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의 세대는 08년을 지각변동의 해로 볼 것이다. 08년을 1917년, 1929년, 1945년, 1968년, 그리고 1989년 격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역사적 분수령을 이룬 시기로 볼 것이다. 언뜻 보기에 관련이 없는 세 위기가 숨돌릴 틈 없이 발생했고, 세상은 어떤 전환점에 도달했음을 알렸다. 세 위기의 전개양상은 다음과 같았다. 08년 7월 1배럴당 147불을 기록한 유가는 경제성장이 환경적 한계에 봉착했음을 알렸다. 8월에는 60년간 이어진 미국의 세계패권이 종점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을 목도하게 된다. 러시아가 미국의 동맹국이자 의존국인 조지아를 침공했는데도 미국은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9월이 되자 미국의 주요 투자은행 가운데 하나였던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 30년간 사실상 무적의 시장지배력을 행사한 극단적으로 자유로운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이 결국 붕괴
- 당시에는 세계질서에 근본적 변화가 임박한 것 같다는 우려가 몇 달 동안 팽배했다. 심지어 보수성향의 사르코지가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을 정도. 그러나 그해 가을에 펼쳐진 드라마는 카타르시스적 위기와 재생을 선사한 것이 아니라 무기력과 혼돈 그리고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지도자들은 유럽의 경우 도덕적으로 온당한 긴축정책, 그리고 미국의 경우 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적 정신무장을 단기처방전으로 동원하면 08년 이전에 누렸던 양지바른 안전지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의 성찬에 설득되는 이는 많지 않다. 대부분은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심각한 부채문제, 하락하는 생활수준, 그리고 깊어지는 불평등의 시절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장기적 측면에서는, 오늘날 세계 자유시장 체제에서 서구세계가 임금과 생활수준을 크게 떨어뜨리지 않고도 과연 부상하는 아시아 신흥강호들의 역동성에 대적할 수 있게쓴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손을 쓰지 않으면 개인적 차원의 불행과 사회적 혼란, 그리고 정치적 갈등이 격해질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 농경사회형 제국들은 전사와 지주세력의 가치를 체현한 귀족집단이 운영. 귀족집단은 특히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하 사제집단과 밀접한 동맹을 맺고,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관료제를 활용. 귀족과 사제 그리고 관료집단 모두를 합해 당대으 지배 엘리트라 할수 있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대중은 노동을 통해 이들을 부양했다. 대중은 다름 아닌 농민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조세형태로 공물을 귀족들에게 바쳤다. 이에 더해 귀족집단은 인근의 힘없는 민중들로부터도 공물을 받았다. 이 형태의 국가는 이전의 씨족기반 사회보다 위계질서가 훨씬 강했다. 무엇보다 대다수가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소작농 집단이 자신들이 수확한 농산물들을 납세형식으로 바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농경사회형 제국은 씨족사회가 크게 달랐다. 소작농들이 공물진상에 대한 대가로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귀족들이 소작농 집단의 기생적 존재에 그친 것은 아니다. 소작농 집단으로서는 토지를 확보해야 했고, 나아가 납세를 감안하여 잉여생산이 가능하도록 최소한의 평화를 보장받아야 했다. 귀족 지배자들은 바로 최소수준의 평화보장을 위해 소작농 집단을 보호했고, 기근이 발생하면 사제집단과 더불어 식량배극에 나서기도 했다. 한편 사제집단은 항상 존재하는 위협적인 자연재난과 질병의 형태로 다가오는 하늘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기도와 종교의식으로 신을 달래는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이런 사회는 문화적 측면에서 위계성이 매우 엄격했을 수도 있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보다 평등한 체제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일정 수준의 자율권 확보에 필요한 토지나 다른 생산자원들을 갖지 못한 점을 볼 때 더욱 그렇다.
- 정착 농경사회의 귀족들이 혈통과 관대함 그리고 용맹을 중시했다면, 현인집단은 이와 확연이 다른 가치체계를 갖고 있었다. 현인집단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한 것은 무기나 토지, 부가 아니라 사상과 상징 그리고 문화에 관한 능력이었다. 여러 옛 사회에서 현인 집단이 수행한 역할은 궁극적으로 두가지였다. 하나는 도덕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신들의 법에 순종하도록 애썼다. 다른 하나는 기술적 측면이었는데, 심오한 규칙을 정확하게 준수하며 정교한 희생 제의와 예식을 집행했다. 이러한 직무는 점차 분명하게 규정된 두 역할로 진화했다. 경전을 해석하고 남녀의 행동양식을 규정하는 이데올로기 주도자 역할과, 사고력과 저술능력을 활용하여 실제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전문가 역할이었다.
- 과거제도가 모든 직급에 걸쳐 중국 엘리트들을 현인화한 것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 과거제도를 통해 공자의 사상과 유교적 기풍이 행정과 정부, 권력구조 전반의 문화에 깊이 스며든 것이다. 그 결과 가운데 하나는, 중국이 과거를 통한 현인화에 걸맞게 전쟁보다는 공공사업과 기근구호 및 복지에 큰 관심을 쏟게 됐다는 점. 어쩌면 유교문화배경의 국가들이 오늘날 경제발전에 성공한 원인을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임. 중국 관리들은 현인과 전사의 도,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문무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했다. 궁극적으로 생사여탈권을 쥔 황제는 전사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관리들은 전쟁을 선호하지 않았고, 전사 카스트에 대한 존중심이 희박한 경우도 많았다. 초기 유교사회에 등장한 권력의 네 구조에서는 전사집단이 빠져 있었다. 맨위에 현인 관리, 즉 선비가 자리했고, 그 아래 농부와 장인이 자리했으며, 맨 아래에는 상인이 차지. 11세기에 군인에게도 자리가 주어졌지만 여덟계급 중 밑에서 두번째로, 부랑자 바로 위 서열에 불과했다.
- 의례나 시험, 도덕적 완결성에 대한 집착은 현인 집단만의 자기만족적 보수주의를 배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즉 집단 고유의 가치에 대한 헌신이 서열과 직급에 대한 맹목적 복종이나 규율에 대한 독단적 집착을 낳을 수 있었다. 중세 유학자들조차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고는 "공허한 장광설과 하찮은 시책을 제기하여 환신을 구걸하려는" 응시자들을 비난했다. 오늘날에도 귀족적이거나 상인의 면모가 강한 카스트들이 전문가와 공직자 집단을 이와 같이 비판하고 있다.
- 1688년 명예혁명이라고 불리는 제2의 오라녀 혁명이 일어남. 영국의 미래가 농경기반 경제에 있다고 봤던 카톨릭교도이자 친프랑스파 제임스 2세에 대항하여 궐기한 반대세력이 오렌지공 윌리엄을 왕좌에 등극시켜 네덜란드식 상인-귀족 통치모델을 수입. 권력의 핵심에 진입한 상인집단의 부상은 1694년 영란은행 설립으로 공식화. 당시 상인집단에 우호적이었던 런던 거주민 존 톨렌드는 이렇게 말하며 기뻐했다. "영국 정부나 런던의 힘과 자유의 위대함을 영란은행 설립처럼 확실히 드러낼 만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상인집단과 부유한 지주들은 윌리엄공과 무력을 갖춘 귀족들에게 전비를 조달해주었고, 그 대가로 이자를 얻음. 징세수완이 나날이 향상된 관료제가 이를 뒷받침했다. 상인집단은 더 나아가 국가에 대한 결정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제는 상인집단이 국왕의 재원조달창구 역할을 했다. 상인집단이 군자금을 조달하는 전쟁은 후일 교역과 플랜테이션에 기반한 광대한 제국건설로 이어짐. 물론 이 과정에서 외국상인집단은 배제되었다. 또한 상인집단은 영국 본토에서 상인 친화적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제 바본 같은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법을 위반할 필요도 없이 번창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드디어 역사상 최초로 상인 집단이 농경기반 국가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그리고 대영제국은 자국의 상인집단 지배체제를 통해 전 세계에서 그들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 터였다.
- 노동세력의 불만이 분출하면서 당시 상인-산업자본가 집단은 아래로부터 치솟는 엄청난 사회적 압력에 시달렸다. 이러한 내부의 골칫거리에 더해 국경너머에는 국제거 경쟁이라는 또 다른 위협적 요소가 도사리고 있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상인 집단의 대응책은 더욱 강경 일변도로 나가 전사집단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1880년대에 이르면 19세기 중반에 쇠퇴하는 듯했던 전사집단이 전열을 재정비하여 진군을 개시했다.
- 20세기를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의 투쟁으로 규정하는 일반적 행태는 일반적 관점이다. 물론 전체주의 진영으로 불리는 나치주의와 스탈린 주의는 중요한 특징 몇가지를 공유했다. 대표적으로 전사집단의 힘이 두드러졌고, 국가폭력을 활용했으며, 이데올로기 주창자 및 동원자로서 현인-사제 집단의 중요성을 인지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둘은 상인집단과 노동자 세력의 위치와 같은 여러 측면에서 다른 점이 많다. 그러므로 이들을 단순히 전체주의적이라고 분류하면, 이들이 자유주의에 대해 공통적으로 지녔던 증오심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반면 당대에 훨씬 중요하다 여겨졌던 다른 특징들을 한데 묶어서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처럼 단순하고 극단적인 분석틀은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유사성을 과장하는 한편 특히 노동자에 대한 고용주의 권력을 강조했던 자유주의와 나치주의의 공통적 특징을 간과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경제계획과 복지국가라는 공통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유사성도 놓칠 수 있다. 자유주의인가 아니면 국가통제인가 하는 논의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각 카스트간의 균형상태다. 앞에서 언급한 각 체제는 나름의 절충안을 취했다. 나치주의는 전사, 강경상인, 그리고 현인의 가치를 취한 반면, 스탈린주의는 전사, 노동자, 그리고 현인의 가치를 택함. 자유주의 진영은 상인과 현인의 세계관을 이어받았고,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현인, 노동자, 온건상인, 심지어 온정적 가부장주의자의 입장까지 받아들였다. 모두가 분주했지만 처한 조건은 비슷했다. 분노한 노동자와 중산층 집단 사이에 그나마 남아 있던 합일점을 경제 위기가 허물어뜨리자 애덤스미스적 중도도 자리를 잃었고, 각 세력들은 결국 질서를 복원하고 살아남기 위해 전사집단으로 시선을 돌림. 이들은 호전적 투사 혹은 사회복지를 앞세운 가부장주의자로 변모하는 경우가 많았다. 로터리 클럽이 지녔던 상인집단이 지배하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꿈은 완전히 부서졌다. 이제 군인들이 다시 돌아왔지만, 구체제 귀족전사집단은 보다 대중적인 전사집단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 브레턴우즈 총회 결과는 케인즈가 보기에 미국의 상인 및 전사집단에게 지나치게 의지한 면이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세계에서 현인집단의 영향력이 정점을 찍은 사례로 볼 수도 있다. 브레턴우즈에 모여든 당대를 주름잡던 지식인들이 속세로부터 유리된 채 장엄한 워싱턴 산을 바라보며 장차 상인집단을 속박하는 데 쓰일 족쇄를 벼렸던 것이다. 이제 시장이 아닌 정부가 환율을 정하게 될 터였다. 게다가 20년대 세계경제에 격심한 불안정성을 초래했던, 아무 제약없이 국경을 넘나들며 진행되는 과거의 자본투자 행위의 자유는 더 이상 불가능했다. 브레턴우즈의 설계자들은 자본투자행위의 자유는 더 이상 불가능했다. 브레턴우즈의 설계자들은 민간은행가들에게 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안겨줄 생각이 없었다. 즉, 이들은 정부 지출이 탐탁지 않을 때 투자자본을 빼버리는 이른바 자본태업을 일삼을 권리를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업계가 이러한 제약조건을 감내할 것이라는 쪽으로 베팅한 셈이다. 기존의 위험한 단기적 투기가 아닌 장기적으로 안정성이 보강된 투자행위를 통해 업계가 이러한 제약조건을 감내할 것이라는 쪽으로 베팅한 셈이다. 기존의 위험한 단기성 투기가 아닌 장기적으로 안정성이 보강된 투자행위를 통해 업계가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 55년만 하더라도 현인-태크노크라트와 노동자 집단이 결성한 동맹체제의 전망은 세계전역에서 낙관적으로 여겨졌다. 상인집단은 단단히 통제되었고, 전사집단의 힘은 여전히 강했지만 냉전이 가져온 국경 경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손발이 묶여 있었다. 최소한 유럽에서는 그랬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아시아와 서구가 번영을 구가했고, 남반구 빈국들도 이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성장기를 누렸다. 영향력 있는 서구 문필가들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하고 나섰다. 훗날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친상인적 견지에서 펼친 역사의 종말론과 내용은 다를 수 있지만 구조적 측면은 유사한 발상이었다. 캐나다 사회학자 시모어 마틴 립셋은 당대의 시대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좌우 진영을 나누었던 이데올로기적 이슈들은 정부 장악구조와 정부장악구조와 경제계획 차원의 문제로 환원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크노크라트 집단이 발휘한 수완이 모든 현안들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렇듯 현인집단이 장악한 45년 이후 체제는 탄력성이 커 보였지만 적게나마 현인주도체제의 종말을 예견한 이들도 있었다. 갈등의 조짐은 50년대 후반에 눈에 띄게 드러났지만, 그 갈등 국면이 체제붕괴의 긴장상태로 돌입한 시기는 68년무렵부터. 그리고 서구세계에서는 79년부터 80년, 대부분의 다른 국가에서는 89년에 이르러 현인 집단지배체제가 완전히 대체됨. 오늘날 현인집단지배체제는 유서깊은 고향인 북유럽에서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
- 현인집단주도체제는 일찍이 케인즈가 브레턴우즈에서 깨달은 것처럼 깊은 구고적 약점이 있었다. 이 체제는 지속가능한 경제성장 달성을 위해 정부가 현인집단의 경제기획력과 상인집단의 경쟁을 융합한 진정한 의미의 협력노선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체제는 2차대전 승전국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국가들의 전사집단이 설계한 것으로, 일종의 온정적 가부장주의에 기반을 두었다.
-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이 66년 현인-테크노크라트 집단을 상대로 혁명을 전개하면서 인도와는 사뭇 다른 급진주의가 등장. 그가 주창한 혁명은 과거 게릴라 투쟁시기의 노동자-전사 집단의 가치와 평등주의 정신을 되살리자는 부추김 속에서 전개됨. 유교에 뿌리내리고 시대에 뒤처진 재앙적 존재였던 그는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같은 테크노크라트 성향 동료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못마당해했고, 현인적 지배체제를 용인하면 얼마 후 상인집단이 주도하는 불평등을 선호하는 풍조가 나타날 거라고 믿었다. 이러한 판단은 65년 12월 그가 한 말에 잘 나타나있다. "관료계급은 노동계급과 가난한 농민집단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세력들이다. 이들의 지도자들이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자본가들이 되고 있다." 마오쩌둥은 66년 개시된 문화대혁명을 통해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악취나는 9등급 세력이며, 인민의 적인 지식인들을 깨끗이 몰아내고 이념적 헌신성을 갖춘 공산주의자들로 이들을 대체하라고 촉구. 그의 주요목표는 현인-테크노크라트 집단으로부터 사회주의를 구하고, 궁극적으로 상인집단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베트남전과 더불어 커지던 미국의 영향력에도 대응하려 했다. 그에게 문화대혁명은 국외 자본주의 세력과 국내 주자파들로부터 중국을 수호하는 일종의 동원체제를 구축하는 길이었다.
- 68년 위기의 직접적 희생자는 브레턴우즈 체제의 경제체제였다. 금본위제가 감당못할 수준으로 막대한 지출을 일삼았던 미국 정부는 68년 3월 금본위제 유지에 대한 의지를 누그러뜨렸고, 71년 닉슨 대통령은 금본위제를 포기. 결국 미국의 씀씀이가 전후 세계질서의 붕괴를 초래한 것으로 여겨졌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무너진 원인들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사연들이 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오리엔트 특급살인에 등장하는 희생자처럼, 브레턴우즈 체제에는 여러 자객이 존재했다. 물론 해리 화이트에게도 어느정도 책임이 있다. 브레턴우즈 체제를 설계할 당시 화이트는 강대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약소국이 통화가치 절하조치를 단행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결정이 미국의 브레턴우즈 체제 유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또 다른 주범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새롭게 떠오른 카스트였다. 상인집단인 이들은 특히 국제업무를 다루는 은행들을 출범시켜 세를 불리고 있었다. 케인즈가 설계한 자본의 국제적 흐름에 대한 엄격한 통제조치는 이미 1944년부터 은밀히 완화되었다. 자국 은행과 다국적 기업들을 지원한 미국은 런던 시티의 금융패권을 복원하는 데 몸이 달아 있던 영국과 의기투합했다. 결국 1957년 양국은 런던 소재 유럽계 은행들이 보유한 달러화가(유로달러) 규제받지 않는 자본시장을 통해 거래될 수 있는 통로를 조심스레 용인. 이러한 움직임은 제어할 수 없는 힘을 풀어놓은 것과 같았다. 상인집단이 1920년대에 자신들이 누렸던 막강한 권력 중 최소한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30년대 이래 빈사상태였던 국제은행들이 되살아나기 시작. 국제은행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정부지출이 과도하다 싶으면 미국 달러화를 포함하여 해당국가의 통화에 막대한 규모의 투기적 공격을 감행했다. 은행가들은 각국 통화가치의 변동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브레턴우즈 체제를 엄격한 금본위제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 브레턴우즈 체제 붕괴에 누구보다 큰 책임이 있는 카스트는 바로 미국 전사집단과, 그들의 숙적인 소련의 전사집단이다. 특히 국제정치를 제로섬게임으로 본 미국 전사집단은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을 미국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는 신제국주의적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막대한 자원을 동원하여 전비확충에 나설 태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전사집단이 이를 결행할 때 브레턴우즈 체제가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브레턴우즈 체제를 무너뜨렸다. 그들은 브레턴우즈 체제 대힌 제약없는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을 용인하는 대안적 정책을 추구했는데, 이는 결국 국제경제의 혼돈상과 사회적 갈등을 초래했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종말은 경제학자나 은행가들만의 관심거리가 될 만한 난해한 이슈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종말은 1945년 이후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어느정도 안정시킨 현인-테크노크라트 주도 질서가 붕괴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사건으로, 모두에게 중대한 의미가 있다. 이전에는 서구사회의 경제성장 모델이 암묵적 이해에 기반을 두었다.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요구를 억제하면 기업측이 투자를 늘릴 것이라는 상호이해에 바탕을 두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브레턴우즈 체제 종말과 함께 달러화가 현인집단의 통제를 벗어나자 인플레이션이 급증했고, 이전 시기의 사회적 신뢰는 허물어짐. 노동자들은 인플레이션 추이를 완전히 상쇄할 수 있는 수준의 보상을 요구했고, 자본가들은 투자를 축소했다. 그 결과 높은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렸다. 독일 같은 조정자본주의 체제내에서는 현인-테크노크라트 집단이 어느정도 영향력을 보유했기에 사회적 긴장을 협사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용주와 노조 사이에서 국가가 주도적으로 협상하는 전통을 찾아보기 힘든 영국과 미국에서는 노사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1970년 미국이 파업때문에 상실한 일인당 근로일수는 선진국권에서 최고를 기록. 또한 1970년대 독일의 연평균 물가상승률이 5.4%였을때 영국의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12%를 상회했다.
- 70년대의 세계가 주요 카스트간의 타협이 아닌 카스트들의 투쟁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세계는 또 다른 혁명적 격변을 경험. 더 강격해진 상인집단은 전사집단으로 눈을 돌려 도움을 청했고, 이를 통해 외교정책 분야에서는 신보수주의적 움직임이, 경제분야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움직임이 득세. 이러한 공격적 노선은 짧게 나마 세계 체제의 정상을 장악했던 테크노크라트와 노동자 집단의 연대를 무너뜨림. 브레턴우즈 체제를 출범시킨 현인집단이 대공황의 교훈을 새기겠다고 굳게 결심한 지 불과 한 세대가 지났을 뿐인데, 세계는 1920년대의 재앙을 초래한 경제체제로 회귀할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 강경상인집단과 전사집단의 의제를 진전시키고 영미의 패권을 재건하는 데 있어 레이건이나 대처보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폴 볼커를 꼽을 수 있다. 물론 대처나 레이건보다 카리스마는 떨어졌던 볼커는 79년 8월 연준 의장이 됨. 월가와 가까운 경제학자였던 그는 오랫동안 확고한 경제적 자유주의자였다. 그러나 볼커는 이미 국제은행들을 장악하고 있던 상인집단에게 손발이 묶인 처지나 마찬가지였다. 닉슨은 70년대 초반에 모순된 전략을 택한 바 있었다. 적자재정운용으로 전쟁-복지국가 건설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동시에 국제자본흐름에 대한 통제를 풀어버린 것. 이 정책은 미국과 다른 서구 세계에 위기를 가져왔다. 금융시장은 미국국채매입을 거부했고 세계 기축통화로서 달러화의 지위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 이러한 환경에서 볼커는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들을 시행하리라고 마음먹었는데, 이는 곧 금융시장을 달랠 수 있는 조치들을 시행하겠다는 의미였다. 79년 볼커는 달러화에 대한 국제자본의 수요를 증대시키기 위해 엄청난 수준의 금리인상을 단행. 그는 이 조치를 정당화하면서 고용주들이 비용절감과 임금삭감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강변. 이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잡고 통화가치를 회복하며 투자자들을 미국시장으로 유인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실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 볼커의 금리인상조치는 신자유주의시대의 진정한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로써 미국의 전사집단은 과거 현인-테크노크라트 및 노동자 집단과 맺은 브레턴우즈 동맹을 포기하고 상인집단과 같은 배를 탔다. 볼커는 금리인상을 통해 미국 경제가 장기적으로 혜택을 볼 것이고, 물가도 4% 밑으로 떨어진 뒤 장차 20년에 걸쳐 그 수준 또는 미만수준을 유지할 것이며, 미국으로의 자본유입도 활발해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산업부분이 치러야 할 비용은 너무 컸다. 차입 금리가 지나치게 높았을 뿐만 아니라 고평가된 미국 달러화 때문에 수출업도 큰 타격을 입었다. 그 와중에 임금하락과 실업률 상승으로 인해 노조의 힘이 약해졌다. 93년 미국의 실질임금은 78년 기준으로 15% 하락한 상황이었다.
- 레이건이 남긴 유산은 궁극적으로 평화와 자유시장, 그리고 막대한 부채였다. 물론 이는 20년대가 남긴 유산과 비슷했다. 1918년 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89년에도 시대의 흐름은 뚜렷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서진영을 막론하고 폭력적 전사집단과 유토피아적 이상을 추구했다는 현인집단이 이끌어온 구체제가 수명을 다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이 구체제는 코즈코폴리턴 상인집단이 이끌어갈 세계에 길을 내주고 있었다. 귀족사회와 상업사회 간의 차이를 잘 이해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했듯 역사는 종말을 고했다. 니체가 일신의 편안함에 매몰된 열정없는 인물을 가리킨 마지막 인간이 드디어 세상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후쿠야마는 상인집단의 영구적 지배를 예언했다가 엄청난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92년 펴낸 책은 앙드레 지그프리드가 비슷한 책을 27년 출판했다가 불운을 맛본 사례에 비하면 수명이 길었다. 왜냐하면 후쿠야마가 등장한 시대의 온건상인집단의 사회적 위치는 훨씬 막강했고, 반면 그의 적들은 힘을 소진한 상태였기 때문. 게다가 상인집단은 이미 수많은 과거의 적들을 자기편으로 포섭한 상황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심지어 68년과 89년 혁명을 주도했던 보헤미안 세력도 있었다.
- 브레턴우즈를 2차대전 시기에 현인집단의 거물들이 모여든 올림포스 산이라 한다면, 다보스는 새로이 출현한 상인집단의 신에 비견될 만한 인사들이 웅거하는 발할라라 할 수 있다. 다보스 포럼은 금권주의자들을 위한 일종의 로터리 클럽이다. 2012년 참가비용은 무려 7만 1000불에 달했다. 로터리 클럽 회원들이 20년대에 세계 상인 집단을 상징했던 것처럼, 다보스 포럼은 다보스맨이라는 시대적 인물상을 90년대와 2000년대에 선사했다. 물론 유능한 협상가인 상인집단은 다른 카스트들을 배제하진는 않았다. 현인집단이나 전사집단이 아직도 많은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들 단독으로는 전 세계를 한방에 정복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 해를 거듭하며 다보스 포럼은 군부 독재자로부터 공산당 관료에 이르는 다양한 인사들을 초청.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선은 분명히 존재. 그리고 참석자 대부분은, 자유민주주의의 필연적 승리에 대한 믿음을 언제나 공유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탈규제 시장이야말로 바람직한 미래상이라는 관점만큼은 기꺼이 받아들임
- 들로르는 프랑스가 83년 맛본 굴욕을 통해 확신을 얻었다. 즉, 그가 사랑하는 현인, 상인, 그리고 노동자 집단사이에 형성된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타협적 질서가 미국이 주도하는 시장자본주의의 공세로부터 살아나으려면, 유럽이 동원 가능한 모든 자원을 끌어모아 하나로 뭉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유럽의 개별 국민국가들은 이 공세에 대적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유럽이 뭉치려면 그 과정에서 상인집단에게 상당한 양보를 할 터였다. 자본이동에 대한 통제를 없애고, 단일시장을 건설하며, 궁극적으로 상인집단의 투자를 보장하기 위해 단일 고정통화를 도입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유럽국가들이 위대한 계획을 통해 단일 체제로 묶이면, 국제 금융시장의 가공할 영향력에 맞서 유럽 고유의 복지국가체제와 국가주도형 산업정책을 보존할 정도로 힘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결국, 위대한 계획은 유럽 대륙판 제3의 길이었던 셈이다.
- 들로르의 구상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어느정도 호응을 얻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유로체제가 브레턴우즈 체제를 보다 시장지향적으로 진화시킨 제도라 여겼다. 이들은 유로를 도입하면 시장이 요구하는 통화안정성과 국제무역 신장세가 친성장 정책과 결합할 거라고 판단했다. 프랑스 경제처럼 취약해진 유럽권 경제에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와 진단이었다. 그러나 유로는 기대와 달리 20년대식 금본위제 같은 양상으로 작동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상인 친화적이고 반인플레이션적 족쇄로 기능했다. 또한 유로 출범이 대표적 희생자 가운데 하나는 바로 프랑스였다. 유로는 출범 시점부터 훗날 파국을 불러올 잠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브레턴우즈 체제만 하더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은 국가들이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하고 수출증진책을 시행할 여지를 주었지만, 유로는 예외없이 개별통화를 단일 통화체제로 영원히 못 박아버렸다. 말하자면, 통화 평가절하조치라는 선택지를 애초에 제거했다. 게다가 유로는 상당히 제한적인 반인플레이션 제도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이는 유로 출범당시에는 프랑스의 입김이 많이 반영됐지만 후일 독일이 그 주도권을 낚아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 08년 발발한 금융위기가 1930년대 대공황이 초래한 변하에 미치지 못하는 등 파급력이 제한적인 이유는 무얼까? 우선 08년 금융위기의 직접적 위기요인이 30년대 위기상황에 비하면 신속하게 제거됐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중산층 미국인들이, 대공황기 최악의 시절처럼 지하철을 가득 ㅁ운 집 없는 실업자 무리를 헤치며 다녀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인집단이 70년대 이래 구축한 강고한 권력기반도 상당히 중요한 몫을 했다. 2000년대의 상인집단은 20년대 상인집단ㅇ 비해 상당히 강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자원을 보유했다. 그들은 심지어 세계 전역의 상인 친화적 섬나라들과 조세 피난처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도 있다. 뜻대로 안되면 사업장을 옮겨 조세수입에 타격을 주고, 심지어 몸을 숨길수도 잇는 자신들만의 왕국까지 확보한 것이다. 나아가 이들 상인집단은 지난 수십년간 정계에도 발을 넓혔다. 특히 이들이 돈이 핵심적 역할을 하는 미국 정치권에 구축한 영향력은 상당하다. 뿐만 아니라 저세율, 민영화, 그리고 재정 적자감축을 골간으로 한 이들의 노선은 시간이 흐르면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확보했다. 또한 70년대 이래 유연하고 시장지향적인 민간부문이 확산되며 대중 사이에서 상당한 동맹세력이 성장했다. 민간 부문 종사자들은 다른 집단에 비해 시장체제의 가치들을 더욱 기꺼이 받아들이는 성향을 보인다. 최근 등장한 미국의 전투적 자유시장주의 세력 티파티는 상인집단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 사례다
- 은행권은 근래의 경제위기에 약간의 책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은행권의 행태보다 중요한 것은 은행권의 현 패권을 지탱해온 전 세계에 만연한 상인적 가치라는 논지를 전개했다. 상인 집단은 지난 30년 넘게 공세를 취했다. 그들은 우선 앵글로색슨족의 세계에서 상업 및 산업부문을 정복했고 점차 다른 카스트 집단의 권력을 잠식해 갔다. 이 과정에서 상인집단은 스포츠에서 학교, 텔레비전 방송에서 음악, 복지에서 전쟁에 이르는 인간사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들의 가치체계를 확산시킴. 더 나아가 상인집단은 세계 전역에서 인류 사회를 변모시키려 했고, 성공과 실패를 두루 맛보았다.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상인 집단이 거둔 승리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전후 질서를 장악했던 현인 카스트 동맹은 60년대 말엽에 이르러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질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들은 문화적 경직성 때문에 새로이 목소리를 높여가던 여성, 청년, 그리고 인종적, 성적 소수집단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반면에 상인집단은 20년대에 그랬듯이 냉전시대의 군국주의 노선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대안 제시를 약속했다. 뿐만 아니라 상인 집단은 경제 영역에서 당시 절박하게 필요했던 새로운 에너지를 불러 일으켰고, 60년대 학생운동 이후에 창조적 카스트로서 사회에 진출했으며, 낡은 사회 위계질서를 붕괴시켰다. 그러나 20세기 인류사가 보여주듯, 모든 카스트 집단은 욕심을 지나치게 부리다가 망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정 카스트 중심의 에토스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면 여러 다양한 재앙이 닥친다
- 다른 카스트 집단의 사례와 달리 상인 집단 지배의 맹점은 다소 불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08년 위기를 통해 세계는 그 맹점을 보다 분명히 직시하게 된 것 같다. 상인 집단의 치세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상인 집단이 표방하는 단기효율성과 과도한 유연성에 입각해 행동하도록 압박했다. 그 결과 상인집단은 인간의 행복추구에서 불가결한 요소인 가치체계를 훼손할 위험을 초래했다. 장인 집단이 지닌 창의성과 기술에 대한 자부심, 현인-테크노크라트 집단의 장기적이고 조정된 발전에 대한 추구 등도 경시됐다. 이처럼 행위와 존재, 그리고 삶의 방식에 대한 대안적 입장에 무관용으로 일관한 상인집단이 치세하면 경제적 불안정성이 커지고, 사회적 불평등이 깊어지며, 환경적 재앙이 고개를 들게 된다
- 그러나 상인세력이 혁명에 의해 전복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중의 지지를 심각하게 잃을 정도로 실용적 측면과 적응력이 낮은 집단이 아니기 때문. 게다가 상인집단은 경제적 실패자들이 겪는 문제에 대해 편리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답안을 갖고 있다. 바로 희생자 측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 인류사에서 상인지배체제는 29년에 그랬던 것처럼 내부적 결함에 의해 패망하는 경향을 드러냄. 상인 집단체제가 대표적으로 드러낸 경제적 약점은 상인집단의 에토스와 현대경제를 조화시키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상인집단의 주요 가치는 변화하는 사회의 문화와 요구에 대한 민감성과 유연성을 우선시함. 이를 뒤집어보면 상인집단은 묶여 있기를 꺼린다는 의미인데, 달리 말하면 장기적 관점의 자본투자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뜻. 그러나 장기적 관점의 자본투자는 대규모 산업개발이나 구조조정에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다
- 오늘날 세계는 3중위기에 처해 있음. 경기침체, 부채, 기르고 국제무역 및 금융 불균형이 맞물려 초래한 위기국면에서 자유로운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이런 3중위기는 바로 상인집단의 지배가 초래한 예견가능했던 결과다. 70년대 들어 브레턴우즈 체제에 기반한 세계경제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상인세력이라는 신흥 카스트 집단은 개별국가 및 국제무대를 통해 구조조정과 투자를 해결책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그 대신, 8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동안 상인집단은 경쟁세력에 대한 공격에 여념이 없었고, 합리적 시장가설과 주주자본주의론을 앞세운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켰다. 상인집단의 이러한 처사에 힘입은 은행권은 생산적 투자부문에서 자원을 이탈시켜 투기적 거품을 키웠을 뿐 아니라, 서구 사회 시민들이 하락한 실질임금을 보충할 수 있도록 대출에 나섬. 게다가 민주적으로 선출된다는 정치인 집단은 절박하게 필요한 성장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유형의 빚을 동원하도록 고무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왜냐하면 현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저성장은 불평등의 확대와 사회적 갈등의 증폭, 나아가 선거패배를 의미하기 때문
- 역사를 살펴보면, 전반적인 카스트 관계를 재편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사회적 관계와 가치체계 양 측면이 동시에 변화해야 했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이룩한 카스트 간 타협은 29년 상인 지배체제가 파열하고 15년간의 혼돈과 500만명에 달하는 인명희생을 겪은 후 가능한 일이었다. 상인 집단지배로의 귀환이 해결책이라던 하이에크의 주장은 거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게다가 브레턴우즈 체제를 통해 지적 측면에서는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그 자체로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 대한 마셜 원조도 노동계의 압력행사와 노동계급의 반란에 대한 우려 때문에 시행될 수 있었다. 동시에 더 공정하고 효율적인 경제체제가 이를 뒷받침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외부로부터의 위협과 전사집단의 영향력도 브레턴우즈 체제 출범이후 세계 질서에 일정한 몫을 했다. 냉전이 서구 세계의 각 카스트들로 하여금 공산주의에 맞서 상호협력하도록 강제했기 때문. 이는 19세기 펼쳐진 제국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패권다툼이 상인과 현인집단으로 하여금 지배동맹을 결성하게 했던 것과 맥락이 같다.
- 영국과 미국의 자유주의적 친상인패권은 19세기 말 이래 처음으로 세계 시장에서 도전에 직면한 셈. 바로 현인적 역량이 영미권보다 강하고 수출 주도형 자본주의 노선을 따르는 잠재적 적대세력인 중국의 경제적 도전이다. 중국의 도전에 비견할 만했던 45년 이후 독일과 일본, 아시아 호랑이 국가들은 사실상 미국이 비공식적으로 거느린 제국의 일원이었기에 돌발적 긴장국면을 관리하기가 훨씬 쉬웠다. 이에 비해 중국은 빌헬름 황제 시절 독일과 유사한 부분이 많음. 당시 독일 제국처럼 오늘날의 중국도 수출주도형 자본주의를 택해 상인 패권에 도전한 상태다. 또한 두 나라 모두 국수주의적이고 강경 상인집단이 주도하는 정치 행태를 보임. 중국은 전통적 성향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해관계를 반영한 선택일수도 있지만 14년 이전의 독일보다 호전성이 적다.
- 우리는 평등성 제고에 유념하면서 카스트와 그 기본원리인 노동분업에 더욱 도전적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이다. 청년시절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 "인간은 오늘 한가지 일을 하고, 내일 다른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낚시를 하며, 저녁에는 가축을 기르고, 저녁을 먹은 뒤에는 비판적 토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사냥꾼, 목동, 어부 또는 비평가가 되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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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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