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업이 인간을 묶어놓기전에 수렵채집인들은 퍼져나갈 수 있는 선택권을 갖고 있었음. 다른 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분열-융합은 인간사회 내부의 경쟁을 완화하고 같은 땅에 발붙이고 사는인구수를 늘려주었다. 동시에 그 덕분에 각각의 개인은 특별한 타인들과 어떻게, 또 얼마나 상호교류할지 가려낼 수 있었다. 침팬지는 분열-융합에서 융합의 측면을 충분히 활용해 멀리 떨어져 있는 구성원과 단결하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인간은 먼 거리에서도 서로의 소식을 계속 접할 수 있었던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초기 사회에 살았던 사람들은 소리를 질러 소식을 알리기에는 보통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연기를 피우거나 북소리로 신호를 보내거나 하기 위해 기발한 장치가 필수적이었다. 모스 부호가 뉴스를 실시간으로 전송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장거리 통신방식에는 기술적 한계가 있었다. 이처럼 선사시대에 사용된 여러 신호도 문자로 '안녕'정도의 정보만 전달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초기기록들을 보면 수렵채집인들이 소통을 아주 잘했다는 단서들이 가득함. 특히 비상시에 그랬다. 순회를 돌던 전령이 어쩌면 당시의 조랑말 속달우편에 해당했는지도 모른다. 달리기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사람의 몸은 지구력이 뛰어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을 이용해 목마른 주민들은 마지막 물웅덩이로 모여들었고, 누구든 사냥감이나 적을 우연히 만나면 다른 구성원들을 끌어들여 함께 만찬을 즐기거나 맞서 싸웠다. 유럽인들이 호주 원주민들과 처음 접촉했을 때, 1623년 4월 18일에 네덜란드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이 남자 하나를 납치했다. 다음 날 그들은 200명의 호주원주민들이 휘두르는 창을 맛보아야 했다. 소문이 대단히 빨리 퍼진 모양이다.
- 노예개미가 노예만들기 개미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 별것 아니다. 개미 뇌의 진짜 적응력은 지금부터다. 사회붕괴를 피하려면 각각의 노예와 노예만들기 개미가 둥지에 있는 다른 노예개미들까지 모두 환영해야 한다. 노예만들기 개미들이 아무리 다양한 군집을 털어서 노예를 납치해 왔다 하더라도 말이다. 각각의 개체가 만들어내는 냄새가 모두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노예만들기 개미나 노예개미 모두 다른 개체들을 자기 사회의 구성원으로 알아보는 데 전혀 문제를 겪지 않음. 이런 적응성의 밑바탕에는 개체와 유대감을 키우는 역할을 하지만, 전문가들의 추측에 따르면 개미에서의 몸 손질은 둥지 동료들의 냄새를 뒤섞어 모두의 몸에 표준적 냄새가 배게 만듦으로써 사회수준의 애착관계를 굳혀주는 역할을 한다. 즉 노예만들기 개미의 냄새 일부가 어린 노예개미들에게 묻어 그들을 군집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게 만들고, 노예개미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개체의 냄새를 조금씩 바꾸어놓는 것이다. 이렇게 냄새가 혼합되는 것은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진다. 노예개미가 실수로 자신의 진짜 동료와 자매가 살고 있는 고향군집에 발을 들여놓으면, 적으로 간주되어 공격을 받는 것이다.
- 개미둥지에 개미가 추가되는 것처럼 한 국가에 국민이 더 늘어나도 뇌에 추가적으로 부담이 가해지지는 않는다. 익명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정체성 표지를 사용함으로써 낯선 이도 우리 구성원 중 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났다. 대륙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함을 자랑하기도 하는 현대인간사회의 밑바탕에는 이런 상상력의 힘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소규모 사회에서도 마찬가지. 그들은 실제로도 당신이나 나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때의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
- 밴드는 노골적으로 허세를 부리거나 타인을 지휘하려는 시도가 있으면 역전된 지배위계라는 것을 통해 진압했다. 자기중심주의자, 권력에 굶주린 자, 괴사라는 자를 멈추게 하기 위해 대다수가 결탁한 것이다. 아무리 엄격한 영장류의 위계질서를 물려받았다 해도, 우리 선조들은 밴드 안의 그런 시도를 다나합된 행동으로 물리쳤다. 침팬지나 점박이 하이에나가 기분나쁜 개체를 집단공격하는 경우를 보면, 그와 비슷한 전략이 아주 원초적 형태로 드러남. 지배의 역전이 성공이 보장된 일은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성공적인 독재자들도 결탁을 한다는 사실으르 비싼 경험을 통해 알게 됨. 거친 아이들끼리 서로 편을 먹고 학교 운동장을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파워게임을 통한 성공은 한계가 있다. 인류학자들은 수렵채집인들이 발로 투표했다고 표현한다. 한 밴드에서 시련을 겪으면 다른 밴드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밴드를 정치적으로 통제할 방법은 없었기 때문에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다.
어느 누구도 집단을 지배하지 못하고, 집단은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길 거부했기에 밴드 전체에 평등이 확립됨. 동물 중에서도 평등주의를 실현한 선례가 있다. 프레리도그, 큰돌고래, 사자의 경우 지도자가 없고, 지배도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침팬지는 우두머리 수컷이 아무리 배려심이 많아도 그 밑에서의 삶은 아주 힘들 수 있다. 지위가 낮은 수컷 침팬지들이 권력을 위해 경쟁하기 때문.
- 수렵채집인의 평등주의도 완전한 동등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특히 가족 안에서 평등주의가 항상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고, 일부 아버지는 가족 안에서 항상 철권을 휘둘렀다. 그리고 물질적 부에서는 차이가 거의 없었지만 외교적 수완이나 다른 기술에서의 노련함의 차이 때문에 불평등이 생겨났다. 이런 면에서는 사자가 떠오른다. 사자는 지배위게가 없는 평등주의 종이지만 사냥감을 두고는 다툰다.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지 결과의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에서 이것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절대 없다. 사회인류학자 도널드투진은 이렇게 말했다.
적어도 미국인들에게 평등주의는 온화한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사슴가죽 옷을 걸친 투박하면서도 예의바른 개척자들이 모두의 이이을 위해 조화롭게 함께 일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반대다. 보통 평등주의는 다소 야만적인 독크린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평등한 상태를 유지하력 분투하는 와중에 끊임없는 경계와 음모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남에 대해 험담하는거이 인간의 아주 원초적 재능으로 간주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평등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육아, 요리, 사냥 등의 영역에서 성별과 나이에 따라 요구되는 것이 계속 변하기 때문. 하지만 부시먼족의 경우 대부분 각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었고 특히나 성적으로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보다 더 평등했다. 밴드사회에서는 쟁점이 발생하면 합의에 의해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관련된 모든 사람이 목소리를 냈다. TV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분명 이것이 유흥의 주요원천이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국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가 말한 "논의에 의한 통치"의 원본이라 할거이다.
불화를 없애는 것이 일차적 관심사였다. 밴드구성원들은 행동을 규제할 공식적 방법이 거의 없었지만 사람에게 허용된 행동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행동을 권리로 생각함. 어떤면에서 보면 이런 규칙에 동질감을 느껴 올바른 행동을 하고 집단의 중요한 문제에 참여하는 것이 시민의 자질을 보여주는 척도였다. "우리의 법이 진짜 법입니다" 한 왈비리족 사람들이 한 말에서 법은 자기들의 도덕률을 의미한다.
- 사실 인간이 밴드사회의 평등주의적 생활방식을 확대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의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옥신각신 다투는 일이 많기 때문. 록 콘서트가 사회적 엔트로피로 이어질 수 있듯이, 대규모 회합은 결국 난동으로 막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시기에는 살인사건 발생이 정점을 찍는다. 밴드들은 원래 이었던 곳으로 물러나고, 다른 곳에서 살던 친구들이 밴드에 새로 합류하면서 일종의 의자뺏기 놀이가 일어남. 소설가 살만 루슈디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로운 사회는 움지이는 사회다. 그리고 움직임에는 마찰이 따른다. 방랑생활을 하던 수렵채집인으도 마찬가지였다.
- 수렵채집인 정착지에는 조직화된 정부의 지도자 같은 사람은 없었어도 영향력 있는 사람은 있었다. 예를 들어 에클레스산 주변 어부 민족 우두머리를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았고, 전쟁을 선포하고 약탈품 중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신세계에서 왕에 제일 가까운 통치자는 칼루사족 추장이었다. 그는 한 건물 안에서 의자에 앉아 치안을 유지했다. 그 의자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소박한 것이었지만 그 건물은 한 역사가에 따르면 2000면이 들어와도 붐비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추마시족과 태평양 연안 북서부 집단의 추장들은 대단히 호사스럽기는 했지만 자신의 권력을 그리 강하게 내세우지는 않았다. 이들은 군대를 등에 업은 큰 농업사회이 우두머리들에 비해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의무를 다하도록 북돋기 위해 강압하기보다는 잔치를 벌이는 등 설득과 보상에 더 크게 의지. 리더들은 정치적 공작이나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지키는일에는 언제나 달인이었다. 하지만 추장들은 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보여야 할 겸손, 도덕성, 확고한 신념 등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범을 보이는 경우도 많았음. 이런 것들은 오늘날에도 존경받는 리더의 자질이며, 평등주의 시대가 남긴 유산인지도 모른다. 추장들은 사람들에게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평등주의적 마음가짐이 유지되도록 했다. 하지만 이때도 그들의 영향력은 제한되어 있었다. 리더와 추종자 사이의 끝없는 밀고 당기기 속에서 작은정착지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추장을 지지했다. 태평양 연안 북서부 추장들은 마을 생활의 평범한 측면에 대해 발언권이 있는 비공식 자문위원회의 지지를 구했다. 이것은 위원회를 통한 리더십이었다. 유랑사회에서 밴드 전체가 감당했던 역할을 위원회가 맡은 것이다.
- 각 사회를 구분해주는 미술과 장식, 언어와 활동의 멋진 불협화음은 점점 더 정교해졌다. 이 모든 다양성의 기원은 우리 종의 시작과 함께 발생한 익명사회로의 근본적 전환시기, 혹은 그보다 이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감. 인간사회가 이용한 표지들은 오늘날의 침팬지와 보노보에서 여전히 보이는 것가 비슷한 행동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제일 먼저 암호가 있었을 것이다. 그 뒤로 몸 전체를 하나의 캔버스 삼아 소속성을 표현한 표지들이 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고학적 자료에 그것들이 흔적은 거의 엇다. 수만 년 전 인구가 증가하고 상호교류가 충분히 이루어지면서 집단기억과 집단생산이 가능해졌고, 그와 동시에 매우 정교한 사회적 특성이 만들어짐에 따라 사회는 더욱 복잡해졌다.
- 다른 영장류의 개체 알아보기 사회로부터 온갖 문화적 화려함을 갖춘 인간의 완전한 익명사회로 나아가는 길은 기나긴 여정이었다. 단순한 표지와 미리 정해진 사회적 삶을 사는 개미세계에서는 이런 문화적 화려함을 찾아볼 수 없다. 익명사회로의 진화는 대뇌겉질에서 하위의 뇌간으로 확장되는 거대한 뇌 회로 재배열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필수 신경회로의 상당부분은 표지와 그것을 공유하는 집단의 자극과 그 반응의 초보적 상호작용 상태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우리의 개조된 뇌는 개인과 사회에 대한 우리의 표상을 우리의 행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감정 및 의미와 연관시키게 되었다. 진화론자들은 대체로 이런 상호작용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심리학을 통해 그 진상이 드러나고 있다.
- 정착지의 규모가 커지자 사회 내부에서 대추 교환하던 태도도 약해짐. 상대가 낯선 사람이거나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인 경우, 또한 그들이 아주 다른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경우, 그것에 구체적인 가치를 매겨야 했다. 그 결과 사회내부의 상호작용도 사회간 교역과 비슷해짐. 캘리포니아 추마시족의 정착지에서는 구슬을 일종의 통화로 사용해서 재화에 현대적 의미의 가치를 부여했다.
근래의 수렵채집 밴드 사회들 사이에 폭넓게 연결이 이루어진 것은 교역을 통해 불이 붙은 전달연쇄로 설명 가능. 약초, 숫돌, 오커 같은 물품들이 호주 원주민 집단간을 넘나들었고, 때로는 대륙 전체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재화와 마찬가지로 이것들의 가치도 그 재화의 이동거리가 멀어질수록 높아졌다. 진주조개 껍질이 장신구 용도로 내륙에 도착했을 때는 마치 마법의 물건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떤 물품은 원래의 용도대로 사용되지 않았다. 호주 북부에서는 몇 세기 전부터 부메랑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미사일 같은 도구를 무기가 아니라 타악기로 사용하는 유행이 북부지역을 휩쓸자 계속해서 부메랑을 만들던 남부 사람들이 부메랑을 다른 재화와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밴드 사회들은 원재료와 생산품 외에 온갖 아이디어도 거래. 유행어부터 향상된 도구제작법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이 먼 거리까지 복제될 수 있었다. 호주 원주민 사내아이들의 통과의례 때 수행되었던 포경수술은 아마도 1700년대에 인도네시아 교역자들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이 수술은 호주 전역으로 넓게 퍼져나갔고, 일부 지역에서는 남성 성기 전체의 표피를 벗겨내는 극단적 형태로 발전하기도 했음. 호주원주민들은 또한 서로의 노래와 춤을 따라했다.
- 1897년에 처음 보고된 사례가 문서로 잘 기록되어 있는데, 워카이아족의 몰롱가 의식이다. 핵심등장인물들이 정교하게 만든 복장을 하고 며칠 밤 동안 환상적 공연을 펼팀. 그 후로 25년 동안 몰롱가는 호주 중심부에서 1500키로에 걸쳐 퍼져나감. 워카이아 말은 그 부족 사람밖에 이해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서로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들이 사회들이 문제없이 상호작용하게 해주는 동력이 되었다. 수렵채집인들은 동맹을 맺기 위해 사회간 결혼을 주관하는 일이 많았다. 배우자들은 고향을 방문할 수 있었기에 일종의 이중국적에 해당하는 자격을 갖고 있는데, 이는 다른 동물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 집단 간 상호작용의 역사 덕분에 많은 수렵채집인이 이웃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호주 원주민과 대초원 인디언 모두에 사용되는 수화를 널리 공유했다. 일부 수화동작은 아주 멀리서도 볼 수 있었기에 협상가들은 서로의 창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도 소통할 수 있었다. 이 수화동작은 추가적 기능도 갖고 있었다. 급습에 나선 전사들이 소리를 내지 않고도 서로 신호를 교환하며 조직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어느 사회를 봐도 사회의 파탄은 결혼생활의 파탄과 똑 닮아 있다. 분열이 불가피해진 상홍이 닥치면,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억눌러왔던 의견들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런 의견들은 하루는 아닐지라도 한 달 전까지 주장했던 내용과 정반대되는 것일수도 있다. 사회규범에 순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감소하거나 아예 사라지면, 그동안 사회에서 선호되지 않거나 이단이라 여겨졌던 상호작용 방식을 탐험해 볼 자유를 양쪽 진영 모두 얻게 된다. 그렇게 기존에는 용인되지 않았던 행동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각각의 집단이 이제는 서로가 외부자로 보일 정도로 낯설어지게 된다.
- 매직넘버
수십만년 동안 인간 정체성의 변덕스러움이 작은 규모의 사회분할을 만들어 낸 것은 확실하다. 사실 그 규모가 너무도 예측가능해서 일부 인류학자는 500을 매직넘버라 선언. 지구 어디서나 대략적인 평균으로 작용한 이 수치는 한 밴드사회에 사는 사람의 숫자였다. 120이 침팬지 커뮤니티가 불안정해지는 한계수치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사시대 호모사피엔스가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인구수의 대략적 상한치는 500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한 사회가 적더도500명 정도의 사람을 포함해야 하는 실용적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어떤 계산에 따르면 이 정도 규모의 인구면 가까운 친척이 아닌 배우자를 선택할 기회가 생긴다고 함. 수십 마리 규모의 사회를 이루어 사는 많은 포유류는 위험을 무릅쓰고 쉬지 않고 외부사회에 합류하려는 욕구를 보이는 반면, 인간은 그런 일이 드문 이유를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고를 수 있는 짝이 풍부한 덕분에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사회에서 평생 머물 수 있는 선택지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더 큰 규모가 아니라 하필 이 규모에서 사회분할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규모가 더 커지면 짝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도 훨씬 넓어지고 사회방어에도 이점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 수치는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의 견제와 균형을 반영하지 않은 듯 보인다. 수렵채집인이 살았더너 정글과 툰드라 지역은 포식자와 가용한 식량 등이 생태적 요소가 천지차이이기 때문이다. 수렵채집인이 차지했던 영역은 속한 생태계에 따라 총면적에서 차이가 나서 북극 지역 사람들의 영역이 더 넓었지만 사회의 인구는 어딜 가든 대략 비슷했다.
밴드 사회의 인구수 상한선이 낮았던 것은 인간의 개성표현을 관장하는 심리학의 함수였는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균형유지가 필수적이었다. 구성원들은 같은 공동체라는 느낌을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닮았다고 느끼는 한편, 자신을 독특한 존재라고 여길 만큼 충분히 달라야 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몇몇 밴드에 속해서 살아갈 때는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려는 동기가 거의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 파벌이 잘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자 이들도 더 협소한 집단과의 연줄을 통해 생기는 차별성을 욕망했다. 이렇듯 정체성 다변화에 대한 욕구가 증가하지 분파의 등장이 촉진되고 결국에는 밴드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관계단절로 이어졌을 것임. 한곳에 정착해서 결국 인구가 대규모로 늘어난 사회였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임. 밴드 사람들과 달리 정착지 사람들은 대부분 다양한 사회적 집단과 이어질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집단은 분파가 아니라 사회가 기능하는 데 필요한, 다소 폭넓게 용인되는 집단이었다. 직종모임, 전문가 단체, 사교클럽, 그리고 사회위계나 확대친족 사이에 존재하는 모임이 이런 사회적 집단에 해당.
- 부족이 간신히 일관된 정체성을 유지한다 해도, 인구증가만으로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문명을 만들지 못함. 넉넉한 식량과 공간, 능력있는 리더십, 풍부한 사회적 분화 등으로 출생률이 높아진 가장 이상적 조건 아래서도 마찬가지. 이런 특성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은 거대한 인간사회가 동질한 사람의 후손이 아니라 다양한 유산과 정체성을 가진 인구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로 입증됨. 이런 면에서 보면 수렵채집인 사회와 부족사회가 다양화된 표지적응에 실패한 것은 국가가 거둔 대성공과 극명하게 대조됨. 사실 문명의 탄생을 이해하려면 문명이 어쩌다가 다양하게 혼합된 시민으로 구성되어 오늘날 인종과 민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 인간은 외부자와 파트너 관계를 맺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들이 동맹의 결과로 완저히 합병되는 경우는 절대 없다. 심리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다르면 서로에게 크게 의존하는 사회들이 오히려 다른 사회와의 구별을 더 확실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로쿼이 연맹은 공동의 적(처음에는 다른 인디언이었다가 나중에는 유럽인)과 싸우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이 연맹의 부족들은 합쳐진 영토의 서로 다른 경계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이 여섯부족이 서로 독립적이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 이런 식의 연합은 자부심의 원천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원래 사회의 중요성이 감소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 점은 확신할 수 있다. 수렵채집인 연합밴드에서 거대한 제국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회가 더 거대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자주권을 거리낌없이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는 것. 서로 다른 사회들이 하나로 합쳐진 것은 자발적 합병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격을 통해 다른 사회의 사람과 땅을 취득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임.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전쟁이야말로 만물의 아버지라고 한 말은 참으로 옳았다. 중동에서 일본, 그리고 중국에서 페루에 이르기까지 한 사회가 문명을 창조하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이나 힘의 우세를 통해 인구수 폭발을 영토확장과 결합하는 것이었다.
- 5500년 전에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 유프라테스강 동쪽에서 서로 연결된 몇 개의 소도시로 구성되어 있던 우르크는 인구가 늘며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소도시는 수천 명을 거느리고 있었고,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가 그들 삶을 뒷받침해주었다. 그곳에는 거리, 사원, 작업장이 존재했다. 그 지역에서 출토된, 설형문자가 새겨진 수많은 평판을 보면 삶의 많은 측면이 꼼꼼하게 관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루크는 족장사회로 시작했다가 새로운 조직방법을 취하면서 극명한 변화를 겪게 된, 학자들이 말하는 최초의 국가사회의 한 예다. 최초의 국가 중에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작은 마을에 불과한 것도 있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가 충성을 맹세하는 그런 종류의 사회였다.
국가들은 처음 등장한 순간부터 몇 가지 중요한 속성을 공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사회의 리더는 기존에 족장들에게 부담을 주던 수많은 거추장스러운 것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 족장은 세력기반에 한계가 있어서 비교적 쉽게 타도될 수 있었음. 족장 사회의 치명적 결함은 족장에게 권한을 위임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 족장사회의 규모가 커지자 거기에 예속된 마을의 전직 족장들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최고족장은 그들 각각을 직접 감독해야 했다. 합병된 영토 종단에 하루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 시작하자, 대체로 리더의 지배력이나 설득력에 의존하던 조잡한 감독방식은 실용성이 떨어지게 됨.
그러다 국가의 등장과 함께 모든 것이 변화. 국가의 수장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주장했을 뿐 아니라 공식적 기반시설을 바탕으로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었음. 국가에서는 분업과 통제의 계층구조가 통치와 관련된 제도로까지 연장됐다. 그리하여 자랑스러운 관료제의 탄생과 함께 사회가 응집력을 끌어올리고 광범위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게 된 것.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정복하면 기존 국가의 영토는 보통 지방으로 편입되고 그 수도는 행정 중심지로 개조됨. 각자가 특정 업무의 대가인 정부요원들은 필요에 따라 할당되었다. 이러한 감독시스템으로 인해 사회는 전보다 더욱 강압적으로 통치될 수 있었다. 초기국가에서는 수도와 외곽지역의 소통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간지연이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했지만 말이다. 사실 기반시설이 충분하면 리더나 정권이 최악의 충격 속에 전복되더라도 국가는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
국가는 다른 몇몇 세부사항에서도 족장사회와 차이가 있다. 우선, 진짜 법이 제정되었다. 권력이 약한 리더를 둔 사회에서도 사람들이 사적으로 범죄에 대한 처벌을 시행했었지만 국가에서는 권위를 가진 자가 처벌을 부과. 다음으로 상위 계층이 찾는 사치품을 비롯한 사유재산의 개념이 온전히 달성됨. 사실 족장 사회에서도 일부가 세력을 얻으면서 사회계층의 차이가 나타났지만, 국가에서는 그런 불평등이 극에 달했다. 권력과 자원에 대한 차별적 접근 권한은 노력을 통해 획득하거나 물려받을 수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국가는 족장사회보다 더 공식적인 방법으로 조공, 세금, 노동을 뽑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구성원들이 그 어느때보다 사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기반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다.
- 돌아가면서 리더를 맡든, 위원회를 통해서든, 한 사람이 단독으로 이끌든 리더십의 형태와 상관없이 리더는 사회구조를 다듬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의 임무 중에는 국민정체성 강화도 있었다. 때로는 영향력 있는 리더가 사회에서 용인할 수 있는 행동을 무엇으로 할지 결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기벽을 유행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선택한 행동을 강요하여 언어에서 옷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표준을 정할 수도 있었다. 부족사회와 족장사회의 리더들은 그 지위가 취약했기에 민중의 목소리 역할이 가장 우선적이고 무해하며 중요한 덕목이었다. 유능한 리더는 확실한 본보기를 설정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정체성과 운명을 공유한다는 느낌을 부여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경우에도 유대감을 강력하게 유지시킴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안전하게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인구집단이 확실하게 리더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 그의 권위가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왕은 포틀래치에서 촌장들이 그랬듯이 후한 인심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경우가 드물었다. 역사적 사건들을 보면 리더의 영향력은 도로, 인쇄기 등 정보소통수단에 대한 확실한 통제력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에서 국가조직이 발현할 즈음 종교의 역할이 사람들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변화. 수렵채집인은 치유능력과 영적 능력이 깃든 사람들을 존경했지만, 그들의 물활론적 철학은 추종자들에게 거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부족과 족장사회는 이런 면에서 별 차이가 없었지만 국가는 인구가 많아서 구성원들을 더 엄격하게 감독할 필요가 있었다. 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은 신이 내리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타인의 이목이 없는 곳에서 하는 행동에도 영향을 주는 메커니즘을 제공했다.
통치가 지나치게 독재적이지만 않으면 국가가 제공하는 혜택은 엄청날 수 있었다. 국가 안에서 벌집같은 수준으로 이루어진 상호작용은 집단적 정체성을 강화해주었을 뿐 아니라, 흩어져 있어 연결성이 약화된 인구집단이 자기 선조들의 혁신을 잊어버리는 태즈메니아 효과와 정반대의 효과를 일으켰다. 일단 다수의 사람이 상호작용을 시작하면 신선한 관점이 그냥 유행을 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사회변화의 수레바퀴에 올라타게 된다. 5만년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문화 라체팅이 계속 가속화되어 이제는 자기가 태어났던 사회와 별로 달라진 것 없는 사회에서 늙는 사람이 없는 지경까지 왔다. 이런 발전속도 때문에 사회적 정체성이 예전보다 훨씬 더 유동적인 표적이 되고 말았ㄷ. 더군다나 국가에서 확산되는 집단적 연결에는 집단적 무지가 함께 따라왔다. 밴드에 살았던 수렵채집인은 거의 모든 문화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반면, 국가에서는 리더라 하더라도 사회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내용을 일부밖에 모른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결정할 때도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적 경향을 뒤쫓아야 할 때가 많다.
- 한 사회가 족장사회에서 규모가 큰 국가로 올라가려면 우월한 전투력만으로는 충분치 않음. 소수의 거대문명은 일반적으로 사회들이 좁은 공간 안에 꽉 들어차 있는 환경에서 등장. 인류학자 로버트 카르네이로가 제한된이라고 표현한 이런 조건하에서 정복이 훌륭한 성과를 거둠. 이에 대해 인류학자 로버트 켈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은 이동성이 옵션이 아닐 때 등장한다." 사람이 살기 힘든 지역으로 둘러싸인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던 부족들은 딱 하나이 세력만 부각되는 싸움에 스스로를 가두는 꼴이 되었다. 사막 사이에 끼어 있던 나일 계곡이나 대양 위의 점에 불과했던 하와이나 폴리네시아의 섬들을 생각해보라. 나일 계곡은 결국 고대 이집트가 장악했고, 하와이나 폴리네시아의 섬들은 10만명정도를 거느린 거대족장사회의 영토가 되어버렸다.
제한된 환경이라고 해서 문명의 등장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곳보다는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제한이 없는 곳에서는 족장사회나 국가가 보통의 규모에 도달한 다음에는 더 이상 확장을 추구할 수 없었다. 주변 사회들이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옮겨다니기 때문. 뉴기니도 그런 상황이어서 엥가족 같은 부족 전체가 진퇴양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이동했다. 규모가 작은 개미군집이 충돌을 피하기 위해 도피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장소에 정착하려면 이웃들과의 동맹을 통해 이동을 협상해야 했을 것임. 사람들은 영토와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기에, 이런 이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극단적 압박을 받았음을 암시.
- 중국대륙의 정복활동은 이른 식에 시작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결국 현재 중국인구의 90%에 달하는, 지금 우리가 한족이라 간주하는 가상의 통일성을 만들어냄. 이런 규모의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은 초기 왕조가 자신의 문화, 문자, 그리고 때로는 언어로 개종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받아들인 정책 덕분. 이런 전통의 기원을 추적해 보면 공자가 나온다. 그는 한족의 생활양식에 충실하기만 하면 한족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을 고취했다.
고대 문헌을 비롯해서 건축, 칠기제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표현된 정체성 변화의 증거를 바탕으로 고고학자들은 진나라와 한나라가 결국 오늘날 중국이 될 인구집단의 상당부분을 어떻게 통합했는지 밝혀냈다. 수도시설, 조명, 기타 다양하게 개선한 필수적인 것들을 제공한 로마와 달리, 중국왕조는 외곽의 인구집단에게 삶의 질과 관련된 이득은 거의 제공하지 않고 반복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에 더 의존. 진나라와 한나라가 이용한 전략 중 일부는 전 세계 영토확장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임. 양쪽 왕조 모두 원래의 한족이 탄생한 곳으로 추정되는, 제국의 중심부와 제일 가까운 북쪽지역 통합에 초점을 맞추었다. 한족 문화의 지배력을 확실히 하기 위해 신임하는 백성들을 그 지역에 많이 가서 살게 했다. 가장 부유한 지방에서는 자녀들에게 한족의 풍습을 가르치는 바람직한 상황이 처음 현실화되었을 것임. 수 세기에 걸쳐 이런 교육이 사회계층을 타고 전해져, 14세기 명 왕조가 생겨났을 즈음에는 한족의 정체성이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다. 중국 왕조들이 가장 외곽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반복해서 상실했던 이유는, 관심의 초점을 주로 접근 가능한 영토에만 맞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국경 안에는 왕조가 주류로 편입하는 데 실패한 토착 사회들이 존재했다. 이런 집단들이 사는 곳은 경작에 적합하지 않은 산악지역이라 진압해봤자 얻을 것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민족, 그 중에서도 서쪽의 티벳족과 위그르족 및 버마 국경의 와족 등은 결국 왕조의 통제 아래 들어가기는 했지만, 당국은 아이누족을 개로 생각했던 초기 일본인들처럼 그들을 수준이하의 사람으로 보고 거리를 두었다. 기록으로 남지 않은 정책 하나는 그런 야만인들이 언어와 풍습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16세기에 명왕조는 마치 식민국처럼, 적대적인 먀오적의 산악 근거지를 성벽으로 에워싸 그들을 포함한 다른 거주자들을 억압하기도 했다. 사회적 이탈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함으로써 내륙지역 지방들이 잉카제국에서 했던 역할, 그리고 노예들이 체로키 인디언 사회에서 했던 역할을 완수했다. 그리스 시문학의 거장 콘스탄티노스 가바피스가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옳았다. "이제 야만인들이 없어지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들은 일종의 해결책이었다." 야만인들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무엇이 적절하고 옳은지를 밝히는 역할을 했다.
- 사람들은 세상은 근본적으로 공정하다는 관점을 가짐. 민족과 집단의 문제가 이런 식으로 정당화됨. 한 선도적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특권층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약자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대신, 엘리트층을 지지하고 그들의 높은 사회적 지위는 예외없이 그들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라 추론한다." 다른 저자 집단에 따르면 그 결과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으로 인해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그러한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여 거부하거나 변화시킬 가능성이 제일 낮다."
이런 신념의 힘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노예들도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인도의 카스트제도에서 가장 지위가 낮은 불가촉천민은 오늘날까지 그러하다.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이런 묵인은 최초의 족장사회와 국가사회시절부터 사회의 성공에서 분명 핵심적 역할을 했을 것임. 수렵채집인들이 경계심, 혐오감, 역겨움 등을 표현하던 대상이 외부자에서 사회내부계층으로 바뀌면서 그 효고가 사회전반에 스며들다 보니, 탄압받는 자들조차 자신을 하찮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 결과 민족들이 사회적 낙인을 견디며 공존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