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이펙트(10그레이트이펙트 9)

저자
프랜시스 윈 지음
출판사
세종서적주식회사 | 2014-06-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마르크스의 고뇌와 영감의 집결체 [자본론] 의 기원을 추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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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도할 정도의 완벅주의자라 할 그는 그가 그리는 그림에 계속해서 새로운 색조를 입히려 들었음.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작업인 셈. 마르크스는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중간에 수학을 공부하고 천체의 운행에 대해 학습하기도 했으며 러시아어를 독학해서 러시아의 토지제도를 파악하는 노력을 기울임. 이런 그의 태도는 발자크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프랭오페르의 말을 또다시 인용하면 이런 식이 된다. "아, 이런. 내 작품이 다 완성되었다고 한순간 생각했었는데, 몇 군데 세밀하게 표현되어야 할 부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뭔가 미심쩍은 것을 완전히 고치기 전까지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만 같아. 그래서 나는 터키, 그리스 그리고 아시아 여행을 하기로 했지. 그런 곳에 가서 여러가지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자연과 내 그림을 비교하면서 좀더 확실한 모델을 찾아볼 작정이네."
- 마르크스는 사실 자신의 위대한 저작을 모두 끝끝내 완성하지 못함. 이것은 어느모로 보나 가장 현실적 평가임. 자본론 1권만 마르크스가 살아있는 동안에 출간되었을 뿐이며, 나머지 후속편들은 그가 죽고나서 다른 사람들 손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보게됨. 그것도 마르크스의 서재에서 발견한 그가 남긴 메모와 연구초고들을 기초로 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저작은 자본주의 체제자체와 마찬가지로 결말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것에 대해 열려 있음. 바로 이런 까닭에 그의 자본론은 유연하고 탄력적 개성을 갖고 있음. 다시 말하건대 마르크스는 그야말로, 고뇌에 찬 위대한 거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대학시절 마르크스는 자신이 읽은 모든 책에서 인용할 대목을 뽑아내는 습관을 길렀고, 이는 평생 동안 이어진 그의 버릇임. 이 시절 그가 읽은 책의 목록을 보면, 그의 지적 탐구가 얼마나 조숙했는지 알 수 있음. 법철학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마르크스는 18세기 독일예술사의 거장 빙켈만의 고대예술사를 치밀하게 연구.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독학으로 배웠고,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번역. 그뿐 아니라 그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읽고, 자연에 대한 관심과 함께 종교의 역사적 기반을 밝히는데 시동을 걸어 훗날 역사적 예수 연구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라이마루스의 책을 읽는 데 상당한 시간을 들임. 라이마루스를 통해 그는 동물의 예술적 본능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그것을 자신의 마음에도 적용시키며 기뻐했음. 이런 그의 모습은 자본론이 엄청난 분야의 다채로운 인용들을 담고 있는 것과 상통. 그의 서술방식은 필욯나 것들을 취사선택해서 결합시키는 절충주의적 특징을 갖고 있으며, 무엇이든 섭취해서 소화하고 때로는 여기저기 궤도를 이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스타일이다.
- 그는 지식의 부유함을 갖고 있었고, 엥겔스는 부유함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 또한 마르크스는 잉크로 범벅이 된 수많은 교정과 보완을 통해 글을 느리고 고통스럽게 쓴 반면, 엥겔스의 필체는 깔끔했고 사무적이었으며 우아했음. 마르크스는 그의 대부분의 생애를 혼란과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고, 엥겔스는 수입이 나오는 정규직업을 갖고 있었으며, 상당한 양의 책과 산문과 언론관련 저작의 출간을 지속할 수 있었음. 그뿐 아니라 엥겔스는 자기 마구간에 말들을 키우고 포도주가 가득한 포도주 저장실 있는 등, 재력이 많은 부르주아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 이렇게 마르크스에 비해 여러가지로 유리한 점이 분명히 있었던 엥겔스였지만, 그는 마르크스와 만난 순간부터 그 자신은 마르크스를 압도할만한 동료가 결코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음. 그는 어떤 불만이나 질시도 하지 않고 그 자신이 해야 할 의무란 마르크스의 작업이 가능하도록 지적,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임을 받아들였음. 엥겔스는 이렇게 회고한다. "누가 어떻게 천체를 질투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 능력은 너무도 특별한 것이기에,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처음부터 그것을 자신이 획득할 수 없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런 것에 질투를 느끼게 된다면, 그런 사람은 분명히 가공할 정도로 속이 좁을 것이다."
- 자본론을 경전처럼 대하는 일부 공산주의자들의 자세는 근거없는 것. 자본론에는 만일 마르크스에게 에너지와 시간이 좀더 있었더라면, 채워놓았을 대목도 있고 그가 말하지 않고 침묵으로 넘어간 것도 있기 때문. 또한 마르크스의 비판자들이 의기양양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자본론에는 오류와 잘못된 개념도 존재. 이것은 자본론의 가치를 존중하는 이들에게도 반드시 인정되어야 하는 부분임. 경제학자 마이클 리보위츠가 언급한 대로, "마르크스가 뛰어난 능력으로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곧 그가 그 모든 것의 지도를 제대로 정확히 그려놓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가 탐험하기 시작한 그 미지의 대륙은 산업자본주의의 새로운 세계이자, 애덤 스미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풍경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마르크스는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들은 이제 그 어떤 것도 겉보기와는 같지  않은 환상의 나라로 들어가고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자본론의 바로 첫 문장에 그가 고른 단어들을 보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주도하고 있는 사회의 부는 마치 상품의 거대한 집적인 것처럼 보인다. 각각의 상품은 마치 그 부의 기초적인 형식처럼 보인다." "유령이 출몰해 유럽 전체의 뒷덜미가 섬뜩해지도록 뒤쫓아 오고 있다...."라고 시작하는 공산당 선언보다는 다소 덜 극적이지만, 자본론의 첫 문장도 유사한 핵심을 지니고 있음. 그것은 우리가 유령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 그런 까닭에 자본론의 문장들은 유령같은 객관성, 실제적인 근거가 없는 망령, 순수한 환상, 오류에 찬 겉보기의 유사성 등과 같은 표현들로 점철되어 있음. 오직 이 환상의 막을 뚫고 들어감으로써 그는 자본주의가 착취를 통해 생존하는 사실을 폭로할 수 있었던 것.
-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력은 다른 여타상품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그 가치가 측정되는 하나의 상품. 인간의 가치를 구운콩을 담은 깡통처럼 취급하는 것은 기괴하게 여겨지겠지만 바로 그것이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임. 돈 푸대라는 이름의 자본가에게 노동시장이란 다른 상품시장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시장의 한 종류일 뿐. 그렇다면 이 돈푸대 자본가는 이 특수한 성격을 가진 상품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만일 노동력을 소유한 노동자가 오늘도 일하고 내일도 일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건강과 그의 힘에서 동일한 조건 아래 동일한 과정을 다시 반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자면, 그가 갖고 있는 생존수단은 노동하는 하나의 개인으로서 정상적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음식, 옷, 연료 그리고 주택 등 그의 자연적 필요를 채우는 것들은 그가 살고 있는 나라의 기후나 기타 자연적 특성에 따라 여러가지로 달라질 수 있음. 반면에, 이른바 그에게 필요한 필수품의 양과 그 정도, 그리고 그것이 충족되는 방식은 모두 역사적 산물임. 따라서 다른 상품과 대조해서 보자면 노동의 가치를 결정짓는 요소는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것임. 그런데 어느 특정한 시기, 특정한 나라에서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생존수단의 평균적인 양은 이미 자료로 알려져 있다." 노동자는 수명이 다하면 죽게 되어 있으므로, 생존수단의 총량에는 "이 특별한 상품의 종자가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그 자신을 향후에 대체할 수 있는, 말하자면 그의 자녀들에게도 필요한 것들"이 반드시 포함되도록 해야 한다. 그 총량에는 또한, 보통의 경우 노동력의 경우 교육과 훈련에 필요한 요소도 들어 있어야 할 것이지만, 이런 것들은 매우 작은 양에 불과할 것임. 마르크스는 생존에 필요한 필수 요소의 총량은 하루에 6시간을 노동해서 얻는 정도에 결과물과 일치한다고 계산. 그러나 우리의 자본가 선생은 6시간의 필수노동이 끝나면 일을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나올까? 당연히 아니다. 임금을 받기 위해서 노동자는 6시간이 아니라 5시간이나 6시간을 추가로 더 노동해야 함.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가의 이윤이 되는 잉여노동을 마련하는 것. 마르크스는 이런 과정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림.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노동 덕택을 입지 않은 잉여가치는 단 하나도 없다. 털끝만한 잉여가치라도 그렇다." 그리고 이를 "인류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이루어져 온 정복자의 행위와 비견되는" 착취라고 지적. 여기서 그 행위란 "정복자가 자신이 정복한 이들에게서 빼앗은 돈으로 그들로부터 물건을 사는" 것을 뜻함. 이렇게 이윤창출의 비밀을 알아낸 자본가는 당연한 일이지만, 황금알을 낳는 오리에게서 더 많은 알을 뽑아내고 싶게 되어 있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노동자에게 더 오랜 시간노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 노동시간이란 제목이 붙은 자본론 10장에서 마르크스는 일반적인 것으로 보이는 방식에 스며 있는 희생의 현실을 보여줌. 1850년 영국 공장법은 노동자들의 주당 노동시간을 60시간으로 제한. (여기서 60시간은 하루 아침 30분, 점심식사 1시간을 제외한 실제 노동시간) 이 공장법은 또한 일정한 소수의 공장 감독관을 두도록 했는데 이들이 작성하여 2년마다 제출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마르크스는 잉여노동에 대한 자본가들의 탐욕적 욕망을 구체적으로 입증. 자본가들이 벌어들인 부정수입은 노동자들의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을 조금씩 그리고 수없이 훔쳐내서 생겨났다는 것. 어느 공장장은 한 공장 감독관에게 하루에 10분만 노동자들의 식사시간을 단축해도 내 주머니에 연간 1000파운드가 생긴다며 자랑스레 떠벌이듯 말했음. 부르주아 언론도 마르크스에게 이런 현실을 비판하는 무기를 제공해줌.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노팅엄의 한 레이스 교역과 관련한 기사에서 이렇게 그 현장을 보도. "아홉살이나 열살 정도 되었을까하는 아이들이 새벽2시, 3시 또는 4시에 겨우 허기를 채울 뿐인 생존을 위해, 그 더럽기 짝이 없는 침재에서 끌려나와 밤 10시, 11시 또는 12시까지 일을 해야했다. 이러면서 이 아이들의 손발은 기진맥진해지고 그 체격은 점점 더 작아지고 얼굴을 창맥해져갔다. 결국 이 아이들의 인간성은 생각만 해도 공포에 질릴 정도로 돌 같은 마비상태에 완전히 빠져들고 있었다."
- 노동력이 진정 유일하게 가치 있는 상품이라고 한다면, 사용자들이 서로 임금을 올리려는 경쟁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것임.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다 채워지는 완전 고용의 시기에는 이런 현상이 사실이 될 것임. 그러나 노동가격이 높아지면, 자본가들은 한때는 비경제적이라고 생각했던 기계에 투자하는 것이 금전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될 것. 기계는 인간의 노동력 투입을 줄여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늘릴 수 없을 때에는 특히 투자가치가 생겨나기 때문. 마르크스가 쓴 바 있긋이, "자본에게는 상품가격을 싸게 함으로써 노동자를 싸게 만들기 위해서, 노동생산성을 증대하려는 내적 동기와 지속적인 경향이 있다." 이론적으로 기계를 들여오면 노동자의 부담이 줄어들 수 있음.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체제 아래에서 기계도입의 결과는 자본가에게는 매우 유익하겠지만, 노동자에게는 언제나 유해하다고 반박. 독립적인 인간의 능력을 대치하는 경이로울 정도로 놀라운 생산력을 가진 기계로 말미암아. 인간은 날이 갈수록 자본에 종속되어 감. 다름 아닌 바로 그 자동화의 비인간적인 기술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독자적 기술이 없는 단순 작어자가 되고 마는 것. 기계는 보가 큰 규모로 막강한 힘을 갖게 되는 반면, 노동하는 인간은  예를 들어 장인협회와 같은 방식으로 다른 노동자와 힘을 합쳐 자신의 위치를 지켜낼 수 있었던 능력을 이제 잃게 됨
- 마르크스가 말했던 것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임금의 절대적 하락이 아니라 상대적 하락이 일어나게 된다는 점. 이것은 현실에서 입증할 수 있는 진실임. 잉여가치 20%의 증가를 누리고 있는 그 어떤 기업도 임금 20% 인상이라는 방식으로 그것을 노동자에게 몽땅 내주는 경우는 없음. "따라서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는 정도에 비례해서 보자면, 노동자는 그의 임금이 높든 낮든 결국에는 보다 악화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주목되는 문장은 "그의 임금이 높든 낮든"이다. 노동자가 아무리 많은 자동차와 전자렌지를 가질 수 있다 해도 노동자는 자본가에 비해 날이 갈수록 뒤처질 수밖에 없다. 이 밖에도 마르크스는 그가 규정한 빈곤의 개념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단지 돈의 액수로 판정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있음을 같은 장의 문단에서 매우 풍부한 방식으로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대장장이 헤파이토스가 만든 쐐기가 인간을 위해 불을 훔친 죄로 제우스의 정죄를 받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단단히 고정시켜 묶어 놓은 것보다 더 견고하게" 노동자들은 자본의 사슬에 묶여 있다. 누군가의 비참한 지역은 다른 누군가의 부를 위한 필연적 조건이 되고 있다.
-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매번 이전보다 더 위협적으로 주기적인 위기가 반복해서 다가옴으로써, 부르주아 사회 전체의 존재가 시련에 처하게 되는 경제위기에 이미 주목한 바 있음. 이 위기를 통해서 기존의 상품만이 아니라 이전에 만들어진 생산력의 거대한 부분이 주기적으로 파괴됨. 이전의 시기에는 불합리하고 어리석다고 여긴 과잉생산이라는 유행성 전염병이 퍼지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조건은 그것이 형성한 부를 다 포괄하기에는 부족할 지경이다. 자본주의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은 두개로 나뉨. "한편으로는 거대한 생산력의 강제적 파괴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정복하고 기존의 시장을 더욱 철저하게 착취하는 것.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보다 확대되고 파괴적인 위기가 태동하는 길을 여는 것이며, 위기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부가 자본주의 체제 등장 이후 그동안 그토록 벗어나려고 애를 써온 호황과 불황의 순환구조임. 그러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한 탈출구는 없음. 확장과 퇴조라는 파도와 같은 리듬은, 과잉생산에 대한 본성적 경향을 가진 이 체제에 필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요소임. 자본론 3권에서 그는 "자본주의 생산의 진정한 장애물은 바로 자본 자체이다"라고 쓰고 있음. 자본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 대중을 착취하고 빈곤하게 만드는 것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생산확대를 향한 자본의 운동과 항상 모순관계에 있게 됨. "실제로 일어나는 모든 위기의 마지막 순간은 언제나 빈곤과 대중의 억제된 소비에 있다. 이것은 생산력을 발전시키려는 자본주의 생산이 지닌 경향과 대조됨. 왜냐하면 이 생산력 발전의 한계는 오직 전체 사회의 절대적 소비능력이 어떤가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따라서 자기가 만든 무기로 스스로가 치명상을 입을 위협에 처하고 있는 것이다. 1848년 유럽의 혁명적 봉기가 실패한 이후 마르크스는 새로운 혁명이 가능하다면서 그 조건으로 "오직 새로운 경제위기가 발생하게 된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음. 그리고 그는 이후 자본주의의 파국이 도래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음. 1851년 성탄절에 그는 "다음 가을이면 자본주의의 위기가 터지고 말 것이다. 국제경제의 위기 없이는 그 어떤 진정한 혁명도 가능하지 않다는 확신이 그 어느때보다 더 분명해진다." 시장에서의 모든 동요나 돌연한 파산사태가 일어나면, 이와 유사한 유괘한 예언이 마르크스로부터 나온곤 했다. "모든 상황의 정점에는 경제위기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은 날이 갈수록 가까워오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 초기징조는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다. 상황은 앞으로 진전하고 있다."(1852) "내가 보기에 현재의 조건들은 조만간 지진과 같은 상황으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1853)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예상은 자본주의의 성채 안에 그가 심어놓은 정보원인 엥겔스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강화되었음. 1856년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함. "내년이면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진노의 날이 오게 될 걸세. 유럽의 산업전체가 파멸하고 모든 시장에는 재고가 넘쳐나고, .... 모든 자산계급은 곤경에 처하고 부르주아는 철저하게 파산하며 전쟁과 무한정한 방탕이 벌어지고 말거야."
- 은유의 역할은 그 은유되는 내용을 다른 대상으로 바꾸어 생각하게 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잘 알지 못하는 것과 연결해서 대상을 전혀 다른 각도로 보게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론자인 멕시코의 루도비코 실바는 마르크스가 활용한 은유의 어원학적 의미를 파고들었음. 그는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 자체가 바로 은유로서 이러한 은유를 통해,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주체에서 객체로,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 인간에서 괴물로 소외시키는 과정에 대해 논쟁하기 위한 논리전환 방식임을 주목. 이렇게 보면,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활용한 문학적 스타일이란, 마치 두꺼운 빵에 잔뜩 바르는 잼처럼 경제학적 개념을 설명할 때 허용되지 않는 어떤 과정되고 현란한 표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만 보면 놓치기 쉬운 사물의 애매한 본질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절한 언어이자, 기존의 정치경제학이나 인류학 또는 역사와 같은 분야의 틀로만 한정할 수 없는 존재론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음. 한마디로 자본론은 전체적으로 대단히 독특한 작품. 이런 작품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으며, 바로 그런 까닭에 이 책은 그토록 오랫동안 계속해서 외면당하던지 아니면 오해되어왔던 것.
- 그는 자기가 죽고 한참이 지난 뒤에 내용도 없이 그저 자신의 이름을 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등장할 것이나, 막상 자기는 여기에 대해 제대로 항변할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라고 했음. 내용도 정확히 알지 못한채 자신의 추종자라고 내세우는 자들에 대해 그가 느낀 실망을 표현한 발언은 이후 아주 유명해짐. 그것은 1870년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반박이었음. "만일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면, 내가 알기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이렇게 한숨을 쉬다시피하면서 암단해했는데, 이런 그의 발언은 사실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따. 20세기 역사를 보면, 마르크스 혁명은 대체로 선진적 산업경제, 자본가 계급 또는 대규모 임금노동자가 없는 국가에서 발생한 사실을 알 수 잇음. 따라서 1983년 전 세계 국가의 거의 절반이 여전히 자신을 마르크스 후계자로 자처하는 정권이었을 때, 마르크스 연구자인 데이비드 맥렐런이 주목했던 역설이 여기 드러난다.
"마르크스 주의가 서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사상이 서구에서는 국가의 공식적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그로 인해 국가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은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진정 가장 주의 깊게 연구된 현장은 도리어 자본주의 국가인 서구와 미국이다. 그런 까닭에 진정한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이른바 자기를 마르크스주의 국가라고 자처하는 나라보다 서구에 더 많다고 하는 편이 공정할 것이다."
- 자본론이 출간된지 반세기가 지나면서 통속 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를 반박하는 데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아예 무시.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그 내부에 종말적 병폐의 씨앗을 잉태한, 언젠가는 소멸해바릴 역사적 국면에 등장하는 체제가 아니라 영구적 필요를 해결하는 체제로 인식. 이런 관점이 차이는 곳곳에서 매우 대조적으로 드러남. 마르크스가 이자, 이윤, 지대를 지불되지 않는 노동이라 보는 반면, 학계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자본가들이 얻게되는 이윤수입을 절제와 금욕의 대가로 규정. 후기 빅토리아 왕조와 에드워드 시대의 영국 경제학계의 거두 앨프리드 마셜은 자본을 쓰기보다는 축적하는 이들은 기다림의 희생을 치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그와 같은 도덕적 절제의 보상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 주류 정통 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핵심적 양상으로 본 과잉생산이란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함. 세이의 법칙에 따라 공급은 그 자체로 수요를 창출하고, 그렇게 생산과 상품판매로 얻게 된 수입으로 사람들에게는 물건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이 생기게 됨. 이런 시장논리에 따라, 실업도 어쩌다가 잠시 일어나는 일 이상이 될 수 없음. 실업사애에 놓인 사람들은 저임금을 받고도 일하려 들고, 그 결과 하락한 임금은 이들이 생산하는 상품의 가격을 떨어뜨리고, 그로 인해 가격이 인하된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판매도 함께 증가하고 다시 완전고용 상태가 회복된다는 것. 시장의 자동적 자기조절작용, 또는 자기교정논리를 전제로 하는 주장임. 그러나 두차례 세계대전 와중에 경제혼란과 심각한 실업사태가 일어나면서 자본주의 시장의 자기교정력에 대한 생각은 재고의 대상이 되었고, 자본주의도 결국 체제상의 결함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뒤늦게 나타나게 됨. 한 경제학자는 이런 문제가 영구적이며 자본주의 체제로서는 달리 별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 존 힉스는 그의 39년도 저작 가치와 자본에서, 투자를 유지할만큼 강력한 새로운 발명이 없는 상태에서 "과연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것이 지속적으로 존속할 수 있을까"라며 의문을 표함. 이어 그는 지난 200년간의 산업혁명 전체는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아마도 거대한 경기활황 국면에 불과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라고 함. 마르크스가 사망한 해인 1883년 태어난 케인스는 36년 출간된 그의 고용, 이자 및 화폐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 "나는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불로소득적 요소란, 자신의 기능을 다하고 나서 사라질 과도기적 국면이라고 본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작 케인스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자동조절능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에 문제를 제기. 실업자가 생기면 이로 인해 임금이 하락하고 나중에 완전 고용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개별기업이나 산업분야에서는 맞는 이야기일 수 있음. 그러나 모든 임금이 하락하면 모든 수입도 함께 줄어들고 수요는 정체되어 고용주들에게는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체의 동기도 부여되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 케인스 경제학의 논리에 따라 조앤 로빈슨은 "군중 속에서는 그 누구든 의자위에 서 있으면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다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의자위에 올라서 있게 되면, 어느 누구도 제대로 상황을 알아보기 어려워진다."고 말함. 케인스 이전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의 주기적 위기를 무시해도 될 만한 일탈로 받아들임. 반면에 케인스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이를 불안정한 체제의 피할 수 없는 리듬으로 인식. 하지만 케인스는 마르크스를 경제사상의 지하세계에서 튀어나온 괴짜 정도로 여기고 그의 이론들이 비논리적이며 이제는 쓸모없고 과학적으로 오류인데다가 흥미롭지도 않고, 근대세계에 적용되지도 않는다고 비난. 케인스가 마르크스에 대해 가한 이런 맹렬한 발언은, 고전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과 신고전파에 대한 케인스의 비판이 서로 유사하다는 점에서 보면 놀랍기조차 하다.
-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1954)의 첫 54페이지는,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의 역사적 성취에 대해 헌사를 바친 것에 비견할 정도로, 마르크스의 성취에 대한 예상밖의 긍정적 평가를 담고 있음. 슘페터는 마르크스가 특히 노동자들의 빈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예언함으로서 "잘못된 비전과 오류에 찬 분석"의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나, "그는 산업변화의 과정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내다보았고 그 중요성의 핵심적 의미를 절감하고 있었다." 고 말함. 이어 "마르크스는 경제이론이 어떻게 해서 역사적 분석이 될 수 있으며, 역사적 서술이 어떻게 해서 합리적으로 사유된 역사로 바뀔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가르친 최초이자 최고의 경제학자가 될 수 있었다." 고 극찬. 그러고 나서 슘페터는 "자본주의는 계속 존속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아니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변. 이런 대목은 기업가 정신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책에 나올 문장으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임. 그리고 마르크스와는 달리 슘페터는 즐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예상한 것이 아님. 그는 "자신의 환자가 조만간 죽을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해서 그 의사가 환자의 죽음을 바란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덧붙임. 슘페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생산품, 새로운 생산박식과 같은 자본주의적 기술변혁은 창조적 파괴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너무도 성공적으로 진행되다가 그 자체로 파괴적 결과를 빚게 된다는 것.
- 90년대에 뒤늦게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고 지적자극을 받은 제임스 버컨은 그의 뛰어난 저작 얼어붙은 갈망: 돈의 의미에 대한 탐구(1997)에서 이렇게 말함.
"마르크스의 생각은 서구의 사상체계 안에 이미 아주 깊에 스며 있어서, 대체로 사람들은 마르크스에게 그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태도가 어느정도는 자기들이 갖고 있는 물질적 상황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임을 확신한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보통의 생각과는 달리, 인간의 의식은 그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물건이 생산되는 방식의 변화는 공장 밖의 인간의 삶에도 대단히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생각들은 기존의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마르크스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져 왔다. 마찬가지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은 역사란 나쁜 일들이 이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유, 행복, 인간의 잠재력과 같은 것들이 그래도 진보하는 과정이라고 여긴다. 뭔가 좋은 가치가 역사를 통해 현실이 되어간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감정을 마르크스가 독창적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생각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유포시켰다."
고속으로 움직이는 이른바 터보자본주의를 열렬하게 옹호하는 이코노미스트의 존 미클스웨이트와 에이드리언 울드리지 조차도, 마르크스에게 진 지적 부채를 두 사람의 공저 완벽한 미래: 세계화의 도전과 숨겨진 약속에서 고백. "마르크스의 여러 모습 가운데, 사회주의를 예견하는 마르크스 시대는 뒤떨어진 낡은 이론가이다. 그러나 그 나름의 세계호에 대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국가 사이의 보편적 상호의존성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적 논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놀라울정도로 현실에 들어맞음. 그가 묘사한 세계화의 모습은 1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날카로운 분석력을 지님. 가장 두려운 점은, 세계화가 보다 성공적으로 수행되면 그 결과로 인한 반격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사실.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현대산업발전은 부르주아가 생산하고 그 생산을 그 자신이 취득하도록 만들어주는 기초를, 자기 발밑에서 허물고 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부르주아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세계화의 승리가 외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 두언론인은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말이 맞다고 하면서, 지구적 자본주의로 생겨난 창조적 파괴는 언젠가는 본질적으로 정지상태에 이를 수 있다. 사람들이 더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 순간에 말이다 라고 갈파한다. 부르주아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는 오지 않았음.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오류나 이루어지지 않는 예언들에 대한 논란을 넘어서는, 보다 중요한 논점들이 주목받기 시작했음. 그것은 야수의 본질을 정확하게 폭로한 그의 분석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단단하게 고체가 되어 있던 모든 것들이 녹사서 대기속으로 흩어지고 만다지만, 자본론의 힘은 그렇지 않음. 자본론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힘들에 대해 그가 생생하게 그려낸 것들을 포함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정, 소외, 착취에 대한 논지는 그 호소력과 분석의 날카로움을 잃지 않을 것이다. 97년 뉴요커의 한 기사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읽을 가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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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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