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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의 짧은 역사

사회 2025. 3. 30. 16:46

- 이 책에서 우리는 가장 가난한 하위 50%를 민중계급, 그 다음 40%를 중위계급, 나머지 가장 부유한 10%를 상위계급이라 지칭할 것이다. 균질하지 않은 상위계급 내에서도 (하위 9%에 해당하는) 부유한 계급과 (상위 1%에 해당하는 지배계급을 구분하기로 한다. 간단히 요약해 말하면, 민중계급은 적은 금액의 은행예금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다르게 중위계급의 자산은 주로 주택에 집중돼 있으며, 부유한 계급의 자산은 주택과 사업자산, 금융자산으로 나뉘어 있다. 반면 지배계급의 자산은 생산수단(사업자산, 주식, 유가증권 위주)에 집중됨. 계급분류에 사용한 이 용어들은 분명한 의미를 전달해 주지만 결코 고정되어 있거나 경직된 개념이 아님. 현실에서 계급적 정체성은 항상 유연하고 다원적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 계급적 정체성은 결코 화폐적 등급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회계급은 생산수단과 주택의 소유, 그리고 이 소유의 규모뿐 아니라 소득과 학력, 직업, 활동분야, 나이, 젠더, 출신 지역과 국가, 더러는 종족/종교적 정체성에 의해 결정됨. 그리고 이것이 결정되는 방식은 사회역사적 맥락에 따라 유연하고 가변적임.

-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중간계급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었다.  하위 50%와 상위 10% 사이에 있는 40%가 하위 50% 못지않게 가난했기 때문. 그런데 20세기말과 21세기 초에 오면, 물론 개개인으로 보면 엄청나게 부자는 아니지만 궁핍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로 중위 자산계급이 만들어지고(이들은 성인 1인당 대략 10만-40만 유로의 자산을 보유), 이 집단이 전체 자산에서 차지하는 몫은 40%라는 상당 수준에 이르게 됨. 이는 상위 1%가 차지하는 몫(24%)의 거의 두배에 해당하는 규모인데, 1차대전 발발 직전 이들의 점유일(13%)이 상위 1%의 점유율(55%)의 1/4~1/3에 그쳤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다. 이 변화를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자. 집단 전체를 놓고 말할 때, 한 세기 전에 지배계급보다 3배 더 가난했던 중위계급이 오늘날은 2배 더 부유하다고 말할 수 있다. 소유의 집중은 시대를 막론하고 한 번도 극단적이지 않았던 적이 없다. 하지만 이런 전반적 경향 속에서도 집중이 뚜렷하게 꺾이는 추세는 관찰된다. 이 두가지 진단은 상호 모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모두 사실이다. 이같은 세계의 복잡성이야말로 우리가 물려받은 역사적 유산의 일부이기도 함.
이런 불평등의 감소는 전쟁과 경제위기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내내 실행된 새로운 사회정책과 조세정책의 결과. 사회적 국가, 교육과 의료를 비롯한 기초적 재화의 접근에서 실현된 일정 정도의 평등, 그리고 상위소득과 자산에 대한 강력한 누진세 적용이 바로 그 내용이다. 강력한 사회적, 정치적 투쟁이 이끌어낸 이같은 근본적 변화들이 앞서 언급한 법제도 및 소유권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들인 물론 평등의 확대 또한 이루어냈다. 이 여정을 앞으로 계속하는 게 바람직한가? 바람직하다면, 어떤 방법으로 해나가야 할까? 나는 이 평등을 향한 여정이 여러 면에서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이 사회적, 경제적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얻어진 생산성 증대와 집단의 번영도 당연히 그 효과 중 하나일 것이다. 전체 소유에서 차지하는 몫이 대폭 줄었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지출과 투자능력은 19세기이후 급격히 감소. 하지만 이 감소분은 부상한 중위 계급과 이들만큼은 아니지만 민중계급에 의해 상쇄되고도 남았다. 현재 불평등 수준에 만족해야 하며, 하위 50%가 전체 부에서 차지하는 몫이 5%에 불과한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결코 견고한 역사적 경험에 기반한 생각이 아니다. 평등을 향한 여정은 앞으로 계속되는 게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를 좀더 강화해야 할 것이다.

- 케네스 포메란츠는 2000년 출간한 유럽과 아시아의 대분기를 다룬 저작에서, 세계적 차원의 원자재 공급가 노동력 동원이 없었다면 서구의 산업발전은 단시간에 대규모 생태적 제약에 봉착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 그는 특히 18세기말부터 19세기까지 영국을 필두로 유럽국가들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이 세계 다른 지역에서 행한 대규모 원료(특히 면화)와 에너지자원(특히 목재) 수탈에 기반했다는것, 그리고 이 과정이 식민지배를 통해 강제적이고 조직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포메란츠가 보기에 1750-18900년 무렵에는 중국과 일본의 가장 발전한 지역들이 서유럽의 비슷한 지역들과 발전 수준에 차이가 없었고, 사회-경제 구조도 상당히 유사했다. 양쪽 모두 지속적 인구성장과 (경작기술 향상과 개간/버목을 통한 농경지 면적의 증대덕에 가능해진) 농업발전이 진행중이었고, 직물산업을 중심으로 프로토산업화와 자본축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포메란츠의 분석에 따르면, 핵심적 두가지 이유 때문에 1750-1800년부터 양쪽이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게 된다. 첫째, 유럽에서 벌목으로 산업발전에 심각한 제약이 발생한 상황에서 잉글랜드에서 풍부한 석탄 매장지가 확인된 것. 그러자 목재가 아닌 다른 에너지원으로 빠르게 눈을 돌렸고, 관련 기술도 일찍 발전하기 시작. 둘째, 유럽국가들의 조세재정능력과 군사능력의 발전이 국제노동분업과 수익성 뛰어난 공급망 구축을 가능하게 함. 당시 유럽국가들이 지닌 조세재정능력과 군사력은 주로 오래전부터 벌인 경쟁의 산물이었는데, 여기에 국가간 경쟁에서 비롯된 기술혁신과 금융혁신까지 더해지며 강화됨.

- 벌목고 관련해 포메란츠는 유럽이 18세기 말에 탈출구 없는 생태적 제약에 봉착하기 직전이었다는 점을 강조. 영국과 프랑스, 덴마크와 프로이센,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모두에서 몇 세기동안 숲이 급속도로 사라져, 1500년 무렵에는 전체 면적의 대략 30-40%를 차지하던 것이 1800년에는 10%에 불과. 초기에는 아직 숲이 울창한 동유럽이나 북유럽 지역들과의 교역을 통해 목재부족분을 부분적으로 메울 수 있었지만, 곧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해짐. 비슷한 시기인 1500-1800년 동안 중국에서도 벌목이 점차 늘어났지만 상황이 유럽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당시 중국의 발전한 지역들과 숲이 울창한 내륙지역들간에 좀더 강력한 정치적, 상업적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

- 유럽은 아메리카의 발견과 아프리카와의 삼각무역, 아시아와의 교역을 통해 그런 제약들을 타개해나가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북미와 앤틸리스 제도, 남미로 데려온 노동력이 생산한 원료(주로 목재, 면화, 설탕)는 식민지배자들의 이윤창출과 1750-1800년 무렵부터 급성장한 섬유산업에 쓰였다. 군사력을 이용해 장거리 해상운송로를 장악한 것도 원거리 지역과의 상호보완성 강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영국은 플랜테이션에서 가져온 목재와 면화로 섬유제품과 공산품을 만들어 북미에 수출했고, 여기서 번 돈을 다시 앤틸리스 제도와 현재 미국 남부에서 일하던 노예들의 식량구입에 사용. 18세기에 노예들이 입던 옷을 만든 천의 1/3이 인도에서 온 것이었다. 또한 아시아에서 물건(직물, 비단, 차, 도자기 등)을 수입해 오는데 필요한 돈의 상당부분을 아메리카에 수출해서 번돈으로 충당. 포메란츠의 계산에 따르면 1830년 무렵 영국이 해외 플랜테이션에서 들여온 면화와 목재, 설탕의 양은 100만 헥타르 이상 경작지의 생산량에 해당했고, 영국 전체 경작지 생산량의 1.5-2.0배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렇게 식민지를 통해 생태적 제약을 극복할 수 없었다면 다른 곳에서 공급원을 찾아야 했을 것임. 물론 유럽이 자급자족으로 똑같은 산업발전을 이루었을 시나리오가 역사적, 기술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엄청난 상상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 가령 랭커셔 영국인 농부들이 관리하는 비옥한 면화 플랜테이션의 모습을, 맨체스터 인근의 하늘 위로 쭉쭉 뻗은 아무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 세계의 이야기,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 세수관련 자료에 따르면 150-1800년 사이에 유럽국가들과 비유럽국가들 사이에 대분기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600-1650년 동안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세수가 미미했다. 하지만 유럽국가들이 부강해지는 1700-1750년 무렵부터 뚜렷하 격차가 나타나기 시작. 18세기 말고 19세기 초, 중국과 오스만 제국의 세수는 여전히 도시 노동자 임금의 2-4일치(국민소득의 1-2%)에 해당했다. 같은 시기 주요 유럽국가들의 세수는 15-20일치 임금(국민소득의 6-8%)에 해당. 데이터가 얼마나 부정확한가와는 별개로 격차는 분명 존재하며, 이는 커다란 변화가 틀림없다. 국민소득의 1%만을 세금으로 걷는 국가는 사회를 동원할 수 있는 권력과 역량이 극히 제한적임. 달리 말하면, 이런 국가는 스스로 유용하다고 판단하는 국가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국민의 1%밖에 동원할 수 없다. 따라서 종종 자신의 영토 내에서 재화와 사람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도 벅차 지역 엘리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음. 이와 달리 국민의 6-8%를 국가에 복무시킬 수 있는 국가는 특히 질서 유지와 대외적 군사적 야망 실현에 훨씬 더 막강한 능력을 갖게 됨.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똑같이 약한 국가였을 때는 어떤 의미에서 균형이 존재했다. 그런데 다수 유럽국가가 좀더 우월한 조세재정능력과 행정능력, 군사력을 갖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역학이 작동하기 시작.

- 보호무역주의는 유럽의 부강에만 핵심적 역할을 했던 게 아니다. 역사 속 성공적 경제발전의 경험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보호무역주의가 작동한 것을 알 수 있음. 19세기말 이후 일본, 20세기 중반 이후 한국과 대만, 그리고 20세기 말과 21세기초 중국이 그 대표적인 경우. 이들 국가는 타깃화된 보호무역주의를 통해 자국이 중점 육성하는 산업들에서 전문성과 노하우를 축적하는 동시에, 막 자리를 잡아가는 이 분야들에 외국 투자자들이 지배권을 가지게 될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 이 국가들은 특정 품목에서 절대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고 나면 그때부터 자유무역주의를 외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뒤처진 나라들은 종종 이들에게 장기적으로 종속되게 되었다. 세계 체제와 중심부-주변부 관계에 대한 월러스타인의 연구는 자본주의 긴 역사 속 다양한 예들을 통해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 그런데 18세기와 19세기 유럽의 약진에서는 한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됨. 당시 유럽국가들은 안팎으로 대항세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일방적 무소불위의 군사력을 휘둘렀다는 사실. 최초의 유럽무역회사인 영국 동인도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사병을 동원해 인구전체를 폭압적으로 통제한 초국적 무장강도집단이나 다름 없었다. 아편전쟁의 역사는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둠. 18세기 초반에 들어 그때까지 중국, 인도와의 무역수지 균형을 맞춰주던 아메리카의 은이 고갈되자 유럽인들은 불안해지기 시작. 두 거대 아시아 국가에서 비단, 직물, 도자기, 향신료, 차를 수입해 오면서 대신 팔 만한 물건이 더는 없어진 것. 그러자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아편재배를 늘려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 이렇게 해서 18세기에 아편거래 규모가 크게 증가했고, 영국동인도회사는 1773년 벵골에서 아편생산과 수출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함.

- 특권과 지위의 불평등은 사라졌는가?
계몽주의 시대와 대서양혁명들 이후 서구사회에서 법적 평등이 완전히 확립되었다는 동화같은 믿음이 꽤 널리 확산돼 있다. 이 믿음의 중심에 있는 결정적 사건이 바로 프랑스 혁명과 1789년 8월 4일밤에 이루어진 귀족계급의 특권폐지다. 하지만 현실은 당연히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미국과 프랑스 공화국은 1960년대까지도 엄연히 법적 차별이 존속한 노예제 공화국이고 식민공화국이었다.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군주제 국가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세계도처의 기혼여성들은 60-70년대가 되어서야 배우자의 법적 후견에서 벗어나 형식적으로 평등한 법적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18세기 말에 터져 나온 권리의 평등에 대한 요구는 사실상 백인남성들 간의 평등, 그중 특히 백인 남성 소유자들간의 평등에 대한 요구였음.

- 1789년 8월 4일 밤에 일어는 특권폐지는 결정적 사건임에는 틀림없으나, 우리는 이를 평등을 위한 아직 끝나지 않은 긴 투쟁의 관점에서 보아야 함. 7월 14일 바스티유가 함락되지 않았더라면, 아니 1789년 여름에 영주들과 그들의 성을 공격해 토지소유증서를 찾아내 불태운 농민반란이 없었더라면, 8월 4일 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 그해 여름 농민발안이 일어났기에 파리에서 소집된 의회가 저주의 대상이 된 봉건제도를 폐지하겠다는 신속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따져보면 그 여름의 반란 역시 분권된 통치세력이 갈수록 통제력을 상실해가는 상황에서 수십년간 일어났던 무수한 농민반란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788년 여름에는 토지와 공공재화를 점유하고 토지소유자들을 공격하는 등 봉기에 가까울만큼 분위기가 들끓자 마침내 삼부회 선출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짐.
한 가지 주목해야할 점은 1789년 조세, 정치, 법률상의 특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나서도 프랑스 귀족들이 한참 더 소유자계급으로서의 특권과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는 사실. 파리 상속문서들에 등재된 성을 분석한 결과, 우리는 19세기 파리인구의 고작 1%를 차지했던 귀족들이 1830-40년대 상위 자산가의 40-45%를 차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비중은 프랑스 혁명 직전과 비교해 아주 약간 낮아진 것에 불과. 1880-1910년대에 가서야 비로소 상위 자산가 중 귀족이 차지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 이토록 변화가 더딘 이유는 여러가지로 설명된다. 1789-1815년 동안 가까운 유럽 군주제 국가들로 망명했던 귀족들이 1815년 대거 귀국해 당시 프랑스 납세 유권자 군주정이 베푼 각종 혜택을 누렸기 때문.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이미자를 위한 10억 이라는 상징적 법이다. 이 법에 따라 프랑스 혁명 당시 상실한 토지와 임대료에 대한 보상명목으로 돌아온 귀족들에게 막대한 금액이 지급됨(국민소득 15% 해당) 왕정복고 직후부터 논의가 시작된 이 법은 샤를 10세 치하였던 1825년 빌렐 백작의 주도로 채택됨.

- 지난한 과정을 거쳐 사라진 강제노동과 반강제노동
결과적으로 프랑스 혁명은 귀족계급의 특권을 폐지하는 대신 소유자들의 권리를 강화해줌. 따라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반쪽의 성공이었다. 물론 영주들의 전횡에서 벗어났고, 모든 시민을 똑같이 대우하는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사법시스템이 작동한다는 것은 실질적 진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상위 1% 자산가들, 다시 말해 귀족과 부르주아들에게 소유가 집중되는 현상은 1780-1800년에도 크게 개선되지 않음. 오히려 1800-1910년 돋안 더 심화되기까지 했다. 결국 자산 하위 50%의 입장에서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 우리는 프랑스와 유럽 사회에서 노동의 지위가 변해가는 지난한 과정속에 프랑스 혁명을 놓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와 영국 농촌에서는 프랑스 혁명 발발 몇세기 전에 이미 농노제가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는 14세기 중반에 발생한 흑사병이 자주 언급됨. 흑사병 때문에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귀해지고 사회제도가 붕괴하자 농노들의 영지이탈과 해방에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것. 하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 같은 설명은 지나치게 도식적이라고 지적. 결국 개별 지역의 권력관계와 사회정치적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 가령 유럽대륙 동쪽에서 14세기 이후 농노제가 강화돼 19세기까지 존속하다 뒤늦게 사라진 것이 그런 예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일부 낙관적인 중세학자들은 기독교 삼기능 이데올로기가 예속노동의 점진적 폐지에 끼친 긍정적 역할을 부각하기도 함. 유럽대륙 서쪽에서 예속 노동이 점차 끝나고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존재하는 하나의 노동자 계급올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삼기능 이데올로기 때문이며, 이런 과정은 이미 흑사병 이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물론 부분적으로 맞는 설명일 수도 있지만,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가용자료만을 가지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다.
확실한 것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도 생클로드 수도원 같은 곳에는 농노제 경작토지가 존재했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에야 노동을 위한 이동에 가해지던 제약이 완전히, 그리고 영구적으로 철폐되었다는 사실이다. 부역이란 용어는 1789년 프랑스 농촌에도 흔하게 존재했다. 당시 농민들은 전반적으로 이동의 자요가 있었지만 영주를 위해 며칠씩 무보수 노동을 해야 했다. 이런 형태의 부역은 프랑스 혁명기간에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놓였다. 프랑스 혁명기간 중 평등과 재분배가 가장 잘 구현된 1792-94년 동안 국민의회는 부역이라는 이름 자체가 농노제와 봉건제의 뿌리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를 8월 4일 밤 폐지가 결정된 귀족의 특권 중 하나로 간주해 보상 없이 폐지할 것을 요구. 이렇게 해서 일부 가난한 농민들은 자신들의 노동의 결과물과 자신이 경작하던 땅에 대한 완전하고 전적인 소유권을 갖게 됨. 하지만 1789-91년을 포함한 혁명기 대부분 동안, 그리고 다시 1795년에 납세 유권자 원칙이 부활하면서부터 좀더 보수적 인식이 자리 잡는다. 부역은 기본적으로 임대료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마따잏 그렇게 불려야 하며, 다른 결정을 하면 결과적으로 소유 체계를 뒤흔들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렇게 해서 봉건제도의 부역은 자동적으로 자본주의식 임대료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주당 1일의 부역은 수확한 농산물의 1/5 혹은 1/6에 해당하는 임대료가 되었다.

- 1914-80년 동안 일어난 대규모 재분배는 손 안대고 코풀기가 아니었다. 디너파티는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가정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들을 남겼다. 가장 큰 교훈은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가 자본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라는 점이다. 이 두제도가 대대적인 집단행동과 집단적 전유의 대상이 될 때만 평등을 향한 여정은 재개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 두제도가 20세기 동안 이룬 성취의 한계와, 80년 이후 이것들이 약화된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 1914-80년 동안 제도적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사회적, 정치적 투쟁이었음. 앞으로도 강력한 사회적 투쟁과 집단행동 없이는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없을 것임. 레이건-대처 혁명이 80년대 이래로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단순히 지배계급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미디어와 싱크탱크, 정치자금을 통해 막강하고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그것도 분명히 역할을 하긴 했지만, 결정적 이유는 평등주의 연합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 평등주의 연합은 설득력 있는 대안적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를 중심으로 막강한 민중의 집단행동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런 서사를 다시 만들어내고,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체제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제도들의 완결된 형태는 바로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분권화, 자주관리, 환경주의, 다문화에 기반한 민주적 사회주의는 지금의 세계보다 더 해방되고 평등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 완결된 형태의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는 권력과 소유의 항시적 순환에 기초해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자주관리적, 분권적 사회주의의 기반을 닦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 제도는 20세기 서구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사회, 조세, 법률상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실험한 국가적, 중앙집권적,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 변화들을 물론 권력관계의 변화와 민중의 집단행동, 수차례의 갈등과 위기를 거쳐 힘겹게 쟁취한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한 민주적 사회주의는 하나의 밑그림에 불과하며, 여러 단점과 한계를 내포. 가령, 생산수단과 주택의 사적소유룰 제한한 형태로 계속 허용하게 되면, 앞서 언급한 변화들이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고 부의 격차를 엄격히 제한하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 일각에서 과세포를 수정하고 제한을 없애려는 막강한 시도가 있을 것이기 때문. 이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지만, 결코 도구화해서는 안됨. 바로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20년대에 소비에트 정권이 모든 형태의 소유를 자본주의의 종양이라는 이름으로 범죄시했고, 결국 우리가 아는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파행을 맞지 않았던가. 해답은 민주주의 강화와 확대에 있다. 우리는 소유의 재분배를 해야 하며, 부자들에 의한 선거 민주주의 독식을 막기 위해 정치활동, 언론, 싱크탱크 등에 대한 평등주의적 재정조달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앞서 우리는 소유의 재분배와 권력의 분유를 위해 실질적 개헌이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더해 한가지 보호장치를 더 마련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가령, 사회보장 분담금을 사회보장기금에서 관리하듯이, 누진 소유세와 누진 상속세 세수를 모두를 위한 상속기금에서 관리하게 하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을 살펴보면 이렇게 행정조직을 강화하는 것이 결정을 번복하려는 정치인들의 시도를 어렵게 만드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정치인들이 더는 슬그머니 복지혜택을 없애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 평등을 위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따. 이 투쟁은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 실질적 평등, 차별철폐를 극대화하면서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계경제 시스템의 구조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식민주의 시대의 종언으로 평등을 위한 여정이 시작됐지만, 경제계는 여전히 극도로 위계적이고 불평등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자본이 사회적 환경적 목표를 갖지 않은 채 통제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하는 현재의 경제체제는 부자들을 위한 신식민주의와 다름없다. 이런 발전모델은 정치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용납할 수 없다. 현 체제의 극복은 민족단위의 사회적 국가에서 개도국을 향해 열려 있는 연방단위의 사회적 국가로 전환할 때만, 현재 세계화를 좌지우지하는 각종 규정과 조약들에 대한 대대적 수술이 있을 때만, 가능해질 것이다.

- 공적자본의 평균비중 30%라는 수치 뒤에 감춰진 자산 범주별 차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주택용 부동산은 거의 대부분 사유화됨. 2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정부와 기업이 소유한 주택보유고는 5% 미만. 은행을 통한 저축 가능성이 제한적이고 공적 연금 시스템의 재정이 부족하다보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국 가정들에게 주택은 최고의 투자대상이 되었고, 이는 결국 부동산 가격폭등을 불어옴. 부동산과 달리 기업의 자본은 여전히 상당부분 정부가 소유. 중국정부는 현재 기업총자본의 55-60%를 소유. 05-06년 이후 이 비중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국가가 생산시스템을 밀착 통제하고 있다는 의미. 특히 대기업에 대해서는 정부의 통제가 더욱 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기업의 자본 중 외국인 투자자의 보유비중이 현격히 감소하고, 이 감소분이 중국 가계의 보유분 증가로 상쇄되고 있다. 

- 중국식 체제는 다른 강점들도 있다. 기후재난이 발생하면 중국은 거리낌없이 서양에 책임을 묻고 비난할 것임. 자신들이 노예제나 식민지배 없이도 산업화를 이루어냈음을, 오히려 자신들은 그것들의 피해자임을 중국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상기시킨다. 틈만 나면 전세계에 정의와 민주주의를 가르치려 들지만 정작 체제 내부를 갉아먹는 불평등과 차별은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선진국들, 이익만 되면 언제라도 전제주의 통치자들과 올리가르히들과 손을 잡는 타협적인 선진국들, 그러면서도 늘 오만하기만 한 선진국들을 상대로 중국은 유리한 입장이 될 것이다. 여러 측면에서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가 중국식 권위주의적 국가사회주의의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환경적이고 포스트신민주의적인 이 새로운 사회주의는 마침내 후진국들의 운명을 고민하고, 서구국가들의 불평등과 위선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이런 중국의 변화는 동력을 상실한 신자유주의에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자유쥬의의 쇠퇴는 08년 금융위기와 20년 팬데믹 위기로 가속화되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규제완화를 통해 경기부양을 달성하겠다는 레이건주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 중간계급과 민중계급은 그동안의 달콤한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자 세계화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당연히 신자유주의가 다양한 형태의 신민족주의로 대체될 가능성이다. 가령 트펌프주의와 브렉시크, 튀르키에, 브라질, 인도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의 득세는 형태는 달라도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국가적 불행의 책임을 외국인과 국내의 다양한 소수집단들에게 들린다는 것. 트펌프주의의 실패는 정체성 충돌의 격화와, 부자들과 대규모 환경오염 유발자들을 위한 사회적 덤핑이나 조세덤핑을 초래할 그런 정치적 흐름의 한계를 고스란히 노출했다. 이런 신민족주의적 흐름들은 현재 세계가 부닥친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중국식 권위주의적 국가사회주의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중국식 모델 역시 민족주의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긴 하지만, 최소한 당분간 강력한 공권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표를 실현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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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30

Quote of the day 2025. 3. 30.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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