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오나르도는 스스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했음. 그가 말한 sena lettere는 일자무식이란 의미다. 레오나르도가 빈치 마을에 있을 때도, 피렌체로 간 후에도 정규교육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분명함. 레오나르도는 도제교육을 받으면서 회화나 조각을 만들 때의 재료조합법, 소묘, 원근법 등을 배웠을 뿐, 라틴어는 서른살이 지나 밀라노로 옮겨간 뒤에댜 겨우 배우기 시작. 트리블치아노 수첩, 파리수첩에는 라틴어가 빽빽하게 쓰인 부분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 수첩에서 그의 노력을 볼 수 있다. 수첩의 여백에 a부터 시작하여 단어를 늘어놓은 경우가 있는가하면, 마드리드 수첩의 장서목록 중에는 레오나르도의 자필로 짐작되는 나의 단어장이라는 부분도 포함되어 있음.
- 레오나르도가 배우지 못했다고 한 것은 결코 자신을 비하하고자 한 말은 아님. 오히려 문헌학적인 학문의 공허함을 보거나 들어온 그로서는 경험있는 제자 레오나르도라는 말처럼 오히려 경험과 실용학문이야말로 자신의 논거이자 신조라는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 레오나르도는 메디치 가문의 사교계 주류 인물인 인문주의 학자들과도 사귀었지만, 그들은 플라톤주의 또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중요시했고, 레오나르도는 과학적 고찰과 발명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서로 부딪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특히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플라톤 아카데미의 중심인물이었지만, 레오나르도는 점성술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를 존중하지 않았따. 레오나르도는 인문주의 학자들보다는 과학자나 대학교수와 사귀기를 좋아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논하는 일은 의미없다고 생각하여 피렌체 교외에 있는 메디치가의 칼리지 별장에서 열리는 심포지엄 초대에는 단 한번 밖에 응하지 않음. 하지만 그의 무학에 대해 1950년대 이후에도 논쟁이 펼쳐지는 것을 보면, 레오나르도의 발자취가 얼마나 큰지 새삼 느낄 수 있다.
* 파스타의 역사
- 밀가루와 물을 섞어 반죽한 음식을 먹기 시작한지는 오래되었는데, 고대 로마시대에 그리스인은 이를 이토리온이라고 했고, 로마인은 이토리움이라고 했음.
- 파스타는 impastare(반죽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밀가루와 달걀만으로 반죽한 면을 총칭. 5세기에 접어들어 팔레스타인에 머물던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파스타를 먹기 시작했고, 얼마 후 아랍에 점차로 파스타가 전해짐. 아랍인들은 파스타와 함께 이트리아라는 아랍어를 시칠리아에 전했으며, 그 말이 트리라는 시칠리아 방언이 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기록은 없음. 아랍인들은 스페인에도 파스타를 전했으며, 지중해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파스타는 곧 지중해 모든 나라에 전파됨. 그리고 지중해의 많은 나라 특히 이탈리아에 뿌리를 내리게 됨.
- 14세기에 거장 마르티노가 쓴 책에는 라자냐, 마카로니, 베르미첼리의 레시피가 등장한다.  레오나르도의 장서목록 중에서 속칭 플라티나의 '아름다운 생할과 건강'에도 위 레시피가 나오는데, 이것은 마르트노의 레시피를 베낀 것으로, 파스타가 짧은 애벌레 모양이다. 플라티나는 마르티노가 속어로 쓴 레시피를 라틴어로 옮긴 후, 생활과 매너에 관한 내용을 추가하여 펴낸 책으로, 레오나르도는 이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 밀가루와 물로 반죽한 생파스타는 시칠리아에서 건조 파스타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존재했음. 베르미첼리는 애벌레 모양뿐만 아니라 손으로 반죽해 길게 늘인 것도 있다. 그리고 라자냐는 반죽한 파스타를 판모양으로 늘여서 사각으로 자른 파스타이다. 라자냐 중에는 미트소스와 베사멜 소스를 넣어 층으로 만든 라자냐 알 포르노(오븐으로 구운 라자냐)가 대표적. 라자냐는 얇은 파스타를 삶아서 소스를 끼얹거나 또는 라디치오(이탈라인 치커리), 주키니(오이 비슷한 서양 호박), 가지, 피망 등 채소만 넣은 것도 있고, 지방에 따라 각기 요리법이 다름. 예를 들어 제노바의 라자냐는 삶아서 부드러워진 페스토 제노비제를 곁들인 것이다. 손님이 많을 때는 페스토를 많이 만들어두어야 한다면서 투덜대는 요리사도 있긴 하지만 사실 맛은 매우 일품이다. 이 밖에 긴 끈 모양의 라자냐도 있다.
- 마카로니와 스파게티가 중국에서 이탈리아로 전해졌다는 말도 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1295년 마르코폴로가 중국에서 선물로 가져오기 전부터 제노바에 있었다는 설이 유력. 1269년에 제노바의 선원이 배에 마카로니를 가득 싣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고, 또 1279년 2월 4일자 제노바 공증인의 고객재산 목록 중에서 '마카로니가 가득 찬 상자'라고 쓰인 기록이 발견되기 때문.
- 최초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건조 파스타의 시초가 된 레시피는 '플라티나'의 레시피다. 베르미첼리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 플라티나에서 소개하는 시칠리아풍 미네스트라 레시피에도 파스타를 햇빛에 건조하라고 되어 있음. 시칠리아풍 미네스트라는 손으로 만든 마카로니로, 파스타를 늘여서 가는 철 막대기로 감았다가 빼내어 건조한 것. "8월에 파스타를 만들면 2~3년정도 보관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12세기 또는 그 전에 시칠리아 섬을 지배했떤 아랍인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파스타라는 음식에 대해 알고 있었음. 그들은 상업상의 거래를 위해 사막을 여행할 때 부패하기 쉬운 밀가루 대신 보존식품이 필요했고, 이러한 필요에 따라 탄생한 것이 바로 건조 파스타였다. 그것이 이탈리아에 전해져 파스타의 하나인 마카로니가 위에서 말한 공증인의 고객재산목록에 기재되었던 것임.
- 여기서 마카로니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도 등장. 데카메론은 피렌체에 페스트가 만연하던 와중에 피난중인 젊은 남며가 매일 밤 한사람씩 이야기한 내용을 엮은 책으로, 1347~48년이 그 무대임.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만큼 끔찍한 피렌체의 참상을 담은 이 글은 오히려 새로이 마음을 다지며, 마치 오랜 옛날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그중 제8일의 세번째는 동료화가에게 속아서 보이지 않는 마법의 돌을 찾아가는 카란드리노라는 우직한 화가의 이야기다. '그 마법의 돌이 있는 마을에서는 소시지로 포도나무를 묶고, 1데나로의 금으로 거위 한마리를 사면 새끼 거위를 덤으로 얹어준다. 그곳에는 마르메산 치즈가루만으로 만들어진 산이 있다. 그 산위에 사는 사람들은 마카로니아 라비올리를 만들고, 거세한 수탉으로 수프를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일이며, 그들이 수프를 산밑으로 흘려보내면 누구라도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옆 실개천에는 일찍이 누구도 맛보지 못한 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최고급 베르나차 와인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 이야기에 속은 카란드리노는 그곳을 찾아 나섰다.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 그 무렵 토스카나 지방에는 이미 밀가루를 물로 반죽한 파스타가 있었고, 파르메산 치즈를 뿌려먹었다는 말. 음식역사의 대가인 마시모 몬타나리는 이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이것이 바로 농민과 서민이 갈망하는 것'이라고 강조.
- 긴 스파게티 모양의 파스타는 기계생산이 발달함에 따라 급속히 확대. 이탈리아 요리에 빠질 수 없는 토마토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후인 16~17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유럽에 전파됨. 이탈리아에 토마토 소스가 등장한 것은 18세기 이후. 1773년 발간된 나폴리 출신 빈센초 코라도의 '멋진 요리사'에 처음으로 토마토가 요리재료로 등장
- 1472년 화가길드에 가입한 레오나르도는 스승인 베로키오를 도와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리는 작업에 참여. 이 그림의 왼쪽 아래에 있는 천사를 레오나르도가 그렸다고 하는데, 바사리의 전기에 의하면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가 너무 훌륭해서 베로키오는 이후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함. 레오나르도는 이처럼 명성을 날리며 피렌체 거리를 활보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는 잘생긴 데다가 목소리도 멋지고,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류트도 잘 켜는 매력적인 청년이었던 것 같다. 당시 피렌체에는 익명의 고발제도가 있었는데, 타인의 위법행위나 부도적한 행위를 무기명으로 편지에 써서 상자에 넣으면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를 통해 다른 세명과 함께 동성애 죄목으로 고발되어 사형언도를 받음. 1476년 4월 9일 그의 죄를 심판하는 최초의 심문이 열렸지만, 어떤 증거물도 제시되지 않음. 다음 심문에서도 증거가 나오지 않자 결국 고발은 각하됨. 레오나르도는 이 일로 인해 결국 큰 심적 타격을 받음. 어쨌든 그의 인생에서 여성과 관련되는 기록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소년을 좋아한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서자라는 사실과 생모가 자신을 두고 떠난 일이 그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으리라고 짐작됨. 그는 아무조건 없는 애정을 받아본 경험이 없어 애정이 다소 결핍된 인가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는 감수성이 풍부했기 때문에 마음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더욱 일에 몰두했을 것이다. 어쩌면 바깥세상에 대해 마음을 닫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름.
- 그는 '고독은 구원될 수 있다'라고 했지만, 고독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라이와 멜치와의 우연한 만남이 그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럽고 기쁜 일이었을까...
- 유럽에 처음 수입된 음료는 초콜릿이었다. 처음에는 초콜릿의 주 원료인 카카오 씨앗을 잘게 부수어 음료로 마셨는데, 불평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카카오에 설탕을 넣게 되며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럴만도 했다. 고대부터 사탕수수는 있었고, 중세에는 아랍인이 전한 사탕수수가 시칠리아에서도 재배되었지만, 가격이 비싸고 귀해서 의사의 처방이나 요리에 극소량 사용되는 정도였다.
- 차츰 설탕에 대한 기호도가 높아지면서 설탕을 사용하는 요리가 발전하기 시작. 초콜릿은 1595년에는 피렌체와 베네치아에 이미 알려진 식품이었다. 초콜릿 직후에 유럽에 들어온 음료가 커피다.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버터와 함께 페이스트 형태로 소비되다가 남아랍에서 음료로 만들기 시작. 그후 커피는 터키를 지나 베네치아로 전파되었지만,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것은 17세기 초였다. 따라서 레오나르도는 커피를 알지 못했다. 보리를 볶은 후 갈아서 가루로 만든 오르조(보리라는 의미지만 상품명이 됨)라느 커피 비슷한 것을 마시기도 했지만 전쟁중 오르조를 커피 대용품으로 마셨다고 하며, 아이들이 마셨다는 말도 있다. 최근에는 건강식품 붐의 영향으로 일본에서도 오르조라는 이름의 음료수가 판매되고 있는데, 입맛에 따라 오르조를 즐겨 찾는 사람도 있다.
* 14-15세기 음식문화
- 13세기 후반부터 급속히 발전한 피렌체 경제는 백년전쟁의 영향으로, 14세기에 위기를 맞음. 더욱이 1348년에 그때까지 지중해 연안에 만연하던 페스트가 마침내 피렌체를 엄습. 페스트는 맹위를 떨쳐 10만명에 가깝던 인구가 1/3로 줄어듬. 이때 참상은 데카메론에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13세기말부터 피렌체의 요직에 메디치가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 1420년 아버지로부터 은행을 물려받은 코시모가 경영수완을 발휘하여 메디치 은행은 유럽 최대 은행이 되었고, 그 자신은 실질적으로 메디치 왕국이 군주가 되었다. 메디치 가문이 유럽제일의 부호가 되자 피렌체의 경제도 함께 차츰 발달하여 마침내 르네상스가 꽃을 이움. 레오나르도가 빈치라는 작은 마을에서 피렌체로 나간 것이 때마침 그 즈음으로 코시모가 메디치 가문의 주인으로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우 해외에서 유럽에 새로운 식품이 반입됨. 남인도가 원산지인 후추였따. 후추는 로마에서는 이미 향신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로마의 미식가 아피키우스는 대부호로 날마다 맛있는 요리를 포식하며 지냈다. 미식을 추구하는 데 막대한 재산을 탕진한 그는 아직 재산이 남아있음에도 "앞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계속할 수 없을 바에는 살아갈 의미가 없다"며 자살했다. 아피키우스는 미식가답게 여러가지 요리를 고안해내기도 했는데, 그의 요리책 레시피에는 반드시 후추가 들어갔다.
-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레오나르도가 살았던 시대로 가보자. 아피키우스러첨 대부호는 아닌 한 남자가 어느날 친구가 수렵으로 사살한 돼지를 가져오자 몹시 기뻐했지만 고기에 곁들일 소스를 만드는 데 엄청나게 많은 후추를 사용해야 하는 것을 알고는 선물을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베네치아에서 후추는 천국의 씨앗이라 불렸으며, 이로써 후추의 지위는 격상되었다. 가격이 매우 비싸서 1온스(28그램)단위로 팔렸는데, 당시 후추 1리브레(약 453그램) 당 가격은 양 한마리의 가격고 맞먹었다. 향신료는 축제일, 혼례, 신년선물에도 널리 이용되었고, 후추를 구하려고 항해술이 발달했다. 후추는 그만큼 상인들에게 부를 안겨주는 대상이 되었다.
- 후추가 맛이 변한 고기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이용되었다는 통설은 정확하지 않음. 시장의 고기는 지금보다 훨씬 신선한 상태에서 먹을 수 있었기 때문. 시 조례에 따라 여름에는 하루, 겨울에는 사흘이전에 처리된 식육의 판매는 금지되었다. 15세기 당시의 1년간 가축처리 그래프를 보면, 가축은 통상 판매당일에 처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아피키우스 요리책에 나오는 고기보존법은 고기에 벌꿀을 발라 용기에 매달아놓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이 보존법을 사용하며, 벌꿀을 바르면 1년간 보존할 수 있다고 함. 그 후 베네치아 상인이 후추를 계속 수입하면서 후추를 확보하기 쉬워지자, 프랑스 엘리트 계층의 기호는 후추에서 생강으로 옮겨가기 시작.
- 14~15세기에는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새로운 채소와 토마토, 피망, 감자, 인도의 무화과 또는 커피와 초콜릿이 수입됨. 이 요리재료들이 식탁의 주역이 되기까지의 시간과 양식은 당연히 계층에 따라 격차가 있다. 위에서 아래로, 궁중요리에서 중산층의 요리로, 더욱 천천히 일반가정과 농촌으로 전해짐. 이처럼 중세에는 농촌사회에서 도시로 전해진 요리재료와 문화의 유통이 역방향으로 변하기 시작. 변한다고는 해도 사실 변화한 것은 권력층이고, 농민은 여전히 빈곤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당면문제이고, 변함없이 빵, 포카치아(올리브유, 소금, 잘게자른 채소를 뿌려 구운 크고 둥근 이탈리아 빵), 폴렌타 또는 밤가루로 만든 카스타나차를 먹었다.
- 한편, 교역이 왕성해지고 요리재료가 풍부해지면서 먹는다는 것이 단순히 속을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요리라는 관념이 발달. 요리사가 차츰 예술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하고, 1300년 후반에는 전문 요리사가 출현. 그리고 중세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인문주의의 대두, 새로운 르네상스의 숨결은 요리의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요리에도 반영하겠다는 의식이 생겨나고, 세련된 요리, 시각적 아름다움과 색다른 표현이 요구되었다
- 중세에 식사란 오로지 먹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지만 르네상스 궁중요리의 목적은 식사가 아니라 쇼를 관람하기 위한, 회의를 위한, 또는 향연을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 도시와 농촌, 계급에 따라 언어도 다르고, 빈부에 따라 음식의 격차도 컸음. 예를 들어 상류층은 흰빵을 먹었다. 이런 것들은 요리하는 방법에도 큰 영향을 미침. 또 고기를 적당한 색깔이 날 때까지 노릇노릇하게 굽는 요리법을 좋아하게 되는 등 요리법도 차츰 변화. 더불어 식탁에서의 예절도 중시되었는데, 그전까지는 식탁 앞에서의 행동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 1460년에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가 처음으로 요리와 건강에 관한 책을 썼다. 그는 인문학자이며, 로렌초 데 메디치의 살롱에 출입하는 멤버 중 한명이었다. 연회가 점점 잦아지고 때로는 가족의 경사를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기도 했다. 두사람당 한개씩 사용하던 포크도 개인별로 필요하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차츰 포크를 사용하기 시작.
- 연회의 진행은 연극처럼 결정되었다. 접시를 나르는 일은 카메리에레(심부름꾼)의 몫이고, 그 다음 순서부터는 음식에 맞는 와인의 선택, 음악, 청소, 설거지 담당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일의 지휘를 맡은 사람이 주방장이었음. 그중 고기자르기 담당인 트린치안테는 당시 연회의 스타였다. 고기 종류에 따라 전용 나이프가 정해져 있는데, 도마를 사용하지 않고 공중에서 고기를 자르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탄성을 자아냈다. 손님의 접시에 들어갈 만큼의 크기로, 더욱이 손님의 얼굴을 보지 않고 주인의 얼굴을 보면서 고기를 자르는 모습은 예술이라기보다 차라리 미술에 가까웠다. '요리예술'중에 나오는 빈첸초 체르비오의 트린치안테 1장을 읽어보면 그들이 마술에 가까운 예술을 익히기 위해 참으로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의하면 고기뿐 아니라 참새, 개똥지빠귀, 그 밖의 작은 조류, 멜론, 복숭아 등의 과일, 토르타에 이르기까지 단지 먹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마치 세공사처럼 아름다운 모양으로 잘라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임. 자르는 방법으로는 이탈리아식과 프랑스식이 있으며, 프랑스식은 도마를 사용하지만 이탈리아식은 도마를 사용하지 않고 공중에서 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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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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