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기술은 지난 200년 동안 일의 본성과 기술의 가치를 변화시켜 왔으며, 지금까지 그 과정에 세차례 주요 전환점이 있었다.
(1) 산업기술이 발달하면서 제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만드는 장인들의 기술이 사양길에 접어든 때. 권총을 만드는 사람은 나무를 깎아 개머리판을 만들고, 총열을 주조하고, 공이치기를 만들어 넣고, 줄로 방아쇠를 깎은 다음 모든 부속을 공들여 조립해야 했다. 그러나 코네티컷에 있는 엘리 휘트니 총기 제조공장에서는 수력발전으로 구동되는 기계를 활용해서 직원들이 각자 한 가지 공정이나 일부 과정만 맡아서 작업하며, 총기부속은 모두 동일한 규격이다. 그래서 숙련되 기술이 있는 수공업자들이 할 일은 줄어들고, 비숙련 노동자들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기계 다루는 법을 익히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며 노동자와 기계는 보완재였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예전보다 훨씬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2) 20세기 초 전기가 보급되면서 공자들이 전보다 한층 정교해졌는데, 그에 따라 복잡한 기계를 다룰 줄 아는, 교육과 기술의 수준이 높은 노동자들의 수요가 많이 늘었다. 또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지식과 경험을 갖춘 관리자들도 필요했다. 이제는 지식과 기술이 없는 사람들은 외면받고 교육받은 노동자들이 환영받는 분위기였다. 그렇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다.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교육을 통해 기술을 갖출 수 있었기 대문. 그런 추세는 20세기 대부분을 보내는 동안 점차 심화됨. 기술발전에 따라 교육을 더 많이 받은 노동자들이 꾸준히 필요했으며, 미국인들은 전례없는 열정으로 배움에 열을 올리며 그런 시대적 부름에 응했다. 고교 졸업률은 1890년 4%에서 70년 77%로 수직상승.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대단한 국가적 지적 성장이 일었다. 노동자들이 갈수록 증대되는 과학기술 수요를 따라잡을 수만 있으면, 과학기술과 노동자는 보완재로 작용해 서로에게 득이 됐다. 그 결과 생활수준이 급속도로 향상되는 경제 기적이 일어났다.
(3) 80년대 정보기술이 발전하면서, 경리, 사무, 공장에서 필요한 반복적 업무 등 중간 수준의 기술이 필요한 일을 대신하게 됨. 그래서 그런 분야의 일자리는 줄어들고, 계속해서 그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임금상승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기술숙련도 면에서 맨 위와 맨 아래에 해당하는 고도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한 전문직과 기술이 그다지 필요없는 서비스직 쪽은 상황이 좋았다.이 두 계층의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늘어났으며, 임금도 높아졌다. 경제학자들이 노동시장 양극화라 불렀던 이런 현상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남. 정보기술이 아무리 발전했더라도, 최상위 노동시장에서 문제해결, 판단, 업무편성을 담당하는 경영자, 변호사, 컨설턴트, 재무전문가 같은 고숙련 노동자들을 대신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도리어 정보기술발전은 고위 전문직 노동자들에게 더 낮은 비용에 정보를 제공하면서, 이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역할을 함. 한편 컴퓨터들이 육체적 활동에는 재주가 없으므로, 간병인, 정원사, 요리사 등의 최하위 노동시장 역시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음.
그것이 바로 2000년대까지의 이야기였다. 인간의 숙련된 기술이 높게 평가되기도 하고 평가절하되기도 했던 경제사의 변천 속에서, 정보기술은 중간급 노동자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지만, 기술의 양극단에 있던 노동자들은 피해를 전혀 안입거나 오히려 번성했다. 이제 우리는 그 네번째 전환점에 서 있다. 정보기술이 꾸준히 발전하면서, 지금껏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노동기술 양쪽 끝 계층도 이제는 위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 배심원 재판처럼 중요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데이터가 아무리 방대하더라도 데이터만으로 결론짓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살아 움직이며 느끼고 판단할 줄 아는 인간을 원한다.
그와 같은 현실은 경제환경이 바뀌면서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높아질 것인지를 강력히 암시한다. 배심원들은 보고, 듣고, 만지고, 대답할 수 있는 인간을 높이 평가하며, 인간전문가가 인간적 판단을 내리는 모습을 직접 보고 듣는데 엄청난 가치를 부여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상호작용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큰 교훈을 얻는다. 인간적 소통은 우리가 깨닫는 것보다 훨씬 소중하며, 다양한 방시기으로 우리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 경제불황 이후 미국의 고용성장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극히 둔화됐다. 무엇때문이었을까? 그 원인 중에는 고학력 노동자들을 찾는 수요가 감소했기 때문도 있다. 연구원들은 "수요가 역전됨에 따라 고학력 노동자들은 직업군의 단계에서 밑으로 내려와서 전형적으로 저학력 노동자들이 해오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라고 설명. 요즘 일자리를 찾는 젊은 구직자들이하나같이 뼈저리게 느끼듯 말이다. 그래서 대학졸업장이 있는 사람들이 서류를 정리하거나 안내 데스크에서 근무하는 등 단순직에 종사하는 사례가 부쩍 증가. 그렇게 되면서, "이번에는 저학력 노동자들이 더 낮은 계층의 직업군으로 밀려나거나 아예 직업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고 연구에서 밝히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직관적으로도 이치에 맞을 뿐 아니라 미국의 전반적 고용률이 대단히 낮아졌으며 임금이 정체되는 이유에 대한 설명도 된다.
-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서 가장 많이 얻고자하는 것을 제공하는 능력이 앞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며, 인간의 그런 바람은 한동안 변하지 않을 것임.
인간이 바라는 것들은 항상 합리적이지만은 않다는 특징이 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추출한 예측이 사람 의견과 똑같이 훌륭하거나 그보다 정확하더라도,우리는 오로지 데이터만으로 예측한 결과보다는 전문가인 사람이 판단한 바를 듣고 싶어함.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까지 합리적이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우리는 이성적으로 잘 판단할 수 있지만, 컴퓨터보다는 절대 더 이성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욕구과 해결책을 대하는 우리의 본질적인 인간적 관점, 그리고 그런 욕구가 우리에게 어떤 동기를 불어일으키며 어떻게 대응하도록 만드는지가 우리의 미래를 형성하고, 성공의 열쇠로 작용한다.
산업혁명이 태동하고 기계시대가 시작된 이후 인간의 성공은 인간의 기계같은 습성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았다. 인간은 수십년 동안 공장에서의 육체노동과 사무실에서의 정신노동 같이 반복적이며 규칙적활동에 몸담았다. 그것이 그 당시 일의 특성이었다. 헨리 포드가 "양손이 필요하다고 했더니만 왜 매번 머리가 딸려 오는거야?"라고 불평했던 것도 바로 그런 맥락. 그런 업무는 사실 기계에 적합한 일이다. 그저 그 시대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기계가 아직 없었을 뿐. 기계는 처음에는 서서히 발전하다가 정보기술의 발달과 맞물려 발전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음.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기계를 활용해서 제작하는 거의 모든 공정은 기계들이 해나간다.
그 결과 우수성의 의미가 바뀜. 과거에는 기계같은 기능을 하는 사람을 우수하다고 평가. 그러나 요즘에는 인간다운 면에서 뛰어나고, 철저히 인간다운 사람이 되어야 우수한 결과를 달성할 수 있음. 바꾸어 말하면, 뛰어난 사람이 되는 과정은 인간의 지식보다는 인간의 본성적 모습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다각도로 살펴봤다. 그런데 한가지를 더 생각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처럼 상호작용 능력이 창조적 가치의 핵심이 되어가는데, 그와 관련한 사람들의 능력은 오히려 갈수록 쇠퇴하고 있다.
- 인간 이외의 영장류에서도 감정적, 신체적 모방이 나타나지만,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인간이 날마나 행하는 것 같은 공감의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은 왜 이런 독특한 특징을 발달시켰을까? 여러 증거를 보면 이런 특징이 진화과정에서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
예전이든 지금이든 관계없이 공감으로 우리가 얻는 가장 큰 혜택은, 공감이 사회적 존재가 되도록 돕는다는 점. 제임스 해리스는 "한 종의 구성원 간 상호협력이 진화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힘은 개인적 적응이나 적자생존보다도 더 중요했다. 공감은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고, 결과적으로 더 안전해지도록 도왔다. 대초원에서는 개개인이 따로 움직일 때보다 무리를 지어 생활할 때 생존가능성이 더 높았다. 또 인류의 조상이 나무위에서 땅으로 내려와서 수렵채집인이 되면서, 혼자 있을때보다 여럿이 결집했을때 사냥에 성공할 확률이 더 높기도 했다. 그리고 얼굴로 의사소통을 하면 손은 다른 수백만가지 유용한 일에 쓸 수 있기 때문에, 언어가 발달하기 한참전에, 수신호보다는 얼굴표정으로(공감의 신호)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먼저 터득했다고 추측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파악하는 능력은 특히 인간을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가자니가는 "동료가 썩어가는 가젤 시체를 먹고 역겨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그걸 본 사람은 먹어볼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되면 진화는 당연히 득이 된다." 고 설명. 보호하기 위한 작용임이 분명해 보인다. 역겨워하는 얼굴 표정을 보고, 그 감정을 지각하고, 실제로 자신도 역겨움을 느끼는 것은 모두 뇌의 동일한 특정 영역의 활동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기분좋은 향기를 맡은 걸 볼 때는 그와 같은 명확한 반응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좋은 냄새는 조심해서 살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 반면 고통은 역겨움과 마찬가지로 피해야 할 경험에 들기 때문에 우리 두뇌는 상대의 고통에도 반응한다. 다만 역겨움의 경우 당사자의 역겨운 느낌을 상대방도 똑같이 느끼지만, 다행스럽게도 고통은 보는 사람이 똑같이 느끼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누군가가 다칠 때마다 그걸 바라보는 사람의 심신이 피폐해질 것이다.
따라서 여러 측면에서 공감의 능력을 키운 우리 먼 조상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생존하고 더 잘 살았다. 마이클 트림블은 과학용어를 사용해서 "진화적인 선택은 동종의 감정상태를 신속하게 평가하는 뇌의 체계에 유리한 쪽으로 진행돼야 했다." 고 결론짓는다. 다시 말해 본성적으로 다른 이들과 공감하도록 굳어졌다는 뜻. 우리 각자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지가 벌써 10만년은 되었으니, 한동안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 전통주의자들이 받아들이기 가장 힘들어했던 변화는 훈련 프로그램의 핵심인 사후강평이었다. 당연히 아주 가치 있어 보이는 이 간단명료한 발상을 군대훈련의 주류문화로 받아들이는 데 그렇게 엄청난 투쟁이 필요했다는 것이 의아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교훈적이기도 함. 그리고 그 한가지 변화가 군 문화를 얼마나 깊고 넓게 변화시켰는지 생각하면 상당히 놀랍다. 웨스트포인트에서 리더십 교육 책임자로 있던 톰 골디츠 대령은 "말 그대로 육군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고 설명. 랠프 채텀도 이에 동의한다. 그는 글에서 "군인들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경중에 상관없이 사후강평을 거치게 되어 있다. 오늘날의 육군은 모든 계급의 전 구성원의 자기 성찰이 일상화된 유일한 대규모 조직이다."라 언급.
모든 훈련과 실제 전투 이후에는 관계자들이 모두 모여 벌어졌던 일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그런 과정이 사후강평 절차인데, 사후강평절차가 있다고 무조건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비밀은 그 적용방식에 있다.
* 사후강평은 훈련이 끝난 직후에, 그리고 가능한 경우는 훈련이 진행되는 도중에 진행
* 규모가 아주 큰 훈련을 제외하고는 관련된 모든 사람이 참석. 만일 적에 댛항해 싸우는 훈련을 했다면, 훈련이 끝난 뒤에 적군의 지휘관 역할을 맡은 사람들까지도 사후강평에 참석할 수 있다.
* 토론 내용은 훈련 목표를 얼마나 잘 달성했는가의 쟁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떤 계획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해냈는가?를 중심으로 이야기 나눔
* 토론에서는 병사, 지휘관, 부대의 세가지 관점에서 성과를 지속적으로 평가
* 사후강평은 집단의 성과를 점수로 평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점수로 평가하는 방식은 효용성이 거의 없다. 그보다는 강점과 약점을 확인해서 앞으로 의 훈련에 지침으로 삼기 위함.
* 토론은 잔인할 정도로 솔직해야 함. 이 조건은 위의 모든 조건을 합한 것보다 중요하다. 모든 이들에게 아무런 제약을 가해서는 안된다. 콜디츠는 이렇게 말한다. '이 과정의 진정한 열쇠는 바로 허심탄회한 의견나눔이다. 그건 사병이든 장교든 모두 마찬가지다. 이 시간에는 모든 이들이 모자를 벗고 참가하는데, 그 행동에는 깊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토론실 안에서는 계급이 없으며, 직설적 이야기가 오간다. 그래서 부하가 상관이 잘못 내린 결정을 직접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 사회성 기술은 펜트렌드가 아닌 아이디어 흐름이라고 표현한 패턴을 활성화화기 때문에, 집단 유효성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인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최고의 팀이 뛰어난 성과를 내는 데는 다른 그 어떤 요인보다 상호작용에서의 이 세가지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실제로 이 세가지 사회성 기술은 개인의 지능, 기술적 능력, 구성원들의 성격, 그밖의 모든 요인들을 다 합한 것만큼이나 중요했다.
큰 성공을 거둔 창의적 개인과 조직을 오랫동안 연구한 펜트렌드로서는 그런 패턴이 아주 익숙했다. 성공적 개인과 조직은 늘 그와 동일한 패턴을 보였기 때문. 집단을 연구한 이 연구에서 펜트렌드는 "집단의 성과는 구성원들이 아이디어를 거둬들이고, 그에 대한 반응을 이끌어냄으로써 또 다른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과정에 얼마나 능숙한지에 달려 있었다."고 정리. 그는 또 "집단지성 연구에서 사회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했던 역할은, 구성원들이 보다 많은 아이디어를 간략히 제시하고, 제시된 아이디어에 반응을 보이고, 공평히 참여하도록 이끌어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흐르도록 만드는 것이었으므로 사회성 기술이 가장 뛰어난 집단이 크게 성공하는 것이 당연했다." 고 설명. 이 연구로 사회성 기술의 운영상의 가치는 무엇이며, 사회성 기술이 집단을 어떻게 더 유능하게 만드는지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가장 유능한 팀을 만드는 구성원은 최고의 지식을 갖춘 사람일수도,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가장 뛰어난 관계노동자들인 것은 분명하다.
- 경제적 측면에서는 비논리적인 사회적 유대가 팀의 수행능력을 향상시키는 사례는 굳이 찾았던것이 아닌데도 의도치 않게 발견되기도 함. 9/11테러가 발생한 이후 정보과학위원회는 리처드 해크먼과 마이클 오코너에게 연구를 맡겨서, 정부의 정보분석팀 중에서 다른 팀들보다 유독 뛰어난 팀들의 비결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연구결과, 팀이 조직된 근본적인 기초가 인지적인디 아니면 사회적인지 여부가 가장 중요한 차이라는 사실이 발견됨. 연구원들은 "인지적 관점에서 출발한 팀은 개별 분석가를 중시한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을 기반으로 하는 팀은 동료들 간의 상호작용에 더 큰 무게를 둔다.: 고 설명. 그러므로 그 연구에서는 "그런 비교가 연구의 본래 목적은 아니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면서 그런 두 종류를 비교하는 데 연구 대부분을 할애한다.
다시 말해 애초에 팀을 이런 식으로 분류하려던 건 아니지만, 성과의 차이가 워낙 극명했기에 이렇게 구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회적 기반의 팀은 인지적 기반의 팀보다 30%나 높은 성과를 냈다. 그 이유 또한 마찬가지로 아주 명확했다. 바로 사회적 기반에서 굴러가는 팀의 불합리해 보이는 문화가 훨씬 넓고 깊은 상호작용을 야기하기 때문. 구성원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그에 따른 보상체계가 있는 것도 아님에도 서로 가르쳐 주고 도왔다. 연구원들은 예상치 못하게, 남을 돕는 행동이 이 연구에서 평가했던 그 어떤 요소들보다 팀의 유효성과 가장 관련이 깊었다고 보고한다. 즉 팀의 유효성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 사회적 민감성이었다는 다른 연구들과 마찬가지로 이 연구를 진행했던 연구원들도 사회적 요인의 중요성을 발견했는데, 이번에는 그 중에서도 특히 남을 돕는 행동이 핵심으로 작용했다.
- 이그지비트A는 스티브 잡스 밑에서 일하던 애플의 정예팀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잡스의 천재성과 독재적 경영 덕분에 애플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지만, 잡스는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최고의 팀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했는데, 성공한 회사에서 최고의 팀을 유지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회사가 성공가도를 달리면 보통 다른 회사들이 그 회사 임원들에게 더 높은 직책이나 연봉, 주요 역할을 제안하며 유혹하는데, 차마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 제안을 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2011년 8월에 잡스가 CEO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잡스 밑에서 13년 동안 한 팀으로 일해 왔던 여섯 명의 핵심임원은 매주 모여 몇 시간씩 머리를 맞댔다. 그런 사례는 애플 정도의 규모와 성공을 거둔 회사들 중에서는 사실상 유례가 없다.
이 팀이 쌓아올린 사회적 자산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특히 잡스를 포함해 그 누구도, 이 팀의 존재가 애플이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회사가 된 주된 이유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팀이 사회적 자산을 쌓지 못했을 때 일을 얼마나 그르칠 수 있는지 확인하려면 항공사의 경미한 사고를 기록한 통계를 살펴보면 된다. 관련 기록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랍다.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는 데이터로 기록된 사고의 73%가 처음으로 같은 팀으로 편성된 승무원들이 첫 비행에 나섰던 경우였다."고 9/11 테러 이후 정보분석팀을 연구한 경력이 있으며 집단에 대한 연구로저명한 리처드 해크먼이 부고. 승무원들은 팀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배치하면 항공사로서는 훨씬 효율적이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승객들로서는비행기를 타기가 망설여질 것임.
- "인간의 정신은 어떤 주체를 찾아서 그 주체에 개인적 특성이나 의도를 부여할 준비가 되어 있거나 더 나아가 그런 경험을 고대하며, 자기가 목격한 주체의 행동을 개인적 성향의 표현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살펴보려는 관점에서 극히 중요한 논점은, 바로 그런 성향이 우리의 천성이라는 사실. 20세기에는 대체로 그런 주장에 반박하는 목소리가 컸다. 우리는 각자 성장한 문화 등의 영향에서 배운바를 토대로 동기를 발견하고 인과관계를 따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카너먼은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성향을 갖고 태어났다. 만 한 살도 안되는 유아들도 남을 괴롭히는 사람과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을 구별한다. ..."라고 설명. 우리는 선천적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성향이 배어 있으며, 사람들은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이 세상을 그런 이야기가 모인 곳으로 보려고 한다.
- 창조는 본질적으로 특별하거나, 신비하거나,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기술이라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현재 창조력이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창조력은 키울 수 있다. 기술이란 본질적으로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 그런데 그런 주장을 펼치다 보면 다른 그 어떤 기술과 마찬가지로 컴퓨터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의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고, 결국에는 인간보다 더 창조적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가치 높은 창조활동이 인간의 영역으로 남을 이유는 신비하고 설명하기 힘든 창조의 본질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함.
신비로움을 유일한 근거로 제시하는 주장에는 통상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창조를 신비로운 능력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창조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활동이며, 앞서 살펴본 여러 이유에서 창조는 인간의 내재적 본성이므로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해 나가야 마땅하다고 설명하는 편이 옳다. 다른 방법으로는 창조를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는 가장 중요한 인간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 그러므로 타인과의 협력을 통해 혁신하는 인간의 능력은 기술이 우리 앞에서 포효하는 와중에서도 계속해서 높은 가치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