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셸푸코는 팬옵틱이라는 전면적 감시를 감시와 처벌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다. 오늘날 타인의 시각에 노출되느냐 마느냐가 범죄예방의 핵심이라고 평가하는 범죄예방 전문가들도 이런 감시에 큰 의미를 둔다. 애덤 스미스는 당대의 도덕적 타락의 원인 중 하나가 도시화가 낳은 익명성이라고 지적. 한 노동자가 자기 마을에 있을 때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으며 스스로 그것을 의무로 여김. 그러한 규범을 어길 경우 마을에서 평판이 나빠지기 때문. 하지만 대도시로 나오면서부터 그는 어둠과 그늘에 파묻힌다. 아무도 그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는 변덕스러운 악과 방종에 놀아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다.
- 사람들의 평판은 사회적교류에서 만들어짐. 작은 집단 내에서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이 거론되면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은 두번째로 나오는 발언으로 결정된다고 함. 다시 말해 처음에 그 사람에 대한 안좋은 이야기가 나왔는데 누가 그 이야기에 맞장구를 친다면 집단 전체는 그 사람을 나쁘게 볼 것임. 반면에 두번째로 말하는 사람이 그에 대해 긍정적 이야기를 하면 맨 처음 이야기한 사람의 부정적 언급은 상당부분 힘을 잃어버림.
- 기원전 5000-3000년전부터 인간집단은 대개 1000명에서 만명 상당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다. 기원전 3000-1000년부터 일부 집단은 만명에서 10만명 규모에 이르렀고, 그 후에는 100만명 규모도 훌쩍 넘어버림. 물론 현대사회에서 인간활동의 구조는 사회생활의 탈공간화와 그로 인한 실질적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데 할애하는 시간은 아직도 상당함. 인간들의 교류에서 60%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 차지한다고 한다. 사이버 시대에도 사회적 평판은 여전히 시사성 있는 개념이다.
- 당혹감은 수치심이나 죄의식과는 다른 감정. 당혹감은 주로 관습적 규칙(예의범절, 에티켓)을 위반할 때 발생함. 한창 회의중인데 배에서 꼬르를 소리가 남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크게 났다고 상상해보라. 혹은 궁정에서 신년회를 거행하던 중에 뒤늦게 바지 앞섶이 열려 있음을 깨달았던 덴마크 헨리 왕자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해 보라. 당혹감은 우리의 사회적 이미지가 어긋날 때 비롯되며 일시적으로 자존감을 떨어뜨림. 당혹감은 시선을 피한다든다, 말을 더듬는다든가, 맹한 미소를 짓는다든가, 자꾸 자기 얼굴을 만지고 얼굴을 붉힌다든가 하는 모습으로 드러남.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는 당혹감이 죄의식이나 수치심보다 더 괴롭다.
- 당혹감도 여타의 도덕적 감정들의 그렇듯 사회적 편입의 표식이다. 교수들은 질문에 곧바로 대답을 못하고 당황해하는 학생을 덜 공격적으로 본다. 당혹감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규범을 어겼는지 의식하고 있음을 타인의 시선을 신경쓴다는 것을 보여줌. 자기가 방금 저지른 일에 당황해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일을 목격한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거나 사과를 한다. 당혹감은 주위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처벌을 완화하는 역할을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아이가 뭔가 잘못을 하고 당황해하면 부모도 심한 벌을 내리지 않는다. 옆 사람의 바지에 와인을 쏟거나 새치기를 한 사람이 얼굴이 빨개지면 좀더 호감과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당혹감의 진정효과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죄의식의 표시로 해석되어 더욱 가혹한 판단을 끌어내기도 한다.
당혹감을 드러낸다는 것은 사회범을 어겼다는 의식이 있음을 의미.
- 표정의 자동모방은 모방된 표정이 가진 감정을 불러오기 쉽다. 19세기 말 윌리럼 제임스는 그저 어떤 활동을 보고, 생각하고, 상상하기만 해도 그 활동을 실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관념운동성의 원리를 주창. 그래서 우리는 아이에게 숟가락으로 먹을 것을 떠먹이면서 아이가 입을 벌리면 우리도 따라서 입을 벌리곤 한다. 마찬가지로 성난 표정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도 비슷한 감정을 느낌. 인위적으로 표정을 막아버리면 표정의 피드백 현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음. 예를 들어 보톡스 주사를 눈썹 부위에 놓아서 분노의 표정에 이용되는 근육을 마비시키면, 분노에 관여하는 뇌 영역에서 실제로 그 영향이 나타남.
- 이미 2500년전에 투키디데스도 페스트라는 치명적 병이 사회규범을 어떻게 와해하는지 상세히 기술. 그는 이렇게 썼다.
"병은 도덕적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전에는 숨어서 몰래 하던 일에도 과감해졌다. 순식간에 팔자가 변하는 일이 너무 많앗다. 부자들이 갑자기 죽고, 어제까지 빈털털이였던 사람이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사람들은 즉각적인 만족만을 원했고 쾌락을 좇았다. 그들에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 신에 대한 두려움, 법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니 경건하게 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재판을 받고 벌이 확정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무서운 위협속에 있었으니까. 모두들 어차피 죽을 텐테 살아 있을 때 재미좀 보려는 것은 당연하다 여겼다."
런던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에도 한 관찰자는 "이 전염병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더 잔인하게 군다. 짐승도 서로에게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마르세유에 페스트가 돌자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거리로 내쫓았다. 아이들은 물 한 항아리와 사발만 가진채 가혹하게 버려졌다." 연구자들 역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위험한 성관게를 더 많이 고려하게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반대로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규범을 더 잘 지키려는 역설적 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실험참가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연상을 유도했더니 오히려 규범체계가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실제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면 자선단체에 더 많은 돈을 기부하고, 집단의 규범을 잘 지키는 사람을 칭찬하며, 규범을 위반한 사람을 더욱 가혹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 공정한 세상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개발된 설문결과에 따르면, 실제로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실험상황에서 피해자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확인됨. 연구자들은 설문을 통해 공정한 세상을 믿는 자들의 프로필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얻었고 그런 믿음이 연령, 성별, 사회계급과 약간은 관련이 있지만 단순히 어떤 보수이데올로기나 종교적 세계관으로 싸잡아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공정한 세계관에 대한 믿음은 에이즈 환자, 극빈층, 강간피해자와 노숙자, 실업자, 장애인, 노인에 대한 경멸과도 관련이 있다. 이런 설문측정의 흥미로운 변화중 하나는 개인적 적용과 일반적 적용을 구분하게 되었다는 것. 다시말해, 세상이 나에게 공정하다고 믿는가와 세상이 남들에게 공정하다고 맏느냐는 별개다.
- 사회복지사, 의료인, 간병인이나 상담사 등이 그 직업에 오래 종사하다 보면 감정적으로 냉혹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음. 감정이입능력이 뛰어난 의료계종사다들이 제일 먼저 자기 일에 염증을 느끼고 말기 환자들을 회피한다는 보고도 있다. 고통을 치료하는 데 익숙한 의사들은 괴로워하는 환자의 동영상을 보아도 임상경험이 없는 의사들만큼 고통과 관련된 뇌 영역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게다가 의사들은 환자가 당하는 고통을 그렇게까지 힘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감정이입의 패러독스가 있다. 피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할수록 그를 도와줄 확률은 높다. 일례로 타인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심박이 빨라질수록 신속하게 도움을 제공하려 한다. 하지만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관찰자는 괴로운 상황을 회피하고 피해자와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미 도움을 주기로 약속한 상황이거나 피해자가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람이라면, 관찰자의 감정이입이 고조될수록 피해자를 도와야겠다는 의욕의 수준도 높아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