효모를 으깬 포도와 함께 밀폐된 통에 넣어두면 주스에 들어 있는 당이 분해되어 알콜이 생김. 발효는 상당히 빨리 진행됨. 5일에서 5주덩조 지속되는 이 발효과정에서 포도껍질의 색소와 타닌이 녹아나와서 포도주의 품위를 높여줌. 포도의 줄기는 알콜이 과도하게 생기는 것을 막아주는 산을 배출함. 그러나 줄기때문에 원하지 않는 맛이 나기도 하기 때문에, 줄기를 전부 또는 일부만 제거하기도 함. 줄기를 제거하는 작업은 손으로 했었지만 지금은 기계를 이용. 포도송이를 압축하거나 으깨서 주스를 만듬. 옛날에는 포도줄기를 제거한 후 나무막대기로 포도를 으깼지만, 나중에는 포도를 큰 통에 넣고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으깼다. 부르고뉴와 프로방스 지역에서는 2차대전 전까지도 그런 춤을 볼 수 있었다. 사를마뉴 대제는 나사 압축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점성이 더 큰 흰 포도로 백포도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높은 압력으로 압축해야만 한다. 고대 로마의 포도주는 대부분 그렇게 만든 백포도주였다. 붉은 포도로 백포도주를 만들 때는 줄기나 씨 같은 찌끼를 제거해야 함. 그런 찌끼에서 기름을 짜거나, 가축사료나 비료 또는 플라스틱을 만들수도 있음.
- 로제 포도주는 적포도주와 백포도주를 혼합한 것이 아니라 검은 포도로 만든 것. 포도껍질을 몇 시간 동안 주스를 넣어두어 분해되도록 한 후에 꺼냄. 이 과정을 단기발효라고 한다. 포도가 충분히 익지 않아서 과즙에 당이 충분하지 않으면, 발효시키기 전에 설탕을 넣어주기도 함. 나폴레옹 시대의 화학자 장-앙투안 샤프탈이 개발한 샤프탈화(보당화)라고 하는 이 공정을 거치면, 포도주의 알콜 농도가 높아지므로 법으로 엄격하게 규제되거나 금지되기도 했음. 프랑스에서는 포도주를 맑게 만들기 위해 소석고를 넣거나 착색하는 공정도 규제하거나 금지됨. 유럽연합의 농업관련 기구에선 이런 규제를 표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
- 발효과정에서 효모가 당을 알콜로 변화시킴. 그 후에 일어나는 반응에 의해 글리세린과 숙신산이 생김. 발효는 나무, 시멘트 또는 벽돌로 만든 뚜껑이 없는 통에서 이루어짐. 최근에는 합성물질로 만든 통도 개발됨. 큰 술통을 옆으로 눕혀서 쓰기도 함. 발효용 통은 매년 물때를 씻어내야 한다. 미국에서는 특별히 선택한 포도로 과즙을 만들고, 특별히 선택한 효모를 써서, 발효가 일정하게 일어나도록 만든다. 사람들은 발효되어 탄산가스가 나오는 과정을 소란스러운 과정이라고 한다. 줄기, 껍질, 씨가 떠 있는 거품이 생기지만, 거품이 액체의 위에만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거품이 위쪽에 뜨면, 발효가 너무 진행되어 식초인 아세트산이 되기 때문에, 거품을 망으로 눌러서 속으로 집어넣어 준다. 과즙속의 당이 모두 변환되면 발효가 스스로 멈추고, 알콜농도는 14~15도가 됨. 오늘날에는 예전과 달리 발효가 일어나는 동안 과즙의 온도를 철저히 측정해서 발효과정을 지켜본다. 백포도주를 만들 때는 강화유리섬유로 만든 밀폐된 발효통을 쓰기도 함. 상파뉴나 부르고뉴 포도주를 만들 때는 발효실의 온도를 높게 유지하지만, 보통의 경우 섭씨 37도 이하로 유지. 포트와인을 만들 때는 발효통에 브랜디를 넣어서 발효를 중단시킴. 발효한 포도주를 짜서 마르크를 걸러낸 후에는 지하실에 있는 통 속에 넣어 마지막 단계인 2차발효가 일어나도록 함. 짜는 과정에선 포도주를 다른 통으로 옮기면서 침전물과 앙금을 분리. 고대 로마인들은 점진적으로 침전이 일어나도록 해서 더욱 맑게 만드는 정제과정을 거친 포도주를 좋아했다. 카이사르 시대 이후로 정제에는 진흙, 달걀 흰자위, 부레풀, 송아지 연골, 돼지피와 같은 물질을 사용했따. 오늘날에는 그런 물질에 대한 철저한 규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독일과 미국에서는 화학물질을 쓰지만, 옛날과 마찬가지로 소금을 쓰기도 함. 소금을 쓰면 소석고를 쓸 때와는 달리 포도주에 백반이 생기지 않는다. 통 위쪽의 공기층에서 포도주곺이라는 곰팡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발효통을 끝까지 채우고, 증발에 의해서 수위가 내려가는가를 세심하게 관리했다. 이런 과정을 감손량 확인작업이라고 부름.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병에 넣어 일정한 기간 숙성시킴. 포도주를 술통에서 충분히 숙성시킨 후에 병에 넣기도 함. 같은 포도주라도 병에서 숙성시킨 것과 술통에서 숙성시킨 것은 다르다. 옛날에는 병에 넣어서 숙성시키는 방법만 사용했다.
- 그리스인들은 포도주를 문명인의 음료라고 했고, 오늘날 이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스인들에게는 포도주에 물을 타서 마시는 것이 문화인다운 음주법이었다. 고대의 포도주가 모두 그랬듯이 그리스의 포도주도 너무 독해서 그대로 마실수가 없었고, 약초를 넣은 포도주는 더욱 그랬다. 최초로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만들었던 이집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인들도 발효시킨 포도주스가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몇차례에 걸쳐서 처리를 했다. 이들은 일종의 저온살균법을 썼다. 포도주에 꿀을 넣거나, 소아시아에서 수입한 자당을 넣기도 했따. 이렇게 처리한 포도주는 의약품에 가까웠고, 실제로 약으로 조금씩 먹기도 했다. 당시에는 술통이 발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농축된 포도주를 높이가 3미터나 되는 테라코타 항아리나 암포라에 넣어서 운반했음. 토기의 구멍을 통해서 포도주가 증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내부에 송진을 발랐다. 현대의 그리스인들도 소나무에서 나오는 끈적끈적한 송진 때문에 생기는 독특한 포도주맛을 좋아한다.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고대 그리스의 포도주에는 실제로 수지를 넣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진한 테레빈유 냄새가 났음. 매일 마실 포도주는 양 가죽이나 돼지 방광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보관을 했고, 그런 그릇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물을 탄 포도주도 특별한 날에나 마실 수 있었다. 상류층만이 포도주를 매일 마실 수 있었다. 평민들은 보리를 달여서 마든 프티사네를 마셨다. 프티사네에는 약초나 소량의 맥주를 넣기도 했다.
- 이집트인들은 커다란 천으로 만든 주머니에 포도를 담아서 으깬 후에 막대기로 짜서 병에 넣어 포도주를 만들었다. 병에는 포도주의 종류아 색깔, 포도원과 재배자의 이름을 자세히 적어두었다. 이집트의 무덤에는 날짜가 정확하게 적힌 밀폐된 포도주가 발굴되어 고고학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무덤에 넣을 때 이미 200년 이상 묵은 포도주도 있었다. 당시에는 집안에서 가장 귀중한 물건을 무덤에 넣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을 포도주로 닦아냈고, 내장을 꺼낸 다음 내부도 포도주로 닦았다. 그리스의 장례식에서는 포도주를 헌주용으로만 썼고, 사치금지법에 의해 그 사용량도 엄격히 규제했다. 장례식에서는 10리터의 포도주와 3리터의 기름을 쓸 수 있었다. 무덤에도 헌주를 했다. 조문객이 술에 취하면 헌주를 더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샂거으로 사고 팔던 암포라에 새겨진 표시는 법에 맞도록 되어 있었다. 병의 손잡이에는 포도주 상인과 병을 감독하는 관리의 봉인이 찍혀 있었다.
- 여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게 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전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포도주는 피를 상징. 포도주는 포도나무의 피라고 알려져 있음. 어머니로 여겨졌던 여자들은 식물성이기 때문에, 이상한 피를 마시는 일은 간통을 저지르는 것과 같았다. 이집트인을 포함해서 문명세계의 사람들 중에서 로마인들만큼 애니미즘을 신봉했던 사람들도 없었다. 더욱이 포도주는 낙태시키는 약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서로 다른 종류의 피들은 서로 반발하기 때문이라고 믿음. 우유, 피, 물, 포도는 마술적 힘을 갖고 있으므로 제물로 썼다. 출산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비밀스러운 마술적 힘을 갖고 있다고 의심받던 여성들에게는 술에 취하는 마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처음에는 포도주를 조금씩 마시더라도 본래부터 남성다움의 핵심인 힘, 즉 비르투스를 갖지 못한 여자들은 절제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음. 로마인들은 스스로는 절제하지 못하며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술에 취하면 광란상태가 되어 예언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름다운 여자의 말을 듣는 것보다는 그런 여자들을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의 광란은 악마가 아니라 신에 의해서 소유되는 것을 뜻했다. 여자들이 그렇게 소유되는 것은 강간이었고, 강간을 당한 여자는 다시 순결해질 수가 없다. 사실은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다. 그런 강간으로 음탕한 아버지를 닮은 괴물 같은 자식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 따라서 포도주는 위험한 약이었고, 약한 여성은 그런 약을 먹지 않도록 보호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가족들도 고뇌와 불명예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로마의 남자들이 집에 돌아온 직후에 부인의 입냄새로 그녀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관습에서 키스가 시작되었다.
- 두사람 이상이 함께 술을 마실 때 건배를 하면서 잔을 부딪히는 관습은 옛날 그릇이 투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 원래는 쉽게 깨지는 잔을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잔을 권하는 흉태를 내는 사회적 의식이었다. 상징적으로 잔을 권하는 뜻이었지만 예의이기도 했음. 잔이 불투명하므로 그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를 볼 수는 없었다. 축배를 들 때 잔을 보여주는 것은 실제 술을 마시는 것을 손님에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모든 손남에게 잔을 다시 채워줄 것을 약속하는 뜻도 갖고 있었다.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손님들을 똑같이 대접했다. 1552년 라블레가 처음 보았다고 하는 유리잔을 서로 부딪히는 관습은 나중에 시작된 것이었다. 포도주 잔을 얼굴이나 가슴 높이까지 들어올리는 경우도 있다.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옆사람과 팔을 끼고, 서로 눈을 쳐다보면서 마신다.
- 포도주가 요리에 어떤 역할을 할까? 맛을 북돋워주는 역할 이외에도 포도주에 들어 있는 모든 영양분이 도움이 된다. 포도주에 들어 있는 글리세린 때문에 지방을 쓰지 않아도 소스가 만들어진다. 포도주의 맛 덕분에 소금을 적게 넣거나, 전혀 쓰지 않아도 된다. 포도주로 요리한 음식에는 타닌이 들어 있어 소화에 도움이 된다. 포도주에 들어 있는 알콜은 요리과정에서 대부분 증발함. 그러나 아주 조금 남아 있는 알콜이 입맛을 돋우어 준다. 포도주는 재료의 맛이 드러나도록 만들어주고, 지방이 쉽게 소화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사람들의 사기를 돋우어준다. 뒤마의 표현에 의하면 "고기는 식사의 물질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포도주는 지적인 부분'이라고 했다. 포도주는 적당한 음식을 선택해야지, 음식에 맞는 포도주를 선택해서는 안된다. 음식은 장식품에 불과하다.
- 고대의 모든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레위기에서는 아마도 물고기의 함축성 때문인지 생선을 제물로 쓰지 못하게 했다. 계시와 불멸성을 가진 신에게 생선을 바치는 것을 무례하다고 여겼다. 유대인들은 생선 이외의 다른 수산물을 먹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혼동을 피하기 위해 비늘이 있고 뱀을 닮지 않은 생선만을 먹음. 여러 무덤의 부장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집트의 평민들은 생선을 많이 먹었지만 성직자나 파라오처럼 신성한 사람들은 생선을 먹지 않았다. 중세 이후에는 권력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가릴 것 없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사순절에도 생선을 먹을 수 있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이 무엇인가 먹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왜 생선을 먹었을까? 성찬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고기와 지방은 붉고, 진하고, 뜨거운 음식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그런 음식은 사람들을 환각상태로 빠지게 하고 흥분시킬 가능성이 있다. 물과 관련된 생선은 차고, 희고, 지방이 없으며, 온건하며, 순수한 것으로 여겨졌다. 교회는 사순절 기간에, 금식을 했던 그리스도처럼 재의 수요일에서 부활절까지 모든 사람들이 금식을 하돌고 요구. 금식은 금욕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이기도 했고, 1년 중 한번의 금식을 통해서 그동안 저질렀던 죄를 회개한다는 뜻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극히 부유한 사람들의 무절제한 육식습관을 가끔씩 중단할 필요가 있다는 식이요법적인 의미가 담긴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금식이 모든 인간이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교회의 가르침과도 부합된다는 의미도 있었다. 정화와 재생의 순환과 관련된 고도로 상징적 기간인 40일 동안에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부의 상징인 고기대신에 소박한 생선을 먹음으로써 사회계층의 차이를 지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은 사순절 기간동안 구운 농어를 즐기고, 가난한 사람들은 소금에 절인 청어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몽타라니는 이것을 잘 지적했다. '군대의 권력자들이 고기를 먹는 것은 단순히 필요한 영양분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따. 육식은 권력의 상징이었고, 군대문화에 고유한 폭력성을 나타내는 음식문화였고, 자신들의 습관과 자세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육식의 권리를 빼앗기는 것을 참을수가 없었기 때문에 금식은 심각한 고행이었다. ... 권력자들에게 강제로 육식을 못한다는 사실은 일시적으로 자신들이 속한 강자의 사회로부터 소외된다는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강자의 사회에서는 음식과 식습관에 강력한 감정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 로마인이 최초로 거세한 수탉을 먹었다고 한다. 기원전 162년에 곡물소비를 줄이기 위해 제정된 사치단속법인 파우니아 법 때문에 살찐 암탉을 먹지 못하게 되자, 로마의 양계업자들은 겉으로는 법을 지키는 체 하면서 그 본래 뜻은 따르지 않는 기막힌 법을 찾아냈다. 수탉을 거세하면 내시처럼 살이 붙어서 크기가 보통 수탉의 두배정도가 된다. 암탉의 난소를 제거해도 살이 찐다. 과거 미식가들의 기록에는 살찐 어린 닭과 거세한 수탉만이 등장함. 18세기말의 시인 들릴은 거세당한 수탉이 암탉에게 "맙소사, 불쌍한 암탉이여. 우리가 더 살이 찌고, 고기가 더 맛있게 되도록 이렇게 만들었땁니다."는 시를 남겼다. 로마인들은 부화기도 발명. 뜨거운 공기로 따뜻하게 만든 방에서 많은 달걀을 한꺼번에 부화시켰음. 로마인들은 중앙난방과 배관에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집트인들도 병아리 부화용 오븐을 갖고 있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중국인들도 자신들이 좋아하던 오리를 인공적으로 부화시켰다.
- 한동안 이윤을 많이 남기련느 양계업자들이 생선 찌꺼기를 사료로 먹인 적이 있었다. 그렇게 키운 닭의 고기에서는 상한 청어 냄새가 났다. 사람들이 생선을 많이 먹지 않아서 소비량보다 어획고가 더 많았을 때 그런 일이 심했다. 닭에 호르몬이나 비소화합물을 주사하기도 했다. 이런 식의 화학적 거세법을 쓰면 닭이 훨씬 더 빨리 자라기는 하지만, 지방이 많고 고기가 물러짐. 물론 소비자에게도 위험하다. 프랑스에서는 호르몬 사용을 법으로 금지. 그러나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소량의 항생제, 성장 호르몬, 예방약 등을 사용하는 것은 합법임. 그러나 닭고기 100킬로에 1그램 이상의 약품을 사용하면 안됨. 닭 한마리에 일생동안 45밀리그램 이하의 약품을 주사하면 완전한 대사가 이루어져 살코기에는 남지 않음. 더욱이 닭을 잡기 전의 일정 기간 동안에는 약품을 투여하면 안됨. 물론 부정이 있을수는 있다. 그런 일은 상표에 충분한 설명이 붙어 있지 않은 싼 닭고기의 경우에 많이 일어나게 된다. 새로운 양계기술 덕에 오늘날에는 9주정도만 키우면 약 1.7킬로그램으로 자라서 다섯사람 정도가 먹을 수 있다. 2차대전 전에는 그 정도로 키우려면 20주가 걸렸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먹는 닭은 더 어리고, 연하고, 지방도 적으면서 껍질도 얇다. 그러나 껍질이 얇으면 기계를 써서 털을 뽑을 때 쉽게 껍질이 찢어질 수도 있다. 껍질이 찢어진 닭을 요리하면 즙이 빠져나가서 고기가 건조해진다. 닭을 구울 때, 처음에는 높은 온도로 빨리 구워서 껍질이 캐러멜화가 되도록 해야만 즙이 빠져나가지 않는다. 어린 닭은 값이 더 싸다. 이런 닭은 양계장에서 6~8주 정도 키운 경우가 대부분이고, 프랑스에서는 산업용 닭이라 부름. 양계장은 넓은 공간에 선반처럼 쌓은 좁은 닭장을 설치한 곳. 닭장에 갇힌 닭은 하루종일 먹고 마시면서 살을 찌우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 더 많이 먹고 마시게 만들기 위해 하루종일 전등을 켜두어서 잠을 잘 수도 없게 만듬. 에어컨을 장치하도록 되어 있지만, 비용 때문에 항상 가동하지는 않음. 8미터 높이로 닭장을 쌓아놓아서 마치 거대한 배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양계장의 모습은 실제로 보지 않고는 상상도 하기 어렵다. 수천마리의 닭들이 컨베이어 벨트 위로 끊임없이 지나가는 사료를 쪼아 먹는 소음이 마치 폭풍처럼 들린다. 양계장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구역질 나는 냄새가 코를 찌르기도 함
- 말레이시아 정글에서 전해진 닭과 아프리카 관목지대에서 전해진 뿔닭을 제외한 모든 가금류는 야생철새의 후손들이다. 그러므로 가금류를 먹는 것은 여러 면에서 태양력이나 농사력과 깊은 관련이 있음. 가금류의 상징도 반드시 규칙적으로 되돌아오는 것과 관련이 있고, 신의 계시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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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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