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의 역사(하)

etc 2016. 3. 26. 16:04

- 액젓은 로마가 갈리아를 점령한 이유중 하나였음. 액젓의 생산과 판매는 무역도시의 번영을 결정하는 요인이었다. 그런 무역도시는 그리스인들이 갈리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프로방스, 랑그도크, 스페인의 해안지방에서도 번성했었다. 로마가 단순히 대상들의 숙소에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그리스인들은 가론(액젓)을 먹었다. 로마인들은 요리의 기본조미료이고, 훌륭한 양념인 액젓을 광적으로 좋아함. 액젓을 넣지 않은 로마요리는 거의 없었따. 리용 만에서 발견된 난파선에서 나온 액젓 찌꺼기가 남아 있는 암포라에는 기원전 5세기부터 액젓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생산자의 문장이 표시되어 있었다.
- 액젓은 고등어나 멸치의 내장을 소금에 절인 후에 햇볕에 놓아두어 내장에 들어 있는 미생물에 의해 완전히 분해되도록 만든 것이다. 정확한 양의 농축 향료를 넣는다. 그리고 아주 가는 체에 넣어서 강한 냄새가 나고 끈끈한 액젓을 걸러낸 다음 숙성시킨다. 포도주를 압축해서 거르고 남은 찌꺼기인 마르크와 마찬가지로 액젓을 거르고 남은 찌꺼기인 알레크도 버리지는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곡물로 끓인 죽에 액젓 찌거기를 조미료로 넣어 먹었다.
- 러시아 황제가 이크라라고 부르는 캐비아를 프랑스 왕에게 보내던 시기의 어부들은 철갑상어에서 알을 꺼내서 소금을 친 후에 천으로 말아서 땅에 묻어 두었다.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몰랐지만, 카스피 해안의 흙은 뛰어난 보존력을 지니고 있었다. 뉴펀들랜드의 잔디 밑에 소금을 친 대구를 묻어두었던 어부들도 같은 현상을 이용했다. 사실 이 지역의 토양이 가지고 있는 기적적인 효과는 이 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보락스라는 화학물질에 의한 것이었따. 전쟁전에는 캠프를 가는 사람들이 보락스를 넣은 물에 버터를 보관했다. 지금은 휴대용 냉장장치가 개발되기도 했고, 미국의 식약청에서 보락스가 인체에 해롭다고 밝혔기 때문에 이런 방법이 더이상 쓰이지 않음. 캐비아를 일생동안 매일 1킬로씩 먹으면 보락스가 인체에서 완전히 배출되지 않을 수가 있따. 오늘날에도 캐비아에 소금을 넣기는 하지만, 땅에 묻어두는 대신 아주 소량의 보락스를 첨가. 보락스는 캐비아의 맛을 증진시켜주는 효과도 갖고 있음. 그러나 아메리카로 수출되는 캐비아에는 보락스를 넣지 않는 대신 유럽에서 판매되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소금을 넣음
- 정상적인 캐비아는 알을 채취하는 철갑상어의 종류에 따라 세가지로 구분됨. 벨루가가 가장 귀한 것이고, 알이 가장 크며(그램당 30개), 가장 비싸다. 색깔은 옅은 색으로부터 짙은 회색까지 여러가지이다. 전체 캐비아의 약 20%를 차지. 값이 약간 싼 오세트로바는 독특한 아이오다인 냄새가 나고, 벨루가 캐비아보다 알이 작음(그램당 50개). 회색으로 곳곳에 황금색이 보이며 전체 캐비아의 30%를 차지. 값이 싼 세브루가도 역시 좋다. 가장 흔하기 때문에 값이 쌀 뿐이다. 이것은 거의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이고, 알이 작다(그램당 70개). 전체의 50%를 차지.
- 러시아식 압축 캐비아도 잊지 말아야 한다. 너무 성숙되거나 성숙되지 않은 알을 시골풍으로 만든 것. 알 속에 들어 있는 액체가 빠져나가서 부피의 4분의 3이 줄어들 때까지 압축함. 압축 캐비아의 시장가격은 벨루가 캐비아의 절반 정도이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 우리가 쉽게 구하기는 어렵지만, 알의 크기가 모래알만한 캐비아도 있다. 이것은 고기의 맛이 뛰어난 스타렛이라는 작은 철갑상어의 알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많이 잡히지 않아서, 러시아 황제에게만 진상되었고 매년 생산되지도 않는다.
- 숲에 살던 돼지들은 유목 사냥꾼 무리가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한 직후부터 이들의 밭고 쓰레기 더미를 코로 쑤시고 다녔다. 그런 돼지들은 쉽게 잡을 수 있었고, 크기가 작고 살이 별로 없기는 했지만 사람들에게 고기를 제공하기에는 충분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평야에서 양이나 소를 기르던 사람들은, 사람을 잡아먹기도 하고 기생충이 많은 돼지의 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돼지가 나병을 옮긴다고 믿었던 고대 이집트인들은 돼지치기들에게 사원출입을 금했다. 최하위 계급에 속했던 돼지치기의 수는 많지 않았다. 이집트 무덤의 벽화에도 돼지가 등장하지 않는다. 유대인가 이슬람 교도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같은 생각때문일 것이다. 파라오의 궁전에서 자란 모세는 돼지를 깨끗하지 않은 짐승으로 정의해 버렸다. 돼지를 너무 더럽다고 생각해서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뷔퐁의 주장에 의하면, 이슬람의 이런 금기 때문에 잉어와 오리 못지 않게 돼지고기를 좋아했던 중국에서는 이슬람이 환영받지 못했다.
- 갈리아 사람들이 햄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햄이 지금의 프랑스 지역에서 시작된 특별한 음식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현재 독일 북서부 베스트팔렌 숲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살던 돼지의 살코기는 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소금을 쳐서 말린 후에 훈제한 베스트팔렌의 햄은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2천년 전의 게르만족은 상당한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로마의 시인 마르티알리스도 베스트팔렌의 햄을 좋아했음. 카토는 이탈리아 돼지고기를 같은 방법으로 조리해서 햄을 만들거나 훈제하기 전후에 올리브유를 바르고, 훈제한 후에 식초에 담가서 이민족의 맛이 조금 나도록 만드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갈리아, 독일, 이베리아의 돼지고기 맛이 뛰어났던 진짜 비밀은 도토리였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따. 사실 지금도 훌륭한 맛을 가진 코르시카 소시지의 비밀도 역시 도토리다. 스페인 북서부의 폼페이오폴리스(현재의 팜플로나)는 로마제국 시대에 햄을 수출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 피레네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햄의 기원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돼지 한마리가 살르-드-베아른 부근에 있는 소금물이 나오는 샘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에 빠져 죽었는데, 얼마 후에 하류의 목동이 죽은 그 돼지를 건져올렸다. 소금에 절여진 고기의 맛을 본 사람들이 같은 방법으로 햄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 기름을 발라 익힌 햄은 십중팔구 엉터리일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보통의 햄에 인공색소와 훈제향이 나는 기름을 바른 후에 센불로 겉을 익혀서 누렇게 만든 경우가 많음. 그렇지만 진짜 익힌 햄은 맛이 뛰어나서, 비싸기는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과거에는 전통적으로 여러차례에 걸쳐서 첨가물을 바른 후에 말리거나 훈제해서 익힌 햄을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소금을 쳐서 말린 최상급의 햄은 그런 방법으로 만든다. 흰색 햄의 경우에는 날고기에 소금물을 주입해서 만든다. 파리 햄도 익힌 햄이다. 프릉스에서 판매되는 최상급 햄은 천에 싸서 쇠고기 국물로 익힌 것으로 구하기도 어렵고, 값도 대단히 비싸다. 이런 햄은 신선한 고기로 만들고, 돼지 허벅다리의 가장 윗부분과 엉덩이살만을 쓴다. 혈관을 통해서 간수를 주입한다. 간수는 단순히 짠 소금물이 아니라 소금물에 초석과 천연방향제를 넣어서 맛을 돋운 것이다. 이렇게 만든 간수에 햄을 3~4일 담근 다음 물기를 빼내고, 천으로 싸서 쇠고기 국물로 익힌다. 완전히 익으면 껍질과 일정한 양의 기름기를 제거하고 뼈를 발라낸다. 뼈째 익히면 냄새가 좋아질 뿐만 아니라 칼슘도 풍부해진다. 건초가공이라고 표시된 햄도 특별한 것. 건초(말린 된장풀과 클로버)로 싸서 익힌 햄은 시골의 공예품에 가까움. 대량으로 생산된 모조품은 그렇게 좋지 않다. 그런 제품은 자연산 재료만 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 특급햄은 사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제품. 껍질과 뼈와 기름기를 제거한 후에 만들기 때문에 향기와 미네랄염이 없어져 버린다. 간수는 컨베이어 벨트에 붙어 있는 바늘을 통해 혈관이 아니라 아무데나 주입된다. 그런 후에 전통적 방법에서와 마찬가지로 간수가 담긴 통에 넣는다. 다음에는 전통적 햄 모양의 틀에 넣어 3~5시간 정도 뜨거운 수증기로 익힌다.
- 최고급햄은 특급햄을 만드는 과정에서 틀에 넣기 전에 잘라낸 부분에 어깨살로 만든 햄을 더 넣어 압축한 것. 햄을 잘라보면 색깔과 조직이 다른 부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음. 그러나 프랑스에서 붉은 상표가 붙어 있는 경우에는 좋은 품질의 고기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이 햄은 별미는 아니지만 괜찮은 편에 속함.
- 고급햄은 이름과는 다르다. 대량으로 생산되는 이 햄은 앞에서 설명한 햄을 만드는 과정에서 남은 고기를 모아 만든 것. 남은 고기를 콘크리트 혼합기와 비슷하게 생긴 기계에 넣어 잘게 자르고 섞어 만듬. 간수가 고기에 잘 배어들도록 인산염(2%)와 설탕을 탄 간수를 사용. 간수함량이 햄에 포함된 수분의 74%가 되고, 무게로는 10%나 된다. 색깔은 분홍빛이다.
- 일반 햄은 품질이 일정하지 않은 냉동고기로 만든 것으로, 프랑스에서는 특별한 표시가 없이 판매됨. 인산염 함량이 3% 정도로 높고, 고기가 잘 달라붙도록 카세인과 같은 락토 단백질과 글루텐을 넣음. 이렇게 만든 고기 덩어리를 햄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첨가물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음.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플라스틱 용기에 넣어 판매하는 이런 햄은 수분함량이 높음. 이런 햄은 값이 싸므로 매점에서 싸구려 샌드위치를 만들 때 많이 사용. 프랑스에서는 이런 햄을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판매되는 이런 햄은 모두 수입된 것. 이런 햄은 첨가물의 양과 수분함량 때문에 유통기한을 잘 살펴보아야 하고, 냉장보관을 하지 않으면 상하기 쉬움. 포장을 열었을 때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는가 잘 살펴보아야 함.
- 요크햄은 뼈를 발라내지 않은 것으로 요크지방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에서 생산된 것도 아님. 요크햄은 준산업적 규모로 생산되기도 함. 프라하 햄은 구운 후에 약간 훈제한 것이며, 체코에서 수입한 것은 아니지만 품질은 좋다. 요크햄과 프라하햄은 그 지방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요크햄과 프라하햄을 만드는 전통적 방법으로 만들었음을 의미.
- 말린햄은 간수를 주입하지 않고, 전통적 방법에 따라 겉에 마른 소금을 발라 만든 것
- 프리쥐티라는 코르시카 햄은 상점에서는 흔히 볼 수 없음. 상점에서 이런 햄을 보면, 생산지를 확인해보아야 함. 이 햄은 카스타니치아 지방의 코르시카 밀림에서 방목해서 향기가 강한 밤을 주워먹으며 자란 돼지의 고기로 만듬. 고기에서는 잊기 어려운 특별한 냄새가 나고, 다른 햄보다 기름기가 적음. 고기를 씻어서, 껍질을 벗기고, 후추를 바른 후에 40일 동안 간수에 담가둠. 전통적 방법으로 3~4일간 훈제를 하기도 하지만, 그 후에는 좋은 포도주처럼 먹기 전에 몇달 동안 숙성시킴.
- 파르마햄은 이탈리아 파르마 지역에서만 생산되므로 그 지역세어 키운 돼지의 고기로 만든 것이 확실함. 품질과 향기가 좋은 이 햄은 8~10개월 정도 숙성시킨 후에 썰어서 판매하기 좋도록 뼈를 발라낸다. 이 햄의 명성은 천년 이상 이어져 왔다.
- 베스트팔렌 햄은 독일의 베스트팔렌에서 만든 것이다. 값이 비싼 이 햄은 마른 소금을 바른 후에 그 지역의 특별한 나무로 일주일동안 훈제해서 만든다. 뼈를 발라낸 햄은 압축해서 모양을 다시 만든 것으로 뼈를 발라내지 않은 햄만큼 오랫동안 저장하지는 못함. 조각으로 잘라서 플라스틱 용기에 넣어서 판매하는 말린햄이 바로 이런 것. 첨가물 E450이란 표시가 붙어 있으면 마른 소금을 발라 만든 것이 아니라 인산염을 주입해서 만든 것이란 의미. 이런 햄은 수분함량이 상당히 높아서 오래된 것이 아닌가 주의할 필요. 이런 햄은 구입한 즉시 먹어야 함
- 파슬리 햄은 부르고뉴 지방의 별미다. 다른 지방에서도 생산되기는 하지만, 부르고뉴 지방에서 만든 것과 그 맛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이 햄은 익히지 않은 햄을 천에 싸서 포도주를 넣은 쇠구기국물에 익힌 것. 이 햄은 잘라서 도기로 만든 찜냄비에 담고, 졸인 국물을 얹고 다진 파슬리를 듬뿍 넣어서 마치 천연젤리에 담긴 것처럼 만들어 먹는다. 싸구려 파슬리 햄은 쓰고 남은 햄 조각을 젤라틴에 넣어서 만든 것이다.
- 로마인들이 거위에게 억지로 먹이던 매우 단 말린 무화과는 거위의 건강을 크게 해쳤다. 푸아그라는 실제로 당뇨가 심한 거위의 간이다. 그러나 무화과를 먹여서 얻은 무화과 간은 푸아그라 중에서도 최상품이었다. 그래서 갈리아 사람들은 무화과를 먹여 얻은 푸아그라를 단순히 이에쿠르(간)라고도 불렀고, 피카툼(무화과)은 형용사로만 썼다. 그 말이 8세기에는 피기도가 되었고, 12세기에는 페디에와 페이에로 바뀌었다가 결국 푸아가 되었다. 그래서 현대 프랑스어에서는 모든 동물의 간이 푸아그라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따. 캐비아라는 말이 철갑상어의 알뿐만 아니라 모든 물고기의 알을 뜻하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이제 과학자들은 거위에게 식욕이상 항진증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아냈다. 시상하부에 위치한 식욕을 조절하는 부위를 파괴해버리기만 하면 됨. 거위를 마취시킨 후 전극을 뇌 밑부분에 넣고 수밀리암페어의 전류를 흘려주기만 하면 시상하부의 정해진 부위를 파괴시킬 수 있음. 그 후에 인공조명을 해주면 환각에 빠진 거위는 일주일동안 끊임없이 먹기만 한다. 시간이 지나면 세포가 다시 자라면서 그런 현상은 점차 사라진다. 필요하면 그런 시술을 반복할 수도 있다. 이 방법을 쓰면 며칠만에 거위를 손으로 먹일 때 한달 걸리던 체중으로 자라게 됨. 전기자극을 주는 대신 거위의 뇌에 화학물질을 주입하기도 함. 현재 이 연구는 순전히 과학적 실험단계에 있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을 염두에 두고 있는 프랑스 농부들은 이런 방법을 환영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다른 나라의 농부들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얻어진 푸아그라도 크기를 제외하면 보통의 방법으로 얻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렇지만 당뇨에 걸린 거위의 간을 거리낌없이 먹기는 하지만, 간질에 걸린 거위의 간도 그럴까? 우리도 로마인처럼 미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 푸아그라를 올바르게 먹기 위해서는 주의할 점이 있다. 적당하게 얼린 푸아그라는 첫 코스로 먹거나 전채 다음에 먹는 것이 좋다. 고기파이는 먹기 하루전에 통조림이나 냄비를 냉장고의 중간칸에 넣어두는 것이 좋다. 좋은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먹기 한시간 전에 뚜껑을 열어서 맛이 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칼을 뜨거운 물에 넣었다가 써는 것이 좋다. 냄비에 담긴 고기파이는 숟가락으로 떠낸다. 역시 떠낼때마다 숟가락을 뜨거운 물에 담근다. 어떤 경우에도 푸아그라를 샐러드와 함께 먹어서는 안된다. 드레싱에 들어 있는 식초의 산성 때문에 푸아그라의 맛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푸아그라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포크로 찍어서 먹는다. 그러나 신선한 빵을 살짝 구워서 버터를 바르지 않고 함게 먹어도 좋다. 호밀빵, 시골빵 또는 비스킷과 함께 먹는 것은 죄악이다.
- 영양학자들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처럼 개도국 사람들은 선진국 사람들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식생활을 하고 있지만, 선진국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음. 예를 들면 에스키모인은 전통음식에 소금을 넣어서 먹지 않음. 주식으로 먹는 음식인 육류에는 이미 충분한 양의 소금이 들어 있고, 그 지역의 추운 기후가 가장 훌륭한 방부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에스키모인은 소금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음. 그들은 문명사회가 그들에게 나쁜 습관과 질병을 옮겨주기 전까지는 소금을 따로 넣어서 먹지 않았다. 그러나 채식을 위주로 하는 인도사람들처럼 소금결핍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현상은 무더운 여름철에 특히 심하다.
-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했던 바스코 다가마가 살았던 16세기초의 포르투갈인들은 이미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실론(스리랑카)을 탐욕스럽게 수탈했음. 그들은 계피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포르투갈인들이 실론에 도착한 1505년부터 1년동안에 무려 11톤의 계피를 리스본으로 실어 날랐다. 카브랄이 캘커타를 무참하게 폭격하고 인도에서 약탈한 400퀸탈의 향료를 싣고 돌아가던 중 난파되어버린 사고는 포르투갈인들에게 상당한 위안이 되었다. 나쁜 방법으로 얻은 것은 결국 좋을수가 없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실론의 계피를 확보하기 위해 포르투갈은 오만에서 고아에 이르는 지역으 50년 동안 무력으로 지배했고, 그 후에도 수백년간 점령. 그들은 실론의 원주민이었던 신할라족을 노예로 삼았고, 인도 서해안 남부의 아랍지역인 말라바르의 돛단배들을 그대로 침몰시켰고, 알렉산드리아, 제노바, 베네치아 상인듸 대리인들도 무참히 죽여버렸다. 포르투갈은 보안을 더욱 철저하게 하기 위해 아프리카 해안의 모잠비크를 폐허로 만들어 희망봉을 지키는 기지로 사용했다. 네덜란드 인들이 실론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실론으 결국 두 주인을 모셔야 했고, 새 주인은 더 흉악했다. 마침내 1656년에 네덜란드가 계피무역의 독점권을 획득했고, 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그 권리를 넘겨주었다. 물론 이런 제국주의 침략에는 욕심이 많았던 상인들과 은행가들도 동반했다. 영광은 함대를 파견했던 왕에게 돌아갔지만 손쉬운 이익은 이들 상인과 은행가들이 챙겼다. 전성기의 메디치가를 능가하는 허세로 유명했던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은행가는 카를 5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지원했다. 그는 엄청난 해외 차입금에 대한 황제의 차용문서를 계피와 함께 태워버리기도 했다.
- 익기 전에 열매를 따서 햇볕에 말리면 껍질에 주름이 생기고 진한 갈색이 된다. 이것이 바로 검은 후추이다. 열매가 완전히 익은 후에 따서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기면 옅은 색의 씨앗을 얻는다. 이것을 말리면 흰 후추가 된다. 오늘날 유행하는 푸른 후추는 신선한 열매를 간수, 식초 또는 후추 주스에 불려서 캔이나 병에 담은 것이다. 후추를 빻아서 가루로 만들면 그 맛이 없어지므로 후추열매를 사서 필요할 때마다 빻아먹는 것이 좋다. 검은 후추가 가장 강하고, 자연스런 맛이 난다. 흰 후추는 맛이 약하다. 푸른 후추는 매운 맛이 난다. 요리의 마지막 단계나 먹기 직전에 넣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지 않으면 향기가 없어지고 쓴맛이 난다.
- 바닐라 향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어서, 매일 많은 양의 바닐라를 취급하는 작업자들에게는 마약중독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바닐라에 중독되면 두통, 피로 그리고 얼굴, 목, 손의 피부에 과민반응이 나타남. 바닐라 중독에 걸리며 직업을 바꾸는 것이 유일한 치료법이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바닐라 향기를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면 연간 세계 소비량이 1600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울 수도 있다. 아이스크림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면서 바닐라 소비는 더욱 늘어났다. 그러나 바닐라와 바닐라 향은 같은 것이 아닐수도 있음. 천연 바닐라는 가장 비싼 제품에만 사용됨. 값싼 제품에는 진짜 바닐라와 아주 비스산 에틸바닐린이라는 합성물질로 바닐라 향을 낸다. 사실 향수와 식품에 대단히 많은 양이 소비되는 이 합성물질은 인공향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바닐라 값이 비싸므로 화학자들은 발효된 깍지에서 향기를 내는 바닐린이라는 바닐라의 방향성 알데하이드 결정을 대량생산하는 방법도 개발했다. 진짜 바닐라를 사용한 것인가 또는 나무펄프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인공 에틸바닐린을 사용한 것인가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상표를 잘 살펴 보아야 한다. 소비자를 혼란시키는 애매한 상표는 짜증스럽지만 천연식품에서 나는 향기도 결국은 분자들이 혼합되어 생기는 자발적 변화가 코와 입과 뇌의 시상하부에 있는 감각세포를 자극해서 느껴지는 것이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단순한 상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 중세에는 모든 식탁에 준비되어 있던 겨자 덕분에 돼지고기는 물론 쇠고기, 염소고기, 양고기처럼 소금에 절인 고기를 훨씬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17세기까지는 오늘날 집에서 비네그레트와 마요네즈를 만드는 것처럼, 가루 덩어리를 사서 집에서 겨자를 만들어 먹었다. 메나지에 드 파리에 소개된 끓이지 않는 소스를 만드는 법은 아주 간단하고, 다른 중세 음식과는 달리 우리 입맛에 맞지 않을 것 같은 재료도 없어서 오늘날에도 쉽게 만들 수 있다. 포도과즙을 구할 수 없을 때는 겨자에 식초를 넣고 식초의 강한 맛을 없애기 위해서 로마인들처럼 꿀이나 설탕을 넣었다. 포도과즙을 넣은 겨자는 붉은 색이다. 신 주스를 넣어도 좋았따. 처음에는 괭이밥의 산성주스를 썼지만, 나중에는 익지 않은 자두의 주스를 썼다. 사람들은 16세기부터 익지 않은 포도의 주스를 양념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 주스는 쉽게 구하기 어려웠던 레몬이나 오렌지의 주스를 쓰는 것보다 훨씬 더 경제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여름에 기후가 나빠서 제대로 익지 않은 포도를 소비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포도를 재배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익지 않은 사과나 야생능급을 같은 목적으로 썼다. 이런 주스로 일종의 식초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도 만들어 먹고 있는 사과식초는 류머티즘에 효고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식초는 원래 신포도주라는 뜻이다. 겨자도 일반적 입맛의 유행을 따라 변해왔다. 중세에는 향료를 넣었고, 르네상스 말기에는 칠리를 넣었다. 17세기 말에는 당시부터 식탁에 오르기 시작한 바닐라를 넣었고, 오렌지꽃 물이나 보라색 물로 겨자를 만들기도 했다. 18세기에는 케이퍼, 멸치 또는 여성용으로 샴페인을 넣은 겨자도 나왔다. (샴페인 겨자는 지금도 만든다. 고급 식품점에서 다양한 종류의 겨자를 구할 수 있다. 그런 겨자는 조금씩 먹으면 맛있지만, 주재료인 겨자의 독특한 향을 가려버리기도 함. 겨자가 과거처럼 음식맛을 더해주기도 하지만, 중세 사람들이 본능에 의해서 알게된 것처럼 겨자의 산성이 기름기가 많은 음식의 소화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모든 양념에서처럼 중용이 가장 중요한 법칙이다. 양념을 사용해야 하지만, 그리스 쾌락주의자들의 말처럼 쓰더라도 남용은 하지 말아야 한다.
- 허브가 소박한 음식을 고상한 것츠로 만들지는 않는다. 허브에 들어 있는 방향성 정유(화학적으로는 알칼로이드)와 미네랄 염의 높은 함량, 그리고 신성한 허브의 비타민이 소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허브가 들어있는 음식은 아무리 검소하더라도 더 영양가가 높아지고, 식탁에 올려 놓기만 해도 입 속에서 침이 돌아서 식욕이 생기게 된다.
- 향료를 그렇게 많이 썼던 것은 단순한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따. 아마도 아무런 목적도 없었거나, 단순히 모양을 위해서 헤프게 썼을수도 있다. 블로크에 따르면, 과거나 다른 나라의 사회에 대해서 연구할 때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 그리고 지적이고 윤리적 선입견으로 과거를 자신에게 투영하는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끈임없는 시대착오적 해석"을 경계해야 한다. 관찰만 하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우리 시대에 맞는 기준이 없을 경우에는 향료를 쓰는 것과 같은 일상적 행동에 포함된 집단심리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행동은 우리의 관점에 따라서 전통, 습관, 일상적 행동 또는 유행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신화의 수준에 이르게 된 과도한 향료사용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최고조에 이른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길기는 하지만 중세라는 변화의 시기에 적용되는 사회심리학에서 나타나는 개념이 표현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개념은 구별과 보상과 모방이었다. 앞에서 육류에 대한 논의에서 중세음식에 담겨진 메시지를 살펴보았다. 그 메시지는 성숙되어서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필요가 없었던 다른 시기의 경우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숨겨져 있었다. 사회의 집단심리가 개개인의 심리를 단순히 합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음식을 선택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장치의 요소라는 사실은 누구나 날고 있다. 식생활에 담겨진 모든 의미는 사회적 또는 종교적 단체의 특성을 반영한다. 특권층에게만 허용되는 귀한 음식을 마음껏 낭비하는 일은 소수 지배계층이 자신의 우월성을 표시하는 상징이 된다. 의복에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식은 계급의 상징이었다. 특권층은 옷과 장신구를 풍족하게 썼고, 평민들은 단순한 겉옷만 입고, 맨발로 다녔다. 향기와 풍족함의 힘을 가진 음식의 장식품인 향료는 상위계층의 사회적 우월성을 분명하게 나타내줌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유발시키도록 만드는 억압적인 종교에 의해 억눌려 지내던 우울한 시대에 그런 향료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런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중세의 성대한 축제들은 그런 집단적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거부하려는 시도였다. 음식을 실컷 먹는 것이 육체적 힘과 사회적 권위를 보장해주는 이중의 즐거움이라면 향료를 넣는 일은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즐거움을 주었다. 고대 로마의 경우처럼 방탕자들의 무절제한 식욕은 사치스럽게 뱃속과 성욕을 함께 만족시키기 위한 귀족주의적 또는 엘리트주적 욕구와 연계되었다.
- 사람들이 최고급 음식을 보장하다고 광고하는 커피 살롱으로 모여드는 것은 단순히 커피와 다른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체스를 두고 약삭빠른 프로코페가 난로 굴뚝에 붙여 놓은 그날의 소식이나 잡지를 읽어보고, 시사문제나 유행하는 사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등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정보제공자, 철학자, 선동자, 비밀요원이나 이중첩자이기도 했던 수다쟁이들이 살롱이나 대기실이나 여성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작은 방과 같은 곳에서 모여서 정보를 주고 받고, 파리와 베르사유의 소문들을 사고 팔았다. 약삭빠른 프로코페는 이런 사람들을 유인했고, 그 손님들이 다시 다른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많은 사람들이 프로코페의 흉내를 내기는 했지만, 최고급의 커피와 설탕저임, 셔벗, 시럽, 리큐어, 반주용 포도주 등의 맛있는 음료를 비롯한 메뉴를 흉내내지는 못했다. 1721년에는 파리에 300곳의 카페가 생겨났고, 프랑스 혁명 때는 2천속, 프랑스 제국이 시작될 때는 4천 곳에 이르게 됨. 몽테스키외는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내가 만약 왕이라면, 사람들이 뇌가 피곤할 정도로 열을 내게 만드는 카페를 폐쇄할 것이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술집에서 술에 취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술에 취하면 자신들만 다치게 되지만, 커피에 취하면 나라의 장래를 위태롭게 한다'고 했다.
-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왕실 경찰은 담배연기가 자욱한 카페를 단속하겠다고 발표했다. 200년전 터키의 커피 하우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카페에서도 사람들 사이에 너무 많은 이야기가 오갔기 때문에 경찰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아르장송은 정부를 비난하는 사람을 모두 체포한다면, 모든 사람을 체포해야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시작될 무렵에는 카페가 국회에 버금갈 정도의 사교클럽이 되었다. 카미유 데물렝은 팔레-루아알에 있던 카페 뒤 포이의 지붕위에 올라 자신의 모자에 나뭇잎을 꽂으면서 '혁명의 징표를 답시다!'라고 소리쳤다. 데물렝, 당통, 마라와 같은 혁명가들이 공화국을 세운 곳도 바로 그런 프로코페의 카페였다. 당시에 그곳의 주인은 조피라는 사람이었따. 로베스피에르는 라 레장스라는 카페를 더 좋아했지만, 모카 커피와 오렌지 주스를 마실 때는 역시 대적할 곳이 없었던 프로코페의 카페를 애용했다.
- 농업이나 가정경제에 대한 책을 남긴 로마의 학자들은 대부분의 과일을 신선하게 보관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리스 저택에서는 대리석으로 만든 냉장실을 사용했다. 1세기의 플리니우스는 오포로테카라고 부르던 이 저장실을 포마리움이라고 불렀다. 더 간단하게 저장하기 위해서 완전히 밀폐된 통 속에 넣어서 도랑이나 모래속에 묻어두기도 했다. 내부에 송진을 바르고 왁스로 밀폐한 암포라를 쓰기도 했지만 플리니우스와 콜루멜라에 의하면 사과의 경우에는 너도밤나무나 라임나무로 만든 상자를 쓰기도 했다. 저장용으로 쓸 과일은 가능하면 늦게 꼭지를 비츨어 땄다. 사과를 왁스나 진흙에 담그거나, 뜨거운 바닷물에 넣었다가 바깥에 걸어두는 방법도 있었다. 꿀이나 포도주(또는 식초, 액젓)를 이용해 잼을 만들기도 했다. 다른 과일과 마찬가지로 정원을 소유하지 못했던 평범한 로마 시민들은 시장이나 길거리의 과일상으로부터 과일을 구입. 이런 과일들은 대부분 그냥 먹었지만, 당시에는 후식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트리말키오의 다섯번째 음식에는 과일과 케이크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가금류, 사냥고기, 굴 등의 음식을 먹는 사이에 숨을 돌리기 위해서 내놓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일이 들어가는 음식은 아주 많았다. 방부제로 꿀을 넣어 달게 만든 음식이나 세이버리 또는 안주가 많았다. 그렇지만 아피키우스의 요리에는 세이버리로 쓰는 채소안주가 없었다. 그 대신에 현대의 입맛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모든 음식에 액젓을 넣었다. 아피키우스가 소개한 돼지고기 라구에도 사과가 들어갔다. 생선양념과 향료를 넣지 않은 이 음식은 오늘날 북부와 중부 유럽사람들이 먹는 것과 비슷하다. 산성의 사과가 돼지고기처럼 지방이 많은 고기의 소화에 도움이 된다
- 런던 왕립학회와 프랑스 학술원 회원이었던 작가 퐁트넬은 백살까지 살았다. 그는 자신의 장수를 '사실과 꿈을 혼돈하지 않았던 곧은 마음을 가진 여인'이었던 그의 할머니로부터 전해 받은 비결 때문이었다. 그 비결중 하나가 바로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과일이고, 오늘날 마음이 흐트러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살구를 많이 먹는 것이었다. 싱싱한 것이나, 말린 것이나, 절인 것이나 상관이 없었다. 황금색의 이 과일에는 인과 마그네슘을 비롯한 미네랄 염이 많기 때문에 지능에 좋은 것이 사실이다. 살구가 기억력을 상당히 좋게 해주고, 적혈구의 수를 늘려준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살구는 다른 어떤 과일보다 비타민A의 선구물질인 카로틴이 많이 들어있어서 아름다운 오렌지빛을 띤다. 잘 익고, 말리지 않고, 색깔이 짙은 살구의 카로틴 함량이 특히 높다. 100그램의 살구에는 성인의 하루 섭취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카로틴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해 살구는 성장에 좋고,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해주며, 빈혈에는 소의 간만큼이나 좋은 효과를 내고, 시력을 좋게 해준다. 비타민 C는 감염을 막아준다. 익은 상태에서 따서 통조림으로 만든 살구 속에 들어 있는 비타민C의 양이 익지 않은 상태에서 따서 찬 곳에 오래 둔것 보다 많다. 살구에는 중요한 미네랄 염과 함께 마그네슘, 인, 칼슘, 포타슘, 소듐, 황, 망간, 그리고 치아에 좋은 플루오린 등의 미량 원소도 많이 들어있다.
- 오렌지가 포장공장에 도착하면, 기계로 처리된다. 오늘날에는 모든 공정이 기계화되어 30분에 1톤의 오렌지를 포장할 수 있다. 그러나 오렌지는 미용처리를 거쳐야만 한다. 따뜻한 비눗물에 몇 분동안 넣었다가, 두번째 물통으로 옮겨져서 소독된다. 그리고 나면 몇시간에 걸쳐 말린다. 환기가 되는 방에 넣어 껍질의 수분을 증발시켜 단단하게 만든다. 그것만으로 미용처리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미용사가 하는 것처럼 강력한 온풍으로 오렌지를 잘 말린 뒤 부드러운 솔로 광태글 내고, 반짝이게 만들고, 비타민 C가 증발하지 않도록 왁스를 바른다. 크기별로 선별하기 전에 수소에 적당하지 않은 것들을 골라낸다.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선별과정은 아주 까다로움. 오렌지는 크기에 따라 자동선별됨. 선별과정은 고무 롤러를 이용해 이루어짐. 롤러 사이의 간격이 충분하면 오렌지가 빠져 나옴. 그러나 이것은 눈에 보이는 부분일 뿐이다. 선별된 오렌지에는 생산자를 표시하는 도장이 찍힌다. 마지막으로 포장하기 전에 화장지로 싸기도 한다. 특히 스페인과 이스라엘에서 그렇게 한다. 화장지에는 과일을 보호하기 위해서 소비자에게 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양의 다이페닐을 바르기도 한다. 오렌지의 맛을 즐기려면 따뜻한 물에 씻어 닦은 후 먹으면 된다.
- 무화과는 수렵채취 시대부터 현대의 교환경제에 이르기가지 수천년 동ㅇ나 지중해 연안 국가의 식사는 물론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설탕이 없거나 귀했던 때는 익은 과일을 저장하는 데 무화과를 사용. 프로방스에스는 지금도 무화과 절임을 만든다. 싱싱하거나 말린 무화과 몇개에 무화과 나무의 수액을 넣은 우유나 빵으로 만든 납작한 케이크로 한끼 식사를 할 수 있다. 플라톤은 무화과를 운동선수를 위한 식품이라 불렀다. 무화과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그리스인들은 앞에서 본것 처럼 금보다 더 귀한 아티카의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화과의 수출을 금지했다. 시코판트라고 하는 성직자가 무화과가 익어서 따도 좋다고 선언하기 전에는 무화과를 수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코판트라는 이름은 훗날 무화과 밀매업자와 밀고자들을 뜻하게 되었다. 무화과는 성서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나무.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과일을 따먹었을 때 "두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 나무잎을 엮어 앞을 가리웠다."고 했다. 에덴이라고 추측되는 지역에 무화과가 많았다면, 아담과 이브가 먹었던 지혜의 과일은 사과, 살구 또는 오렌지 나무가 아니라 무화과 나무에서 딴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이 더 논리적일 수 있음. 더욱이 고대 종교에서 모두 성스럽게 여겼던 무화과와 무화과 나무는 중요한 상징이고, 특히 지혜화 관련이 많았음.
- 풍요와 입문을 뜻하는 무화과의 상징적 의미가 무화과 나무의 상징적 의미보다 앞섬. 고대 이집트의 성직자들은 봉헌의식에서 무화과를 먹었고, 최초의 은둔자도 무화과를 먹었따. 무화과에 들어 잇는 수많은 씨앗은 진정한 이해와 지식과 때로는 믿음의 통일성과 보편성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석류의 경우에도 같은 상징성을 찾을 수 잇음. 과일을 따낸 줄기에서 흘러나오는 무화과 나무의 하얀 수액은 일종의 유액으로 우유와 정액을 상징. 여성적이기도 하면서 남성적이기도 한 수액은 보편적 에너지를 의미. 아프리카 여인들은 불임을 치료하거나 젖 분비를 촉진하기 위한 연고로 사용했다. 인도인들은 무화과 나무를 브라만의 세 신중에서 두번째 구원의 신 비슈누에게 봉헌했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재생의 신인 디오니소스에게 봉헌했따. 무화과 나무는 새로 태어난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보호해 주었다. 고대 아테네에서 무화과 가 익은 사실을 공개하는 일을 했던 성직자 시코판트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다. 자연의 재생을 증명해주는 소식을 반기기 위해서 겷합의 제례의식을 거행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무화과 나무는 성스러운 뜻을 가짐. 부다의 유명한 벵골 고무나무도 그 중 하나. 마귀들이 갖고 있는 힘과 생명을 상징하는 세상의 기둥인 벵골 고무나무는 명상으로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상징했다. 무화과는 지금도 북아프리카에서 다산, 특히 죽은 자에 의해서 기름지게 되는 땅의 축복을 의미.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의 이 선물은 밭갈이 때 돌 위에 올려 놓는 무화과 제물이 부활한 것이라고 여김. 정통 이슬람 교도들은 베르베르족의 이런 관습을 심하게 비난했다. 베르베르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선조들의 애니미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무화과에 대한 아랍인의 태도는 조금 애매하다. 무화과는 영양학적으로 가치 있고, 다산성을 상징한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 미묘한 모양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짐. 남성의 성기를 닮은 모습때문에 무화과를 피그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오늘날 이 말은 다른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화과는 열매가 열리는 계절을 따라 가을을 뜻하는 크리프라고도 불린다.
- 파인애플은 그 맛이 훌륭하고 신선할 뿐만 아니라 유럽의 겨울철에 적당하도록 비타민과 미네랄염이 풍부하고 소화에 도움이 됨.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은 파인애플을 극찬함. 파인애플은 수천배의 무게를 가진 단백질을 소화할 수 있는 브로멜린이라는 효소를 갖고 있음. 일부 비만 전문가들은 파인애플만 먹는 다이어트를 권하기도 함. 흡수된 브로멜린이 더 이상 분해할 단백질을 찾지 못하면 불필요한 지방을 분해한다는 것. 일주일에 이틀씩 하루에 1킬로의 파인애플을 먹으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다이어트에 대한 반대의견도 상당한. 파인애플 껍질을 잘 씻어 살충제를 제거한 후 달여 먹어도 좋음. 이 용액을 하루 3리터 정도 마시면 몇 파운드의 지방이 제거되지만 설사의 부작용이 있음.
- 바나나는 열대지방 사람들의 주식이다. 플랜틴과 같은 큰 바나나는 맛있는 요리의 재료로 쓰임. 서아프리카에서는 큰 바나나를 찧어서 일종의 빵을 만들고, 향료를 넣은 소스와 육류 또는 생선과 같이 먹음. 서인도 제도,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에서는 큰 것과 작은 것 모두 향료를 넣어 튀겨 먹음. 인도에서는 소를 넣어서 구워 먹음. 바나나는 작을수록 더 달다. 마르티니크에서 무화과라 부르는 껍질이 붉은 바나나는 유럽의 사치 식품점이 아니면 찾기 어려움. 작고 겁질이 얇은 카나리아 바나나는 특히 맛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나나에는 많은 양의 녹말이 들어 있고, 특히 덜 익은 경우에는 녹말 함량이 더 많다. 그런 상태로는 소화가 어렵다. 바나나가 익으면 녹말이 포도당으로 변화됨. 마나나는 상당한 양의 에너지를 제공. 포타슘도 많아서 하루에 한개만 먹어도 성인 섭취량을 채울 수 있음. 이 때문에 땀을 많이 흘리는 더운 지방 사람들에게 바나나가 특히 유용. 완전히 익지 않은 바나나는 껍질째 끓는 물에 익혀 먹는 것이 좋다. 어린아이와 노인에게 특히 그러함. 그러나 나무에 달려 있을 때 독성이 강한 살균제인 싸이오벤자돌을 뿌리므로 잘 씻어 먹어야 함. 케냐에서는 바나나를 끓인 즙을 발효시켜 바나나 맥주를 만들어 마심. 바나나 천연향기는 휘발성이 강하므로 익힌 음식, 크림, 우유제품, 빙과류, 리큐어에 넣은 바나나는 실망스럽다. 그런 용도로는 익은 바나나 냄새와 아주 비슷한 아밀 아세테이트를 쓴다.
- 18세가 말에 장거리 항해애 나서는 배들은 괴혈병을 예방하기위해 양배추 상자를 식량으로 싣고 다님. 1769년 쿡 선장의 첫 항해에서 심한 폭풍으로 어드벤처 호의 선원 중에서 40명이 부상을 입었다. 선의는 압축한 양배추를 상처에 붙여 괴저를 예장. 배의 항해일지를 보면 그 선의는 양배추와 베이컨으로 만든 음식을 먹던 중 그런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간수에 절인 양배추인 슈크루트는 아주 예전부터 알려져 있다. 산성 발효를 이용해서 식품이 상하지 않도록 저장하는 방법은 오래전에 개발된 것으로, 마우리치오 박사는 이 저장법도 말리거나 훈제하는 방법처럼 인류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맥주와 빵에서 본 것처럼 젖산 발효는 미생물을 제거해줌. 절인 양배추가 등장하기 전에는 신맛이 나는 수프가 있었다. 신석기 시대의 유럽 사람들은 자작나무의 어린 가지 도는 싹이나 잎으로 그런 수프를 만들어 먹었고, 16세기 까지는 쐐기풀, 카르돈, 괭이밥 등을 중부유럽식으로 만들어 먹었다. 초원에 살던 게르만족은 침략한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양배추를 자신들의 방법으로 절여먹기 시작했다. 집에서 만들어 먹었던 절인 양배추는 17세기에 산업적으로 가공되기 시작한 최초의 식품이 되었다. 초기에는 기름이나 포도주를 만들거나 소금이나 식초에 절이는 가공산업과 마찬가지로 소규모로 시작됨. 절인 양배추는 독일의 마그데부르크와 알자스의 스트라스부르의 주산업이었다. 발효식품으로 인, 포타슘, 비타민이 풍부한 절인 양배추는 쿡 선장의 항해가 성공할 수 있던 비밀 중 하나. 쿡 선장은 신선한 양배추도 식량으로 싣고 감. 그 후부터 영국 해군 군수부에서는 절인 양배추 창고를 설치하고, 항해에 나가는 모든 배에 절인 양배추를 싣도록 했다. 절인 양배추는 익히지 않더라도 대부분 사람들이 쉽게 소화시킬 수 있는 식품. 특히 향나무 열매를 넣으면 더 좋음. 양배추는 내장에 가스가 차게 만든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절인 양배추와 함께 먹는 지방이 많은 율류가 문제이고, 특히 그런 음식을 요리할 때 쓰는 백포도주나 그런 음식을 먹을 때 함께 먹는 맥주가 원인인 경우도 많음. 절인 양배추를 만드는 방법은 기계화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수백년 동안 변하지 않음. 양배추를 잘게 잘라 향료와 함께 간수에 담가 통 속에서 발효시킴
- 이탈리아 파스타 요리가 훌륭하긴 하지만 이탈리아 음식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된 것은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후. 생활의 여러면에서 그렇듯이 콜럼버스가 돌아온 이후로는 부엌의 모습도 많이 변화. 이탈리아 반도의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토마토를 먹지 않고 어떻게 살았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가 됨. 감자나 담배와 같은 과에 속하는 리코페르시콘 에스쿨렌툼은 멕시코를 비롯한 중앙 아메리카에서 자랐다. 향기는 좋지만 작고 보잘것 없는 이 식물은 오늘날 체리 토마토와 비슷하게 둥근 자갈 모양의 열매를 맺기는 하지만, 번식이 잘 되지 않음. 인디언들은 대를 이어 채소상을 했던 최초의 안달루시아 개척자였던 모리스코스에게 토마틀에 아히를 넣으면 좋은 소스를 만들 수 있다고 가르쳐줌. 아히는 아코스타 신부가 지독하게 강하고 맵다고 했던 칠리고추이다. 다른 식물처럼 약용식물로 여겨졌던 토마토는 16세기에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나폴리를 통해서 이탈리아 요리에 소개됨. 이탈리아 사람들은 스페인 사람들과는 달리 매운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칠리를 넣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시적인 이태리 사람들이 황금빛 사과라는 뜻으로 포모도로라고 불렀던 토마토는 제네바와 니스를 통해 프로방스로 전해짐. 프로방스 사람들은 사랑의 사과라 불렀다. 프로방스 사람들은 냄새로 개미와 모기를 쫓아버리는 붉은 열매를 예쁘다고 생각하기는 햇지만, 토마토를 먹기 시작한 것은 한 세대가 지난 후부터. 처음에는 조심스레 먹기 시작했지만, 결국은 아주 좋아하게 됨. 영국 개척자들도 북미에서 토마토를 만났지만, 오랫동안 신뢰하지 않았으나 영어에서도 사랑의 사과라고 알려짐.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다른 파리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브리야-샤바랭도 토마토를 맛본지 얼마 되지 않았고, 소스로는 거의 먹어보지 못했다.
- 사실 빵은 굶주림에 대한 환유적 반응에 지나지 않았다. 인류문명이 초기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용 빵은 옥수수죽의 일종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밀로 만든 것을 먹을 수 없었음. 가루로 빻아서 한동안 배를 불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이용. 밀보다 더 굵은 곡물, 대두, 도토리, 그리고 무엇보다 베르길리우스가 카스타네아이 몰레스라고 불렀던 밤 등이 모두 그렇게 이용되었음. 고전에는 이상하게도 밤을 여자들의 식품으로 설명했다. 밤은 수천년 동안 곡물을 재배하기 어려웠던 지중해 연한 산악지방의 주식이었다. 밤은 물물교환에 쓸 수 있는 자원이었고, 밤 이외에는 다른 자원이 없는 곳도 많았음. 스파르타 이전의 트라키아 사람들도 밤으로 빵을 만들었다. 그런 빵은 발칸, 이태리 중부, 사르데냐, 시칠리아, 코르시카, 피레네 동부 지방에서 지금도 먹고 있는 납작한 케이크와 비슷한 것. 전통적인 코르시카 경제는 오랫동안 섬에 있던 숲에 의존했기에 코르시카의 중앙은 밤 문명이 시작된 곳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음. 많은 전통이 전해져 오고 있는 섬 전체에서 밤을 수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해 먹음. 그런 요리가 오랫동안 에너지를 제공해왔다. 불을 사용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밤이 익기 전에는 날것으로, 완전히 익은 후에는 말려서 껍질을 벗겨 침이 배어들도록 천천히 씹어 먹음. 양치기들은 일을 나가기 전에 등짐에 밤을 잔뜩 넣었다.
- 쿠르틴은 감자 수플레가 감자의 시라고 했다. 그는 감자 수플레는 아무것도 아니면서도 모든 것이다. 감자 수플레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수플레가 아니면 절르발이가 되거나, 주저앉아버리거나,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고 했다. 튀긴 감자조각을 처음에는 낮은 온도로, 그 다음에는 높은 온도로 두번 요리하면 작게 부풀어오른 풍선으로 변함. 감자 수플레는 우연히 발명되었다. 증기기관, 방사선, 페니실린은 물론 감자 수플레와 같은 위대한 발명은 우연의 결과인 경우가 많음. 1837년 파리에서 생-제르맹까지의 철도가 처음 개설됨. 루리 필리프왕과 왕비가 첫 기차를 타고 가서 연회를 열었다. 메뉴에는 튀긴 감자와 구운 쇠고기가 들어 있었다. 주방장은 완전히 익지 않은 감자를 기르에서 꺼내서 손님들이 전채를 시작할 시간에 맞추어 다시 기름에 넣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기름을 뺀 감자는 쭈그러들어버렸고, 주방장은 죽고싶은 심정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감자를 다시 기름에 넣었는데 조수가 불을 붙이자 기적이 일어났다. 감자조각은 황금빛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감자 수플레는 대성공이었다. 볼테르에 의하면 시간과 행복한 기회가 예술과 과학을 완성시켰다고 했다.
- 오늘날에는 정어리를 기름에 튀기지 않고 증기로 찌거나 구움. 정어리를 잡은 즉시 소금을 약간 뿌려 살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것을 등급에 따라 분류한 후에 머리를 자르고 내장을 제거한다. 기계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런 과정은 모두 수작업에 의존. 아메리카에서는 흡입술로 정어리 내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유럽산 정어리에는 적용 불가. 노르웨이에서는 내장을 제거하는 대신 통조림을 만들기 전에 수조에 넣어 굶기는 방법을 사용. 그후에는 정어리를 흐르는 물에 씻어 30분 정도 간수에 넣어두고 피를 빼고 박테리아를 제거. 다시 씻은 후에 뜨거운 바람으로 말려 터널 모양의 오븐에 넣어 구움. 구운 정어리를 캔에 넣고 섭씨 90도의 기름을 넣음. 마지막으로 캔을 밀봉하고 소독함. 1880년에는 대서양의 수온이 갑자기 내려가만셔 브르타뉴의 정어리가 포르투갈 해안으로 옮겨감. 프랑스 통조림 업자들은 공장의 일부를 세지나로 이동. 몇년 후에는 정어리가 포루트갈 해안에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고, 통조림 업자들도 그 뒤를 따름. 포르투갈 정어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상의 정어리 통조림에는 반드시 올리브 기름을 써야 함. 통조림에 올리브기름이라고 표시되어 있지 않으면, 다른 기름을 쓴것이다. 정어리를 구운 후에 토마토 소스를 넣어 통조림으로 만들기도 함. 생선이 소화가 잘 되도로 만들기 위해서 레몬이나 매운 향료를 넣기도 함. 뼈를 제거한 정어리가 더 비싸기는 하지만 맛이 더 좋지는 않다. 생선의 저민 살도 마찬가지. 뼈를 남겨두면 소스에 칼슘이 녹아들어가는 장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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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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