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뇌는 천성적으로 낙관하는 경향을 갖고 있으며 이는 오랜 진화의 결과. 즉 우리의 뇌는 미래를 예상할 때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전개될 것이라고 믿으며 예상하지 못한 사고나 불행을 굳이 가정하지 않음으로써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을 억제하고 상대적으로 도파민 수치를 높임. 신체에 부담을 주어 건강을 약화시키는 요인을 억제함으로써 생존에 유리한 방향을 선택한 것.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낙관하는 뇌는 비관적 결과가 쉽게 예견되는 상황에서도 이를 본능적으로 부정하고 외면하며 심지어 애써 낙관적인 모습으로 포장까지 한다는 것. 사람들이 평상시 가장연습을 등한시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음.
- 영국 철학자 길버트 라일은 인간은 인지능력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범주착오에 빠져 있는 존재라 규정. 인간은 모든 것을 잘게 나누어 이해하는 분석적 속성을 갖고 있어 작은 부분들은 잘 보면서 그것이 속해 있는 전체 그림은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 그렇게 되면 작은 것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큰 것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지극히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됨.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것. 마치 지도책에서 커다란 글시를 보지 못하거나 작은 파도들만 보고 너울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 우리는 스스로를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믿지만 이 범주착오 때문에 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합리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음. 더구나 우리들은 자신이 범주착오에 빠져 있는 존재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도 대체로 무감각하고 무지함. 그렇다보니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작고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즉각적으로 반응하지만 정작 그 뒤에 닥쳐오는 거대하고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무관심함. 심지어 어마어마한 문제가 이미 자신에게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 자체를 미처 깨닫지 못하는 이상한 일도 벌어짐. 마치 눈앞에 밀려오는 작은 파도들에만 온통 눈이 팔려 멀리에서 덮쳐오는 너울을 보지 못호 그대로 검은 바닷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버리는 희생자들처럼 말이다.
- 1차 세계대전은 경제발전의 원동력을 얻는 데 사용했던 주요 에너지 자원이 석탄에서 석유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빚어진 분쟁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 우리가 흔히 간과하고 지나치는 역사적 사실은 이 시기에 에너지 자원이 부족했던 독일이 중동지역의 원유자원을 선점하기 위해 쇠락해 가던 오토만 제국에 야심적으로 손을 뻗쳤다는 사실이다. 당시 동유럽과 중동지역에 걸쳐 넒은 영역을 통치하던 오토만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들여온 막대한 차관으로 빚더미에 앉아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에 독일은 구원의 손길을 내밀며 부채를 대신 갚아주는 조건으로 1899년과 1902년 두차례에 걸쳐 터키에서 바그다드를 거쳐 페르시아 만에 인접한 바스라까지 이어지는 철도에 대한 독점적 개발권과 사용권을 얻어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철로를 따라 양쪽으로 40킬로미터 폭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굴되는 모든 지하자원에 대한 독점권을 독일이 갖는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독일은 새로운 에너지 자원인 원유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독일은 군사전문가를 파견하여 오토만 제국의 군대를 새로 재편하고 군사훈련을 배후에서 지휘하면서 이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강화하기 시작.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도 주요 에너지 자원을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림. 영국은 풍부한 석탄매장량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국내에 원유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에 매우 소극적이었음. 하지만 독일의 급속한 발전에 위기감을 느껴 마침내 에너지 정책을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고 중동지역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 이후 1909년에 쿠웨이트로부터 페르시아 유전에 대한 독점권을 따냈고 독일의 중동지역 철도개발에 제동을 거는 물밑 외교전을 펼치기 시작. 이때부터 이미 중동지역에서는 원유라는 새로운 에너지 자원을 두고 제국간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 이처럼 당시 유럽대륙은 오토만 제국이 통치하던 영토와 자원을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고조된 제국간 갈등으로 어디를 건드리더라도 터졌을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굳이 공작내외의 암살사건이 아니었더라도 무언가를 빌미로 전쟁이 시작될 것이 거의 확실했다.
- 합성원유는 이를 얻는 과정에서 천연가스의 형태로 투자된 에너지의 5배에 해당하는 순에너지를 갖게 됨. 얼핏 들으면 상당한 양의 순에너지를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 소위 쉬운 원유의 경우 투자된 에너지 대비 50배 정도의 순에너지를 얻는데, 이에 비하면 매우 적음. 채굴과 분리과정에서 환경파괴로 인한 피해와 복원비용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경제적 가치는 마이너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지난 수년간 전체 원유 수입량의 10%를 캐나다의 천연 아스팔트에서 얻은 합성원유로 채웠음. 그로 인해 캐나다의 앨버타 지역에는 오일머니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지역경제가 살아났다. 하지만 대규모로 진행된 환경오염으로 인해 몸살을 앓는 희비가 교차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가 여론의 따가운 질책을 무시한 채 그동안 거들떠 보지도 않던 천연 아스팔트에 적극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정부에서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논리는 캐나다는 오일머니로 인해 경제가 살아나고 미국은 중동원유에 대한 의존율을 낮추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므로 서로가 윈윈하는 정책이라는 것. 그러나 정치경제적 논리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더 중요한 이유는 원유생산량 정점 때문이라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함. 아주 가까운 미래에 인류가 사용해왔던 쉬운 원유가 동이 나면서 더이상 원유에서 순에너지를 많이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정책적 판단이 배경에 깔려 있음.
- 현실을 직시하고 나면 아직 마땅한 대체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렇게 많지 않다. 연료를 적게 쓰기 위해 자동차를 속도를 줄이던지, 아니면 지금의 속도를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원자력 의존도를 더욱 높이게 될 것이 확실해 보임. 그런데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의 수용한도가 가까워지고 있는데다 지금까지 가동하던 원자로마저 한계수명여 다다르고 있는 시점에서 원자력 에너지의 비중을 높인다는 것은 비현실적. 그렇다고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는 것도 흔쾌히 받아들이기 어려움. 이것은 경제가 급격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지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저 시간이 지나면 등 떠밀리듯 에너지 자원이 부족해지는 시대로 걸어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것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까운 미래에 말이다.
- 과거 수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대멸종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며 가장 번성했던 종들이 예외없이 멸종의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것. 페름기 대멸종 사건에서는 삼엽충과 암모나이트 같은 바다동물이 멸종했고, 백악기 대멸종 사건에서는 공룡을 위시한 거대 파충류가 멸종.
- 지능형 전력망은 기존의 한방향 전력망과도 분리하여 운영해야 하므로 고립된 지역이나 비교적 규모가 작은 자치 단위의 중소 도시에 적합. 미국, 캐나다, 유럽, 일본과 같이 지방자치제가 잘 정착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각 지역 공동체 단위의 소규모 발전소를 중심으로 어렵지 않게 이 방법을 실현해 볼 수 있음.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인구의 대부분이 몇개 도시에 집중되어 있는 나라에 적용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 사회의 온도가 높아지고 구성원들의 속도가 빨라지면 에너지의 극히 일부분만 질서를 창출하는 데 쓰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낭비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열역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온도가 높은 사회는 에너지 효율이 지극히 낮은 사회. 근현대에 들어와 인류가 소비하는 에너지 자원의 양이 가파르게 증가하게 된 이면에는 바로 이같은 열역학적 원리들이 작동하고 있다. 사회의 온도가 올라가고 모든 것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유용한 일로 활용되지 못한 채 버려지는 에너지가 큰 폭으로 증가한 것. 그렇게 되면 똑같은 정도의 질서를 창출하더라도 훨씬 많은 양의 에너지 자원을 소비하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에너지 수요는 폭증. 속도를 줄이고 온도를 낮추는 것 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와 같은 열역학적 결과를 피해갈 수 없다. 열역학 법칙은 그저 자연이 운행하는 섭리일 뿐이기 때문. 오늘날 우리 사회의 온도도 너무 높고 구성원들의 속도도 너무 빠르다. 에너지 지원이 부족해지기 시작하면, 우리 사회의 에너지 소비 패턴은 결코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 한정된 에너지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낭비되는 에너지를 최소로 줄여야 함. 결국 낭비되는 에너지를 줄여 제한된 양의 에너지 자원으로부터 최대한의 효과를 창출하려면 모든 활동 영역에서 속도를 줄이고 사회의 온도를 낮추는 것이 바람직함. 그 길이 바로 최선의 에너지 절약이다. 문제는 속도를 줄이고 온도를 낮추는 것이 결코 과학기술로 실현될 수 없다는 것. 일반 대중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그런 방향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과학은 손을 놓고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다. 이런 사실은 엑셀을 힘껏 밟은 채 속도경쟁에 몰입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오로지 앞으로 달리는 데만 쏟아 붓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 오늘날 우리 의식구조에 자리잡은 경제 패러다임은 열역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에너지 문제 해결방향과 정면으로 충돌. 소비가 미덕, 지속성장, 끝없는 발전, 무한경쟁, 속도전과 같이 인류가 만들어낸 경제개념들은 인류의 에너지 수요를 폭증시키면서 인류와 지구사이의 에너지 균형을 깨뜨려버린 주범이나 다름없다. 그중에서도 오늘날 현대인의 에너지 소모적인 의식구조와 행동양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소비가 미덕이라는 경제구호임. 자원과 폐기물 문제의 관점에서 보면, 이 구호는 가히 인류의 사상적 발명품 중 가장 최악. 제품이 만들어지기 전 단계인 자원과 버려진 후의 마지막 단계인 폐기물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제품의 금전적 가치라는 단편적 지식에만 얽매이게 만든 구호이기 때문. 범주착오에 빠져 전체를 보지 못한 채 눈앞에 놓인 단편적 부분에만 집착하고 있는 인간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의 전형. 인류가 추구하는 엔트로피가 낮은 질서정연한 상태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기존의 것들을 허물고, 그 위에 다시 쌓는 방식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 결코 아님. 원래 있던 것을 계속 보강가호 덧대어 튼튼하게 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음.
- 분자운동론의 관점에서 사회를 보면, 경제활동에서의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는 조건에서는 부의 쏠림현상이 어떤 형태로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골치거리를 안겨주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경제학자들은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각 개인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방향을 움직일 거이라고 역설하는데 그 결과가 결국 부의 쏠림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 더구나 분자운동론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온도가 올라가면 충돌빈도수가 증가하면서 수시로 부가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어야 마땅한데, 어떤 이유로든 이 현상이 억제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짐. 그렇게 되면 부의 쏠림현상이 심화되는 동시에, 활성화되어야 할 부의 전이와 분배가 억제되면서 가진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없는 자는 결국 파산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됨. 실제로 2000년대 금융위기로 촉발된 전세계적인 경제혼란은 그와 같은 상황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여러 선진국에서도 현실이 되어 나타났음을 여실히 보여줌.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 왜 예상되는 결과를 벗어난 것일까? 그 이유를 분자운동론에서 전제로 하고 있는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가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입자들간의 충돌은 탄성적이라는 가정이다.
- 개인이나 기업간의 경제활동이 탄성충돌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가장 흔한 경우는 이들 사이에 지켜져야 할 법칙이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았을 때이다. 사회 구성원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법이 강자에게는 관대하게, 약자에게는 있는 그대로 적용되는 사례가 대표적인 예. 특히 경제사범과 관련된 법이 불평등하게 적용되기 시작하면 그 결과는 매우 참담해짐. 그렇게 되면 경제활동에서 항상 가진자가 없는 자의 것을 가져가는 결과가 빚어짐. 자신의 위치를 다진 강자는 굳이 자기개발에 정진할 필요도 없어짐. 게임의 결과는 이미 나와있기 때문. 이 경우 아무리 많은 벤처기업들이 기발한 아이디어와 주도면밀한 사업계획을 갖고 시장에 뛰어들어도 이미 자리를 굳힌 거대기업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낳게 됨. 그와 같은 상황이 얼마간 지속되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마침내 두부류로 나뉨. 한편에서는 잘 나가는 기업들이 몸집을 불려가며 갈수록 그 힘을 더해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도산으로 내몰리는 작은 기업과 모든 것을 잃어버린 힘없는 개인들이 늘어남. 비탄성적 충돌이 계속될수록 그런 상황은 악화됨
-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의 운동에너지를 위치에너지로 바꾸는 것일까? 일상생활을 위한 지출과 이윤창출을 위한 투자는 개인의 경제활동으로 이어지므로 모두 운동에너지에 해당. 이와 달리 묵혀둔 안전자산이나 금융기관에 맡긴 예금은 위치에너지에 해당. 따라서 투자에는 신중을 기하되 불필요한 지출은 줄이고 안전자산과 저축을 늘이는 것이 자신의 운동에너지를 위치에너지로 전환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검소와 절약, 그리고 근면함이 요구됨. 모든 것은 자신의 능력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담보로 돈을 빌리거나 자신이 가진  모든 자산을 털어 투자에 뛰어들 때는 지극히 신중해야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운동에너지를 잃을 확률이 커지기 때문이다. 지출을 줄이고 저축을 늘이며 투자에 신중을 기한다는 것은 운동에너지를 줄임으로써 속도가 느려진다는 것을 의미. 빠르고 느린 두 입자가 충돌하면 느린 입자가 빠른 입자로부터 운동에너지를 건네받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처럼 사회적으로도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속도가 느린 사람이 실제로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정신업히 돌아가는 주변상황에 휩쓸리다 보면 자칫 속도가 빠른 사람이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을 갖기 쉬운데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음. 검도에서도 자주 보듯이 빠른 속도로 돌아다니기 보다는 마치 서 있는 듯 신중하게 기회를 기다리다가 결정적 순간에 자신의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전환하여 달려오는 상대를 전광석화처럼 정확하게 가격하는 것이 훨씬 승률이 높다. 즉 승리의 관건은 신중함과 정확성이다.
- 굳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아도 그리고 굳이 사회가 미친 듯이 빨리 돌아가지 않아도 경제가 발전하고 사람들의 삶이 윤택해질 수 있다는 것을 온도가 낮은 사회인 독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화석연료를 재생가능에너지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팔을 걷고 나선 점이다. 적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도 질서정연한 상태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현재 인류가 직면한 고갈되는 자원과 쌓이는 쓰레기 문제를 모면할 근본적 해결방안들이 어쩌면 이들을 통해 그 윤곽을 드러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는 온도가 매우 높은 사회의 대표적 예이다. 분자운동론의 관점에서 보면 온도가 높다는 것은 전체 운동에너지가 커서 전반적으로 구성원들의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의미. 그러한 모습이 외국인의 눈에는 역동성으로 비친 것.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변화에 빨리 적응하고, 또한 빠른 변화를 주도한다는 특징이 있음. 그래서 우리나라는 아주 작은 나라임에도 거의 대부분의 속도경쟁에서 유독 뛰어난 성적을 기록. 그 이면에는 바로 우리나라 국민의 역동성이 자리함. 그런데 에너지의 관점에서 보면 역동성이 갖는 단점이 눈에 들어온다. 열역학적 관점에서 보면 온도가 높고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곧 에너지 효율이 낮아녀 낭비되는 에너지가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 열역학에서 유용한 일로 전환할 수 있는 이론적 최대치를 나타내는 깁스프리에너지 식에서 온도가 올라가면 엔트로피항의 값이 커짐. 온도가 올라가면 그만큼 낭비되는 열량이 많아진다는 의미. 또한 온도가 올라가면 자연스레 모든 것들의 속도가 빨라지게 되고, 그 결과 변화에 개입되는 비가역성도 덩달아 커지게 됨. 비가역성이 커진다는 것은 유용한 일로 변환되지 못한 채 버려지는 열량이 많다는 것을 의미. 결국 온도가 올라가고 동시에 속도가 빨라지면 에너지 효율이 뚝 떨어짐. 같은 거리를 가더라도 훨씬 많은 연료를 태우는 것. 따라서 온도가 높고 속도가 빠른 사회는 누가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느냐는 속도경쟁에서는 이길지 몰라도 누가 더 적은 에너지로 목적지에 도달하느냐는 에너지 효율 경쟁에서는 낙제점. 온도가 높고 속도가 빠른 역동적 사회는 부의 편중현상과 극심한 빈부격차 등 새로운 사회문제도 안게 됨. 온도가 높으면 분자운동론에서 맥스웰-볼츠만 곡선의 모양이 위에서 짓눌려 펑퍼짐하게 벌어진 모습으로 변하기 때문. 지금 우리사회는 바로 그런 역동적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전형적 현상을 그대로 경험하고 있음. 여기에 경제활동에 있어서의 개인의 평등마저 제대로 보장되지 않게 되면 최악의 경우 사회 양극화로 치달으면서 스스로 무너지는 길로 들어설 위험도 안게 됨. 보다 근원적 문제는 과연 그 역동성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운동에너지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전환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그것도 부족해 다른 곳에서 빌려온 에너지까지 모두 운동에너지로 쏟아붓고 있다. 우리나라 가계 빚이 1000조원이라는 가히 천문학적인 규모에 도달했다는 통계와 정부의 공공부채마자 이에 버금간다는 발표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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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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