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의 모험

etc 2016. 3. 26. 16:19

- 종이클립의 아버지라는 영예는 볼레르의 사후에 수여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점점 발전하여 노르웨이에서는 그가 민중의 영웅 같은 존재로 변신. 나치 점령당시 노르웨이 사람들은 저항의 상징으로 그 클립을 달고 다녀다. 이는 볼레르가 노르웨이인이라는 사실과는 상관없이(볼레르의 특허신청서가 1920년대에 다시 발견되었지만 그가 종이클립의 발명가라는 믿음이 널리 퍼진 것은 한참뒤의 일이었다) 종이를 한데 묶어주는 클립의 기능이 점령군에 대항하여 한데 뭉치자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표시로 사용된 것. 전후에 볼레르가 클립을 발명했다는 믿음이 퍼지기 시작. 처음에는 노르웨이 백과사전에 그 이야기가 실렸다가 레지스탕스 이야기와 섞여 종이 클립이 국가적 상징 비슷한 지위로 끌어올려졌다.
- 제조국 표시가 갑자기 등장하는 바람에 몰스킨이 제조지를 중국으로 옮겼다고 생가갛는 사람이 생겼다. 그런데 사실 처음부터 몰스킨의 제조지는 중국이었다. 단지 그 제품 어디에도 그런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을 뿐이다. 소유권이 SG캐피털로 넘어가기전과 후의 제품에는 실질적 차이가 없었지만 몰스킨의 인터넷 토론방과 팬사이트에서 사람들은 새 몰스킨의 품질이 뭔가 열등해졌다고 주자하기 시작했다. 몰스킨이 제조지를 중국으로 옮긴 뒤로 모든 공책이 약간 달라졌다. 표지는 느낌이 다르고, 제본도 좀더 빡빡해졌고, 냄새도 뭔가 이상해졌다. 채트윈의 무의식적인 메아리처럼 어떤 사람들은 진짜 몰스킨을 사재기하려고도 했다. 공책의 품질도 플라세보 효과의 한 사례일까? 몰스킨 공책이 경쟁제품보다 좋은 이유는 이탈리아 장인이 만들어서라고 생각하다가 중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최악의 사태를 예상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중국산이면 무조건 저급품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중국은 종이가 처음 만들어진 곳이고 오랫동안 세계의 제지산업을 이끌어온 곳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 이베이에서 엄청난 돈을 들어 에버하드 파버의 원조제품을 구매하는 블랙윙 열광자자 저지르는 아이러니는 그들이 연필 한자루를 사용할 때마다 그들이 사랑하는 그 대상을 소멸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연필깍이로 그 연필을 깎아낼 때마다 그 생명은 줄어든다. 연필깎이는 문자 그대로 연필에게 존재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그것을 죽이기도 한다. 내가 알기로는 결혼도 그렇다.
- 새 문구를 사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문구점에 가면 사방이 가능성으로 가늗하다. 그것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방식이다. 이 색인카드, 이 페이지 마커를 산다는 것은 내가 언제나 되고 싶어했던 그런 조직적인 사람이 마침내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공책과 이 펜을 산다는 것은 꿈꿔옸던 그 소설을 내가 마침내 쓰리라는 의미이다.
* 접착의 역사
- 수천년 동안 인류는 여러방식으로 물건들을 접착시켜왔다. 자작나마 수액으로 돌조각을 붙인 원시적 도구가 2001년 이탈리아 중부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만들어진 시기는 20만년 전으로 추정됨. 자작나무 껍질에 열을 가하면 뻑뻑한 풀 같은 수액이 나옴. 고대에는 역청도 석기 제작에 사용되었다. 남 아프리카의 시부두 동굴에서 발견된 표본은 7만년 전의 것으로, 복합 접착제의 흔적을 보여줌. 역청 같은 천연 접차제를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식물수액과 붉은 황토를 섞은 다음 돌조각을 목제 손잡이에 붙여 무기를 만든 것이다. 붉은 황토는 접착력을 강화시켜(식물 수액만으로는 부서지기 쉬워 충격에 깨지곤 함) 습한 날씨에도 수액이 묽어지지 않게 한다.
-1930년 풀의 역사에 관한 저서 '어떤 고대 기술 이야기'에서 플로이드 대로는  고대 이집트에서 얆은 나무판으로 가구를 만들 때 풀이 어떻게 쓰였는지 설명. 테베에서 발견된 3500년 전의 벽화에는 항아리에 담긴 풀이 불 위에서 데워지고 있고 일군 한명이 솔로 풀을 찍어 바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음. 같은 시기의 무덤에서 발견된 가구에는 얇은 나무판을 풀로 붙인 흔적이 있다. 가구의 역사에서 알프레트 쾨펜과 카를 브로이어는 이렇게 단언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평범한 목재에 값비싼 목재를 얇게 풀로 붙여 고급품으로 만드는 세공기술을 이미 쓰고 있었다고, 쾨펜과 브로이어는 이집트인들이 쓰던 두 종류의 풀에 대해 설명했다. 많이 쓰이는 풀은 동물 찌꺼기와 물고기 부레로 만들었다. 또 생성회와 달걀 흰자나 카제인으로도 풀을 만들었다.
- 이집트인들은 얇은 나무판을 장식용으로 쓸 뿐만 아니라 그 구조적인 장점도 알아냈다. 얇은 판을 겹쳐 만든 가구는 통나무로 만든 것보다 덜 휘어졌다. 당시 제작도니 가구 중에 오늘날 까지 보존된 것들이 있어서 당시 이집트 공예의 수준을 보여준다. 대로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적 연구결과로 보건대, 이 가구의 호사스러운 아름다움은 숙련된 나무판 제작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이다." "그리고 이 고대 공예기술에서 핵심은 풀이다."
- 풀 만드는 기술은 그리스와 로마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박물지에서 대플리니우스는 푸을 발명한 것이 미노스 왕을 위해 크레타의 미궁을 만든 아테네의 장인 다이달로스였다고 말하면서 두 종류의 풀을 묘사했다. 바로 황소 풀과 물고기 풀이었다. 어떤 동물 부스러기에서든 콜라겐을 추출하여 젤라틴을 만들 수 있지만 "최고 품질의 풀은 황소의 귀와 성기로 만든 것"이라고 설명한다. 물고기 풀은 재료의 이름을 따서 부레풀이라고 불렸다. 플리니우스는 흔한 종이풀에 대해서도 설명. "아주 고운 밀가루를 물에 풀어 끓이다 식초 몇방울을 뿌린" 그 풀은 지금도 초등학교 교실에서 쓰는 밀가루와 물로 만든 풀과 비슷하다. 플리니우스는 다이달로스가 황소로 풀을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풀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동물은 말이다. 퇴역한 말은 폐마 도살장으로 보내 풀로 만든다. 그런데 말이 다른 동물보다 우수한 풀의 재료라는 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다. 말고기가 유달리 심하게 끈적거리는 것도 아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말을 육용으로 사육하기 보다는 일하는 동물로 활용해왔다. 그러니 일하는 동물로서의 삶이 끝난 뒤 식탁에 오르는 것 외에 다른 용도를 생각해 낸 것이다.
- 로마제국이 멸망하자 합판 제작기술은 거의 사라졌다가 16세기와 17세기에 차츰 되살아났다. 역사상 최초의 상업적 풀공장이 1690년 네덜란드에 세워져서 동물가죽으로 풀을 만들었다. 1754년 피터 조머라는 사람이 "고래 꼬리와 지느러미, 기차 기름 제조업자들이 내다버린 물고기 찌꺼기와 부스러기를 재료로 하여" 풀을 만드는 방법으로 영국 최초의 특서를 등록했다. 따라서 풀은 이런 제조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을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으로 활용한 산물이다. 그러나 조머 본인이 인정했듯이 그 결과물인 생선풀이 가죽부스러기로 만든 풀에 비해 품질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 풀 생산은 19세기 후반까지도 다분히 지역적 산업이었다. 특히 장거리로 운송되고 판매되는 동안 썩거나 말라버리지 않을만큼 수명이 긴 제품을 개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윌리엄 르페이지는 이 문제를 해결해줄 방법을 가장 먼저 찾아낸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생선풀에 탄산나트륨을 써서 그때까지 완전한 성공을 저해했던 염분 찌꺼기를 모두 제거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물고기 껍질에서 비늘을 벗겨냈지만 르페이지는 비늘도 그대로 둠으로써 비늘의 유용한 성분이 풀에 함유되어 물질적 이익이 있었다. 그 성분 덕에 비늘을 벗긴 껍질로 만들 때보다 풀이 물에 녹지 않고 접착성이 더 강해졌다. 르페이지의 풀은 생산된 지 몇달이 지나도록 액상으로 남아 있어서 그릇에서 그대로 퍼서 쓸 수 있었다. 다른 풀은 쓰기전에 데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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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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