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년대에 미국학자 폴 로머는 혁신과 지식이 노동과 자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주장해 경제성장에 대한 사고에 일대 변혁을 가져옴. 그의 연구에 붙은 읽기도 어려운 이름, 곧 내생적 성장이론(endogeneous growth)은 교육을 강화하고, 과학연구를 뒷받침하고, 기업활동을 용이하게 만드는 것이 재정적자와 세율로 속 썩는 것보다 경제성장증진에 훨씬 도움을 줄 것이라 주장. 이 이론이 전 세계 경제부처를 휩쓸고 30년이 지난 뒤 로머는 자신이 옳았다고 더 이상 확신하지 않았다. 2015년에 그는 이렇게 인정했다. "지난 20년간 성장이론은 사회적 공감대를 향한 과학적 진척이 전혀 없었다." 이런 설명이 현대인의 귀에는 충격적으로 들린다. 경제란 신중하게 조율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니며, 그 장기적 추이는 대부분 정부관리아 중앙은행의 통제 아래 놓이지 않은 힘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고는 2차대전 이후 세대의 학생들이 받아들인 지식과 정면으로 충돌. 그보다 한층 더 당혹스러운 것은 73년 이후의 변덕스런 추세가 원래대로 돌아갈 가능성, 곧 생산성과 경제성장 및 생활수준 향상이 주춤하거나 가끔은 전혀 나아지지 않던 시대로 회귀할 가능성이다.
- 어쩌면 황금기와 함께 사라진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믿음이었는지도 모르낟. 사반세기 동안 모든 부국과 많은 빈국의 평범한 국민은 나날이 자신들의 삶이 좋아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희생과 고된 노동이 자손을 위한 굳건한 기반을 구축하는 것임을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황금기가 추억이 되면서, 만인이 행복했던 시대의 무한한 낙관주의 역시 추억이 되었다.
- 종속이론가들이 제기한 기본정책, 즉 원자재 가격 안정과 제조업 육성을 위한 정부의 관여는 고소득 국가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들의 기업이 저렴한 원자재에 대한 접근성과 해외 시장개방을 원했기 때문. 그러나 고소득 국가들이 설파하는 더욱 자유로운 무역에는 상당한 위선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높은 관세와 낮은 수입쿼텅 뒤에서 자국의 제조업을 보호. 아울러 많은 나라가 자국 농민에게 도움을 주거나, 남아있던 기존 식민지를 그밖의 수입 원산지보다 선호하거나, 또는 단순히 세입을 늘리기 위해 설탕과 커피 및 기타 열대작물에 터무니 없는 관세를 부과했다. 의류나 가공식품처럼 필시 저소득 국가에서 생산했을 제품은 특히 높은 무역장벽에 무딪히곤 했다.
- 개도국의 60년 이후 인상적인 경제성장은 역동적인 신산업보다 예부터 존재해온 천연자원과 관련이 있었다. 개도국 식량수출 가격은 2차대전 직후 떨어졌다가 65년-74년 346%로 껑충 뛰었다. 10년 안에 UNCTAD의 광물가격지수는 2배로 올랐고, 67년 톤당 252불이던 야자유는 7년 뒤 1041불로 상승. 이런 가격상승 덕에 가장 부패하고 행정이 엉망인 나라들조차 기대수명 증가, 학교 출석률 상승, 손전등과 트랜지스터라디오 같은 사치품의 확산을 경험. 그러나 이 밖의 많은 것들의 변화가 없었다. 대다수 국가의 경제는 흔히 정부소유의 독점기업이 장악했고, 이런 기업의 비싼 가격은 모두 가정과 민간기업에 부과하는 일종의 세금이었다. 정부의 쓸데없는 엄격한 관리는 회사를 창업하거나, 전화를 개설하거나, 혹은 많은 경우 합법적으로 집을 짓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소비재 호황은 좀더 안정적이고 좀더 다각화한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대신 벼락부자가 되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유혹을 제공했다. 그러다 호황이 끝났다. 83년 이후 고소득 국가들의 경제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천연자원에 대한 국제수요도 떨어짐. 가격은 하락했고, 개도국은 예전상태를 고스란이 드러냄. 개도국은 생산성이 낮아 사업을 시작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육성하기에는 너무 높은 장벽이 있는 곳이었다. 계획자들이 자국경제를 새로운 정점을 몰고가기 위해 도입했던 정책, 특정 부문과 연줄 든든한 특정 개인을 선호하던 바로 그 정책이 경제성장의 족쇄였다. 카를 실러의 독일이 그러했듯 멕시코와 브라질과 인도네시아 역시 그랬다. 정부의 계획이 전 국민의 번영과 생활수준 상승을 보장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잔인한 거짓말로 드러났다.
- 연준은 강제로 유입되는 통화의 흐름을 조이거나 풀기 위한 조절 밸브를 여러개 갖고 있었는데, 그날그날 어떤 작업을 해야할지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일반적으로 진보주의 정치인과 관련한 학파는 연준이 평범한 미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일자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플레이션과 상관없이 실업률을 4% 정도로 유지하는 게 연준의 최대목표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로 보수파 정치인들로 이뤄진 반대쪽 학파는 연준이 초단기간을 제외하면 투자를 자극하거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없다고 주장. 따라서 통화정책의 유일한 목표는 실업률과 상관없이 물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그 양극단의 입장과 거리를 뒀다. 닉슨처럼 그들은 연준이 유권자에게 고통을 안기지 않고도 낮은 물가상승률과 낮은 실업률 모두를 내놓기를 바랐다.
- 71년 말 스미스소니언 학술협회에서 개최한 컨퍼런스는 달러를 그 밖의 모든 주요통화와 대비해 평가절하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통화시장에서 약간 더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만든 흥미로운 협상을 끌어냈다. 닉슨은 이 협정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통화협정이라고 단언했다. 앞선 브레턴우즈 협정처럼 스미스소니언 협정은 미국달러를 세계 통화체제의 중심에 두었다. 미국은 원하는 대로 경제를 운영할 수 있었고, 다른 나라들은 자국 통화를 허용범위 내에 두기 위해 미국의 경제정책에 맞추어야 했다. 그러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 새로운 협정은 피 냄새를 맡은 외환딜러들의 공격을 받았다.
- 인플레이션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각각 다른 방식의 대처가 필요. 통화 인플레이션은 중앙은행이 경제에 지나치게 많은 통화를 쏟아붓고 있다는 뜻. 수요 인플레이션은 소비자와 기업이 경제가 공급가능한 수량 이상을 구입하려 해서 판매자에게 더 높은 물가를 요구할 힘을 실어주었다는 의미. 그리고 가장 치명적 유형을 여겨지는 비용상승 인플레이션이 있다. 이런 유형의 인플레이션은 원자재, 생산물자 및 노동력처럼 사업에 투입되는 요소의 공급자가 유발하는 것으로 추정됨. 광산업자, 제강업자 및 노동조합이 더 높은 가격이나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면, 그러한 투입요소를 사용하는 기업은 스스로 가격을 올릴 수 밖에 없고, 그러면 인플레이션은 한층 더 높게 상승할 것이다.
- 프리드먼은 모든 인플레이션은 통화 인플레이션이라고 주장. 중앙은행이 통화 공급량 증가를 억제하기만 한다면 인플레이션은 사라질 거라는 이야기였다. 바로 몇년 후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통화량과 관련한 현상이라는 프리드먼의 금언은 절대진리로 대접받게 됨. 그러나 73년 내노라하는 경제학자들은 프리드먼이 가상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형태의 인플레이션 걱정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수요 인플레이션은 세금인상, 정부지출 삭감, 금리인상 또는 은행 대출제한 등으로 통제할 수 있을거라고 여겨졌다. 그중 어떤 방식이건 소비자와 기업이 쓸 돈을 줄여서 수요를 공급과 비슷하게 되돌려 놓는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제강업자, 알루미늄 제련소 및 화학품 제조업자에게 설비투자를 유보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은행에서는 할부대출을 감축하라고 명령하면서 이러한 정책을 맹렬하게 밀고나감. 이 모든게 물가상승이 진정되리라는 기대 속에서 기계와 노동에 대한 수요를 낮추기 위함이었다. 비용 상승 인플레이션은 더 까다로운 문제로 여겨겼다. 정부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압박과 물가통제의 조합을 통해 이를 다루었다. 정부 각료가 산업계의 임금이나 물가상승폭이 얼마나 되어야 할지 공표하고, 그런 연후에 미국인이 터득한 테크닉인 정부의 강력한 설득작전 같은 자발적 가이드라인을 노조와 고용주가 따르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게 지극히 정상으로 보였다. 좀더 회유적인 접근법으로는 기존의 임금이나 물가가 얼마나 많이 올라야 할지 판정하는 정부위원회의 창설이 있었다. 어느 쪽이건 만일 식료품점 점원이나 타이어 제조공이 외부 전문가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수준으로 인상된 급료만 받는다면, 정부는 경제를 뒤엎지 않으면서도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물가 상승률을 낮출 수 있을 거라는 가정 아래서 나온 발상이었다.
- 필립스 곡선은 끊임없는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의 조합을 고려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이 예기치 않은 위협은 고유의 이름을 갖게 됐다. 바로 스태그 플레이션. 73년 유가쇼트는 경제성장의 숨통을 조이면서도 소비자 가격을 올려놓음으로써 낮은 실업률과 낮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의지 양 측면에서 명성이 있던 나라들, 특히 서독과 스위스에까지도 스태그플레이션을 불러올 조짐을 보임. 스태그플레이션은 중앙은행 총재와 재무장관들의 경험을 넘어서는 문제였다. 그러나 인플레를 막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는 것과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를 인하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모든 논쟁에도 불구하고, 스태그플레이션은 한층 더 다루기 힘든 도전과제 중 하나의 징후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세상에 전례없는 번영의 사사분기를 안겨준 경제모델 전체가 산산조각 났다.
- 그 모델은 놀랄만한 생산성 증가에 기초하고 있었다. 생산성은 경제학에서 가장 복잡한 개념 중 하나. 경제는 주어진 양의 노동, 자본 및 원자재로부터 더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더 부유해질 것이라는 게 그 기본적 생각이었다. 개별 노동자 한명이 근력으로 완수할 수 있는 작업량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는 이상 생산성 증가에는 기계, 기술 및 사업방식을 좀더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포함된다. 생산성은 다양한 방법으로 측정 가능. 아울러 이 측정법은 지극히 난해할 수 있다. 그러나 튼튼한 경제란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원을 꾸준하게 더욱 잘 활용하는 것이라는 근본적 생각에 대해서는 거의 논란이 없다. 급속한 생산성 증가는 전후 시대 기업들에게 매우 많은 수익을 가져다줌. 수익이 증가함에 따라 고용인의 임금, 주주 배당금, 기업체의 세금 영수증, 그리고 한층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설비에 대한 투자 역시 증가. 황금기를 빛나게 한 것은 바로 이 선순환이었다. 그러나 대중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73년 10월 석유위기가 찾아올 무렵, 둔화된 생산성 증가는 이미 장기적인 전 지구적 풍요에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 73년 10월에 도래한 석유위기는 생산성 문제를 초래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 세계적으로 생산성을 짓누르고 있던 요인들의 리스트에 하나의 항목을 추가했을 뿐이다. 높아진 유가는 값싼 석유라는 가정 위에 구축된 산업기반 전체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려 했다. 세상은 수년간 지속될 힘겹고 대가 큰 적응기와 맞닥뜨릴 터였다. 서독의 경제자문위원회가 상황을 요약했듯 "따라서 석유수입 감축은 새로운 난관, 전통적 경제운영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게 만든다." 생산성 실패는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정부와 중앙은행 총재는 그들이 건강한 경제를 되찾기 위해 전통적 경제운영방식(금리, 세금 및 정부지출의 인상과 인하)을 어떻게 사용랄지 알았거나 혹은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락세인 생산성 증가의 해결책에 관한 한 경제학자들의 툴박스는 당혹스럽게도 텅 비어 있었다.
- 73년 10월 5.12불이던 사우디 경질 원유 공식가격은 74년 1월 11.65불, OPEC국가들의 수입금이 1350억불을 찍었던 75년에는 12.37불에 도달. 그 돈이 금융시스템을 타고 빠르게 흘러들었으므로 전 세계 은행들은 프랑크푸르트와 뉴욕에서, 베이루트와 애틀랜타에서 문을 활짝 열고는 앞다퉈 예탁금을 유치하고 예전에는 접촉하지 않았던 대출자에게 융자를 제공했다. 수익사업으로 몰려들던 은행 다수는 국제적 대출에는 초보자였고, 자신들의 신규고객에 대해 잘 몰랐다. 이는 시한폭탄이었고, 감독관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젤에서 감독관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들이 무시해주었으면 하고 은행들에게 바라던 한가지 문제(자본부족)에 대한 우려는 늘어갔다
- 득실을 따져보면 규제완화의 결과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옛날 직종과 옛날 회사가 사라진 반면 새로운 일자리와 새로운 기업이 등장했고, 규제로 보류됐던 새로운 상품(변동금리 예금계좌, 휴대폰, 골퍼와 미식가의 구미에 맞춘 민영 텔레비전 채널)이 소비자에게 혜택을 가져다 둠. 예전에는 규제기관에 의해 좌우됐던 가격과 서비스를 협상할 수 있게 된 회사들이 자신의 사업을 더욱 생산적으로 운영할 방법을 모색함에 따라 경제성장은 힘을 받음. 그러나 황금기의 본질적 양상이던 안정과 안전은 그걸 감싸주는 규제라는 틀이 없어지면서 심각학 훼손됨. 정부들이 생산성 증가를 회복하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려 노력하면서, 안정은 감당할 수 없는 사치가 되고 말았다.
- 일본의 저돌적 성장 요인은 대략 세가지로 추적 가능.
(1) 유럽 및 미국의 기술수용. 일본기업은 해외 특허를 걸신들린 듯이 사들여 자신들의 공장을 다른 나라만큼 효율적으로 만드는 데 써먹음. 한 추정에 따르면 석유 위기가 터지기 이전 일본경제는 거의수입산인 신기술만으로도 연간 약 2%씩 성장.
(2) 막대한 자본투자. 이자 수익에 책정된 낮은 세율에 힘입어 일본 가구의 저축률은 50년대 말 급증. 은행은 그런 가구의 돈을 제조업체의 대출금으로 재활용.
(3) 규모의 경제. 장인들의 협소한 공방이 현대적 설비를 갖춘 거대한 공장에 자리를 내줌
- 73년 석유위기는 일본의 국제무역 수지를 69년 이전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다시 적자로 기울게 했다. 60억불을 넘어선 74년의 무역적자는 아마 일본 역사상 최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적자는 일시적이었다. 두꺼운 책자를 채울 만큼 많은 규제가 수입을 제한하느 한편, 새로 구조조정을 마친 수출기구가 기어를 고속으로 바꾸면서 일본은 전례 없는 규모의 무역흑자를 축적하기 시작. 이러한 흑자가 죽은 경제를 부활시킴. 75년이 되자 일본은 73년 이전보다 훨씬 느리긴 해도 다시 성장하기 시작.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이 나라는 다른 모든 산업화한 경제대국을 앞질렀다. 그러한 이익이 일본 스스로의 소정의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가서야 밝혀졌다. 정부는 지식 집약적인 제조업 구축에 세밀한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서 이 나라의 놀라우리만치 비효율적인 서비스업 부문을 거의 간과했다. 80년 일본의 서비스업 부문 생산성은 70년보다 낮았다. 대형점포개설의 장벽, 트럭운송의 경쟁 억제, 그리고 은행의 주말 현금인출기 운영금지를 비롯한 많은 유사한 규제는 향후 몇년 간 경제성장의 걸림돌로 여겨졌다. 그러나 당시는 제조업이 꽃피우고 있을 때였으므로 일본 서비스업 부문의 심각한 상황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 미국의 무역제재라는 은근한 위협에 직면한 MITI는 레이건 취임 이후 불과 3개월이 지난 81년 5월 1일 대미 자동차 수출에 대한 자발적 제한을 공표. 일본은 차기 회계년도 3년 동안 매해 169만 대만 미국에 수출하겠다고 약속. 한달 뒤 일본 정부는 그해의 대캐나다 자동차 수출이 전년보다 5.8% 낮아질 것이라고 예보했고, 자동차 없체가 각자의 수출계획을 조정해 거기에 맞추도록 했다. 자발적 제한은 북미 소비자에게 극도로 높은 비용을 부담시키면서 수년간 지속되었다. 국제무역위원회가 산출한 통계를 보면, 일본의 수출제한은 미국에서 84년 4만 4100개의 일자리를 창출했지만, 자동차 구매자에게 더 높아진 가격의 형태로 85억불, 혹은 추가된 일자리 1개당 19만 3000불(미국 자동차 노동자 연봉의 약 6배)를 부담하게 했다. 캐나다 일자리 1개당 비용은 필시 훨씬 높았을 것이다. 필요가 없어진 자동차 노동자에게 나가서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돈을 주는 편이 훨씬 더 싸게 먹혔을 것임. 일본의 사정은 더 나아져싿. 일본 자동차 업계는 80년대 총 자발적인 수출제한 덕에 더적은 차를 더 높은 가격에 판매함으로써 미국과 캐나다로부터 추가로 70억불의 수익을 더 거둠. 일본회사는 이 수익을 북미에 자동차 조립공장을 세운 것 외에 고급모델을 개발하는 데 투자. 북미에 수출할 차량의 수가 한정적이라면, 그들이 팔 수 있는 차중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것을 출하하는 게 타당했다. 알미늄, 화학제품 및 제철업의 몰락으로 쫓겨났던 일본 노동자는 자동차 산업에서 즉시 일자리를 찾았고, 이는 힘겨운 산업적 과도기의 고통을 덜어줬다.
- 노동자 계층을 돕는다는 대의명분으로 곤경에 빠진 산업을 구제하는 것은 73년 이후 10년간 산업화한 세계전역에서 주요 프로젝트가 됨. 구조조정이라는 지시문 아래 수익을 못 내던 제조업체는 정부의 직접적 지원으로 수십억불을 챙겼고, 정부의 수입제한 및 카르텔 합법화 같은 경쟁완화 정책으로 가격을 높일 수 있게 되면서 수백억불을 추가로 거둬들임. 그러나 실제 들어간 비용은 인상된 상품가격과 특혜받은 회사가 빼먹은 보조금을 훨씬 넘어섬. 전 세계가 생산성 증가의 둔화로 고전하던 시기에 대부분 국가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산업보다는 성장가능성이 희박한 부진한 산업을 조직적으로 지원했다. 그 최종결과는 생산성의 슬럼프를 극복하는 게 아니라 심화하는 쪽이었다.
- 토마피케티가 제시한 것처럼, 전후 세계에서 평등이 증진된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경제정책보다는 비극과 더 관련이 있었다. 2차대전은 막대한 양의 자본을 파괴. 아파트, 상점, 사무실 및 공장이 생산기계 및 가정비품과 더불어 송두리째 무너짐. 자산이 파괴 및 징발되지 않은 기업조차 물가통제, 원자재 부족 및 고객의 재정문제로 수익에 타격을 입음. 그 사라진 자산은 특정 집단 사람들의 소유였으므로, 자본의 파괴는 부의 분배를 고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부의 대부분이 부자들 주머니로 흘러 들어간 임대료, 배당금, 및 지급이자를 생성하는 데 쓰였으므로 부의 손실은 소득을 고르게 만드는 경향이 이었다. 빈부격차가 좁아진 것은 단지 빈민층이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잠시 동안 부유층이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평등확대 추세는 임금증가가 막 둔화하기 시작한 70년대 중반에 역전됨. 시기는 나라마다 똑같지는 않았다. 상류층이 평균소득자나 최저소득층보다 얼마나 더 잘 벌었는지 정도도 나라마다 상당히 달랐다. 자녀가 있는 가정에 추가지원금을 제공하건, 아니면 은행에 과거라면 거부했을 주택 구입자와 기업주에게 대출을 연장해주도록 장려하건 몇몇 나라는 평균이하 소득자의 소비력을 늘리기 위해 다른 나라보다 많이 움직였다. 그러나 20세기 마지막 25년이 대다수 임금 소득자는 제자리를 유지하느라 발버둥친 반면 높은 급료와 투자소득을 차지한 이들은 매우 높은 생활수준을 누린 시기라는데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
- 통치불능은 70년대 중반에 이 용어를 받아들인 대로 사회불안보다는 정치마비와 더 관련이 있었다. 이는 두가지 근본적 사회변화의 결과로 알려졌다. 하나는 교육과 풍요가 보통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줬다는 것. 시민은 더 이상 맹목적으로 그들이 속한 교회, 노조, 혹은 기업조직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무엇이 자기들에게 최대이익이 되는지를 스스로 결정했따. 또 다른 변화는 정부가 많은 국민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서비스와 보조금을 제공하면서 실질적으로 너무 커져버린 나머지 시민이 과거 어느때보다도 더 정부의 행동을 주시했다는 것. 한꺼번에 일어난 이 두가지 변하는 정치인이 어떤 공공의 선이라는 명분아래 결정을 내리면 순종적인 유권자는 그걸 따를 거라고 더 이상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회복지 제도가 안긴 선물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가 되었다. 예전에는 정치인이 어떤 수당을 새로 나눠주건 유권자가 감지덕지했던 반면, 이제는 절대적 관점에서든 혹은 다른 이들과의 상대적 관점에서든 유권자는 자신들의 처지를 나빠지게 할 모든 변화를 차단하기 위해 결집했다. 나날이 명확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게 된 유권자는 지켜내야 할 확실한 경제적 이익이 있었고 정부가 그들의 말을 들어주길 바랐다. 통치불능에 대한 우려는 경기침체와 직접벅 관련이 있었다. 경제가 급속학 성장하던 황금기에는 정부가 거의 전 국민의 전 국민의 여건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무자녀 노동자 가구의 세후 소득을 줄이지 않고도 아동수당을 올리고, 무료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교육시킬 대학을 신축할 돈은 충분했다. 그러나 경제가 느리게 성장하거나 위축되기까지 하다보니 통치는 제로섬 게임이 됨. 미취학 영유아간 노령연금 수혜자건 어떤 한 집단에 더 많은 자원을 쏟아붓는 모든 조치는 다른 집단으로부터 자원을 빼앗는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궁극적으로는 거의 모든 국민에게 혜택을 줄 인플레이션 감소 같은 정책일지라도 장기적 이익을 위해 단기적 고통을 흔쾌히 감내할 생각이 없는 대중 앞에서 좌초했다.
- 대처주의처럼 레이건주의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었다. 자유시장 신봉자들은 수년간 끈기있게 사회복지제도에 반대하는 싱크탱크 및 대학 연구기관으로 된 지적 상부구조에 투자해왔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60년대부터 다양한 사회적, 법률적 변동에 대한 분노로 결속하고, 그런 변동을 역전시킬 수단으로 열심히 공화당을 활용하기 위해 풀뿌리 집단의 네트워크를 육성해왔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미국 정치를 결정적으로 우경화할만큼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레이건이 보수정당의 기수가 된 76년 전통적 온건파이던 대통령 제럴드 포드는 어떻게든 그를 당의 대통령 후보로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당시 경제는 73-75년 불황에서 회복중이었고 물가상승률은 하락세였으며 아직은 미국의 전성기가 끝났다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았따. 79년 하반기에 채권시장이 예측한 불황이 예정대로 닥치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11%를 상회하는 담보대출 이자율이 언젠가는 집을 장만할 수 있으리라는 젊은 세대의 희망을 꺾고 건설현장의 철골조립공과 자동차 공장의 공구제작공에게 강제해고 통지가 나붙자, 비로소 보수 정당이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왔다. 언어구사와 그가 내뿜는 자신감에서, 레이건은 통치불능의 세상이 됐다는 통념에 정면으로 배치됨. 그는 강인한 이미지를 투사했고, 미국정부가 적절히 관리하기만 하면 대외적으로 적들에 맞서고 대내적으로 번영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어떤 확신을 보여줌. "여러분은 4년전 보다 잘 살고 계십니까?" 레이건은 80년 10월 텔레비전으로 방영한 카터와의 토론에서 미국인에게 거머쥐었다. 1년전 영국 선거에서처럼, 수백만의 노동자층은 사회복지 정당을 내치고 필연적 몰락의 시나리오를 거부하는 후보에게 신뢰를 보냈다. 레이건이 새로운 생각과 각고의 노력이 좋았던 시절을 되돌려줄 것이라고 장담할 때, 미국인은 간절히 그를 믿고 싶어했다.
- 영국의 민영화 프로그램은 헨리8세 치하 수도원 해산이래 아마도 최대 규모의 권력과 재산 이동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국영사업체의 역할이 점차 사라짐에 따라 무려65만의 노동자가 정부에 고용된 상태에서 민간경제로 강제 이동. 납세자 보조금을 박탈당한 산업부문은 간판 인물들이 수익성 없는 업체를 폐쇄함에 따라 급속히 감소. 영국이 과감하게 서비스 경제로 전환함에 따라 79년 노동력의 30%를 차지했떤 제조업 고용은 대처정권 아래서 22%로 감소. 광산 노동자뿐 아니라 모든 노조의 노동운동에 힘을 잃음. 이는 단지 노동법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1세기가 넘도록 그 기반을 닦아온 산업들의 급속한 침식 때문이었다. 79년엔 영국 노동자 54%가 조합원이었다. 노조가 통틀어 거의 300만의 회원을 잃으면서 불과 8년후 그 수치는 42%가 됐다.
- 대처주의의 핵심은 필사적 움직임이면서 경제 실패에 대한 최후의 대응이었다. 대처주의는 만일 70년대의 불행한 추세를 억제하지 못한 채 또 다른 10년간 지속됐을 경우 벌어졌을 결과보다 의심할 바 없이 영국을 더 잘살게 만들었다. 개인적 차원에서 대처의 솔직함,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자신의 진로를 방해하는 장애물과 적들을 밀어버리는 의욕은 예절을 중시하고 직접적 충돌은 삼가는 경향을 지닌 나라에서 많은 이들에게 당혹감을 주었다. 그러나 대처의 타고난 낙천주의, 영국이 다시 한번 역동적이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굳건한 확신은 전염성이 있었다. 대처주의는 경제몰락은 필연이라고 자조하던 한 나라에 속 시원한 탄산음료 같은 것이었다. 88년 당시 재무장관 나이절 로슨은 이렇게 공언했다. "분명한 사실은 영국 경제가 완전히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 하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봤을 때 대처정권의 기록은 전혀 뛰어나지 않았따. 79-81년까지 초기 통화주의 실험은 어느 모로 보나 재난이었다. 81년 갑작스런 방향전환 이후 서유럽의 어떤 나라보다도 경제가 커지면서 상황이 호전됐지만, 아직 활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인플레이션은 국제표준으로는 여전히 높았다. 79-89년 소비자 물가는 연간 7.5% 비율로 상승했는데, 이는 이탈리아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주요 경제국 보다 높은 수치였음. 영국의 공장들이 대처가 처음 다우닝가 10번지로 이사했을 때만큼 많은 생산량을 기록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9년이 지난 88년 겨울이 되어서였다. 대처가 재임말기에 영국 경제의 성장을 부활시켰다가 설명하는 것도 역시 맞지 않음. 노동생산성은 11년 재임기간 동안 과거 10년보다 더디게 증가. 수년간의 형편없는 경제성과에 이어 80년대 하반기에는 몇년간 강력한 성장이 있긴 했지만, 보수당의 정책 전환이 영국 경제를 아주 건강하게 되돌려놓았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옳지 않다.
- 대처에게 비법은 없었다. 그녀의 정책은 80년대 하반기에 몰락한 것처럼 보이던 영국 경제를 되살린 것으로 많은 칭송을 받음. 그러나 79-90년 재임기간 동안 경제는 그녀가 총리로 재직하기 전 10년과 대략 비슷한 비율로 성장. 실업수당 대기 줄이 취임무렵보다 짧아지려면 2000년 가을이 되어야 했고, 그나마 다시는 황금기가 쇠퇴하고 있던 몇개월 동안 그랬던 것처럼 짧아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설령 대처의 성공적 경제실적이 엇갈린다 해도, 그 확신과 완강한 투자는 반대자 사이에서조차 추종자를 만들어냄. 대처의 임기중 9년간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미테랑의 말을 빌리면 "그녀는 적이었지만, 적어도 비전이 있었다" 그 비전은 미테랑 자신에게도 미칠만큼 영향력이 컸다
- 81-82년 정통 사회주의 간주곡이었던 최초의 미테랑 프로그램은 사회주의식 사고의 전환점이었다. 에스파냐가 면밀히 주시한 프랑스의 경험은 정부의 산업 및 금융 소유를 포함해 국가의 지나친 경제장악은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듯 했음. 그것은 또한 어떤 나라도, 프랑스 같은 경제강국 조차도 날마다 투자자들이 환율과 조세정책에 의거해 판단을 내리는 금융시장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자국의 진로를 설정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 신성하게 여기던 사회주의 사상이 더이상 자유시장 사상을 대체할 실행가능한 대안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자들은 국영기업이 아나니 민간부문에서 경제회복을 꾀하는 새로운 버전의 사회주의를 창조해야 할 터였다. 경쟁을 장려하고, 규제해제를 단행하고, 기업이 수익을 내도록 지원하고, 경제생활에서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 모두가 경제의 활력을 되살리는 새로운 사회주의 공식의 일부였음. 오랜 시간 동안 사회당의 충실한 일꾼이던 미테랑은 유럽공동체를 장차 시장의 동력이 지배적 역할을 행사할 훨씬 더 긴밀한 경제동맹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헬무트 콜 및 마거릿 대처와 손을 잡음. 미테랑은 대처의 노조에 대한 반감과 사회복지제도에 대한 불쾌감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제정책에 관한 한 83년 대처와 미테랑은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 경제문제에 관한 한 별로 편하지 않았던 카터는 볼커의 견해를 소상히 알지 못했음. 어느나라의 정치지도자나 그렇듯 대통령은 인플레이션을 떨어뜨리는 데 찬성. 하지만 연준이 그 일을 점진적으로 진행한다면 국민을 일터에서 몰아내지 않고도 물가안정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널리 퍼진 기대를 똑같이 갖고 있었음. 연준이 10년 넘도록 이런 접근법을 시도해봤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대통령의 견해를 바꾸지는 못함. 볼커에게는 그런 환상이 없었따. 78년 출간한 저서에서 그는 "경제를 한결같이 완전고용의 방향으로 계속 진행시키기에는 수요관리 능력의 한계가 있다고 경고. 인플레이션을 끌어내리며 일자리가 희생될 것이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뉴욕 연방은행에서의 지위 덕분에 연준 정책위 위원으로 일하던 79년 초 그는 인플레이션에 맞설 더욱 강력한 조치에 몇번이고 찬성표를 던졌지만, 그의 의견은 소수파에 속했다. 그가 연준 의장이 되고 몇 주후 실시한 논란 많은 9월 18일 통화 정책 투표에서 연준의 고위 관료 4인방은 금리를 높이자는 그의 제안에 반대했는데, 이는 인플레를 저지하려는 그의 계획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 소식은 다음날 아침 워싱턴포스트로 흘러 들어감. "연준 이사들은 달러를 구하기 위해 연일 오름세에 있는 유럽의 금리를 좇음으로써 남성과 여성을 일자리에서 몰아내는 것이, 기업을 파산으로 몰고가는 것이 정말로 말이 되는지 여부를 놓고 최초로 소리내어 의문을 던졌다" 금리 대신 은행의 보유금에 초점을 맞추는 볼커 계획의 백미는 연준 이사들이 정치적으로 불편한 표를 던질 필요가 없을 거라는 점. 10월 6일 연준이 했던 일이라고는 은행의 보유금 증대를 둔화시키기 위한 원칙을 채택하는 게 전부였다. 이후부터는 그 원칙을 고수하기만 하면 되었음. 인플레를 끌어내리는 동시에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얼마나 금리를 높여야 할지 중앙은행 총재들이 토론하는, 논란의 불씨가 될 회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금리는 이제 연준의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연준의 새 정책에는 작지 않은 교묘한 술책이 들어 있음. 모든 관계자가 알고 있듯 은행으 보유금 증대를 줄이려면 연준예치금 대출로 알려진 은행간 1일 대출금리를 높여야 했따. 10월 6일 회의 당시 11.9% 이던 연준 예치금 대출금리는 3주뒤 15.6%를 찍었고, 다음 해 3월에는 17%에 이름. 돈을 빌리는 게 비사지자 은행은 고객과 기업에 대한 대출을 줄임. 장기금리 역시 오르긴 했지만 단기금리 만큼은 아니었다. 이는 1년 이상 확실하게 표명됐던 금융시장의 불황예측이 좀더 강력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시장이 옳았다. 미국의 고금리는 다른 나라의 금리를 인상시켰고, 경제성장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둔화됨. 네덜란드에서는 실업률이 향후 4년가 9%포인트 올랐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5%포인트 이상 상승. 한국은 불황에 빠지고, 브라질의 연이은 강력한 경제성장도 제동이 걸림. 그러나 볼커 쇼크가 처음으로 정치적 피해자를 속출시킨 나라는 미국이었음. 신규주택건설은 절반이 감소했다. 79년 10월 연간 1400만대에 달하던 자동차 판매는 1000만대 미만으로 감소. 실업은 거의 2%포인트 뛰어오름. 비록 불황은 짧았지만,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 92년 연준의 경제학자들은 레이건 시대가 소수에게는 많이, 그러나 다수에게는 거의 아무런 혜택도 가져다주지 않았다고 논평. "소득 및 순자산의 중간값 가치가 약간 상승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 평균값이 상당히 올랐다는 사실은 83-89년 소득 및 순자산 분배가 더욱 편중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왜 레이건 시대의 경제회복 효과는 저소득층에서 그토록 저조했을까? 한가지 이유는 82년 8월 이후 주식 및 채권 가격의 폭등이 주식과 채권을 소유한 가구의 소득과 부를 신장시켰다는 사실. 놀랍지 않게도 이들은 보통 가구보다 훨씬 연령대가 높고 훨씬 더 고소득자일 확률이 높았다. 가장이 55세 이하인 가구는 83년 50가구당 1가구만 채권을 보유했고, 5가구당 1가구가 주식을 갖고 있었음. 그리고 대부분은 몇천불 수준. 월가의 포상금이 부유층에서 덜 부유한 가구로 흘러들어간 것은 금융시장 투자자들이 자기가 횡재한 돈을 자동차 제조공, 웨이터 및 주택 리모델링업자의 추가 소득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쓴 정도였다. 경제 피라미드의 최상부에 위치한 국민의 형편이 나아지면 그 아래에 있는 국민에게도 더 큰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던 공급중시자들의 약속은 절대 지켜지지 않았다. 레이건의 경제학자들은 투자자가 소득을 더 늘리도록 허용하면 경제를 현대화하고 생산성을 자극할 새로운 투자를 유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 그러나 공급중시 경제학은 실패로 판명됨. "내가 생각하는 핵심은 기적이 아니다" 레이건의 예산 총책 데이비드 스톡먼이 86년에 한 말이다. "우리나라 저축률은 현대 들어 최저다. 작년에 생산성 증가가 부진했는데, 우리의 지론은 우리가 폭발적 생산성 증대와 실질임금 인상을 유발할 거라는 것이었다" 대체로 생산성 핵심 지표인 비농업 기업의 작업 시간당 산출량은 한계 세율이 오히려 훨씬 높았던 77년 이전의 어느때보다도 레이건 시절에 더디게 증가했다. 역사적으로 생산성 증가는 임금 상승과 생활수준 향상으로 이어져왔는데, 80년대에는 더이상 그렇지 않았다
- 이렇게 실망스런 상황이 된 하나의 원인은 사회학자 그레타 크리프너가 금융화라 지칭한 것이었음. 그가 주장한 대로 금융 규제 완화와 고금리의 조합은 급속히 팽창하는 신용시장에서 기업들이 돈 놓고 돈먹깅 주력하는 것을 온당하게 만듬. 그런 전환은 "비금융 기업들이 공장의 장기적 설비투자로부터 자본을 빼내 금융투자로 자원을 돌리는 형태를 취했다" 이런 추세는 일찍이 레이건이 지명한 산업경쟁력위원회가 금융자산에 대한 투자수익이 제조업 자산에 대한 수익보다 높다는 것을 관찰한 83년에 익히 알려졌고, 그 10년동안 더욱 확연해짐. 그 결과 기업투자패턴에서 드러난다. 예상됐던 공급중심 투자붐은 자본을 상품제조와 서비스 제공이 아닌 사무실과 빌딩, 쇼핑센터로 투자
- 정부의 역할을 둘러싼 워싱턴과 런던의 이념적 전투라는 틀에서 나온 전문가들의 조언은 개도국의 경제가 보통은 높은 세율과 큰 정부가 아니라 대규모 조세 회피 및 무능한 정부와 더 관련이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민영화가 정부 소유 독점기업을 민간소유 독점기업으로 바꾸는 것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상황에서 그것은 경제적 부흥을 거의 불러오지 않았고, 잠정적 투자자들이 뇌물이나 약정을 요구하는 부패관료의 대열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서 해외투자에 대한 무호개방은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놀라우리만치 높은 문맹률이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걸림돌이 되는 나라에서 단순히 물가를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는 정부로는 사립학교 학비를 구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제공할 교육부처의 역량을 향상시킬 수 없었다. 워싱턴 컨센서스 옹호자들이 간과한 이러한 약점은 개도국의 경제성장을 방해하는 심각한 장애물로 밝혀짐.
- 채무위기 극복과 관련해 전형으로 여겨지는 나라가 딱 한 곳 있었다. 바로 한국. 이 나라의 해외 부채는 85년 말 470억불에 달했는데, 경제규모에 비하면 멕시코보다도 많은 빚이었음. 한국은 워싱턴에서 내놓은 조언을 딱 잘라 거절. 이 나라는 결코 자유시장 경제가 아니었다. 5개년 계획이 어떤 산업을 성장시키고 어떤 것을 축소할지 결정했고, 정부는 어떤 회사가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지 선택했다. 수입장벽은 정부가 필수라고 여긴 산업을 보호. 정부는 자동차 판매를 대폭 제한하고, 기타 제품의 가격을 높게 유지. 가정에는 소득이 큰 비중을 저축하도록 유도. 그 저축이 더 이상 해외 차관을 들여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업의 투자자금을 조달. 한국은 재정 흑자 운영을 위해 공급 중시사상과는 정반대로 세금을 인상했고, 지속적으로 경제성과를 미세조정하기 위해 세금과 정부지출에 손을 댔다. 규제 해제, 민영화 및 해외자본에 대한 개방은 정치적 의제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정부는 교육에 돈을 쏟아부었다. 한국은 새로운 통념을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너무나 쟁쟁한 성과를 거둬 국가가 혹독한 군사독재에서 시끌벅적한 선거민주주의로 전환되던 혼란의 와중에도 해외부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지극히 드물고 하나같이 작은 국가(싱가폴, 타이완, 영국령 홍콩)만이 시민들로 하여금 기본적으로 소비를 보류하고 소득의 3분의 1이상을 저축하도록 강제함으로써 한국을 따라갈 수 있었다.
- 60-73년까지 13년간 다요소 생산성(노동생산성, 자본생산성 및 기술진보를 계산하는 척도)은 미국의 전 비즈니스 부문에 걸쳐 34% 증가. 이와 완전히 대조적으로 73-86년까지 13년간 미국기업의 다요소 생산성은 단 7% 증가. 기업의 효율성은 엄청나게 증가했던게 아니고 거의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멈칫거리며 늘어남. 저조한 생산성 증가가 임금을 억제하고 불안감 확산에 기여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납득가능하다. 그런데 왜 생산성 증가가 지체되었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는 힘들었다. 이론은 흔해빠졌다. 노동자가 생산성 낮은 농장 일에서 고생산성 산업의 일자리로 이동한 것이 50년대의 생산성 증가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지만, 70년대에는 농장을 떠난 노동자가 훨씬 더 적어 생산성이 느려졌다는 이론이 있다. 또 다른 이론은 50년대 베이비붐 이후 20년이 지나 노동력에 유입된 전례 없이 많은 젊은 인구에게는 베테랑 노동자의 숙련도가 결여되어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 그들의 능력이 향상되면 아마도 생산성은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 또는 젊은 저임금 노동자가 대량 공급되다 보니, 고용주들이 노동력 절감 기술 투자에 덜 이끌렸을 거라는 설명도 있다. 어쩌면 석유가격이 과거 최대 생산성 증가를 보였던 화학제품과 섬유 제조업 같은 산업에 특히나 영향을 줄 만큼 치솟은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회사가 에너지 효율 설비를 더 많이 설치함으로써 에너지 비용 상승에 적응해 생산성이 반등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기업 수익률에서 세계적 하락이 발생. 캐나다, 영국, 미국, 서독은 일제히 60년 내내 수익성 하락을 경험했고, 특히 제조업 부문이 그랬다. 일본 회사들은 60년대에 했던 투자에 지출되는 경비가 갈수록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같은 추세를 따랐다. 프랑스의 수익 역시 73년 이후 급격히 떨어졌다.
- 대규모 세금 환급이나 금리인하의 자극은 침체된 경기를 신속히 재가동시킬 수 있다. 비슷하게 감독이 부실한 은행으로부터 쉽게 빌린 돈은 잠시 잠깐 모든 이를 기분좋게 만드는 과소비를 받쳐줄 수 있다. 70-80년대 초의 개도국 붐이 그랬듯 말이다. 그러나 일단 자극이 수명을 다하고 나면, 한 경제의 장기적 성장 잠재력은 전적으로 생산성 증가에 의존함. 70년대 초 이후 모든 경제 부국의 생산성 증가는 경제정책과는 무관한 이유르 인해 예전보다 현저하게 느려졌따. 전후 시대에 더욱 생산적 노동으로 옮아갔떤 거대한 저활용 노동인력을 다시 이용할 수는 없었다. 소농과 소작인은 오래전에 도시로 이주했고, 예전에는 무직이던 여성 노동인력의 유입도 마무리됐기 때문. 고속도로 건설과 항구의 현대화처럼 거의 즉각적으로 생산성 증대를 끌어낼 수 있는 유형의 공공부문 지출도 시행됐다. 노동력에 유입되는 청년 인구는 부모 세대보다 학력이 높긴 했지만 읽고 쓰는 능력이 경제부국에서 거의 보편화한 이상 평준화 교육으로 생산성이 급증하던 시대는 이제 과거가 되었다. 미래의 복리증진은 얼마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 경제기적은 정말로 일어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대와 대부분의 장소에서 경제는 행복감의 갑작스런 분출과 불필요한 노동자를 거리로 내모는 불황이 간간이 끼어드는 가운데 생활수준이 점진적으로 향상하면서 느리게 성장함. 대처와 레이건이 옹호하던 시장지향 경제정책도, 미테랑이 처음 착수한 것과 같은 국가통제주의적 개혁도 그런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됨. 일본과 한국에서는 한때 전 세계인이 숨 막힐 듯 감탄하며 바라봤던 국가주도의 어마어마한 투자 붐이 폭발적 경제성장에 이어 생활수준의 급속한 향상을 가져옴. 이번에도 잠시 동안이었다. 그러나 이들 경제국 역시 결국에는 궤도에서 이탈했고, 그들의 정치 지도자는 더 이상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다.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소 혁명 (0) | 2018.10.22 |
---|---|
1퍼센트를 위한 나쁜 경제학 (0) | 2018.10.13 |
누가 내 돈을 훔쳤을까 (0) | 2018.10.07 |
투자자가 된 인문학도 (0) | 2018.10.07 |
왜 상인이 지배하는가 (0) | 2018.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